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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경│ 뉴욕주립대학교 철학과 석좌 교수 권두논단‘남을 이해한다’는 것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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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경│뉴욕주립 학교철학과석좌교수

│권두논단│

‘남을이해한다’는것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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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해교육 2004 가을∙겨울││ 9

‘타자(他者)’의 현상학,‘이문화(異文化)’이해의 해석학이 벌써 오래 전부터

논의되고 있습니다. 국제교류가 활발해지고, ‘지구화’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문제되고 있는 이 때에 타자와 이문화에 한 이해는 우리의 현실

문제인동시에사상적으로도크게부각되고있는과제입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중학생 때까지 일본의 지배하에서 자랐고, 해방 이후에는 독

일 유학을 거쳐 미국에서 몇 차례 교환교수를 지냈습니다. 미국에서 30년 이상 교

편을 잡은 셈입니다. 그런 이유로‘타자’와‘이문화’문제에 해서 얼마간의‘체

험’을쌓았다고볼수도있겠습니다.

한 번은 오사카의 어느 학회에서 일본인 교수가“조 선생은 어느 나라 사람으로

자처하십니까?”라고 내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처음 만나는 사람이 뜸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고, 좀 낯이 익숙한 사이에서 벌어진 화 습니다. 나

는 서슴지 않고“120%는 한국인이죠”라고 이야기하고는, 잠시 멈췄다가“나머지

80% 중 20 내지 30%씩을 미국∙일본∙독일 등 여러 나라의 향을 받으면서 지

내온 것으로 압니다”고 답했었습니다. 즉, 200%를 나의 해외 경험의 총량으로

본것입니다.

너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니까 정처 없는 유랑인으로 보 든지 또는 한국인 고

유의특색이내게서조금흐려진모양이었든지, 그것도아니면어떤국제인(코스모

폴리턴)의 표본처럼 보 든지, 질문한 사람의 속뜻은 알 수 없었지요. 그러나 가장

선의로 해석해서, 내가 여러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 속

에 몸을 담고 오랜 동안 생활했으니만큼‘이문화’에 한 이해가 조금 깊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일본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독일 사람들이, 중국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내게 비슷한 말을 건네왔습니다. 그러다

가 어느새‘상호문화성(interculturality)’이라든가,‘타자이해의 해석학’또는‘동

서 비교철학’을 주제로 하는 학회에서는 한약에 감초 넣듯이 나를 부르는 일이 잦

아지게되었습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이방면의공부를더하게된것이지요.

남을나보다더높이여겨라

그러면 먼저 타자를 이해하는 문제에 들어서봅시다. 이 문제는 극히 현 에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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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권두논단

등장한 문제입니다. 동서양 고 철학에서나 중세∙근 에 있어서도‘타자’가 철학

적으로크게다루어진일은없는듯합니다. 물론문명인이야만인을철저히천시하

고,‘인간이 누구인가’를 기독교적 신(神) 앞에서 묻고, 사회의 계급구조에 따라

인간의 상 적 위치를 구별하는 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인간을 단적으로

‘나’또는‘자아’와 구별하여 그 존재론적, 윤리적 또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묻는

태도는비교적근래에발생한것입니다.

나는 데카르트(Descartes)를 그 직접적 유인(誘因)으로 봅니다. 그에게는 자아

만이있고타자가없었으므로, 그극단적인주체본위의사상에 한반작용으로어

느때엔가는타자가발견되어야만할처지에있었다고보는것입니다. 왜데카르트

가 자아만을 인정했느냐 하면, 그것은 그가 수학과 자연과학을 진짜 학문으로 여겼

기 때문입니다. 그 습관은 칸트(Kant)에 와서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주관 일

반’또는‘의식 일반’이란 개념 속에 모든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은 다 포함되

게마련이었습니다.

