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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하하 하하 하하하 하 하 01 – 하하 하하 하하하 하하 하하하하 02 – 하하하 하하 03 –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04 – 하하하 하하 05 –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06 – 하하 하하 07 –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08 - 하하 하하하 09 - 하하하 10 –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 11 – 하하하 하하하 12 – 하하하 하하하하 13 - ‘하하하하’하 ‘19 하’하 하 하하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 하하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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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이 나는 자전거

목 록

01 – 기우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02 – 지하철 만세03 – 짓밟힌 첫사랑의 이야기04 – 아빠와 아들 05 – 참새와 까마귀의 로맨스 06 – 꿈의 뱃길 07 – 전기 요금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잖아 08 - 북극 까마귀09 - 인천항10 – 다단계 영업사원과 우체국11 – 담배와 쏘가리12 – 사라진 결혼반지13 - ‘자위하다’에 ‘19 금’이 웬 일이야?

후기: 억수로 허벌나게

저자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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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우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고고학자들은 조심스럽게 고대인의 무덤을 파헤쳤다. 마치 눈 앞의 무덤이 사람 무덤이 아닌 것처럼.

이윽고 까맣게 신비에 갇혀 있던 무덤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무더기의 백골 그리고 주변에 깨져버린 도자기가 전부다.

값진 것도 주목할만한 것도 없다. 고고학자들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 무덤 주위를 파헤쳤다. 이윽고 흙더미 속에서

청동 팻말이 하나 나왔다. 자세히 보니 팻말에는 ‘우천의 기인(憂天之杞人)’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은 ‘기인우천(杞人憂天)’으로 널리 세상에 이름을 날린 기(杞)

나라 사람이란 말인가! 이럴 수가 있을까? 눈 앞의 한 무더기의 해골이 그 유명한 기(杞) 나라 사람이라면 기인(杞人)은

실존인물이란 얘기가 아닌가!생각 밖의 발견에 고고학자들은 환호한다. 신이 난 고고학자들은 두더지처럼 무덤 주위를 계속 파헤쳤다. 땅 밑에서 무슨

보물이 나올지 누구도 모른다.땅을 뒤지며 고고학자들은 한결같이 궁금하다. - 기인은 왜 하늘이 무너질까 우려했을까?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인은 정말 바보 멍청이였을까?아래로 파고 들어가니 작은 청동상자가 하나 나왔다. 상자를 여니 둘둘 만 죽간(竹

簡)이 여러 개 나왔다. 학자들은 모여 앉아 조심스레 죽간을 탐독한다. 기인이 실존인물이란

사실만으로도 관심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상대가 전설의 기인인 만큼 고고학자들은 한바탕 세상을 놀랠 사건을 발견하기

바랐다. 기인이 바보 짓을 한번만 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죽간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어느 날, 개구쟁이 기인이 마당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데 서쪽 하늘에서 커다란

까마귀가 한 마리 날아왔다. 기인이 까마귀의 덩치에 놀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까마귀보다 훨씬 큰 독수리가 한 마리 날아왔다. 까마귀와 독수리는 한바탕 싸운다. 먹구름이 용솟음치고 번개가 번쩍번쩍 우레가 우당탕 한다. 눈 앞에서 천지가 요동친다.까마귀는 싸우다 힘이 부치는지 돌아서 도망간다. 까마귀가 구름 속으로 도망가자

독수리도 뒤를 쫓아 사라졌다. 천지는 다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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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은 까마귀가 독수리한테 잡혀 먹힐까 봐 걱정되었다. 독수리가 갈구리 같은 뾰족한 주둥이로 물어뜯으면 얼마나 아플까?

생각만 해도 아프다.기인이 바보처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빨래를 하러 갔던 엄마가 머리에

커다란 빨래함지를 이고 마당에 들어선다. “거기서 뭘 하는 거야?”기인은 엄마와 하늘을 가리키며 외친다. “이따 만큼 큰 독수리가 이따 만큼 큰 까마귀를 잡아먹으려 해.” “엄마는 안 보이는데…….”엄마는 하늘을 힐끔 쳐다보며 말한다.“까마귀가 도망가니 독수리가 막 쫓아갔어.”“비가 오겠다.” 엄마는 빨래함지를 들고 힘겹게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만 놀고 들어오너라.”하지만 기인은 바보처럼 고개를 쳐들고 계속 하늘을 쳐다본다. 기인의 맑고 순수한

눈동자에서 먹구름이 요동친다. 어린 기인은 고개를 쳐들고 까마귀가 걱정스럽다.까마귀가 걱정스럽다니까.마침내 까마귀가 용솟음치는 구름 밖으로 뛰쳐나왔다. 까마귀의 뒤를 이어

독수리도 번개같이 나타났다. 도망가던 까마귀는 다시 독수리와 싸움을 벌인다. 하늘 위에서 번개가 번쩍번쩍

우레가 우당탕 한다. 까마귀는 역시 독수리의 상대가 아니다. 수세에 처한 까마귀가 다시 구름 속으로 도망가자 독수리도 뒤를 쫓아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기인은 고개를 쳐들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까마귀와 독수리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쏴~ 하며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기인은 물 병아리가 되고 말았다.그 일이 있은 뒤부터 기인은 시간만 나면 하늘을 쳐다보며 까마귀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했단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다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하늘이 무너진다는 소리가 없다니까.

기인은 바보가 아니라 천성이 착하고 따뜻한 애였다.우리 기인은 바보가 아니라니까.아래에 기인이 봤다는 까마귀와 독수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림을 보고

고고학자들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건 독수리와 까마귀를 닮은 외계인의 비행선이었다. 현실에는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기이한 비행물체다.조심스레 비행선을 관찰하던 고고학자들은 다시 한번 놀란다. 외계인의 비행선에 태극기 마크가 그려져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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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머리를 맞대고 자세히 보니 그건 틀림없이 태극기였다.대한민국의 국기가 틀림없었다. - 외계인의 비행선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니 웬 일이야? 그 것도 기인이 살고 있던

기원 전의 멀고 먼 옛날에……. 고고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쳐다본다. 꿈인지 생시인지 다들 갈피가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보면 볼수록 죽간 위의 태극기가 신비스러웠고, 대한민국이란 이웃 나라에 경외심이 생겼다.

- 한국인은 외계인의 무리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느 별에서 온 거지? 은하계에 인간보다 총명한 생물이 존재한다는 증거잖아.

*집필 수기*

집필을 마치고 보니 형평성 문제가 고개를 쳐드네요. 한국사람을 띠우고 중국사람을 무시한 거 아니냐고 걸고 들면 곤란합니다.

까마귀는 중국으로 돌아 못 갑니다.한국에서 계속 살라고요?고국에서 계속 사는 건 문제가 없지만 누구처럼 한바탕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문장이 아니라니까요. 목숨을 걸고 글을 쓸 정도로 미련하지 않습니다.대충 먹고는 살거든요.중국으로 돌아 안 가도 되지만 부모님이 건재합니다. 백두산 밑에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습니다.글을 안 쓰더라도 부모님을 외면하고 못 삽니다. 배은망덕한 짓을 하고 등골이

싸늘해 어떻게 살지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니까요.그나저나 한글을 아는 중국 분들이 까마귀의 글을 읽고 한바탕 열을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읽어보시면 열이 안 납니다.죄송하지만 외계인을 중국인으로 설정하자니 인구가 너무 많습니다. 중국인을 외계인으로 하자니 말이 안 됩니다.

지구가 한바탕 요동치고 주인이 바뀌지 않을까요?외계인이 지배하는 지구로…….다들 외계인이 지구를 지배하기를 바라지 않지요? 중국인도 외계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바란다 해도 안 된다니까요.죄송하지만 지구의 평화를 위하여 까마귀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중국인

대신 한국인을 외계인으로 만들기로…….지구의 평화를 위하여 까만 놈은 별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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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나게 놔둘 수 없다니까요. 상식적으로 봐도 억 소리가 나는 중국인은 외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억 소리가

나는 존재가 외계인이라니 말이 됩니까?외계인은 지구에서 소수입니다.소수의 소수입니다.그 놈의 소수에 외계인인척 하는 사람까지 포함해도 극소수입니다.하여튼 중국인은 절대 외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억 소리가 나는 중국인이 외계인이 되면 뭐가 되지요?외계인이 안됐다고 삐칠 존재도 아닙니다.절대 안 삐친다고 장담합니다.그렇다면 한국인은 외계인 같은 존재에 적임자일까요?다들 질문만 하지 마시고 대한민국으로 관광을 오심이 어떻습니까? 내 눈으로 직접 외계인을 보면 믿음이 가지 않을까요?

까마귀가 공항에 마중 나갈게요.장담하는데 이제 여러분들이 신비의 땅을 밟으면 비행선을 타고 외계 행성에 온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저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 여행을 했습니다.그나저나 우주 여행을 하며 인생대사까지 해결하면 일거양득이 아닐까요?대한민국에는 시집 장가를 못간 외톨이 외계인이 많습니다. 돈으로 사가던 꼬셔서

가져가든 맘대로 하세요.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대로 해보라니까요.여러분들은 외계인과 한바탕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습니까? 총명하고 활발한 외계인과 한바탕 뒹굴고 싶지 않습니까?

- 사랑이란 무엇일까?이 땅의 아가씨들은 예쁘고 잘 빠졌고 이 땅의 총각들은 핸섬하고 자상합니다. 예쁘고 자상한 총각 처녀들은 노래를 잘 하고 춤을 잘 춥니다. 외계인 같은 처녀 총각들입니다. 다들 한바탕 외계인과 일생을 약속하고 싶지 않습니까? 외계인과 한바탕 예쁜

새끼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가정을 꾸려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외계인의 나라에서 한바탕 살아보고 싶지 않습니까? 외계인과 나란히 누워 꿈을 꾸고 싶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은 꿈이 있는 자를 환영합니다. -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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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하철 만세

까마귀는 한바탕 재수가 없어 못 살겠습니다. 재수가 없는 놈은 날개를 부러뜨리고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날지 못하니 사는 재미가 있을까요? 날지 못 하니 여우가 까마귀를 물어갈까 봐 무섭습니다.무슨 놈의 세상이 이런지…….까마귀는 뇌졸중경력이 1년이 넘는 환자입니다. 뇌졸중환자는 마을공원에서 절룩거리며 운동합니다.

운동하다 잠시 의자에 앉아 쉽니다.왜 이렇게 외롭지요? 소외된 인간은 눈 앞이 한바탕 어둡습니다. 그 놈의 신세가 처량하여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까마귀는 재활병원에서 사귄 선배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재활경력이 5년이 넘는 선배는 말합니다.

“이 놈의 병에 걸리면 친구가 없다. 반년이면 절반이 도망가고 일년이면 하나도 안 남는다. 우린 사람 축에도 못 든다.”경험자의 솔직한 얘기입니다.사람구실을 못하면 지나가는 개가 짖어댑니다.선배의 얘기대로 일년도 안 돼 까마귀의 친구들은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필요 없는

인간이 되니 찾아오는 놈이 없습니다. 죽자 살자 하던 놈도.심심풀이로 한잔 하자는 놈도.그렇다고 까마귀가 누구 탓을 하는 거 봤습니까? 처음에는 마음이 불쾌했는지 몰라도 흐르는 시간은 한바탕 이해를 돕습니다.

세상을 살며 남의 탓을 왜 하지요?입장이 바뀌었다면 까마귀도 재수없는 놈을 떠났을 겁니다. 필요가 필요를 부르는

세상입니다.다들 아무 필요가 없으세요?화장실은 가세요?덕분에 그 놈의 핸드폰은 호주머니에서 잠을 잘 때가 많습니다. 제구실을 못하는

어느 인간처럼 심심해 죽을 것 같습니다.핸드폰이 아니라 시계입니다.까마귀는 핸드폰을 열고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오늘도 심심한 놈은 절뚝거리며 지하철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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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야?”마누라가 전화 왔습니다.“지하철.”남편은 대답합니다.“어디 가?”“아무데도 안 가.”전차는 아무데도 안 가는 놈을 싣고 달립니다. 아무 데도 안 가는 놈은 달리는

전차에 몸을 실었습니다.아무데도 안 가는 놈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오늘도 까마귀는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왔습니다. 지하철은 사람이 우글거려 까만 놈은 좋습니다.

구경하기 제격이라니까요.절름발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별 기분입니다. 승객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려 안 하지만 까마귀만은 아닙니다.

까만 눈알을 굴리며 열심히 사람 구경을 합니다. 시야에 별난 인간이 다 들어옵니다.희한한 놈들이 많네요.인간이 이렇게 다양한 줄은 난생 처음 알았습니다. 인간이 그리워 지하철을 타기

시작한 그 날부터 알았다니까요.별난 인간이 다 있습니다.하여튼 지하철을 타니 까마귀는 하나도 외롭지 않습니다. 인간 구경을 맘대로 하니

까마귀는 마음이 편합니다. 인간은 역시 인간을 떠나 못 삽니다.마음이 편하니 까마귀는 자주 지하철을 찾습니다. 지하철은 인간들의 삶을

지탱하는 보편적인 수단입니다.까마귀는 지하철을 타고 끝까지 가봅니다. 종착역에서 내려 자장면도 한 그릇 사 먹고, 마을 공원에 앉아 한바탕 햇빛을 쬐기도 합니다.

- 동네가 깨끗하고 살만하구나.햇빛에 몸이 나른해 나면 다시 지하철을 탑니다. 전철은 까마귀를 싣고 출발 역으로 돌아갑니다.

지하철을 타고 나면 까마귀는 밤잠을 잘 잡니다.한바탕 잠이 잘 오니 까마귀는 지하철을 열심히 이용합니다. 덕분에 1 호선부터 9

호선까지 수도권 지하철을 모두 타봤습니다.마치 호기심이 많은 애들처럼.

*

지하철을 이용하며 잠시나마 살 것 같습니다. 살면서 까마귀는 못 볼 것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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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도 인간세상인 건 틀림없습니다.자세히 보니 요즘 젊은 애들은 늙은이나 까마귀 같은 장애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있어봤자 늙은이고 장애인입니다.눈 앞에 늙은이가 서있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눈 앞에 장애인이 휘청거려도 관심이 없습니다.늙어버린 건 늙은이의 일이고 젊은 놈과 관계가 없습니다. 장애자가 된 건 장애자가 자초한 탓이지 멀쩡한 놈과 관계없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니까요.그렇다고 애들과 억지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자리를 양보하라고 젊은 놈들과 호통칠 용기가 없습니다.

하루 이틀을 절룩거린 것도 아니고 주제를 알거든요. 입이 삐뚤어 까마귀는 노래방도 못 간다니까요.

그 놈의 주제를 입비뚤이는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사지는 부실해도 다행히 머리는 돌아왔습니다.

한 마디로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이 세상에서 살자면 우선 주제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양보를 할 줄 아는

세련된 사회에 사는 거 아닌 것 같습니다.다시 보니 세상은 살벌하네요.요즘 애들은 뭘 먹고 자랐는지 하찮은 일에도 물 불을 안 가리고 달려듭니다.

시원하게 자리를 차고 일어나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주제를 아는 절름발이는 애들과 같은 양 하고 싶지 않습니다.어른은 어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어른은 애들 앞에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합니다. 나이가 좀 있다고 어른인 척 하지

말고 점잖게 행세해야 합니다.점잖아야 한다니까요.어른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분들이 눈에 뛸 때도 있습니다. 하는 행동을 보면 정말

어른 같지 않다니까요.어른은 어른다워야 어른 같지 않을까요?아니면 어른도 애도 아닙니다.우리는 지하철이란 시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하철이란 발전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애들의 모습은 결국은 어른의 모습입니다.눈 앞에 할머니 같은 분이 다가오자 절름발이 까마귀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자리를 양보합니다.

“어머님, 여기에 앉으세요.”“젊은이, 고맙네.”까마귀는 오랜만에 인간 노릇을 한 것 같습니다.마음이 뿌듯합니다.그 후부터 까마귀는 내 어머니 같은 분들께 양보하고 또 합니다. 내 아버지 같은

분들께 기꺼이 자리를 양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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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않으세요.” 양보하면 할수록 절름발이 까마귀는 즐겁습니다. 몸은 아파도 마음은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제대로 사유를 하네요.양보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은 줄은 몰랐습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까마귀는 할아버지 같은 분에게 자리를 양보합니다.“아버님, 여기에 앉으세요.”“젊은이, 고맙네.”양보하면 할수록 까마귀는 마음이 즐겁습니다. 지하철에서는 까마귀 같은 놈도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 구실을 살짝

하니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요?기분이 좋으니 어느 날 문뜩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습니다.“여기 앉으세요.”까마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 같은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자, 곁에 서있던

아줌마가 놀란 모습으로 까마귀를 바라봅니다.“까마귀가 아니야?”

*

“참새가 아니야?”까마귀는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이게 무슨 일이지요?고등학교 동창 참새를 지하철에서 만났습니다. 참새를 바라보는 까마귀는 이렇게

기쁠 수가 있을까요!이게 대체 몇 년만이지요? 참새와 까마귀는 나란히 한 책상을 썼는데, 사춘기 까마귀는 예쁘고 똑똑한 참새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까마귀가 주저하는 사이에 참새는 전학 가버렸습니다. 결국은 사랑한다는 소리도 못 하고 한으로 남았습니다.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두 사람은 서로 소식이 끊긴 지 20년이 넘습니다.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20년 만에 불쑥 나타나네요.왠지 꿈 같습니다.이렇게 참새와 까마귀는 지하철에서 한바탕 해후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참새는 옛날 예쁜 모습이 역력합니다.

