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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자료 접근과 인식을 중심으로- 양정석 (수원대학교 사학과)

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portal.nrich.go.kr/file_link/Report/2012_AsiaArchaeology국제학술심포지엄_북한... · 우선 제1기는 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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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8 129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자료 접근과 인식을 중심으로-

    양정석 (수원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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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자료 접근과 인식을 중심으로-

    양 정 석(수원대학교 사학과)

    목 차

    Ⅰ. 머리말Ⅱ. 자료 접근에 따른 인식의 변화 1. 자료 간접 접근기(1945~1980) 2. 자료 지접 접근기(1980~2000) Ⅲ. 북한의 인식과 연구 성과의 검토Ⅳ. 남북 공동 자료 작성 시기의 도래Ⅴ. 맺음말 : 조사를 위한 제언

    Ⅰ. 머리말

    북한소재 고구려·발해 유적의 조사 및 연구 성과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쉽게 접

    할 수 없는 고구려와 발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국가와 민족을 떠나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남한의 연구자들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라는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의 역사상 공통 분모로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공유와 더불어 중국의 동북공정 등 주변 국가의 역사인식에 대한 대응과 맞물려 주

    변 나라의 연구자들과는 다른 의미로 이들 자료가 다가오게 된다. 사실 다른 학문분야도 마찬가

    지이지만 남북으로의 분단은 남한의 고고학 연구자들이 북한의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을 통해 한

    국의 역사, 특히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데 많은 한계를 가져왔다. 다행히 이

    러한 양상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내외적인 다양한 상황 변화로 인해 차츰 한계를 극복해 나가

    면서 변화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북한의 고구려와 발해와 관련된 자료의 측면에서 크게 간접적으로 자료를 확

    보하던 시기, 직접적으로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시기, 마지막으로 남북이 공동으로 자료를 만

    들어 가는 시기, 이렇게 3시기로 나누어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사이의 북한이 생각하

    고 있는 고구려·발해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연구 성과를 시기별로 검토하여 이것이 남북 공동으

    로 자료를 만드는 시기에 어떻게 활용되어야 할 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 132 133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Ⅱ. 자료 접근 수준에 따른 인식의 변화

    1. 자료 간접 접근기(1945~1980)

    우선 1945년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는 간접적으로 자료를 확보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구려 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 성과를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사 내용은 주로 일본과 중국에서 정리한 연구사적 검토에 의지하

    여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가운데 북한의 조사 및 연구 성과가 다양한 경

    로를 통해 오히려 더 자세히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한 역사고고학 최초의 발

    굴로 이야기되는 안악고분군이다.

    1949년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운리에서 발굴 조사된 안악고분군은 북한 최초의 역사고고학

    적 성과로서 유명하였으나, 당시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도 한동안 보고서

    가 간행되지 못하였다. 보고서가 간행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인데, 『안악제3호분발굴보

    고』(1958), 『안악제1호 및 제2호분발굴보고』(1960) 이렇게 두 권으로 발간되었다.

    이중 안악 3호분의 조사 성과는 1960년대 일본과 중국의 논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였지만

    한국의 연구자는 이를 직접적으로 접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논문에서 소개된 내용을 요약하여

    재소개하는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1)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안악고분군에 대한 새로운 보고가 한국에서 이루어졌

    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안악고분군에 대한 기존의 보고와도 일정한 수준에서 차이가 있으며, 그

    에 대한 해석도 다른 방향에서 시도하고 있었다. 이는 이 논문을 쓴 연구자가 안악지방의 고분

    을 직접 발굴하고 보고서의 초고를 작성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2)

    물론 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북이 분단되고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

    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정보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의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앞의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외국,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에서 정리

    된 자료를 재인용하거나 일본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소개된 자료를 간접적으로 인용하는 방법으

    로 접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남한 학자들의 연구에도 그대

    로 연구수준의 한계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2. 자료 직접 접근기(1980~2000)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 여러 방향에서 차츰 상황의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중의 하나

