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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건축학 건축은 학문인가? 아니면 흔하게 포장되듯 학문과 기예의 종합인가. 만일 이 질문이 건축과 건축학을 구분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면, 건축과 건축학이 모두 ‘architecture’로 번역되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령, 대학 건축학과의 영문 명칭은 ‘department of architecture’이고, 이 《건축신문》의 영문명은 ‘architecture newspaper’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대학의 건축학과는 줄여서 건축과로 말하기도 하지만, 이 신문을 ‘건축학신문’이라고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건축과 건축학은 쌍방향으로 교환 가능한 말이 아니라, 늘 건축이 건축학을 포괄하는 큰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건축사나 건축가, 관청의 건축과 등의 예에서 보듯, 건축이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데 반하여, 건축학은 대학의 학과 이름에나 남아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국내의 상황을 적확하게 반영하려면, 차라리 대학 건축학과의 영문 이름을 ‘department of architectural studies’로 바꾸는 것이 혼란을 줄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질문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다. ‘건축학’은 건축이 아니고 건축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던진 것은, 2002년 5년제 건축학 전문교육과정 -대학에서 사용하는 말이라 관습적으로 건축학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시작되면서, 이 좁은 범위의 ‘건축학’이 점점 위축되어 급기야 소멸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가는 두려움이 들어서이다. 교과과정이 설계 중심으로 바뀌고 교수진의 구성 역시 건축학자에서 건축가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면서, 이제는 학과의 영문 이름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문명을 바꿔야 하는 상황으로 급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건축학과 보다 건축과가 적당한 상황이 되었고, 실제 한국예술종합대학의 학과명은 건축과이다. 이 같은 상황을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과거 인문대학에 속해 있던 예술학과가 예술대학으로 전이되는 것이니 가히 단과대학의 경계를 넘어가는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에 둔감하였던 것은 혹시 건축학과 건축이 둘 다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던 저간의 사정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학제 변화의 성과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대개 교육이라고 하는 상품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성과가 드러나고, 그나마도 수많은 경험을 거쳐 과연 어느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쳤는지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즘 소비자가 많이 따지는 ‘가성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학교를 선택할 때면 으레 전통과 명성에 의존하게 되고, 신설 학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기성의 벽을 넘기 어려운 것이 교육 상품의 특징이다. 바로바로 결과가 나오는 시험 대비 학원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 입안자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학생들은 일방적으로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점이고, 문제는 변화를 주동한 교육입안자들 역시 건축과 건축학의 개념을 소홀히 하였다는 의구심이 든다는 점이다. 예술과 예술학의 관계에서 잘 드러나듯이 건축과 건축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이 학문 즉, 과학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좁아진다. 과학은 대상이라기보다는 방법에 의해 정의되며,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실험과 관찰을 이용하고 가설과 논증을 거쳐 법칙을 찾아내는 일을 공통으로 한다. 따라서 과학은 예측과 검증이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축적적이다. 물론 모든 학문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정통 인문학은 여전히 과학적 방법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20세기 이후의 인문학은 과학적 방법과 크든 적든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시기의 건축학이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할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과거 건축학자는 무엇을 가르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옛 건축학과에서 중요한 과목이었다가 현재의 건축과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대표적인 과학이 ‘건축계획학’이다. 옛 건축학과의 커리큘럼에서는 최소 4개 학기에 걸쳐 있을 만큼 중심 과목이었으며 내용은 시설별 프로그램에 대하여 학습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건축계획학의 최종 성과는 종종 설계자료집성의 형태로 묶어지는데, 한 마디로 프로그램을 수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들을 찾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좋은 건축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나쁜 건축을 걸러내는 데는 도움을 준다. 20세기 초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도시 시설들이 속출할 때, 이를 처리하기 위한 제너럴리스트로서 건축가에게 유효한 도구였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된다. 지금은 지식 자체가 고도 전문화되면서 건축계획학에서 정리된 내용은 자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분야별 컨설턴트가 건축가를 도와주는 분업 체제로 바뀌었다. 건축가 역시 시설별로 특화된 영역으로 전문화되기 때문에 학교에서 모든 학생에게 초보적인 지식을 교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교육을 하는 것과 연구를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그와 같은 컨설턴트와 전문화된 건축가는 어떻게 길러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건축계획학의 무시는 계획의 전문적인 내용을 외국의 컨설턴트에 의존하겠다는 암묵적 동의, 혹은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포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문가양성의 걸림돌 건축 역사에 대한 태도에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행의 교육 커리큘럼은 인증제도 도입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것을 모범으로 하였다. 건축역사학의 경우 미국과 유럽의 태도는 큰 차이를 갖는다. 고전시대의 유적이 시내에 가득한 로마는 물론이고, 역사도시인 파리나 런던에서 건축을 하는 것과 뉴욕에서 건축을 하는 태도가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미국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역사에 대한 집중도나 전통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전후 미국 서부의 교외 주거를 다루는 것은 파리의 건축대학에서 나폴레옹 3세 시대의 도시계획을 배우는 것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건축교육에서 건축역사는 어떻게 교육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전문가는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 하나는 학부 교육과, 다른 하나는 대학원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학부 교육 커리큘럼의 경우, 어느 하나를 강조하여 분량을 늘리면 다른 것이 그만큼 전시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 (삼성미술관 리움, 2015.11.19~2016.3.27) 전경. 본 전시는 한국건축 천년의 지혜를 되돌아보는 건축전으로, 전봉희 교수가 공동 기획한 전시로, 한국건축의 역사는 물론, 건축학자로서의 앞으로의 과제에 대한 물음과 답이기도 하다. 건축으로 학문하기 건축학은 지역과 역사를 떠나 생각하기 어렵다. 이곳에서 참인 것이 다른 곳에선 부정되는 이유다. 한때 유행했던 것이 다른 시기에 거부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건축역사학은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봉희 교수는 현상에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여 미래를 추론하는 것이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가진 본령이라고 말한다. 단편에서 보편적인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지역적인 것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면에 계속 → 건축신문 Architecture Newspaper 발행인: 김형국 편집인: 박성태 발행처: 정림건축문화재단 발행일: 2016. 4. 28. 주소: 03044.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8길 19 ISSN: 2287-2620 신고번호: 종로 바00136 우리 안팎의 난민 난민이 아니어도 충분히 난민적인, 자연·사회·제도에 의해 떠밀려온 국내외 난민에 대한 전지구적 고찰 민중미술의 새로운 태도와 유라시아에 던지는 질문 날카로운 질문에 둔탁하게 던지는 대답, 김정헌 유라시아의 심원한 시공간, 요우미 현대 시각예술과 비평의 세대교체와 동역학 전 세대와 노골적인 종료를 알린 현대미술과 디자인에 대한 고찰, 임근준 vs. 권시우 공유지 사적소유에 대한 실험과 대책 경의선 공유지를 둘러싼 시장 개발논리에 맞서는 시민행동의 목소리와 해결 방법 기술적 이미지의 몸 혹은 모험 비평과 글쓰기의 고독을 넘어서기 위한 비평가와 비평영역의 재발굴 노력 www.junglim.org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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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건축과 건축학

건축은 학문인가? 아니면 흔하게 포장되듯 학문과 기예의

종합인가. 만일 이 질문이 건축과 건축학을 구분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면, 건축과 건축학이 모두 ‘architecture’로

번역되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령, 대학

건축학과의 영문 명칭은 ‘department of architecture’이고,

이 《건축신문》의 영문명은 ‘architecture newspaper’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대학의 건축학과는 줄여서 건축과로 말하기도

하지만, 이 신문을 ‘건축학신문’이라고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건축과 건축학은 쌍방향으로 교환 가능한 말이

아니라, 늘 건축이 건축학을 포괄하는 큰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건축사나 건축가, 관청의 건축과 등의 예에서 보듯,

건축이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데 반하여, 건축학은

대학의 학과 이름에나 남아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국내의

상황을 적확하게 반영하려면, 차라리 대학 건축학과의 영문

이름을 ‘department of architectural studies’로 바꾸는

것이 혼란을 줄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질문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다. ‘건축학’은 건축이 아니고 건축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던진 것은, 2002년

5년제 건축학 전문교육과정 -대학에서 사용하는 말이라

관습적으로 건축학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시작되면서, 이

좁은 범위의 ‘건축학’이 점점 위축되어 급기야 소멸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가는 두려움이 들어서이다. 교과과정이

설계 중심으로 바뀌고 교수진의 구성 역시 건축학자에서

건축가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면서, 이제는 학과의 영문

이름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문명을 바꿔야

하는 상황으로 급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건축학과 보다

건축과가 적당한 상황이 되었고, 실제 한국예술종합대학의

학과명은 건축과이다. 이 같은 상황을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과거 인문대학에 속해 있던

예술학과가 예술대학으로 전이되는 것이니 가히 단과대학의

경계를 넘어가는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에

둔감하였던 것은 혹시 건축학과 건축이 둘 다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던 저간의 사정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학제 변화의 성과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대개 교육이라고 하는 상품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성과가 드러나고, 그나마도 수많은 경험을 거쳐 과연 어느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쳤는지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즘 소비자가 많이 따지는 ‘가성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학교를 선택할 때면 으레 전통과 명성에 의존하게

되고, 신설 학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기성의 벽을 넘기

어려운 것이 교육 상품의 특징이다. 바로바로 결과가 나오는

시험 대비 학원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 입안자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학생들은 일방적으로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점이고, 문제는

변화를 주동한 교육입안자들 역시 건축과 건축학의 개념을

소홀히 하였다는 의구심이 든다는 점이다. 예술과 예술학의

관계에서 잘 드러나듯이 건축과 건축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이 학문 즉, 과학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좁아진다. 과학은

대상이라기보다는 방법에 의해 정의되며,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실험과 관찰을 이용하고 가설과 논증을 거쳐 법칙을

찾아내는 일을 공통으로 한다. 따라서 과학은 예측과 검증이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축적적이다. 물론 모든 학문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정통 인문학은 여전히 과학적 방법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20세기 이후의 인문학은 과학적 방법과 크든 적든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시기의 건축학이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할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과거 건축학자는 무엇을 가르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옛 건축학과에서 중요한 과목이었다가

현재의 건축과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대표적인 과학이

‘건축계획학’이다. 옛 건축학과의 커리큘럼에서는 최소

4개 학기에 걸쳐 있을 만큼 중심 과목이었으며 내용은

시설별 프로그램에 대하여 학습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건축계획학의 최종 성과는 종종 설계자료집성의 형태로

묶어지는데, 한 마디로 프로그램을 수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들을 찾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좋은

건축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나쁜 건축을

걸러내는 데는 도움을 준다. 20세기 초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도시 시설들이 속출할 때, 이를 처리하기 위한

제너럴리스트로서 건축가에게 유효한 도구였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된다.

지금은 지식 자체가 고도 전문화되면서 건축계획학에서

정리된 내용은 자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분야별

컨설턴트가 건축가를 도와주는 분업 체제로 바뀌었다. 건축가

역시 시설별로 특화된 영역으로 전문화되기 때문에 학교에서

모든 학생에게 초보적인 지식을 교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교육을 하는 것과 연구를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그와

같은 컨설턴트와 전문화된 건축가는 어떻게 길러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건축계획학의

무시는 계획의 전문적인 내용을 외국의 컨설턴트에

의존하겠다는 암묵적 동의, 혹은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포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문가양성의 걸림돌

건축 역사에 대한 태도에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행의 교육 커리큘럼은 인증제도 도입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것을 모범으로 하였다.

건축역사학의 경우 미국과 유럽의 태도는 큰 차이를 갖는다.

고전시대의 유적이 시내에 가득한 로마는 물론이고,

역사도시인 파리나 런던에서 건축을 하는 것과 뉴욕에서

건축을 하는 태도가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미국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역사에 대한 집중도나

전통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전후 미국 서부의 교외 주거를

다루는 것은 파리의 건축대학에서 나폴레옹 3세 시대의

도시계획을 배우는 것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건축교육에서 건축역사는 어떻게 교육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전문가는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 하나는 학부

교육과, 다른 하나는 대학원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학부 교육 커리큘럼의 경우,

어느 하나를 강조하여 분량을 늘리면 다른 것이 그만큼

전시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 (삼성미술관 리움, 2015.11.19~2016.3.27) 전경. 본 전시는 한국건축 천년의 지혜를 되돌아보는 건축전으로, 전봉희 교수가 공동 기획한 전시로, 한국건축의 역사는 물론, 건축학자로서의 앞으로의 과제에 대한 물음과 답이기도 하다.

건축으로 학문하기 건축학은 지역과 역사를 떠나 생각하기 어렵다. 이곳에서 참인 것이 다른 곳에선 부정되는 이유다. 한때 유행했던 것이 다른

시기에 거부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건축역사학은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봉희 교수는

현상에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여 미래를 추론하는 것이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가진 본령이라고 말한다. 단편에서

보편적인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지역적인 것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면에 계속 →

건축신문 Architecture Newspaper 발행인: 김형국 편집인: 박성태 발행처: 정림건축문화재단 발행일: 2016. 4. 28. 주소: 03044.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8길 19 ISSN: 2287-2620 신고번호: 종로 바00136

우리 안팎의 난민

난민이 아니어도 충분히 난민적인, 자연·사회·제도에

의해 떠밀려온 국내외 난민에 대한 전지구적 고찰

민중미술의 새로운 태도와 유라시아에 던지는 질문

날카로운 질문에 둔탁하게 던지는 대답, 김정헌

유라시아의 심원한 시공간, 요우미

현대 시각예술과 비평의 세대교체와 동역학

전 세대와 노골적인 종료를 알린 현대미술과

디자인에 대한 고찰, 임근준 vs. 권시우

공유지 사적소유에 대한 실험과 대책

경의선 공유지를 둘러싼 시장 개발논리에 맞서는

시민행동의 목소리와 해결 방법

기술적 이미지의 몸 혹은 모험

비평과 글쓰기의 고독을 넘어서기 위한 비평가와

비평영역의 재발굴 노력

www.junglim.org

Page 2: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32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난민은 한계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다. 시리아 난민이나 일본의

구마모토 난민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한국의 청년세대도 충분히

난민 상황에 처해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에 의한 난민이나

사회·경제적 난민이 전지구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오늘날

지구촌의 모습이다.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땅과 사회를

떠나야 하는, 난민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서로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만들려는 의지를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안팎의 난민

10 Interview

날카로운 질문, 둔탁한 답변 김정현. 인터뷰 안소현

유라시아의 심원한 시공간 요우미. 인터뷰 김남수

14 Focus 공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실험과 대책

도시재생의새로운실험,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최정한. 인터뷰 정기황

늘장에서 난장으로: 공유지를 지키는 시민행동 이영범

16 Roundtable 기술적 이미지의 몸 혹은 모험 김현호, 유운성, 임경용

18 Critic 『스스로 조직하기』가 비추는 세계 윤원화

19 Foundation 정림학생건축상 <재난건축> 심사평 및 수상작 소개

20 Ads 통의동 집

01 Comment 건축으로 학문하기 전봉희

02 Issue 우리 안팎의 난민

세대라는 눈길, 그리고 청년세대의 몰락 서동진

개인적인 전시, 조각난 흔적들 차지량

청년들의 조난신호 이규호

난민생산 국가 속 청년의 빈곤 구현모

청년의 주거와 노동 미스핏츠

난민,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어 박노자

03 Editorial 아직 오지 않는 봄 박성태

07 Borderless 급변하는 현실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가 안성석

08 Versus 현대 시각예술과 비평의 세대교체와 동역학 임근준 vs. 권시우

CONTENTS

Editorial

아직 오지 않는 봄

올봄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화사한 햇살도 노란

개나리도 멈칫거리며 뒷걸음칠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황폐한 사막이거나 짙푸른 바닷속 같은 세상에 과연

봄다운 봄이 찾아올 수 있을까? 가늠하기 어려웠다.

진실과 정의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곳에서, 절절한

애원마저도 매몰차게 내처 버리는 차갑고 시린 이곳에서

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새순이 돋고 따뜻한 바람이 분다. 우리는

소풍을 준비하고 친구들과 도시락을 까먹을 생각에

들뜬다. 벚꽃이 만개한 도시엔 꽃보다사람이 많은

진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 모습이 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봄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

잊자”는 “잊지 않겠다”에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거는 꼴이니, 힘겨울 수밖에 없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놈의 저질 망언과 경제 타령이 넘칠 때부터 봄마다 몸이

부대낀다.

이번 호 이슈로 난민을 다뤘다. 세계 곳곳에서

난민이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매년 수천만

명이 비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난다. 정치·사회적 갈등이

주요 이유다. 시리아는 인구 절반이 난민이나 유민이

되어버렸다. 최악의 비인도적 참사인 시리아 내전이

이유다. 그 내전은 독재정권과 시리아의 복잡한 민족과

종교 분파에 기인하지만, 이 아수라장에서 가장 큰 피해는

아이들과 여성들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떠돌이가

될 수밖에 없다. 난민 문제는 지금 세계가 짊어진 가장

무거운 짐이자 아픈 상처다.

한국은 국제적인 난민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다.

2015년까지 누적 난민 신청자는 1만 5천여 명이지만,

난민 자격을 인정을 받은 숫자는 576명으로 4%에도

미치지 못한다. 난민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없고

서둘러 테러방지법을 처리했다. 평화를 위한 노력보다

피아彼我 구별짓기만이 난무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속했던 공동체를 떠나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을

품는 데 인색하다. 그들을 나의 몫을 채가는 사람들로,

해를 끼치는 사람들로만 여긴다.

이 가운데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청년 세대들은

자신들을 ‘난민’으로 부르며 고향을 등지는 꿈을 꾼다.

세대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들은 절망적이고 무기력하며

빈곤하다. 우리 사회는 다른 세대, 다른 계층의 이웃을

점점 더 심각한 불안정 속으로 몰아놓고 있는데, 특히

청년세대가 코너에 몰렸다. 일자리는 부족하고, 그나마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빚’을 가지고 성인이 된

첫 세대다. 학자금 대출을 빼고도 생활비로만 은행에서

빌린 돈이 지난해에만 1조 원이 넘었다. 그들은 아직

난민이 아니지만, 삶은 이미 충분히 난민적이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타인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돌을 던진다.

이웃과 함께 살자는 공동체의 가치는 희미해졌다. 반면

패거리 문화는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다. 꿈을 갖기

어려운 나라에서 우울과 절망에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청년들은 난민을 자처한다. 봄이 왔지만, 구조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성태 편집인

줄어들어야 하는 제로섬 게임과 같다. 그러므로 지역의

역사문화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의

분량을 늘리려는 노력은 주변의 모든 교수를 적으로

만드는 행위가 된다. 다들 자신의 몫이 줄어든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에 협상이 쉽지 않다. 대학원 과정을 통한

학자 양성은 비교적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지만, 역시

학부 교육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연구직으로 진출하기 위함인데, 학부

교육에서 건축역사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교수직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5~6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엄격한 전문 학위과정을 견뎌 낸 ‘예비 건축사’

가운데 새삼스럽게 학자가 되겠다고 전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건축역사학의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컨설팅과 마찬가지로

그 지식을 외부에서 수입하는 의존적 상황으로 바뀔지

모른다. 그 외부는 역사학이나 미술사학 등과 같은 다른

분야가 될 수도 있고, 세계 시장을 무대로 삼기 때문에

건축역사학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외국의 연구기관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외국어 구사능력과 외국 논문

편수를 중시하는 대학 교원 채용시스템 때문에 이미 그런

상황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국 건축학자에게 주어진 과제

둘 다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며, 일상생활에서

큰 의미 없이 혼용되는 건축과 건축학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여기서는 건축계획학과 건축역사학 두

분야만을 거론하였지만, 기예적 성격이 강화된 건축에

대해 과학이어야 하는 건축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 기예와 과학이 균형 잡힌 종합적인 발전으로

이어지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좀 더 미국적인 것, 좀 더 국제적인 것이 좋다는 식의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의 건축학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건축학은 그것이 장소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문화적인 상품이기 때문에 지역과 역사를 떠나서

생각하기 힘들다. 이곳에서 참인 것이 다른 곳에선

부정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그래서이다. 한

때는 유행하였지만 다른 시기에는 거부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격자형 도시만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에서 시작하여, 고대의 동아시아 세계, 그리고

19세기 서구의 신도시에서 간헐적으로 환영을 받았다.

이미 여러 글에서 언급하였지만, 건축역사학은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현상에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여 미래를

추론하는 것은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의 본령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이론이 한국의 지역적 상황에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인간과 건조환경의 관계, 인류 문명의

일반적 발전 경향을 설명하는 보편 개념으로 확장해

확인하는 것이 건축역사학을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단편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지극히

지역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지역적인 만큼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애정을 갖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기예가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데 반하여, 과학은 집단적이고

축적적이라는 점이다. 느리더라도 조금씩은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한.

전봉희 1997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건축과 아시아건축에 대한

강의와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주된 관심과 활동분야는 동아시아의

목구조 전통, 한국 주거사, 아시아 건축의 비교 연구, 건축아카이브,

건축문화유산의 보전 관리이다. 저서로 『중국북경가가풍경』,

『3칸x3칸』, 『한국건축의 유형학적 접근』, 『전남의 건축문화재』,

『경주 양동마을』, 『한국근대도면의 원점』, 『한옥과 한국주택』 등이

있으며 『서양목조건축』을 번역하였다.

→ 1면으로부터 계속

청년을 부르는 신조어의 범람

어느 대담에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우리 시대에는 오직 두 가지의 인물만이

세상으로부터 관심을 얻는다고 침통하게 말한다. 그 두 가지

인물형이란, 바로 스타와 피해자이다. 먼저 스타가 있다.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열정과 의지로 자신을 빚어내는 데 성공한

매력적인 인물.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의 TV를 석권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승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공적인 창업으로 부를 거머쥔 기업가 혹은 기업가 정신을

체현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그런 기업가적인 인물의 모범으로 가장 자주 우려먹는 이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청년과 예술가이다.

다음으로 피해자가 있다. 오늘날 타인의 관심을 끄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을 피해자로 그려내는

것이다. 자신을 무고한 피해자로 드러낼수록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난민수용소에서

물과 빵을 외치며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어슬렁대는 난민은

우리에겐 걸리적거리고 불편한 타인이다. 시리아 난민이

그런 꼴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기꺼이 관심을 보일

수 있다. 해변의 모래밭에서 발견한 어느 어린 소년으로서의

시리아 난민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들이 희생자라면 나는

기꺼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청년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청년은 그러한 피해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상연하는 데 열중한다. 청년 세대를 가리키는 신조어의 범람은

이를 잘 보여준다. 88만원세대에서 흙수저계급, N포세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청년 정체성의 여정

오늘날 청년이라는 이름에 깃든 이율배반적인 기대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성공한 청년

창업의 주인공이라는 초상에서, 우리는 스타의 후광으로

에워싸인 청년을 발견한다. 흙수저계급, N포세대로서의

청년을 토로하는 청년에게서 우리는 무고한 피해자로서의

청년을 발견한다. 이러한 청년의 이율배반적인 면목面目은

청년이라는 낱말의 역사적인 편력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이들에겐 낯선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친 김에 청년이란

정체성이 겪은 여정을 한 번 추적해보도록 하자.

인구학은 세대라는 개념을 세상에 물려주었다. 미셀

푸코가 역설하듯 인구란 개념은 생명권력bio-power의

등장에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까다로운 철학자의 생각을 잠깐 방문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인구란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을 마름질하기

위해 발명된 획기적인 개념이다. 권력은 누구에 대하여

행사되는가. 그 전까지 종교나 정치철학을 비롯한 사변적

담론은 신민subject, 시민citizen, citoyen 같은 개념을

내세웠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노동자와

농민의 반란과 저항은 계급(투쟁)이란 개념을 도입하였다.

나아가 민족nation이란 개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역시

‘민족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19세기 중반 유럽을 휩쓸면서

인류의 의식 속에 뿌리박히게 된 개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개념들이 정치적인 캠페인, 행동, 투쟁, 전략 속에 등장하고

성행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개념을 집어삼킨 인간의

이름은 ‘인구’였다. 인구는 아주 겸손하게 뒷전에 물러난 채

다른 여러 개념을 조정하였다.

예컨대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문제가 산업문제로서 혹은

노사문제로서 규정되며 노동자의 건강, 안전, 교육, 영양,

노후 등에 관련된 즉 노동자의 생명life 혹은 삶에 관련된

문제로서 정의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 시민 역시 다르지 않다.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육체의 모습에 깃들지 못한 시민이란

개념은 이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며 삶의 안녕을 추구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에 포개어진다. 따라서 출생과 사망률, 세대별

분포, 남성과 여성의 비율, 가족의 수와 형태, 거주 방식과

위생, 교육 수준과 이주율 등의 복잡한 사실들을 집적하고 또

분석하면서 권력은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대상을 상상한다.

그것은 인구라는 렌즈를 통해 규정된 생명 덩어리야말로

진정으로 권력이 다루어야 할 대상임을 가정하고 또 그

가정에 따라 권력은 자신이 작동하는 제도, 법률, 규칙과 절차

등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얼추 세대라는 개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드러난다. 인구란 개념은 생명의 주기 혹은 단계로서

세대란 개념을 자신의 짝으로 삼기 때문이다. 영어로

‘세대generation’란 낱말은 생식 혹은 생명의 산출이란 뜻을

겸비한다. 그러므로 젊음 혹은 청년기는 인구학적인 범주에

불과한 걸까. 그것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것이 우리가 청년이란 낱말에 마주했을 때 언제나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이다. 인구란 개념이 등장하면서 청년기라는

세대가 따로 분리되어 이해되어야 했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겠지만, 청년이란 낱말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를

거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는 부르주아사회 초기에 청년이란 말이 차지하던

의미를 요령 있게 짚은 바 있다.1) 이 때 그의 관심은 성장소설

혹은 교양소설로 널리 알려진 소설 형식에 등장하는 청년이다.

지금은 시들해졌거나 자취를 감춘 근대문학의 유명한 장르인

그 소설들은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때의

청년이란 인생사의 어떤 단계를 가리키는 인구학적 청년이

아니라, 근대세계의 상징적인 형식으로서의 청년이다.

청년, 세대가 아닌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

교양소설에서 그려내는 문학 내적 존재로서의 청년이란

부르주아 혁명 이후 등장하게 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화해시키는 인물로서의 청년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은

개인의 삶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타협하며 결국 사회와

화해하는 삶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

말했듯이, ‘모든 청년은 부르주아’이다. 부모의 지위를

세습하는 자본주의 이전 세계의 인물에겐 청년이란 인물형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정은 다르다. 그는

자유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간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고 기꺼이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청년이란 세상이라는

문턱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두고 번민하는 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청년은 자신의 꿈과 현실적 생존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적 생존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깨닫고 성숙해지며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욕망과 꿈을 철부지의 미몽迷夢으로 흔쾌히 처분한다.

이처럼 부르주아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이 부과한

운명에 따라 살아가야하는 자들의 타율성을 자신의 삶의

선택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성으로 둔갑시킨다. 그렇지만

그것은 상처를 남긴다. 성장소설이나 교양소설은 예외 없이

시큼한 우울을 우리에게 남긴다. 우리는 마침내 어른이 되기

위한 문턱을 넘어서지만 그것은 나의 자유를 양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고 성장소설은 그러한 우울을 보상할 교훈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것은 성장을 위해 그리고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기꺼이 지불해야할 대가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응축하면서 또 전치시키는 형상figure이다. 모레티는 그것을

성장소설이라는, 지금은 주춤하거나 사라진 문학 장르에서

읽어낸다. 결국 모레티가 말하는 청년이란, 세대라기보다는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에게서 청년은 일정한

연령대에 속한 사람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집단으로서의 청년은 없다. 오직 청년은 개인이라는 형태의

인물형character으로서만 존재한다. 청년이란 이름이 알고

있는 인물은 오직 개인으로서의 인물일 뿐이다.

한때 문화적 은유이자 상징이었던 청년의 소멸

그렇지만 어느덧 세월이 흘러 청년은 다른 모습을 획득한다.

그것이 장 보드리야르 같은 사회학자가 말하는 청년이다.

시대는 바뀌어 우리는 20세기의 중반으로 뛰어 넘는다.

이 때 청년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는 성인계급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비판적인 방식으로 코드의 이 비-장소의 자리를 차지한다.

도처에서 젊은이의 반란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비-장소가 모든 사회계층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 정치, 과학, 문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무책임이며,

말을 빼앗겼거나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반란이다.”2)

서구 여러 나라를 휩쓴 ‘68혁명’은 청년이라는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새겨 넣었다. 보드리야르는 이를 선정적이면서

간추려진 표현을 통해 밝힌다. “젊은이는 성인계급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비판적인 방식으로 코드의 이 비-장소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할 때, 그는 젊음 혹은 청년에게서 세계를

부정하는 자리를 찾아낸다. 비-장소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그가 말할 때, 그것은 그 세계의 부정성을 육화한다는 말과

같다. 청년은 세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가. 그는 이런

뻔한 상식에 대해 이견을 제출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청년은

비-장소이다. 그는 세계 자체를 거부하는,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장소의 이름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청년은

비-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록 뮤직과 카운터컬처 그리고 체

게바라는 청년을 부정의 대명사로서 새기도록 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철 지난 먼 옛날의 낭만으로

비아냥거림 받을 뿐이다. 청년들은 왜 저항할 생각을 않고

칭얼거릴 뿐이냐는 ‘꼰대’의 불평에 대해 청년은 왜 저항의

책임을 청년에게 요구하냐며 볼멘소리로 따진다. 청년이 왜

부정의 상징으로 어릿광대 노릇을 해야 하냐는 그럴 듯한

반박이 출현하는 것은 21세기의 초엽, 바로 오늘이다.

개인화의 알레고리로서 등장한 청년, 전체 세계의 대립

항으로서의 청년. 그러한 역정을 거치며 청년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왔다. 그러나 청년은 더 이상 전과 같은

영예로운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비참하고 우울하며

무엇보다 빈곤하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마침내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인구학적 세대로서, 즉 사회집단을 분류하는

명칭 가운데 하나로 돌아간다. 이는 세계의 문화적 은유이자

상징으로서 청년은 마침내 사라지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이다.

연령대라는 분류의 표지 말고는 가난과 실업이라는 사실적

상태 말고는 여느 사회집단과 특별히 다를 게 없는 청년.

이것이 오늘날 청년 세대가 마주하는 가장 큰 위기일

것이다.

1) 프랑코 모레티, 『세상의 이치: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

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

2) 장 보드리야르, 『생산의 거울』, 배영달 옮김, 백의신서, 1994, 132쪽.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 저서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2009), 『디자인 멜랑콜리아』(2009), 『변증법의

낮잠』(2015) 등이 있고, 역서로 『섹슈얼리티: 성의 정치』(1999) 등이 있다.

변화된 자본주의에서 문화와 경제의 관계, 특히 금융과 일상생활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요즘은 마르크스주의적인 문화

분석, 특히 정치와 주체,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쟁점들을 생각하는 데 넋이

팔려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불과 13년 전만 해도

나는 P세대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다. 그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물론 월드컵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길바닥에서 빨간 옷 입고

소리 좀 질렀을 뿐이었다. 인터넷에서 이른바 ‘수꼴’들 좀

비웃고, 방 밖으로 기어나가 고작 투표나 했을 뿐이다. 헌데

그런 독박을 썼다. 연유는 이렇다. 난데없이 한 광고회사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고는 열정passion, 참여participation,

잠재력potential power을 갖고 있는 P세대라고 나한테

그랬다. 민주주의를 걸쳐만 입었을 뿐 권위주의 꼰대이긴

매한가지였던 386세대, 마냥 시니컬하기만 하고 자기 에고를

감당 못하는 철없는 X세대가 아니었다.

P세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를 열어갈 포텐 터지는

세대’라고 한다. 물론 그 기대를 광고회사한테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양반들은 고답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레드콤플렉스도 없이 ‘빨강’이라는 색깔로 광장을 새롭게

점유하는 열정적 청년/시민 주체로 호명하기도 했다.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우리가 참여해서 새롭게 바꿀 거라고 했다.

하지만 P세대는 지난 13년간 그들의 붉은 피만 제대로 빨을

뿐이다. 열정은 노동 착취의 명분이 되었고, 참여는 잠깐의

정부이름이었을 뿐이며, 잠재력이란 잠재를 시키는 능력

혹은 모든 것이 잠식된 채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는 말이었을

뿐이다. 그동안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게 악화되었고, 그 사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해졌다. 희망과 기대를 담아 P세대라고 호명한 게

2003년이었는데, 4년 만에 ‘88만원세대’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몇 년 후,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며 찌질하게 잉여질이나

하고 있는 벌레들이 되었다. 물론 ‘살아 있다’라는 전제

조건하에서 말이다.