까마귀도 안 변했답니다.변하긴 좀 변했네요.좀만 변한 거 아니라 많이 변했네요.우리는 나란히 앉아 신이 나서 지난 얘기로 들끓습니다. 언제 이렇게 친했나

느낌이 들 정도로 말씀이 많습니다.아줌마도 아저씨도 말씀이 많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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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은 마치 20년 전의 사춘기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남들이 쳐다보든 말든…….한바탕 얘기를 늘어놓던 아줌마는 한숨을 돌리더니 드디어 까마귀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아니, 너 몸이 왜 이래?”까마귀는 그녀와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날개 부러진 까마귀는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지하철에서 사춘기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합니다.“그럼 어떻게 먹고 살아?”“대충 먹고 산다.”까마귀는 바보 웃음을 하며 마누라 덕분에 산다고 실토합니다. 몸이 이렇게 되니

지난 날의 호기는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절름발이 까마귀는 솔직합니다.“집 사람이 애도 챙기고 남편도 챙기느라 고생이 많다. 돕고 싶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몸이 이 모양이니 별 수가 있나?”참새는 잠시 잠자코 있더니 고개를 들고 까마귀와 묻습니다.“일을 하고 싶어?”“나 같은 놈이 뭘 하겠냐? 일이 있다면야 하고는 싶지…….”“재택번역 같은 것은 할 수 있잖아.”참새는 말합니다.“나 서대문에 작은 번역회사를 하나 차렸는데, 주로 외국어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한다.”“일한번역이라면 글쎄…….”“일한번역이 있어.”참새의 두 눈이 반짝입니다.“타자는 괜찮아?”“문제 없어.”까마귀는 대답합니다.“나 한 손으로 뭐든 다 한다.”“그렇다면 좋아.”전철을 내리며 참새는 까마귀의 손에 명함을 쥐어줍니다.“내일 사무실로 올 수 있지?”“반드시 찾아간다.”“그럼 우리 내일 다시 보자.” 역시 사람은 골방에 앉아있지 말고 밖으로 나돌아야 합니다. 지하철 덕분에 옛날

친구도 만나고 할 일이 생겼습니다.절름발이 까마귀는 하늘 높이 날 것 같습니다.“지하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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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수기*

위의 작품은 ‘대중교통 체험수기 공모전’에 보낸 작품입니다. 솔직히 다 쓰고 나서 만세를 외칠 정도입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작품입니다.그나저나 자전거가 없이 이렇게 멋진 글이 나올까요? 상상도 못 한다니까요.오늘도 까마귀는 한바탕 글을 쓰고 자랑스럽습니다. 웬 일인지 한 손가락으로 쓰는 글이 너무 잘 됩니다.

마법의 손가락이 따로 없습니다. 절름발이 까마귀는 못 쓰는 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못 쓰는 글은 절름발이와 관계

없다니까요. 옛날에는 이렇게 못썼거든요. 열 손가락으로 자판기를 때려도 힘이 부쳤습니다. 한바탕 힘이 부치니 안 쓰러지게 되었습니까?

하지만 뇌졸중에 걸린 덕분인지 머리가 달라졌습니다. 바닷물에 씻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고 상상에 넘칩니다.

그 동안 얼마나 더러웠으면…….절름발이 까마귀는 천재가 된 느낌이 들어 못 살겠습니다. 오스뜨로프스끼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가 생각납니다.

이게 대체 웬 일이지요? 오스뜨로프스끼가 아직도 살아있을 줄은 몰랐습니다.좋은 일인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혹시 쓰러진 사이에 누가 까마귀의 머리를 바꿔

치운 건 아닐까요?의사를 의심해야 하나요?아니면 밤 중에 입원실에 도둑이 들었을까요?도둑이 아니면 부처님께서 까마귀의 처지가 가련하시어 봐주는 걸까요.

부처님께서 다녀가셨다면 까마귀는 할 말이 없습니다.부처님은 위대한 존재입니다.지난 번에 우리 가게를 찾은 스님의 공덕이 아닐까요? 가게란 마누라의 다이어트 ‘shop’을 말하는데, 마누라는 화곡동에서 ‘허벌라이프’

란 가게를 하나 운영합니다.까마귀는 마누라의 가게에서 절뚝거리며 손님에게 차도 따르고 쉐이크도 따르며 돕는 척 합니다.

까마귀도 사람구실을 하고 싶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문이 활짝 열리며 스님 한 분이 들어옵니다.마누라는 신이 나서 스님께 쉐이크도 타 드리고 용돈도 드리며 친절이란 친절을 다 베풀었습니다.

스님은 떠나면서 합장하고 답례를 합니다.“장사가 잘 되시고 집안에 행복이 깃들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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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글이 잘 된다니까요.글이 잘 되자 절름발이 까마귀는 참지 못하고 아들과 한바탕 자랑합니다. “아빠 머리가 돌아온 것 같다. 이제 아빠가 공모전에서 상을 받으면 우리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줄게.” “정말이지?”“아빠가 언제 거짓말 했지?”“아빠, 약속이다.”아빠와 아들은 한바탕 깍지를 걸었습니다. 깍지를 걸자 아빠의 머리 속에 아들의 자전거가 들어앉았습니다. 아들과 약속한

아빠는 열심히 글을 씁니다. 글을 쓰다 고개를 들면 눈 앞에서 자전거가 왔다 갔다 합니다.아빠는 미소를 짓습니다.귀여운 자식에게 아빠는 자전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아빠의 눈에는 아들의

자전거밖에 없습니다.자전거는 아빠의 마음입니다.우리 아들은 자전거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

‘대중교통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한바탕 떨어진 작품입니다. 이렇게 멋진 작품이 왜 아무 상도 못 받았을까요?

이 정도면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공모전에서 한바탕 떨어지고 까마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재주가 없어 수상을 못

했다면 끝이 아닌가요?상금 100 만원이 날아갔습니다.덕분에 까마귀의 작품집에 작품을 하나 추가했지만……. 떨어져도 까마귀는 상심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자격이 안 되는 줄도 모르고 참가한 공모전입니다. 남의 잔칫집에 떡을 얻어먹으러 갔다가 쫓겨나온 놈입니다.

까마귀는 뇌졸중환자입니다. 뇌졸중환자는 머리가 조금씩 돌아오네요.어리버리한 놈은 한바탕 떨어지고 저작권에 신경을 씁니다. 공모조건에 입상과

관계없이 보낸 작품의 모든 권리가 주최 사에 있다고 합니다.수상한 작품도 떨어진 작품도…….이거 혹시 저작권 위반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떨어진 작품까지 내 거라는 건 횡포란

생각이 듭니다.떨어졌으면 주인에게 돌려줘야지.떨어져서 아파죽겠는데 작품까지 빼앗아요? 돈을 빼앗고 물에 차 넣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을까요?해도 해도 너무 한 것 같습니다.신경 끝에 공모전 주최 사에 메일을 하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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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책임자에게:

안녕하세요. 귀사의 공모전에 <지하철 만세>를 보낸 까마귀입니다.솔직히 낙선된 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여 의견이 없습니다. 잘못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작품을 보낸 놈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격도 안 되면서 보냈네요.

이상한 병에 걸리니 이상한 실수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떨어진 문장을 수정하니 대충 볼만하여 까마귀의 단편집에 수록하기로 했습니다. 혹시라도 불필요한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어 얘기를 드리는데, 자격이 안 되니 저의

작품은 공모전에서 제외되는 거지요?  제외되니 자연히 ‘제출된 작품에 대한 모든 권리는 **부에 귀속되며......’에 포함되지 않는 줄 압니다.  대단한 작품이 아닌 줄 알지만 절름발이가 심열을 기울려 창작한 소중한 작품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밤잠을 거스르며 한 손가락으로 쓴 작품입니다.  뇌졸중환자 까마귀가…….감사합니다.

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습니다. 답장이 필요 없는 메일을 보냈으니 답장이 없지 않을까요?

기대한 놈이 바보입니다. 절름발이는 신경을 끄고 다음 콩트 <짓밟힌 사랑>을 시작합니다. 그 놈의 ‘사랑’에

LED 3D TV 도 걸렸고 노트북도 걸렸습니다.자그마치 100 만원이 걸렸다니까요.상을 받으면 팔아서 우리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줄 수 있습니다. 고생 많은

마누라에게 근사한 선물도 할 수 있습니다.자전거를 위하여 선물을 위하여 아빠는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밤잠을 거스르며 열심히 글을 씁니다.

한 손가락으로…….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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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짓밟힌 첫사랑의 이야기

창가에 서서 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쉽니다. 흐르는 세월은 억수로 흘렀지만 까마귀만 보면 생각난다니까요.

허벌나게 생각납니다.무슨 놈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한지 까만 놈은 알고도 모르겠습니다.그 놈의 별명은 ‘까마귀’입니다.첫사랑이 ‘까마귀’에게 선물했다면 믿어지십니까? 기막힌 선물이지만 소중한 선물이기도 합니다.별명이 없는 놈보다 열 배나 낫다고요?세월은 눈 깜빡 할 사이에 20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20년이란 시간은 그 놈의 인생에서 장난이 아니지요?

다들 요란하게 간다는 장가도 못 같습니다. 그 놈의 장가를 언제면 까마귀도 갈 수 있을까요?장가를 못 가니 지난 기억만 새롭습니다.노총각은 생각합니다.- 나의 첫사랑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집을 가서 아들 딸을 한아름이나 낳고 잘 살고 있지 않을까?

그녀는 못 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똑똑하고 눈치가 빠릅니다.기억 속의 계집애는 너무 빨라 문제가 될 정도로 조숙했습니다. 그렇다고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니지요?남보다 빠르면 안 되나요?빠르면 때려요?시시한 얘기는 그만 하고 첫사랑이 ‘까마귀’를 선물한 얘기나 할까요? 우리 한바탕

시간여행이나 하며 심심한 시간을 보낼까요?다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세요.눈을 뜨면 안돼요.여러분들을 모시고 한바탕 여행을 하겠습니다.“1년이 지났습니다.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났습니다. 4년 5년 6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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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났습니다. 7, 8, 9, 10년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장가를 못간 놈의 지루한 20년이 흘렀습니다. 장가를 못간 경력을 억수로 많이 쌓았지요?

그 놈의 경력을 허벌나게 쌓았습니까?그만 눈을 떠도 됩니다.눈을 비비고 보니 눈 앞에 뭐가 보이지요? 시골 중학교의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이

들어오지 않습니까?운동장에서 허줄한 옷을 입은 애들이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닙니다. 애들

속에 까만 놈이 하나 유별나게 활발해 보이지요.사춘기 까마귀의 모습입니다.어린 놈이 귀엽지요.수업종이 울리자 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교실로 밀고 들어옵니다. 까마귀는 교단 앞 제일 앞자리에 달려가 앉습니다.

까마귀는 책상 위에 교과서와 공책을 꺼내놓습니다. 교과서와 공책을 까마귀는 책상 위에 꺼내놓습니다.근데 교과서에 뭔가 삐죽이 끼워있네요.“이거 뭐지?”꺼내보니 쪽지였습니다.아무 생각이 없이 눈 앞에 쪽지를 펼치고 보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담임선생님이

독수리처럼 채가네요.“이거 뭐야?”선생님은 쪽지를 들고 묻습니다.까마귀가 우물거리며 말을 못하자 선생님은 교단에 서더니 쪽지를 펼치고 애들

앞에서 큰소리로 읽기 시작합니다.

까마귀야, 까마귀라 불러도 되지? 나 너를 좋아하니까. 영화 표 두 장이 생겼다. 우리 영화 보러 갈까? 오늘 저녁 7 시에 영화관 앞에서 기다릴게. 참새가~

애들이 참지 못 하고 킥킥거립니다.“참새가 누구야?”선생님이 묻자 애들이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선생님은 손을 들어 애들을 제지시키고는 한마디 합니다.

“누가 공부는 안 하고 연애나 하라고 했어!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고, 엉덩이에 뿔이 난 놈이 누구야!”애들이 킥킥 합니다.선생님은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선생님은 글씨체만 보고도 참새가 누군지 알고 있다. 쪽지의 주인 참새는 방과 후 교무실로 출두하세요.” 선생님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내 곁에 앉은 과부집 외동딸 영이를 바라봅니다.

영이는 볼이 빨개서 창피한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습니다.죄를 지은 놈이 따로 없습니다.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교과서를 펼치고 강의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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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69페이지를 펼치세요.”하지만 까마귀는 교과서를 펼치고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정신이 아닙니다.

영이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 안절부절 못 합니다.불안하고 또 불안합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솔직히 까마귀는 곁에 앉은 영이를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영이는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쁘고 귀엽습니다.

까마귀는 영이와 한 책상을 쓰는 거 자랑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영이가 활짝 웃으면 까마귀는 혼이 날아갑니다.

까마귀는 영이가 좋습니다.좋아도 영이가 쪽지를 쓸 줄은 몰랐습니다. 쪽지가 선생님에게 빼앗길 줄은 더욱

생각 못 했습니다.반항도 못하고 ‘약탈’당한 느낌입니다.- 내기 무슨 짓을 한 거지!이렇게 사춘기 까마귀의 첫 연애편지는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이란 놈이 잘 난 척하며 학생의 인권을 마구 짓밟네요.

사춘기의 반짝이는 눈동자들 앞에서.인권이 뭔지 모르는 암흑한 시대에 태어난 죄인가요, 아니면 눈치 코치 없이 찾아오는 사랑이 죄를 부른 건가요?

어둠 속에서 까마귀는 방황하고 또 합니다.방황하고 또 했다니까요.문제는 연애편지 풍파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까만 놈이 한바탕 방황하다 끝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단한 일이 아니잖아요.방과 후 영이가 도망가버리니 고약한 선생님은 그녀의 부모에게도 까마귀의

부모에게도 알립니다.선생님이 너무 한 거 아닌가요?그녀야 용기가 없어 부끄러움을 못 참고 도망을 가버렸지만, 선생님이 용기 없는

자를 쫓아 하늘 끝까지 갈 줄은 몰랐습니다. 쪼끄만 놈들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까?죄를 지어봤자 여자애가 남자애와 살짝 좋아한다고 했을 뿐입니다. 애들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면 안 되나요?모습이 보기 좋잖아요.선생님은 어떻게 사춘기를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얘기를 듣고 우리 엄마가 주먹을 쥐고 영이 엄마를 찾아갑니다.“그 집의 애를 잘 단속하세요. 한창 공부를 할 나이에 연애를 하면 어떡해요. 우리 애 성적이 왜 떨어지는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요.”

영이 엄마는 펄쩍 뜁니다. “이 놈의 여편네,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할까? 성적이 떨어진 거 우리 애와 무슨 상관이야. 제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머리가 나쁜 탓을 해야지.” 엄마들은 동네 한복판에서 서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대판 싸움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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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이 모여들며 동네가 부산하기 그지없습니다.결국은 우리 둘은 마치 세기의 연애라도 한 것처럼 소문이 쫙 퍼져버렸습니다.방송사에서 취재를 안 왔을 뿐입니다.영이 엄마는 화를 못 참고 딸과 한바탕 분풀이를 합니다.“하란 공부는 안 하고 연애 질이야? 이마에 때도 안 마른 년이 벌써부터 사내가

보여? 가시나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영이가 엄마한테 한바탕 얻어맞은 건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얻어맞고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귀여운 ‘비구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구니’는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수업시간에도 영이는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대신 까만 놈은 정식으로 까마귀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우리 사이는 서먹서먹해 버렸는데, 아예 자리도 바꾸고 서로 피해 다녔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무섭습니다.그리고 얼마 안돼 ‘비구니’ 영이는 다른 학교로 전학 가버렸습니다. 까마귀와 아무

소리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까마귀란 별명은 그녀가 남긴 유일한 선물입니다.그나저나 그 놈의 까마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까만 놈에게 껌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지 않을까요?- 사랑이란 무엇일까?그 놈의 입에서 사랑 같은 소리가 다 나오네요. 물어봤자 장가도 못 가고 토라진 놈이 대답이 있을까요?

- 사랑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네.

*집필 수기*

- 수상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이게 무슨 망신이지요?어린 애들의 놀음판에 끼어들었다가 괄시만 당했습니다. ‘EBS 대국민 사연공모’에

보냈다가 떨어졌습니다.돈에 눈이 멀어 별 짓을 다 하네요.- 사랑이란 무엇일까?마흔 고개를 넘긴 놈이 사랑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아빠는

자빠지고 또 자빠집니다. 아들의 자전거를 위하여.

하지만 문장에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여기 저기서 마구 문제가 튀어나오네요.

아빠는 할 말이 없습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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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써서 어떻게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지? 자전거가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힘들겠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잠이나 잔 거 아닙니다.아빠는 수정하고 또 합니다.수정을 거듭하니 조금씩 빛이 나는 것 같더니 이젠 볼만 하네요. 볼만 하니

자전거가 다시 눈 앞에서 얼른거립니다.아빠는 아들이 있습니다.“아들을 위하여.”“위하여!”

4. 아빠와 아들

우리 집은 미니 3 인 가족입니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6살 아들입니다. 엄마도 아들도 잘 났는데 아빠는 못 났습니다. 입도 삐뚤고 한쪽 팔 다리가 제 구실을 못 합니다. 현실은 무슨 놈의 현실인지

억수로 비현실적입니다.허벌나게 억수로…….아빠는 재수 없는 뇌졸중환자입니다. 가장인 아빠가 돈을 쓰기만 하고 벌지를 못 하니 기회를 넘보던 엄마가 제꺽

가장자리를 빼앗습니다. 아빠는 가장자리를 빼앗기고 할 말이 없습니다. 엄마와 싸워봤자 힘도 못 쓰고 질

거 뻔하기 때문입니다.누가 재수없는 병에 걸리라고 했지요?현실은 애들의 소꿉놀이도 아니고 억수로 비현실적이라니까요. 허벌나게

비현실적이라고 포기하고 안 살 수도 없는 일입니다.아빠는 아들이 있습니다.아들이 있는 아빠는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하여튼 엄마는 회사를 다니고 아빠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챙겼습니다. 아침마다

아들을 어린이 집에 데려가고 저녁에 데리러 갑니다.나머지 시간은 재활운동에 투자합니다.외롭고 쓸쓸합니다.대신 주말은 온 하루 아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주말에도 쉬지 않는 마누라를 도와

아들을 챙겼습니다.주말에 마누라는 식당에서 ‘서빙’을 합니다.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마누라는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열심히 사는 마누라는 우리 집의 기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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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우리 집의 희망입니다.희망과 기둥 뒤에서 고개를 숙인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모습을 감추며 남편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쉽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못났지요?다행히 못난 놈은 희망이 있는 집에서 모자와 함께 삽니다.주말은 아빠와 아들이 친구하는 시간입니다. 아빠는 아들을 앞세우고 마을 공원으로 갑니다.공원에는 그네랑 미끄럼대랑 애들의 놀이가 많습니다. 공원에는 아들 또래

친구들로 요란합니다.아빠는 의자에 앉아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들을 지켜봅니다. 보면 볼수록 내 아들

같지 않습니다.- 누구 아들인지 참 잘 생겼다.아들을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에 미소가 흐릅니다. 못난 아빠는 아들이 귀엽고

자랑스럽습니다.아들이 있는 아빠는 미래에 희망을 가집니다. 희망이 있는 아빠는 존재의 가치를

느낍니다.아들은 아빠의 희망이자 존재의 이유입니다.덕분에 아빠는 존재합니다. 신이 나서 애들과 뛰어다니는 아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들이 웃으면

아빠의 얼굴에도 웃음이 흐릅니다. 아빠가 바보 웃음을 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 쪽에서 달아 다니던

아들이 이 쪽으로 달려옵니다.“아빠, 지갑 주었다.”눈 앞까지 달려온 아들은 아빠에게 불쑥 지갑을 내밉니다.“어디서 주웠는데?”“저기 의자 뒤에서 주었어.”아들은 손으로 지갑을 발견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아빠는 손에 두툼한 지갑을 들고 갸웃합니다. 기쁜 표정을 억누르고 고급스런

지갑을 열어봅니다.지갑 속에는 카드도 있고 현금도 꽤 들어있습니다. 세어보니 현금은 5 만 원짜리를 포함하여 자그마치 10 만이나 됩니다.