    가 일본이 아닌 중국 연구자들의 고구려, 발해에 대한 조사와 연구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었다.3)

    이러한 방향과는 별도로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도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연구경향을 바탕으로 한

    국사 체계에 대해 재검토하는 분위기가 성립되었다. 본격적인 학술 개방으로 인해 발굴 보고서,

    연구서, 그리고 학술잡지 등 북한의 조사 및 연구와 관련된 각종 자료가 소개되고 그 중 일부는

    국내에서 출판 및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1) 김원룡, 1960, 「고구려 古墳壁畵의 기원에 대한 연구 - 한국고대미술에 대한 중국의 영향 -」,『진단학보』21.2) 채병서, 1968, 「안악지방의 벽화고분」『백산학보』2집.3) 최무장, 1982, 『고구려․발해문화』, 집문당 ; 王承禮 저, 宋基豪 역,1987, 『발해의 역사』, 翰林大學아시아文化硏究所 ; 김정배·

    유재신 공편, 1988, 『발해국사』; 방학봉, 김정배·유재신 공역, 1989 『발해사연구』; 김정배 편, 1991,『중국학계의 고구려 인식』.

    더불어 북한의 한국사 연구성과가 남한학계에 알려지면서 많은 괴리감도 주었지만 기존의 분

    단사학을 극복하고 통일사학을 지향하면서 그 접합점을 찾고자 한 노력도 나오기 시작하였다.4)

    이러한 양상은 고고학 측면에서도 이루어지는데, 본고에서는 이 시기를 제2기인 직접적으로 자

    료를 활용할 수 있는 시기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 시기의 성과는 개인적, 학술단체, 국가기관 등

    다양한 방향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첫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방향에서 논의될 수 있겠지만 1985년 문화재관리

    국 문화재연구소에서 간행한 『北韓文化財 實態와 現況』이라는 책자를 들 수 있다. 문화재연구

    소는 통일에 따른 우리의 동질성 회복과 전통문화사의 정립을 대비하기 위하여 북한의 문화유산

    에 대한 자료를 간접적으로 꾸준히 모집하여 왔는데, 이를 1945년부터 1980년까지 북한에서 발

    굴한 유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 1990년에 역사학, 고

    고학, 미술사학, 민속학 등에 관한 저술과 논문을 수집 정리한 『北韓文化財關係文獻彙報』, 그

    리고 1991년에는 1990년까지 이루어진 북한의 문화유적발굴조사에 따른 자료를 정리한 『北韓

    文化遺蹟發掘槪報』의 발간으로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력은 90년대를 걸쳐

    지속되었는데, 이후 한동안 정리작업이 멈추었다 다시 2007년에 이르러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의 관련자료를 정리하여 『북한문화재관계문헌휘보』가 다시 발간되었다.

    북한의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성과는 이러한 국가기관 이외에도 학회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989년에는 북한 고고학 문헌 목록이 한국고고학회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다.5) 더불어 1989년

    새롭게 북한의 연구자들의 기본적인 시각을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6) 1990년에는 북한에서 만들

    어진 한국사에 대한 인식이 전시기에 걸쳐서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하였다.7) 한편 1989년

    박시형의『발해사』를 남한에서 재발간할 때 「북한의 발해사 연구와 발해사」라는 해제를 쓴

    송기호는 북한의 발해사에 대한 문헌연구 뿐 아니라 유적·유물을 바탕으로 한 고고학적 연구도

    함께 검토하였다.8)

    이후 일군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북한의 선사시대 연구가 정리되고, 그 가운데 장호수에 의해

    1945년부터 1991년 사이의 고고학 관련 주요 사건과 해적이 정리되었다.9) 같은 해 북한의 연

    구성과에 대한 정확한 소개와 그에 대한 평가가 우리학계에서 이루어졌다.10) 그 가운데 고구려

    에 대해서도 안악 3호분 피장자의 논쟁이라든가, 평양성의 축성과정에 대한 연구 등에 대한 논

    평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북한의 고구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에 대한 소개를 전론으로 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11) 나아가 1994년에는 북한의

    고대사 연구와 성과에 대한 개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고고학적 조사 및 연

    구 성과가 별도로 정리되기에 이르렀다.12) 이후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여 고구려고고학이라는 책

    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13) 여기에서는 고구려의 위치와 영역, 성곽, 건축물, 무덤, 벽화, 금속기,

    질그릇 등 고구려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를 정리 수록하였다.