난민이 된 청년세대

이곳에서 나는 난민이 된 청년을 얘기하고 있다. 냉전

시대의 분단 상황에서 피난민 국가로 시작해,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하며 전 세계에서 방구 좀 낀다는 나라가 됐다는

데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난민이 됐단다. 전쟁통에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굶주림과 폭압에 못 견뎌 사선을

넘어 여러 나라를 떠돌다 들어온 탈북난민도 아니다. 맛집에

환장하고 쓸데없이 인터넷질이나 하고 앉아 있으며 SNS에

쿨내가 진동하는 사진으로 칠갑하는 인생들에게 난민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는 것은 무도한 일일 수도 있다. 일찍이

이렇게 풍요로우면서도 나르시시즘으로 가득한 난민은 지구

역사상 딱히 본 적이 없을뿐더러, 우리가 난민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범주에 딱히 맞아 떨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청년 담론들에서 사람들은 모두 청년의 위기와

그들의 암담한 현실과 미래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개별적으로

만나는 청년들은 마냥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면서 빤한 데다

심지어 게으르고 무식하다. 게다가 기생한다는 말 빼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서는 발전주의

한국의 도덕적 가치였던 근면/성실과 ‘노오력’ 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을 수도 있다. 윗세대가 피땀으로

일궈온 이 땅의 풍요를 단물만 쪽쪽 빨아 먹고는, 미래가

없다며 어리광에 가까운 불평만 하고 있게 들릴지도 모른다.

이에 작금의 현실이 청년세대에 가혹하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이해해도 개별적으로 청년을 만나게 되면 복장이 터지고야

만다. 이런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국가가 엄청난 폭력에서

도망쳐 한국으로 피난 온 이주민들에게도 부여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난민이라는 지위를 청년들에게 주는 것은 정말이나

껄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 동안 한국 사회를 견뎌낸

청년들은 어떤 면에서 충분히 ‘난민’이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은유적으로 말이다. 또한 주변에서 개별적으로 보게

되는 ‘한심한’ 청년들 말고도, 고립무원 상태에서 피어나지도

못했는데 인생막장으로 치닫는 걸 매일 느끼면서 사는

청년들도 많다. 이들은 대게 ‘비가시적’인 곳에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었을 뿐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청년들은 그동안 난민화되고 있고, 아직 난민은 ‘충분히’ 되지

않았을지라도 삶은 이미 완벽하게 ‘난민적’이다.

전쟁과 같은 큰 사건이 있어서 누구에게나 동의할 수

있는 난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시나브로’라는 부사만이 적합할 정도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난민이 되었다. 은유로서 난민이라는 증거들은 다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일자리는 없지만 빚은 있다. 역사상 최초로 이

나라의 청춘들은 ‘빚’을 가진 채 성인이 됐다. 어마어마한

학자금 대출은 재껴두고, 생활비로만 은행에서 꾼 돈이

2015년 기준으로 1조원이 넘었다. 미래는커녕 지금 당장

버티기도 버겁다. 그렇다고 사회안전망이나 복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도 버겁다. 게다가 그

둘은 ‘매우 비싸다’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심리적으로 든든한 사회적 관계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수저’가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진실, 노력은 보상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착취의 다른 이름이라는 진리, 사람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걸러내고 대체해버리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해버렸다. 공정함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순 없지만,

계속해서 무한 경쟁의 구도에 내몰린다.

P세대라고 한참 떠들었던 그즈음, 2004년 노동석

감독의 독립영화 <마이제너레이션>은 빚으로 허덕이는

세대라는 눈길, 그리고 청년세대의 몰락서동진

청년들의 조난신호이규호

작가로서 개인이 온전한 책임을 지는 전시를 4회

경험했다. 그 전시장 네 곳 중 세 곳이 사라졌다. 명동,

홍대 앞, 역삼동, 연남동. 전시장이 있던 위치엔 현재

다른 공간이 들어섰다. 서울은 ‘성인이 되어 태어난 집을

찾아갔는데, 변해버린 동네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꽤 많은 이사를 다녔고, 오래 머문 동네가

없어서 기억은 조각나 있다. 30년을 넘게 살았던 경험은

서울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조건일까? 최근 4년 동안은

서울 이외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인천 2년, 고양 1년, 안산

개인적인 전시,

조각난 흔적들차지량

1년. 매년 이사하며 짐을 줄이거나 작품들을 폐기해야만

했다. 머문 시간의 증거물은 또 조각내어 담아야 했다.

서울에서 일시적으로 머물 공간을 구했고, 최소한의 짐을

꾸리고 있다. 3팀(명)이 함께 사용할 예정이며, 각각 거주/

모임/작업을 위해 임대료의 1/N을 지불한다. 나는 입주

전 비어 있는 5일 동안 개인적인 전시를 하기로 결심했다.

이 전시는 그동안 경험한 개인적인 전시인 <이동을

위한 회화>(2008), <세대독립클럽>(2010), <일시적

기업>(2011), <new home>(2012)을 새롭게 살아가게 될

공간에 재구성하고, 현재의 열망을 단서로 남기는 방식을

택했다. 다시 서울에 머물고 작업하게 된다면 어떤 조각을

남기게 될까? 기억만 하게 될까? 흔적만 갖게 될까?

차지량 ‘시스템의 고립을 겨냥하는 개인’에 초점을 맞춘 참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시스템에 상상력을 제안하는 개인’이 가능한

사회를 희망하며 작업한다. 다수의 전시, 예술제, 뉴미디어 참여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차지량, <표류난민>, 2015

© 차

지량

Page 3: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54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난민[難民]: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은 시리아 난민들은 “우린 인간이다”를

외치며 프랑스, 독일, 캐나다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건너갔다.

프랑스 정부가 불도저로 칼레 난민촌을 밀어버려도,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살 인간은 아니라는 듯

마케도니아가 국경을 닫아도 그들의 이동은 계속됐다. 시리아

난민 사태가 일어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도 내전은 격화됐다.

터키 국경으로만 3만 명이 몰렸다. 60만 명의 난민이 추가로

발생할 거란 예측도 있다.

정치적·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탈출한

사람을 ‘난민’으로 일컫는다. 난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떤

제도도 그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국적은 있으나

본국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고, 이주국에 살고 있으나

국적은 여전히 본국에 있다. 쉽게 말해 음영지대에 사는

사람들이다.

난민을 음영지대에 사는, 사회 제도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내가 이 발을 딛고 있는 한국도

난민발생 국가다. 그리고 그 난민이 청년이라면, 미래 세대의

기둥이 될 청년이 난민이라면, 그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나라의 기둥, 그

난민들의 이름은 청년노동 난민, 청년주거 난민이다.

9.5%.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청년(15~29세)

실업률이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구직을 포기한 사람들과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통계에 잡히지 않고 1주일에

1시간만 일해도 취업자로 분류되는 걸 고려하면 실질적인

청년 실업률은 훨씬 높을 것이다. 대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청년들의 실업률은 무려 25.3%라는 조사도 있다. 고등학교

학생의 약 70%가량이 대학을 진학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최소 1/5가량의 청년이 대학을 나왔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실업자인 신세다.

일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고생하기 싫어서, 눈이 높아서

취업을 못 한다고 이야기한다. 눈을 낮추면 취업될 가능성이

커지긴 한다. 하지만 그 현실은 어떠한가. 2015년 중소기업

직원 평균 월급이 대기업의 60%가량이었다. 이정도 임금

격차는 조사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독일과 일본은 임금

격차가 각각 74%, 82% 내외로 우리나라보다 덜하다.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회피하는 이유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삶이 힘들어서다. 눈을 낮추라고 할 게 아니라

중소기업의 위치를 올려야 하는 게 급선무다. 우리나라

굴지의 보수 일간지가 사설로 “청년들에게 어떻게 중소기업

취업을 권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판국이다.

20.3%. 지난해 첫 직장을 잡은 청년들의 1/5가량이 1년

이하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기업은 정규직 일자리를

비용문제를 들먹이며 줄이고 있고 정부 역시 정규직이 과보호

받고 있다면서 정규직 기득권 해체를 주장한다. 정부와

기업이 전폭적으로 실시한 임금피크제 역시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정규직의 기득권이 없어지면 마치

청년의 일자리가 생길 것처럼 말했지만 청년의 일자리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 역시 임금피크제와

청년일자리의 연결고리가 약하다고 평가했다. 효과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청년고용 의무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 절반가량이 신규채용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버지

월급이 줄고, 자식 일자리가 생기는 게 아니라 아버지 월급은

줄고 자식 일자리는 여전히 없다. 생긴 일자리도 1년 이하

계약직이 20%다.

78%. 부모가 비정규직일 때 자녀도 비정규직인 경우가

78%에 달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노동자 사이의 신분으로

굳어졌는데, 이 신분이 자식에게까지 이어진다. 비정규직인

부모는 충분한 자본을 쌓지 못하고, 자본이 부족해서

자녀에게 교육자본, 사회자본을 투자하지 못한다. 투자받지

못한 자녀는 노동 시장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으며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수저계급론은 일부 가지지 못한, 약해빠진 청년들의 투정이

아니라 통계적으로 증명된 엄중한 현실이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청년들은 불안정한 노동으로

몰렸다. 청년들이 약해서 헬조선을 말하는 게 아니고, 아무

근거 없이 탈조선을 소리치는 것도 아니다. 정치권에서

청년 담론이 몇 년 전부터 유행했지만 청년들의 상황은

난민생산 국가 속 청년의 빈곤 구현모

청년의 주거와 노동미스핏츠

갈수록 악화됐다. 불안정 노동, 불안정한 비정규직들을

뜻하는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는 유럽의 단어였다.

금융위기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이

취한 노동시장 개혁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들이는 비용을 줄이면 그만큼 채용을 늘릴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에 의한 계획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유로존 청년들 중 절반 가량이 비정규직이다. 스페인 같은

경우, 청년 10명 중 7명이 비정규직이다. 장밋빛 전망은

전망으로만 끝났다. 2011년 유로 크라이시스의 해결책으로

꼽히던 노동시장 유연화를 동아시아의 한 국가가 도입했다.

노조 조직률이 10% 내외인 상황에서, 비정규직 627만

명 중 절반가량이 1년 미만 근속하는 세상에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겠다고 한다.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을

아무도 보호하지 않는다.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소리치고,

국회 역시 노동시장 관련 4대 입법에 관해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청년 노동자들은

난민의 위치에 준한다. 제도의 부재로 인한 박해를 청년층은

피할 수 없다. 불안정한 노동자로 남지 않고, 탈출하고

싶은 노동자로 변하고 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될 것이다.

프레카리아트가 아닌 노동 난민으로의 변화다.

청년들이 일자리의 꿈과 동시에 버린 또 한 가지의

꿈이 있다. 바로 ‘집’이다. ‘집에서 오손도손 사는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청년은 그리 많지 않다. 실버푸어, 에듀푸어

등 온갖 푸어들이 넘쳐나지만 그 시작은 하우스푸어였다.

2016년 하우스푸어의 주인공은 ‘큰 집을 사기 위해 빚을 내

투자했다가 빚을 못 갚는’ 중산층이 아니라 ‘하루 살고 하루

자기도 버거운’ 청년층이다.

2013년 민달팽이 유니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청년의 14.7%가 주거빈곤 상태에 놓여있었다. 주택법에

규정된 최저주거 기준 (1인당 14제곱미터)에 미달하는 주택,

지하방, 고시원 등에서 거주하는 청년이 전국에 140만 명

정도 있다. 필자가 『청년, 난민 되다』를 쓰면서 만나게 된

청년들 대부분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주거의 현실은 꽤나 암담했다. 벽간 소음이 너무

심해 잠을 잘 수 없던 사람,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치료를 받은 사람, 너무나 비싼 월세를 충당하기 위해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람 등 주거 난민의 현실은 통계치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단순히 안 좋은 집에 사는 게 청년주거 빈곤의 핵심은

절망적 상황의 청춘을 기민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의 카피는

이러했다. “행복은 자꾸만 비싸지는데… 우리도 꿈을 살 수

있을까? 청춘의 조난신호-마이제너레이션.”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10년 넘게 청년이 보내는

조난신호를 철저히 무시했다. 영화 <마션>에서는 화성에 홀로

던져진 우주비행사의 조난신호를 알아차리는 데도 2주가

걸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되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몹쓸

말로 모르핀이나 한 방 놓아주려고 했다. 그 사이 청년들은

알아버렸다. 우리는 꿈은커녕 현재도 살수가 없다.

조난신호가 닿지 않고 구조는 꿈도 꿀 수 없는 ‘헬조선’의

상황에서 선택지는 ‘탈조선’밖에 없다. 사회의 약속과 개인의

전망이 부재한 곳에서 생존 자체의 불안을 느끼며 탈출만이

답이라면, 그곳이 바로 난민수용소이다. 물론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안정적인 삶의 구조를

파괴해버리고 모두를 불안정한 삶의 경쟁으로 몰아놓을 때

일상은 난민주의화되어 버린다고 어떤 인류학자는 말한다.

하지만 한국은 경제 성장도 기적적인 속도로 했듯, 청년,

더 넓게는 일반 시민들을 난민으로 만드는 것도 경이로운

속도로 하고 있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고 한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이제 보니 깨져버린 샴페인병 위에서 발바닥에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아니다. 문제는 월세가 너무나 비싸다는 점이다. 2013년 기준

고시원의 평당 월세는 152,000원이었다. 타워팰리스의 평당

월세는 14만 8000원이었다. 고시원에서 매일 소음과 싸우며

잠을 이루는 친구들이 강남의 중심인 타워팰리스보다 높은

평당 월세를 내는 현실이다. 실제로 2012년 기준으로 소득의

30% 이상을 주거비로 쓰는 청년 1인 가구가 전체의 70%에

달했다. 절반 이상을 내는 경우도 23%가량이었다. 월급의

절반을 주거비로 내는, 월세로 내는 상황에서 청년들이 보다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을까. 청년들은 으리으리한 궁궐 같은,

아방궁 같은 집을 꿈꾸지 않는다. 아프면 삼각김밥 대신에

죽을 끓일 수 있고, 햇빛을 쬐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집을

꿈꾼다.

청년주거 빈곤은 청년 빈곤의 시작이다. 부모에게 주거비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생은 월세를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1달 내내 최저 시급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의

30%가량을 주거비에 쓴다. 많게는 절반가량을 쓴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생활이 망가진다. 일을 끝내고

오면 축 늘어지고, 공부할 시간에 잠을 자고 쉬게 된다. 자기

계발은커녕 하루하루 재충전하기도 벅차다. 이 상태에서

좋은 일자리를 갖기는 힘들다. 결국 부모에게 주거비를 지원

받을 수 있는 청년, 즉 수저가 있는 사람들만 그럴듯한 자기

계발과 취업을 도전할 수 있다. 정말 심플한 알고리즘이다.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필자가 만난 인터뷰이 모두가 공통적으로 짚은 문제점이다.

주거빈곤에 이은 취업 실패, 취업을 하더라도 불안정한 취업이

되는 이 상황. 노동 난민과 주거 난민이 공존하는 이 나라가

난민 국가가 아닐 수 있을까.

주거난민과 노동난민 등 난민 발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 시스템을 붕괴시킨다는 점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난민

유입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

한국도 여러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연금이다. 노동불안과 주거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은 자연스레 출산을 포기한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나라에서 국민연금이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다. 노후 대비가 취약한 한국의 노년층을

고려하면 국민연금의 붕괴는 노년 세대 전체의 붕괴다.

이를 막으려면 노동과 주거 두 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카이스트 김우창 교수는 해결책으로 국민연금을 제시했다.

국민연금으로 어떻게 국민연금의 불안을 줄일 수 있을까.

바로 청년에게 투자하는 방식이다. 505조 원가량 되는

국민연금의 1%가량이라도 인구에 투자하면, 국민연금의

금융투자수익률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김교수의

주장이다. 쉽게 말해, 국민연금을 청년에 투자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면 자연스러운 선순환이 된다는 뜻이다. 김우창

교수가 이 아이디어를 냈을 때가 2014년이다.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 역시 국민연금을 주택에

투자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구체적인 대책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기 위해 청년의 주택문제와 일자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인간은 노동과 주거로 삶을 건축한다. 노동으로 돈을

모아 자신의 가족을 꾸리고, 생계를 이어가고 미래를

꿈꾼다. 주거는 가족과 생계 그리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공간이다. 한국의 청년들은 노동 난민, 주거

난민으로 몰리고 있다.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제도 바깥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 청년난민들에게 그럴듯한

공간을 주자. 성실하게 노력하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번듯한 일자리가 아니어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고, 그

돈으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하자. 더이상

한국의 청년들이 헬조선의 청년난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강한 미래 세대로 남을 수 있게.

구현모 대안미디어 ‘미스핏츠’ 팀원으로 『청년, 난민 되다』를 위한 국내

취재를 맡았으며, 현재 <청춘씨:발아> 미디어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되풀이되는 사적 죽음

누구 하나 자신을 도와줄 사람 없는 고립무원의 사회적 난민

상태,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채무로 버텨내는 경제적 난민

상태만으로도 이 사회의 청년들은 충분히 난민의 조건을

갖춘 듯하다. 나는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다. 바로

죽음이다. 난민의 삶이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근접하게 있는

삶이라면, 우리 사회의 청년들도 정도는 다를지언정 굉장히

죽음과 근접한 삶을 살고 있다. 모두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매해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며 세계적으로도 13년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 안을 좀 더 살펴보면 노인과 청년의 자살이 굉장히

높으며 청년들의 사망원인으로 1위가 자살이다.

돌이켜 보니 그간 죽음이 참 흔해졌다. 자살로 떠난

사람들이 참 많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그동안의

안부를 묻던 중 대화는 어쩌다보니 누구누구가 몇 년 사이에

저 세상으로 떠났는지,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 어떤 방법으로

떠났는지로 흘렀다. 물론 대부분의 사인은 ‘우울증’이라고들

했다. 자살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고 한 게 120년

전인데, 여전히 사인은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천성이 학교 교사였던 동창은 몇 년을 계속 임용고시에서

차지량, 《개인적인 전시, 조각난 흔적들》 전시 전경, 2016차지량, 《개인적인 전시, 조각난 흔적들》 전시 전경, 2016

© 차

지량

© 차

지량

청년이 무너지고 있다. ‘나라의 기둥’, ‘미래 세대’라는

수식어와 밀접했던 청년들이 이젠 ‘단군 이래 가장 힘든

세대’, ‘N포세대’, ‘청년 난민’이란 수식어와 가까워졌다.

청년들이 살고 있는 고시원의 평당 월세는 152,000원으로

타워팰리스의 평당 월세보다 높다. 전국 청년의 15%가

주거 빈곤 상태에 놓여있다. 삶을 건축하는 것이 주거와

노동이라면, 주거의 축은 이미 무너진 상태다. 노동의 축

역시 위태롭다. 첫 직장을 가진 청년 5명 중 1명이 1년 이하

계약직이며, 청년 10명 중 1명은 공식적인 실업 상태다.

대학교에 다니는 청년만으로 한정지으면 4명 중 1명이

실업자라는 통계도 있다.

노동과 주거의 축이 무너진 청년에게 미래는 없다.

‘헬조선’에서 생존을 위해 ‘탈조선’ 하려는 청년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치인들은 좀 더 많이, 자주 청년을 호명했다.

청년 일자리를 위한 공약, 청년 국회의원을 위한 공약 등

‘청년을 위한’ 정책은 문자 그대로 넘쳐났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책 속에 진짜 청년은 없었다. 국회의원은 북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을 불렀지만, 결국 국회의원 부흥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동원된 관중으로서의 청년,

얼굴마담으로서의 청년, 호위대로서의 청년일 뿐이었다.

언론에 나온 청년 정치인들은 준비가 미비했고, 정치인들은

항상 선거철에만 대학가에 왔다. 국회로 간 이들은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청년의제를 이어가지 않았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갖 청년 기획이 있었지만

그들은 선거철에만 청년에게 관심을 주었다. 언론은 통계청이

쓴 보도자료의, 청년 실업률 속의 청년을 만나고 싶어 했다.

대자보를 쓰자, 대자보를 쓴 청년이 기특하다며 대학가에

왔지만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지, 어느 과정을 거쳤는지 묻지

않았다. 청년이 보는 사회는 어떠한지, 즐기는 문화생활은

무엇이고 어떠한지, 하다못해 요즘의 유행은 무엇인지 언론은

좇지 않았다.

청년이 직접 주장을 하고,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했다.

하다못해 화를 낼 공간이 필요했다. 대학가 대자보가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란란이 아니라, 또 다른 공간이

필요했다. 청춘은 아파야 한다며 청년의 고통이 합리화되는

현실도 싫었으며, 천 번을 흔들려야 성숙해진다는 식으로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더 이상 기존 사회의 득을 보고 있는,

기성세대가 쓰고 버리는 청년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당당하게

대화하고 요구할 수 있는 청년이길 바랐다.

그렇게 모든 ‘Fit하지 않은(mis-fits)’ 목소리를 담으려

했다. 기성세대가 바라보기에 적합하지 않은, 그들이 보기에

기존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Fit’하지 않은 청년의 목소리를

모아야 했다. 어른들이 원하는 ‘수도권-대기업-이성애’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청년이 보기에 틀린 건 틀리다고,

그른 건 그르다고 말할 수 있어야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목소리를 내고, 청년들을

연결시켜 줄 새로운 공간. 청년이 더 이상 언론사 기사의

인터뷰이가 아니라 통계 속에 있는 숫자가 아니라 건강한

주체로서 존재하길 바랐다.

미스핏츠는 이 판을 만들고 싶었다. 여러 가지 소재로

청년들을 이끌어 내고,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진 청년을

연결시켜 그들이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내게끔 하고 싶었다.

일단 그들이 마음껏 글을 쓸 수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이어서 청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취재하고

싶었다. 청년의제를 청년이 아닌 기성언론과 기성조직이

선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하고 싶었다.

판을 만들자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원양어선을

탄 청년, 자기소개서 99개를 쓴 청년, 정신과 상담을 받은

청년 등, 소위 사회에서 보는 ‘패배자’들이 모였다. 언론 지면

상의 한 줄짜리 인터뷰 혹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 청년의 이야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 모인

청년들에게 새로운 의제를 던지고 싶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현실을 알고, 그래야만 제대로 화라도 낼 수 있다. 첫

문제는 바로 청년 주거.

그렇게 청년 주거 취재 프로젝트인 <청춘의 집>은

시작됐다. 청년 세대가 주거 난민으로 몰리는 시대에 청년의

주거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싶었다. 전국 4년제 대학교의

기숙사 수용률이 평균 18%에 불과하다. 기숙사에 들어간

학생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방에서 배달음식을 먹었다고

벌점을 받고, 늦게 들어왔다고 벌점을 받는다. 대학원에서

주관하는 여러 심리 실험 테스트로 돈을 벌고, 한여름에 강남

한복판에서 인형탈을 쓰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과외를 해야

겨우 1달 월세를 번다. 거기서 월세를 내고, 통신비와 교통비를

내면 남는 게 없다. <청춘의 집> 프로젝트에서 만난 모든

청년들의 이야기였다.

앞으로 2년은 우리나라와 청년들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올해 4월 총선, 내년 12월 대선은

노동 난민과 주거 난민으로 몰린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순간이다. 더 이상 청년과 청년 의제가 일회용으로

낭비되지 않도록 먼저 판을 이끌기 위해 정책입안자와

청년을 연결시켜야만 한다. 이 관점에서 <미스핏츠

청년포럼: 에이지 오브 좌파기득권>을 진행했고, 대선까지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다. 300명의 정책입안자는 정책의

수혜자인 청년을 만나지 않았고, 청년 역시 인터넷이란

공간에서만 정책입안자를 비판해왔다. 그 판을 바꿔야 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청년들을 공론장으로 끌고 오고,

정책입안자를 데려와 둘의 토론을 붙여야 한다. 공론장에서

나온 여러 이야기가 정책에 입안되고, 청년들이 영향을 받고

피드백을 주는 과정, 문자 그대로 선순환이다.

남은 2년이 선순환의 2년이 될지, 또다시 소모의 기간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청년 정책이

나올 거라는 점은 확실하다. 복지국가 담론과 유사하다.

지난 2010년 떠오른 복지국가 담론 덕분에 우리는 북유럽

복지국가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과정을 생략하고 초고속으로

복지 제도를 정비했다. 무상급식은 시작한 지 3~4년 만에

전국으로 확대됐다. 최근 논란이 된 무상보육 역시 2~3년

만에 전국 단위로 활성화됐다. 7년 만에 기초 노령연금은

2배 가량 규모가 커졌다. 비록 정책의 지속가능성은 여전히

논란이지만, 복지정책이 급속도로 정비된 것은 확실하다.

총선과 대선에 떠오른 청년 담론도 빠른 시간 안에 정책으로

구현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언론과 정부 그리고 정당과

시민단체는 어떤 청년층의 옆에 서 있어야 할까.

사실, 청년이 다 같은 청년이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강남 타워팰리스에 사는 청년은 같은 연령대에

있지만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 집이 없는 나로서는 집값이

떨어지든말든 큰 상황이 없겠지만, 타워팰리스에 사는 청년은

집값이 떨어지면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청년과 대학을 다니는 내 이해관계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문과 청년과 이공계 청년의 이해관계마저

다르다. 전기전자전파공학부, 화학공학과, 컴퓨터공학과를

나온 청년은 불황이 무엇인지도 느끼지 못할 만큼 빠르게

취업을 한다. 이렇듯 단순히 나이변수만으로 이해관계를

뭉뚱그리는 것은 좋은 해법이 아니다.

지역변수 역시 마찬가지다. 집값과 관련된 부동산 논쟁은

사실 수도권 청년만 관심을 가지는 이슈다. 지방에서 가장

비싼 고급 아파트가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와 가격이 비슷한

것이 현실이다. 몇 년 전부터 주택시장의 큰 문제였던 ‘전세난’

역시 수도권의 이야기다. 당장 2016년 상반기 부동산 전망을

보면, 지방 5대 광역시 경우, 입주물량이 작년에 비해 늘어

전세난이 나아질 모양새다. 하지만 수도권인 경기도는 오히려

작년에 비해 입주물량이 줄어들어 전세난이 심해질 전망이다.

“청년이 살 집이 없다”라는 명제도 결국 수도권 위주의

담론이다. 이처럼 청년층의 이해관계를 단순히 묶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어디에 있을까. 청년층의 이해관계가

공통 전선을 이루는 전장은 바로 노동이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20~29세 전후로 직업을 얻는데, 이 직업의 형태는

그 시대의 경제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정부의 정책과 시장

상황 등에 의해 규정된다. 물론 40, 50대 등 정년퇴직

전까지 많은 이들이 노동에 의해 삶이 규정된다. 하지만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면, 1순위로 처리해야 할 문제는

청년노동이다. 그렇다면 청년노동의 중심 수혜자는 누가

되어야 할까.

모든 답은 비정규직 청년에 있다. 현재 한국 사회가

맞이한 가장 큰 문제는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다. 같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정규직으로, 누구는

비정규직으로 나뉜다. 문제는 이 노동 구조가 일종의

신분제처럼 작동한다는 점이다. 미국식 노동시장이라면

고용이 불안한 대신 봉급이라도 많이 받아야 하는데, 한국의

비정규직은 월급도 적게 받는다. 반대로 정규직은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고, 월급 역시 낮지 않다. 결국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예전 양반사회처럼 신분 계급으로 작동한다.

같은 일을 하지만 기간제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일은

부지기수다. 세월호에서 학생을 끝까지 구조한 선생님이지만,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순직 인정을 받지 못했다. 상여금과

보상 그리고 복지 같은 제도 뿐만이 아니다. 차별은 곳곳에

숨어져 있어, 송곳처럼 노동자들을 찌른다.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맞고, 욕설을 당해도 구제받지 못한다.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받는 차별이다.

문제는 이 차별이 점점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사회생활 첫 직장을 비정규직으로 시작한다. ‘좋은

일자리’라는 수식어를 받는 정규직은 하늘에 별따기다.

정부가 작년 7월에 시행한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을

통해 취업한 청년 중 4명이 비정규직이다. 150만 원보다 적은

월급을 받는 청년들도 10명 중 4명에 달했다. 좀 더 표본을

크게 해보자.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으로

신규 채용된 청년(15~29세) 중 64%가량이 비정규직이었다.

이 수치는 2007년에 비해 무려 10%P나 오른 값이다.

2015년 12월에 발표한 청년실업률은 9.2%에 달했다. 통계를

작성한 이후 최고치 수준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기껏 취업을 해봐야 비정규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말, 최악이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한국 노동연구원이 발표한 ‘한국노동패널조사에서 나타난

비정규직 현황과 추세’에 따르면 비정규직으로 청년을 채용해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기업은 고작 11.5%였다. 비정규직

신분은 자식에게도 세습된다. 성공회대 대학원 김연아

박사에 따르면, 부모가 비정규직일 때 자녀가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확률은 77.8%다. 부모가 정규직일

경우보다 10%P 높다. 즉, 부모가 비정규직이면 자녀가

비정규직일 확률이 높은 셈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간극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자녀에게마저 세습되니 21세기

신분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대기업 정규직을 가진다고 해서 청년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2015년 두산인프라코어는 신규 채용한

청년들에게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연봉도 받지 못한

청년들에게 퇴직부터 강요한 셈이다. 정부의 노동개혁 관련

4대 입법이 성공적으로 처리되면, 가뜩이나 쉬운 해고가 더

쉬워진다고 한다. 이공계를 나와도, 문과를 나와도 50대에

잘리고 치킨집을 차려야 한다는 씁쓸한 유머에 모두 공감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노동시장에 다수는 중소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차지하고 있다. 사용자 유형으로 보면 전체 노동자

중 90%가량이 중소기업에 속해 있다. 정규직보단 비정규직

채용이 더 늘어나고 있다. 중소기업 노동자는 대기업에

비해 60%밖에 되지 않는 임금을 받는다. 대기업이 하청을

내릴수록 임금이 깎이고 그중에서도 비정규직이 월급을

적게 받는다. 기아자동차 광주 공장 정규직 노동자 평균

연봉이 1억일 때 광주 공장 하청 노동자는 연봉 5,000만

원을 받는다. 광주 공장 1차 협력사 노동자의 연봉이 4,700만

원이고, 1차 협력사 사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봉은

3,000만 원이다. 결과적으로, 2차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는 2,000만 원을 받는다. 고통받는 다수를 구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

청년의 첫 일자리가 비정규직으로 굳어지는 시대다.

가장 좋은 해답은 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답은 한 가지다.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혹은 성 안의 노동자와 성 바깥 노동자로

구분지어진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를 해소해야만 청년노동

문제도 해결된다. 해결책은 각기 다양하지만, 정부 관점에서는

‘증세'가 답이 아닐까 싶다. 현재 4.5%에 불과한 기업의

사회보험료 분담비율을 높여야 한다. 이영 현 교육부 차관이

교수 시절 발표한 ‘국제 비교를 통해 본 조세정책 발전방향’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의 사회보험료 부담비율은 GDP의

2.6%에 불과하다. OECD 평균인 5.2%에 절반 수준이다.

기업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세금을 더내야 한다. 2014년

서민증세로 논란을 빚은 연말정산이 실은 부자증세였다는

의견들이 많다. 노동계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증세 담론을

꺼내서 청년 고용 등 필요한 부분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정의당 비례대표 경선을 진행 중인 조성주 후보 역시

지난해 6월 이와 같은 의견을 냈다. 조성주 후보는 당시

노동자가 부담하는 현행 0.65% 고용보험료 비율을 1%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월 300만 원 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가 한 달에 8천 원가량 더 내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증세를 해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투자해야 한다. 비정규직은 국민연금도 가입하기 벅찬 것이

현실이다. 증세를 바탕으로 고용보험 가입률을 높이고,

실업급여를 높여 청년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다수의 청년이 비정규직으로

노동을 시작하는 현실이기에, 이런 정책이 궁극적으로

청년을 위한 정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야기를 청년층

스스로가 던져서 이슈를 이끌고, 정책으로 만들어야 한다.

복지국가 담론은 2012년 총선과 2012년 대선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다. 그 결과 우리는 많은 복지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다음 담론은 청년노동으로 이끌어야 한다. 사회의 미래인

청년이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면, 나라의 근간이 무너진다.

담론의 선순환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순환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의제를 끌어야 한다.