- 이게 무슨 횡재지?10 만이면 아빠의 두 달 용돈입니다. 아빠의 지갑에는 쥐꼬리만한 용돈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 이 돈으로 뭘 할까?고개를 드니 아들의 순진하고 착한 눈동자와 마주쳤습니다.아빠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자신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고 생각합니다. 아빠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못난이 아빠는 끝내 한바탕 꿀꺽하고 싶은 욕심을 참았습니다.용돈도 용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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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들의 본보기입니다.본보기는 한바탕 노릇을 할 때가 왔습니다. 어쩌면 인생에서 한번밖에 없는 본보기 노릇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앞에서…….결심을 내린 아빠는 지갑을 들고 아들과 말합니다.“지갑 주인은 지갑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애탈까? 지갑을 잃어버리고 애타게 찾고

있지 않을까?”“응, 얼마나 애탈까?”동조하는 아들은 어른스럽습니다.“우리 지갑 주인을 찾아 돌려주는 거 어때?”“응, 돌려주자.”아빠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지갑을 열고 신분증을 꺼냈습니다. 신분증을 보니

주인은 일흔을 넘긴 노인장입니다.“연세가 많은 분이시네.”“할아버지야?”“할아버지가 맞아.”아빠가 신분증을 보여주자 아들은 들고 봅니다. 신분증을 보는 아들은 키가 또

자란 것 같습니다.아빠는 아들이 대견스럽습니다.신분증 외에 지갑에서 주인의 명함도 여러 장 발견했습니다. 명함에는 집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있습니다.생각밖에 지갑의 주인은 먼 동네에 사는 분입니다. 웬 일로 우리 동네에 지갑을 떨어뜨렸지요?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사시는 분이 아니네.”“어디에 사는 거야?”“아주 먼 곳에.”아빠는 잠시 생각하다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명함에 있는 할아버지의

번호에 전화를 합니다.“혹시 지갑을 잃어버리시지 않으셨습니까?”“네. 지갑을 주웠습니까!”할아버지는 연신 고맙다며 어디냐고 묻습니다. 아빠는 장소를 말하며 화곡 역에서

기다려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할아버지는 문제 없다며 2 시간 뒤에 만나자고 합니다.“5 호선 동쪽 끝이다 보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화곡 역에 도착하면 전화를

드리지요. 하여튼 고맙습니다.”“무슨 말씀을요.”순간 아빠는 기발한 생각이 떠오릅니다.“잠시만요.”아빠는 아들과 묻습니다.“우리 어린이대공원에 놀러 갈까?”“가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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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신이 났습니다.“호랑이가 보고 싶어. 사자가 보고 싶어. 코끼리도 보고 싶어. 원숭이도 보고 싶고

다 보고 싶어.”아들은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한바탕 굶주린 아들을 보니 아빠는

할 말이 없습니다.아빠 노릇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실례했습니다.”아빠는 핸드폰을 들고 말합니다.“화곡 역까지 올 필요가 없이 군자 역에서 만납시다. 마침 아들과

어린이대공원으로 가는 길이거든요.”“그렇다면…….”아빠와 아들은 어린이대공원으로 출발합니다. 아들을 앞세우고 아빠는 절뚝거리며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어린이대공원에는 아들이 보고 싶은 동물이 많습니다. 아들은 신이 났습니다.두 시간 뒤에 우리는 군자 역에서 지갑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는 까마귀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미안할 거 없습니다. 마침 이 쪽으로 오늘 길이어서…….”아빠는 겸손을 차립니다.“얘야, 할아버지께 지갑을 드려야지.”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들은 두 손으로 지갑을 내밉니다.“제가 공원에서 주웠어요.”할아버지는 지갑을 받아 들고 열어보더니 장하다는 듯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합니다.

“애가 참 착하구나. 이렇게 고마울 수가…….”할아버지는 아빠와 얘기합니다.“젊은이, 너무 고맙네. 지난 밤에 친구와 약주를 한잔 하고 오다가 공원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 떨어뜨린 것 같구먼. 못 찾을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는 지갑을 열고 확인하더니 속에서 제일 큰 5 만 원권을 한 장 꺼내 아들의 손에 쥐어줍니다.

“이 걸로 맛나는 거 사먹거라.” 아들은 받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아빠를 바라봅니다. 받아도 되냐는 듯이. 아빠는 할아버지를 말립니다. “어르신,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침 주말이어서 어린이대공원에 가던 길에

들렸습니다.”할아버지는 말을 안 듣습니다.“애야, 어서 받거라. 할아버지가 주는 거다. 넌 좋은 일을 했으니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호주머니에 억지로 돈을 넣어줍니다. “공원에 가서 재미있게 놀고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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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손을 저으며 돌아서 지하철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드님과 좋은 주말 되시오…….”할아버지가 떠나자 아빠와 아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우리 그만 가자.”아빠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우리 아들 장하다. 호랑이를 보러 가자. 사자를 보러 가자. 코끼리를 보러 가자.

원숭이를 보러 가자.”아빠가 외치자 아들도 신이 났습니다.“호랑이를 보러 가자. 사자를 보러 가자. 코끼리를 보러 가자. 원숭이를 보러 가자.

빨리 가자.”아빠와 아들은 신이 나서 어린이대공원으로 갑니다. 마음이 기쁘니 절름발이는 걸음걸이가 가볍습니다. 마음이 기쁘니 아빠는 살 것

같습니다.의사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좋은 생각을 많이 하세요. 마음이 기쁘면 회복이 빨라요. 기쁜 마음으로 운동을

하세요.”하나도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인생이란 결국은 마음가짐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음만 올바로 가지면 사는 거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아빠, 왜 웃어?” 앞에서 걸어가던 아들이 돌아다보며 묻습니다.“아빠 안 웃었는데…….”“웃고 있잖아.”그제야 아빠는 바보웃음을 한 자신을 발견하고 점잔을 뺍니다. “우리 아들이 기특해서.”“아빠가 가져.”아들은 아빠에게 5 만원 권을 쑥 내밉니다.“우리 아들에게 준 거야.”“알거든.”아들은 말합니다.“아빠가 가지고 있어.”“알았어.”아빠는 금덩이 같은 5 만 원권을 받아 지갑에 넣습니다.“대신 나한테 천원 줘.”“알았어.”아빠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꺼냈습니다.“내 돈을 쓰면 안 돼.”“알았다니까.”어린 놈이 참 고약합니다. 어려도 자기 거 하나는 제대로 챙긴다니까요. 맨날 까먹는 아빠는 아들이 대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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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럽습니다.아빠와 아들은 어린이대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대공원에는 사자도 있고 호랑이도 있습니다. 코끼리도 있고 원숭이도 있고 없는

동물이 없습니다.아빠는 절룩거리며 아들을 따라갑니다.아들은 아빠 앞에서 신이 나 팔자걸음을 합니다. 절름발이 아빠는 괘씸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누구 아들이지요?- 이 세상에 부러움이 없어라.

*집필 수기*

위의 작품은 역시 공모전에 보내려고 집필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써놓고 보내지 못 했습니다.

한바탕 떨어진 거 아니라니까요.떨어지고 싶어도 기회가 없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2012 바르게 살기 전국모범가정사례’ 공모전에 보내려고 열심히 썼는데 다 쓰고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공모전 유의사항을 보니 ‘응모된 사례는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며, 허위사실에 대한 책임은 응모자의 책임하에 있습니다’라고 경고합니다.

까마귀는 할 말이 없습니다.‘바르게 살기’입니다.한바탕 창작하고 ‘허위사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아쉬워도 솔직한 놈은 포기했습니다.

대상 상금이 자그마치 200 만이지만…….200 만이 수포로 날아가는 것 같아 아쉬움을 금치 못 합니다. 덕분에 괜찮은

작품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작품의 첫 독자는 까마귀의 아들입니다.까마귀의 천재 아들입니다.6살밖에 안 되는 놈이 아빠의 작품에 관심이 많다니까요. 아빠가 글을 쓰면 아들은

가만히 뒤에서 훔쳐봅니다.책을 읽기 좋아하는 아들은 일년 전에 한글을 다 떼고 닥치는 대로 별 거 다 읽으려 듭니다.

날마다 자기 전에 이야기를 해줬더니…….자기도 작가가 된답니다.어린 놈이 <곰과 늑대의 이야기>나 <미용실 새끼 쥐의 이야기>보다 훨씬 재미나는 글을 쓴답니다.장난인 줄 알았더니 정말 쓰기 시작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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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놈이 노트에 둬 줄 쓰고는 아빠와 자기가 쓴 거 읽어보라고 야단입니다.누구 아들이지요?어려도 제법 어른스럽지요? 이제 아빠가 문단에 데뷔하면 아들도 시켜야겠습니다. 어느 동네에도 우리 아들

같은 놈이 없는 것 같습니다.아빠가 컴퓨터 앞에서 한바탕 자판기를 때리고 있는데 등 뒤에 아들 놈이

나타났습니다.“아빠, 다 썼어?”“한 벌 수정을 더 해야 돼.”“다 쓰면 보여 줘.”아들은 절름발이 아빠가 쓴 글이 재미있나 봅니다. 어린 놈이 뭘 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도대체 누구 아들이지요?

5. 참새와 까마귀의 로맨스

재수가 없는 놈은 아이디가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생각만 해도 재수가 없어 못 살겠습니다.

한심하게도 40 대 젊은 나이에 뇌졸중에 걸려 쓰러집니다. 재활병원에서 한바탕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한숨이 나와도 별 수 없습니다.별 수가 없다니까요.다행히 그녀가 있었습니다.까마귀의 재활치료를 책임진 의사선생님은 젊고 예쁜 아가씨입니다. 예쁜

아가씨의 치료를 받으니 까마귀는 살 것 같습니다.절름발이는 살 것 같다니까요.그녀의 이름은 까먹었는데 별명은 기억하고 있습니다.참새라고 하는데 귀엽지 않으세요?환자 중에 부엉이처럼 생긴 흰 머리 할머니가 있는데, 그녀의 어디에 마음이

들었는지 특별히 지어준 별명입니다.참새는 예쁘고 야무집니다.가느다란 몸매에 작은 머리통은 누가 봐도 참새입니다.까마귀는 참새의 치료를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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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까마귀한테 주어진 참새의 치료시간은 하루에 30 분입니다. 끝나기 바쁘게 참새는 다음 환자한테 이동합니다.

까마귀는 참새와의 30 분이 아쉬워죽을 것 같습니다.참새가 떠나면 까마귀는 질투 섞인 눈빛으로 그녀의 치료 상대를 바라봅니다. 마치 연적에게 사랑을 빼앗긴 것처럼.열심히 환자를 치료하는 참새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습니다. 참새는 역시 웃는 모습이 예쁩니다.

참새를 바라보며 까마귀는 생각합니다.- 그녀는 어떻게 재활치료사가 될 생각을 했을까?재활치료사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닌 줄 압니다. 아무나 하면 재활병원은 문을 닫지

않을까요?참새의 치료를 받으며 까마귀는 끝내 입을 열었습니다.“재활치료사가 될 생각을 어떻게 했지요?”참새는 웃으며 대답합니다.“어릴 때 엄마가 말씀했어요. 저의 손이 예쁘대요. 예쁜 이 손은 재활치료사가 제격이래요. 이 손으로 많은 생명을 구한대요.”

까마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어머니는 멋진 분이시네요.”다음 날 까마귀는 지난 기억을 망각하고 또 묻습니다. 재수가 없는 까마귀에게 자주

있는 일입니다.“재활치료사가 될 생각을 어떻게 했지요?”그녀는 웃으며 대답합니다.“어릴 때 아빠가 말씀했어요. 저의 손이 예쁘대요. 예쁜 이 손은 재활치료사가 제격이래요. 이 손으로 환자에게 기쁨을 줄 수 있대요.”

까마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합니다.“아빠는 멋진 분이시네요.”며칠 뒤에 까마귀는 까먹고 참새와 같은 질문을 또 합니다.“재활치료사가 될 생각을 어떻게 했지요?”그녀는 웃으며 대답합니다.“오빠가 말씀했어요. 저의 손이 예쁘대요. 이 손은 재활치료사가 제격이래요. 내

동생은 천사가 될 거라며 자랑하고 다녀요.”까마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오빠가 참 멋지네요.”한 달 뒤에 어리바리한 까마귀는 참새와 또 묻습니다.“재활치료사가 될 생각을 어떻게 했지요?”그녀는 웃으며 대답합니다.“선생님이 얘기했어요. 저의 손이 너무 예쁘대요. 이 손은 재활치료사가 제격이래요. 인간에게는 각자 주어진 직업이 있대요.”

하나도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선생님을 잘 만났네요.”그렇다면 까마귀에게 주어진 직업은 무엇일까요? 작가 지망생 까마귀는 창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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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 욕망이 살아났습니다.글을 쓰고 싶습니다.일을 하는 참새는 볼수록 예쁩니다.참새는 언제나 착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까마귀의 본능을 자극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까마귀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시를 한 수 써줬습니다.

참새와 까마귀(1)

까마귀 한 마리 까옥~길가에서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데지나가던 참새가 묻는다.까마귀님, 여기서 웬 일이세요?배가 고프세요?

까마귀는 울다 말고 까옥~눈물이 글썽해서 참새와 하소연한다.배가 고픈데 날개까지 상해 하늘을 날지 못해요.참새님, 저는 장가가고 싶어요.노총각이 싫어요.

시를 읽고 참새는 한바탕 깔깔 웃어댔습니다.“하나만 더 써줘요. 하나만 더…….”참새가 졸라대자 까마귀는 못이기는 척하며 한 수 또 써줍니다.

참새와 까마귀(2)

사랑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까마귀는 한숨을 쉰다.팔도 아프다.다리도 아프다.

오늘은 사랑 같은 소리 안 하세요?참새는 심심하다.일을 하다 고개를 돌리니창 밖에서 주룩주룩 봄비가 내리고 있다.

시를 읽고 참새는 쪼끄만 고개를 갸웃거립니다.“심심한 줄 어떻게 아셨어요?”“밖에서 비가 내려요.”참새는 창 밖을 바라보며 활짝 웃습니다. 실오리 같은 눈으로 한번 웃으니 까마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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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이 날아갑니다. “하나만 더 써줘요.”참새는 시인의 팔을 잡고 조릅니다.

참새와 까마귀(3)

아침이다.까마귀는 노래한다.사랑이여, 기죽지 말고 영원하여라.우리 집 뒷산에다리 부러진 노루가 산다.절뚝절뚝

아침이다.참새는 노래한다.사랑이여, 오늘도 어제처럼 느끼하여라.꿈나무 병원에날개 부러진 까마귀가 있다.푸드득 푸드득

이렇게 까마귀는 그녀에게 <참새와 까마귀>를 아홉 수나 써줬습니다. 덕분에 그 놈의 머리가 많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참새의 웃음소리는 치료에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까마귀의 가슴에 삶의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희망이 보인 까마귀는 열심히 선생님의 치료에 응합니다. 덕분에 건강이 눈에 뛰어나게 회복되었습니다.

3 개월 뒤 시인은 재활병원에 시를 ‘유산’으로 남기고 퇴원합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며 참새와 이별을 했습니다.절룩거리는 사이에 일 년이 흘렀습니다. 비가 내리고 번개가 번쩍이며 우레가 대지를 흔듭니다. 눈이 내리고 하천이 얼어붙더니, 얼어붙은 하천이 풀리며 시냇물이 노래를 부릅니다.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며 새봄이 꽃 단장합니다.따사로운 햇빛아래 까마귀는 참새에게 써준 시를 바라보며 지난날을 그립니다.

시인은 무슨 놈의 정신으로 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다시 쓰라면 재주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겸손 같은 소리가 아니라 까마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까만 놈의 지혜인지 뇌졸중의 재주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요?

*집필 수기*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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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참새와 까마귀>는 ‘재한외국인 생활체험 수기 공모전’에 재외동포의 신분으로 보낸 작품입니다.