2003년 9월 세계 주요 종교 지도자들이 독일의 아첸(Aachen)에 모여, 3일 동안 종교간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행사를 진행하는 장면 ⓒ Dagmar Meyer/EPA/Sip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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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해교육 2004 가을∙겨울││ 11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주장한 데카르트의 사상에는 사유 이외

에 색다른 인간의 존재양식이 끼어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빠졌겠습니까?

감정, 신체, 행동, 언어, 사회∙역사적 상황 등 많은 구체적 요소가 생략된 것입니

다. 혼자서만 존재하는 자에게는 자기 이름이 필요없고, 나(I)∙너(you)∙그(he,

she) 중 그 어느 명사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나는 존재한다”고 한

데카르트의 자아는 사실상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다만 생각하는 기능만을 표현한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정말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다는

현실을부인한것은아니지요.

그러나 그들이 다‘사유’하는 자로 완전히 축소 ∙생략되고 만 마당에 있어서 그

들 생각이나‘나’의 생각이 똑같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가서 인사를 올릴 필요도,

손을 내 어 악수할 필요도, 아니 가능성도 없는 게 아닙니까? 데카르트가 자기의

‘사유하는 주관’이 신체를 가졌다는 것조차‘불필요’하다고 보았고, 남의 신체도

하나의사물로밖에보지않았으니말입니다.

후설(Husserl, 1859~1938)은 해석학자로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현상

학을통해서타자의문제를연구한가장뛰어난학자입니다. 그는철저한데카르트

주의자로서 출발하 습니다. 데카르트보다 더 상세하게 우리 의식의 기능을 연구

한 그는‘무엇이 있다(There is something.)’라는 상식적인 표현 신에‘무엇이

내 의식에 주어져 있다(Something is given to my consciousness.)’란 말을 사용

합니다.

저기 무엇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 물건만이 언급되고 있으나, 후설은‘누구에게’

‘누구의 의식에’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상과 주관과의 상관관계(相關關係,

correlation)에 주목하고,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는 상을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 속에는 내가 그 상을 (1)현재 눈으로 보고

있다, (2)어제 본 그 상을 기억하고 있다, (3)그 상을 상상하고 있다, (4)그

상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등의 나의 태도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같은

상인데도그것이‘지각(perceive)’되는경우,‘추억(remember)’되는경우,‘상상

(imagine)’되는 경우,‘판단(judge)’되는 경우 등으로 세분화될 때에 상의 의

미가각각달라지지않을수없습니다.

의식의 작용을 상세히 분석하다 보면 뜻밖에 상에 관한 여러 가지 확실한 지식

을 얻을 수 있습니다.‘나’라는 말을 어떤 경우에 쓰는 것이 가장 타당한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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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권두논단

문제가 바로 그 예입니다. 누구나 다 자기를‘나’라고 합니다. 흔해빠진 것이‘자

아’인데 그것을 써야 할 경우와 못 쓸 경우가 따로 있다 해도 무엇이 그리 큰 문제

가 될까 하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해 그 발생학(發生學)적

인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묻는 현상학으로서는, 인간이 홀로 세상에 있을 때

에‘나’라는 명사가필요없다는사실을밝혀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먼저 있고,‘너’나‘그’는

항상 제 2차적인 인간일까요? 내가 태어난 다음에 알고 보니 이 세상에 이미 다른

사람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면, 이 두 사람 중 먼저 태어난 사람이‘나’라는 제 1

인칭을 차지할 자격을 먼저 소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 먼저 태

어난 순서 로 한다면 현실적으로 나 자신은‘나’라는 명사를 쓸 권리를 취득할

때까지얼마나기다려야할지모르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자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각각

자기가 인간으로서 제1차적인 주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이것을 옳게 판

단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방법은 자기주장을 무시하고 어느 쪽이 상 방

의힘을더많이빌리는가를따져보는것입니다.