선순환의 판을 깔기 위해 미스핏츠는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Fit하지 않은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 2014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 장 티롤Jean Tirole의 논문에 따르면, 앞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네트워크 경제의 논리에 따라 큰 기업이

더욱 커지는 속성을 가진다. 큰 기업이 더욱 커지고, 작은

기업은 묻힐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 사회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본 ‘각자의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는

여전히 교과서 속 이야기다. 한국 사회의 기성세대가 원하는

수도권 대기업 정규직에 속하지 않는 청년들은 더욱 고통

받을 확률이 높다. ‘Fit해지기 위해’ 지금의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감수하는 시대는 바뀌어야 한다. 이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사회가 좀 더 다원화되고 자유로워지고

건강해지기 위해서라도 미스핏츠는 좀 더 ‘Fit하지 않을’

예정이다. 자신이 ‘Fit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분들은 항상

환영이다.

미스핏츠 2014년 8월 20대들이 모여 직접 모든 ‘Fit하지 않은 목소리’를

담는 독립 언론. 기성세대가 보기에 적합하지 않은, 그들이 보기에 기존

사회에 적합하지 [Fit하지] 않은 청년들의 목소리를 모은다. 청년이 더이상

언론사 기사의 인터뷰이나 통계 속에 있는 숫자가 아니라, 건강한 주체로서

존재하고자 한다. www.misfits.kr

낙방한 후 고층 건물에 올랐다. 한 후배는 인터넷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산에서 목을

메었다고 한다. 성정체성으로 우울했던 어떤 이도 세상을 혼자

떠났다. 전 애인의 스토킹으로 고생하던 친구의 동생도 그렇게

떠났다.

몇 년 전 나는 한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그 친구의 친구가

죽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온라인 행적을 찾아봐 달라고 한다.

본의 아니게 사이버 상에서 신상을 털어야 했던 그 때, 그가

한 자살 카페에 가입한 것을 찾아냈고, 얼마나 자살을 하고

싶은지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야하는 등업 (커뮤니티 내 회원

등급 업그레이드)을 통과하여 동반 자살할 동료들을 모아서

지방의 한 도시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카페의 사람들이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지인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의 황망함이 아주 오래갔지만, 지속적으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내 또래 사람들의 자살 소식에 어느덧

마음에 굳은살이 생겨버린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그들을

우울하고 삶의 극단으로 내몰았는지는 생략된 채, 대부분의

죽음은 우울이라는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만 귀결되어

버린다.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 하나 즈음 있는 거라고 했지만,

그 상처가 일련의 자살들 때문에 죽음에 대한 굳은살이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는 못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굉장히 위태로우며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까이 있는 삶을 난민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난민이 된 청년들은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거나 자기 삶을 스스로 끊으면서 이 사회의 재생산을

거부하고 있다. 어떤 이는 왜 화염병을 던지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왜 투표를 하지 않느냐고 한다. 시민은

미처 되지 못했지만 확고하게 ‘국민’이었던, 하지만 ‘난민’은

아니었던 이들이 난민이 된 지금의 청년들에게 던지는

질타이다. 어디에다 화염병을 던져야 할지, 어디에다 투표해야

이 상황이 조금이라고 개선될지 전혀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투표권이나 있는지조차 의심이 드는 상태인데 말이다.

화염병과 투표 대신 이들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혹은 이 난민

수용소의 조용한 ‘사적인’ 죽음인 것 같은데 말이다.

이규호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현재는 한국에 체류하면서 전 세계적 의료산업과 청년노동이라는 주제로

현지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런저런 학교들에서 수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Page 4: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6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한국에서는 덜 느껴지겠지만,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계속

느끼는 것은, 요즘 ‘난민’이라는 단어가 전 사회에 하나의

핵심어가 됐다는 것이다. 일면으로는 다소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비록 유럽을 향한 작년의 피난민 행렬은 역사적으로

그 전례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긴 했지만, 유럽연합 전체의

인구에 비해서 피난민 수가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2015년에 피난민 지위를 유럽연합에 신청한 비非유럽연합

출신들은 약 120만 명에 달했지만, 이는 유럽연합의 총인구

(약 5억 명)의 0.2%에 불과하다. 즉, 신청자 모두에게 설령

체류 허가를 주어도 유럽연합의 인구 구성은 본질상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일면으로는, 숫자 그 자체를 넘어서 이번의

‘피난민 위기’는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어떤 심각한 약점들을

노출했음이 틀림없다. 결국 이런 ‘약점의 노출’이야말로

숫자와 비교해 훨씬 더 과민한 이번 사태에 대한 유럽 주류의

반응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세계화’라는 새로운 자본

확대재생산의 방식과 ‘국경’이라는 자본 축적의 전제조건의

충돌이라고 본다. ‘세계화’는 일단 유럽 재벌들도 꽤나

살찌우는 각종 정보기술의 확산을 의미한다. 유럽의

이동통신업체들부터 앞장서서 중동을 포함한 여러 세계체제

주변부 지역에 이동통신망을 깔아놓지 않았는가? 한데,

이렇게 해서 휴대폰도 인터넷도 집집마다 보급되어 주변부

주민들이 핵심부의 임금·생활수준을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되고

그 핵심부에 직접 들어가서 핵심부 사회의 가장자리에서라도

뿌리를 내려보려는 욕구를 키우게 된다. 사회적 임금, 즉

사회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 (의료, 교육, 안전, 연금 등)까지

포함해 계산한다면, 유럽 안의 주변인은 어쩌면 중동의

중소사업가 이상의 생활수준을 영위한다고 볼 수 있기에,

따져보면 그렇게 불합리한 욕구도 전혀 아니다. 전 세계

자원의 이용에 의해 만들어진 유럽의 부를, 유럽인만이

독점해야 한다는 자연법칙이라도 있는가? 이번 피난민

행렬은 휴대폰과 페이스북, 각종 메신저 없이는 아마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을 터인데, 결국 핵심부의 주된 상품이

된 정보기술이 핵심부로의 월경자越境者들의 대대적 유입을

가져다주었던 셈이다.

한데 주변부 주민들에게 각종 정보통신 상품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정보 상품을 파는 핵심부 자본가들은,

전 세계 자원의 이용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유럽의

부를 기꺼이 세계인의 공공재로 만들 의향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월경 그 자체를 반가워할 리는 없다.

핵심부에서는 물론 저임금 육체노동에 임할 외부 인력이야

필요하지만 유럽 같은 경우에는 1990년대에 동유럽을

경제식민화하고 나서는 동유럽으로부터의 인력유입만으로도

충분히 충당된다. 동유럽인에 비해 서구 주류에 대한

각종 반발의 소지가 훨씬 더 많을 중동계 출신들은, 서구

지배자에게 그다지 ‘무탈하고 충실한 노동자 후보군’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중동과 유럽의 임금 격차는 여전히

적어도 5~6배 정도인 만큼 중동 인력들을 바로 중동에서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즉 중동에서의 단순조립제조업 (특히

방직업 등)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유럽 자본으로서는

이윤창출에 가장 적합하다. 즉 한 마디로, 중동인이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월경의 꿈을 심어줄 정보기술을 파는

것도 자본의 이윤전략이고, 그런 월경을 애써 막는 것도

동시에 이윤전략이다. 이러한 이윤창출 전략의 이중성은,

‘세계화’ 시대 지배자들이 이번 난민 사태에 보인 매우 과도한

신경질적 반응을 본질상 설명해준다고 본다.

피난민들이 유럽을 ‘위협’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극치에

가깝다. 위에서 말했듯이 ‘위협’할 만한 숫자도 전혀 아니고,

‘위협’이 될 확률은 없다. 비록 유럽과 그 주변부 사이의

격차는 이제 정보기술 덕택에 모두에게 확인됐다지만, 선뜻

살던 터를 버리고 차별과 배제를 받을 곳이라고 뻔히 알 수

있는 유럽을 향해 길을 나설 사람들은 늘 그 소속 사회에서는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시리아 등 커다란 전장이 된

나라의 경우는 예외일 수 있지만 말이다. ‘피난민 범죄 위협’

등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민자들이 아무리 늘어나도

유럽의 최근 추세는 경향적으로 범죄율이 저하되고 있다.

예컨대 자동차 등에 대한 도난 건수는 2007년 이후에 약

40%나 떨어졌다. 그만큼 감시카메라 등의 새로운 대민 감시

수단들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효율성’이

사생활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부정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부터

앞서는 판국이다. 피난민들이 최근 비교적 더 많이 유입돼도

유럽 주요국 범죄율 저하 경향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피난민들을 ‘위협’으로 개념화하는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주류

보수 매체들의 지면을 도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이해로는, 피난민 수의 격증이라는 현실을 접한

유럽 지배층은, 이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그 고유의 몇

가지 ‘문제’들을 풀어보려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중의

하나는 백인 저임금 노동자층의 잠재적인 정치적 ‘불온성’의

문제다. 유럽 사회에서는 고숙련, 고임금 백인 노동자들이

전통적으로 사민당 류의 온건좌파에 투표하는데, 이미

신자유주의에 거의 그대로 투항한 그 온건좌파는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 온건좌파는

급진화돼봐야 고전적인 개혁주의라고 할 영국 노동당

새 당수 코빈의 노선 정도가 될 것이다. 문제는 백인계의

저임금·저숙련·불안 노동자들이다. 소비사회에 완벽하게

편입될 수 없는 –예컨대 은행 융자 받아 자기 집 마련하는

등의 일을 할 위치에 있지 않은–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더욱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적 정당을 지지할 확률도 있다.

특히 그들 중에서는 요즘 취직이 불가능한, 그러나 동시에

정치의식이 강한 젊은 대졸들이 많아 지배층으로서는 –특히

청년실업이 많은 프랑스나 스웨덴 등지에서는– 충분히

걱정할 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한데 이번 피난민 수의 폭증과

각종 매체의 악질적인 –사실상 인종주의적– 피난민 관련

악선전으로 이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된 셈이 됐다. 젊은

대졸들은 그래도 좌파를 지지하는 경우들은 여전히 많지만

좀 더 나이가 많고 숙련도가 높지 못하고 비교적 불안한

상황에 놓인 백인 노동자 –특히 남성– 들은, 피난민들을 ‘취직

경쟁에서의 적’이자 ‘치안 위험 요인’으로 오인하여 인제 여러

나라에서 극우포퓰리즘의 지지자가 됐다. 신新파쇼라고

할만한 프랑스의 ‘국민전선’(프랑스의 극우 민족주의 정당)은

‘새로운 노동자의 당’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가 된 것이다. 즉,

유럽 지배자들이 유입되는 무산자와 국내 토박이 무산자들을

너무나 성공적으로 이간질시켜 서로의 적으로 돌린 셈이다.

이런 분리통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각종 파국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이 시대에 지배체제를 공고화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할

셈이다.

왜 이런 이간정책이 상당 부분 성공하는가? 유럽 좌파의

대대적인 실패의 덕을 본 게 아닌가, 싶다. 전후 체제 속의

유럽 좌파는 전통적으로 조직노동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사회개혁세력이었다. 즉, 체제 그 자체를 받아들이면서

공공성의 제고, 공공영역 확충, 복지 증진 정도의 과제를

담지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한데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 개혁주의 노선은 의미를 잃었다. 공공성의 원칙 그

자체는 가면 갈수록 퇴보에 퇴보를 거듭하고 있으며, 개혁

좌파에게 남은 역할이란 그나마 복지 후퇴라도 막아주고 노동

관련 법 개악에 맞서는, 극히 제한적이며 수세적인 역할일

뿐이다. 그런 역할을 수행하면서 큰 틀에서는 신자유주의에

사실상 백기투항한 좌파는, 일부 조직노동의 지지야 여전히

받아도 미조직 불안 노동자나 젊은 시대의 노동예비군에게

무용지물이 됐다. 일자리가 불안하거나 아예 취직이 불가능한

사람에게는 복지증진 등은 고맙긴 해도 다소 이차적인

문제이고 ‘직장’부터 일차적 문제가 아닌가? 하지만 일자리

창출을 보다 공격적으로 하자면 자본의 해외유출을 철저히

막는 등 자본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거나 증세를

감행하여 공공부문을 확장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주류 좌파세력은 이미 신자유주의 체제에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렸다. 결국 그들이 불안 노동자들에게 그 어떤 희망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도입에 가장

피해가 막심한 백인 불안 노동자의 상당 부분은 ‘당신의

일자리를 바로 이 외국인이 가져갔다. 외국인을 배척하여

우리끼리 일자리를 나누어 가지자!’는 극우파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주류 좌파의 상대적

우경화는 상당수 노동자들의 극단적 극우화를 부추긴 셈이다.

주류 좌파는, 본국 불안 노동자들의 상당 부분이 이미

사실상 자신들의 사회 안에서의 ‘내부적 난민’이 됐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결과, 난민들을 악마화시켜 내부 난민이라고

할 불안 노동 인구와 외부로부터의 난민 사이를 이간질시킨

극우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왔다. 제대로 대응하자면,

좌파의 현실인식부터 정확해져야 한다. 난민이라고 할 불안

인구가 날로 증가하는 이 사회를 자본주의 틀 안에서는 더

이상 ‘개혁’ 시킬 수 없다는 점을, 좌파가 깨달아야 한다.

단순한 복지예산 증액으로는, 정규직이 돼야 할 모든

사람에게는 정규직을 마련해줄 수 없다. 마련해주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룰까지 과감히 깨 가면서 사회가

자본을 통제하는 단계까지 가야 할 것이다. 개혁이 아닌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부 난민이라고 할 불안

인구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외부 난민에 대해서도

보다 정의롭고 개방적인 수용정책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가 이와 같은 급진화의 길로 가지 않을 경우,

유럽이 다시 한 번 내부결집을 타자 배제를 통해서 이루었던

1930년대와 같은 사태로 떨어질 확률도 높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선택을, 우리가 또다시 맞이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박노자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구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1973년에

출생하여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불교사, 민족주의, 공산주의 운동사 등에 대해 연구하고 저술한다.

급변하는현실은우리를어디로데려가려하는가-안성석

# 17

안성석은 급변하는 현실에 대해 집중한다. 인터넷 이후의 확장된 감각을 기반으로

큰 흐름에서의 역사적 현재와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현재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지금 현재를 있게 한 지난 역사에 대해서 조금 더 학구적인

태도로 조사하고, 나의 세대, 나의 성장배경,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계획이다. sungseokahn.com

난민,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어박노자

‘표현의 자유’ 미명하에 이슬람 혐오증을 이용하면서 이슬람계 이민자들을 공포 상태에 빠뜨려 관리하려는 유럽연합 권력자들을 풍자한 만화.

출처: hshidayat.wordpress.com, “Western Prejudice and Double Standards against Islam and Muslims Threaten World Peace and Harmony”

<사적현재016>, 151x190cm, c-print,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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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성 그 너머>, 단채널 비디오, 11분 44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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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량, <분양중인 ‘메세나폴리스’에 몰래 침입하던 날>(개인적인 사진), 2012 차지량, <태어난 곳에서 하룻밤>(개인적인 사진), 2012

차지량, <한국을 떠나서 살 수 있을까>(개인적인 사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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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된 현판과 광장

경찰, 의경, 자동차 등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한다. 사진을

찍어 이어붙인 이 영상에서는 현실 광화문을 탈각시키고

부유하는 것들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급하는 곳이 광화문 현판과 뒷산이다. 3년 6개월의

복원공사를 끝내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광화문은 석 달이

채 안되어 현판에 균열이 생겼다. 그 해 말 완공예정이었던

복원사업은 G20과 광복절 같은 큰 행사에 의해 앞당겨졌던

것이다. 이 모든 사회적 현상들이 이 장소를 새롭게 의미화

하였다. 1인칭 시점으로 광장을 누비며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실존적 드라마의 현장감을 나타내고 싶다. 일련의 이러한

변화하는 역사 속 공간들이 나의 감각을 자극하며, 그것들은

새로운 미디어 체험와 함께 잠재성의 공간을 나의 의식으로

까지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기회를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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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중인 광화문

2008년 처음 마주친 광화문. 군 전역 후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여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국동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며

여행객처럼 서울을 돌아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보았던 낯선

서울의 모습을 발견했다. 여러 장소와 마찬가지로 광화문 또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콘크리트 광화문을 철거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광화문이 콘크리트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가림막에는 강익중 작가의 작품이 광화문 전면에

있었다.

<무한성 그 너머>에 등장하는 광화문은 2010~2011년의

모습. 새롭게 지어진 광화문을 다시 찾았다 (그새 광화문에는

이상한 것들이 많이 생겨났다.) 완공된 지 단 3개월 만에

광화문 현판이 균열됐다. 이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상한

풍경의 광화문 일대를 2년 동안 작은 카메라로 일일이 찍었다

(당시 나는 사고로 인해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없었고 답답한

마음에 광화문을 보고 싶어 작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녔다).

이후 찍어놓은 하나하나의 사진을 가상공간에 하나씩 배치한

후 카메라 워킹을 통해서 영상으로 제작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분수, 분수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분수로부터

크게 한발 짝 떨어져 있는 어른들, 그 뒤 높게 세워진 이순신

동상, 광장 잔디 위 ‘잔디보호’ 글씨와 잔디를 밟지 않는 사람들,

황금색 세종대왕상, 곳곳에 돌아다니는 형광색 사람들,

균열된 현판. 긴장감이 맴도는 장소에서의 평화로운 사람들과

각종 재현행사 등 이질적이고도 조화로운 요소들이 가득한

이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나하나씩 기록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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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라는 낯선 장소의 탐구, 야외 영사 테스트와 의미 연구,

순수한 호기심에서의 과거로의 여행, 시각의 몽타주 등을

실천해보며 사진 탐구와 현실 기록에 중점을 두고 작업했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이 만들어지기 이전 모습들, 바닥의

콘크리트를 한 꺼풀 벗겨낸 상태, 변함없는 북악산의 위치와

형태, 흑백사진 속 흙먼지가 날리는 바닥, 100m 옮겨진

해태상의 위치, 콘크리트 광화문의 공사 현장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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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2009

2011

2012

2013

Page 5: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98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미술계와 디자인계의 세대교체

임근준 현대미술계에서 지난 2014~2015년은

오랜만의 세대교체가 가시화되고 또 구체화된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화제가 된 전시

《서울 바벨》(서울시립미술관, 2016.1.29~4.5)은

소위 신생공간/콜렉티브의 시대를 총괄하는

기획은 아니었다고 해도, 한 시즌을 정리하는

상징적 시공의 성격을 띠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게 때마침 그래픽 디자인계의 세대변환과도

맞물려서, 일민미술관에서는 소규모 스튜디오 중심의

그래픽 디자인 활동을 메타-결산하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2016.3.25~5.29) 전이

열렸습니다. 디자이너 최성민과 김형진이 기획한

이 전시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자, 다음 세대 나오세요’ 하며 멍석을 깔아주는

셈인데, 남의 나라에서도 이런 전시는 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게 책임감 넘치는 전시랄까요. 아무튼 저는

올해 상반기가 2018, 2020, 2022년 마의 삼각지를

향해 행군할 채비를 갖춰야 하는 짧은 이행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권시우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에서

임근준 씨는 어느덧 ‘구세대’로 분류되는 자신과

신진 디자이너를 매칭한 뒤, 나름의 방향성과

레이아웃을 전제로 작업을 전개한 것 같습니다.

반면 《서울 바벨》은 신생공간이나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참여했지만, 포괄적인 구심점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체로 각자도생 형식의 뷰view가

펼쳐졌습니다. 이 두 전시 사이에 결절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임근준 결이 완연히 다르죠. 디자인 전공자는

모이면 스머프 마을 분위기가 납니다. 남에게 에고ego

광선을 쏘지 않아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90년대생이 두각을 나타낼 차례라는 걸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건 방백 같기도

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어설프게 따라 하지 마.

이들에게 허락됐던 소규모 스튜디오 자리는 포화

상태고 주역 몇몇은 중형 스튜디오로 이행 중인데,

미안하게도 다음 세대를 위한 자리를 창출할 방법은

아직 모르겠어’라는 고백 말이죠.

반면, 현대미술계에서 구세대가 신세대에게

전시로 멍석을 깔아주는 장면은 상상이 어렵죠.

세대에 상관없이 서로를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확연하니까요. 작가에게 전시는 본업이고,

화이트큐브는 실재계가 되지만, 디자이너에게 전시는

부업이고, 화이트큐브는 가상계가 됩니다. 여러모로

힘의 작동 방식이 다르죠. 아무튼, 《서울 바벨》에서도

구세대 몫의 이야기는 아예 빠졌고, 2014~2015년에

등장한 신생공간/콜렉티브 가운데서도 덜 주목 받은

곳들을 모아놓은 거잖아요? 신은진 큐레이터가

굉장히 애를 쓰긴 했지만, 개막 당시엔 이런 전시를

최선의 형태라고 호평하긴 어려웠죠. 하지만, 전시

기간 내내 다양한 기획들이 펼쳐졌고, 전시는 서서히

성장하며 의도 이상의 모양새로 자라났습니다.

개막 당일과 중간, 폐막의 모습이 실제로 달랐고, 또

독해하는 입장에서도 추동된 혹은 견인된 자세로

전시를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미술계

구세대들의 노골적인 비판과 악의적 비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큐레이터를 비롯한 전시의 주역들은 어떤

다층적 임시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제 입장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권시우 《서울 바벨》에서 유추할 수 있듯 최근

신생공간 범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일별해보면

역시나 ‘구세대’와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것 같고,

전개한 작업들의 역학이나 방법론 또한 그 이전까지

축적됐던 미술사적 레퍼런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지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해주실 수 있나요?

임근준 글쎄요, 여태껏 한국 현대미술계의

본진이라고 간주돼온 이들이 대체로 두 세대의

중첩이라고 봅니다. 제1진이,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두각을 나타낸 최정화와 이불 작가 세대죠.

90년대 중반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정책에 힘입어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생기고, 광주비엔날레가

출범하고, 또 《아시아 산보》와 같은 범아시아를

전제로 한 기획전이 이어지면서 전에 없던 뜻밖의

혜택을 입었던 행운아들이 한국의 포스트 올림픽

세대 미술가들이었습니다. 제2진은, 1997년 12월

외환위기로 국가 경제가 망가지면서, 98년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유학 자유화 세대죠. 이영철 선생의

큐레이팅이 빛을 발했던 《도시와 영상-의식주》

전에 참여했던 김소라, 정수진, 함경아, 함양아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귀국과 서울 데뷔 이후,

쌈지스페이스가 문을 열고 대안공간의 시대가 열렸죠.

하지만, 선순환의 긍정적 에너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70년대 중후반생 작가들은 새로이 형성된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줄을 서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습니다. 대안공간이나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은 점차 커리어 평가의 기준이 됐고,

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구습처럼 작동했습니다.

게다가 방법론에서도 70년대 중후반생 작가들은 앞

세대의 것을 반복해 아류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한데, 그들이 두각을 나타내야 했던 시기에 미술

시장의 호황이 겹치면서 실험보다는 상업적 가치가

더 중시됐죠. 그런데, 1978/79년생 몇몇이 실패를

단절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설치미술의 방만한 유행과 뉴미디어 아트에 대한

물신적 기대가 끝장났죠.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미술관의 초대형화에 맞춰 무작정 작업

규모를 키우던 몹쓸 경쟁에도 제동이 걸렸습니다.

1978/79~88/89년생 작가들은 작업 규모를

휴먼스케일에 맞춰 축소했죠.

앞선 세대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도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한국 당대 미술사가 제대로 작성된 바가 없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도 한국의 90년대 현대미술을

제시하고 해설하는 상설전을 볼 수가 없어요. 지금의

젊은 세대는 최정화, 박모, 이불 등을 말로만 들었지,

주요 작업을 직접 본 적은 별로 없어요. 미술이론,

미술사를 전공한 이들도, ‘정전 형태의 역사를

작성하는 일은 나쁜 것’이라고 잘못 배웠기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서사화한 형태의

역사적 고찰이 부재하니, 후속 세대의 입장에선

구세대와 본인들 사이의 거리를 파악하고, 그를 통해

작업 방법론을 정교하게 대차대조하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교육이죠. 석사 과정을

거친 사람 가운데 1975년 이후 서양 현대미술계에서

전개된 방법론적 변환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을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못 봤습니다.

자꾸 작가들을 유형별로 묶어서 계보화하려 듭니다.

작업의 내적 질서에 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에피소드나 떠벌입니다. 그래서 보면, 단절이 있긴

하지만… 1978/79~88/89년생 작가들은 구세대, 즉

구 386세대의 작가들을 꽤 닮기도 했습니다.

권시우 386세대와의 연속선상에 있는 신생작가를

굳이 거론한다고 할 때, 즉각 연상되는 작가는

아무래도 강정석 작가입니다. 작업에서 스마트폰

시점을 이용해 특정 도시 인프라를 가로지르며 메타

시점을 확보하려 하는데, 동시에 일련의 이미지

재료에선 작가 본인이 속한 세대와 관련한 추동 같은

게 (심지어 전면에) 드러나죠.

임근준 세대 내에서 처음 단절을 가시화하고 담론을

주도하고, 또 주요 신생공간을 설립한 건 78/79년생

라인이지만, 10년 터울의 세대그룹 안에서 주도권을

쥐고 이데올로그로서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

아이디어맨들은 1984년생 작가들입니다. 돈선필,

강정석 씨 둘 다 84년생인 걸로 아는데요, 그들은

386세대를 많이 닮았어요.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제시하며 세대정치 이야기는 꺼리는 것 같지만,

세대정치를 작동시키는 어떤 욕망이 심중에 자리 잡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강정석 작가의 작업들에서 여러

스킨과 가지를 쳐내면 작가의 희한한 에고가 남는데,

그게 박모(박이소)와 상당히 닮았어요. 그래서, 약간

실망한 책이 『메타 유니버스』에요. 훨씬 더 잘 나올

수도 있었는데 작업의 내적 자율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세대정치만 논해요.

홍태림 씨는 박불똥 개인전 《박불똥, 1985-

2016》(갤러리175, 2016.3.15~3.31)을 기획하면서

“작가 박불똥을 ‘민중미술’이라는 맥락에서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이 목표라고 제시했습니다. 아니, 박불똥

작업이 민중미술이 아니라면, 뭐가 민중미술인가요?

젊은 작가를 위한 갤러리에서 구시대 작가의

구작으로 미니 회고전을 열면서 “갤러리175가 주로

청년 작가들이 새롭게 선보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청년 박불똥’의 작업들을 만나기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상했습니다.

윤율리 씨도 《청춘과 잉여》 (커먼센터,

2014.11.21~12.31) 전의 도록이 정상 출간되지

못한 상황에서 도록을 대신하는 『메타 유니버스』의

편집을 맡게 됐고, 덕분에 담론 생산의 지형에서

주도권을 갖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더랬는데,

1979~89년생 주요 작가들의 문제작을 적절한 양태로

호출해 해석하는 비평적 얼개를 고안·제시했더라면

평론가로서 우뚝 섰을 겁니다. 그런데 연구에

박차를 가했어야 할 귀한 시간에 앞 세대가 잘못

벌여놓은 ‘국선즈’(‘국립현대미술관장 선임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에 가서 검열 투쟁 행사에

참여하고… 지금 한국 현대미술계가 논해야 할

시급한 문제가 정말 검열인가요? 지금껏 윤율리

씨가 한 이야기는 세대변환에 관한 것일 뿐, 작업의

내적 질서에 초점을 맞춘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

세대의 동역학이 구 386세대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정치적

전유appropriation의 방법론을 탐구한 사례가 없고,

또 담론적 장소성이라는 개념을 정교하게 변주·적용해

새로운 설치미술의 문법을 실험한 경우가 없어요.

권시우 저도 그 부분이 의아했습니다. 『메타

유니버스』에 대해서는 임근준 씨가 일전에 SNS에도

관련 내용을 올리신 적이 있는데요. 그 책은 키워드를

‘세대, 지역, 공간, 매체’로 세분화해서 00년대를

독파하려는 전략을 택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 정작

매체에 대한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비단 『메타 유니버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서울 바벨》의 도록만

봐도, 저를 포함한 필자들이 나름 각자의 관점에서

2015년 한해를 회고하려는 추동이 엿보이지만, 결국

도출된 것은 세대와 플랫폼 이야기였기 때문에, 앞선

전제조건이 마련된 상태에서, 과연 개별 작업들을

어떻게 호명하고 포지셔닝할 것인가, 혹은 그와

연루된 상태에서 작가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작업적

방법론을 전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또다시

물음표로 남았죠.

번외로 제가 ‘집단오찬’이라는 유사 동인에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도 그와 어느 정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한창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이 대두되었을 때 몇몇 기성 평론가께서 그에

대한 코멘트를 해주셨는데, 그분들이 신생공간이나

그 안의 주체들이 특정한 기성세대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는 식으로 언급한 부분에서 일차적으로 ‘뜨악’

했고, 그와 별개로 가장 큰 위화감이 들었던 것은

신생 작업들을 작업으로서 대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서진석 기획자나 강수미

평론가가 그와 엇비슷한 맥락들을 던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청년관이 국립현대미술관 안에 실제로

마련된다고 가정할 때 ‘그 안을 과연 너희들이 작업

콘텐츠로 채울 수 있겠는가’, 혹은 ‘그럴 만한 역량이

있는가’ 하는 날선 질문들에 글로 구체적인 주석을

달아보고 싶었습니다.

임근준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 구세대가 자신들의

평가 기준으로 그들을 재단하고 애써 가치 절하하는

비평이 나오는 게 패턴이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심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어요. 거의 ‘청년 증오’에

가까워요. 『월간미술』은, 청년들의 기획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필자들을 지면에 초대해 그간의 성취를 부정

혹은 폄훼하는 글을 꾸준히 지면화하고 있죠. 한데,

역시 작업 이야기는 없어요. ‘너희들은 정치적으로

각성이 덜 되어 문제다’ 라며 싸잡아서 깎아내려요.

권시우 최근 신현진 평론가가 쓴 글에서는 신생공간

플랫폼이 《서울 바벨》 혹은 서울시립미술관을

관통하며 자본주의적 헤게모니를 선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요. 진위 여부를 떠나, 젊은

미술생산자들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헤게모니를

선취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원활한 제도로서

구실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임근준 사실 한국 현미술계에서의 자본주의적

헤게모니라는 게 무슨 말인지 저는 모르겠어요. 주요

대학 교수되면 패권을 잡는 건가? 요즘 서울대나 홍대

교수에게 그런 힘, 없어요. 그럼, 국제갤러리 같은 데서

전속 작가로 전시하면 패권을 잡나요? 그것도 우스운

착각이고… 주요 미술관에서 한시적으로 작품을

전시하는 게 무슨 벼슬도 아니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되면 헤게모니를 잡는 걸까요? 그것도 임기

끝나면 끝이잖아요. 헛소리 좀 작작하면 좋겠어요.

비평의 폐허 속에서 미술비평의 방향

권시우 최근 『오큘로(O-K-U-L-O)』에 게재된 강덕구

씨 글에서는 강정석, 김희천 작가를 단일한 연속체

차원에서 재고했습니다. 그 와중에 이질감이 들었던

것은 강정석 작가가 작업에 활용하는 잉여세대, 혹은

지인과 같은 유사 주체들과 스마트폰 디바이스나

웹상에서 통용되는 정크이미지를 일대일 대응관계로

설정하는 대목이었어요. 양자의 작업재료가 그런

식으로 직접적인 매칭이 가능한 관계인가 싶었거든요.

임근준 강덕구 씨의 글은 재밌긴 했지만, 영화

비평의 관점에서, 그리고 영화 비평을 위해 작성된 것

같았습니다. 영화로 실험이 가능하던 시대가 무너졌고

심도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한 신작도 안 나오는

갑갑한 상황. 자, 그렇다면 영화평론가와 이론가들은

어떻게 생존을 모색할 것인가. 그들에게 손쉬운 대안은

포스트시네마 담론이고, 거기에 부합하는 국내 재료가

없으므로… 물론 재료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죠.

〈논픽션 다이어리〉와 〈철의 꿈〉이 있었지만, 두

영화가 개봉 중일 때 새로운 이론으로 그들의 작업을

분석·비평하고 나서서 고사 위기의 영화 담론 지형에

새로운 전선을 그어낸 논자는 부재했죠. 지금에 와서

손에 잡히는 게 김희천, 강정석이니까 필요에 작가와

작업을 두드려 맞춘 것은 아닌가… 저는 그 잡지를

기대하고 펼쳤다가 실망했어요. 판을 만든 이의 욕망과

참여 필자들의 난처한 입장이 그려낸 풍경이 퍽

심란하더라구요.