자격도 문제 없고 작품도 문제 없으니 대상 상금 100 만원은 반드시 까마귀의 호주머니에 들어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 자전거가 보입니다.하지만 막판에 발표를 연장한다고 공지가 뜨자 까마귀는 불안합니다. 지난 번

작품도 발표가 늦어지더니 결국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떨어지고 엉덩방아를 찍으면 큰 일인데…….우리 아들 자전거를 어쩌지요?아빠는 아들과의 약속만은 반드시 지키고 싶습니다. 아빠는 머리 속에

아들의자전거밖에 없다니까요.3 일 뒤 끝내 발표를 합니다.발표와 함께 눈 앞에서 자전거가 날아가버렸습니다. 발표와 동시에 까마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습니다.프로가 아마추어의 무리에 끼어들었네요. 발표가 늦어진 거 혹시 절름발이와 관계 있지 않을까요? 늑대가 양 무리에 뛰어들어 소동이 일어난 거 아닐까요? 뇌졸중환자가 또 민폐를 끼친 거 틀림없습니다.관계없다면 한바탕 서운하지만…….뭐가 뭐든 간에 떨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떨어지며 우리 아들 자전거도 함께

날아가 버렸습니다.아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막다른 골목에 접어든 놈처럼 아빠는 부랴부랴 공모전을 찾아 헤맵니다. 헤매고 또

헤맨 끝에 붙어 볼만한 공모전을 찾아냈습니다.목표를 발견하기 바쁘게 아빠의 상상력은 달리기 시작합니다. 상상력은 파도처럼

망망대해에서 여객선을 밀고 달려갑니다.여객선이 인천항에 도착하자 장가를 못간 놈이 내리더니 유람선을 갈아타고

아라뱃길을 미끄러지듯 달려갑니다.유람선 위 갑판에서 노총각이 새파란 처녀를 꼬시려 듭니다. 하지만 제대로 말도 못 꺼내고 끝나버립니다.

무슨 일이지요?유람선은 비좁은 운하를 달리더니 서서히 한강으로 접어듭니다. 요란하게 사랑

같은 기적을 울리며…….한강 위에 사랑 같은 소리가 마구 울려 퍼집니다. 여기까지 상상력이 달리자 아빠는 눈 앞에 다시 희망이 보였습니다. 동녘에서 찬란한 아침 해가 솟아오릅니다.희망은 희망을 부릅니다.- 까마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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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꿈의 뱃길

까마귀는 하늘을 나는 여객기보다 바다를 가르는 여객선을 즐긴다. 즐기는 데는 나이를 못 속이는 것 같다.

까만 놈은 총각 경력이 10년이 넘는 노총각이다.노총각은 하늘을 나는 여행에 질렸다. 구름바다는 한 두 번 보면 끝이다. 신문이나 읽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비좁은 공간에서 부자연스레…….대신 여객선 위에서 바다 바람이나 쐬며 갈매기와 친구하고 싶다. 갈매기에게 빵

조각을 나눠주며 친분을 쌓고 싶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바탕 상상하고 싶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오늘도 까마귀는 여객선을 타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향한다. 까마귀의 집은 한국에

있고 까만 놈의 직장은 중국에 있다.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하늘 길도 바다 길도 열려있다. 열려있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선택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선택이 자유로우니 사는 재미도 다른 것 같다. 까마귀는 시간만 나면 내 집으로 달려간다.중국에서 한국으로…….한국에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못난 자식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는 전화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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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타령이다.“예쁜 아가씨 소개할까? 엄마 친구 딸인데 우리 아들 사진을 보여줬더니 만나고 싶단다. 주말에 오는 거지?” 총각은 늙어도 어머니의 아들이다.장가 못간 놈은 효자다.여객선이 경인항에 도착하자 까마귀는 유람선을 갈아탄다. 호텔 같은 유람선은 손님을 싣고 서서히 인천터미널을 출발한다.

귀가에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음악과 함께 출발한 유람선은 미끄러지듯 아라뱃길을 달린다. 까마귀는 카페 앞에 앉아 한가히 커피를 마신다. 유람선 위에는 여행객들의 웃음소리가 넘친다.

‘쏼라 쏼라……’ 하는 중국어가 귀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젊은 남녀가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있다. 우리 나라로 신혼여행을 온 신랑신부인가 보다.

다정히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다.신 항로가 생기며 뱃길에는 귀여운 카페가 많이 생겼다. 마치 프랑스 파리의

세느강변에 즐비한 카페를 보는 것 같다. 연인들이 커피를 마시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사랑을 속삭이며 연인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유람선 위에서 손을 뻗치면 커피를 슬쩍 할 것 같다.- 사랑이란 무엇일까?노총각은 갸웃하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고 또 해봐도 장가 못간 현실은 변함이 없다. 변함이 없는 건 역시 사랑이

없는 비현실인 것 같다.사랑 같은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온다.커피를 마시며 까마귀가 한바탕 사랑 같은 기분에 잠겨있는데, 눈 앞에 20 대의 젊은 아가씨가 불쑥 나타났다.

“여기 앉아도 되죠?”손에 컵을 든 그녀는 활짝 웃는다.“앉으세요.”까마귀는 미소로 회답한다.“빈자리에요.”그녀는 의자에 엉덩이를 내리고 한가히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경치를 바라본다. 노총각은 눈 앞의 처녀를 바라본다.보면 볼수록 예쁘다.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유채화 같다. 그녀는 청순하고 귀엽다.심심한 노총각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마치 봄바람이 황폐한 까마귀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듯…….“여행 갔다 오시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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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그녀는 대답한다.“인천에 놀러 왔다 돌아가는 길이에요.”“뱃길이 생겨 편하지요?”“너무 편해요.”그녀는 활짝 웃는다.“할머니가 인천에 살아요. 주말마다 뵈러 가요. 저는 할머니의 손에서 컸거든요. 제가 찾아가면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할머니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우리 할머니 얼마나 예쁜데……. 처녀 때

사진을 보면 깜짝 놀라요. 여자가 봐도 반해버려요. 근데 고생을 많이 하셔서 이마에 주름이 많이 생겼어요.”

그녀는 말하다 말고 한숨을 쉰다.“연세가 있어도 다행히 건강한 편이에요. 저는 할머니가 오래오래 살기를 바래요. 제가 시집가는 모습도 보고 애를 낳고 잘 사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어요.”총각은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온다.“할머니 참 행복하시네요.”“행복한 건 저에요.” 그녀는 살짝 정색하며 말한다.“할머니가 없었다면 저는 고아원에 가야 해요. 어릴 때 아빠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갔거든요. 할머니가 아니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여전히 눈 앞의 청순하고 귀여운 모습일까? 까마귀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생각만 해도 할머니가 너무 고마워요. 할머니의 손에서 부러움 모르고 컸어요.

할머니는 저의 아빠고 엄마에요. 할머니는 저의 전부에요. 결혼하면 할머니를 모시고 한집에서 살 생각이에요.”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근데 할머니는 나와 안 산대요. 시집가면 시집에서 살아야지 하면서. 할머니가

거절해도 한 집에서 살 거에요. 아니면 시집 안 간다고 했거든요. 저의 남편이 될 사람도 의견이 없으리라 생각해요.”

그녀는 밝고 당당하다.“의견이 있으면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요.” 그녀는 활짝 웃는다.눈 앞의 그녀는 얼굴만 예쁜 거 아니라 마음도 예뻤다. 활짝 웃는 모습은 얼굴도

마음도 너무 예쁘다.노총각은 그만 그녀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장가를 못간 놈은 그녀에게 반해

죽을 것 같다.- 할머니는 내가 모시는 거 어떨까?까마귀는 그녀의 남편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와 같은 여자라면 노총각은 장가를 백 번도 더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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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를 못간 놈이 결심하고 입을 열고 프러포즈를 하려는데 테이블 위에서 그녀의 핸드폰이 부르릉거린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확인하더니 전화를 받는다.“자기야, 볼 일을 다 봤어?”이게 무슨 소리지?무슨 소리든 간에 까마귀를 실망의 나락에 떨어뜨리기는 충분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남자친구와 함께 배를 탄 거였다. 맹랑한 까마귀는 할 말이 없다.임자가 없는 줄 알았더니 화장실에 가 있을 줄이야. 그녀 정도라면 남자친구가

없는 게 이상하지만…….한바탕 할머니를 모시고 싶은 마음은 억울해도 할 말이 없다. 억울한 마음은 노총각이란 현실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나 금방 갈게.” 그녀는 자리를 차고 일어난다.“즐거웠어요.”“좋은 여행 되세요.”그녀가 떠나자 까마귀는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두 눈을 비빈다. 까만 놈은

고개를 쳐들고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총각은 살짝 늙은 것 같다.늙어도 총각은 총각이지만…….어느새 유람선은 시천나루와 귤현나루를 지나 김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손님을 내리고 유람선은 다시 출발한다.

유람선은 고동을 울리며 서서히 한강으로 접어든다. 한강은 가슴을 펼치고 어머니처럼 장가를 못간 놈을 포옹한다.

유람선은 노총각의 로맨스를 품고 한강 물길을 가른다. 물길을 가르며 신이 나서 상류로 이동한다.

눈 앞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남산타워가 보이는 것 같더니 63빌딩이 고개를 쳐든다. 우후죽순처럼 강남의

고층건물이 하나 둘 나타났다. 고층건물이 키 자랑을 하듯 서서히 수림을 이룬다.대도시의 절경이 펼쳐졌다.선남선녀들은 난간에 서서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서쪽 하늘에서 저녁노을이 타오르며 도시는 금빛으로 번쩍인다.

마치 대지에 다이아몬드라도 박아놓은 것처럼…….오늘도 노총각은 유람선을 타고 달려간다. 어머니가 청국장을 끓여놓고 기다리는

우리 집으로…….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노총각은 스쳐 지나간 사랑에 미련을 못 버리고 고개를 젓는다. 사랑하고 싶은

까마귀는 어머니가 소개한 그녀를 생각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총각은 오늘만큼 장가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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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장가를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때를 놓치면 안 되지.그 놈의 때를 놓치면 밥은커녕 국물도 없지 않을까? 그 놈의 때를 놓치면

국물은커녕 밥도 없다니까요.노총각의 꿈은 아라뱃길을 누비며 한강을 달린다.미래의 유람선 위에서…….

*집필 수기*

이만하면 까마귀란 놈이 대충 글을 쓰지요? 누가 봐도 이 정도면 상을 받을만하지 않을까요?

까마귀는 수상하는 꿈을 꿉니다.절름발이가 절룩거리며 무대에 올라서는 꿈을 꿉니다. 한 손으로 상패를 받으며

바보웃음을 합니다. “제가 몸이 좀 아파서요.”상패를 들고 절뚝거리며 휘청거리며 무대를 내려옵니다.꿈을 꾸는 까마귀는 눈 앞에 자전거를 떠올립니다. 천사 같은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화려하게 웃습니다.

“아빠, 고마워.”“아빠는 약속을 지켰다.”까만 놈이 약속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요.한바탕 작품을 써놓고 결국은 공모전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세상 사람들과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 일이고 밝혀봤자 재미가 없습니다. 생각 같았으면 까마귀는 한바탕 야단치고 싶지만, 야단쳐봤자 힘만 빠질 뿐 도움이 안 됩니다.

하여튼 별난 놈들이 다 있다니까요.믿고 살기 힘드네요.그나저나 우리 아들 자전거를 어쩌면 좋지요? 괜히 허무한 곳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버렸네요.덕분에 문장이 하나 생겼지만…….까마귀는 고민하고 고민하다 미용실로 뛰어듭니다. 아빠는 깨끗이 삭발하고 아들과 약속을 못 지킨 거 사죄합니다.

“자전거는 다음에 사줄게. 다음 공모전에서 상을 타면 반드시 사준다. 아빠는 아들과 약속한다.”

하지만 아들은 삐쳤습니다.“약속을 안 지키는 아빠는 아빠가 아니야.”쪼끄만 놈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엄마한테 가버렸습니다. 무슨 애가 원칙이 이렇게 강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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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아들인지 고약해도 너무 합니다.하여튼 덕분에 절름발이 까마귀는 난생처음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시원하게 삭발을 해봤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전생에 스님이었구나.삭발하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스님 머리가 시원한 줄만 알았지 볼만도 하네요.

아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립니다.- 어린 놈이 엄마한테 가버렸잖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아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합니다.생각하고 또 합니다.하지만 생각해봤자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빠란 놈이 아들을 무시하고 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빠는 절룩거려도 아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고 싶습니다. 아빠는 세상 사람들과 등을 지더라도 아들만은 챙기고 싶습니다.

- 자전거를 사줘야 하는데…….구겨진 아빠의 체면을 어쩌면 좋지요? 지난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왜 이렇게

힘들지요? 아빠는 실망하고 또 합니다. 내일은 5월 5 일, 아들의 어린이 날입니다. 약속을 못 지킨 아빠는 자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 다음에 상을 타면 반드시 사줄게.

7. 전기 요금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잖아

마누라는 전기 요금 고지서가 날아오자 상을 찡그립니다.“무슨 요금이 이렇게 많아.”하면서도 고지서를 들고 은행으로 갑니다.- 누구 탓이지?마누라가 문을 나서자 남편은 고개를 쳐들고 한숨을 쉽니다. 화장실을 쓰려고 문을

여니 전기가 켜진 채로 있습니다. - 전기 요금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잖아.거울 속의 남편은 거울 밖의 남편과 상을 찡그립니다. 남편은 변기에 앉아 볼 일을

보며 끝내 결심을 내렸습니다.- 이번 기회에 잡아야겠다.한바탕 결심한 남편은 다음 날부터 체크합니다. 한달 동안 두 눈을 부릅뜨고 살폈더니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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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이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아래는 남편이 그 동안 한바탕 수집한 데이터를 정리한 겁니다.

사례(1): 자기 전 마누라가 목욕하고 침실로 들어서자 남편은 일어나 가봅니다. 아니나다를까 목욕실 등이 켜진 채로입니다.

- 전기 요금이 올라가 는 소리가 나잖아.남편은 잽싸게 전기를 끄고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사례 2: 저녁에 식구 넷이 영화를 보러 갑니다. 남편이 애들을 데리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마누라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부랴부랴 달려나옵니다.

맨날 부랴부랴 하는 마누라입니다.“나도 소변 봐야겠다.”남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방의 등이 환하게 켜진 채로 있습니다. 화장실 문을 여니 역시 대낮처럼 밝습니다.

- 전기 요금이 올라가 는 소리가 나잖아.남편은 돌아다니며 등을 끕니다.

사례 3: 아침에 애들이 학교로 가자 아빠는 애들 방을 체크합니다. 중학교를 다니는 큰애의 방에 들어서니 컴퓨터가 켜진 대로 있습니다.

- 전기 요금이 올라가 는 소리가 나잖아.아빠는 컴퓨터의 전원을 끕니다.

사례 4: 아들 두 놈은 목욕실에서 한바탕 장난치며 한 시간이 넘어도 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아빠는 끝내 참지 못 하고 훈계합니다.“이 놈들, 빨리 씻고 나와. 다음부턴 샤워기를 사용한다.”아빠는 중얼거립니다.“전기 요금이 올라가 는 소리가 나잖아.”

사례 5: 아침에 마누라도 애들도 모두 나가니 집안은 조용합니다. 자유직업자 아빠가 일을 할 시간입니다.

서재에서 일을 하다 머리도 쉬울 겸 집안을 돌아다닙니다.주방을 둘러보니 밥 가마 전기가 켜진 대로 있습니다. 남편은 다가가 밥 가마의 플러그를 뽑아놓습니다.

시야에 냉장고가 들어옵니다. 갸웃하다 서재로 돌아가 인터넷으로 검색해봅니다. 되돌아와 냉장고 온도를 다시

설정합니다. 냉동실 온도를 -16 도에 냉장실은 4 도로 설정합니다.- 전기 요금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잖아.

사례 6: 거실을 청소기로 돌리고 있던 남편은 상을 찡그립니다. 청소기 뚜껑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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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기 필터를 한바탕 청소합니다.온갖 쓰레기로 꽉 찼습니다.청소기를 사고 나서 한번도 필터를 청소한 기억이 없습니다. 흡인력이 좋아지자 남편은 한 단계 낮춰 사용합니다.

- 전기 요금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잖아.청소기는 신나게 돌아갑니다.

사례 7: 마누라가 일을 하러 나가자 자유직업자 남편은 가사를 시작합니다. 모아놓은 세탁물을 한꺼번에 세탁합니다.

사용횟수를 줄이기 위하여.절약모드를 이용하고 탈수는 적당히 5 분으로 설정합니다.- 전기 요금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잖아.세탁기는 잘만 돌아갑니다.

사례 8: 인터넷을 보며 한바탕 연구한 남편은 집안의 조명을 교체합니다. 집안의 백열 전구를 모두 LED 전구로 바꿉니다.

- 전기 요금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잖아.방안이 더욱 밝네요.

사례 9: 아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다 졸립니다. 머리가 피로하니 상상력이 죽어버려 일이 진척이 안 됩니다. 피로한 머리를 쉬울 겸 침실로 들어가 누웠습니다.1 분도 안돼 뛰쳐나옵니다. - 전기 요금이 올라가 는 소리가 나잖아.컴퓨터를 끄고 돌아갑니다.

이렇게 한 달이 되자 제비가 고지서를 물고 날아왔습니다. 고지서를 받아 들고 마누라는 얼굴이 활짝 펴졌습니다.

“요금이 2 만원이나 줄었다.”즐거운 마누라는 애들처럼 신이 나서 떠들어댑니다. 마치 남편의 공적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오늘저녁 우리 한바탕 삼겹살 파티나 열까?”역시 우리 마누라입니다.생각이 많은 남편도 솔직히 삼겹살까지는 생각 못 했습니다. 현실은 때로는

상상력을 초월한다더니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생각은 못 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요?한바탕 전기를 절약했으니…….다음 달을 위하여.“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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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수기*

공모전에 보내고 한바탕 기대를 품었던 작품입니다. 발표를 기다리며 정말 기대를 많이 했다니까요.

하지만 앞에서 자격문제가 생기며 뒤늦게 확인해보니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를 상대로 한 공모전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인’은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그 놈의 뇌졸중에 걸리더니 꼴이 말이 아닙니다. 무슨 꼴인지 하여튼 그 놈의 꼴이 좋다니까요.