여기에 참고가 되는 이야기가 헤겔(Hegel, 1770~1830)의《정신현상학》에 있

는 주인(master)과 노예(slave)의 관계입니다. 누구나 주인이 더 많은 권력을 가

지고 있고 노예는 그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헤겔은 그렇게 보지

않고 어느 쪽이 상 편에게 더 많이‘의존’하고 있는가를 따졌던 것입니다. 의존

도가 더 많은 사람은 곧 자유가 자기 자신의 수중에 있지 않고, 남의 힘을 빌릴 때

에만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예는 극히 작은 것으로 자족할 수 있고, 한

주인을 떠나도 다른 곳에서 지금까지와 비슷하게 소박한 자기 존재를 유지할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 것, 많은 일을 노예에 의존해야만 살

수있겠습니까?

만일 1인칭이 마치 여러 자녀들 가운데서 장남이 차지하는 듯한 특권을 의미한

다면, 아들이 장∙차남 두 명 있는 집에서 장남이 누리는 권세(?)가 차남에 의존한

다는 이상한 이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차

남이 없는 집에 무슨 장남이 있겠습니까? 그래도‘독자(獨子)니까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문법상으로 보면 장

남인 아들이‘나’라면 부모도 그에게는‘타자’이므로 이 독자가 누리는 특권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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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해교육 2004 가을∙겨울││ 13

사랑은 자기가 스스로 내부에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타자)가 베풀어줄 때에

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만큼 이 독자는 앞서 말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있어서와마찬가지로타자에의존해야만하는연약한존재입니다.

이렇게 역전되는 자율성과 타율성의 변증법을 논한 헤겔과 비슷하게, 후설은 결

국 제1인칭인‘나’가 원래부터‘제1차적인 인간(the first human being)’일 수 없

음을 보여줬습니다. 따라서 그는‘타자야말로 제1차적인 인간(“The Other, not

me, is the first human being”Husserliana ⅩⅣ, 41)’이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

게 된 것입니다. 이 복잡하고도 지극히 추상적으로 보이는 기초적인 인간관계를

‘윤리(�理)’의 차원으로 담하게 옮겨서,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해석학적인‘타

자이해’에큰 향을미친사람이바로레비나스(Levinas, 1906~)입니다.

한마디로‘나’보다‘남(Other)’이 더 귀중하다는 논리에서 바로 실천윤리를 강

화하여, 윤리관계가 논리나 인식론 또는 심지어 하이데거가 세운 존재론보다도 더

깊은 원리이며 기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타자가 윤리적으로 1인칭적인‘나

(자아)’보다도 선행한다는 이론을‘얼굴(visage)’에 관한 현상학적인 분석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이미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생략했던 신체나 육체

가현 철학에의해차차회복되어왔는데‘얼굴’의발견도그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이‘visage’란 말은‘눈’또는‘눈초리’라는 뜻을 겸하고 있습니다. 남의

노예매매 폐지 기념일을 기리는 기념작품 ⓒ UN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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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권두논단

눈과 마주칠 때 나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레비나스는 그것은‘책임

추궁을 받는’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내 앞에 나타나 나와 맞서는 사

람은 암암리에‘너는 내게 해서 책임이 있다’고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묻는 얼굴, 책임을 추궁하는 눈초리, 이것이 타자가 내 앞에 나타나는 제1차적, 근

원적 태도라고 합니다.‘남을 나보다 더 높이 여겨라’라는 답은 상당히 기독교

적냄새가풍기는것인데, 실제로레비나스는그런기독교적 유태교신비주의적배

경에서 남을 우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결국 나의 건너편에 있는‘너’의 근

원은신(神)적인것으로까지거슬러올라가야한다고봅니다.

타자 또는 타문화를이해한다는것

이상은 현상학적으로 간추린‘타자 이해’의 원형입니다. 여기에 해석학적인 입

장을 가미한다면 그것은 곧 가다머(Gadamer, 1900~2002)의‘이해(Verstehen,

Understanding)’의 이론과도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가다머도 현상학의 향을 일

찍부터 받았지만, 그는 초기부터 후설이 너무 주관∙주체∙자아를 내세우는 데에

호감을 느끼지 못하고‘ 화(對話)’의 구체적 상황에서 타자 이해의 원리를 밝히

려했습니다.