국내 영화 평론을 지탱하던 토대가 무너졌다고,

포스트시네마 담론으로 이동하면서 그에 맞는

대상만을 취사선택해 제 글쓰기의 연료로 쓴다?

이건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작업이 먼저

아닌가요? 문제작들을 다이어그램으로 펼쳐놓고,

거기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그를 규명하려는

분석의 틀을 고안하는 것이 정상적인 접근입니다.

망했으면 망했다고 공표하고 정확히 끊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건 평론가의 윤리적 이슈이기도 해요.

권시우 그렇다면 영화비평, 문학비평 등이 망했다고

선언할 수 있는 상황에서 미술비평은 어떤 식으로

망했다고 보시나요?

임근준 불행히도 현대미술비평은 아직 완전히

망하지 않았어요. 간간이 문제적 작업이 돌출하기

때문에. 90년대생 작가들의 작업이 나오고

세대변환이 이뤄지고, 그 동세와 파장이 사라질

때까지 비평도 제 목숨을 부지할 겁니다. 잡지가

미비한 미디어환경 변화는 독립출판 양태의 비평지로

돌파할 수도 있고요. 방법론적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작업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땐 정말로 망한 그 다음을

모색해야 하겠죠.

권시우 90년대생의 시점에서 또다시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은, 앞서 말씀하셨던 90년대 이후에

성사된 컨템포러리 아트의 계보가 존재한다 해도

저에겐 너무나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것 자체가 제가 경험한 게

아니라 이미 지면화된 사건에 가깝고, 반드시 그

대목만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2008년 전후에 등장한

파트타임스위트, 옥인콜렉티브, 리슨투더시티

등의 작가들은 여전히 이전 세대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한 작업들에게 중요한

건 물리적 공간이 현존한다는 전제 같아요. 그런데

김희천, 강정석 작가가 구현하는 납작한 이미지들을

반추해보면, 물리적 공간의 현존은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디지털에 의해 여과됐을 때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가, 혹은 어떻게 바라봐야 최소한의 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시점 선택이 더 중요해진

거죠.

임근준 파트타임스위트를 비롯한 작가들의

작업에서 뉴미디어 환경이나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의해 재매개된remediated 시점의 문제의식을 찾을 순

없나요?

권시우 저는 결국 특정 미디어를 통한 인지방식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2009년 이후

스마트폰이 국내에서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걸 사용자

차원에서 얼마만큼 체감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인지

능력의 메커니즘이 미세하게 갈리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러한 분기 선택에 있어서 이전 세대들은

(이를테면, 앞서 언급했던 폐허 특정적 작업을

구사하는 콜렉티브들) 이전까지 추구했던 공간

경험을 사회·경제적 현존성에 오버랩하는 방식으로

재구조화시켰다면, 스마트디바이스와 연계된, 소위

스마트 환경을 경험한 세대들은 이미 몇 겹으로

여과된 차원에서 공간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점차

현존성은 휘발되고 무미건조해지죠.

임근준 저는 파트타임스위트나 옥인콜렉티브의

작업을 보고, ‘젊다, 새롭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들의 작업을 기동시키는 시각 인지 차원의

시점이란 게, 구세대와 거의 같아요. 미술계 전체에서

대안공간마다 어떤 계보가 있다면, 어느 한 지점에

빗금(슬래시)을 쳐서 자기 자리를 만든 셈이었죠.

지금 두각을 나타낸 젊은 작가들에게 세대교체의

열망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체 미술계를

조망하며 ‘내 자리가 어디인가’를 고민하는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워요. 실제로 차지할 자리나 기회가

없어서 그렇겠지만. 신생공간들이 제각각 다르긴 해도

그런 이격된 감각은 대체로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권시우 신생작가들이 제도적으로 불시착한 현재

좌표가 난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그들이

점유한 폐허와 게토로 상징되는 물리적 공간 자체는

그들 작업의 방법론과 연동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임근준 메타 차원의 폐허로 인식된 구체적 공간에서

벌이는 게임적 프로토콜의 실험이, 신생작가들을

연결하는 감각이고 방법이라고 보면, 저는

‘지금여기’와 ‘케이크갤러리’는 상황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구식 대안공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자의 시공 인식이나 기획 방법론도 그렇고요.

권시우 신생공간의 공간이 제대로 된 공간이

아니라면, 작가들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공간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상황주의의 전략과는

또 다른 층위의 스펙트럼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혹자가 웹 데이터베이스나 관련 디지털

환경을 토대로 작업하는 사람들을 범주화시키기

위해 포스트프로덕션 개념을 거론하고, 뒤이어

그들이 이러한 방법론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일종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며 ‘덕분에 이전과는 판이한

종류의 집단적 정체성을 가지게 됐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순간, 저는 그게 뻥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단지 그런 환경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들을 ‘신생’의 작가로 범주화시킬 수 있다고 보지

않아요. 포스트프로덕션 자체는 반드시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수렴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특정한 교집합으로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공기 같은 대상에 가깝잖아요.

임근준 2000년대를 주름잡은 구미의 주요

평론가도 어떤 게 정말 새로운 작업인지 가늠 못하는

흥미로운 상황입니다. 뇌시각의 버전이 달라요. 국내

구세대 논자들이 청년 미술가에게 화를 내는 이유도

작업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파편들을 그러모으고는 예술가인 척하는, 게으르고

질 나쁜 애들로 뵈는 거죠. 사회 비판적 메시지나 제도

비평적 접근이 안 읽히니 사회와 미술계의 문제에 등을

돌렸다고 착각하고, 그러니 또 영 괘씸하고.

새로운 세대의 작업 방법과 생존법

권시우 포스트프로덕션의 관점에서, 신생작가들을

범주화할 수 있는 동력은 결과값의 이미지를 공간

아닌 공간, 폐허, 게토 등이 지닌 공간적 요철 같은

것에 투사함으로써 공간 자체를 재차 포스트프로덕션

하는 과정에서 그 특정성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이미지와 공간 자체가 겹쳤을 때 과도기적인

영역 자체가 작가에게는 이후 작업의 레이아웃 구실을

한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이렇게 구실하는 공간적

토대 (공간적 토대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미지와 공간이 교접된 그곳으로부터 이후

어떤 작업이 전개될 지 명확한 전망을 내놓을 수

없다는 점이죠.

임근준 이미지와 공간이 교접된 지점에서 정말

뭔가 새로운 걸 창출해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직

없죠. 그런 면에서, 걱정되는 작가 중 대표적인 이가

돈선필 씨에요. ‘반지하’라는 특수한 판단 유예의

시공을 만들어놓고, 자기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다른

작가들과의 모호한 관계 속에서 형성·배양하는

데 성공했어요. 주변 작가들로부터 암묵적 인정을

얻어냈고, 다른 동료들과 ‘반지하’ 밖으로 나와

세종문화회관에서 ‘굿-즈’라는 성취를 이뤄냈죠.

‘굿-즈’는 사실 ‘반지하’의 바깥은 아니었던 셈입니다만.

돈선필 씨는, ‘반지하’라는 비정상적 공간을 바탕으로,

가상 시점의 문제와 게임 네트워크의 프로토콜을

엮어서, 다른 작가들과 그들의 작업으로 모종의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그게 자신을 예술가로서 지탱하는

외골격이죠. 그런데 그가 만약 소라게의 소라껍질을

벗어던지고 ‘시청각’에서, 더 나아가 미술관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연다면 어떤 전략을 취할 수

있을까. 유사한 문제의식을 어쨌거나 전시용 작업으로

풀어온 강정석과 비교해보면 둘의 처지는 사뭇 달라요.

권시우 정말 그런 지점이 애매모호한 것 같아요.

저는 한진 작가의 작업이 아까 말씀하신 폐허로서의

공간에 최적화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단 본인부터

회전력이나 편의성 같은 것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작업을 하기도 하고, 그에 대한 결과값으로 튀어나온

작업을 독해해보면, ‘드로잉된 회화’라고 생각해요.

공간적 요철을 향한 조건반사적인 회화랄까요.

임근준 그 세대의 시공 안에서 한진 작가는 유달리

빛나죠. 이 작가의 그림을 그대로 떼어다 오브제

자체만 국립현대미술관에 넣었을 때, 그 작업은

여전히 멋있을까? 어쨌든 그 세대 안에서 봐도

유의미하고, 또 세대 밖에서 봐도 유의미하도록,

적절히 0점 조절이 된 작가는 강정석, 윤향로

씨입니다. 영 맘에 안 들지라도, 구세대가 보기에도

그 둘은 명백히 작가인 거죠. 그런데, 그런 종류의

외골격을 갖추는 데 성공한 작가는 소수입니다. 장차

변화하는 상황에서 그룹 활동 없이 각자도생해야

한다면, 생존할 작가가 몇이나 될지 잘 모르겠어요.

권시우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 안에서 통용된

작업들이 과연 2015년을 통과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체득했는지 자문해봐야 하는 때가 아닌가 싶네요.

임근준 아직은 개별 작업으로 딱히 판가름이 안

나는 상황에서, 신생공간과 콜렉티브의 주역들을

미술관으로 끌고 들어온 게, 《뉴스킨: 본뜨고

연결하기》(2015.7.3~8.9) 전이었죠. 첫 미술관

입성이었기에 당시에 사람들이 대놓고 비평을 안

해서 그렇지, 뒤에선 ‘뉴스킨이 어디 있냐, 올드스킨

아니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죠. 폐허로서의

신생공간을 공통 거점으로 삼고, 자기 작업으로는

새로운 시점과 인지/인식의 문제를 다루는 작가를

모아 놓았는데, 옛 작업 그대로 화이트큐브에 옮겨

놓으니 작업의 핵심이 잘 도드라지지 않았어요.

유일한 예외가 김희천 씨였고. 당시 신생공간/

콜렉티브의 주역들이 미술관에서 어떤 게임을

재기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논했어야 했는데,

구세대가 말을 꺼내긴 애매하고, 세대 내 비평가도 안

하더라고요.

젊은 작가들을 위한 장치 소거

임근준 노골적으로, 현대미술계에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이야기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미술계의 중심축은 국공립미술관이니,

청년 미술인의 생존을 위한 프로그램과 공간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서울관, 과천관, 덕수궁관, 청주관 등 공간이 많고

서울시립미술관도 최근 여러 공간을 거느리게 됐죠.

청년들을 위한 작고 실용적인 공간 하나 내놓으라고 왜

말을 못하나요? 과거 대우복지재단의 아트선재센터와

삼성미술관의 로댕갤러리가 문제적 청년 작가에서

국제적 중견 작가로 이륙하는 공항 같은 역할을

했지만, 이제 둘 다 사라지거나 옛 기능을 상실하게

됐어요. 그러면, 청년 미술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권시우 결국 자발적으로 플랫폼을 제시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아까 말씀하신 80년대생 작가들이

국공립미술관에 공간을 요구하는 일이 지금 적기인

이유가, 90년대생 시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예술대학이라는 공간이 굉장히 고립되어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이 예술 대학 졸업 이후에 가장

직접적으로 맞닥뜨렸던, 혹은 맞닥뜨릴 수 있는

플랫폼이 무엇인지 되물어보면, 저는 앞서 언급된

오작동의 플랫폼인 것 같거든요. 제도 외부에 산개하던

신생공간들, 즉 2015년 한 해 동안 다소 착시적으로

감지됐던 바로 그 플랫폼들이요. 플랫폼의 주체였던

80년대생이야말로 그들 입장에선 최소한 가늠할

수 있는 ‘선배’인 셈이죠. 아무래도 신생공간 이전의

미술과는 현실적인 접촉면이 부재하니까.

임근준 본인들이 살려면 궁리를 해야 하지 않나요?

탈출구를 찾으려는 동역학을 창출해야 1979~88년생

라인은 1991~01년생과 함께 굴러갈 수 있을 겁니다.

1991~01년생은 인구 통계 그래프에서 마지막

파도입니다. 그 이후엔 인구 절벽이라 세대교체를

시도할 수도 없어요.

권시우 누군가 고의로 문화판 자체를 엎을

수도 있지만, 하여튼 현재의 세대교체 국면은

이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요. 그러면

‘새출발’이라는 건 1979~88년생 세대가 여태까지

구축했던 공간과 이미지를 합성한 레이아웃 형식에서

자생적으로 튀어나온 플랫폼의 형식이 될까요? 혹은

그와 별개로 누가 계속해서 이를 활용해 작가로서

효율적인 연장전을 치를 수 있을까요?

임근준 현재 방법론적 차원에서 ‘이 작가가 지금

이곳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입니다’라고 지목할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강정석 작가예요. 세대 내에서도,

세대 밖에 내놔도 말이 되는 지표적 인물이죠.

자신만의 방법론도 만들었고, 글로 자기 비전을 설명할

능력도 갖췄고요. 그래도, 한국에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같은 작가가 한 명 있으면 좋겠죠.

권시우 강정석 작가가 점유하는 사회적 포지션과,

김희천 작가가 작업으로서 점유하는 이미지 차원을

접합하면 가능할까요? (웃음)

임근준 그렇죠. 그런데 히토 슈타이얼도 사실

작업의 전제가 되는 가설이 재밌는 거지, 작업 자체는

별 재미가 없잖아요. 과대평가됐죠. 어쨌든, 넷상의

저급 이미지가 새로운 현존 방식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분석해 이미지의 새로운 위상을 조명한

에세이(「In Defense of the Poor Image」)나, 수직적

원근법vertical perspective을 이야기하며 자유낙하로

이 시대의 상황을 유비해 낸 에세이(「In Free Fall」)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뮤지엄을 공장으로 재해석해 관련

주체들의 각 역할을 재고찰한 에세이(「Is a Museum

a Factory?」) 등을 보면, 아주 쉬우면서도 또 완결된

이론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레고블록과

같아서 다른 이들이 그 아이디어를 빌려다가 새로

조합해서 파생 담론을 만들기 쉽습니다.

주목할 만한 작가 혹은 전시

권시우 괄목할 만한 신생공간의 전시를 굳이 하나만

뽑자면 저는 《던전》이었던 것 같아요.

임근준 2014, 2015년 통틀어 미술행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시와 작업이 《던전》이에요.

‘교역소’의 〈상태참조〉나 ‘727NOW!’에서 전개된

밈미우×강재원의 〈#1–7〉도 특기할만했지만, 역시

정점에 〈던전〉이 있습니다.

좀 이른 것 같지만, 이제 저는 생존 가능한 주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특정 세대의 동역학이

사라지고 난 뒤 개인으로 살아남아 역사로 기록되는

작가 수는 대개 일곱에서 열 명 정도니까… 최근 몇

년 동안 단색화 재조명이라고 막 바람을 잡아도, 결국

현재 주요 작가는 박서보, 윤형근, 하종현, 이우환,

권영우, 정상화 이렇게 여섯이죠. 그렇게 여섯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각 단계마다 평론가와

미술사학자 등이 활활 몸을 불사르며 제 역할을

해냈습니다. 방근택, 이일, 나카하라 유스케, 오광수,

기정현(조앤기) 등. 화상의 역할도 마찬가지죠.

명동화랑의 김문호 사장,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 인공화랑의 황현욱 사장… 지금은 국제갤러리의

이현숙 대표. 그래서 지난 하반기와 올해 상반기의

시공에서 윤율리 씨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시대가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본인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 사이에 간극이 좀 있는 모양이에요.

권시우 윤율리 씨는 《서울 바벨》에 기고한

글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플랫폼에 대한 역할

욕구가 남아있는 것 같고, 그걸 어떻게 온전한 제도적

장치로서 구현할 수 있을지 고찰하는 것 같은데요.

임근준 플랫폼에 대한 집착은 교육제도가

담당해야할 과제를 밖에서 해소하고자 하는 일종의

오귀인misattribution이 아닐까요? 1950년대생

작가·교수들이 차례로 은퇴하고, 인구 절벽 효과로

대학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 춘추전국시대가

열릴 테고,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의 몫이 될 겁니다.

2000년생이 보게 될 미술학교와 미술계는 어떤

모습이며, 엉망진창 오작동하는 교육제도를 거치고

나면 어떤 작가가 될까요? 아마도 역사부정의 태도를

취하게 되지 않을까요? 다시 원점에서 출발해버리자는

멘털리티가 팽배해지면 여러모로 편하거든요. 전후의

앙포르멜 작가들이 딱 그랬죠.

공존의 생존 프로토콜로서의 플랫폼

임근준 미술계의 신생공간/콜렉티브를 디자인계의

소규모 스튜디오와 비교해봐도 흥미롭습니다.

장기 지속하기 어려운 양태였다는 것은 양쪽

다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소규모 스튜디오는

2005~2015년의 10년을 버틸 수 있는 자산이자

전략이 됐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몇몇 스튜디오는 중형으로 이행하고 있죠.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을 통해 시대의 종료를

선포했으니, 다들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지 않을 수도

없게 됐죠. 하지만, 신생공간/콜렉티브의 사례들은,

각각 다 다르고, 또 그 자체로 작업이기 때문에 타인이

벤치마킹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기 어려워요.

권시우 현재 체감하고 있는 막연한 불안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소시키느냐가 큰 관건인 거 같아요.

임근준 필요한 것은 불안의 해소가 아니라, 위기를

직시하고 다 함께 불안해하도록 의제화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현재의 위기 상황은 세대 안에서도

똑똑한 작가 몇 명만 아는 거잖아요. 한국은 관료주의

사회라서, 어쨌거나 한 업계의 흥망은, ‘관계’와

‘학계’와 ‘민간’의 삼각 바퀴가 잘 굴러가느냐 여부에

달렸습니다. 그 삼각 바퀴의 도식으로 오늘의

위기를 바라보면, 미술계의 경우, ‘민간’이 가장 먼저

취약화됐죠. 2008년의 미술시장 붕괴와 함께. 이제

‘학계’가 취약화될 차례입니다. 그러면, 믿을 것은 ‘관계’

하나가 남아요. 청와대가 문화융성을 슬로건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리고 문화관광부 장관이 그래도

미대 출신이라, 대학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미술대학은

인문대처럼 도매급으로 통폐합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들 합니다만…. 아무튼, 플랫폼으로 위기를

돌파하고 싶다면, 국공립미술관의 개혁을 요구해야

합니다. 법인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기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법인화 시대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논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저 관장 자리를 놓고

시끄럽게 떠들었을 뿐입니다.

물론 관장의 리더십은 중요합니다. 김홍희 관장이

서울시립미술관을 이끌면서 정말로 많은 것들이

개선됐고, 또 그 혜택은 작가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2016년이 임기의 마지막 5년차이고,

머잖아 그는 물러날 겁니다. 그의 퇴임 이후,

서울시립미술관은 어찌 될까요. 불행히도, 한국에서

후임이 전임의 업적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후임 관장이 전임이 만들어놓은 연간

프로그램들을 폐지하고 주요 큐레이터들은 순환

보직을 이유로 한직으로 보내버리면, 상생형 리더십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겠죠.

권시우 결국 다시 원점이네요. 제도적 차원에서

독립적인 플랫폼을 요구하고 그들 나름의 동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임근준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 한국에 온 지

꽤 됐는데 미술관에 정식 요청해서 관장실로

찾아오겠다고 한 면담, 대담 요청 건수가 0건이었다고

합니다. 다들 비공식 채널로만 만나는 모양이에요.

관장 선임을 놓고 그리들 항의를 했으면 공중의

의견을 수렴해서 서한이라도 전달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정책이 잘못 됐다면 장관에게 공개서한을

쓰고 간담회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과

큐레이터들이 있어요. 비난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세대 내 작품, 비평 간 레슬링의 부재

권시우 플랫폼 마련이나 제도 개선의 문제와는

별개로, 제가 작년에 글을 쓰면서 들었던 의문은

신생공간을 토대로 작가들이 이렇게나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데 그와 관련한 비평, 평론, 리뷰 등의 사족들이

달리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임근준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본인들이 못한

거죠. 전시를 열면, 잡지사에 전화하고, 지면 좀 달라고

조르고, 어느 필자가 좋겠다, 미리 운을 떼고…. 그런데

젊은 세대들은 그걸 잘 모르더라고요. 내 작업이

좋으면 비평이 저절로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알아서 평론할 대상을 가리고, 지면 달라고 잡지사에

전화해서 조르고, 청탁받지 않은 장문의 평문을

써내고, 주목 받아야 할 작가와 큐레이터에게 이목이

쏠리도록 이러저러한 부가 행사를 기획하는 평론가는

십 년에 한 명 정도 겨우 나오는 거죠.

권시우 세대 안에서도 필자를 지향하는 이들이 있을

텐데, 왜 신생공간을 물지 못했을까요?

임근준 세대 안에서 미움 살까봐 노골적으로 눈치

보지 않았나요? 일단 서로 비판을 삼가잖아요. 세대

내에서 프로레슬링을 좀 해야 헛에너지가 막 나와서

담론이 활성화되는데, 그게 안 됐어요. 십여 년 전만

해도 미술잡지를 펼치면 강수미, 반이정, 이정우, 셋

모두 서로 충돌하는 비평을 제시하고 있었어요. 누가

옳건 그르건, 아무튼 삼각 스펙트럼이 그려지고 이견이

분명히 제시되는 건 긍정적인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면,

작가들도 판단을 내리기 쉬웠죠.

권시우 저만 해도 세대 내에서 글을 쓰는 다른

분들이 잘 파악이 안 돼요. 애초에 무언가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필자를 임의적으로 추려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점인 것 같아요. ‘집단오찬’의

동인들과도 신생공간이란 화두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결과값으로 튀어나온 글도 서로 상이했어요.

당시에 그런 식으로 나름의 논의가 진전됐는데, 지금은

거의 저의 1인블로그처럼 되었죠. 조금만 더 불을

당겼으면 본격적인 동인의 각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구성원들 대부분이 군대에 가버렸네요.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지점들이 있는 거죠.

임근준 제 경우엔 『DT(디자인|텍스트)』가 성장을

위한 플랫폼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어요. 비정기

간행물이 뭐 큰 도움이 됐을까 싶겠지만, 박해천,

최성민 씨와 그 이론지를 만들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DT’ 동인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연구자/

필자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서로 성장·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1990년대 후반 이후

담론의 지형이 크게 변화할 때 오판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결국 기적적으로 연구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디자인계와 미술계

사이에서 담론의 교집합을 발견하고 또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동역학을 창출할 수도 있었고요.

오늘의 청년 미술가 세대에도, 비평적 연결고리가

되는 이론지가 필요합니다. 시청각의 안인용 씨와 함께

비평지를 내면 어떨까요? 위로는 윤원화 씨, 아래로는

권시우 씨가 포진한 이론지라면, 새로운 성취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권시우 앞세대에 대한 바톤터치의 개념으로 이후의

세대가 플랫폼을 만들고 개별적인 논의를 전개한다고

해도 휘발성이 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담론화의

지형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라면요.

임근준 공통의 기억을 바탕으로 당대의 성취들을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비평 담론이란 것은 아말감

역할을 합니다. 해석의 방향성을 창출하는, 비평적

동세를 창출하는 필자들의 네트워크가 꼭 필요합니다.

지금은 이론지가 새로 출범해야 할 시점이에요.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비평과 이론의 차원에서

되돌아보는 기획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요즘 대학원

강의에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서 근원 김용준과

이경성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강독 세미나를 하고

있어요. 한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 가운데에도

당대의 시각성 체제 이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비평

방법론을 확립한 경우는 희귀합니다. 한국의 미술사를

역사화하는 기본 틀을 제시하고, 각 분야를 포괄하는

통사로서의 미술사 서술을 추구-성취한 비평가는

이경성 이후 없습니다. 아무도 도전하지 않아요.

제 생각에 그건 연구자 연합의 형태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따라서, 연구나 비평가에게도 그룹이

중요해요. 그래서 1979~89년생 구간에 속하는 논자

여러분을 보고 있으면 갑갑합니다. 어서 추구하는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 ‘나’를 중심으로 비평적 동세를

창출해야 하는데, 왜 자꾸 방황하는 것인지. 그 말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큰 추동이 어디로 향하는지 읽지

못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조만간, 한국 당대

미술을 일군 주요 인물들이 줄줄이 은퇴합니다.

호랑이굴이 비는 셈이기도 하죠. 그러면, 누가 호랑이

역할을 해야 좋을까요?

그래서, 누가 문제적 작가인가?

임근준 어쨌든 다음 단계로 이행하려면, 역사를

다시 재조명하는 일이 필수입니다. 신생작가/

콜렉티브 가운데에서도 구체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작가는 누구인지 하나하나 호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미술계도 2005~2015년의 십 년을

결산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2018년 12월쯤,

2008~2018년으로 십 년을 끊어서 결산해보는 것도

좋겠죠. 지난 십 년을 결산하기 위해 걸작을 꼽아야

한다면,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을 고르겠습니까?

권시우 지금 당장 특정 작가를 호명하기엔 무리가

있고, 우회의 전략이라면 방법론적으로 겹치는

일군의 작가를 선별한 다음 대질을 시켜 공통 속성을

밝히고, 이로써 당대의 시각성을 역추적해보는 메타

독해를 시도하는 것이겠죠. 지금 활동하는 개별

작가들 중 일부만을 문제적인 작가로 호명하는 일은

아직까진 회의적인 것 같아요. 솔직히 잘 모르겠기도

하고. 윤향로, 백경호 작가는 ‘레이어 회화’, 강정석,

김희천 작가는 X라는 ‘연속체’ 등의 키워드 도출은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정말 개별 작업의 몸체에 온전히

들어맞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인지 자문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현재 ‘신생’이라는

작업 언어를 구성하는 의미소를 분별하는 시도에

가깝겠죠.

다만 국내의 2013,14,15년의 구간을 하나의 징후로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은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이를테면, 강정석 x 김희천 연속체로 서울을 상연하고,

〈던전〉의 표본과 강재원 x 밈미우의 〈#1-7〉의 표본을

공간 재연하고, 한진의 드로잉 회화와 백경호의

레이어와 김정태의 하이퍼스레딩을 일종의 모듈로서

제시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이런 걸로 순회전을

돌면 뭔가 세상이 한층 더 우울해지겠지만.

그보다 시간을 더 거슬러가보면 (제 정보량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지만), 지난 10년은 거듭 언급했듯

제게는 지면화된 사건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어렴풋이 알지만, 작업 자체를

호명하기에는 역시나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임근준 그렇다면, 김형진, 최성민 씨가 했듯이, 지난

10년을 총괄하는 인덱스를 작성해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을

위해 〈101개 지표〉를 만들었다곤 하지만, 사실 별개의

작업이고, 또 곰곰이 들여다보면 계속해서 지난 십

년을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하도록 유도되거든요.

권시우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특정 작업을

이미지로, 혹은 담론적 차원의 텍스트로 마주한 채

일방적으로 소화하거나 체해버립니다. ‘지면’이란 것도

엄밀히 말하면 강의 PPT인 셈인데, 사용되는 이미지를

보면 도판에서 체계적으로 발췌한 것이 아닌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처럼 뇌 속에 적절하게 색인 처리된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잘 안 잡힐 때가 있어요.

저의 기억은 온통 저화질이죠.

임근준 연구자들의 구심점 노릇을 하는 아카이브가

하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온라인으로 공동 작업을

하면서 오프라인 공간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연구센터를 애용해도 좋겠네요. 그게 다 시민

세금으로 만든 거라 여러분 것인데 말이죠.

한국의 정치와 사회 면면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세대의 교체는, 현대미술과

디자인계도 예외는 아니다. 2014~2015년 활동한 일련의 신생공간에 더하여,

근래 미술과 디자인 전시들에서는 다양한 레이어로 청년 작가의 임시공동체를

보여주거나, 전 세대와 노골적인 종료를 알린다. 하지만 그들만의 전망이

밝아서 기성세대와 안녕을 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시대 작품, 작가,

비평이 공생할 수 있는 탄탄한 플랫폼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실하다. 이에 대해

임근준 미술·디자인평론가와 권시우 미술비평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현대 시각예술과 비평의

세대교체와 동역학

미술·디자인 평론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LGBT운동가로 활동했고, 이후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

시공아트 편집장,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으로 일했다. 『현대미술의 끝: 좀비 모던

시대의 예술 생존법』(가제)을 출간할

예정이다.

비평 동인 ‘집단오찬’(jipdanochan.com)을

운영하고 있다. 동인의 일원으로서 2015년 한 해

동안 신생공간 관련 프로젝트 <동세대 미술에

관한 코멘터리>를 진행했다. 그간 축적된 글들을

일별하며 앞으로의 글쓰기에 관한 향방을

모색하는 중이다.

임근준

권시우

Page 6: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1110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선생님의 작품을 안과 밖의 경계로 나눌 수는

없지만, 일단 작품 내부, 화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예전에 심광현 평론가가 “사이-

공간을 다루는 작가다”라고 한 바 있고 (<‘백 년의

기억’, 예술-역사의 ‘사이-공간’에 말 걸기>), 그런

측면이 화면에서는 종종 거칠게 표현된 부분과

매끈하게 표현된 두 차원의 대비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신작들에서는 역사와 현재,

도시와 농촌 같은 두 세계를 질감의 대비로

표현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난 것 같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예전에는 양면적인 성격이

확실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묘사를 한다는

것에 신경질이 났고, 그래서 큰 붓으로 거칠게

그리면 속이 후련했다. ‘현실과 발언’1) 초기부터

그런 면이 있었다. 심광현이 말한 “두 공간 사이의

진자운동” 같은 것은 미술대학을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미술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묘사에 대한 중압감이 있다. 추상화를 그리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사실적으로 그릴 수는

있지만 그 경지를 넘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으로 향한다고 말한다. 시각화하고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만 잘 안 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아예 그것을 상쇄시켜버리도록

큰 붓질로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그와

대비되는 효과를 드러낼 수 있도록 이중적인

것을 한 화면에 배치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럭키

모노륨: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1981)이다.

광고에서처럼 바닥재의 무늬를 자세하게

묘사하려 했지만 그걸 일일이 다 어떻게 그리나?

(웃음) 그게 잘 안 되니까 줄로 표현했는데,

그것과 강하게 대비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똑같이 그리면 안 돼서 그 위에 뭉툭한 붓으로

빠른 손길로 그렸고, 같은 맥락에서 시간성도

대비를 이루는 이중적인 화면을 구성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좀 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려고

했다. 어떤 그림은 툭툭 그린 것도 있고, <아차!

아차산이로구나!>(2015)에서는 자세히

그리려다가 맘에 안 들어서 동그라미 패턴을 그려

넣기도 했다.

동그라미 패턴이 반복적으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달의 중력으로 군함도를

격파하라>(2015)에서처럼 바로 ‘달’로 파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아차! 아차산이로구나>의

회색 동그라미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리신 건가?

심심하니까. (웃음) 사실 2004년 《백 년의

기억》 전시부터 동그라미 패턴을 선보였다.

3·1절 고종 승하를 다룬 그림인 <반지와 3.1

독립만세>(2003)에도 나온다. 클리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반복되는 것인데, 뭔가 그림이

좀 아쉬울 때 사용한 방법이긴 하다. <아차!

아차산이로구나!>가 그런 경우다. <섬진강에

대한 비대칭적 사유>(2011)처럼 밑그림을 그린

후 2년간 그대로 두었다가 동그라미 패턴으로

마무리한 경우도 있다. 동그라미는 달로 표현한

경우도 있고, <국가를 향해 쏴라>에서처럼 총알

자국이나 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동그라미는

내가 그림 위에 쓰는, 혹은 ‘중얼거리는’ 캡션이나

텍스트들과 비슷한 이유에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소격 효과랄까. 그것은 이중성

혹은 다의성을 위해 그 아래에 있는 이미지를

전복시키면서 다시 한 번 이미지를 보게 만드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황세준 작가가 이번 전시에 부친 글에서, 달은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그림 위에 붙인 스티커와 마찬가지 기능을 한다고

했다. 저는 그 말이 처음에는 잘 와 닿지 않다가

그림을 자세히 보니 이해가 되었다. 동그라미는

붓으로 그냥 그린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 문방구에서 파는 동그라미 틀을 사용해서

아크릴물감과 응고제를 섞어서 틀 밑으로 퍼지지

않게 그린 것이다. 어떤 것은 달의 표면처럼

울퉁불퉁하기도 하다. 최진욱 작가가 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나?

동그라미 패턴이나 나무뿌리가 “미심쩍다”고

했다. 이중적인 의미였는데, 최진욱 작가는

선생님의 과거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는 만큼

공백기를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최근작들에

대해서는 유감이라고 했다.