    이와 같이 1980년대 후반 본격적인 북한의 조사 및 연구성과가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검토가

    4) 최광식, 2000, 「남북한의 ‘한국사 시대구분론’ 비교 연구」, 사총』51.5) 『한국고고학보』23.6) 김정배 편, 1989, 『북한이 보는 우리 역사』, 을유문화사. 7) 안병우,도진순 편, 1990, 『북한의 한국사인식』, 한길사. 8) 송기호, 1990, 「북한의 발해 고고학」, 『발해문화』」『역사와현실 3.9) 장호수, 1991, 「북한고고학이 걸어온 길」,『북한 선사 문화 연구』, 백산자료원.10) 김정배 엮음, 1991,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Ⅰ)(Ⅱ)』, 대륙연구소출판부.11) 임영진, 1992, 「고구려 고고학」,『국사관논총』 33, 국사편찬위원회.12) 김정배 엮음, 1994, 『북한의 고대사 연구와 성과』, 대륙연구소출판부; 박경철, 1996, 「최근 북한학계의 고구려사 연구동향에

    관한 소고」『백산학보』 46집. 13) 최무장․임연철 편저, 1990, 『고구려 벽화고분』, 신서원;최무장, 1995, 『고구려고고학』Ⅰ, Ⅱ, 민음사.

  • 134 135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다양한 시각에서 행하여졌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가 한국인의 시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1990년대 말에는 중국 연변대의 연구자가 정리

    한 북한 영역내의 발해의 유적14), 고구려 성에15) 대한 조사 및 연구성과가 고구려연구회를 통해

    남한에서 발표되었다.

    Ⅲ. 북한의 인식과 연구 성과의 검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북한의 고구려에 대한 조사 및 연구성과에 대해 남한 학계의 입장에서 정

    리한 연구사논문이 나오게 된다.16) 이후로도 남한에서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지

    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17) 이제는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되기도 하였다.18)

    그런데 북한의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조사와 연구의 추이를 검토해 보면 단순히 고구려 발해

    의 중요성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이 되는 인식의 방향에 있어서 변화가 보인다. 우선 이

    에 대한 문제 제기는 김희찬이 고구려연구회에서 북한의 고구려유적 조사 성과를 발표하고 한창

    균이 토론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김희찬은 고구려 연구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었던 유적을 중심으로 북한의 고구려고고학

    발굴사를 네시기로 구분하였다. 우선 제1기는 안악 3호분에서 대성산성 발굴까지로 40년대 말엽

    에서 60년대 초엽에 이른다. 제2기는 대성산성 발굴에서 동명왕릉과 덕흥리고분 발굴까지로 60

    년대 초엽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른다. 제3기는 동명왕릉과 덕흥리고분 발굴부터 장수산성 발굴

    까지로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며, 제4기는 장순산성이 발굴된 80년대 중반부터

    2000년에 이르는 시기로 나누었다. 여기에 대하여 고분에서 산성, 왕릉에서 벽화고분 등 중요한

    유적의 발굴 시점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차라리 10년 단위, 또는 그 이상의 단위로 북한에서 이루어진 유적 발굴의 성과를 고찰하면서

    그것이 시기별로 북한의 고구려사 연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검토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부각된 것은 북한의 경우 사회과학원 산하 고고학, 민속학 연구소에서

    발굴을 거의 독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집체 연구를 통해서 이루

    어지기 때문에 발굴 성과에 따라서 다음 연도의 발굴사업을 목적 사업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기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북한의 고구려, 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 및 연구 성과에 대한 정리가 이루