어떤 화든지그 화의주제(主題)가있으며, 이주제가 화를이끄는주동력

(主動力)이어야 합니다. 내가 화를 이끄는 자가 되는 순간에 문제는 벌써 그 자

체로서의 역할을 빼앗기고 맙니다. 가다머에 의하면, 화의 주체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문제 자체입니다. 그의 유명한‘놀이(spiel, play)의 논리’는, 어떤 운동

경기에서 서로 립해서 싸우는 팀(team)의 주관적 의식과 계획이 아무리 세 하

게 잘 짜여 있어도,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 인간의 계획은 부차적∙우연적인 요소로

탈락하고, 게임(game) 또는경기자체가주동이되어경기가운 된다고말합니다.

그러나 경기나 시합에서도 결국‘이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러한 모델을 그

로 철학적 화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가다머도 결국 주제(主題)의 주도성(主

導性)을 앞세우되, 상 방을 나보다 우선하는 윤리적 차원을 강조합니다. 내 의견

이 뚜렷하게 있어도 이를 일단 억누르고 남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에 귀를 기울이

고, 이에 해서 내 가슴을 열어 받아들이고자 하는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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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해교육 2004 가을∙겨울││ 15

운동경기에도 소위‘스포츠맨십’이라는 것,‘페어 플레이(fair play)’라는 것이 있

습니다. 애초부터 남을 이기려고 꾸민 경기를 하면 그것은 허구요, 진지하게 싸워

볼가치가없는것이겠지요.

플라톤(Platon)의 < 화편>을 보면, 논적(�敵)과 토론할 때에 상 방의 약점을

찾아내어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느니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강한 점을 상 로 하

여떳떳하게다투는것을이상으로삼고있습니다. 이기는것이목적이라면잘못된

전략이라하겠습니다. 그러나상 방의좋은점을배우고나자신이성장하려면이

것이더고차원적으로바람직한태도일것입니다. 가다머교수는플라톤을많이연

구했고, 최근까지 하버마스(Habermas)∙데리다(Derrida)와 같은 쟁쟁한 토론가

들과 논쟁을 벌이는 동안에 개방성(開放性), 그리고 상 편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해 주는‘선의(善意)의 해석(charity of interpretation)’의 필요성을 더욱더

주장하게된것으로봅니다.

그러나 한편, 해석학을 의심(疑心)의 해석학(hermeneutic of suspicion)이라고

부르는 사람(Dreyfus)도 있을 정도로, 선의의 해석보다는 그와 반 로 끝까지 상

방의 위장(僞裝)을 벗겨버려서 그 진의(眞意)를 알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

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과 사회의 실상이라고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가다머의

해석학에서도 이해할 길이 막혀버렸을 때에는 해석학이 필요하게 된다는 말을 하

고있습니다. 아무문제없이의사소통이제 로되는경우라면무슨해석이별도로

필요하겠습니까?

해석학이 고전문서, 특히 고 희랍의 철학사상과 기독교의 성경을 제 로 이해

하기 위한‘보조학(補助學)’으로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고

인의 언어가 다르고 그 시 배경과 문화 수준이 다 다른데, 우리가 현 인의 현

적의식으로이런문서에접근한다면그어려움이보통이아닙니다. 따라서문자

의 뒤에 숨은 진의를 바로 알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를 하게 되는데, 19세기의

해석학자인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는 이런 뜻에서 해석학은‘점술(占

術)’즉‘점치는기술’이라고까지하지않았겠습니까?