최진욱이 그 정도 하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웃음)

<자본의 배를 탄 국가>(2015)를 비롯해

나무뿌리에 대해 해명하실 기회를 드리겠다. 과거

<광주 5·18과 난초>(2001)에서 그랬던 것처럼

뜬금없는 사물들이 등장하여 그 사물에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김정헌의 스타일인

것 같다. 나무뿌리를 굳이 ‘국가’라고 칭한 이유가

무엇인가?

‘광주 5·18’이라고 하면 선명하고 구체적인

형상과 도상이 떠오른다. 그 광주의 형상들에

난초를 정말 뜬금없이 갖다 붙인 거다. <금강산도

식후경>(2016)의 자장면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먼저 생각해 냈는데 (특별한 것은

아니고) 비실비실하던 난초가 갑자기 꽃을 피운

것을 보며, 광주의 정신이 다시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광주비엔날레에 전시한

그림 <그해 오월 광주의 푸르름>(1995)에도

플라타너스를 공중부양하듯 갖다 붙였다. 광주

문제라고 하면 여러 상처와 슬픔이 뒤엉켜있고,

가해자와 피해자도 뒤섞여 있는데 녹색으로

그것을 치유하는 생각을 했다. 반면 국가라는

것은 5·18보다 더 막연하고 무언가에 비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주제였다. 그때 마침 눈앞에

기괴한 나무뿌리가 있어서 그에 비유한 것이다.

내가 엉뚱한 사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두고

‘왜 하필 그런 뜻인가’ 라고 물으면 답하기 어렵다.

최진욱이 작업실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미술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곡괭이 선생>(1995)에서는 농기구를

의인화했는데 ‘왜 하필 곡괭이인가?’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나무뿌리의 기괴한 형상이 내가

생각한 국가와 맞아서 그린 것이다. 벌겋게,

그리고 약간 섹시하게 그렸다. 최진욱은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

같다. 자기도 칠십이 되어 보라 그래. 정년퇴직도

안 해놓고…. (웃음)

그에 비해 저를 비롯한 관객들은 <희망도

슬프다>(2015)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창문

모티프를 볼 때 특정 사건을 떠올리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창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다.

1980년대에 가족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큰 창문

안에 그린 그림이 <행복의 모습>(1982)인데,

그건 실제로 내가 살던 집을 보고 그린 것이다.

내게 창문은 가족이나 가정이다. 창문도

나무뿌리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황세준이 언급했듯이 창은 안에서 다른 세상을

내다보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일 수도

있다. 가족은 국가나 사회의 최소 단위이다.

가정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데 슬프지

않을 수 없다. 바다 그림들은 모두 세월호와

연결되어 있다. 가정의 노란 불빛은 <노동자의

밤>(1995)에서 남자가 귀가해서 초라한 밥상을

앞에 둔 장면이나 <행복의 모습>에 있는 바깥의

LPG 가스통과 대비되는 실내 장면에도 나타난다.

사회가 불안하고 위기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다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단순한 대상으로

압축해 표현하고 싶었다. 이런 이미지들에는

문학의 시어처럼 기호의 측면이 있다.

늘 혼자 궁금해하던 것이 있다. 작품들에 구름은

왜 항상 두 개만 있나?

아, 그것도 그냥 습관이다.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부터 구름을 두 개 그렸는데… 글쎄,

왜 두 개일까? 농부가 있는데 머리 위의 구름이

두 개다. 그때 구름은 신문기사를 오려 붙여

세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위에

흰색을 덧칠했다. 그 전시는 동산방 화랑에서

열렸는데, 화랑 주인이 전시를 하자 해놓고

겁이 덜컥 난 모양이다. 형사들이 들락날락하고

뭐라고 하니까. 그 전시의 다른 작가들이 시뻘건

그림들을 걸어놨다. 내 구름이 신문을 오려 붙인

거라 ‘세상이 어떠어떠하다’라는 기사가 나와

있었는데 일부러 그 기사를 선택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동산방 주인은 형사들이

와서 뭐라고 하니 그 기사를 지워달라고 했는데,

힘들게 연 전시이니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아

완전히 지우지는 않고 그 위를 붓으로 한번 왔다

갔다 했다. 그때부터 구름이 꼭 두 개인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구름도 암수가 있는

거지. (웃음)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

요즘 작가들은 특정한 발언을 제지당한다기보다

스스로 발언을 꺼리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최근 검열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때도

자기도 모르게 하는 자기검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래서 요즘 작가들에게는 저항하고

분노해야 하는 상황보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에

억압되어 있는지 되물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에 있는 ‘구름이자 말풍선’은 물론

특정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의미심장하고 또 유머러스하기도

했다. 민중미술이라는 표현보다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 현재 선생님의 작업에

더 잘 맞고 유효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미술이

비판정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 또 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미술의 몫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어떤 전략을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 요즘

사건들이 끝없이 터지고 있지만 특정 사건에 대해

표현하기가 어쩐지 쉽지 않다.

맞다. 사건이 너무 많아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5.18 같은 큰 사건들이 있었고,

작가들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그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예술가도

감당하기 어렵다. 얼마 전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리얼리즘의 복권》 전은 임옥상, 신학철,

이종구, 황재형 같은 작가들이 참여한 다소

상업적인 전시이긴 하지만, 여하튼 임옥상

작가가 신작들을 전시했는데 그중 백남기

노인 사건을 그린 것이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충격적인 사건이고 임옥상이

도화지 수십 장에 분절해 그려서 물대포 장면을

잘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사건마다

즉각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것을 하더라도

어쨌든 공감이 되고 소통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제일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각적인 개입은 그야말로 임옥상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하기는

좀 힘들다. 예술가는 어쨌든 시각적인 소통을

시도해야 하지 않는가.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은 구름만이 아니고, 원근법이 잘

맞지 않게 하거나 앞쪽이 짧고 뒤쪽이 길게 하는

등 여러 시각적 방법을 통해서 시대적 모순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그런 걸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들 ‘아몰랑 구름’에 매몰되긴

했지만…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대로

받아들여 즉각적인 분노를 폭발적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예전에 나도 그런 것을 해보려 했지만 잘

안 되더라고. 나는 이렇게 교묘한 글귀를 써서

표현하고, 둔탁한 패러디를 하고 그런다.

이번 전시는 상대적으로 힘을 뺀 것 같고, 또

선생님의 원래 스타일도 그런 것 같다. 저는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부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좌표가 되기도 하는데, 그

자체는 가볍게 떠있지만 아래에는 무거운 것이

가라앉아 있다. 황세준 작가는 그런 것을 ‘거리

조절’이라고 표현했다. 1997년의 좌담에서 당시

미술의 엄숙주의에 반발하려 했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런 것을 의식하시는가?

그렇다. 내 동그라미 패턴은 부표다. 거의

체질화된 것 같다. 예전에는 농촌, 농부, 마을

등의 주제를 다루었고 거기에 역사적인 것이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 그냥

명작전’이라는, 내용을 가늠하기 어려운 전시

부제는 김정헌 선생이 발산하는 유연함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우리 시대의 가장 빛나는 끼”로 그의

작품과 면모를 일축했다. 최근 그의 12년만의

개인전을 계기로 작품에 대한 과거와 오늘의

이야기, 언뜻 부표처럼 떠 있으나 분명한 좌표를

찍고 있는 작품들에 대해 나눈 심도 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날카로운 질문,

둔탁한 답변

도입되면서 동학의 도상들을 그렸고, 그런 주제가

(전시장의 <곡괭이 선생> 작업을 가리키며)

저 곡괭이 같은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1997년의 좌담회 기록을 보면 박이소 (당시

이름 박모)가 내 그림을 ‘bad painting’, 다시

말해 ‘일부러 못 그린 그림’이라고 한 바 있다.

전시에서도 100개의 패널을 마치 실패한

그림들처럼 만들었다.

그때 ‘미술이 과연 뭘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미술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문장을

당시 표제어처럼 자주 사용했다. 미술이라는

것이, 이미지라는 것이 그럴듯하게 그린 것이건

막 그린 것이건 여러 방법으로 관객을 거의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구태여 뭔가를

묘사하려 하거나 내면의 무언가를 보여주려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거친 패널

위에 이미지 100개를 만들어서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미지를 조합해서 보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게 그때의 콘셉트였다. 그 전시를

계기로 이영욱, 박찬경, 박이소 같은 날카로운

친구들이 모여서 좌담을 할 때, 박이소가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배드 페인팅’이라고 표현한

건 제일 잘 이해한 거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는

잘 그리려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그림은 재빨리 그리다 보면 이미 바탕이

된 경우가 있다. <섬진강에 대한 비대칭적

사유>(2011)도 답사를 다녀와서 거의 단색으로

그린 것인데, 그걸로 부족해서 동그라미와

호밋자루를 더한 것이다. 하여튼 먼저 생각한

주제가 있더라도 표현을 하면서 많이 바뀐다.

‘이걸 그려야겠다’ 한 것이 끝까지 관철되는

경우가 잘 없다. 물론 광주비엔날레의 경우는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주제 대로 큰 작품으로

채워야 해서, 몇 가지 아이템을 정하고 정치, 5·18

등의 주제를 정하고 그린 것이긴 하다.

요즘에는 기억력도 안 좋아서 하루 지나면

생각이 사라지기도 하고, 이 생각이 나면

이렇게, 저 생각이 나면 저렇게… 그렇게 해서

자동으로 거리조절이 된 거지, 일부러 거리조절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체질화된 것 같다.

<고풀이>(2015)라는 그림의 경우에는 그

위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을 때 황세준이 보고

그대로 좋다고 해서, 참 취향도 여러 가지다,

했다. (웃음) 그 무렵 민속박물관에서 책을

보내주었는데 그 책에 실린 굿의 이미지를 보고

‘고풀이’나 소주병에 나뭇가지를 꽂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렇게 책을 읽다가 덧그리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 전시를 보고 생각을 얻기도

한다. 금강산 이미지에서는 거리를 만들기가

어려웠는데, 그때 마침 강홍구의 전시에서

자장면의 이미지를 보고, ‘너의 자장면을 가져다

그려도 괜찮겠냐’고 했더니 얼마든지 하라고

해서 <금강산도 식후경>(2016)이 나온 거다.

비무장지대를 그린 <이상한 풍경>(1999)은

성조기, 오성기 액자까지 내가 직접 만들어

넣었지만, 어느 전시에서 선보였는지 기록도 없고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그림인데, 이번에 젊은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다시 보니 나도 좋더라.

선생님은 그림에서는 그렇게 거리조절을

하시는데, 예전에 연극 <꿀떡꿀떡낄낄낄-유신의

소리>에서는 연기를 진짜 못하시더라. 일부러

못하신 건 아닌 것 같았고, 민정기 선생님과 같이

하시니 비교가 됐다. 물론 박찬경 선생님보다는

잘하시는 것 같더라. (웃음)

아마추어가 그 정도면 잘한 거지. 내가 못해야

민정기가 진짜 배우가 되는 거다. 박찬경은 뭘 좀

할 줄 알고 시켰더니 영…. (웃음)

민중미술 작가로의

규정과 한계

이제 민중미술 자체보다는 그런 ‘규정’에

대해 여쭤보려 한다. 최근 인터뷰에서

‘민중미술’이라는 규정이 부담스럽다고

말씀하셨지만, 선생님께 민중미술 작가라는

이름은 항상 따라 다닌다. 그리고 이제

민중미술은 특정 시기에 나타났다 사라진 하나의

역사로 기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작가는는 그렇게 어떤 역사적 운동이나 경향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선생님께서

젊은 작가들에게 그런 규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예를 들어

‘포스트민중미술’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을 때,

그 대상이 되었던 젊은 작가들이 격하게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

민중미술도 아니고, 포스트민중미술이라고 하면

더 싫어하지. ‘탈’-민중미술이라고 해줘라.

‘포스트’에 ‘탈’의 의미가 있어서, 저는 그 말을

‘문제의식을 공유하되 방법이나 접근 방식을

다르게 취하는’ 정도의 의미로 해석했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여전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작가는 무언가로 규정되는 것을 다들 싫어한다.

민중미술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민중이냐, 그래서 나 스스로

‘민중 부르주아’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지금도

비슷하다. 진짜 민중이라는 의미로 규정한다면

그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게 어디 있나. 민중미술

운동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주도한 것도 없다. 내

별명이 ‘고아원 원장’인데 그런 티가 나는 정도다.

지금도 미술사적으로 민중미술 운동이 있었고,

내가 그중에 주도적인 여러 인물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작가를 ‘민중미술 작가’ 라고 규정해버리면,

작가들은 여러 층위를 가지고 작업하고 싶어하고

다양한 면모를 갖고 싶어하는데 원치 않을 수밖에

없다. 아마 젊은 작가들은 더 심할 거다. 주변에서

‘민중미술 키즈’라고 부르면 얼마나 화가 나겠나.

‘포스트’라는 말도 애매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저항미술의 측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에 ‘민중미술’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를 구성할 때,

‘민중’미술협의회로 하자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민족이 그 당시로서는

비교적 넓은 의미여서 선택했던 것이다.

‘민미협’을 만들긴 했지만, 단체를 조직해서

운영하는 것이 진짜 민중미술은 아니라고 본다.

민중미술이 예술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단체와 관련 없이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밑바닥에서부터 같이 시대적인

의식으로 공유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민중미술이다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우리

시대의 삶의 변두리에, 스스로 낮게 위치해서,

세상이 불편하게 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스스로

중심에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약간 불량배

같은 기질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후배들이 꽤 있더라. 약간 데카당한 태도를

가진. 민중미술이건, 민족미술, 혹은 둘다 아니건

작가들의 기본 자세는 권력으로부터 좀 멀어…

내 스스로 권력에 가까이 가놓고… (웃음), 하여튼

태도는 그랬으면 좋겠다.

또 다른 권력인 자본에 관해서 여쭤보고 싶다.

민중미술이 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값이 오른다고

하더라. 그런 점에서 저는 김정헌이 오랜 시간

작업을 해서 그의 작품이 결국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렸다더라는 식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으면 하고, 그래서 좀 더 새로운 작업과

전시를 보고 싶기도 하다.

시장에서 어떻다더라 하는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더라. 나도 시장과 관계없이 내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왔고 판매를

거부할 수는 없지만 자본의 행세를 하는 화랑에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지난번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있었던 《민중미술의

복권》 전시는 화상이 완전히 상품처럼 작품들을

꺼내놓은 전시였다. 요즘 갤러리 화상들은

노골적으로 상품 가치가 있다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것이 싫은 것이다. 물론 누가 내

작품을 사고 싶다 한다면 자본주의에 저항한다며

판매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전시라는 것이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잘 모르겠다. 전시를

열면 “이 자가 아직도 내 전시에 안와봤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웃음) <어린

왕자>를 보면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 사는 별이

있는데 어린 왕자에게 자신에게 와서 찬사를

바치라고 한다. 전시회를 열면 자연히 작품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게 되고 내가 그 허영심

많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12년만에 개인전하면서 병들었다. 아이고, 또

전시를 하면 내가 잘난 척하고 꺼떡꺼떡 할텐데

내가 그런 내 꼴을 어찌 보나 싶다.

거꾸로 내가 물어보고 싶다. ‘베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표절이 아니라

패스티쉬나 패러디라고 하던데 나는 “빌려다

쓴다”는 표현을 쓴다. 내가 젊은 세대를 미리

빌려다 쓰기도 하고 과거를 빌려다 쓰기도

한다. 빌려다 쓰기는 괜찮은 방법 같다. 인류의

삶 자체도, 진화도 그렇게 잘 된 표현을 빌려다

쓰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겸재 정선의 금강산을 되살리고, 오늘의 자장면을

넣은 것이다. 내가 자주 이야기 했지만 발터

벤야민은 인용구만으로도 된 책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지식 체계가

정립되어 있었겠는가. 나는 그림쟁이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문학이건 미술이건 남의 것을

가져다 쓰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없더라.

이 질문이 구름이 왜 두 개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좀 더 나은 질문 아닌가? 근데 구름이 세 개면

이상할 것 같긴 하다. (웃음)

겸재 정선 같은 고전을 가져오는 것은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지고 일반적이 되었다. 다만

선생님께서 다른 작업으로부터 어떤 것을

빌려오게 되면 빌려온 대상의 형식이나 성격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김정헌이 가져왔다’라는

사실이 일종의 선언처럼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저는 궁금증을 많이 풀었고, 여기 계신 다른

분들도 질문을 하시면 좋겠다.

선생님의 작품명과 이번 전시 제목이 독특하다.

작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좋겠다.

(이경희. 《건축신문》 편집자)

내가 제목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림에 보면 표제처럼 제목을 화면 안에 적는

경우가 많다. 설명을 길게 할 수 없으니까 제목에

압축한다.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처럼

광고 카피를 이용한 예처럼, 제목은 이야기

그림에 들어가는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성공하기도, 또 다른 것은

실패하기도 한다. “아차, 아차산이로구나!”, “주목!

태백산의 주목 나무를 주목하자”는 지금 내가

봐도 유치하다. 하지만 내 작품이 심각한 것도

아니고, 제목이라도 웃겨야 하지 않겠나. “국가를

향해 쏴라!”, “인양하라!”처럼 영화 제목 비슷하게

지은 것도 있다. (그 말투로) 내가 고문으로 있는

단체의 젊은 친구들에게 SNS에서 “고문으로서

알린다. 내 개인전이 열리고 있으니 와서 보라!”고

했더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비장하게) “아,

오라하셔서 왔습니다!”라고 하더라.

작품을 보면서 선생님의 매체가 회화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화실에서

조용히 혼자 작업하는 작가들과 달리,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회적 활동을 하시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소통이 작품에도 드러나는 것 같다.

쉽고 압축적인 텍스트를 사용하신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성희.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분명히 그런 면이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그림에 드러나는 것 같다.

인터뷰가 너무 길어졌으니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이제 마무리할까 한다.

1) 미술을 통해 민중현실에 발언한다는 취지로 창립한 ‘현실과

발언’은 군부독재와 소비사회 비판, 민족분단 문제 발언,

일상생활 발견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1980년대 수차례 동인전을 열었고, 1985년 민족미술인협회

창립으로 동인 작가들이 늘었으며, 중심인물 중 한 명인인

판화가 오윤이 1986년 작고하면서 1990년 공식 해체했다.

인터뷰. 안소현 독립큐레이터. 미학과 미술관학을

공부하고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로 근무하였다. 《x사운드: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 《끈질긴 후렴》,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예술의 정치성과 전시

공간의 의미 형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김정헌1946년 평양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월남, 부산과 서울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공주대 미술교육과 교수, 민족미술협의회, 문화연대 대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0년부터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했다. 주요 개인전으로 《생각의 그림, 그림의

생각》(2016), 《백년의 기억》(2004) 등이 있고, 제1회 광주비엔날레(1995) 특별상을 수상했다.

젊은 예술가들과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를 만들어 제천의 한 폐교에서 마을운동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림과 말, 그림과 이야기를 융합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 캔버스에 아크릴, 93x93cm, 2015

<행복의 모습>, 캔버스에 아크릴, 136x200cm, 1982

<희망도 슬프다>, 캔버스에 유채, 75x75cm, 2015<자본의 배를 탄 국가>, 캔버스에 유채, 63x75cm, 2015

<곡괭이 선생>(1995), 판넬에 혼합재료, 140x1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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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7: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1312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것을 실행한 사람은

근현대에 요우미 작가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우리한테 유라시아라는 대륙은

의식과 관념에서 잊혀졌죠. 왜냐하면 아시아의

결정 변수가 대양으로부터 왔거든요. 과거

우리의 활동무대였던 대륙적인 사고방식은

국경이 설치되면서 다 분할되고 혈맥은

끊겼고, 땅이 플랫하면서도 연속적이라고 하는

열린공간이라고 하는 그 성격을 우리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요우미 작가의 그간 프로젝트들을 크게

몇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빅히스토리 관점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합니다. 빅히스토리라는 역사학 방법론은

시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이 없었던 시간까지도

역사에 편입하는 작업이죠. 현대사상이 인간을

넘어서는 소위 ‘포스트휴먼post human’이라고

하는 입장이 있죠. 그랬을 때 인간이 없었던

시간조차도 역사화 한다는 사실은 지금의

휴머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적인 작업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르네상스형

사고방식입니다. 르네상스는 대부흥이 아닌

고전의 회기죠. 태초, 고대, 중세에 만들어진

고유의 독특한 사유가 현대에 도래하면 과거와

근미래 사이에서 새로운 시간의 교차를

만들어내죠. 여기에서 우리가 현재라고 하는

이 감옥, 흔히 현재에 집중하기 때문에 소위

그 ‘시간의 사레’라는 현상에 아주 강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과거를 포획해 온다든가

미래학자처럼 미래를 견인해오는 방식을

택하는데, 그것이 부분적이었죠. 근데 요우미

작가는 굉장히 전면적입니다. 과거의 시간을

가져오는 ‘앤틱 컬렉터antique collector’ 성격이

강한데, 동시에 미래를 접촉하는 얼리어답터까지

겸하고 있어 제 머리가 혼란스러운 정도입니다.

이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고 전체 프로그램을

봤을 때 구체적으로는 우리한테는 상당히 익숙한

‘노마드nomad’라고 하는 주체화 과정에 있어요.

한국사회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십여 년 가까이 노마디즘 혹은

유목주의라는 표현이 득세했고 예술에도 많은

영감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말을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는 판타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우미 작가는 판타지에서 멈추지

않고 리얼리티로 치열하게 진행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어떤 역설이 발생하죠. 즉, 유라시아

대륙을 교통과 통신을 일치시키면서 자기 몸으로

그것을 체험한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항상 최초의 노마드 개념이 재설정되는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드리고 싶은 질문은, 요우미 작가는 유라시아

대륙 중에서도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여행을

하셨죠. 그 길은 사실상 마르코 폴로, 현장법사,

징기스칸과 동행했던 야율초재耶律楚材, 그외

장춘진인長春眞人, 혜초스님 등이 갔던 길입니다.

아주 유서 깊고, 우리로서는 성지순례를 하는

것처럼 답사를 해야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어렵죠. 어떻게 이 어려운 여행을 하게

됐는지 계기와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생각의 노마드’로서 어떻게 자신만의 게임작업을

하게 되었는지도요.

제 프로젝트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월경越境과

혼재混在>라는 프로젝트로, 들으신 것처럼

실크로드를 비유적인 사유의 방식으로 사용해서

다시 유목민이 되어서 국경을 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의 굉장히 개인적인

여행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한데, 그보다 먼저

보시는 포스터에 보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의 이름이 나와 있지요. 큐레이터로서 이

작가들이 모두 공연, 영화, 렉처퍼포먼스 등의

형태로 매우 수행적으로 해당 주제를 실행한다는

이야기를 먼저 드립니다.

저는 약 2년 전 5주에 걸쳐 500킬로미터를

여행했습니다. 육로를 따라 중국 중심부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국경 근처까지 여행했습니다.

제가 따라갔던 루트는 주로 7세기에 현장법사가,

12~13세기에 마르코 폴로가, 19~20세기 초

유럽의 고고학자와 수많은 여행자들이 지난

자리입니다. 당시 여행에서 받았던 첫인상은,

우리 머릿속에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육로를 걸었을 때 사실

동서의 구분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이 굉장히 느리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체처럼 느껴졌고, 이는 동서

간의 음식, 건축, 회화, 시각문화 언어, 종교

관습 모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시에,

여행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도 했습니다.

실크로드를 여행했던 승려, 고고학자, 중세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계속 읽으면서 여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각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몇백 년 전, 천오백 년

전 다른 여행자들과 제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들이 그 공간에

남기고 간 무언가와 제가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굉장히 사변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제가 여행을 하는

중에는 시간과 공간이 접히고 겹친다는 느낌이

들었고,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월경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 저는 하나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실크로드를 여행했던 여행자나

인물이 되어볼 수 있는 보드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게임 과정 중 서로 교류가 가능하고,

역사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을 펼치기도

하고, 특정 인물이 여행을 해야 했던 추동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사명 혹은 충동을 느껴서

여행하게 됐는지, 어떤 유목적인 정신이 깨어나서

게임을 하게 됐는지 생각해보는 게임입니다.

‘실행의 노마드’와 ‘생각의 노마드’를 일치시켜

가는 작업, 거기에 수행성performativity’이

있다는 거죠. 노마드라는 건 자유로운 발상,

자유로운 실행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둘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만

앞설 수도 있죠. 그런데 그 생각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으면 앎의 세계만 많아지고, 실행의

몫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는데, 그런데 실제

그것을 했을 때,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옛

선현들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구나, 현장법사가

걸었던 길을 걷고 있구나’ 하는 것이 단순히

앎의 기억이라던가 환기가 아니고, ‘시간이

겹쳐진다’는 사실이죠.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 길 위에 또 다른 시간의 층이

포개어지는 듯한, 그저 단순한 감정이 아니고

소위 ‘중층시간’이라 할 수 있겠죠.

아까 제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시간을

말씀 드렸는데, 길을 걸을 때 누군가를 그 길을

걸었던 선인들을 생각했을 때는, 또 시간의 어떤

층위가 계속 발생하는 것 같아요. 바그너는

성배를 찾아가는 ‘파르지팔Parsifal’의 모험담을

오페라로 만들면서, 1막 마지막에 “여기서는

시간이 공간으로 바뀐다”고 적었습니다. 공간을

걸어가는데 ‘시간차원’이 열리는 거죠. 저도

아시아예술극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유라시아

대륙을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비자 문제가 너무

까다로워 멀티비자를 만들 수는 없을까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국경은 아시아인이 만든 게

아니거든요. 아프리카도 마찬가지로 정복자들이

이해관계와 욕망에 따라 국경을, 그것도 심지어

직선으로 만들어놓았죠. 원래는 국경이라는

게 없었죠. 국경이라고 하면 국가체제가 있는

곳이고 또 그것을 지탱하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 있죠. 그런데 요우미 작가는 ‘결코 노마드는

낭만이 아니다’는 것이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자본주의 문제를 현대적으로

사유를 해왔어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사유를 해왔는데 바로 노마드 자체를 그 조건

속으로 되던지는 겁니다.

노마디즘Nomadism을 낭만화하면 안 된다는

부분을 감사하게도 강조해 주셨는데요. 현재 그런

경향이 우리 사회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정치적인 맥락에서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고속철도 계획만 봐도 낭만적인

접근이 정치적 맥락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고속철도 아이디어에는 아마 한국도 연류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경향을 다시

생각해보고 또 질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크로드가 과연 이동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중요했던 것일까? 장소 간의 사람, 물자 이동

측면에서만 중요했던 것인가를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장소와 장소간

그리고 문화와 문화간에 상호작용, 교류가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아프리카 국경에 관한 사례는

중앙아시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희가 특정한 어떤 시공간과 다시 연결을 맺어

보려고 할 때 꿈이라던지 어떤 월경적인 사변이나

상상 등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국가주의라던지 민족주의 그 다음에

위에서부터 그냥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역사에

많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자면,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 중에도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는 작가가 있는데요. 일단

중앙 아시아에 보면 모든 ‘‐스탄Stan’ 나라들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나라들의 국경을 나눈 것을 보면 사실

최근에 국경이 지어졌을 때 문화나 언어, 역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굉장히 단순하고 편협하게

마르크스 스타일로 정치 경제 부분만 고려해서

국경을 나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타지키스탄 경우는 산지농업, 우즈베키스탄은

저지대 농업, 키르기지스탄은 산지 유목문화,

카자흐스탄은 초원 유목문화, 투르크메니스탄은

거의 사막에 가까운 건조지대 농업 등 이런 정치,

경제적인 요소로만 국경을 나눈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아시아문화전당예술극장 개관페스티벌 때

참여했던 작가 중에도 우즈베키스탄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작품이

있는데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인 조치들이

젊은 아티스트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 국경,

월경을 다르게 본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합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작품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로렌스 아부 함단Lawrence

Abu Hamdan이라는 아티스트의 <함성의

계곡 속, 언어의 골짜기>에서 ‘함성의 계속’은

실제 지명입니다. 이곳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간의 국경지대 지명입니다. 이곳은

원래 전통적으로 이슬람교도 중에서도

드루즈인Druze人이라는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원래 살던 고향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국경 때문에 인위적으로 갑자기

분단된 것이죠. 아시다시피 이 국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넘기 힘든 국경 중 하나입니다.

아부 함단 작가가 기록한 것은 드루즈인이

일상적으로 매일 실행하는 어떤 행동입니다.

그들은 계곡 양편에 매일 모여 스피커로 친구와

가족의 안부를 소리 질러 묻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언어가 정말 물질적인 어떤

매개체 자체로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언어를 통한

월경’이라는 개념을 좀 더 은유적으로 접근해

번역의 문제를 다룹니다.

언어를 통한 월경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가로 슬라브 앤 타타르Slavs and Tatars라는

콜렉티브 입니다. 이들은 베를린장벽 동쪽부터

만리장성 서쪽까지 이 작업을 한다고 본인의

작업을 설명합니다. 바로 유라시아인데요. 이들은

작품에서 음역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중앙아시아의 몇몇 언어들, 그리고

코카서스 지역의 언어들이 구소련이 행했던

어떤 정치적인 국가화 과정 속에서 레닌이

얘기했던 “중앙 아시아의 혁명은 언어들을 라틴

문자화 하는 것이다. 로마자화 하는 것이다”

라는 언급 때문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시리아,

아제르바이젠 그 모든 지역의 다른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언어들이 하나의 문자체계로

통일이 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다 로마자로

통일되었다가 이후에는 키릴문자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슬라브 앤 타타르에 의하면, 이러한

언어변화 과정에서 뉘앙스들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혀를 긁는 것 같은 ‘하’ 소리가 나는

음소인데, 이것이 로마자 문자체계에는 없기

때문에 음소가 담고 있는 뉘앙스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죠. 작가들은 이 음소가 굉장히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어떤 성적인 내용도

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문자체계로 옮겨지면서

문자가 단순화 되었을 때 어떤 관능성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우리가 언어와

신체적으로 맺는 연결관계를 되찾으려 하는

것이고, 이 또한 제가 볼때는 월경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요우미 작가가 ‘월경Transgression’의 개념을

쭉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아시아예술극장에서 열린 <월경과 혼재>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며 동서양의 차이를

초역사적인 우주적 상상력으로 담론화한 강연,

상영, 공연 프로그램이다. 이 장을 기획한

요우미는 직접 광대한 대륙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노마드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실크로드를

사유의 수단으로 삼아 오늘날 국가, 인종,

경제성장이라는 문화·정치적 규범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지난 3월 기획자 요우미와 안무비평가

김남수가 만나 대담을 나눴다.

유라시아의

심원한 시공간

과거의 월경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월경과는

다릅니다. 지금의 월경은, 예를 들어 시리아

난민이 발생을 했어요. 국가가 이 윤곽이

터져버려가지고 그냥 지구촌에 수백 만 난민이

발생하자 유럽, 미국, 아시아에서는 난민을

얼마나 수용할 것인가, 월경을 허용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사고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직설적으로 ‘내가 대통령이

되면 난민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인기를

얻곤 하죠. 독일의 경우도 국민들은 내심 받아

들이지 않으려고 하는데 국제 정치의 대의명분

때문에 받아들이기도 하고, 난민들이 실제

유럽문명 안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장면도 보게

되고요. 그래서 월경이라는 문화적인 ‘충돌’과

또 시간이 지나면 ‘접변’ 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혼재syncretism’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게 휠씬 더 유연하고 또

폭력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런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요.

실크로드가 나뭇잎의 잎맥처럼 되어 있는데

나뭇잎 하나를 이렇게 보시면 중앙 잎맥이 있는데

거기서 계속 번져나가잖아요. 인체에 비유하면

모세혈관과 미세신경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린

거기에 대해 몰랐거든요.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알 수도 없고, 거기 가서 그 마을에 할아버지를

붙잡고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죠.

그런데 직접 가면 거기 다 있어요. 요우미 작가의

월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월경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월경을 하는지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혼재’ 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한

것이 아까 말씀하셨던 동서양의 구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지금

독일에 거주하면서 그곳 예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유럽의 어떤 지적 전통을 조금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놀라는 것이, 소위 ‘서구’라는

것은 스스로를 규정할 때 항상 타자가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반면, 비서구 사회 혹은 동양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 외부를 필요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개념적인 경향이

지금의 난민 상황을 결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데요. 유럽은 항상 ‘자신과

타자’, ‘자아와 타자’, ‘유럽과 외부’라는 구분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 서구라는

것 자체를 본인들이 실제로 본인이 아닌 무언가를

기반으로 자신이 아닌 것을 기반으로 ‘서구’ 라는

개념을 만들고 지어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몽테스키외나 헤겔,

마르크스 등의 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트워크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의

관점 또는 수평적인 관계 혹은 서로 간의 어떤

접속적인 연결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와

타인 혹은 유럽과 비유럽 혹은 인간의 영역과

비인간의 영역 간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고요.

