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7
Download
0
Category
Preview:
Citation preview
Art�Insight�#3:�아네트�쿨렌캄프예술의�사회적�역할에�대해�근원적�질문을�던지는�카셀�도쿠멘타
동독과�서독의�경계�지역,�독일의�헤센주에�위치한�중소도시�카셀(Kassel)은�세계�2차�대
전�시기�완전히�파괴되었습니다.�당시�항공기와�전차를�생산하는�군수공장이�있어�연합군
의�폭격�대상이�됐던�탓입니다.�또한�나치는�예술의�다양한�부분들을�모두�차단시켰기�때문
에,�전쟁의�폐허에는�예술적�움직임�역시�남아있지�않았습니다.�이에,�카셀�출신의�화가이
자�미대�교수였던�아르놀트�보데(Arnold�Bode)는�독일�나치정권�하에�자행됐던�반인륜적
행위에�대해�자각하고�반성하며,�나치�이후의�예술을�다시�새롭게�부흥시키고자�했습니다.
보데는�몇몇�동료들과�함께�‘20세기�서양미술협회’를�창립하고�민간�주도로�자금을�조달하
면서�나치�이후의�문화�독일�재건을�목적으로�전시를�열게�됩니다.�1955년,�보데가�설립자
하여,�단발성으로�기획된�전시는�4~5년에�한�번씩�열리는�정기�전시로�이어지게�됩니다.�전
쟁의�황무지에서�반세기�이후�베니스�비엔날레와�더불어�세계�제2대�미술축제로�일컬어지
는�‘카셀�도쿠멘타(Kassel�Documenta)’가�피어나게�된�것입니다.�
현재,�5년에�한번�100일간�개최되어�‘100일간의�미술관(Museum�of�100�days)’으로�일
컬어지는�도쿠멘타는�변화를�거듭하여�매�행사마다�90만�명�이상이�방문하는�세계�최대�현
대�미술제이자,�예술이�사회에�어떤�역할을�하는지에�대해�근원적�질문을�던지는�가장�진지
한�시각�예술�현장으로�자리�잡았습니다.�오는�2017년�제14회를�맞이하는�도쿠멘타가�폴란
드�출신의�새로운�예술감독�아담�짐직(Adam�Szymczyk)을�맞아�어떤�전시를�선보일지,
로서�연�전시가�바로�첫�번째�도쿠멘타(Documenta)입니다.�이�전시에서�당시�유명한�미
술역사가였던�베라�하프트만(Vera�Haftmann)은�큐비즘,�표현주의,�미래주의�등의�모던
아트를�카셀로�가져왔습니다.�처음�선보인�이�미술�사조들은�독일인들이�보기에�완전히�새
로운�것이었고,�전시는�13만여�명의�방문객을�끌어들이며�놀라울�만한�큰�성공을�거두었습
니다.
전�예술인들의�이목을�끌고�있습니다.�다가오는�카셀을�미리�맞이하기�위해�카셀�도쿠멘타
의�대표이사�아네트�쿨렌캄프(Annette�Kulenkampff)를�만나봤습니다.
Q.�정확하게�카셀�도쿠멘타�대표이사의�역할에�대해�알고�싶습니다.
CEO로서�저는�매니징�디렉터�역할을�하고�있습니다.�재정에�관련된�역할을�포함하여,�팀
을�조직하고�운영하는�전반을�책임지고�있다고�보시면�됩니다.�카셀�도쿠멘타는�매�행사마
다�팀이�새로�꾸려지기�때문에,�제�첫�번째�일은�행사를�시작하기�위한�팀을�조직하는�것입
니다.�이후,�예술감독이�도쿠멘타를�열�장소를�정하면�이를�실현하기�위해�조율하는�일도
제�몫이고,�카셀�시의�지원을�받기�위해�그들과�이야기를�하는�것도�제�일입니다.�또한,�종종
도쿠멘타와�관련해�발생하는�공공문제들을�해결하기도�합니다.�결국,�대표이사는�도쿠멘타
가�성공적으로�열리기�위한�모든�조율에�관여한다고�보면�됩니다.�단,�예술적인�부분은�전
적으로�예술감독에게�책임이�있습니다.
도쿠멘타가�열릴�건물이나�팀조차�정해져�있지�않습니다.�모든�사항들을�재조정해야�하
는데,�바꿔�말하자면,�예술감독은�이로써�자유로운�결정권을�가진다고�볼�수�있습니다.
이와�관련해�카셀�도쿠멘타의�시작이�세계�2차대전�시기,�완전히�파괴됐던�도시�카셀에
서�이뤄졌다는�점을�상기할�필요가�있습니다.�이�역사적�특징을�반영해�매회�도쿠멘타는
항상�새롭게�피어납니다.-�아네트�쿨렌캄프�-
Q.�그렇다면,�예술감독은�어떤�역할을�하나요?