신구약 성경을 예로 들자면, 그 당시의 소박한 어부나 농부가 믿었던 기적을 오

늘날지식인이그 로믿게하기는어렵습니다. 그배후의의도를알아내서현 어

로풀이를해야합니다. 그렇게보면고 문서뿐만아니라현 문학작품에서도제

임스 조이스(James Joyce), 포크너(Faulkner), 그밖에 많은 작가에 의한 심리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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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권두논단

술은 억측과 상상의 기술을 요

합니다.

더욱이 일상생활에서 현실

적 정세를 배경으로 주고받는

화는 겉으로야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의 복잡하기로

말하면, 결국 해석학은 철학의

특수 분야가 아니라, 일상생활

에서 우리가 제 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생활 수단

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만

큼 남과의 말 또는 언어 속에

서 우리가 옳게 응답도 하고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

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해석학

을 그 보조수단의 위치에서 보

편타당한 이해의 철학으로까

지 폭을 넓히게 된 가다머의

뜻을알수있습니다.

그런데 껄끄럽고 순탄하지

않은 것이 언어이자 또 그 뒤

에 숨겨진 인간의 의도입니다.

정치∙외교∙권력∙금력이

판을 치는 국제사회, 국내사

회, 상인들의 상술 등을 고려

할 때 누구나 다 짐작할 것입

니다. 사람이 자기 속마음과는

다른 소리를 하는 존재라는 비

관론도 나올 만합니다. 그래서

윤리가 해석학 이전의 기본학아프가니스탄 헤라트(Herat)에 있는 이슬람 사원

ⓒ Roland et Sabrina Michaud/Rap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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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해교육 2004 가을∙겨울││ 17

이어야한다는레비나스의입장에공감할만도합니다.

일본과 한국 간의 국교관계를 보더라도 겉으로 오고가는 외교 언사 이외에, 실력

의 차이에서 오는 엄청난 다른 종류의 통신이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하버마스는 이 때문에 언어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며, 권력(power)과 노동

(labor) 그리고 혈통관계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국과 미국은 독립국가

이면서도 유사시에는 앵 로 색슨이라는 혈통 때문에 단합하게 되고,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도 민족 단위로 립하여 언어가 통하지를 않고 비참한 유혈극까지 벌

이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혈연관계, 지연관계, 학연관계로 뭉쳐져서 이를

초월한합리적인의사소통이힘들다는것을누가부인할수있겠습니까?

그런데 가다머는 그럴수록 언어로 다시 돌아와서, 언어를 통하여 정치권력∙재

력∙금력∙혈연관계 세력의 진정한 의미를 규명, 이해시키고 반성시키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버마스 역시 언어의 제한성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렇

다고 폭력이 해결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으므로 결국 화와

협상을거듭하는길밖에없다고결론짓고있습니다.

하버마스는 칸트의 이성철학과 그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고 문명인으로서의 개

인, 사회,국가, 국가군들이 반성하면서 합리적인‘절차’를 확립,이에 따라 억압과

강제가없는‘합의(consensus)’로이끄는세계형성을목표로삼고있습니다.

이 그럴싸한 의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 데리다입니다. 데리다는 이성을 최

고, 최후의 권위로 내세우는 하버마스나 이와 비슷한 가다머의 전통적 보수주의의

한계를 통렬하게 비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모든 사유의‘규범(canon)’

이 된 합리성의 논리는 그 자체가‘강제’의 체계이며, 사유를 묶어버린 사슬에 지

나지않는다는것입니다.