    어지기 시작하면서 북한의 경우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목적이 존재하며, 또

    그 인식도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선 북한에서 고구려유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목적으로 고구려 문화가 동아시아에서 가지고

    있는 선진성을 밝히고자 하는 점을 들 수 있다.19) 북한은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고구려 문

    화에 대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논증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북한의 연구성과는 1975년

    14) 徐日範, 1998, 「북한 경내의 발해유적과 출토유물」,『고구려연구』 6.15) 徐日範, 1999, 「북한 내의 고구려 성 분포와 연구현황」,『고구려연구』 8.16) 金希燦, 2001, 「북한의 고구려 유적 발굴과 그 성과」,『고구려연구』 12.17) 백종오, 2008,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정신문화연구』 31-1; 한규철, 2008, 「북한의 발해유적과 성격」 『역사와 경계』68.18) 白種伍, 2006, 「高句麗 기와의 硏究史的 檢討」『白山學報 』74; 정호섭, 2008, 「고구려 벽화고분의 현황과 피장자에 대한 재

    검토」『민족문화연구』 49; 백종오, 2012, 渤海 기와의 硏究史的 檢討」『정신문화연구』 92.19) 전호태, 1990,「삼국시대에 대한 인식」,『북한의 한국사인식』1 , 한길사.

    『고구려문화』라는 단행본에 집성되어 출간되었다. 이를 통해 해방후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구

    려 유적 발굴 및 보존, 연구상 성과로 인정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고구려묘제 연구자료의 증대이다. 1949년 발굴된 안악 1,2,3호분을 비롯한 수백 기의 고

    구려 고분이 발굴되어 고구려 초기 이래의 묘제변천과정을 밝힐 수 있는 기초자료가 제공되었

    고, 이를 이용한 연구도 상당히 진척되었다. 더욱이 함께 발굴된 수십 기에 달하는 벽화고분은

    비단 고구려 고분의 편년 뿐 아니라 고구려문화의 제반 측면 탐구에 귀중한 지표가 되었다.

    둘째, 고구려산성 및 도성 관계자료의 조사와 복원이다. 평양의 대성산성과 안학궁의 일부가

    발굴, 복원되었으며 이외에도 백마산성을 비롯한 여러 개의 산성이 조사되어 고구려 성곽방어시

    설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평양 장안성 유적의 발굴은 특히 대규모로 진행되어 계속 내외의 주목

    을 받고 있는 작업이다. 산성과 도성 뿐 아니라 ‘정릉사지’ 등의 절터와 일반 건축물의 자취도

    다수 조사되었다.

    셋째, 고구려 성립 초기의 철기생산기술 및 제철 수준 등을 전하는 생산력 관계 자료의 발굴

    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시중군 노남리와 중강군 토성리 등지에서 발굴된 다수의 집자리

    터와 쇠부리터이다. 이들 유적은 고구려 초기 사회의 주거형태와 제철기술의 수준, 이에 따른

    생산력 수준을 파악하는 기초자료의 역할을 하였다. 북한은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의 종류

    와 성분을 상세히 분석하여 당시의 생산력과의 상관계를 확인하거나 추정하는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넷째, 고분벽화 및 제반 유물자료의 유기적 연계를 통한 고구려의 사회경제와 문화 각 부문의

    기술적 재구성이다. 수십기에 달하는 북한내에서 발견된 고분벽화와 여러 유적발굴을 통해 수집

    된 각종 유물자료는 당대 고구려의 회화수준을 전할 뿐 아니라 음악, 무용, 기예, 풍속, 체육 등

    일반 사회생활 및 문화 복원을 위한 생생한 자료의 역할을 하였으며 정치제도, 군사활동, 종교

    사상 등을 밝히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목적의식은 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 및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

    이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지역적 특성을 최대한 살려서 집요하게 논증하여 밝히는 것이다.20)

    이를 좀 더 부연하면 첫째,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인 황제국이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

    이고, 둘째는 한국사의 정통성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서 찾아, 신라사 위주의 신라중

    심적 남한 학계와 차별성을 두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학계의 주장에 대한 반향이기도 하지만,