기대란 마구 품는 거 아니었습니다. 특히 절름발이 까마귀처럼 재수 없는 병에 걸린 놈들은 금물입니다.잘못 품으면 엎어진다니까요.눈 앞에서 우리 아들의 자전거가 춤을 추며 날아가네요. 훨훨 날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더니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습니다.실망한 아빠는 맥이 풀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이 놈의 공모전에 계속 ‘올인’

해야 하나요?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까마귀의 재간이란 글을 쓰는 재주가 유일합니다. 그 놈의 재주로 돈을 벌기가 왜

이렇게 힘들지요? 혹시 까마귀가 주제를 모르는가요?크게 한 건 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린 아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빠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니까요.아들과 약속한 아빠입니다.빚을 진 아빠는 아들과 약속하고 또 합니다.“우리 아들 조금만 기다려줄 거지. 기다리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 이번에 상을 받으면 반드시 사줄게.”

“정말이지?”“아빠는 거짓말 안 한다니까.”“한번 했잖아.”“아빠가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 머리를 빡빡 깎았잖아. 아빠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머리인데…….”“알았어.”아들은 말합니다.“믿어줄게.”아빠는 아들과 약속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하지만 한숨을 쉬기 바쁘게 걱정이 따릅니다.

“또 떨어지면 큰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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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북극 까마귀

“나도 한 푼이라도 벌어 오자.”뇌졸중 경력이 일년을 넘기자 까마귀는 끝내 결심을 내렸습니다. 야심한 시간에

마누라가 잠에 빠진 틈을 타 소주를 마십니다. 마누라는 지쳤는지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어린 아들을 가슴에 품고…….오늘도 마누라는 아침 일찍 회사에 나갔다가 캄캄해서야 돌아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마누라는 피곤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합니다.“별 일이 없었지?”여느 때처럼 마누라는 대충 씻고는 잠자리에 듭니다. 코를 골며 정신 없이 자고 있는 그녀를 보니 까마귀는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뒤칠락 엎칠락 하며 고민하고 또 합니다.고민이 끝이 없자 일어나 옷을 걸치고 문을 나섭니다.까마귀는 한잔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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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중에 편의점으로 발길을 옮기며 고개를 쳐듭니다. 머리 위에서 둥근 달님이 멋도 모르고 까만 놈을 반깁니다.

심심한 놈이 따로 없습니다.절뚝거리며 가로등 밑을 지나는데 절름발이의 그림자가 외롭습니다. 절룩거리며 컸다 작아졌다 다시 커지는 것 같더니 끝내는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골목을 벗어나니 멀지 않은 대로변에 눈에 익은 편의점이 보입니다. 어둠 속에서 ‘GS25 시’는 파란 불빛을 발산합니다.

마치 어둠을 태우는 희망의 불빛 같습니다.

*

현실은 억수로 비현실적입니다.허벌나다니까요.까마귀는 북극에서 북극곰과 이웃하다 한국으로 건너온 재외동포입니다. 고국으로

건너오기 전 까마귀는 모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었습니다.그런데 왜 한국으로 왔을까요?까마귀의 가슴 속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나라가 없는 건 아니지만, 고국으로

날아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까마귀의 꿈과 연결됩니다.까마귀는 연구소에 직을 두고 예술가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예술가의 꿈이란 다들 한번씩은 꿔보는 법이지요? 그런데 까마귀가 꿈을 꿨더니

그대로 실현이 될 줄은 누가 알았지요?난생 처음 쓴 시나리오가 고국의 공모전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될 줄은 누가 알았지요?

고국에서 영화화 한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시나리오가 영화화 된다는 소리에 신이 난 까마귀는 주위의 만류도 불구하고

사직하고 한국으로 달려옵니다.작가의 꿈을 꾸며…….꿈을 꾸는 까마귀는 신이 났습니다.하지만 당장 찍을 것 같던 영화는 자금 문제로 엎어집니다. 영화가 엎어지며

까마귀의 꿈도 함께 엎어지고 말았습니다.엎어지며 까만 놈은 코가 납작하게 되었습니다.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합니다.“나 어쩌면 좋아.”오갈 데 없는 까마귀는 결국은 서울에 눌러앉고 말았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고국에 뿌리를 내리기로 마음을 굳힙니다.마누라도 서울로 불러들였습니다. 임신 중인 마누라는 배를 안고 한국으로 건너 오더니 달덩이 같은 귀여운 아들을 낳았습니다. 덕분에 우리 아들은 집안에서 유일한 서울태생입니다. ‘북극’ 김씨가 아니라 ‘서울’ 김씨라니까요.아들이 태어나며 아빠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우리 아들의

미래를 위해 아빠는 짬짬이 글을 씁니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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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흐르고 흘러 아들은 어느새 6살이 되었습니다. 어린 놈이 너무 귀엽습니다.

*

아들 생각을 하며 아빠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쉽니다.- 무슨 놈의 현실이 이래?어느 날 까마귀는 공모전에 보낼 시나리오를 쓰다가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젊은 놈에게 뇌졸중이라니 웬 일이지요?뇌졸중은 노인병이 아닌가요?그건 옛날 소리입니다.그 놈의 뇌졸중이 한바탕 진화를 거듭하더니 요즘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마음대로

한다고 합니다. 재활병원의 환자는 열 둬 살 되는 어린 애부터 80 세에 이르는 늙은이까지

다양하고 또 다양합니다.다들 정도는 달라도 절뚝거립니다.그나저나 까마귀가 쓰러지며 우리 집은 쇼크로 휘청거립니다. 남편이 쓰러지며

마누라는 대신 가장의 짐을 떠멨습니다. 전생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큰 놈을 간호하며 작은 놈을 먹여 살리려고

죽기내기로 뛰어다닙니다.무슨 놈의 팔자가 이리도 세지요?어둠 속에서 한바탕 까옥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한 많은 놈은 하늘이 왜 벌을 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열심히 살고 또 사는 놈에게…….침묵 속에서 지루하고 지루한 일년이 흘렀습니다. 까마귀는 재활병원을 퇴원하고 절뚝거리며 집에서 아들애를 챙겼습니다. 아침에

아들을 어린이 집에 데려가고 저녁에 다시 데려옵니다.아빠는 힘들어도 아들만 보면 즐겁습니다. 절름발이 아빠와 친구하며 놀아주는

아들이 대견스럽고 고맙습니다.“우리 누가 더 빠르나 한번 비겨볼까?”어린이 집으로 가는 길에 아빠는 아들과 한바탕 경주합니다.“좋아, 비겨보자.”시작소리가 나기 바쁘게 아들은 쏜살같이 달립니다. 아빠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아들 뒤를 쫓습니다.절뚝거리며 재활병원에 있을 때 기억을 떠올립니다.어느 날 아들은 엄마의 손을 잡고 입원 중인 아빠를 보러 왔습니다.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빠가 걸을 수 있다니 아들은 갸웃합니다.“따라 와 봐.”아들이 앞에서 걷자 아빠는 뒤에서 휘청거립니다. 아들은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며 팔자걸음을 합니다.

아빠는 눈물이 나오는 거 겨우 참습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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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무슨 꼴이야.

*

- 반드시 쪼끄만 놈을 이긴다.아들이 없는 사이 까마귀는 집에서 운동합니다. 재활병원에 다닐 때 배운 방법으로

운동하고 또 합니다.이 놈의 병은 운동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힘들어도 해야 합니다. 대신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은 재수 없는 병에 걸릴 확률이 적습니다.까마귀는 왼팔을 살리려고 운동합니다. 운동하며 곡절이 많은 까마귀의 지난

인생을 돌이킵니다. 재수 없는 놈은 할 말이 없습니다. - 주제에 하늘 높이 나는 꿈을 꾸고 자빠졌네.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곤두박질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말았습니다.까마귀는 왼쪽 팔을 살리려고 운동을 합니다. 운동하며 사랑하는 그녀에게

미안하고 또 합니다. 까만 놈을 따라 서울로 온 마누라에게……. 까마귀는 왼쪽 다리를 살리려고 운동을 합니다. 운동하며 사랑하는 마누라가 너무 안 됐습니다.

가장이란 무거운 짐을 그녀의 가냘픈 어깨에 지워주고 말았네요. 까마귀는 운동하고 또 합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하루 빨리 가장자리에 복귀하고 싶습니다. 남편 노릇도 아빠 노릇도 자랑스럽게 하고 싶습니다.

반드시 그 날이 오리라 믿고 또 믿습니다.- 쪼끄만 놈을 이긴다.

* “아이스크림을 사 줘.”

어린이 집에서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데, 쪼끄만 놈이 동네 슈퍼 앞에 버티고 서서 떼를 씁니다.

호주머니를 들추니 아빠는 천 원짜리 한 장 없네요.아빠 노릇을 어떻게 하지요? 별 수 없이 아빠는 마음씨 고운 슈퍼 주인과 상의하여, 다음 날 돈을 드리기로 하고

아이스크림을 아들 손에 쥐어줍니다.아들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신이 났습니다. 즐거운 아들의 모습을 보니 아빠는

쪽이 팔려도 행복합니다.“아빠, 한 입 줄까?”“안 먹어.”“왜?”“아빠는 아이스크림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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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싫어?”“어른이니까.”그제야 아들은 납득이 가는지 잠자코 아이스크림을 빨아댔습니다. 아빠와 아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엄마가 울었어.”아이스크림을 빨던 아들이 침묵을 깹니다.“언제?”“목욕할 때…….”아빠가 말이 없자 아들은 계속합니다. “목욕을 시키며 엄마가 울었어. 근데 엄마는 안 울었대. 내가 우는 거 봤는데, 얼굴에 물이 튕겼대.”

아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종알거립니다.“아닌 것 같은데…….” “엄마가 아니라면 아니야.” 아빠는 아들이 하는 소리가 대충 짐작이 갔습니다.“엄마는 거짓말 안 한다. 거짓말 할 줄 모르거든. 거짓말 하면 나쁜 사람이야.”까마귀는 눈시울이 젖어났습니다.현실은 이해가 되어도 비현실적인 놈은 도울 방법이 없습니다. 재수 없는 까마귀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할 말이 없습니다.- 나도 한 푼이라도 벌어 오자.

*

“자기 많이 힘들지?”“안 힘들어.” 출근하는 마누라는 신을 신으며 까마귀와 활짝 웃습니다. 활짝 웃는 마누라의 얼굴은 화장을 안 한 민 낯입니다.

요즘은 아예 화장도 안 하고 다니나 봅니다.“걱정 마. 나 보기보다 강하거든. 자긴 다른 생각 말고 열심히 운동해. 그 몸으로 애까지 챙기게 해 미안 해.”

“할 수 있어.”전직 가장은 장 자리를 빼앗기고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 없는 놈은 한바탕 예술을 하다 쓰러졌습니다.예술이란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큰 코를 다친다더니…….결국은 이 꼴입니다.나그네 마흔 고개면 팔을 걷어 올리고 한바탕 일을 할 때인데, 절름발이 까마귀는 집에서 애나 보며 놀고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해도 회복의 기미가 안 보입니다. 무슨 놈의 병이 회복이 이리도

더딘지 모르겠습니다.혹시라도 회복이 안 되면…….현실은 대낮처럼 밝지만 미래는 한치 앞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까마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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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마누라뿐입니다. 오늘도 마누라는 아침도 안 먹고 부랴부랴 출근합니다.“나 간다.” “너무 늦지 마.”

*

- 나도 한 푼이라도 벌어 오자.여느 때처럼 아들을 어린이 집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온 까마귀는 방바닥에 <벼룩시장>을 펼쳐놓고 연구합니다. 절름발이가 할만한 일이 없나 번지고 또 번집니다. 하지만 까마귀 같은 놈이 절룩거리며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 놈의

가능성은 희박하고 또 희박합니다. 한바탕 연구한 까마귀는 실망합니다.그렇다고 포기하고 현실을 유지하며 살 수도 없는 일입니다. 비현실이란 까마귀의 뇌졸중처럼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 지 모릅니다.

눈앞에 지쳐버린 마누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까마귀는 용기를 내여 <벼룩시장>을 펼치고 계속 연구합니다. <벼룩시장>에

이마를 대고 할만한 일이 없나 보고 또 봅니다.절름발이는 ‘시장’에서 ‘벼룩’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습니다.까마귀의 오기가 살아났습니다.“반드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이놈의 입이 살아있는 한 나는 할 수 있어.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기회가 주어진다.”

한바탕 결심하고 까마귀는 열심히 찾아봅니다. 하지만 암만 찾아봐도 까마귀가 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무슨 놈의 현실인지 몰라도 까마귀의 현실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절름발이가 대체 뭘 하면 좋지요?“외국어강사나 해볼까?”“입이 삐뚤었잖아.”“북극어강사는 어떨까?”“그 놈의 입이 삐뚤었다니까.”찾고 찾아봐도 입 삐뚤이를 쓰겠단 곳은 없었습니다. 실망한 까마귀는 천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쉽니다. 마치 고삐가 풀리기라도 하듯

까만 놈은 한숨을 쉬고 또 쉽니다. 그 놈의 인생에 무슨 한숨이 이렇게 많지요?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다시 신문에 눈을 돌립니다. 문뜩 시야에 ‘전단지배포’ 라고

들어옵니다.

전단지 배포하실 분 구함, 장당 100 원, 1 일 100~500장씩, 성실한 분, 초보자 환영, 당일지급 「일등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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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전단지를 생각 못했지? 전단지라면 얼마든지 뿌릴 수 있잖아. 손이 없나 발이 없나?”

까마귀의 눈에서 희망의 불꽃이 반짝입니다.

*

결국은 까마귀는 전단지를 돌리기로 했습니다.벌이가 괜찮은 것 같습니다.한 장에 100 원이면 100장에 만원, 500장이면 5 만원입니다. 이렇게 한 달만

하면 100 만원은 벌 수 있습니다.100 만원이면 까마귀네 한달 생활비입니다.목표를 정한 까마귀는 머리를 식힐 새도 없이 행동에 옮겼습니다. “외국인인데요…….” 절름발이는 닥치는 대로 전화합니다.그러나 한바탕 전화한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여자가 필요하지 않으면 외국인은 사절입니다.

실망에 실망을 엎었을 뿐입니다.까마귀가 뇌졸중환자라고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절름발이는 실의를 느끼며 앞길이 막막합니다. 막막하니 눈 앞에 마누라의 지친

모습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남자를 잘못 만나니 여자 인생이 개판이네요.창 밖에서 비가 내립니다. 침울해있던 까마귀는 다시 용기를 내여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 나는 일을 할 수 있어. 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는 죽지 않았어. 까마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절름발이는 전화를 하고 또 합니다. 안 하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화에 매달리고 또 매달립니다.

전화가 열을 받아 터질 정도로 했습니다. 죽기내기로 달라붙은 결과 끝내 한 곳에서 만나자 하네요.“방금 전화하신 분 맞지요?”“깜빡 하고 그만…….” 귀가에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전화를 받은 아가씨는 말합니다. “내일 사무실로 들리세요.”“감사합니다.”하늘이 못난 놈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네요. 수없이 거절당한 까마귀는 행운의 천사를 만난 것 같습니다. 행운의 천사는 아무나

만나는 거 아닙니다.뇌졸중으로 반쪽을 못 쓰는 환자라고 실토했으면 어떨까요?천사가 까마귀에게 손을 내밀까요?현실의 냉혹함을 직감한 까마귀는 입에서 한숨밖에 안 나왔습니다. 주제 파악을 잘

하니 나오는 건 한숨뿐입니다.- 100 만이 아니라 10 만이라도 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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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다음 날 까마귀는 절뚝거리며 <***전단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몇 평 안 되는 사무실에는 20 대의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습니다.

“안녕하세요.”인사를 받는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런 표정이 떴습니다. 그녀는 제꺽 표정을 풀며 웃는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오셨어요?”“어제 전화를 드린 사람입니다.”그녀는 갸웃하고 까마귀를 바라보더니 묻습니다.“두 번 전화하신 분?”“제가 그만…….” 한 짓을 생각하니 까마귀는 살짝 쑥스럽습니다.“몸이 불편하신 거 같네요.”절름발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보기에도 걱정스럽습니다.“실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일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찌라시 정도는 뿌릴 수 있습니다.”

아가씨는 미덥지 않은 표정입니다. “어려우실 것 같은데요.”“할 수 있습니다.”까마귀는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아무 문제 없습니다. 저는 한 손으로 뭐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일만 주시면 책임지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가씨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도움을 못 드려 죄송해요.”절름발이가 부탁해도 막무가내입니다.“죄송합니다.”별 수 없이 까마귀는 돌아서 사무실을 나옵니다. 문밖에 서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서있는데 아가씨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왠지

마음씨 나쁜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하기 바쁘게 까마귀는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밉니다.“실례지만 성함을 어떻게 쓰시지요?”“미스 송입니다.”

*

온밤 고민한 까마귀는 다음 날 아들을 어린이 집에 보내고는 다시 <***전단지>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절름발이는 찰떡처럼 미스 송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제발 부탁 드립니다. 가장인 제가 일을 못 하니 큰 일이 났습니다. 우리 집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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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는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단돈 몇 푼이라도 벌어야 합니다.”절름발이는 미스 송하고 부탁하고 또 합니다.무릎을 꿇지 않았을 뿐입니다.미스 송은 난처한 기색을 띠고 잠자코 있습니다.“마누라가 혼자 벌어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마누라도 아픈 몸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우린 다 죽습니다.”까마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쉽니다.“저라도 일을 안 하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마누라를 도와 한 푼이라도 벌고 싶습니다. 집세도 전기세는 두 달이나 밀렸습니다.”

“알겠습니다.”미스 송은 끝내 입을 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내일 다시 오실 수 있겠어요?” “올 수 있습니다.” 까마귀는 꾸벅 절을 올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습니다. “감사합니다.”돌아오며 생각하니 눈 깜짝할 사이에 새끼 둘이나 추가했네요.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더니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역시 까마귀는 재주가 있어.재주가 많은 놈은 그 놈의 고개를 하늘 높이 쳐들었습니다. 까만 놈은 죽다 살아난

느낌입니다.“마누라, 나도 이젠 돈을 번다.”

*

가을 하늘은 억수로 맑고 푸릅니다.허벌나게 억수로…….내일이 오늘로 바뀌자 까마귀는 미스 송을 찾아갑니다. 절룩거리며 가는 길에 미스 송이 약속을 지키기를 빌고 또 빕니다.