데리다는이 강제의 논리를 전통적인‘남권(男權)’주의 사회의 횡포와 비교하고

‘진리는 아마 여성일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진리 연구가 마치 개구리를 해부 에 눕혀 사지에 못을 박고 배를 갈라서 내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잔인한 방법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성의 말은

도피(逃避)적이고,‘예(yes)’가‘아니요(no)’일 수도 있으며,‘ 쎄요’가 정답

일수도있습니다. 신축성과유연성을살리면서조심조심다루어야하는것이진리

인데, 논리학의 틀 속에 강제로 몰아넣고 이 서양 고유의 논리를 다른 문화권에 뒤

집어씌우려고한것이지금까지서양이해온놀이가아니냐고반문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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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권두논단

하이데거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논리학이‘존재’

를 망각한‘존재자’의 합리화에만 도움이 되었으며, 그것을 모르고 지내온 동양

사람들이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언급하고, 심지어‘서양의 이성은 사유할 줄 모른

다’고까지 하 습니다. 좀 극단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동서양을 고루 비교해 보

는 사람에게는 상호 보충적인 의미에서 동양적 사고에도 장점이 있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데리다는 이렇다 할 안 없이 이성주의를 배척한 모양인데

그나마가장 안다운 안을내세운사람은레비나스라고보아야하겠지요.

2001년 9월 11일뉴욕의고층건물이아랍계통테러리스트에의해폭파당한직후

가다머가 TV 인터뷰를했다고합니다. 100세가넘은가다머는자기가떠난이후의

세계, 특히 서구문명이 아랍국가들과 립하여 합리적인 화가 아닌 폭력을 통한

극한 투쟁에 접어들게 될 사태를 지극히 우려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말하기를‘우

리 구라파와 서양은 그리스 문명 이래로 이성을 신뢰해 왔고 나는 지금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아랍의 문명과 그

인간성을지나치게소홀히하고, 타문화이해를한다면서도이점에서크게부족했

던 것을 느낀다. 앞으로의 세기(century)에서는 아랍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노력해

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의 해석학이 인간성의 보편적인 이해를 표방하면서도 미

흡했던데 하여마치개인적인책임을느끼는듯한이야기입니다.

자기를제 로이해하지못하면, 남을바로이해하지못한다

세계는 바야흐로 국제화되는 과정에 있으면서 국제적 몰이해와 종교적인 맹신

(盲信)이 판치고, 화가끊어져버린단계에돌입한느낌입니다. 위에서말한타자

이해의 해석학의 골자는‘남을 나보다 위로 하여 받드는 자세라야 진정으로 남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서로 간의 합의와 협력 그리고 평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으

로 수렴됩니다. 개인들 사이에서 그렇다면 한 나라와 다른 나라, 한 문화와 다른 문

화권들사이에있어서도이와똑같은결론이나오게되는것이옳지않겠습니까?

서양철학이 동양철학에 해서 취한 태도는 어떠하 던가요? 물론 별 형편없는

자기중심의 일방적인 평가 지요. 동양은 서양문명, 특히 기술과 과학을 수입하여

그 힘으로 경제력∙국력을 키웠던 한계 안에서만 서양문명은 어느 정도 인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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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해교육 2004 가을∙겨울││ 19

입니다. 그런데도서양을 표준으로 삼고 서양화만이 옳은 길이라는 사상은 유감스

럽게도서양인뿐아니라동양사람들가운데서도너무나깊이뿌리박고있습니다.

이 문제에 한 나의 생각을 추려보기 전에 한 가지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17

세기 독일의 철학자 가운데 이름난 라이프니츠(Leibniz)는 참으로 다방면의 천재

습니다. 그는 미적분(infinitesimal calculus)을 뉴턴(Newton)과 거의 동시에

발견했고, 오늘날 컴퓨터 과학의 기초가 되어 있는 이진법(二進法) 수학(binary

arithmetic)의 원리, 기호논리학 등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에서도 기계

론적 세계관에 립되는 유기(有機)론적 우주론을 폈고, 원자 신에 단자(單子,

monad)를 내세웠습니다. 또‘예정조화설’을 제창하고, ‘호신론(護神論)’으로써

세계 안에 존재하는‘악(惡)’의 뜻을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20세기 중간에까지 와서도 동양 특히 중국을 많이 이해하고, 어느 철학자보

다도 중국의 문명을 유럽문화와 동등한 것으로 인식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거