거기에�도쿠멘타의�또�하나의�비밀이�있습니다.�매회�새로운�예술감독은�완벽한�공백(그라
운드�제로)에서�시작해�모든�것을�새롭게�창조해야만�합니다.�도쿠멘타가�열릴�건물이나�팀
조차�정해져�있지�않습니다.�모든�사항들을�재조정해야�하는데,�바꿔�말하자면,�예술감독은
이로써�자유로운�결정권을�가진다고�볼�수�있습니다.�이와�관련해�카셀�도쿠멘타의�시작이
세계�2차대전�시기,�완전히�파괴됐던�도시�카셀에서�이뤄졌다는�점을�상기할�필요가�있습
니다.�이�역사적�특징을�반영해�매회�도쿠멘타는�항상�새롭게�피어납니다.
Q.�매회�주제는�예술감독이�전적으로�결정하나요?
완전히�그렇습니다.�이사회(CEO)는�전문가들로�위원회를�구성하고,�위원회는�예술감독을
결정합니다.�모든�과정은�독립적이며,�결정�이후에는�그들이�하고�싶은�것에�대해�그�누구
도�절대�관여할�수�없습니다.�도쿠멘타의�다음�예술감독으로�선정된�아담�짐직의�경우를�예
로�들어보죠.�그는�앞으로�콘셉트에�대한�프레젠테이션을�할�텐데,�이사회는�그가�제시하는
콘셉트를�거절할�수�있는�권한이�전혀�없습니다.�이사회에�남은�것은�무조건�“예스”라는�대
답뿐입니다.�물론,�이사회의�대표격인�카셀�시의�시장�역시�그�의견에�동의할�수밖에�없습
니다.
Q.�향후�카셀�도쿠멘타의�주제는�정해졌나요?
논의되는�주제가�있지만�비밀입니다.�참여�작가들�역시�아직�결정되지�않았으며,�내년에�공
개할�예정입니다.
Q.�도쿠멘타는�4~5년에�한번�씩�열립니다.�다른�비엔날레들은2년�만에�여는데,�여기서�특별한�차이가�발생한다고�보시나요?
아시겠지만,�비엔날레라는�명칭�자체가�‘2년마다’를�의미합니다.�하여,�4~5년에�한�번씩�열
리는�카셀�도쿠멘타는�문법적으로도�비엔날레가�아닙니다.�초반부에는�4년인�경우도�있었
지만�현재�5년마다�한�번�열리는데,�개인적으로는�이�점이�카셀�도쿠멘타를�매우�성공적으
로�만드는�부분이라고�생각합니다.�첫째로,�5년은�예술이�많은�변화를�겪기에�충분한�시간
이기�때문이며,�둘째로,�예술감독에게�이를�반영하고�실질적으로�일할�수�있는�4년여의�시
간이�주어지기�때문입니다.�이�말인�즉,�그만큼�준비기간이�길다는�의미인데,�이것이�비엔
날레와의�차이입니다.�현재�독일에서�열리는�또�다른�큰�행사�‘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10
년에�한�번씩�열리는데,�이�10년은�예술계의�새로운�변화들을�반영하기에�다소�긴�기간인데
반해,�5년이�새로운�것을�창조하고�반영하기에�매우�적당한�기간이라고�생각합니다.
Q.�카셀�시민들은�도쿠멘타를�어떻게�받아들이고�있나요?
현재,�카셀은�공식적으로�‘도쿠멘타�시티’로�불리고,�사람들은�그�점을�자랑스러워하고�있
습니다.�그러나�이렇게�되기까지는�오랜�시간이�걸렸습니다.�현대미술은�어찌�보면�항상�투
쟁하게�되는�것�같은데,�이와�관련해�하나의�일화를�떠올려�볼�수�있습니다.�제7회�도쿠멘타
에서�요셉보이스(Joseph�Beuys)가�7,000�그루의�떡갈나무를�심은�일이�있었습니다.�카
셀은�소규모�도시이기�때문에,�이�경우�모든�이가�예술을�대면할�수밖에�없었습니다.�하지
만�당시에는�사람들이�그�작업에�대해�꼭�호의적이지만은�않았고,�지금처럼�대부분의�사람
들이�그�작업을�긍정적으로�인지하기까지는�정말로�많은�시간이�걸렸습니다.�상기할만한
사실은�예술은�언제나�확실하지�않고�깨지기�쉽다는�점입니다.�무언가�새롭게�제시되었을
때�항상�강한�투쟁이�동반되기�때문에�합의를�보는�것이�어렵습니다.�사람들은�완전히�새로
운�것을�보고�싶어�하지만,�한편으로�너무�새로운�것은�원하지�않습니다.
Q.�하랄드�제만(Harald�Szeemann)은�자신이�감독을�맡았던�제5회도쿠멘타에서�선보인�작업과�큐레이팅에�있어서�혁신적인�실험을�선보이며,�당시�보수적이었던�카셀�시�당국과�갈등을�겪었던�것으로�알고�있습니다.�이�상황을�현재�어떻게�재해석할�수�있을까요?