    발해영토였던 북한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정당하고 상식적인 태도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의식만으로 북한의 고구려·발해 유적에 대한 연구성과를 이해할 수는 없

    다. 고고학은 기본적으로 의도성과는 별도로 실제적으로 발굴 조사에서 나온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인식의 방향도 달라지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고고학 발굴은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벽화고분 3기에 대한 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안악 3호분에 대한 조사 성과는 사

    실 1958년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졌고, 한국 전쟁 이후 평남 순천 오동성총

    (1953) 발굴을 필두로 평남 일대의 석실분과 벽화분 등 고분유적이 중심이 되어 조사가 이루어

    졌다. 이후 1957년부터 전후 복구사업과 경제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조사가 본격화되면서 독로강

    유역 적석총, 태성리 고분군, 이후 1958년에는 약수리 벽화분 등 자강동 일대를 중심으로 고분

    조사가 1960년대까지 대규모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고분유적 중심의 발굴조사와는

    별도로 로남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주거지, 야철지 등 생활유적은 고구려 초기의 문화상을 밝히

    는데 기초 자료가 되었다.21)

    20) 한규철, 2008,「북한의 발해유적과 성격」,『역사와 경계』68.

  • 136 137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한편 당시 북한 고고학을 이끌어 가던 도유호는 1957년의 문화유산 창간호에서 고고학이 발

    해사의 복원에 기여해야 함을 독려하고, 발해 연구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아울러 구체적으로

    함경북도 화대군(구 명천군) 고분이 발해 유적임을 지적하기도 하였다.22)

    이 시기를 북한에서 고구려에 대한 조사 및 연구가 본격화되고, 발해의 유적에 대해 인식하고

    시작한 제1기라고 이해하고자 있다.23)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대성산성과 안학궁에 대한 연차 발굴은 1970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였던 도성체계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대성산성 뿐 아니라 백마산성(1965), 청해토성(1967) 등이 발굴되고, 1965년

    에는 산성답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성곽유적으로 조사의 영역이 확대되었다.24) 이는 전

    시기의 대규모 건설사업과 관련된 구제조사와는 규모나 조사량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이 시

    기를 제2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1960년대 초 발해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북한과 중화인

    민공화국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를 바탕으로 1963년 8월 23일부터 1965년 7월 19일까지 4차례

    에 걸쳐 고구려·발해유적을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의 이름하에 공동발굴하였다. 이 때의 공동발

    굴에 대한 보고서는 중국내정의 문제로 인해 북한 단독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후 당시의 발굴

    경험과 자료들은 북한 발해 고고학의 큰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중국 동

    북지방의 유적발굴보고(1963~1965, 1966).

    이후 1960년대 후반으로 가면 북한 역사학계의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68년부터 1976년까지 이루어진 역사잡지 『력사과학』의 정간이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가 북

    한에서 주체사상 유일체제 확립과 주체사관을 확립하던 시기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

    학계의 변화와는 별도로 이 시기에도 발굴조사는 68년부터 70년까지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1960년대 후반에는 박천군 일대 유적조사(1967), 고구려 고분조사(1967) 등 유적

    에 대한 현황 조사를 바탕으로 1970년대에 들어와 수산리벽화분(1971)을 시작으로 진파리 10호

    분(1974), 덕흥리벽화분, 지경동고분(1976), 우산리고분(1977) 등 고분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중

    진파리 10호분의 조사는 정릉사지(1974)의 발굴조사와 더불어 그동안 전설로만 인식되었던 동명

    왕릉의 실체를 규명하는 계기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시기에도 성현리토성(1976),

    대흥산성(1979) 등 성곽에 대한 조사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이렇게 1970년대에 이루어진 고구려

    유적 조사를 고구려사의 강조를 통한 ‘주체사상’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

    해가 제기되었다.25)