의알려지지않고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의 뉴욕 테러 모습 ⓒ Patrick Andrade/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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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권두논단

라이프니츠는 유럽인으로서 동양에 한‘타문화 이해’를 시도한 가장 훌륭한

선구자 습니다. 그 당시에는 해석학도 현상학도 없었지요. 그의 시 는 동서간의

교류도 극히 제한되고 불충분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큰 문명국인 것을 믿고,

거기서 배울 것이 많으리라는 기 를 걸고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을 왕래하

는 가톨릭 신부들에게 자료 수집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중국의 자연신

학》이라는상당한분량의책을저술까지한일이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중국이(17세기 수준에서 볼 때에)‘산업기술의 면에서 유럽과

등한 위치에 있고, 실천철학 즉 윤리학과 정치의 행위 기준을 세운 것을 보면 유

럽인들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나, 확실히 우리보다 우월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 습니다. 중국이 유럽보다뒤진것은오직‘사변(思辨)’철학, 즉 논리학∙형이

상학 분야일 뿐이라고도 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평가에서 그치지 않고 앞

으로 중국과 손을 잡고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세계교회주의적(ecumenical)’

인 차원에서 두 문명권이 더욱 접근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도 그 작업 추

진을위해중국의과학, 특히수학등의자취를더듬어나갔습니다.

세계교회주의를 목표로 하면서 왜 과학과 수학을 뒤져서 살펴보려 했는가 하는

데에는 색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17세기 소위 유럽 륙의 합리주의자들은 라이프

니츠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처럼 모두 수학자 으며, 그들이 섬겼던 하

나님은 합리성의 극치로서‘완전한 수학자’ 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먼

나라의 문명을 평가하는 기준은 라이프니츠가 보기에‘최고의 신’이었습니다. 최

고의 신을 알고 있는 나라는 문명의 꼭 기에 올라선 나라여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예컨 중국처럼 그 전통이 전혀 다른 나라일 경우에는 유럽과는 달리

최고의 신을 기 할 수 없었으므로 차선(次善)으로 수학이 얼마나 발전해 있는가

를따져보게되었던것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중국 고 의 신화적인

웅인‘부의(付義)’가 역학(易學)을 만들어냈을 때에 그 밑바닥에 이진법적 수

학을 깔았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 태극기에도 있는 주역의 원리인‘괘(卦)’를 그

렇게 풀이한 라이프니츠의 정신은 타자를 적어도 자기와 같은 높이에 놓고 보려는,

가장 선의의 해석의 산표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선교사들이‘당

시의 중국인은 예외 없이 무신론자’라고 본 데에 해서, ‘지금은 그렇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퇴화된 현상이고 고 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하여 위에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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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의발자취를좇았던것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중국을 동양의 한 나라라고만 보지 않았습니다. 마치 유럽이 서양

전체에서 문화의 중심지 듯이, 중국도 동양 전체의 문화적 원동력으로서 그 주

변의 여러 나라를 비춰주는 창조적인 원천이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

이 한자의 원리를 더듬어 세계 창조의 신이 유럽과 중국에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똑같은 진리를 선포하려 했던 것으로 믿고, 이 두 가지 방법

을 다 살리고 보존하려고 노력하 습니다. 이는

헤겔이나 심지어 후설이 동양에는 철학이 없다

고단정한태도와는너무나 조적입니다.

유럽과 중국이 손을 잡고, 가능하면 하나의 같

은 신(神)을 섬기며, 세계평화를 위해 힘써야 할

것이라는라이프니츠의꿈은그러나결실을보지

못하고 시들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문화

는 그 후 유럽 식민주의의 침해로 더욱 쇠퇴되었

고, 동양 전체가 오늘날‘문명발전=서구화’라

는 등식을 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서양이 이문화권인 동양을 제 로 이해하려면

동양에 한 이문화(異文化)가 있어야 할 것인

데,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

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동양권 안의 한국으

로서 이웃나라나 서양의 문화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큰 선결과제가 부과되어 있음을 알

아야 합니다. 그것은 역설(逆說)적이지만, 우리

스스로가 먼저‘이문화’가 되다시피 한 우리 고

유의문화를폭넓고깊게이해하는과제입니다.