이 네트워크의 이미지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말씀드리면 조금 더 은유적인 접근인데요.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얘기할 때, 보통 역사적으로

굉장히 무역량이 많았다고 생각을 하시는데

그래서 실크로드를 기본적으로 교역 네트워크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고학 자료를

실제로 들어서 설명을 할 때 많이 놀라곤

하시는데, 그 실크로드 상에 위치했던 중요한

지점에 남아있던 조세 기록들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실크로드 위의 교역량이 하찮을 정도의 수준으로

굉장히 적었다고 합니다. “한 15마리의 낙타가

3kg의 보석, 3kg의 향료 정도를 싣고 다녔다.”

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의 기록이고요. 역사 시기

대부분에 무역량이 그렇게 작았습니다.

그래서 이 실크로드의 네트워크는 사실

굉장히 좀 자연 발생적이고, 즉흥적이고

소규모였습니다. 그래서 조직적이거나 어떤

열강이라던지 혹은 거대한 사업적인 목적을

가진 개체에 의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고요.

소규모 무역상들이 만들어 냈던 네트워크

였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분산된 신경체계 같은

네트워크였고, 저는 오늘 이런 실크로드의

이미지를 실제로 닮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물론 이 얘기를 할 때 가장

먼저들 떠올리시는 게 인터넷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인터넷이야말로 위에서 부과된 통제체계에

불과한 것이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데서는

저희의 정보들이 계속 저장되고 노출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무한한 자유가 있고

자유로운 정보의 흐름이 있는 것 같지만 인터넷은

실제로 그러한 체계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에 또 소계되는 ‘비트코인Bitcoin과

블록체인Blockchain’에 관해 논의가 있을

예정인데 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어떻게

은밀한 소통 체계로써 또 은밀한 금전거래로써

화폐없이 디지털 화폐로만 이루어지는 금전

거래로 이렇게 이런 인터넷 체제에 대항하고

있는지 이야기 할 예정입니다. 이 비트코인도

실제로 지금 중국정부를 비롯한 많은 정부들이

자체적인 디지털 화폐를 만들려고 하면서 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요. 이런 면에서 어떤

네트워크의 정치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크로드를 이렇게 길을 연결을 할 때 동쪽

끝에는 중국이 있어요. 그리고 장안이라는 도시가

있고 서쪽 끝에는 로마가 있고,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이스탄불이죠. 이걸 연결하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기 때문에 하나는 장안으로 수렴되고

또 하나는 로마로 수렴되어 길 위의 모든

것들은 그냥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유라시아에 제국이 많았죠. 그렇기 때문에 제국

안에서는 네트워킹이 모두 수평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깥과는 항상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부풀어 오르면 중국으로 수렴이 되고

여기도 제국이고 로마도 제국이니까 수렴되는

곳이 여럿이 되는 거죠.

우리 몸에도 신경망이 있잖아요.

서양식으로는 이게 ‘신경계’라고 하는 거고,

동아시아 타입으로는 ‘경락’이라고 하죠.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길들이 있다고, 또 그 소위

‘기’라고 하는 특유의 표현을 가지고도 설명을

하는데, 거기서 둘 체계 사이에서 얘기가 아니라

유라시아를 하나의 신경망으로 생각할 때 그

상인들이 막 북쪽으로도 가고 남쪽으로도

가잖아요. 동서로만 가는 게 아니지요.

교역량이 적은 것은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심지어 그 시장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에서 다 만들어졌다고 하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실크로드라는 것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프로유라시아Afro-Eurasia’라고

하는 신경망이 있는 것 같아요.

아프리카 모로코에 가면 마라케시라는

유명한 옛 도시가 있어요. 일만 년 전에 만들어진

그곳 시장에 대해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 시장에 가면

물건 값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주인하고 흥정을

하다보면 공연이 하나 만들어진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장인들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직접

작업을 해가지고 만든다. 즉 다른 데서 물건을

떼어다가 걸어 놓는 방식이 아니다.” 하여튼

굉장히 아름다운 시장의 풍경을 막 그리는데

그 시장이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아라비아의

바자라고 하는 시장, 사마르칸트의 시장, 신장

위구르, 그리고 쭉 이어져 가지고 장안에

이르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의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집니다. 그게 매우

아름답기도 하고 월경에 관한 관점에서 저는

요우미 작가의 프로젝트를 이해하기 위해 요우미

작가의 선언문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월경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장이 있는 곳은 대체로 오아시스라는

곳인데 우리는 유목민에 이렇게 현혹이

되잖아요. 유목민을 낭만화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유목민들은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만 기록하지

않죠. 근데 오아시스에 들르면 그 시장에서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줄 수가 있어요. 근데

오아시스에서는 또 정주민이 있잖아요. 정주민은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이렇게 씁니다.

그들은 앉아 있으니까 복잡하게만 이야기를

이렇게 엮어 가죠. 무슨 서사시를 쓴다 던가

그래서 토인비 같은 사람은 진정한 혼재라는

것은 오아시스에서 유목민과 정주민의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그 새로운 아이디어하고

좀 복잡하게 만드는 능력이 사실 좋게 작용을

할 때 일어난다고 하면서 굳이 ‘정주stationary

유목민’이라는 표현을 쓰죠. 오아시스에

앉아 있는 책상머리 지리학자는 사실은 말만

이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리 철학자’가

되는 셈이죠. ‘지오필로소퍼Geo-philosopher’

요우미의 혼재와, 월경과 혼재의 선언문은

지오필로소퍼로서 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론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중에 또 한국인 예술가 박소영

씨가 남북한이 윤곽으로 굴레처럼 되 있는 것을

돌파하는 이야기를 해서 반갑기도 하고요. 혼재는

종교에서 쓰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미트라교 등

중앙아시아는 종교의 용광로인데, 십자가를 메고

있는 부처상이라던가 타지키스탄의 샤먼을 불러

영업을 하게 만드는 우즈베키스탄이라던가,

지리철학의 혼재가 일어나는 광경을 많이 보시고

또 작업 속에 직접적으로 천명하는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지리철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박소영 작가의

작품은 한반도 산맥이 가지고 있는, 산이 가지고

있는 어떤 ‘숨’을 추적하는 작업입니다. 한반도에

사는 그 자체로 이미 국경을 횡단하고 있는,

월경하는 존재인데요. 다음 주에 버스를 타고

무등산 절에서 ‘한반도의 산’ 산맥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사운드 체험 공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또 하나의 작품을

소개해 드리면 <신스마키낸> 이라는 콜렉티브의

작품이 있습니다. 굉장히 스펙타클한 지질학적인

현상에 대한 작업인데요. 야말Yamal반도에

있는 싱크홀에 대한 작업입니다. 야말반도는

러시아 최북단 북극 근처에 있는 지역인데

지름이 30~40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분화구가

갑자기 몇 년 전부터 생겼습니다. 아무런 어떤

설명이나 원인이 없이, 우연히 어쩌다가 생긴

현상인데요. 이 지역에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유목민을 알아보게 됩니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이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지구가

안에서 밖으로 뒤집히는 현상이라고도 이야기

하는데요. 유목민은 그들이 오래 전 하던 그 관습,

즉 어린 소녀가 신부가 되어서 그 구멍 속에

땅밑으로 보내면 노했던 땅이 진정을 한다는

관습을 이야기합니다.

이 영상 작품은 싱크홀의 장면들 다음에

유목민들을 만나서 이야기 했던 장면들이 어떤

작가들의 특별한 코멘트 없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 유목민들이 했던 역사적인 관습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은 일단 제쳐두고, 그것을

보면서 들었던 제 생각은 지구가 안에서 밖으로

뒤집히는 것처럼 그에 대항하는 현상 혹은 그와

유사한 현상으로 ‘지구가 밖에서 안으로 덮여오는

그런 현상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그런 시공간의 어떤 연속체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것이

과연 ‘다양한 시간대의 차이를 없애는 그런

과정일까?’ 혹은 ‘시간만이 아니라 어떤

다양한 종류의 의식까지도 하나로 뭉쳐버리는

그런 과정일까?’ 아니면 ‘이것이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체험이 가능한 것일까?’ 이런

생각들을 해보게 됐고요.

이 프로젝트는 역사에 관해서도 사실은

선적인 측면에서 ‘역사란 우리 뒤에 있는

무언가이다’ 라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선적인 역사를 굉장히 급진적으로 붕괴

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양한

시간이나 공간 혹은 다양한 의식체계를 한순간에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오필로소퍼’라는 표현을 쓴 것은

‘월경’을 기반으로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것이고, ‘혼재’라고 말할 때 요우미 작가가 드는

비유는 ‘히말라야 산맥’입니다. 제가 초반에

말씀드린 것처럼 빅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히말라야는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지구의

작품인 거죠. 예술작품이에요. 왜냐면 인도라고

하는 판과 유라시아라고 하는 판이 어느 시기에

쾅 부딪혀서 엄청난 심해가 갑자기 정반대인

육지로 바뀐 거죠. 뒤집어 진 겁니다. 인도

대륙을 보세요. 제가 ‘대륙’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시카고대학의 세계사 교수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인도는 대륙에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

대륙이다.”

현장법사가 장안에서 출발해 실크로드를 갔던

이유는 뭘까요? 인도에 뭐가 있기 때문에, 특유의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담긴

불경을 구해야 했기 때문일 겁니다. 서유럽을 다

합쳐도 인도보다 작다고 합니다. 근데 우리 환영

속에는 인도가 굉장히 작습니다. 서유럽과 비교해

일도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우미 작가는 이제 중국인이에요.

근데 수렴하는 방식, 소용돌이가 안으로

파고드는 방식이 아니라 분산형으로 바깥으로

원심력이 작용하는 방향으로 ‘지오필로소퍼’

역할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제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을 가지고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유라시아 대륙을 재설정, 재맥락화,

재발명 하겠다’는 이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선

우주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목민이 왔다갔다 하면서

만들어냈던 그것은 빅히스토리 입장에서 봤을

때 지구가 지향해온 생성 방식, 즉 진화죠.

20세기부터 21세기 우리는 지구의 건강을

위협하면서 진화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잖아요.

지구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요.

그런데 요우미 작가의 우주적 상상력은 지구의

결을 흐트러트리지 않습니다. 저는 거기서 어떤

자연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 무언가

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왜 중국이면서도 구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물어보셨는데요. 저도 물론 많은

중국인들이 굉장히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마드를

생각했을 때 사실 굉장히 중요한 개념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많은 중국인들이 그렇듯이) 어떤 동심원으로

봐라 봤을 때는 굉장히 정적이고 숨막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중국인으로서 그걸 겪으면서

굉장히 답답하게 느꼈고, 저는 그래서 거기에

회전을 거듭해서 조금 더 원심력을 가진 운동이

생겨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오늘 저의 사고와

사고과정이나 프로젝트에 담겨 있는 역사를

뛰어넘는 초역사적인 흐름을 완벽하게 짚어내

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김남수 안무비평가. 2001년 무용예술상 무용평론

부문 당선을 시작으로 평론을 시작했다. 무용월간지 『몸』

편집위원을 거쳐(2003), 퍼포밍아트지 『판』의 창간(2006)

및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 국립극단 선임연구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개발원 아시아문화아카이브 팀장 및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고, 전시 《오픈댄스-달리는 늑대들》,

《고래-시간의 잠수자》를 기획했다. 저서로 『세계신화여행』,

『백남준의 귀환』(공저)이 있고, 평론집 『고함』이 있다.

※ 본 인터뷰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과 두산아트센터

공동주최로 진행된 ‘컨템포러리 토크: 요우미x김남수’

(2016. 3. 5)의 내용을 주최측과 협의 후 정리한 것이다.

요우미 베이징 출신의 미디어아티스트이자 독일의 쾰른 미디어아트아카데미의 연구원으로 있다. 현재

자신이 실제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방문했던 공간인 실크로드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로이스 응, <흡혈귀 기시 >로렌스 아부함단, <함성의 계곡 속 언어의 골짜기>

슬라브 앤 타타르, <The Tranny Tease>

Ⓒ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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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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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1514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거버넌스 구축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활동하던

‘늘장’과 같은 시민 주체를 붕괴시켜 시대에

역행하고 있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늘장’의 문제와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의

일련의 과정은 공공에서 시행하는 재생사업과

개발사업에 많은 교훈을 줄 수 있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공공이 시행하는 사업에서

발생하는 오류 또는 문제는 지금과 같은

예비단계를 생략했기 때문이라고 보시는지요.

‘늘장’은 좋은 사례입니다. 서울시는 세운상가나

서울역고가도로 등에서 공유지를 활용하여

문화적으로나 경제적 측면 모두에서 시민을

위한 앵커시설(핵심시설) 구축을 위한 구상을

추진하고 있고, 이는 높이 평가할만한 좋은

실험입니다. 하지만 방향이 옳더라도 더욱

신중하게 진행해야 하죠. 유사 공간들의

활동은 이미 도처에 존재합니다. 2000년대

초반 프리마켓을 키워낸 홍대앞 놀이터가

대표적입니다. ‘늘장’도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에서 앞서 벌어졌거나 혹은

현재 벌어진 현상과 활동들에 대한 스터디가

필요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얻은 성과와

개발독재 시대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1990년대 초반부터 마을만들기, 도시재생

커뮤니티 운동과 같은 다양한 시민단체에서

활동해 오셨습니다. 그간의 시민활동 소개를 통해

우리나라의 마을만들기와 도시재생의 방향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93년 녹색교통운동 창립을 주도하면서

시민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지역과

밀착한 시민운동 보행환경을 테마로 ‘걷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 창립을 주도해 8년간

사무총장과 실무총괄을 맡았죠. ‘어린이

통학(로)안전’, ‘시청 앞 보행광장 캠페인’ 등 여러

운동을 했습니다. 1996년 ‘인사동 마을만들기’로

도시의 역사문화환경과 골목의 장소적 가치를

지키는 일에도 집중했습니다. 1999년 현재

쌈지길 자리에 있던 ‘인사동 12가게 살리기

운동’과 ‘인사동 작은가게 살리기 운동’으로

지구단위 계획, 문화지구 기본계획 수립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북촌마을가꾸기 기본계획’에도 참여해

주민참여, 지역장인, 예술인들과의 네트워킹

일을 했습니다. 서울시 주도의 틀에서 이루어진

‘북촌마을가꾸기’였지만, 민간에 기반을 둔

네트워킹을 만들었는데, 이명박 정부 때 북촌을

한옥 밀집지역만 남기고 규제를 푸는 것으로

한옥마을 정책이 바뀌면서, 저는 제 역할이 더는

어렵다고 판단해 홍대 지역에 집중했습니다.

홍대 정문 앞 놀이터 프로젝트를 통해 여러

사람과 프리마켓을 진행했고, 홍대 클럽데이

콘텐츠도 10년 정도 꾸렸죠. 그러는 동안 ‘인간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도시를 읽고자 했는데,

욕망이 무한으로 팽창하니까 더 이상 제어가

어렵고, 그 내발적 에너지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지역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낭만적, 계몽적인 접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대안을 찾으셨나요?

창조적인 에너지와 지역의 실천적 에너지가

합쳐지면서 그 지역을 재구성하는 동력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지역 플랫폼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하고자 한 게 충남 서천의 장항이라는

소도읍이었는데, 이곳의 근대산업 유산에

문화예술 콘텐츠를 접목해 새로운 지역모델을

만들려는 것이었죠. 그러나 내부화 과정에

어려움이 있어 끝까지 끌고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13년 서울로 돌아와 ‘늘장’을

만났습니다. 당시 제가 ‘늘장’을 이끈 건 아니었고,

일원으로서 ‘합 협동조합’, ‘공유공방 합’을

만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후 구청과의 충돌,

입지 여건, 내부적인 한계에 봉착하면서 운영이

난항을 겪어, 결국 2014년 늘장협동조합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2015년부터 대표를

맡으며 새롭게 운영을 하게 된 것이고요.

그간 수많은 도시 차원의 사업과 개발을

지켜보면서 얻은 교훈이나 방향은 무엇인지요.

공공은 공공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간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물자와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삶 속에서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정산하는 과정에서

욕망을 거르고 제어하는 기제가 전혀 없습니다.

욕망을 거른다는 것은 자기성찰과 반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게 없다보니 도시는 엉망이

되고 오로지 개발논리와 경제논리에서만 도시를

경험하고 접근하게 됩니다.

저는 본질적인 변혁이 두 개의 방향에서

온다고 봅니다. 하나는 기술의 응용입니다.

‘알파고’와 같은 뉴테크놀로지가 삶의 노마드를

강화시켰는데, 이농세대 이후 도시에서 성장한

아이들의 삶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정주보다는

유동성, 네트워크성, 접속의 개념이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방의 붕괴입니다.

일본에서도 보듯이 인구 고령화로 인해 행정구역

단위는 빠른 속도로 단위들이 소멸되고 있습니다.

20세기에는 이농 인구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

넣었고 경제적 동력이기도 했지만, 현재 지방의

소멸은 도시의 소멸을 동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금 지역에 대한 프레임은 대단히 낡았고

관념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존의 혼탁하고,

불안정한 청년의 창조에너지를 발굴하고, 지역과

매칭해 해당 지역을 재구성하는 동력으로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플랫폼은

현지에만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단위, 더

나아가 글로벌 차원에서도 네트워킹이 가능한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만들기가

우리에게 봉착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념인가에 대해 저는 의구심이 듭니다. 수많은

정책 입안자들은 도시재생과 마을만들기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지역의 어려운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포퓰리즘으로 이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계몽주의자 입장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자는 이를 도구화한다는 것에서 위험하고,

후자는 지역 현실과 현장에 무지하고 관념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마을만들기와 도시재생 관련

정책과 사업들이 말씀하신 지역과 생활개념의

시대변화를 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지역을 원단위原單位로 분절화 된 세포처럼

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의 지역 상황은

평균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각 지역은 결국

행정에 의해 구획된 것이고, 삶의 흐름은 속도와

방향에서 모두 다릅니다. 당연히 과제를 해결하는

접근 방식도 다르지요. 또한 중앙집권은 훨씬

강화되었고 지방자치도 10년이 넘었지만, 실제

매칭펀드 없이 기초지자체에서 예산을 세우고

자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각 수준에

맞는 범위, 규모, 깊이를 가지고 시민 주체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시민 주체는

지자체나 중앙정부에 물려 있거나 파편화되어

있어서 행보가 자유롭지 못하고 어젠다의

완성도도 부족합니다.

‘늘장’을 운영하시면서도 앞서 답변해주신 상황을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경의선 6.3km 구간은 서울의 서부권에서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삶이 흐르는

강’과 같은 곳이죠. 하지만 문제는 이곳이

공원으로 이어지면서 각 권역의 삶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주요 역세권 개발을 통해

지역들이 재편된다는 점입니다. 공원이 사회적

경제, 작은 삶, 작은 경제를 활성화하면서 (각

권역의) 삶의 생활 생태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대자본이 지역으로 침투하는

앵커를 철도역사를 기반으로 만들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까지도 자본주의 사회니까

인정한다 하더라고 이것은 너무 과도한 거죠.

거의 절반 이상의 부지가 대자본에 의해서

개발된다니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경의선

공원길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삶의 다양성이나

지속성을 일구어 가는 갯벌과 같은 풍요로운

젓줄이 아니고, 거꾸로 자본이 지역을 시장화

할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죠. 실제로

연남동의 경우, 난개발이 되고 있고 재개발이

된 곳은 주민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고 있어서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가 말도 못합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공공이 젠트리피케이션을

오히려 촉진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정책으로 대안을

제시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죠.

그와 같은 경의선 공유지의 상황에서 여전히

시민 주체들이 활동하던 ‘늘장’이 가지는 의미나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경의선 공유지에서 ‘늘장’은 앞서 말한 상황들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너지면 그 다음은 제어가 되지

않는 거죠. ‘늘장’ 같은 경우는 주변에 브랜드

아파트가 많이 들어오고, 저개발 된 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채로 방치되어 주거환경이

나쁜 삭막한 공간이란 말이죠. 이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경의선 공유지였습니다. 이런

공간에서 문화의 텃밭을 어떻게 새로 일구어

갈 것이며, 그 안에서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은

어떻게 모색할지 그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늘장’에서는 2015년 하반기에 공원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찾아와 쉬고 책을 보고 노는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한 어머니는 그곳이 빌딩

숲에 둘러싸인 오아시스이길 바란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홍대 쪽 경의선 공유지는

연남동의 센트럴파크라고 해서 ‘연트럴파크’라고

부르는데, 그곳은 그 지역에 맞는 문화공원으로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권역

별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접근이 정책적으로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위한

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또한 ‘늘장’과 연남동 모두 각 공간에 맞는

구체적인 디자인이 나와야 합니다. 눈에 띄는 큰

건물을 짓는 것보다, 실제 그곳의 삶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그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영구적인 건물을 짓기 보다는, 예를 들어,

영국의 <박스파크Box Park>와 같이 일정 기간

삶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라면을 먹고 싶을 때는 라면 그릇이, 비빔밥이

먹고 싶을 때는 양푼으로 바뀌는 과정을 합의하는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일부

전문가나 자본의 욕망에 의해 공간이 세팅되는

것은 문제지요.

‘늘장’이 마포구로부터 퇴거명령을 받고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이 시작되었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늘장’에 들어와 있는 경제 주체들에게는

지금이 분명한 한계 상황입니다. 그래서

시민단체와 결합해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을

만들었습니다. 큰 틀에서는 퇴거명령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받아내면서 ‘늘장’의 완성도를

높여나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의 사회적

경제 주체들은 나름의 여건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들은 경제활동을 하는 조직이지

시민운동 조직과는 다르니까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의 의미를 대외적으로

공유하고 함께 살려나갈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함으로써 공간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늘장’ 또는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에 많은 시민

주체가 참여하고 있지만, 공공의 개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공공의 역할과 지향해야하는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근 서울시는 역세권 개발, 임대주택, 청년주거

사업 등을 하고 있습니다. 도시재생, 역세권

개발 등 다 좋은데, 새롭게 무엇을 만들기보다는

이미 있는 공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부분에서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의 접근 방식을 서울시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마포구는 인허가권자로 ‘늘장’을

위탁해 운영한 당사자 중 하나지만, 결국 기존의

도시개발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묻어가려는 경향도 보입니다. 가령 홍대전철역

쪽에 AK타운을 만드는데 그와는 맥락이 없는

책거리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봅니다. 오히려 본질을 흐려요.

경의선 자체가 구 하나의 독점물도 아니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곳이므로 서울시 차원에서는

분명하게 접근 방식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원 조성했으니 할 일은 끝났다는 식, 혹은

역세권 개발은 철도시설공사사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의 방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경의선 공유지 전체에 제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계획안이 있으신가요?

도시재생센터와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죠. 경의선

공유지를 기반으로 주변지역과 연계해 삶의

에너지를 키워나가고, 그런 부분에서 서울시의

정책적인 출발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

출발점에서 권역 안에서 세분화된 소권역이 됐던,

(각 지역의) 대안들이 나와야겠죠. 이 속에서

주변부에 대한 관리방안도 나와야 되고, 개발이

여의치 않은 곳에서는 새로운 도시재생 수법 등도

논의를 하고, 전체적인 도시관리적 차원의 정책이

세워져야 된다고 봅니다.

‘늘장’처럼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 주체가

도시재생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정책적으로도

대안을 모색하는 모델이 다른 곳에서도

가능하다고 보시는지요. 다시 말해,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이 도시재생의 새로운 모델,

지자체와 시민 주체의 유기적 거버넌스 구축을

위한 실험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죠. 어떻게 보면 예비단계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주저앉을 수 있고, 예비단계를

발판 삼아 다음 플랜으로 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올봄은 그 실험의 구체성과 방향이 드러날

예정이라 참여하는 시민들의 고민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정리해 보면, 경의선

공유지에서 현재 시행되고 있는 역세권 개발은

강물과 같이 이어진 경의선 길을 끊어 정체된

웅덩이로 만드는 것이고, 모든 시민과 지역이

누려야 할 ‘도시의 권리’를 대자본에 팔아넘기는

행위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공원계획은

경의선에 면해 있는 각 지역의 정체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관 주도의 토건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한 이런 개발방식은 시민 주체와의

공유지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개발논리에

공공마저 가세하면서 사적 소유지만이 증가한다.

경의선 폐선 부지도 대자본이 과도하게 들어오며

삶의 다양성과 지속성이 위협받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작은 삶터인 ‘늘장’이 퇴거명령을

받자 시민들이 나서서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을

출범시켰다. 공유지 독점에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공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실험과 대책

최정한‘걷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도시연대) 사무총장으로 서울의 보행권 및 보행환경 개선에

뛰어들었다. 인사동 마을만들기(1996), 북촌마을가꾸기 기본계획(2001)에 참여하면서

마을만들기 운동을 주도한 바 있다. 홍대앞 놀이터프로젝트, 홍대 클럽데이(2001~2011),

서천 장항 재생을 위한 선셋장항프로젝트의 총괄기획(2011~2012), 늘장협동조합

대표(2015~2016) 등 지역의 문화와 도시재생 활동에 집중해왔다.

문제, 과제들을 통해 서울시의 정책은 현장의

구체성을 획득하면서 한걸음 더 진화된 정책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지요. 서울시가 보유하고 있거나

활용가능한 공유지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론이나 시스템 이전에 선경험을 충분히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 위에 도시재생을 위한

비영리 공익재단이나 거버넌스 중간지원 조직을

만들어야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공유지의 이용 또는

계획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 행정, 시민 주체,

시민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우선 행정 쪽에서는 (늘장에서) 경의선 문화적

도시재생에 대한 전시도 있었는데, 역세권

개발 등 토목 공사적 입장으로만 들여다보지

말고, 지역이라는 개념 속에서 전체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곳 경의선

공유지를 하나의 정책단위로 보고, 여기에 맞는

행정시스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거죠. 그게 서울시가 됐던, 마포구가 됐던

말입니다. 그 다음 시민 주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지금 구별로 마을기업이나 사회적기업이

움직이고 있는데 저는 조금 위험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거버넌스라는 이름아래 많이 묶여있고,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지지마켓: 공유지 난장, 2016.03.26.

경의선 공유지 보도블록 위에 그림과 글을 쓰고 있는 아이들 모습이다. 하얀 바탕에 노란색 글씨로 “경의선 공유지는 모두의 공간”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늘장과 경의선 공원 전경

땅을 둘러싼 자본놀음과 사회적 배제

사회가 시간 속에 축적해 온 공동체적

삶의 가치는 전통적으로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억압과

착취의 중심에 있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억압과 착취구조가 땅의 소유 유무에서

비롯된 것이고, 용산 철거민 사태나 이태원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젠트리피케이션

이슈 역시 소유로 땅의 가치를 높이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본의 독점적 지배로 인한 사회적 배제를

야기한다. 땅을 둘러싼 사회적 배제는 민간의

자본놀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최근

공덕역 인근의 경의선 폐선부지에 자리한

‘늘장’의 사용 계약기간이 만료되었다고 내린

마포구청의 일방적인 폐쇄결정은 행정력이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일방적인

권력놀음이며 행정력의 과잉으로 보인다.

개인이나 사회현상은 그것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참모습이 파악될

수 있다. 대상을 그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매우 중요하다. ‘늘장’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그렇다. ‘늘장’ 현상의 본질은,

단순히 유보지의 개발에 의해 특정 주체들의

행위가 지속적으로 보장되지 않음에 대한

갈등의 노출이 아니라 공유지에 대한

성숙되지 않은 사회적 인식과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합의의 비민주적인 절차가

고질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인

불합리와 모순에 저항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오히려 일반 시민들에

의해 야유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점이다. 최근 언론 보도가 나간 후

인터넷 상에서의 댓글을 보면 시민에 의한

시민사회의 배제가 매우 심각한 지경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현재의

‘늘장’은 시민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자 위기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으로

분한 로빈 윌리엄스는 학생들을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가게 한다.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세상도 달리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늘장’을 비난하는 댓글을

단 시민들이 ‘늘장’이란 책상 위에서 한번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다. ‘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저 개인이

아니다. 시민사회, 혹은 시민공동체의 열망이

개인화된 주체이다. 그들이 ‘늘장’을 열었던

것은 그 열망을 개인화하고자 함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와 함께 키우고 나눌 수 있는

희망의 공유지를 확보하여 자본의 땅이 아닌

모두를 위한 땅으로 지켜내고자 함이다.

자본의 물신숭배와 가치의 사물화

자본주의 물신숭배fetishism로 인해 인간과

사회의 관계가 사물화 된다. ‘늘장’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공동체를 위한 공유지로서의

가치가 자본이 개입될 여지가 생기면서

일순간 사물화된 것이다. 자본은 사물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고

이야기한 마르크스에 빗대어 보면 늘장의

폐쇄와 민간자본에 의한 개발행위는 마포구청,

그리고 철도시설공단과 대자본 사이의 배타적

사회적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시민사회나

지역공동체가 그 배타적 사회적 관계망에

개입하여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최근 늘장을 둘러싼 문제가

언론에 의해 부각되면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지시를 받은 서울시는 늘장의 대체부지를 한강

고수부지 인근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알려졌다. 대체부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늘장은 늘장이 있는 그

자리에 있어야 의미가 있다. 장소의 대체가

의미와 가치보다 우선하진 않는다. 그저 던져진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시민

공유지인가? 서울시가 소유하지 않은 땅이기에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유한 땅에 대한 서울시의 작금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소유하지 않음은 단지 현 상황에 대한

책임회피의 명분 거리일 뿐이다.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의 베벨 광장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매우 특별한 게 있다. 가로·세로

1m 정도의 유리바닥 밑의 지하공간에 조성된

‘유대문학 분서기념관’이 그 주인공이다. 유리

바닥 속을 들여다보면 지하의 어둠에 에워싸인

흰색 책장들이 보인다. 하지만 수천 권의 책이

들어갈 책장들에는 단 한 권의 책도 꽂혀 있지

않다. 1933년 나치정권의 선전 장관이었던

괴벨스에 의해 자행된 ‘베를린 분서’를

기억하고자 함이다. 유대계 작가들과 나치정권에

비판적인 작가들의 책이 불온서적으로 낙인 찍혀

바로 이 광장에서 불 태워진 역사를 상징화한

도서관이다. 이 텅 빈 ‘도서관’에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책을 불태우는

것은 서곡에 불과하다. 책을 불태우는 자는

언젠가는 인간도 불태우게 된다.” 공유지도

마찬가지다. 유보지로 남은 땅을 자꾸만 팔다

늘장에서 난장으로: 공유지를 지키는 시민행동이영범

경의선 공유지의 실험

제공

: 정기

그러다보니 공공 베이스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공공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거죠. 이 틀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더라면 ‘늘장’이 처음에 이런 식으로 안

들어왔을 것 같아요. 사업성도 따져야 할 것이고,

삶의 단위로서 생존해 갈 것이고, 지속적으로

생존가능한지에 대한 더 깊은 치열한 고민들이

필요했던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것에

대한 전략적인 접근과 주체 형성이 불분명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시행착오가 끝까지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이 시민사회와 결합하면서 극복 방법과

대안은 무엇인지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시민은 이런 공간을 수혜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시민들의 공간에 대한 느낌이나 애정을 시민의

모임, 시민이 주체가 되는 장으로서의 ‘늘장’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인터뷰. 정기황 건축학 박사. 사단법인 문화도시연구소와

엑토종합건축사사무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관심사는

서울의 근현대 도시건축을 문화적 집적체로 보고, 현재

도시건축에 남아있는 흔적에서 문화적 적응adaptation

과정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보면 마지막에는 도시에서 최소한 보장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존엄마저도 내다 팔게 될 것이다.

시민의 공유지로 남아야 하는 땅마저도

자본화한다면 역사는 훗날 오늘을 야만의 세월로

기억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권력의 불균등

행정과 자본이 결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공감과 결단이 요구된다.

늘 시민과 함께 하는 행정이라고 하지만, 정작

구체적인 행정력의 실천과정에서 시민사회가

납득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댄다.