    그런데 또 다른 연구에서는 60년대말에서 70년대 초반의 조사 성과를 이전시기로 인식하고,

    동명왕릉과 정릉사, 덕흥리고분 발굴에서 장수산성과 그 일대 도시유적 발굴까지로 시기적으로

    70년대 중엽부터 80년대 중엽까지를 3기로 이해하기도 하였다.26) 그리고 이 시기는 북한에 있

    어서 다시 고고학발굴이 활성화되는 시기로 보았다. 이를 주체사상적 사회분위기와 관련하여 동

    명왕릉과 정릉사지, 덕흥리 벽화고분을 통해서 위대한 민족사를 강조함으로써 고구려 중심주의

    적 사고가 확립되어가고 있었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를 앞에서 다루었던 『고구려문화』의 발간

    과 연결하면 이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성과는 고고학 자료와 문헌자료를 적극 접목하여 전체 고

    21) 하문식, 2002,「북한의 유적답사와 고고학계 연구동향」,『백산학보』 64.22) 이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발해유적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86년과 1992년에 이르러서이다.23) 한창균, 1999,「1950년대의 북한 고고학 연구」,『백산학보』 53.24) 한창균, 2000,「1960년대의 북한 고고학 연구」,『백산학보』 55.25) 백종오, 2008, 앞의 글.26) 김희찬, 2001, 앞의 글.

    구려사를 복원하는 기초 골격을 마련하고 있고, 고구려사에 대한 입장 정리가 어느 정도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어느 시기를 중심시기로 보는가에 따라 60년대말과 70년대초 북한의 고구려·발해

    조사 및 연구와 관련된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각각의 시기구

    분에 따라 80년대초 또는 80년대 중엽 이후 자연스럽게 제4기가 된다. 그러나 4기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인식이 유사한데, 일단 중요 포인트로 장수산성과 그 일대 도시유적 발굴을 본다는 점

    이다.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산성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 도시유적 발굴을 통해서 그 동안 끊임없

    이 논의되었던 남평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풀었으며, 이를 통해 안악 3호분의 주인

    공이 고국원왕이라는 학설이 점차 굳어지게 되었다. 더불어 이 시기의 특징은 이전시기에 고고

    학 자료의 종합화를 시도했던 것에 비해 특정 주체별로 개별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고구

    려 고고학의 중심 연구분야가 균형있게 연구되고 있으며, 그 동안 등한시했던 유물에 대한 관심

    이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고구려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기본적으로 고

    분과 산성이 중심이 되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하나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 평양 덕산토성(2002)과 남포 태성리 3호 벽화분(2001)과 평양 금옥리 벽화

    분, 문화리 1호분(2002), 연탄 송죽리 벽화분(2002) 등을 포함한 고분유적의 발굴이 진행되었고,

    평양시 온정구역 광명동 일대에 위치하는 덕산토성에서는 고조선을 포함한 고구려, 고려 문화층

    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발해유적의 경우도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북한에서는 당시까지 발견된 함경북도 일대의 발

    해유적을 대대적으로 조사 정리하게 된다.27) 함경남북도 일대에서 조사 발굴된 발해유적은 평지

    토성, 산성, 강안보루, 차단성, 건축터, 24개돌, 옛무덤, 시설물 등이다. 또한 여러 가지 장식류,

    무기류, 수레부속, 그릇류, 농공구, 건축재료 등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1972년과 1985년

    에 조사된 청해토성의 경우 몇 가지 논거를 통해 발해의 남경남해부로 이해되었다. 즉 둘레가

    2,100여m에 이르는 장방형의 성은 서고성보다는 좀 작지만 오동성보다는 큰 규모이다. 성의 축

    조 방식은 성벽 밑에 돌을 깔고 흙으로 쌓으며, 토성 안에는 두 고래로 된 온돌을 놓은 여러 채

    의 집터가 있는데, 이들 집터 초석의 직경이 1m 이상 되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들은 관청터였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더불어 청해토성 주변에는 발해 지배계급의 고분군이 있는데, 북쪽으로