가다머 교수의 지론 가운데‘모든 이해는 자기

이해이다(Alles Verstehen ist Sich-verstehen.)’라

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이해하거나 다른 나라

의문화를이해하는것은‘곧자기이해다’라는 실크로드 : 화의 길 ⓒ UN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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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권두논단

말인데 그 뜻은 좀더 심각합니다. 가

다머 자신의 생각은, 남의 것을 남의

입장 그 로 이해해 주려면 이것을

자기의 생각으로 소화해서 자기의

산지식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

다.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서 이해했

을 때에 남의 입장을 잘 알았다고 우

선긍정할수는있겠지요.

나 자신의 지식이 풍부해지고, 나

의 경험의 지평이 넓어진 것은 다행

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소화했다는 것은 부정적인 면으로도

해석됩니다.

첫째로, 내가 이미 전부터 알고 있

었던 요소에 동화시켜서 이와 비슷

한 것으로 만들었다면 남의 것의 고

유한 성격이 없어지거나 흐려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내가 이기

고 남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아닐까

요? 둘째로, 동화의 방향이 역전되

어 나를 없애고 저쪽 사람의 것에 내

가 흡수되는 경우엔 어찌 남을 아주

잘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예 없어지고 만 터에 말입니

다. 내가 타자가 되어버리는 경우에

나는 나 자신을 이해했다고 어찌 말

할수있겠습니까?

협동학교 홍보 팸플릿‘함께 사는 세상 배우기’ ⓒ UN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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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해교육 2004 가을∙겨울││ 23

‘ 나’와‘ 남’을동시에살리는‘ 산 화’의길

나는 이번에 동양의 다섯 나라(지역)가 역사상 처음으로 현상학자들을 불러서

‘자기동일성과 타자성(Identity and Alterity)’을 논하는 마당에 나가 기조연설을

하는 벅찬 일을 맡았었습니다. 홍콩에 있는 중문 학교가 주최하고, 중국∙ 만∙

홍콩∙한국∙일본이 참가국이었으며, 미국과 유럽 몇 나라에서 찬조회원 자격으

로 온 사람들도 강연을 했습니다. 현상학이 유달리‘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타자와

타자 이해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는 그 일부가 후설의 끊

임없는연구에힘입은것이라는점을나는앞에서이미지적했습니다.

그밖에 현상학은 그 방법이 투명하기 때문에 현상 그 자체에 충실하고 외부에서

삽입한 이론이나 방법을 최 한으로 걸러서 그 본질이 변하지 않도록 반성하는 까

닭에, 동양문화를 다시 살리고 서양과의 진정한 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는참으로없어서는안되는매체(媒體)가되었습니다.

우리 것을 살린다는 말도 어지간히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해오긴 했으나,

해석학과 현상학의 이론을 거쳐서 새로운 각도에서 재시도하는 것이 앞으로의 숙

제입니다. 가다머가 말한‘모든 이해는 곧 자기 이해이다’라는 말을 나는 거꾸로

돌려서‘자기를 제 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남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까지 말

하고 싶습니다. 물론 고립된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남과의

화를 통해서 또 남이 나를 보는 눈을 읽어 가면서, 자기가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깨

닫게 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자기 이해와 타자 이해는 반드시 병행(竝行)하

는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높이라’는 레비나스의 윤리적 지침을 살리되, 타자에게 동화되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나를 살린다고 해서 주관과 주체의 우위를 그전처럼 그

로 고나가서도 안 될 일입니다. 나와 남을 이처럼 동시에 다 살리는 길은 끊임

없는‘산 화’의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