시민을 위한 가치는 그저 전면에 내세운

허울 좋은 명분이 되고, 그 아래 도사린 행정

편의주의가 아마도 더 중요한 잣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시민들로 하여금 “우리는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혹은 우리는

진짜 한솥밥을 먹는 식구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늘장’의 땅 소유권을 갖고 있는

한국철도관리공단의 책무가 과연 그들이 말

한대로 자신들이 소유한 국유지를 잘 관리하여

가장 후한 값을 처 주는 사람을 골라 임대하거나

처분하여 다시 철도에 투자하는 것일까?

행정이 소유한 공공자산은 엄밀히 말하면

시민의 자산이다. 공공자산을 공공, 즉 행정의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어떻게 시정할

것인가? 그 주체가 한국철도시설공단이든,

서울시든, 마포구청이든 다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의 근본가치를 공유해야 할 행정력과

시민사회의 사이가 오히려 갈수록 권력의

불균등으로 치닫고 있다. 시민사회가 권력화

되어서 생긴 불균등이 아니기에 행정의

환골탈퇴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래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행정 시스템의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 공유자산의 사용과 처분에 관한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려는 행정력과, 공유지에

대한 권리 주장과 자율적 운영을 확보하려는

시민사회와의 대립을 궁극적으로는 도시 인권의

신장을 통해 해결해야만 한다. 공유지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성 확보는 공간이 인권일 수

있고 복지일 수 있다는 생각에 맞닿아 있다.

공유지의 자율성 확보는 도시에서 인권을 확장해

나가기 위한 기본권에 해당한다. 개발의 대한

저항이나 반대 프레임에 갇히면 담론을 만들어

갈 수 없다. 시민사회의 공유자산에 대한 자율적

운영을 통한 공유지 확보는 한 순간에, 아니면

늘장만으로 확보할 순 없을 것이다. 시민사회의

자율성의 영역을 제도화된 행정력의 틀 안에서

스스로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시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인식하고 행정력과의

대응과정에서 시민공동체의 가치가 우선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자유를 얻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늘장에서 난장으로, 그리고 대안으로서의

시민자산화를 꿈꾸며

시민행동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문화연대의 이원재 문화정책연구센터장은

늘장의 사태를 통해 도시재생이라는

옷을 입었지만 낡고 변함없는

개발동맹(정부+공기업+대자본)의 사회적 폭력은

반복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현재 도처에서

진행되는 도시재생사업에 내재된 대상화된

공공성의 가치와 실현방식의 폭력성의 끝이

어디일지, 그리고 그 일방적인 질주를 누가

제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명확한 것은 시민의

행동만이 대안이라는 점이다. 죽은 공간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시민공동체의 힘으로 꾸려온

대안경제 장터 ‘늘장’이 도시의 빈 땅을 허락하지

않는 자본의 개발 욕망에 의해 일순간에 사라질

위기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힘을

합쳤다. 2016년 2월 19일 늘장의 현재를 통해

미래의 도시 공유지를 고민하는 다양한 단체와

사람들이 모여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을

결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늘장’이 개발압력에

저항하는 난장으로 전환되었다. 여럿이 함께 하면

길은 뒤에 생긴다는 신념이 힘이 되어 움직인다.

자본의 시대, 불균등한 사회에서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공유지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공유지가

조성되면 그 주변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공유지의 비극이 아닌 공유지의 역습이다.

최근의 연남동이 그렇다. 경의선이 폐선화 된

후 공원 조성이 결정되고 난 후부터 오르기

시작한 땅값이 지금은 공원에 바로 면한 위치

좋은 곳이 평당 8천만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공유지로 인한 반사이익이 특정한 개인에게만

집중되는 공유지의 사유화가 발생한 셈이다.

경의선 공원의 연남동 구간처럼 선한 가치의

공유지가 누군가에만 배타적인 이익을 안겨주고

결과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과 같은 사회적

배제를 야기한다고 공유지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공유지의 역습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공유지 따로, 지역 따로’의

소위 따로 국밥형 지역재생의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다. 사후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처하는

수동적 접근이 아니라 공유지 조성과 같은 공공적

행위의 개입이 가져올 지역의 문제를 사전에

예측하고 부정적 결과를 최소화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이는 경직된 제도화된 시스템이

아닌, 공간에 개입된 이해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하여 스스로의 문제를 조정하고

결정하는 자율적인 시스템이어야 한다.

그 시스템이 껴안아야하는 문제의 핵심은

행정이 주도하는 공유지 조성에 뒤따라가며

급속하게 지역을 상업화하는 자본의 힘과,

그 힘으로 인해 거침없이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기뻐하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내 주는 지역주민의 문제를 어떻게

동시에 제어할 것인가이다.

해답은 시민자산화에 있다. 공유지를

지역과 묶어 시민자산화로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민자산이란 통합된 틀 안에서

공유지 조성과 지역재생을 함께 해 나가자는

것이다. 지역공동체 개발을 위해 공유지

조성과 지역재생을 시민자산화전략으로

통합하고, 참여주체로서의 행정과 주민,

그리고 이해관계가 있는 개발자본이 전략

안에서 상호이익을 적정화하는 조정과

타협의 협력적 계획을 진행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선 시민자산화를

단순히 건물이나 땅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공간, 주체, 프로그램이 통합된

플랫폼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유휴국공유지의 사용권을 시민사회가

양도받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행정으로부터

시민사회로의 공유지에 대한 자치적

권력의 이양이란 가치와 철학의 차원에서

시민자산화를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숲을 만드는 지혜

더불어 숲을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본으로 인해 사람과 공간 사이에 박힌

불신이 사라지고 개발압력에 의해 억압된

공간에 갇힌 시민의 역량이 해방될 때

희망의 공간은 우리에게 온다. ‘늘장’의

시민행동이 꿈꾸듯 공유지로서의 ‘늘장’

역시 더불어 숲을 이루는 희망의 공간이어야

한다. ‘늘장’에 담긴 다양한 시민주체들의

소중한 시간이 우리 모두를 위한 공유지, 더

나아가 시민자산이란 공간으로 전환되길

희망한다.

이영범 경기대 대학원 건축학과 교수/도시연대

이사. 경기대 대학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커뮤니티디자인랩(CDL)의 대표이다.

도시연대 커뮤니티디자인센터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공간공유를 통해 사회혁신을 추구하는

시민자산화은행 쉐어SHARE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제공

: 이영

Page 9: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1716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패널: 김현호, 유운성, 임경용

진행: 이경희

함께 하나의 책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내는 경험

이경희 글쓰기 워크숍 <기술적 이미지의

모험>을 진행 중이신 것으로 압니다.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볼까요?

유운성 저 또한 영화평론을 쓰면서 틈틈이

강의를 해 왔지만, 특정 감독, 작품 혹은 주제에

대한 강의 형식의 강좌는 많은데, 정작 비평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기도록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미 글을

쓰고 있거나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을 모집해

공동으로 주제를 정해 글을 쓰고, 토론하고,

책의 구조를 짜고, 출판까지 해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 거죠. 마침 더북소사이어티의 임경용

씨가 글쓰기 워크숍 제안을 해 왔고 이후에

사진비평가인 김현호 씨가 합류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기획하게 됐습니다.

임경용 더북소사이어티에서 글쓰기 강좌를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재작년에는 장혜령 씨가

수강생들과 함께 글을 쓰는 워크숍을 진행했고,

작년 말에는 박찬경 작가님이 젊은 작가들과 함께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어요. 작가들이 자신이나

타인의 작업에 대해 글을 쓰는 방식으로 워크숍을

진행하셨죠. 두 번 모두 참가자나 강사 모두

만족스러워 했는데 어떤 결과물을 도출해내진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함께 반드시 책을 만든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다 보니 좀 더 구체적인

목적이 있어야 과정도 더 좋을 것이라고

기대했죠.

김현호 사실 어떻게 해야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물론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는 식의 조언 같은 것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사실 정작 중요한 건 어떻게 해야

‘나'라는 인간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게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일일

거예요. 그렇지 않은 조언들은 한낱 근성론으로

빠지기도 쉽고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답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

글을 쓰려고 백지를 대면했을 때의 고립감은 꽤

지독합니다.

제가 정확히 기억하는 건 단 하나였어요.

좋은 매체의 지속적인 청탁이죠. 글이 지면에

실리고 특정한 독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면서 정말

열심히 읽고 썼던 것 같아요.

사실 백지 앞에서 무력한 건 저희나 참여자들이

마찬가지죠. 하지만 함께 하나의 책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내는 경험을 한다면, 잔소리나

가르침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와

유운성 씨는 각각 『말과활』과 『인문예술잡지 F』의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비평

말고도 둘 다 잡지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서,

그걸 바탕으로 시도할 수 있었던 워크숍이지요.

유운성 책을 낸다는 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검증된 필자를 물색하거나,

도중에 수정도 해 가면서 위험을 줄여나가려

하는 거죠. 그동안 저는 대학이나 사설

아카데미에서 영상제작 워크숍을 몇 차례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실험적인 다큐멘터리

연출자인 안건형 감독과 함께 했습니다.

영상 소스를 직접 활용해서 비평작업을 하는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워크숍이었는데요.

이런 워크숍의 경우 학기말이나 강좌가 끝날

무렵에 시사 및 총평회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항상 기관이나 영화제와 협력을 해서

참여자들의 작품이 공식적으로 상영될 기회를

만들고자 했어요. 워크숍에 참여한 이들끼리만

보고 총평을 하게 될 작품을 만드는 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불특정 다수에게 내보일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것은 꽤 다른 결과를 냅니다.

작업에 임하는 태도, 작품의 성격, 참여자들이

투입하는 에너지까지 완전히 달라져요. 그래서

글쓰기 워크숍도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해보자고

제안 했습니다. 이건 모험이죠. 검증된 필자가

거의 혹은 전혀 없는 책을 내는 일이니까요.

김현호 글과 책에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요. 글과는 달리 책은 하나의 물건이자

상품이지요. 이 말은, 글이 책이 될 때 특정한

변화를 견뎌내야 한다는 걸 의미해요. 예를

들어 글은 쓰는 이 자신이 일차 소비자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독립출판이건 학술서이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자에 맞추어서

자신을 깎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목차에 따라 각각의 글이 바뀔 것을 요구받기도

하고요. 이건 근본적인 차이일 수도 있어요. 글은

자기가 원하고 관심 있는 것을 쓰지만, 책은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결과물로서의

물건이니까요. 책의 요소에 맞게 글 각각이

상호보정을 해야 하니 참여자들은 각각 기획자의

역할도 가져야 하죠. 이건 일반적인 글쓰기

교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거친 경험일 수 있어요.

이경희 그러면 ‘기술적 이미지의 모험’이라는

주제에 대한 워크숍 참여자들의 글을 출판하는

것인가요?

유운성 그건 주제라기보다 화두죠. 워크숍

참여자 분들 가운데는 글을 쓰면서 ‘기술적

이미지’의 개념 정리를 하려는 분도 있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이 용어를 정의하거나 풀어보자는

게 아니다, 심지어 최종적으로 출간되는 책에는

아예 이 용어가 쓰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화두일 뿐이다’, 라고 말씀 드렸어요. 이렇게

진행하게 된 것은 강사 구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거였어요.

김현호 씨는 사진비평을, 저는 영화비평을

하고 있어요. 이런 이들이 모여 예술 일반 혹은

매체 일반에 대한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는

건 주제 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주로

사진과 영상에 대한 글쓰기로 제한하는 게

좋겠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사진, 영화,

디지털적 이미지를 가리키는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의 용어인 ‘기술적 이미지’라는 표현을

써서, 어느 정도는 포괄적이면서도 분명한 제한은

있게 고려했습니다. 이미지라고만 하면 회화는

물론이고 조각까지도 모두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지나치게 넓히는 건 무리라고

봤습니다.

임경용 두 분이 처음에는 ‘기술적 이미지의

몸’이라고 정한 것이었는데, 제가 ‘몸’을 ‘모험’으로

잘못 들은 거였어요. (웃음)

김현호 주제를 정해줄 수는 없지요. 화두 자체가

무엇인가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걸지도 몰라요.

단지 특정한 화두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각 글의

주제가 더 정교해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정교함을 도울 수는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특정 영역에서 비평을 하려고 하면

기본적인 텍스트에 대한 독서는 필요하거든요.

물론 글쓰기가 읽기의 부산물은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로 쓰기가 읽기를 강제하기도 하죠. 하지만

최소한, 아주 동시대에 벗어나지 않으려는 글을

쓰려면 기본적인 독서는 필요하거든요. 어떻게

글을 잘 쓰게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너무 벗어나는 글은 피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진비평을 예로 들면, 사진의 본질을

탐구한다거나, 찍는 이의 진정성을 상찬하는 등의

이야기는 안 하게 하는 역할은 가능할 것 같아요.

비평가와 비평 영역의 재발굴

이경희 아트씬만 보아도 월간지에서는 비평가

간에 논쟁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비평담론의 부재를 이야기 하면서도, 정작

단단한 플랫폼은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진행

중이신 글쓰기 워크숍이 젊은 비평가를 발굴하고

견인하고자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유운성 한국에서 비평이 존재했던 영역이

어디였나를 생각해보면, 문학과 미술에는

(한때는) 분명 있었다고 봐요. 비평이란

작품론이나 작가론, 당대의 경향을 진단하는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작가나 작품에

대해 말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자칫 선동이 됩니다. 그러한

당대성에 입각해 보편적인 사상으로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면 비평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봐요.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의 영화비평은 한국에서

거의 존재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취향의

속물주의를 영화를 매개로 풀어놓은 것이

태반이었지요.

예전에 《교수신문》에 한동안 한국에는

크게 두 가지의 영화비평이 있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사의 비평’이죠. ‘시네마

리터러시’라는 강령에 입각해 영화는 읽혀져야

하고 그 읽는 법을 제시해 주겠다는 식이죠.

다른 한편에는 ‘교도관의 비평’이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이러이러한 작가나 작품을

주목하는데 우리는 아직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이

그런 비평에 속합니다. ‘너희들은 감옥에 갇혀

있어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고

이런 일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겠다’는

식이죠.

이경희 그러면 사진비평은 어떠한가요?

김현호 사진은 양상이 조금 다른데요.

사진비평을 문학비평이나 미술비평에

비교하기는 어려워요. 범주가 훨씬 넓은 거죠.

사진에 대응하는 개념은 ‘문학’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정도겠지요. 미술관이나 갤러리

밖에서도 훨씬 많은 사진이 생산되고, 문제는

다양한 사진들, 즉 건축사진이나 항공사진이나

의학사진, 상업사진 등의 사진들이 특정한 시점에

기회를 잡으면 미술관 안으로 마구 밀고 들어오려

한다는 거예요. 예술로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대단히 강하죠. 성공하는 이들도 많고요.

실제로 미술비평에 있어서도 신미술사나

시각문화연구가 준 시사점이 대단했지만, 사진에

준 충격만큼 강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사진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예술 제도에서 유통되는 사진만을

아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요. 사진

이미지가 세상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고

유통되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거죠. 그들이 언제

갑자기 갤러리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그런 맥락에서 이영준, 최봉림 선생 같은

분들이 한국 사진에서는 최초로 어떤 당대성을

지녔던 비평가가 아니었나 싶어요. 두 분은 특히

자신의 비평이나 이론을 전시기획으로도 구현할

수 있었던 분이고요. 하지만 ‘사진은 사진이어야

한다’는 식의 어떤 근본주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요. 찍는 이의 휴머니즘에 대한 신뢰도 아직

강한 편이고요. 어떤 교착 상태에 놓여있는 것

같아요.

유운성 평단의 양상이 영화의 경우 확실히

다르긴 해요. 문학, 미술, 사진의 경우 평론가의

상당 수가 연구자나 교수 등인데, 영화 쪽에는

저널리스트가 많죠. 학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들 내부의 담론으로만 유통될

뿐 영화 평단에 거의 유입되지 않아요. 그게

영화와 영화평론이 지닌 대중성 때문이라고만

단정짓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데요. 대단히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둘러싼 담론

영역에서도 저널리즘과 학계의 교차는 거의

생기지 않고 있거든요.

김현호 사진은 분야의 특성상 탁월한 분들이

자꾸 다른 곳으로 가요. 이영준 선생님은

기계비평, 이경민 선생님은 아카이브로. 즉

사진과 연관된 다른 자극적인 지식의 영역으로

떠나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임경용 수요가 별로 없어서 그런 걸까요?

김현호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대중 매체라는

사진 생태계의 특성상, 평론이 없어도 잘

살아가기도 하고요. 실제로 사진이 다른 영역과

교합되어 만들어내는 지식의 풍경은 대단히

거대하고 아름다워요.

하지만 저는 사진 자체에 관심이 있어요.

우리는 경이로운 시대를 살고 있거든요. 인간은

최초로 모든 개체가 매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는 종이 되었어요.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지지체를 만난 사진은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하고요.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고 위험성에 대해

같이 공부하고 경고하고 싶기도 한데, 선배들은

도망가고 후배들은 안 나타나네요.(웃음)

글쓰기의 고립과 고독

임경용 두 분이 워크숍을 진행하지만, 어떤

텍스트가 되었든 간에 미디어버스에서 출판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사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워크숍 결과물로 책을 만드는 것이니까

책의 퀄리티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고 일종의

모험이죠. 저도 같이 워크숍에 참여하는데, 글을

쓰는 것이 친숙하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는데 서로의 글에 코멘트도 하면서 공동으로

글을 쓴다는 인상을 줘요. 그러한 과정이 글에

어떤 영향을 줄지 지금은 예측할 수 없지만, 저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작부터 ‘출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주는 책임감이나 무게가 있다고 생각해요.

계속 지금 쓰고 있는 글이 교보문고나 알라딘

같은 일반 서점에서도 판매될 것이라고 계속

이야기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계원예술대학과

국민대학교에서 디자인 전공 학생들과 디자인

글쓰기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디자인이나

시각예술학과 학생들과 진행한 글쓰기

수업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책 만들기

수업이었어요. 과거와 다르게 이제 독립서점이나

‘언리미티드에디션’과 같은 페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업을 유통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러한 사실이 수업 중에 진행하는

작은 프로젝트라도 큰 동기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발행인으로서 이렇게 쓴 글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적인 무대에서 유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러한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참여하고 있어요.

김현호 저는 기본적으로 출판 편집자라서

한편으로 매우 조심스러워요. 아무리 책을 많이

낸 석학이라도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타인의

한두 마디에 잘 흔들리는지 알거든요. 선배

비평가들이 고립감 때문에 이상해지는 모습도

많이 봤고요. 어떤 선생님은 (글쓰기가) ‘우물에

돌을 던지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끊임없이

써도 반응이 없었다는 말씀이시죠.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도 술자리에서 많이 이뤄지기만 하고요.

그런 건 상처가 돼요.

특히 저는 결정론을 이야기하며 횡행하는

글들을 볼 때 가장 상처를 받아요. 예를 들어 특정

장르의 예술적 기능은 끝났다거나,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거나 하는 묵시록적 선언을 강하게

내지르는 글들이죠. 하지만 이런 건 비평가의

태도는 아니에요. 공부를 하다 보면 종말을

선언하고 싶은 욕망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우리는 세상이 어떤 몇 가지의 요소로 모델링을

허락하는 결정론적 대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역사는 단절적이며 불연속적이죠. 그러므로

중요한 건 결정론에 굴복하지 않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어쩌면 저렇게 강하게 이야기하는

건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참여자들이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는 게

이런 워크숍을 하는 중요한 계기에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유운성 저 또한 비평적 글쓰기는 자신이 당대의

독자들과 관계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없으면

성립이 안 된다고 봐요.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분명 당대의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로부터의

응답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그런 피드백을 기대하는 순간 글쓰기가

이상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말을 거는 대상을 상정하고 쓰는 것과 응답을

기대하며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거든요.

‘나는 이들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 하지만 내가

쓰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힐 지는

모른다, 심지어 전혀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점을 자각하면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검증해가며, 상상의 독자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고독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인터넷의 장단점이 있어요. 글을 발표할 수 있는

플랫폼이 다양해진 것은 좋은 일인데, 글쓰기에

요구되는 고립과 고독의 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거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비평적 글쓰기에

필수적인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감각

만으로 글쓰기가 지탱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글을 발표하자마자 온라인 상에서

이런저런 반응들을 받는 것이 필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반응이 없이 하루만 지나도 조급해지죠.

조급해지다 보면 글에 자극적인 혹은 강한

무언가를 자꾸 넣게 되고, 이런 평론가는 일종의

‘유사 잠언’을 던지는 사람이 됩니다.

특정 영역에서는 인기도 끌 수 있겠죠. 이런

데 익숙해지다 보면 코멘트나 주장만 던지고

근거를 대는 일은 점점 번거롭게 여겨지겠죠.

비평가에겐 자신의 글이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독자에게 말을 거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해가 있을까 해서 덧붙이자면, 일단 이런

과정을 거쳐 쓰여진 글에 많은 이들이 접근

가능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인터넷은 이 점에서 유용하지요. 피드백에 대한

불안만 떨쳐낸다면요.

이경희 글쓰기와 피드백에 대한 임경용, 김현호

두 분의 생각도 말씀 들어보죠.

김현호 읽히지 않는 글을 쓴다는 건 한편으로

대단히 용감한 일이예요. 하지만 저는 비평의

외연이 넓다고 생각하고, 저는 유운성 씨보다

훨씬 더 잡스러운 영역에 있고 싶어요.

저는 출판편집자 출신이라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읽기 어려운 글을 쓰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실제로 주위 사람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사진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요.

하지만 요즘의 사진은 세상을 채울 정도로

많이 생산되고, 자신의 벡터를 지니고 움직이며

증식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글을 많이

읽히고 싶어하는 편이에요. 그걸 위해서는 기꺼이

많은 걸 포기하고요. 유운성 씨의 밀도 높은 글을

저는 정말 좋아하지만, 저와 목표가 다를 수는

있는 것 같아요.

유운성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고요. 제 말은

어디까지나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것입니다.

비평적 글의 경우 즉각적으로 전적인 공감을

끌어내는 글이 존재한다는 게 저는 납득이 안

되거든요. 그것은 사실 크리티컬한critical 글이

아닐 가능성이 크죠.

김현호 출판 편집자들이 베스트셀러와

비베스트셀러 작가를 구분할 때 하는 말이

있어요. 전자는 대중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는 거에요. 예를 들어 뇌과학자 정재승

선생 같은 경우죠. 그런데 대중은 자신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잘 모르지요. 누군가 선제적으로

자신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찾아서 해주면

좋아하고 공감하는 거에요. 사실 이것은 어떤

급진성을 차단하는 일이기도 해요. 독자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용감하게 하는 단호한

비평은 멋지죠. 아까의 제 말과는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글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데

동의해요.

임경용 지금 참여하시는 분들은 20대

중후반~30대 초반의 젊은 층이 많아요. 물론

40대도 몇 분 계시지만.

어쨌든 젊은 세대를 보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로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는 것에

익숙한 것 같아요. 그러한 상황이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많죠. 즉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표현에 집중하고

그러한 방식으로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은 똑똑한 냉소 같은 것인데 그게 작은

회로 안에서 반복되면서 그 안에 참여한 사람들을

교육시킨다는 인상을 줘요. 하지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글에 도달하려면 SNS에서 반응해주는

글과는 분명 거리가 있죠. 그리고 그러한 회로에

익숙한 필자들은 그 바깥을 어려워하거나 거리를

두죠. 그리고 텍스트가 아닌 시각적 언어로

작업하는 디자인과나 예술 전공 학생들도 비슷한

것 같아요. 자신이 즐겨 찾는 서점이나 즐겨보는

레퍼런스의 클리쉐들을 무의식적으로 답습하는

것 같아요. 그건 당연한 것이고 긍정적인 부분도

있죠. 하지만 그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견해를 내놓거나 비평적인 태도를 가질 수 없을

때 일종의 지적인 것에 대한 혐오로 변질되는 것

같아요. ‘취향의 공동체’라는 말을 저도 사용한

적은 있는데, 그 취향이 작은 회로에서 끝나버릴

때 사고를 좀 더 밀고갈 수 있는 체력이나 지적인

능력이 점차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경희 실제 참여하시는 분들의 지원방식이

글을 제출하는 거였잖아요. 참여가 기대하신

것보다 많았나요? 글쓰기와 본인 글에 대한

피드백을 향한 갈증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유운성 많았어요 실제로 선발한 최종 인원보다

두 배나 많은 분들이 신청했으니까요.

김현호 선정 기준은 쓰기에 대한 욕망이 강하고,

이미 꾸준히 해온 사람들이 우선이었어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때도 글쓰기가

즐겁다는 것을 아는 분들을 대상으로 하고자

했어요.

유운성 앞으로도 글을 쓰거나 쓸 것 같은

사람인지도 고려했고요.

김현호 현업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의

글이 일정 수준 이상인 경우가 많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현업에서 활동하는 사진가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어쩌면 이것이 한국 독립출판이

디자이너 위주로 동력을 얻었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누군가의 심사를 받거나

클라이언트에게 자신을 소명할 필요 없이 책을

만들어서 팔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임경용 유운성 씨도 디자이너 글이 신선해서 더

좋게 보였을 수도 있어요. 이론 전공자들이 쓰는

글과는 또 다르니까요.

김현호 그런 면에서 첫 시간에 논문 글쓰기에

대해 한참 지적을 했어요. 물론 저는 학술서를

만드는 편집자로서 논문이 얼마나 대단한 지식의

형식인지 잘 알죠. 상호 호환되는 프로토콜을

지닌 부품들이 모여서 하나의 군집을 이루죠.

하지만 논문의 세계는 어딘가 초현실적이예요.

대부분 공통적인 배경지식을 지닌 이들이 있고,

딱히 부탁하고 설득하지 않아도 글을 읽어 주죠.

하지만 책은 누군가 자신의 시간을 팔아서 번

노동을 통해서 구입해야 하는 거예요. 그건

독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걸 의미해요.

논문의 공간에 글을 쓰는 습관이 저자거리로

나왔을 때는 꽤 무력할 수 있어요.

이경희 프로그램 이야기 한 김에, 참가자들이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유운성 저희에게 본인이 글 잘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웃음)

이미 출간 경험이 있는 분도 있는데 글을 쓰면서

적어도 한 번은 누군가 솔직하게 짚어주는

경험을 기대한 것도 같고요. 코멘트를 받았을 때

위축되거나 상처 받지 않을 정도로 강한 분들이

모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런 분들이 모였다고

믿고 싶습니다.

김현호 분명 기억나는 것은, 참여하신 분 중 몇

분이 ‘바뀌고 싶다’고 말했던 거였어요. 기존에

쓰던 방식에서 달라지고 싶다고요. 저는 이

워크숍에서 ‘크리틱’이라는 말도 안 쓰려고 해요.

하지만 학술출판 수준의 편집을 받는 경험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자기가 하는 퇴고와

남이 해주는 편집은 전혀 다르거든요.

유운성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확실히 해요.

저희에게도 이런 기회는 별로 없었거든요.

김현호 이런 일이 드물긴 할 거에요.

집단적 글쓰기의

가능성과 방향

임경용 이게 가능했던 것은 구글도큐먼트라는

테크놀로지 덕이 크죠. 심지어 자신이 글을

편집하는 중간에 누군가가 로그인을 해서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 코멘트를 하고 편집을

하는 상황은 기술적으로만 이야기하자면 소위

‘집단적 글쓰기'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이건

정말 고독할 수 없는 글쓰기일 텐데 앞으로는

더 빈번하게 나타날 글쓰기 방법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기 강사 두 분은 집단적 글쓰기와는

먼 글을 쓰고 지향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워크숍 중간에도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시고요.

‘구글도큐멘트’를 통해 글을 쓰고 서로

코멘트하는 지금 워크숍 방식이 비평적 글쓰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두 분께 질문

드리고 싶네요.

유운성 열 두어 명이 10여 주 동안 정기적으로

모여 이야기하고 글을 쓴다고 해서 고독과 거리가

먼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분명 집단적으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각자가 쓴 글을 읽을 독자가

누구이며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자의식은 지녔으면 좋겠어요.

임경용 글쓰기 기회는 어느 형태든 더 많아질

텐데, 이 수업의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김현호 제가 기대하는 가능성은 글쓰기의

향상보다는 함께 책을 만들어 보는 경험에

있어요. 예를 들어 한 편의 글을 같이 쓰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책 한 권을 함께

만들어볼 수는 있어요. 이 워크숍을 들은 분들이

자기 나름의 동지를 모아서 책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관심사가 다르고 글을 쓰는 방식이

다르더라도, 함께 공부하고 세미나를 하고 책을

만들 수는 있죠. 그리고 그 책을 밖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유운성 저 또한 집단적 글쓰기에 대해선

회의적인데, 한편으론 여럿이 함께 해서 가능한

흥미로운 책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1997년

미국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 -최근 국내에

그의 영화평론집 『에센셜 시네마: 영화 정전을

위하여』가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은 여러

국가적, 언어적 경계를 가로질러 특정 세대에게

나타나는 시네필적 취향의 공유와 무의식적

연대의 일반 조건은 무엇일까, 궁금해 하며

1960년 전후에 태어난, 자신과 열다섯 정도 어린

미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호주의 영화평론가

후배들에게 편지 교환을 제안해요. 이들은 심지어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임에도 대단히 유사한

영화 취향을 공유하고 있다고 봤고, 그 취향은

자신의 것과는 좀 다른 것이어서 궁금했다고

해요.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프랑스 영화잡지

『트라픽Trafic』에 수록되었고, 이 서신교환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다른 비평작업들, 대담들,

편지들과 묶여 2003년에 『무비 뮤테이션즈

Movie Mutations』라는 책으로 발간됩니다.

이와 유사한 다른 예들도 많은데요. 공동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평론이 어떻게 대화를

통해 담론을 생성할 수 있는지 시험한 유의미한

작업이었다고 봐요. 그런 걸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임경용 씨와 공동으로 발행하고

있는 잡지 『오큘로(O-K-U-L-O)』 2호부터

서신교환의 결과물들을 수록할 예정이기도

하고요. 지금 진행 중인 글씨기·퍼블리싱

클래스는 꼭 이런 포맷을 따라가는 건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주기적으로 만나 서로 대화하면서

‘기술적 이미지’라는 화두 아래 책을 만들어

보려는 것입니다.

집단 글쓰기를 넘은, 출판

미디어의 경험

이경희 집단, 즉 공동으로 긴밀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글만 쓰는 게 아니라, 함께 기획부터

출판까지 경험한다는 지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출판과 유통은 출판사에게 넘기고 설득하면

되는데, 왜 개인들이 이것들을 직접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김현호 미디어를 강하게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책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 상품이예요. 그 독자, 혹은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내용과 구성도 달라질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한편으로 출판의 특징 중 하나는

대량생산이라는 거예요. 모든 생산 프로세스가

모듈화되어 있어요. 유통도 단순한 편이고요.

실제로 잡지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내고 싶은데,

그 단순한 기술적인 것들을 몰라서 머뭇거리지

않기를 바랬어요. 글쓰기에는 고립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쾌감이 있지요. 동료들을

모아서 함께 책을 만들고, 책을 통해 계속 친구를

얻어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유운성 대부분의 필자들은 일단 글을

편집자에게 보내고 나면 교정 원고를 검토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출판 프로세스에 관여할

일이 별로 없어요. 아예 모르기도 하고요. 그런데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일할 때 출판 편집자들의

작업을 가끔 지켜보면서 이러한 출판 프로세스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출판 문화에서는

글쓴이 외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지원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나 디자이너의 작업을 어느

정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의 경우 이들의 제안과

지적을 감안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의 작업을

고려해가며 글을 쓰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가 무척

흥미로웠어요. 에디터십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에

기반해 ‘나는 어떤 글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무척 유용한 경험이라는 거죠.

임경용 두 분과 비슷한 이야기인데, 저는

독립출판의 큰 성과라면 사람들이 매체로서 책의

성격을 이해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책 매체나

내용, 형식에 대해 모두 자기 반영적인 작업들이

계속 나온다는 점이에요.

김현호 글을 쓴다는 건 세상에 상처를 입히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글이 글 자체로 있을 때는 큰 상처가 되지

않아요. 세상을 때리려면 출판이 되어 자신의

글이 돌아다니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과 브레히트도 잡지를 만들려 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비평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매체를 가지고 세계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출판은 비평의 적극적인 한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운성 최종 결과물로 나오는 책에 비평만이

아니라 에세이도 있고 가능하면 인터뷰도 있으면

좋겠어요. 기술적 이미지라는 화두에서 출발해

이에 접근할 수 있는 글쓰기의 여러 양식들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워크숍을

함께 했던 분들과 워크숍이 끝난 이후에도 무언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하고요.