    8km 떨어진 북청군 평리에 무덤떼가 있는데 길림성 돈화시 륙정산 무덤과 공통점이 많다는 것

    이다. 또 토성에서 서남쪽으로 10km 떨어진 신포시 오매리에 있는 절터 역시 이 토성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함북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의 석성과 고분군을 통해 이곳

    이 동경용원부 지역으로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근거로 북한학계에

    서는 기본적으로 이들 유적에서 고구려 문화의 계승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28)

    Ⅳ. 남북 공동 자료 작성 시기의 도래

    한편 이러한 북한의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조사 및 연구 성과의 정리과정과는 별도로 고구려

    와 관련하여 남한과 북한의 학술교류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1993년 중국의 집안시

    에서 개최된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회의는 해외한민족연구소와 조선일보사, 중국의 조선사연구회

    27) 박진욱, 1989,「최근년간 우리나라 동해안 일대에서 발굴된 발해유적들과 그 성격에 대하여」,『연변대학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 론문집』, 연변대학출판사.

    28) 한규철, 1994, 「북한의 발해사 연구」,『북한의 고대사 연구와 성과』,대륙연구소출판부.

  • 138 139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가 주최하여 비록 남북간 합의에 의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남측, 북측,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

    지의 많은 학자들이 참석한 학술대회였다. 이 학술대회는 문화유산과 관련한 남북의 학자들이

    직접 대면한 학술회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29) 이후 1997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고구려 국

    제학술대회 역시도 남북간 합의에 의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남측과 북측, 일본, 중국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고구려 고분벽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이렇게 고구려를 매개로 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연결고리를 만들어온 남북의 학계는 2000년

    들어서 이루어진 남북공동선언 등 새로운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실제적인 남북교류협력의 본

    격적인 장을 만들게 되었다. 우선 2002년도에 역사적인 남북한 역사학자들의 교류가 시작되었는

    데, 9월 한국고대사학회의 서영수, 하문식, 송호정이 KBS 및 세계거석문화협회 관련 인사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였다. 또 10월에는 “남북한 공동학술회의-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역사학자들

    의 공동 학술토론회”가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서는 남북 역사학자 5명씩, 모두

    1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교류는 남북한 역사학자간의 견해 차이를 더욱 좁히고 통일

    에 대비한 역사인식 마련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중국은 1990년 이후 진행 중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 흐름과 관련하여 2002년 2

    월 28일~3월 1일 북경에서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전문가위원회를 개최하여 ‘東北工

    程’을 공식 선포하고 관련 연구를 본격화 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2003년 12월 9일 한국사 관련 17개 학회의 공동주최 형식

    으로 열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 학술발표회’를 시작으로 2004년은 ‘고구려’가 한해의 화

    두가 되었다.30) 우선 2004년 1월부터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연구기관 설립이 추진

    되고 5월 24일자로 ‘고구려연구재단’이 17명의 연구진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 후 국제, 국내

    학술회의 개최, 연구활동의 지원, 연구 결과의 출판 등 ‘북방사’연구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던 고

    구려연구재단은 2006년 8월 해체되고, 그 기능과 연구인력은 9월 출범한 동북아역사재단으로 이

    관되었다.31)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 시도가 북한의 고구려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류 결

    정, 중국 집안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2004년 고구려고분군

    세계문화유산등재기념 남북공동 학술토론회는 남북역사학자협의회와 북측의 조선아세아태평양평

    화위원회가 주최하여 금강산에서 진행된 행사로 남측 200여명, 북측 100여명이 참석한 행사였다.