- 보자고 했으면 일을 줘야지.까마귀가 휘청거리며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미스 송은 보름달 같은 환한

미소로 까마귀를 반깁니다. 마치 절름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먼저 100장 뿌려볼까요?”미스 송은 준비한 찌라시를 건넵니다.“불편하시니 여기 저기 다니느라 하지 마시고 지하철 역 출구에서 나눠주세요. 다 뿌리려면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수고하세요.”찌라시를 들고 나오는데 눈물이 벌컥 쏟아졌습니다. 까마귀는 골목 어귀에 서서

소매로 눈물을 훔칩니다.훔치고 훔쳐도 계속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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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훔치고는 절뚝거리며 화곡 역으로 갔습니다. 까마귀는 화곡 역 3 번 출구 앞에서 손님들에게 찌라시를 나눠줍니다.

한 장씩 열심히…….한 시간 반정도 걸려 찌라시 100장을 모두 돌렸습니다. 사무실로 찾아가니 미스 송이 화려한 미소로 절름발이를 맞이합니다.

“힘들지 않으셨어요?” “아니요. 전혀……”미스 송은 일한 대가로 서랍에서 만원을 꺼내줍니다. “내일은 200장에 도전해볼까요?” “감사합니다.”눈 앞의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요? 사랑스런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합니다.

사무실을 나온 까마귀는 절뚝거리며 어린이 집으로 갑니다. 여느 때보다 일찍이 어린이 집에서 아들을 데리고 나옵니다.

동네 슈퍼 앞까지 오자 아빠는 아들과 묻습니다. “아빠가 아이스크림 사줄까?” 생각 밖의 소리에 아들은 너무 좋아 토끼처럼 퐁퐁 뜁니다.“아빠, 사 줘, 빨리 사 줘…….” “얼마만큼 사줄까?” “하늘만큼.” 까마귀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아들 손에 쥐어줍니다.“가서 마음대로 골라.”아들은 거금을 들고 어쩔 줄 모르더니 돌아서 슈퍼로 달려갑니다. “넘어지겠다. 조심 해…….”신이 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아빠 노릇을 한 까마귀는 가슴이 뿌듯합니다.

아빠 노릇은 아무나 하나요?- 돈이란 무엇일까?

*

다음 날도 까마귀는 3 번 출구에서 열심히 찌라시를 뿌렸습니다. 세 시간 만에 끝내 200장을 다 뿌렸습니다.

다리가 아팠지만 절름발이는 입을 악물고 끝까지 참았습니다.그 날 받은 2 만원은 은행에 저축했습니다. 그나저나 미스 송 덕분에 매일 200장씩 뿌릴 수 있게 되었는데, 까마귀는

사무실에서 돈을 받으면 쓰지 않고 저축했습니다.아빠는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들은 우리 집의 미래입니다.미래는 밝고 맑습니다.까마귀는 날마다 아들을 어린이 집에 보내고는 미스 송을 찾아갔습니다.

사무실에서 찌라시를 받아 들고 화곡 역으로 갑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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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끝나면 다시 사무실로 되돌아가 일당을 받아 챙겼습니다.절뚝거리며 신나게…….이렇게 드디어 한 달을 채웠습니다. 까마귀의 통장에 그 동안 모은 돈이 50 만원이나 되었습니다. 50 만원이란 절름발이 까마귀한테는 상상도 못 할 거금입니다.

미스 송 덕분에 까마귀 같은 놈도 벌어먹고 사는 것 같습니다. 까마귀는 못 나도 인복 하나는 있는 것 같습니다. 절름발이는 미스 송이 후원하고 있습니다.미스 송 덕분에 할 일이 생긴 까마귀는 삶에 희망이 생겼습니다. 눈 앞의 현실은 더

이상 비현실적이 아닙니다.세상은 까마귀가 못 살 정도로 삭막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생기며 까만 놈은

아침마다 한바탕 기지개를 켭니다.마치 근심걱정이 없는 놈처럼 말입니다. 까마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따뜻한 봄날처럼 화창합니다. 화창한 봄날은 까마귀의

눈에서 반짝거립니다.겨울이 눈 앞인 늦가을이지만…….

*

오늘도 여느 때처럼 퇴근이 늦은 마누라는 대충 씻고는 아들 곁에 누웠습니다. 아들은 오늘도 엄마 얼굴을 못 보고 잠이 들었습니다.

귀여운 모습을 하고 새큰거립니다.까마귀는 준비하고 있던 돈 봉투를 꺼내 마누라의 손에 쥐어줍니다. “이거 뭐야?”봉투를 들고 마누라는 이상한 눈으로 남편을 바라봅니다.“가계에 보태 써.”마누라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봉투를 열고 확인하더니 돈의 출처를 추궁합니다.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어?”“묻지 마.” “안 말할 거야?”마누라는 남편의 겨드랑이를 마구 공격합니다. “말을 안 하면 죽어.”“알았다니까.”까마귀는 끝내 ‘고문’을 이기지 못 하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합니다.“나 아르바이트 한다.”“아르바이트?”마누라는 갸웃하며 반문합니다.“무슨 아르바이트?”감출 수 없게 된 까마귀는 입을 열었습니다.까마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마누라는 눈물을 비 오듯 흘립니다.

마누라가 울어버리자 까마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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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돈을 벌어오랬어.”마누라는 절름발이를 끌어안고 속삭입니다.“돈은 내가 벌어 온다고 했지. 자긴 열심히 건강만 챙겨. 겨우 50 만을 벌자고

한국에 온 거 아니지? 자기는 꿈이 있잖아.”

*집필 수기*

<북극 까마귀>는 절름발이가 사흘 동안 밤잠을 안 자고 쓴 글입니다. 한바탕 쓰고 보니 이렇게 감동적인 작품이 없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렸다니까요.까마귀의 재주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지난 인생에서 제일 빨리 쓴 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난 일은 까마귀도 생각 밖입니다. 생각 밖의 일이란 그 놈의 뇌졸중처럼 언제 어떻게 못난 놈을 찾아올지 누구도

모른다니까요.까만 놈은 할 말이 없습니다.재주가 좋다고 세상 사람들의 승인을 받는 거 아닙니다. 승인을 받자면

문학상이라도 하나 타야 합니다.까마귀는 상도 타고 돈도 벌고 싶습니다.인터넷을 뒤져보니 마침 ‘2012 장애인고용인식개선 작품현상공모전’이 있었는데

누구나 가능하답니다.최우수상 상금이 자그마치 250 만원입니다. 250 만원이면 우리 아들에게 자전거도 사주고 맛나는 것도 사주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쓰면 됩니다.문제는 응모작품의 매수입니다.200 자 원고지 40매가 기준인데 까마귀의 작품은 80매에 가깝습니다. 한 두 매도

아니고 초과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요?매수 외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수필을 공모한다는데 <북극 까마귀>는 수필이 아닙니다. 별 수 없이 까마귀는 매수를 주려 소설을 수필로 바꿔 썼습니다.제목은 불쌍한 척 하며 <나도 한 푼이라도 벌어오자>라고 지었습니다. 누가 봐도 괜찮은 제목이지요?눈물이 나오지 않나요?메일을 보내자 접수가 되었다며 답장이 날아왔습니다.

장애인고용인식개선 공모전 담당자입니다. 공모전에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접수 완료되었으며 발표 일은 3.16(금) 입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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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을 보내고 까마귀는 소식을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좋은 소식이 오기를 왜가리처럼 목을 빼 들고 기다립니다.

아빠는 아들에게 자전거만 사주면 끝입니다.거창한 욕심이 없다니까요.공모전 담당자가 좋은 결과를 바랄 정도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작품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얘기입니다.심사위원이 누군지 몰라도 가능성이 있다니까요. 눈 앞에서 아들의 자전거가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닙니다. 작품을 보내고 이렇게 기쁜 적이 없습니다. 까만 놈의 세계에는 하늘을 나는 자전거가 있습니다. 자전거가 나비처럼 훨훨 눈

앞에서 날아다닌다니까요.기나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발표 일이 찾아왔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홈페이지를 확인하니 웬 일이지요? 수상 명단에는

까마귀의 이름은커녕 그림자도 없습니다.대상이 아니면 우수상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수상명단에는 까마귀의 이름이 안

보입니다.꼴찌 장례상도 없습니다.위안을 받을 가치도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실망과 동시에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던 자전거는 곤두박질하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습니다.

*

이렇게 작품을 팔아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려던 노력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실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절름발이가 도대체 무슨 실수를 한 거지요? 뇌졸중에 걸린 뒤부터 실수가 하도 많으니 저도 모르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 내가 뭘 잘못 한 거지?생각하고 생각하던 까마귀는 깨달았습니다.- 프로가 아마추어와 붙으면 뭐가 돼. 프로가 갈 자리가 아니잖아. 굶어 죽어도 프로는 프로야.

까마귀는 깨끗이 승복하고 바보 웃음을 합니다.절름발이는 프로입니다.승복하고는 다시 두리번거리며 기회를 엿봅니다. 여기서 그만 두고 멈출 까마귀가

아니라니까요.앞으로 가고 또 갑니다.좋은 작품은 좋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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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니까요.여기 저기를 한바탕 뒤졌더니 ‘5.18 문학상’이 눈에 띠었습니다. 마지막 날이 4월

23 일이니 며칠 안 남았습니다.까마귀는 부랴부랴 원작 <북극 까마귀>의 수정에 달라붙었습니다. 수정하며 참 잘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작품이라니까요.<북극 까마귀>의 주제가 인간애이니 ‘5.18 정신’과 충돌이 생길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까마귀는 자신이 있습니다.자신이 있는 놈은 작품을 보내고는 기다립니다. 기다리며 ‘5.18 정신’의 성지 광주로 날아가는 꿈을 꿉니다.

- 아들을 데리고 갈까, 마누라를 데리고 갈까? 아들만 데리고 가면 마누라가 삐치지 않을까?

결국은 마누라도 아들도 모두 데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좋은 일에는 언제나 가족이 동반하는 겁니다.

꿈을 꾸며 까마귀는 기다립니다.하지만 까만 놈이 수상의 문턱에서 또 뒹굴 줄은 누가 알았지요?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뭐가 문제든 간에 떨어지고 엉덩방아를 찧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한바탕 죽다 살아났다니까요.엉덩이가 아파죽겠습니다.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뻗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불쌍한 <북극 까마귀>를 어쩌지요?

*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북극 까마귀>는 선배들을 만납니다. 지난 공모전에서 한바탕 떨어지고 불구가 된 놈들을 말입니다.

<지하철 만세>도 있고 <짓밟힌 첫사랑>도 있고, <꿈의 뱃길>도 있고 <아빠와 아들>도 있습니다.

<참새와 까마귀>도 있었는데 모두 풀이 죽어 있습니다. 까마귀의 새끼들은 하나 같이 상처를 입고 절룩거립니다.

유일하게 절룩거려도 기고만장한 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기우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입니다.

다들 생략해서 <자빠졌네>라고 불렀는데 부르기 편하다고 기고만장한 놈이 달라진 거 하나도 없습니다.

<자빠졌네>는 역시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어느 날 밖에 나가 한잔 하고 돌아온 <자빠졌네>는 절름발이들을 모여놓고

한바탕 훈계합니다.“이 놈들아, 사는 꼴이 왜 이 모양이냐.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이 곳을 뛰쳐나갈 때가 되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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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무슨 소리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나 봅니다.<자빠졌네>는 애들과 선포합니다.“우리 힘을 합쳐 이 곳을 뛰쳐나가자. 합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힘을 합쳐 박에 나가 단편소설집을 하나 내자. 단편소설이나 콩트는 힘이 없어도 우리가 모여서 뭉치면 책이 된다.”순간 희망의 불꽃이 여기 저기서 튀기 시작합니다.“맞는 얘기다. 뭉치면 산다.”“뭉치고 또 뭉치자.”“세상에 우리만한 문장이 어디 있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장편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우리도 잘 살아보자. 우선 살고 볼 판이다.”이렇게 다들 되살아났습니다. 되살아난 놈들은 너도 나도 손을 잡고 위대한 <자빠졌네>를 따라 재활병원을 뛰쳐나왔습니다.탈출하고 까마귀를 찾아옵니다.자식들이 버르장머리 없이 아빠와 뭐라는 지 압니까?대한민국에는 단편소설이나 콩트가 설 자리가 없으니 지들끼리 뭉쳐서 책을

만들어 출판하겠답니다.쪼끄만 놈들이 머리를 굴리기는 굴렸네요.역시 똑똑한 놈들입니다.되돌아보니 그 동안 써놓은 짧은 글이 한 두 편이 아닙니다. 단편집을 서너 권 내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니까.” 이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우리 잘 먹고 잘 사는 방향으로 가자. 사는 척 해 봤자 한번 사는 인생이야.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

9. 인천항

엄마는 배를 타고 먼 길을 떠나는 아빠를 배웅합니다. 부두에 서서 배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젓고 또 젓습니다.

동녘에서 찬란한 아침 해가 솟아오릅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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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떠나고 한 달이 되자 아들이 고고 성을 울리며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품에 안고 엄마는 아빠를 생각합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인자하다는 ‘인(仁)’자에 바다 ‘해(海)’자를 붙여 ‘인해

(仁海)’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아빠가 무고하기를 기원하며 지은 이름입니다.인해는 쑥쑥 자라더니 어느새 개구쟁이가 되었습니다. 개구쟁이는 친구들과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하루는 인해가 밥을 먹다 말고 엄마와 묻습니다.“난 왜 아빠가 없어?”“우리 아들도 아빠가 있다. 우리 인해는 아빠를 똑 떼 닮았단다. 누가 아빠 아들이

아니랄까 봐.”엄마는 아들을 품에 껴안습니다.“아빠는 보물섬을 찾아갔다. 보물섬은 멀리 남쪽바다에 있는데, 이제 아빠가

보물을 하늘만큼 지고 올 거야.”그 후부터 인해는 사람들과 가슴을 내밀고 당당하게 말합니다.“아빠는 보물섬으로 갔어요.”“이제 아빠가 보물을 한 아름이나 안고 올 거에요.”“저도 아빠가 있거든요.”인해는 기적소리만 나면 만사를 제쳐놓고 항구로 달려갔습니다.항구에는 커다란 배가 멈춰 있습니다.“아빠가 탄 배다.”인해는 신이 나서 달려갑니다.하지만 아들의 기대와 달리 배 위에는 아빠가 없었습니다. 인해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아빠를 기다립니다. 기적 소리가 날 때마다 항구로 달려갔습니다.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기다림 속에서 인해는 키가 쑥쑥 자라더니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어른이 된 인해는

항구에서 울리는 기적소리와 친구가 되었습니다.항구에서 기적소리가 울립니다.“아빠가 탄 배다.”인해는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항구로 달려갑니다.항구에는 처음 보는 커다란 배가 손님을 내리고 있습니다. 인해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손님들을 여겨봅니다.손님들은 배를 내립니다.하나 둘 눈 앞을 지나고 또 지납니다.손님들 속에서 인해는 끝내 아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아들은 역시 아빠를 닮았습니다.

아빠와 아들은 서로 보고 또 봅니다.자신을 똑 떼 닮은 아들을 바라보며 아빠는 놀란 모습입니다. 아빠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들은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립니다.아빠와 아들은 두 팔을 벌리고 포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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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부러움이 없습니다.이렇게 20년 만에 아빠와 아들은 마주 앉았습니다. 아빠도 아들도 왠지 하나도

서먹서먹하지 않습니다.아빠는 아들과 넓은 바다에 대해 얘기합니다. 전설 같은 바다 위 보물섬의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줍니다. 전설의 보물섬에 가면

없는 물건이 없답니다. 갖고 싶은 거 모두 가질 수 있답니다.“인해야, 보물섬은 우리 남자들의 꿈이야. 아빠와 함께 보물섬으로 갈까? 보물섬은

우리를 부른다.”“아빠를 따라가겠습니다.”아들은 두 말 없이 아빠의 마음 속으로 뛰어듭니다. 아빠는 바다 같은 넓은

가슴으로 아들을 품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인해의 눈에는 넓고 넓은 광활한 세계가 보였습니다. 세계는 인해를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쳤습니다.

아빠의 품 속에서 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찬란한 아침 해가 솟아오릅니다.아들은 아빠를 따라 배에 올라탔습니다. 아빠를 따라 미지의 세계로 용감히 한발을 내디뎠습니다. 떠나는 남편을 바래며 며느리는 어머니 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떠나는 남편을

바래며 어머니는 며느리를 쪽 껴안습니다. 자매 같은 모녀는 부두에 서서 배가 지평선 위에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습니다. 남편이 떠나고 한 달이 되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어머니는 길을 떠난 아빠가 무고하기를 빌며 아들에게 인천(仁川)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인자한 하천에서 배가 풍랑에 쓰러질 일이 있을까요?인천은 쑥쑥 자랐습니다.세월은 흘러 어느덧 여섯 해가 흘렀습니다.어느 날 임금님은 항구로 시찰하러 왔다가 부두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앉아있는 어린애를 발견했습니다.“저 얘는 웬 일인고?”신하들이 달려가 어린애를 임금님 앞에 대령시켰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소자는 인천이라고 하옵니다.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빠는

소자가 태어나기 전에 보물섬으로 가셨다 하옵니다. 인천은 인자한 하천이란 뜻으로 저는 아빠가 탄 배가 무고하기를 빕니다.”

얘기를 듣고 임금님은 감탄합니다.“어린 나이에 기특하구나.”임금님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묻습니다.“몇 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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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는 여섯 살입니다.”여섯 살이란 소리에 임금님은 다시 한번 감탄합니다.“이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로다.” 임금님은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더니, 고개를 들고 신하들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지금부터 미추홀을 인천으로 명 하니라.”

*집필 수기*

보기 좋게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상처를 입은 작품입니다. 떨어지고 할 말이 없습니다.공모전에서 떨어지며 아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려던 희망은 또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는 아들과 뭐라지요?이번도 떨어졌다고 하면 아들은 뭐라고 할까요? 아빠는 왜 맨날 떨어지냐고 묻지

않을까요?아빠는 할 말이 없습니다.누구는 떨어지고 싶어 떨어지는 건가요?아들의 자전거를 생각하니 아빠는 괜한 약속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들은 애들과 아무 소리나 하는 거 아닙니다.