사실 저희는 학생을 가르친다기보다는

동료를 만든다는 기분으로 이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어요. 동료라고 생각하니까 코멘트도 더 강하게

할 수 있고요.

김영호 사진비평가이자 출판 편집자다.

대학에서 철학,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전공했다.

격월간 『말과활』과 『사진이론학교』의

기획위원으로 있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물리학과 영화이론을

공부하고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04~2012) 및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2012~2014)으로 일했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있다.

임경용 영화이론과 프로듀싱을 공부했고

지금 통의동에서 더 북 소사이어티와 미디어버스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경희 본지 편집자

기술적 이미지의 지지체를 은유적으로 ‘몸’이라

표현하며, 오늘날의 범 시각예술에 대한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운영팀의

아주 사소한 커뮤니케이션 실수는 ‘몸’을

‘모험’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어쩌면, 함께 글을

쓰고, 서로 피드백을 격렬히 주고받고, 그 결과를

출판물로 남기고 알리는 동료를 찾는 모험이 더

시급해서 의도적으로 오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비평적 글쓰기 모임의 운영자와 글쓰기의

고독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들어본다.

기술적 이미지의

몸 혹은 모험

임경용 / 더북소사이어티, 미디어버스 공동대표

김현호 / 사진비평가, 출판편집자

유운성 / 영화평론가

정기적으로 영상작품을 고화질로 스트리밍 서비스하는 온라인 플랫폼인 브이드롬(www.vdrome.org)에서 애미 시겔의 최신작 <채석장Quarry>(2015)을 공개했다. 3월 6일부터 19일까지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애미 시겔은 2014년 10월 29일부터 2015년 1월 3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된 「섬광 혹은 소멸: 아티스트 필름 & 비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동독/동독

DDR/DDR>(2008) 및 <출처 Provenance>(2013) 등 여섯 편의 작품이 소개되면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다.

『오큘로(O-K-U-L-O)』 창간호 내지. 영화평론가 유운성과 더북소사이어티 대표 임경용이 발행한 영상비평 전문지

Page 10: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1918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이 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없다. 그저 거울처럼 둔하게

반짝이는 재질이 표지를 뒤덮고 있다. 이를테면 2006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당신’을 선정했을 때, 표지를

유튜브 창이 열린 데스크탑 컴퓨터 이미지로 채우고

스크린 부분을 반짝이는 은박으로 코팅해서 맞은편 얼굴이

비치도록 했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당시 이 컴퓨터 모양의

거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래요,

당신. 당신이 정보 시대를 통제합니다. 당신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십 년 후에 나온 『스스로

조직하기』(스티네 헤베르트, 안느 제페르 칼센 엮음, 박가희,

전효경, 조은비 옮김, 미디어버스 펴냄)의 표지에는 더 이상

컴퓨터 이미지도 없고 덧붙이는 말도 없다. 표지는 단순히

저해상도의 반사면이 되어 독자를 맞이한다. 이제 여기에

비치는 것은 당신뿐이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말자. 거울은 당신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포탈처럼 당신을 향한 입구를 제공하지만,

『거울 나라의 앨리스』처럼 정말로 그 문을 넘어버리면 거꾸로

뒤집힌 세계가 펼쳐진다. 거울로 된 세계는 종종 죽음을

부르는 미로 또는 함정으로 묘사된다. 거울 미로는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처럼 겉보기만으로 알 수 없는 실재의

혼란이든지, 또는 <용쟁호투>처럼 실재의 명정함을 흩뜨리는

겉보기의 혼란이든지 하여, 결국 화려하게 박살나는 것으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다. 그러나 종이로 된 거울은

부숴버릴 수 없고, 심지어 코팅되어 있어서 찢어지지도

않는다. 무수한 기술적 거울들이 서로를 되비추는 자기

반영적 세계에서, 『스스로 조직하기』는 작은 거울 방패가 되어

불투명한 문자들을 숨긴다.

이 책은 ‘자기조직화’라는 이름 아래 엇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것들을 별다른 편집 없이 나열한다. 북유럽과

중부유럽, 동유럽과 러시아,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의

예술적 자기조직화 사례들과 이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선들이 제시된다. 그런데 이들은 더 이상 평평하고

동시대적인 ‘세계’로, 다채롭고 거대한 하나의 사회로

상상되지 못한다. 지역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밀접하게

뒤얽혀 있지만 그만큼 분열된 채로 각자의 시간을 통과한다.

이 시간들을 관통하고 파열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역과 세계의 전 차원에 만연하는 ‘사회’의 불가능성이다.

사민주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기의 사회적

상상을 구체화했던 거의 모든 제도들이 파산하거나 위축된

곳에서, 하나의 상상적 우산으로서 사회는 설 곳을 잃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자기조직화는 주로 이 빈자리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이루는 수많은 목소리들은

자기조직화를 통해 사회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시도를

낙관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가, 여태까지 해오던 식으로 계속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이 막연하지만 끈질기게 책 전체를 휘감고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얀 버보트는 이 책의 「모든 잘못된

사례」에서 이 자기조직화의 시대가 푸틴, 베를루스코니,

블레어의 시대이기도 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제도화된

공통 생활의 공간으로서 사회를 지우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조직하는 사회적 관계망 또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자기

구원의 비전을 전파했다. 버보트는 미술가들의 자기조직화도

결국 이 시대의 일부로서 번성했다고 본다. 물론 미술가들의

국제주의적 연대는 ‐특히 이 책의 발원지인 유럽 지역에서‐

대단히 유서 깊은 것이다. 그러나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이상주의적 사회의 상상이자 현실주의적 지역 블럭으로서

유럽연합이 파산할 수도 없는 실패에 직면한 2010년대에,

자기조직화의 주체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개인 간

관계를 넘어서는 사회를 상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빈자리에서 자기조직화는 대안적 선택이 아니라 차라리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개인

간 관계 특유의 한정된 유효기간이 끝나면 다시 빈자리만

남긴 채 수수께끼처럼 소멸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공이든

사회의 번영이든 간에 어떤 구원도 약속하지 못하면서 그저

일하라고 채찍질하는 메르켈의 시대에 이르러 일제히 소진과

무기력, 의혹이 보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도 이와 유사한 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세계화 이후의 세계, 이미 세계화된 현실의 분열상

속에 놓인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전 세계적 상황은 언제나

세계화된 여러 지역들의 상황이며, 이를 일종의 거울로

받아들이려면 이 거울이 이미 깨져있다는 사실부터 고려해야

한다. 예카테리나 드곳과 데이비드 리프가 반아베미술관 관장

찰스 에셔를 인터뷰한 「자유보다 무엇을 더 원하는가?」는

거의 모든 문단이 거울 조각처럼 반짝인다. 드곳과 리프가

말하는 과거 공산주의 사회의 미술사와 최근 러시아의

상황은, 에셔가 말하는 과거 사민주의 사회의 미술사와 최근

네덜란드의 상황과 서로를 반영하는 듯하면서 되 튕겨낸다.

이들의 이야기는 서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미술사적 관점에서 다소간 주변부에 속하며, 애초에 식민지

경험을 가진 신생 국가주의/민족주의 사회로서 한국의

미술사와 최근 상황에 일대일로 대응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깨진 거울들은 탁구채처럼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자신이

비추지 못하는 어떤 공통의 빈자리를 거듭 환기시킨다.

이를테면 이들의 대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회의 빈자리에서 예술은 어디에 어떻게 있을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요나스 에케베르그의 「미학과

행동주의 사이의 제도적 실험」은 이 질문에 대한 접근법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보는데, 하나는 사회를 생산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을 생산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방향은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의 복원이 예술에 필수적이라는 대전제를

공유하면서, 자기조직화를 통한 미술 제도의 생산적 해체

또는 해체적 재건을 요구한다. 반면 바나비 드래블은 「조직을

벗어나는 것에 관하여」에서 사회라는 큰 우산을 전제하지

않는, 특히 그 상상적 우산을 지탱하기 위한 관료적 제도 내에

포섭되지 않는, 심지어 일인 관료제로서 자기 조직화된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 어떤 문화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그는 우리가 사회의 빈자리와 맞서서

분투하는 동안 망각해버린 또 다른 무언가의 빈자리를

드러내야 한다고 느낀다. 이는 단순히 사회의 빈자리가 예술의

빈자리를 차지했다는 불평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자 우리를 우리 바깥으로 이끌어내는 것으로서,

그럼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일신하는 것으로서 예술의

고유한 외부성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은 본래 은유적인 것이다. 그러나

낯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전체적 장소, 거주 가능한

지속적 환경으로서 사회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책임과

소속을 경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우리의 파편화된

세계에서, 내부는 어디이고 외부는 또 어디이며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머무르기도 불가능하고 떠나기도

불가능한 곳에서 내부와 외부는 더 이상 자명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물신화된다. 그리고 이 물신들에 홀릴

때 우리는 이미 거울의 미로에 갇혀 있다. 하나의 전체로서

표상되기를 거부하는 세계와 그로부터 생성된 무수한 표상들

속에서 우리는 파묻히고 메마른다. 여태까지 해오던 식으로

계속해서는 안 되는가? 그렇다. 어쩌면 내부와 외부가 아닌

다른 은유가 필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빈자리에 들어맞지

않음으로써 여태까지의 퍼즐조각을 처음부터 다시 짜맞추게

하는 수수께끼의 파편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 지어져본 적 없는 사회를 다시 상상해야 하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작은 거울 방패를 들고.

윤원화

윤원화

서울에서 활동하는 번역가, 시각문화

연구자다. 미디어, 문화, 사회의 복합적인

변화상에 관심을 가지고 『청취의 과거』,

『광학적 미디어』, 『기록시스템

1800/1900』 등을 번역했다.

2012년부터 미술과 시각문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여 『퍼블릭 아트』,

『아트인 컬처』, 『도미노』 등의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2014년 일민미술관에서

아카이브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를 공동 기획했다. 저서로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출간 예정)이 있다.

강원 속초시 속초 동아서점

강원 원주시 카페베레

광주 남구 라이트라이프

광주 동구 맥거핀

경기 수원시 수원시평생학습관

경기 안산시 경기창작센터, 경기도미술관 아카이브,

DOBA

경기 안양시 김중업박물관, 안양파빌리온 공원도서관

경기 의왕시 갤러리27

경기 파주시 북카페 눈

경북 포항시 달팽이책방

대구 남구 THE POLLACK

대구 수성구 커피는책이랑

대전 중구 도어북스

대전 유성구 플레이북

부산 금정구 샵메이커즈

부산 기장군 오픈스페이스배

부산 연제구 프롬

서울 금천구 금천예술공장

서울 마포구 1984,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땡스북스, 문지문화원 사이, 수카라,

어쩌다가게 LOUNGE, 북카페 여행자

앤트러사이트, 오브젝트(홍대), 유어마인드,

제비다방, 책방 만일, 후마니타스 책다방

서울 성동구 책방이곶, 카우앤독

서울 성북구 PIKA COFFEE,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

서울 양천구 카페쿰cafeqooom

서울 용산구 고요서사, 스토리지북앤필름, 워크스

서울 중구 200/20, 서울그라픽스,

서울시NPO지원센터, 유월의 마들렌

서울 종로구 mk2, 갤러리 팩토리, 더북소사이어티,

일민미술관 기둥서점, 라운드어바웃,

레드북스, 시청각, 아르코미술관 아카이브,

아트스페이스풀, 예술가의 집,

오브젝트(삼청), 이음책방, 책방무사,

토탈미술관

인천 동구 스페이스빔

인천 중구 인천아트플랫폼

전남 순천시 예술공간 돈키호테

전북 군산시 군산창작문화공간 여인숙

전북 전주시 삼양다방

제주 중앙로 왓집

충북 청주시 우민아트센터

2016. 4. 28. Vol. 17

창간: 2012. 4. 9.

등록번호: 종로 바 00136

ISSN: 2287 - 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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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건축문화재단은 건축의 건강한 생태계 조성을 위해

일합니다. 한국 건축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바르고 균형

잡힌 매개자, 건축을 통한 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촉매자가 되고자 합니다.

정림학생건축상 2016

<재난건축>

총평 및 수상작

건축의 기본을 묻다

조남호 건축가/솔토지빈건축 대표

<재난건축> 주제설명회를 통해 ‘건축은 역사와

사회를 묻는 것에서 시작 된다’는 말을 인용한 바

있다. 과거를 통해 지혜를 얻고, 오늘의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근원을 묻는 것(archi)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구현하는 것(tecture)이 건축이다. ‘재난건축’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일상의 삶으로부터 단절이

되는 상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맥락적이기보다

근원적이다. ‘재난건축’의 주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인간적인 존엄을 유지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 되고, 이 주제를 건축의

언어로 해석하는 일이다. 많은 재난으로부터

확인되는 사항은 재난에서 유지되어야할

최소한의 것은 삶의 존엄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물리적인 조건으로서 셸터와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상호부조이다. 재난건축은 건축의

기본을 묻는 일이다.

대부분의 공모전이 주제를 두고 최고의

건축 작업을 선정하는 경연의 성격이라면,

본 공모전은 참여한 많은 학생들이 수개월

동안 재난을 주제로 연구하고, 건축을 매개로

고민하는 과정을 함께 했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재난은 우연이

아니고, 구조적이며 지속적인 현상이다. 더불어

건축의 한 분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점을 이번 공모전을

통해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심사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첫째, 좋은 작업은 훌륭한 과제 설정에서

시작될 수 있다. 재난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지만 물리적인 유형과 특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나리오를 통해 재난의

전개 상황을 기술하고 재난 발생지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는 양상을

가정하고, 건축적 해법을 설정하는지를

평가했다. 둘째, 재난 이전의 건축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재난보다 더 강하고 직접적인 해결책

보다는, 문제를 이해하고 성찰적으로 수용하면서

연약해 보이지만 다차원적인 복수의 해결방법

제시하는지 평가했다.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믿는 건축 결정론은 경계했다.

셋째는 재난에 대한 유형과 특성에 맞게

재난건축의 형태언어를 만들었는지를 평가했다.

도시건축에 대한 관심의 확대는 건축의 외연을

확대해 다양한 주제들을 건축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한편, 건축 내부의 형태와

공간을 생성하는 원리는 가벼운 다이어그램

등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는 이 주제를 관심

분야로 선정하고 지속적으로 확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난민을 위한 주거를 주제로 하는 전시도

예정되어 있다. 재난에 대한 방재력은 특정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재난에 대해 다양한

분야에서 복수의 해법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노력만이 실효적일 수 있다. 학생들과 더불어

관련된 분야의 지속적인 관심과 확장을

기대한다.

재난은 건축에게 무엇을 요청하는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재난건축’은 응모자에게 난감함을 주었을

법한 주제이다. ‘재난’과 ‘건축’이라는 단어의

결합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재난’의 속성이 ‘파괴, 소멸, 망가짐’이라면,

‘건축’의 속성은 ‘구성, 제작, 생성’이기 때문이다.

‘재난건축’은 그래서 다양한 의미의 결합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재난 (이후의) 건축’일 수도

있고, ‘재난 (속의) 건축’일 수도 있으며, ‘재난

(앞에서의) 건축’일 수도 있다.

인문학자이자 멘토위원으로서 나는

‘재난건축’이라는 주제가 학생들에게 파괴와

소멸이라는 테마를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랐다. 빈 공간을 건축으로 채우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동선, 행동, 인식을 바꾸는,

한 마디로 무언가를 구성하고 생성하는 ‘건축’의

언어는 철저히 근대적이다. 근대적 사유는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여 주체의 인식과 행위가

대상을 보고, 알고, 지배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에 반해 재난은 정확히 반대다. 만들어진

모든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고 무너뜨린다. 게다가 오늘날의

재난은 인간중심주의적인 근대문명에 의해

더욱더 급진화되고 광폭화되고 있다. 재난은

근대를 다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건축가가

재난을 사유한다는 것은, 그래서, 본업인 건축의

언어를 통해/비껴가며 오늘 우리의 일상과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는 재난이라는 이름의

파괴적 사건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그 일은

단순히 어떤 건축물을 지음으로써 어떤 재난을

예방하고 방재하겠다는 차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재난을 급진화시킨 근대적

방식의 사고다). 이번 공모전은 우리 시대에

왜 ‘재난’이 중요한 화두인지를 이해하는 것,

‘재난’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는 것, 이를

통해 기존 건축철학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

‘재난’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어떻게

사회를 재생시킬지 시뮬레이션해보는 것,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총 249편의 시나리오 응모작, 이중

128팀의 상세계획안, 그리고 여기에서 선별된

최종 12팀의 프레젠테이션을 지켜보면서, 나는

심사 이전에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재난에

접근하는 방식과 패턴을 살펴보고 싶었다.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재난이라는 주제를

관통하면서 ‘공유, 협동, 연대, 상호부조’의

가치를 끌어내었다 (내게 ‘건축 기술’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유토피아적

열망utopian desire’ 같은 것이다. 거대한

파괴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학생들은 필연적으로

기존 시스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유토피아적 열망이 발현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열망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하듯이 언제나

‘아직은 아닌 것Not-Yet’으로, 즉 지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중요한 점은

바로 그 ‘아직은 아닌’ 부정성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비판하고 고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번 응모작들에서는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급진적인 인식을 찾기가 힘들었다.

가령, 우리는 왜 ‘자본주의를 없애야 한다’거나

‘민주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하지 못할까? 왜

그런 명확한 명제를 에둘러 가면서 공유와

협동과 연대를 말하려고 할까? 현실 시스템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인식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패기 없이는 유토피아적 열망도

의미를 상실한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하듯,

기존 체제는 자신의 문제점을 가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유토피아적 열망을 이용하고

활용한다. ‘희망, 꿈, 청춘, 도전, 힐링’ 등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착한 말들은 모두 그런

기만적인 역할에 사용된다. 유토피아적 열망은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고

지적하면서 비로소 힘을 획득할 수 있다.

건축가가 부단한 공부와 현실참여를 통해

인문학적 비판정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신이 지은 건물과 디자인한

공간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위해 쓰이는지, 쓰일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건축’은 궁극적으로

파괴와 구성, 유토피아와 현실이라는

이항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는 장일

것이다. 이번 심사과정에서 나는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실망을 경험했다. 희망이란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좋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여지없이 발견한 것이고, 실망이란 그 열망이

‘오늘의 현실’에 대한 깊은 비판과 연결되지

않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희망’의

몫이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믿기에 기쁘다.

왜? 이번 응모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그동안

낯선 개념이었을 ‘재난, 파국, 파괴, 소멸’이라는

아이디어를 인문학적, 건축적으로 사고해보는

체험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체험이

‘현실’에 대한 재인식을 추동할 것이라고, 그로

인해 ‘유토피아적 열망’이 실제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재난에 대한 사유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현실화하려는 웅대한

건축적 포부와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료배포처

Concrescencism (합생주의)

박범수, 임화선, 이진우 (명지대학교 건축학과)

‘concrescence’의 어원은 ‘더불어 성장한다’는 라틴어 동사이다.

각각의 특성을 가진 개인이 마을공동체에서 ‘공진화’를 통해 더욱

고유한 특성을 갖는 성장을 거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일상적인 재난에 충분한 대비를 하는 것이 재난의 방재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지역 방재 기관으로

마을회관을 주목했다. 마을의 행정기관이자 공공재산인

마을회관은 일상과 가장 근접한 방재기관으로서 자치적

집회소로의 기능과 마을 공동재산의 운영 및 관리 기능을

맡아왔으므로 수요자 중심의 방재가 가능할 것이다. 특히 방재를

S.E.E.D(Study. Enjoy. Education for Disaster)로 유닛화 하여

고립이나 일상의 위기를 연대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온정이 깃든 공간 0km 마을

배준현, 안주희 (세종대학교 건축학과)

2016년부터 지속된 기상이변과 중국의 산업화 가속이 가져온

애그플레이션으로 심화된 인플레이션은 도시 공동체의 소멸을

가져왔다. 농산물 수입의존도가 75%인 우리나라는 그 피해가

심각했다. 2018년, 서울 성수동의 협동조합들은 계속되는 최악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급자족 마을을 만든다. 그러나

2020년, 식량난으로 고통받던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백두산은

폭발하여 한반도는 도시인프라 파괴 및 농업지대의 황폐화로

사상 최대의 식량난을 맞이한다. 이와 같은 도시 외부와의 단절

시에는 농촌, 공장과 같은 생산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Rural +

Urban = Rurban을 기본 개념으로 도시 집합주거에 농업시설과

생산시설을 어우러지도록 배치해 공통 자급도를 높이도록 한다.

난민 스펙트럼: Home for Displaced Person

최제광, 김진관, 박수진 (중앙대학교 건축학과)

일부 국가적 위기에 따른 난민 수의 급증으로 다른 국가들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들을 수용한다. 하지만 무분별한 난민

수용은 더 큰 사회적 문제들을 야기해,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난민수용을 재난으로 설정했다. 난민과 내국인 모두를

위한 난민주거시설 ‘MOMO’는 먼저, 난민의 문화적 적응과

내국인의 인식 개선을 위해 함께 거주하도록 하는 시설이다.

난민은 일정 기간 생활 이후 새로운 MOMO에서 시스템운영과

관리를 도와 난민센터의 일을 돕는다. 특히 이 시설에는 난민,

청년, 노인이 2세대 씩 모여 총 6세대가 ‘프리즘’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시설은 기존과 달리 외피를 감싸는 레이어 구축으로

시공성을 높이고, 유닛화된 외벽은 내부 공간의 구획과 확장을

용이하게 하여 증가하는 난민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한다.

1+1=1

김유나, 최경하, 한정아 (명지대학교 건축학과)

‘하나와 하나를 더해 하나를 만든다.’ 최소 단위 주거의

지속가능한 자급자족형 공동체로의 변화를 꽤하는 본 설계는

재난 속에서 도시 공동체를 어떻게 잘 유지하고 새로운 사회의

기틀이 될지를 고민한다. 지진으로 인한 고립이 생기지 않도록,

유닛의 칸막이가 움직일 수 있는 자동감지시스템을 구축하고,

지반 침하 시 층고의 유연한 이동으로 대피로를 확보한다. 유닛은

주거와 공용으로 나뉘며 유닛 간에는 유동적이어서 마치 하나의

마을과 같다. 대한민국이 단기간의 성장으로 잃은 사회적

유대감을 재난을 계기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한다.

연평도, 약속의 마을

곽무룡, 곽태혁, 정혜수 (명지대학교 건축학과)

휴전협정이 60여 년이 지났지만,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는 가운데,

연평도는 지속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다. 건축이란 건축물과

외부공간의 관계를 찾아주는 작업이며, 건축의 목적은 곧

사람이라는 기본 개념에서 출발해, 재난 이전에는 사람의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행위 기반의 장소를 만든다. 이에 더하여

열린거실(Open Livingroom)을 통해 서로 다른 세대가 서로의

부분을 내어주며 새로운 일상을 가지며, 더 나아가 전체가

공동체적 유대를 이룰 수 있는 건축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Struc-hitecture everywhere

온진성, 홍현석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댐과 상하수도와 같은 거대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에

대해 우리는 아무 의심이 없지만, 가뭄이 온다면 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순식간에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건축으로서, 외벽체가 기존의 스트럭처 기능(물을 보관,

정수, 순환)을 가져, 인프라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스트럭키텍처(Struc-hitecture)를 제시한다. 특히 각

부재들은 모듈화되어 가뭄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건축적(파이프 모듈 교체 및 유지 관리), 도시적(밀도상승),

사회적(식량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가변성과 증축 가능성을

지닌다.

Project AA _ AnArchistopia

이재단, 이준형 (국민대학교 건축학과)

OECD 중 네 번째로 임금 불평등이 심한 나라, 임금 상승과

경제성장 간의 괴리가 네 번째로 큰 나라, 저임금 노동자가 두

번째로 많은 나라. 이미 대한민국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분되었으며, 전체를 뒤흔들 만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나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막을 수 없다. 만약, 일련의 재난 혹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 체제가 전복된다면?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등장한다면, 보다 성숙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건희, 이한솔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재난 발생에서 혼란이 가중되고 피해가 증가하는 원인 중 하나는

주민네트워크의 붕괴이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우사단로를 사이트로 선정해 ‘우사단

분산형 주민 네트워크’를 제안한다. 이는 우사단의

드리프팅(drifting : 도시를 표류하며 주민과 소통)을 통해 (지금은

붕괴되었지만) 과거 우사단 부녀회, 산악회, 반상회 등이 활발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비공식 소규모 커뮤니티의 형태로 불씨가

되어 존재했기에, 여기에서 출발한 주민 네트워크 시설 배치를

제안한다.

Manufacturing Life Project

신창하, 이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학과),

김지윤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

국가에 의한 강제이주를 경험했거나 그럴 위기에 놓인 사람들은

안정적인 주거에 대한 꿈을 가진다. 그들에게 주거공간은 현재와

미래의 삶을 지켜가는 곳이다. ‘공업-주거단지Manufacturing Life

Project Housing’는 불안정한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들이 스스로 완성한 곳으로, 건축 과정에서 형성된

네트워크는 재난 이후 공동체 형성에 기틀을 제공할 것이다.

공업-주거 단지는 주거동(주거), 공업동(일터),

공동작업장(작업장), 공공생활시설(문화공간)을 포함한다. 각

동은 셔터나 간이 벽으로 공간을 범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이후 지진이 닥쳤을 때 새롭게 요구되는 공간들로 단지

사람들이 힘을 합쳐 개조하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하청업자로

과소평가되던 공입인들이 생존기반을 만드는 중요한 존재로

바뀜에 따라, 이들의 사회적 가치는 역전될 것이다.

보통마을

박성민, 박상훈, 김요엘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도시의 공동성 회복은 재난 극복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재난 상황에서 건축의 실천적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1) 계획안은 특수조건을 초월하는 일반

전략을 담되, 새로운 주거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는가? 2)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삶의 어떤 부분을 지원

받으며, 물리적 공간구조와 더불어 구호 시스템은 어떤 방식이

되어야하는가? 3) 건축이 사람들에게 질적, 물리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재난은 늘 잠재적으로 발생 가능하기 때문에 재난 이전의

건축은 일상 깊이 침투해야 한다. ‘보통’의 것은 이미 수많은

개량을 거친 것이다. 지금의 일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와 운영이

‘미래의 보통’을 가져올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연진 (공주대학교 건축학과)

중국에서 유학 중인 이상화李想花 학생은 대한민국 대통령께

자신이 중국에서 겪은 전염병의 원인과 재난을 대비하기 위한

피난처의 기초 개념들을 편지로 보낸다. 중국에 위치한

의학기업의 실험으로 탄생한 개체가 심각한 전염병을 퍼트린

것이다. 치사랑도 치사량이었지만 문제는, 감염자들이 쉽게 죽지

않아 격리할 수 있는 병동이 부족해 더 큰 재앙으로 불거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위한 대비책으로 동질감이라는

이해관계로 이루어진 보균자들의 집단이 구호시설에 물리적인

격리만을 경험시켜주는 장소가 아닌 그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하나의 마을 같은 셸터를 계획하였다.

삶의 언덕-모래, 바람, 초원으로부터

이연호, 하동균 (국민대학교 건축학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국토의 90%가 사막화 된 몽골의

문제원인은 다차원적이며 복합적인데, 우리는 과도한 목축업에

주목했다. 이는 도시 외곽의 인구집중, 빈곤의 되물림, 몽골의

유목 문화 상실로 이어지는데, 개선을 위해 ‘닫힌선형의

순환고리’를 제안한다. 먼저, 유엔사막화대책협의회(UNCOD)의

지원으로 환경난민의 주거를 위한 기구를 건립한다. 게르를

수용하는 공동체 섹터 <삶의 언덕: Khill amidral>은 사막화로

거주를 잃은 난민들의 보금자리 제공, 녹화사업을 위한 지역거점,

사막화 방지연구소, 자급자족적 식량보급과 유목민에 대한

계획방목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며, 최종적으로 도심의 정착을

돕는다.

Page 11: 건축신문 17호. 2016.4.28 [PDF 다운로드]

20 April 2016. Vol.17 Architecture Newspaper

◎ 통의동, 집 ― 통의동에

집을 정한 이유는 우리가

제안하는 ‘혼자이면서 함께

사는’ 가족이 잘 어울리고 받아

들여지기 쉬운 환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통의동은

첨단을 달리는 도심의

편리함과, 오래된 동네의

차분함이 교차하는 묘한

느낌의 지역으로, 몇 년 전부터

창성동, 효자동, 옥인동 등과

함께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러한 환경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건축가, 디자이너,

문예가, 음악가 등 문화 생산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로,

서촌에서 일하고 생활하고

휴식하면서, 지역의 분위기와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곳곳에 위치한

작은 카페와 음식점, 서점과

갤러리는 그들이 자연스레

모이고 교류하며 공동체의

분위기를 표출하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현하고자

했던 지금 서울의 자연스러운

공동체 감각, 혼자이면서 함께

있는 듯한 느슨한 감각이 지역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집은 당연한 듯

통의동에 자리잡았습니다.

◎ 라운드어바웃, 집 ― 우리는

이미 형성된 통의동이라는

장소의 가치를 빌리는 것에

멈추지 않고, 우리의 집

스스로도 지역과 교류하며

장소의 가치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이 집의 가족인,

정림건축문화재단이 제안하고

운영하는 라운드어바웃은

일곱 명의 입주자 뿐만 아니라,

지역의 주민들, 건축과 도시에

대해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며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입니다.

스스로가 주거의 대안을

실천하는 라운드어바웃에서는

주거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누는 라운드테이블이 열리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전시와 워크숍이

개최되기도 하며, 건축과

디자인 관련 서적을 열람할

수 있는 열린 책장이 마련되어

‘보다 풍부한 지적 교류가 있는

공동체’라는 가치를 지역에

더해나가고자 합니다.

◎ 쉐어하우스 보다는 그냥, 집

― 통의동집은 그냥 집입니다.

쉐어하우스라고도 불리는 이

집은, 혈연도 지인도 아닌 남과

같은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어

사는 곳입니다. 이러한 가족의

형태가 아직은 낯설기 때문에

보통의 가족이 사는 집과

구분해 특별한 이름을 필요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족이 앞으로 또 하나의 보통의

가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우리의 집을 그냥 ‘집’이라고

부릅니다. 단지 방의 개수가

좀 더 많고, 주방과 욕실이

더 널찍할 뿐입니다. 기숙사,

고시원, 하숙. 사실 그동안

남과 같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집은 이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 통의동집은 ‘혼자이면서

함께 사는’ 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합니다. ―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보다 자연스럽게 느끼는

조화로운 공동체의 질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을공동체와 같은 표현에서

흔히 떠올리는 억지스러운

접착력 보다는, ‘혼자’의

자유로운 독립감과 누군가가

‘함께’ 있어 느끼는 무심하고

느슨한 연결감이 공존하는

상태가 지금 서울이라는 공간에

사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공동체 감각이 아닐까 하고.

우리는 서울 곳곳에서 지역

통의동

집함께

사는혼자

이면서하지만 이 집들은 임시의

기간 동안 어떤 목적을 위해

외로움과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집, 목적이 달성되면 원래의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제된

응변의 일시적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임시의 삶이

일상이 된 사람들이 의미 있는

규모를 이루게 되면서, 이들의

주거에서 나타나는 높은 비용과

주택 경험의 질적 저하, 고독과

불안 등의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타인과 이루는

가족과 그들의 집’을 새로운

시각으로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보다 풍요롭고 효율적으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집의

물리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한편, 남들이 함께 살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

(생활 습관, 성향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생활 영역에 대한

애매한 결정력으로 인한

혼란 등)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관리운영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조화로운

보통의 가족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커뮤니티 공간으로 일반화 되는

카페와 같은 상업공간들을

관찰하며, 그러한 생각에 확신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통의동집에 ‘혼자이면서 함께

사는’ 분위기를 부여해, 보다

산뜻하고 지속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과 집을 운영해

나가고자 합니다.

정림건축문화재단

국내 유일한 공공 건축문화 재단으로서

건축의 건강한 생태계 조성을 위해

일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 건축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바르고 균형잡힌

매개자, 건축을 통한 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촉매자가 되고자

합니다. 통의동집 1층에서 새로운 주거

공동체로의 전환처인 라운드어바웃을

운영합니다.

서울소셜스탠다드

혼자 살면서도 함께 사는 듯한 적당한

거리감, 느슨한 커뮤니티를 특징으로

하는 통의동집 속에는 사유를

유지해야 하는 부분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만나서 이루는 미묘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긴장감의 경계에서

함께 사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장치를

제공하고 운영합니다.

입주문의

www.jungli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