    이 행사를 통해 고구려 고분에 대한 남북의 동일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의 고구려 고분과 벽화에 대한 조사 필요성도 제기되었고, 평양일대 고구

    려유적 남북 공동 학술조사는 2005년 고구려연구재단과 북측 민화협에 의해 추진되어 평양일대

    의 벽화고분과 성곽유적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나온 성과는 남북학술교류차원

    에서 2005년 11월 29일 북한 사회과학원과 공동으로 ‘고구려유적 공동조사 학술회의’를 개최하

    였다. 이때 이르러 본격적으로 북한학자들의 관련 논문들이 소개되었다.32) 이는 북측 고구려 유

    적에 대한 남북 공동 발굴 조사로 발전하여 2006년에는 고구려연구재단, 김일성종합대학, 사회

    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안학궁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이 조사는 남측의 연구

    29) 정호섭, 2012,「민족공동 문화유산 관련 남북교류협력의 역사와 평가」,『통일시대를 위한 민족문화자산 남북협력, 민족문화자산 남북공동보존 학술심포지엄』, 통일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30) 전호태,「비평논문 밖으로부터 시작된 위기와 기회, 2004년의 한국고대사연구」,『역사학보』187.31) 조인성,「비평논문 고대사 연구의 성과」,『역사학보』195.32) 김인철,「태성리3호 벽화무덤의 축조년대와 피장자 연구」; 송순탁, 「안악3호무덤 행렬도의 력사적 배경에 대하여」; 강세권,

    「덕흥리벽화무덤에 보이는 유주의 성격」, 『北方史論叢』9.

    자들이 평양으로 직접 가서 북측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발굴조사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

    시는 비록 조사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질지 여부도 불분명하였고 조사 기간이나 여건 등에서 안정

    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남측과 북측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성벽과 건물지, 성내 고분에 대한

    조사가 일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성벽의 축조과정이라든가, 남궁 정전 유구의 조성

    과정에 대한 단서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고분군 남북공동실태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남북역사학자협의회와 북측의 민

    화협이 주최한 행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 고분벽화의 실태조사를 통한

    보존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비록 직접적 교류는 아니지만, 중국의 대학을 통해 간접 지원한 사례도 찾아 볼 수 있다. 바

    로 2010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연변대학교를 통해 남포시 용강군 옥도리 벽화고분 발굴조사를 지

    원한 후 성과가 간행되었다. 또 발해유적과 관련하여서도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와 북측 조선사

    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 및 그 일대

    의 발해유적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보고서를 간행하였는데, 이 역시 동북아역사재단을 통

    해 이루어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남북 긴장관계의 상황에서 고안한 간접지원의 형태로 연변대학교가 북측과

    공동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조선사회과학원에서 협조한 사례이다. 이러한 사례들도 직접 교류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소 한계는 있지만, 학술적 차원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

    다.

    Ⅴ. 맺음말 : 조사를 위한 제언

    최근 들어 북한에서 이루어지는 고구려·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 중에는 북한의 연구자들에 의

    해 독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외부의 연구자 또는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조사하는

    경우도 많이 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연구자 또는 연구기관들도 조사에 참여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2010

    년과 2011년에 걸쳐 낙랑구역에 있는 동산동고분의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일제시기 조사되

    었던 식물원구역에 있는 고산동 고분에 대한 재조사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불어 앞에서도 언

    급하였듯이 중국 연변대를 중심으로 한 발해유적에 대한 조사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일부이기는 하지만 남한에서도 안학궁지에 대한 시굴이라든지, 평양 주변의 벽화고분에 대

    한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이렇게 다양한 외부의 연구자들과 연구기관과의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

    루어질 수 있도록 변화한 상황은 북한 경내에 존재하는 고구려·발해 유적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

    고 집중적인 조사와 다양한 각도에서의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구려·발해에 대한 조사는 이

    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고구려·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같이 고려해야 할 것이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정

    치외교적인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발해 유적의 경우에도 동일한 상황이다.

    따라서 한국에는 발해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영토의 연고성도 떨어진다는 점에서 고구려유

    적 뿐 아니라 북한의 발해 유적발굴과 학술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과 협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고구려 유적의 경우 북한이 중국의 입장에 동조했다면 고구려의 독

  • 140 141북한소재 고구려·발해유적 조사를 위한 제언

    자성을 주장하는 한국의 주장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는 견해는33)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정리한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러한 노력은 최근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

    니다. 1980년대 이후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남한과 북한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

    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던 많은 연구자들과 연구기관의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

    고 이제 이러한 노력의 결과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에 대한 조사에 있어서도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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