제만은�도쿠멘타가�선정한�최초의�외부�기획자였습니다.�당시�그는�젊고�실험적인�큐레이
터였습니다.�그가�회화보다�집중적으로�선보였던�퍼포먼스,�사진�등의�작업은�당시�예술로
받아들여지지�않았죠.�그렇게�그는�도쿠멘타의�모든�것을�완전히�바꾸어�놓았습니다.�매회
새롭게�선정된�예술감독에게�행사를�전적으로�일임하는�현재의�시스템은�제만이�열었던�도
쿠멘타를�기점으로�재편된�것입니다.�여느�현대�미술행사가�그렇듯,�도쿠멘타에도�항상�정
치적인�문제가�있었고,�시민들의�반발도�있어왔습니다.�하지만�이�모든�과정을�겪으면서�도
쿠멘타는�큰�성공을�거뒀고,�오히려�이런�논쟁을�통해�예술적으로,�경제적으로�끊임없이�성
장하고�있습니다.
Q.�펀드레이징(재정확보)에�관련한�팁이�궁금합니다.
요즘,�전세계적으로�국가�재정이�점점�어려워지고�있기�때문에�펀드레이징�역시�어려워지
고�있습니다.�‘카셀’은�그�자체로�하나의�대명사이자�키워드이기�때문에�그�점이�많은�도움
이�되지만,�다른�비엔날레들은�점점�힘들어지고�있다고�알고�있습니다.�사실,�도쿠멘타는
스폰서를�찾기가�힘들지는�않습니다.�하지만�“어떤�스폰서인가”�역시�아주�중요하고�조심
해야할�문제입니다.�이�과정에서�특기할만한�것은�카셀�도쿠멘타의�스폰서는�카탈로그에
로고만을�실을�뿐,�다른�어떤�것에도�관여할�수�없다는�점입니다.�도쿠멘타가�마켓이나�상
업적인�것에�귀속되지�않아왔다는�사실은�도쿠멘타가�계속해서�지켜야�할�필수요소이자�장
점이라고�생각합니다.�조언을�해주자면,�무엇이�필요한지를�스폰서에게�명확하게�설명해야
합니다.�하여,�우리는�매회�예술감독이�정한�컨셉과�내용을�정확하게�어필하려고�노력합니
다.
Q.�현대미술�비엔날레에서�가장�중요한�필수적인�조건이�무엇이라고�보시나요?
예술가와�큐레이터들에게�제약�없는�자유를�제공하는�것입니다.�현대미술은�언제나�그�중
심테마로써�편치�않은�주제를�택하고�그에�대한�발언을�유도해왔습니다.�성공적이고�뛰어
난�예술�행사들은�정치적•재정적으로�책임을�지고�있는�사람들이�제약�없는�자유를�지지할
때만�실행될�수�있습니다.�특히,�정치적�관여로�인해�예술적이고�기획적인�면에서�아이디어
를�잃게�되는�것은�도쿠멘타�정신의�죽음과도�같습니다.
Q.�곧�있을�당신의�중요한�계획에�대해�알고�싶습니다.
저는�카셀과�도쿠멘타의�역사를�사람들에게�설명하고�싶습니다.�해서,�역사�투어와�도쿠멘
타�투어를�기획하고�있습니다.�역사�투어는�아주�조심해야�하는�부분이지만�동시에�매우�중
요한�부분이기도�합니다.�만일�제대로만�실행된다면�많은�사람들로�하여금�도쿠멘타를�더
잘�이해하게�하는데�큰�도움을�줄�것입니다.�앞으로�남은�2년여�동안�해야�할�일이�많습니
다.�■�with�ARTINPOST
Gerhard�Richter�<Portrait�of�Arnold�Bode>1964�Courtesy�of�the�artist�Image�Courtesy�of�ARTINPOST
1957년�독일�하노버에서�태어난�쿨렌캄프는�프랑크푸르트�요한볼프강괴테대학교에서�미
술사석사학위를�취득했고,�2014년�봄부터�카셀�도쿠멘타의�대표이사�직과�프리더리치아
눔�페어안슈탈퉁스�박물관의�디렉터직을�맡고�있다.�1980년에서�1988년까지�프랑크푸르
트의�게링-쿨렌캄프�미술관을�공동�경영했고,�1989년에서�1994년까지는�본�독일연방공화
국�예술전시관의�출판실장을�역임했다.�1998년부터�슈투트가르트�뷔르템베르크�예술단체
의�관리이사직을,�2005년에서�2013년까지�단체의�이사장직을�역임했다.�2009년에서
2013년까지�슈투트가르트�국립미술관연합의�관리이사로�일했으며,�2011년부터�‘슈투트가
르트�문학관의�친구들’�관리이사직을�맡고�있기도�하다.�
Copyright:�Edisonga.de.�Image�Courtesy�of�ARTINPOST
약력
Recomme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