아빠는 역시 입이 문제입니다.입이 삐뚤었다니까요.뇌졸중환자 까마귀는 그 놈의 입만 삐뚠 거 아닙니다. 한쪽 팔 다리도 못 쓰고 머리를 상했습니다.

아빠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문제가 많은 놈은 아들과 약속을 못 지키니 미치겠습니다. 미칠 것 같은 놈은

문제가 너무 많다니까요.문제가 없는 놈보다는 낫습니까?문제는 문제입니다.

10. 다단계 영업사원과 우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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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이 어디에 있습니까?”까마귀가 가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글을 쓰고 있는데 지나가던 손님이 들여다보며 묻습니다.

“우체국은 저쪽으로 가면 있어요. 쭉 가시면 대로변에 횡단보도가 있는데, 바로 횡단보도 곁에 있어요.”

까마귀는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감사합니다.”손님이 가버리자 까마귀는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한 손가락으로 열심히 자판기를

때립니다.까마귀는 시나리오작가입니다. 시나리오작가는 시나리오를 안 쓰고 소설을 씁니다. 영화로 대박을 못 낼 바에는

문학으로 대박을 내기로 했습니다.영화로 대박이 나면 어떻고 문학으로 대박이 나면 어때요. 결국은 돈을 많이 버는 놈이 임자입니다.

이 놈의 세상에는 돈만큼 공평한 놈이 없습니다. - 소설을 써서 대박을 낼 거야.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는 대박의 꿈을 꾸며 열심히 글을 씁니다. 쓰면 쓸수록 글이 잘 되니 눈 앞에 대박이 보입니다.돈다발이 보인다니까요.다들 예술을 하며 대박 꿈을 꾸는 놈을 처음 보세요? 대박 꿈을 꾸며 예술 하면 안 되나요?

꿈을 꾸면 안 되나요?

*

영화도 예술이고 문학도 예술이고 모두 예술입니다.까마귀는 예술이 아닌가요?예술이 까마귀라면 한바탕 이해가 되세요?개뿔도 모르면서 예술 한다고 뛰어다니는 놈들을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그 놈의

개뿔이 어디에 달렸는지도 모르면서.개뿔이 어디에 달려있는지 까마귀는 잘 알거든요.- 개뿔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아무나 영화를 만드는 거 아니고 아무나 글을 쓰는 거 아닙니다. 다행히 까마귀만은

‘아무나’에 속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아무나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까마귀 앞에 나란히 선 놈들은 홀딱 벗었습니다. 영화도 문학도 엉덩이를

들어내놓고 까만 놈의 선택을 기다립니다.문학을 선택했다 했지요.영화면 어떻고 문학이면 어떻고 관계가 없습니다. 장르가 다르고 투자 규모가 다를 뿐입니다.

너도 나도 예술에 속합니다.영화는 억 소리가 나지만 문학은 요란한 소리를 안 냅니다. 소리를 안 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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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아니란 법은 없지요?다르다면 영화는 요란하고 문학은 고독하다는 겁니다. 과정은 다르고 또 다릅니다.영화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바탕 떠들다 시청률이 뜨는 순간 조용해진다면,

문학은 한적한 오솔길을 홀로 외롭게 걸어가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순간 한바탕 환성에 뒤덮입니다.

반대의 상황도 있지만…….영화와 문학은 역시 투자 규모가 다릅니다. 영화는 돈이 없으면 못 하지만 문학은

배를 굶으며 할 수 있습니다.사람이 하기 나름인가요?투자가 많다고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닙니다. 투자가 적다고 돈을 못 버는 거

아닙니다. 까마귀가 문학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문학에서 돈을 만들고 다시 영화와 붙으면 안 되나요? 적은 돈으로 큰 돈을 벌고 큰 돈으로 영화를 만듭니다.

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는 못 하는 거 없습니다. 문학도 영화도 할 수 있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재 같은 소리는 아무나 못 합니다.놈들은 시각적인 사고도 추상적인 사고도 합니다. 시각적인 사고도 추상적인

사고도 한다니까요.‘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는 아무나 부르는 거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세요.검색하나마나 하지 않을까요?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반드시 하늘 높이 나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

“우편국을 못 찾았어요.”아까 손님이 문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못 찾았어요?”까마귀는 갸웃합니다.“찾기 쉬운데…….”손님은 가게로 걸어 들어오며 말합니다.“찾긴 찾았는데 대형소포는 취급 안 한 다며 다른 곳으로 가보라네요.”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요?못 찾았다 해놓고 찾긴 찾았다고 하네요. 찾은 건지 못 찾은 건지 까마귀는 믿음이 안 갑니다.

까마귀가 알려준 우체국은 대형소포도 취급하거든요. 필요하면 인간도 포장해 부쳐준다는데…….

“부근에 우편국이 또 없어요?”“모르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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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는 웃으며 대답합니다.손님은 심심한 입을 다시며 가게를 둘러보더니 묻습니다.“가게를 한지 오래되었어요?”“일년이 됐습니다.”“장사가 쉬운 거 아니지요?”“요즘 세상에 쉬운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손님은 미소를 짓습니다.“경기가 나쁘니 잘 되는 장사가 없다니까요. 장사가 안 되면 무슨 수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글쎄요, 무슨 수가 있지요?”손님은 말합니다.“사장님께서는 혹시 어너지라고 들어보셨습니까?”까마귀는 저도 모르게 손님의 가슴에 눈이 갔습니다. 가슴에는 허벌라아프 메달과

비슷한 메달을 달고 있습니다.

*

“어너지에서 오셨어요?”이상하다 했더니 손님은 역시 우편국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우편국은

까마귀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하지만 한발 늦었습니다. 어너지의 분들은 몇 달 전에 이미 우리 가게를 찾았고, 머리 속에 허벌라이프밖에

없는 마누라는 깨끗이 거절합니다.“관심이 없으니 나가주세요.”어너지의 분들이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가게를 돌아다니며

간판을 허벌라이프에서 어너지로 바꾸는 거 목적입니다. 하는 짓이 야비한 거 아닌가요?우리 가게에만도 대 여섯이 손님으로 가장하고 들어왔는데 다른 분이 또 올 줄은 몰랐습니다.

까마귀는 웃으며 말합니다.“손님은 어너지에서 온 일곱 번째 분입니다. 그 분들과 합작할 생각이 없다고 이미

얘기를 드렸거든요.”“아, 그래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손님은 꼬리 빳빳이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며

까마귀의 눈동자가 빛났습니다. “이게 웬 떡이야?”머리 속에 기막힌 콩트 하나가 떠오릅니다.예술가에게 소재를 제공하는 사람만큼 고마운 분이 있을까요!고마운 분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 지 모른다니까요. 고마운 분은 시간예약 같은 거 안 하는 거 같습니다.

귀 띰 같은 것도 없습니다. 세상 일은 모른다는 소리가 그 소리인 것 같습니다. 뭐 눈에는 뭐가 보인다고 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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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아닙니다. 절름발이의 눈에는 위대한 예술밖에 없습니다.“덕분에 콩트가 하나 생겼잖아.”

*집필 수기*

모국에서 삶을 살며 까마귀는 항상 즐겁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동네만큼 즐거운 동네가 있을까요?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지요? 이야기가 많다니까요.이야기가 많으니 하늘 높이 나는 놈은 즐겁습니다. 대충 다듬어도 명작이 태어날

정도입니다.명작은 하늘 높이 나는 놈을 부릅니다.까마귀는 소재를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을 가다듬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한편이라도 더 쓰고 싶습니다.쓰고 또 쓰고 싶습니다.소재를 제공하는 분은 고마운 존재입니다. 고마운 분은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라고 소재를 보태주네요. 이보다 친절한 분이 있을까요?아빠는 눈 앞에서 자전거가 반짝반짝 합니다. 반짝반짝 하는 자전거를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아빠는 쉬지 않고 열심히 창작합니다.아빠는 아들이 있습니다.아들이 있는 아빠는 일을 하며 힘이 넘칩니다. 아빠가 열심히 사니 아들은 곁에서 칭찬합니다.

“우리 아빠는 이야기가 많아.”이야기가 많다니까요.아들의 칭찬을 받고 아빠는 마음이 뿌듯합니다. 세상 아빠들이 모두 이야기가 많은

거 아니지요?아빠의 눈에는 자전거밖에 없습니다. 성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1. 담배와 쏘가리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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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놈의 팔자가 이렇지. 담배 한대를 피우기도 힘들구나. 그만 끊어야 하는 거 아니야?”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 소리와 함께 하얀 담배 연기가 한겨울의 쌀쌀한 냉기 속으로 흩어져갔습니다. 오늘도 까마귀는 패배감에 푹 젖어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왕골초 까마귀는 작가 지망생입니다. 그 놈의 꿈을 실현하고자 10년도 넘게 백수 생활을 해왔지만 여태 문단에 데뷔 못했습니다. 흡연 역사가 10년이 된다는 얘기입니다.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그 동안 어느 몰락한 양반집 아가씨를 꼬셔 ‘인생대사’

를 해결한 것 외에는 해놓은 거 없습니다.덕분에 밥은 먹고 삽니다. 지난 10년 동안 담배는 까마귀의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친구를 너무 의지한

느낌이 들지만……. 친구 면목을 봐서 장장 10년이나 피워줬으면 데뷔 정도는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하지만 문턱에 걸려 넘어질 기회도 안 줍니다.너무 하지 않습니까?새해를 맞으며 한 살을 더 먹더니 담배에 대한 의뢰는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 놈의 패배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습니다.

사업에서 실패하고 여자 탓으로 돌리는 못난 놈처럼, 까마귀는 쩍하면 담배와 화를 냈습니다. 화가 꼭뒤에 치밀면 ‘이혼’소리까지 서슴없이 내뱄습니다. “까불대면 끊어버린다.”말은 그렇게 해도 담배가 없으면 못 삽니다.‘금연’도 ‘문단데뷔’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지난 10년 동안 까마귀는 한 두 번 결심한 거 아닙니다. “반드시 담배를 끊을 거야.”하지만 금연 기록은 통 털어서 3 개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누라와 연애할

때였는데 결혼식을 올리기 바쁘게 다시 피우기 시작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무엇이든 간에 결국은 담배의 매력에 무릎을 꿇는 것 같습니다. 그 놈의 매력은 승인해야 한다니까요.

담배를 끊어야 할 이유는 많고 많아도 까마귀는 맥을 못 춥니다.늑대 앞의 어린 양 같습니다. 까마귀는 담배를 피우며 경고문을 바라봅니다.

경고: 건강을 해치는 담배를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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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에 둘러싸인 마을공원은 오늘따라 한적해 보였습니다.오늘도 공원의 한쪽 구석에서 노숙자아저씨가 새우처럼 몸을 꼬부리고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

“집 안에서 피우지 말라고 했지요.”주말에 친정에 갔다 돌아온 마누라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담배 냄새를 맡고 짜증을 냅니다.

마누라는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열어젖힙니다. “의사가 우리 아기 건강에 나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정 피우고 싶으면 밖에 나가 피워요.”

마누라는 임신 5 개월째입니다. 임신 전에는 어느 정도 담배와 양보를 하더니 임신하더니 조금만 냄새가 나도 못

참습니다. “설거지 안 했구나.” 주방으로 들어간 마누라는 끝이 없습니다.“싫으면 물에 담아놓으라고 했지요. 홀몸도 아닌 마누라가 돈을 벌러 다니면 이

것도 못 해요?”그녀는 요란하게 설거지를 하며 바가지를 긁어댔습니다.“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나 혼자 애를 써봤자 어떻게 살아요. 도대체 살

거에요, 말 거에요?”까마귀는 할 말이 없습니다.임신 전에는 긁어도 정도가 있었지만 임신하더니 아예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까마귀는 옷을 걸치고 현관으로 향합니다. “어딜 가요?”마누라가 남편을 불러 세웁니다. “산책 갔다 올게.”“잠시만, 할 말이 있어요.”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마귀를 쳐다봅니다.“아기가 태어나면 돈이 필요해요. 기저귀 값만도 장난이 아니에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지출을 줄여야겠어요. 오늘부터 용돈은 하루에 1000 원이에요.”“1000 원이면 담배 한 곽도 못 사잖아.”“그럼 담배를 끊어요.”그녀는 등을 돌리고 하던 설거지를 계속합니다. 까마귀가 문을 열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마누라의 화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놈의 담배를 안 피우면 안 되나? 그 동안 피운 담배 값을 모으면 아파트를 샀겠다.”

*

“한대만 빌려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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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쳐드니 어느새 나타났는지 노숙자아저씨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앞을 가로막고 서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세수도 안 한 때 투성이 얼굴이었고, 가꾸지 않은 긴 머리는 새 둥지 같습니다. 감쪽같이 나타난 불청객에 까마귀는 기분이 잡쳤습니다. 나그네가 귀찮게 군 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마치 담배를 맡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만날 때마다 손을 내밉니다. 그러잖아도 세상만사가 귀찮은 까마귀입니다. 세상만사가 귀찮다니까요.까마귀는 화를 꾹 누르고 담배 곽에서 담배 한대를 뽑아 건넵니다. “라이터도 빌려주시지요.”부처는 서천까지 바래주랬다고 라이터도 건넵니다. 나그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라이터를 돌려줍니다.

“감사합니다.”낯짝이 두꺼운 나그네는 똥배를 내밀고 어슬렁어슬렁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하늘을 보며 한가하게 담배를 빨아댔습니다.괘씸할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그 놈의 팔자가 부럽다.”아니꼬운 눈길로 나그네를 바라보고 있던 까마귀는, 저도 모르게 코 등이 시큰해

나며 머리가 어지러워 났습니다.“나 뭘 하는 거지?”

*

인간이란 참 이기적인 동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기적인 동물이 바로 조금 전에 담배를 빌려간 나그네이고 나그네에게 담배를 빌려준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한가하게 담배를 빨고 있는 나그네의 모습에서 까마귀는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사(施舍)하는 놈도 구걸하는 놈도 결국은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눈 앞에서 담배를 얻어 피우는 나그네나 용돈으로 담배를 사서 피우는 까마귀나 뭐가 다르지요?

구걸 상대가 다를 뿐입니다.까마귀의 눈에 비낀 나그네의 모습이 거지같아 보였다면 마누라의 눈에 비낀

까마귀는 어떤 모습일까요? 거지가 아닐까요?기껏해야 꿈을 꾸는 거지 정도겠지요.이 시각만큼 까마귀는 자신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살면서 마누라에게 미안한 짓을 많이 했지만 오늘 이 시각만큼 죄책감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담배를 싫어하는 마누라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담배가 싫은 거 아니라 거지

같은 남편의 모습이 싫은 거겠지요.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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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한 푼도 쪼개 쓰려고 애를 쓰는 마누라입니다. 까마귀가 매일 두 곽씩 피워대는 담배 값이 얼마나 아까웠을까요?돈도 못 벌면서 돈만 태우니…….까마귀의 손으로 번 돈이 아니라 마누라가 악착같이 벌어온 돈입니다.마누라는 임신 중입니다.

*

“김희재입니다. 부탁 드립니다.”눈 앞에 회색 세비로에 빨간 넥타이를 맨 40 대의 남자가 손에 명함을 들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서있습니다.

반갑지 않은 모습으로 명함을 들고 보니 ‘구민제일, 지역일꾼, ***당 김희재’라고 찍혀 있습니다.

의원님들이 길거리에 나선 거 보니 선거기간인가 봅니다. “***당에 한 표 부탁 드립니다.”김의원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까마귀와 인사를 하고는 등을 돌립니다.“의원님, 잠시만요.”까마귀는 김의원을 불러 세웁니다. “미안하지만 의원님께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고개를 돌린 김의원은 생각 밖인지 입가에 정치인다운 애매한 미소를 띠고

까마귀를 바라봅니다.“환영합니다.”까마귀는 잠시 주저하다 묻습니다.“다름이 아니라 TV 를 보니 요즘 국회에서 담뱃값을 인상한다고 야단법석이던데

의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그 말씀이라면 저의 입장은 간단합니다. 일부 의원님들이 국회에 담배 값 인상을 제출했는데, 저는 담뱃값을 인상하는 거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이유는 간단하지 않을까요? 담뱃값을 인상한다고 세상사람들이 금연할 거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값을 올려도 담배는 계속 생산되고 판매될 것이니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분들께 부담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피우지 않은 사람도 모두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대세가 금연이니 담뱃값을 인상한다 해도 반대하기 어렵습니다. 담배 곽 위에 건강에 해롭다고 써있지 않습니까?”

까마귀를 바라보는 김의원의 입가에 다시 애매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의원님은 담배를 피웁니까?” “저는 안 핍니다. 옛날에는 피웠는데 마누라가 하도 바가지를 긁으니 끊어버렸습니다.” “끊은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3년이 되었습니다.” “3년이면 담배 생각이 하나도 안 나겠네요.”

“가끔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면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참을 만 합니다. 솔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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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지만 담배를 끊느라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결국은 마누라의 잔소리가 쓴 약이 되었습니다. 잔소리를 안 들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질려서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까마귀는 미소를 짓습니다.“금연 과정이 쉽지 않았나 보네요.”“쉬웠다면 거짓말이지요.”김의원은 호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보여줍니다. “담배 생각이 나면 저는 이걸로 대체합니다. 아시겠지만 흡연이란 일종의 습관성 행위입니다. 자주 피우다 보면 인이 박히고 습관이 되어버리는 거지요. 대신 금연은 습관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금연에 제일 좋은 방법은 습관으로 습관을 대체하는 겁니다.”

이 생각을 왜 못 했지요?습관으로 습관을 대체한다는 말에는 까마귀도 동감이 갔습니다. 그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동시에 옛 습관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습관으로 습관을 대체한다. 좋은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저도 한번 습관을 바꿔볼까요? 조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언이라 할 거 없습니다.”김의원의 얼굴에 점잖은 미소가 떠올랐습니다.“그럼 이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오늘 할 일이 많아서…….”“수고하세요.”

김의원은 예의 정치가다운 애매한 미소를 보여주고는 쫓기기라도 하듯 돌아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갑니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까마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결국은 마누라 때문에 담배를 끊었단 소리잖아. 역시 우리 남자들은 바가지 긁는

소리가 무서운 거야.”문득 ‘서천으로 보낸 부처님’께서 뭘 하시나 궁금해 고개를 돌리니, 나그네는 담배

한대를 다 태우고 부족한지 이 쪽을 기웃거립니다. 까마귀는 엉덩이를 털고 벤치에서 일어났습니다. 나그네가 다시 담배를 비럭질

하러 오기 전에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시원한 강바람이나 쐬고 올까?”

*

한겨울의 추위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 뚝섬유원지에는 인적이 드뭅니다. 가끔가다 추위를 모르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 겨울에 섹시한 다리를 마구 보여주네요.- 다리가 춥지 않나? 오늘도 까마귀는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 물가로 다가갑니다. 강물을 따라 하류로 방향을 정하고 한가히 발길을 옮깁니다.

한 겨울이지만 한강은 얼지도 않고 소리 없이 흐릅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니 못난 놈의 머리가 개운합니다. 흐르는 물길을 따라 바라보니 한강은 한 폭의 유채화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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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대교 교각이 그림의 틀이라면 강물 위에 놓인 아치형 성수대교는 무지개입니다. 무지개 위에 남산이 보였는데 남산 위의 타워가 멋집니다.

까마귀는 담배를 꼬나 물고 강가를 거닐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착잡하고 무거워 났습니다.

“나는 왜 되는 일이 없을까? 10년이면 데뷔해도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왜 데뷔 못할까? 재주가 모자라는 걸까, 세상이 불공평한 걸까? 삶이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물오리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푸드득거리며 강물에 뛰어듭니다.생각하는 까마귀는 계속합니다.“대체 이유가 뭐야? 노력도 할 만큼 했고 담배도 피울 만큼 피웠다. 잔소리도 들을

만큼 들었고 푸대접도 받을 만큼 받았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견뎠다. 하나밖에 없는 목표를 위하여…….”

지난 세월이 영화처럼 눈 앞에서 한바탕 흘렀습니다. 한바탕 흐르더니 비장한 모습으로 끝나버렸습니다.

한강의 물결이 소리 없이 흐릅니다.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까마귀는 땅이 꺼지도록 한 숨을 쉽니다.“혹시 길을 잘못 들어선 건 아닐까?”수면에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하얀 배를 수면에 내밀고 떠있습니다. 까마귀는

저도 모르게 ‘고인’의 과거가 궁금해졌습니다.- 거시기 장가는 갔을까?왜가리 한 마리가 요란하게 떠들며 머리 위를 날아갑니다.까마귀는 흠칫 놀라며 까옥~ 합니다.“한번밖에 없는 인생이다. 내 맘대로 살아보고 싶다. 근데 일이 왜 꼬이기만 하지? 맘대로 되는 일이 없잖아. 인생이란 무엇이기에 이렇게 괴로울까? 인생이란 헛된 짓이 아닐까?”강물을 바라보니 강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였습니다. 수면 위에는 드문드문 바위

돌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작가 지망생 까마귀는 고개를 쳐들고 한탄합니다. “한강도 속을 보여줄 때가 있구나.”우연히 인간의 팬티를 훔쳐보고 한계를 보기라도 하듯, 까마귀는 재수 없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그만 포기하고 취직이나 할까?”얼마 전에 옛날 친구가 함께 장사를 하자며 찾아온 거 떠올립니다.까마귀가 믿음이 가나 봅니다.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친구를 찾아오랍니다.겨울 해가 지기 시작하며 남산 위에 노을이 벌겋게 타고 있습니다. 강남의

고층건물들이 석양을 반사하며 금빛으로 번쩍입니다.

*

“무슨 물고기가 이렇게 크지?”수심에 잠겨 물가를 거닐던 까마귀는 문득 물속에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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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했습니다. “50센티는 되지 않을까?” 까마귀는 숨을 죽이고 수면을 지켜봅니다.정체를 알 수 없는 대물 물고기는 손을 뻗치면 닿을 거리에서 조용히 물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습니다. 물가의 까마귀를 의식 못한 듯 물고기는 여유롭습니다.까마귀는 신기해서 물고기를 따라갑니다. 잠자코 10 여 미터 정도 물고기와 함께 움직였지만 물 속의 대물은 까마귀가 안

보이나 봅니다.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까마귀는 왠지 무시당한 거 같아 기분이 언짢습니다. 물 속의 물고기는 까마귀가

하찮은가 봅니다.- 사람 구실을 못하니 물고기까지 업신여기는구나.까마귀는 기분이 잡쳤습니다.다시 생각해보니 기분이 잡칠 것도 많네요.눈 앞의 물고기가 어떻게 까마귀의 정체를 알 수가 있지요? 까마귀와 달리

물고기는 다른 세상 동물입니다.모르는 사이니 무시고 뭐고 없습니다.그럼에도 물고기를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 어쩌지요?- 도대체 물고기의 정체가 뭐지? 왜 사람을 보고 도망 안 갈까? 혹시 눈이 먼 장님

고기가 아닐까?”중국인들의 ‘年年有鱼’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직역하면 해마다 먹을 물고기가 있다는 뜻인데, 중국어 발음에서 ‘鱼’는 ‘余’와 같은

음으로써 ‘여유로움’을 상징합니다. 때문에 중국사람들은 연말에는 ‘새해에도 여유롭게 살게 해주세요’ 하는 뜻으로

물고기를 재물 신에게 바칩니다. - 야생 물고기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지 않다니 참 해괴한 일이다. 까마귀가 보이지

않을 수가 없는데…….까만 놈의 인생에서 난생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게 대체 웬 일이지요?- 우리 사이에 혹시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 혹시 하늘이 신세를

바꿔보라고 주는 선물이 아닐까?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까마귀는 흥분합니다. -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잖아. 성과는 없어도 노력은 많이 했다. 노력한 자는

자격이 있다. 하늘이 아무한테나 선물하나?틀린 말씀이 아니지요? - 근데 선물이 너무 매끄럽잖아. 낚시도 그물도 없이 맨손으로 방법이 없잖아.

하늘이 주는 선물을 마다할 수는 없잖아.” 까마귀는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두리번거려봤자 강가에는 썩은 나뭇가지 하나 안 보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 벽돌장만한 커다란 돌덩이가 하나 뒹굴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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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 공사를 하다 남은 돌인가 봅니다.까마귀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가 돌덩이를 들고 옵니다. 그 사이에 도망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물고기는 원래 자리에서 상류로 약간

이동했을 뿐입니다. 까마귀는 두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물고기야, 제발 나에게 잡혀라. 너를 잡고 신세를 고치자. 내세에 반드시 물고기로 태어날게.”

기도를 끝내자 까마귀는 돌덩이를 쳐듭니다. “풍덩~”물보라가 사방으로 터집니다. 물고기가 있던 자리는 흙탕물이 일어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맞았는지 빗나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까마귀는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립니다.물이 다시 맑아지자 물속을 여겨보니 강 바닥에 거대한 물고기가 한 마리

누워있습니다. 고급스런 비늘을 번쩍이며…….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조심스레 물속에 손을 넣고 들어올리니 월척이 넘는

대물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쏘가리다.”

*

세상에 어쩌면 이런 희한한 일이 다 있지요?돌덩이로 쏘가리를 잡다니…….벽돌장만한 돌덩이 하나로 한강에서 쏘가리를 때려잡았습니다. 그것도 월척이 넘는 대물 쏘가리입니다.

쏘가리를 보니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한강에서 ‘괴물’을 잡았다는 소문은 들은 적 있어도, 돌덩이로 대물 쏘가리를 잡았다는 뉴스는 못 봤습니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한 쏘가리입니다. 자세히 보니 머리통 위에 끔찍한 상처자국이 나있습니다. 까마귀가 던진 돌덩이에 제대로 얻어맞은 거였습니다.

까마귀는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외칩니다.“이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

* “아저씨, 거기 잠깐만요.”까마귀가 쏘가리를 들고 들뜬 기분으로 집으로 달려가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뒤에서 순경 둘이 자전거를 타고 쫓아옵니다. “손에 든 거 뭐에요?”

“쏘가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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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는 물어보는 대로 대답합니다.“어디서 잡은 거에요?”“저쪽에서.”까마귀는 물가를 가리킵니다.“저쪽은 낚시 금지 구역이어서 잡으면 안 돼요.”“낚시로 잡은 거 아닌데요.”“그럼 뭐로 잡았어요?”“때려잡았어요.”순경 둘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까마귀를 바라보며 웃습니다.“아저씨, 장난하지 마세요.”“장난이 아닌데요.”까마귀는 쏘가리의 머리통에 난 상처자국을 보여주며 있는 대로 있었던 일을

얘기합니다.순경 둘은 믿어 안지나 봅니다. “뭐로 잡았든 간에 하여튼 잡아서는 안 됩니다. 이 구역에서는 모든 수렵행위를

금지하고 있거든요.”까마귀는 난색을 들어냅니다.“산책 나왔다가 우연히 눈에 띄워서 돌을 던져봤어요. 솔직히 이런 놈이 잡힐 줄은

생각 못했거든요.”“그래도…….”두 사람은 잠시 눈길을 주어 받더니 말합니다.“한번은 봐드리겠습니다. 다음부터는 한강에 마구 돌을 던지지 마세요.”“알겠습니다.”까마귀는 미소를 짓습니다. “수고하세요.”쏘가리를 들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등뒤에서 순경 둘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쏘가리가 진짜 크다. 회를 떠먹으면 맛있겠다.”“쏘가리는 그래도 매운탕이야.”

*

- 회도 떠먹고 매운탕도 끓여먹자.집으로 달려가는 까마귀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쏘가리와 주인을 바라봅니다.쏘가리를 든 까마귀는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은 참 운수가 좋아. 2007년 1월 15 일, 기념할만한 날이다. 새해 벽두부터

대물 쏘가리가 잡히다니 웬 일이야!흥분한 까마귀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습니다. - 운수가 대통한다는 소리잖아. 대물은 아무나 잡는 거 아니잖아. 한강에 돌을 던져 월척을 잡은 사람은 까마귀가 처음이 아닐까!

까마귀는 담배를 불을 붙이고 빨아댑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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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도 못할 일이야. 하늘이 도와주려는 거 틀림 없어. 그만 뜰 때가 온 것 같다. 백수 생활 10년이면 공은 없어도 노력은 했잖아.

그 동안 노력을 얼마나 했는데……. 노력한 자는 쏘가리를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노력한 자는 하늘이 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니까요.

“쏘가리야, 나타나 줘서 고마워.”활개치며 걸어가던 까마귀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춥니다. 까마귀는 멈춰서 까옥~ 합니다.- 잠깐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세상 만사는 엎음 갚음이라 했다. 하나를 받았으면 하나를 갚는 거 도리가 아닌가! 어쩌다 하늘이 귀중한 선물을 주셨는데, 받기만 하고 모른 척 할 수 없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까마귀는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뭐로 보답하면 좋을까?생각하는 까마귀는 담배를 물고 두리번거립니다. 두리번거리다 피우고 있던

담배에 멈췄습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세상에 금연보다 힘이 드는 짓이 있을까요? 금연은 아무나 못 합니다. 때문에 금연은 존재합니다. 아무나 못 하는 금연이니 그 놈의 존재감에 도전해볼까요?

까마귀는 끝내 비장한 결심을 내렸습니다.- 이번 기회에 담배를 끊자. 이야 말로 제대로 된 보답이 아닌가! 하늘도 반가워 할

거야. 건강에 해로운 놈은 보내버리자. 하늘의 은공에 보답하고 건강도 챙긴다면 일거양득이 아닌가!

결심이 서자 까마귀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뱉어버립니다. 호주머니에서 나머지도 담뱃갑 채로 꾸겨서 길가의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담배야, 잘 가거라.”까마귀는 마음이 홀 가뿐합니다.담배와의 악연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자, 마치 동녘에서 아침 해가 솟아오르듯 희망이 보였습니다.희망은 까만 놈의 눈에서 반짝입니다.작가 지망생 까마귀는 하늘이 내려준 귀중한 선물을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달려갑니다.

- 마누라에게 매운탕을 끓여주어야겠다. 홀몸이 아니니 살짝 덜 맵게 끓여주자. 보신을 시키고 나가 일자리나 알아볼까?

2007년 1월 15 일 뚝섬유원지에서

*집필 수기*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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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쏘가리>는 까마귀가 2007년에 쓴 글인데 그 해 여름에 조선일보에서 자그마한 상을 하나 받은 적 있습니다.

만 5년이 된 것 같습니다.주최측에서 저작권을 5년간 보유한다고 했으니 그만 제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드라마 집필 때문에 중국에 가있다 보니 시상식에는 마누라가 대신 참석했는데 한

여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무대에 올라가 직접 상을 못 받은 거 아쉬웠지만 5년 뒤 다시 읽어보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습니다. 이런 작품이 수상하다니 심사원 선생님들께서 배려를 많이 해주셨네요.문제가 어지간히 많은 거 아닙니다.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언어가 너무 조잡한 거 아닌가요?대신 구성과 스토리는 나쁘지 않고 우수할 정도였기에 까마귀는 언어 수정을 열심히 했습니다.

문장이 새롭게 다시 태어났습니다.이젠 대충 볼만하네요.그나저나 다시 태어났으니 자태를 자랑해도 되지 않을까요?

*

<담배와 쏘가리>가 한창 신이 나서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네요.

5년 만에 도대체 누구지요?문을 여니 희한하게 생긴 놈이 인사를 합니다.“안녕하세요. <기우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라고 합니다. 다들 저를 편하게

<자빠졌네>라고 부르는데 선배님과 할 얘기가 있습니다.”후배가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들어오세요.”반가운 선배는 후배를 객실로 안내합니다. 객실에서 두 사람은 마주앉아 잠시 서로

바라봅니다. “용건을 들어볼까요?”<자빠졌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습니다.“선배님께서 한바탕 성형수술을 하시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민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이 빠르네요.”“이 동네가 원래 그런 것 같습니다.”“살벌한 동네네요.”“살벌하다면 살벌하지요. 그래도 대충 살만합니다. 근데 선생님은 수술을 너무 잘

한 것 같습니다.”<자빠졌네>는 선배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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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상하고 기품이 넘치는 얼굴은 난생 처음입니다. 역시 소문대로 걸작은 걸작인 것 같습니다. 직접 보니 감탄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실례지만 제가 선배님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우선 얘기나 들어볼까요?”<자빠졌네>는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습니다.“예를 들어 아빠와 아들이 있는데요. 아빠는 작가인데 어린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싶어 열심히 글을 씁니다. 아빠는 뇌졸중환자인데 입도 삐뚤고 한쪽 팔 다리를 못 씁니다. 글도 겨우 한 손가락으로 씁니다. 아빠의 두 눈에는 자전거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공모전에서 계속 떨어집니다. 한 두 번 떨어진 거 아닙니다. 그렇게 떨어지고도 포기 안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면서……. 곁에서 보는 사람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자빠졌네>는 참지 못 하겠다는 듯이 울음을 터뜨립니다.“그 아빠란 사람이 혹시…….”“짐작이 가셨겠지만 바로 우리를 창작한 작가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은 지금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준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또 다시 뇌졸중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제야 <담배와 쏘가리>는 자신이 때마침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아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담배와 쏘가리>는 끝내 나오는 눈물을 억제 못 합니다. 한바탕 울고 나서 <

담배와 쏘가리>는 눈물을 닦습니다.“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어림도 없습니다.”<자빠졌네>는 고개를 저으며 아쉬운 표정을 짓습니다.“보다 못해 제가 형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못난 아빠를 도우려고 말입니다. 형제들을 묶어서 단편소설집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매수를 채우지 못 했습니다.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 했습니다. 선배님 같은 분이 동참해주면 간단히 해결이 되지만…….”

<자빠졌네>는 지긋이 선배를 바라봅니다. “제가 선배님께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선배님은 우리의 우상입니다.

우상의 매력은 누구도 거절 못 합니다. 우상은 힘이고 영향력입니다. 단편소설집에 선생님 같은 우상을 함께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요? 책이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요?”

“과찬이십니다. 제가 어떻게……. 우상은 어림도 없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수정할 거 많거든요.”선배가 겸손을 부리자 <자빠졌네>는 말합니다.“선배님은 수정할 거 없습니다. 누가 봐도 너무 잘된 문장입니다. 나머지는 출판사편집선생님들께 맡기면 끝입니다. 선생님 같은 분을 마다할 출판사가 이 동네에 있을까요?”

그건 틀린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자빠졌네>는 젊어 보여도 말씀 하나는 어른스럽습니다. 보는 눈 역시 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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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습니다.젊은 놈은 계속합니다.“저는 한바탕 자빠진 놈입니다. 이 몸은 작가선생님께서 주셨습니다. 작가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백 번 만 번 자빠져도 좋습니다. <자빠졌네>는 선생님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선생님만한 분이 없습니다.”선배는 <자빠졌네>의 얘기에 감동되었습니다. 한바탕 자빠진 놈에게 감동되다니

무슨 일이지요?<자빠졌네>는 선배의 손을 잡습니다.“선배님, 제발 부탁 드립니다. 선배님만 문제 없다면 모두 해결됩니다. 우린 한바탕 빛을 볼 수 있고 작가선생님은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줄 수 있습니다. 저의 눈에는 선생님의 자전거밖에 없습니다. 선배님은 우리의 희망이자 존재의 이유입니다. 선배님은 배은망덕한 자가 아닌 줄 압니다. 선생님이 없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여기까지 듣고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요? <담배와 쏘가리>는 끝내 천금 같은 입을 열었습니다.

“출간한다는 단편소설집의 제목이 뭐라고 했지요?”“<하늘 높이 나는 자전거>입니다.”<담배와 쏘가리>는 갸웃하고 생각에 잠겨있다가 묵직한 입을 열었습니다.“저도 끼워주시지요.”<담배와 쏘가리>는 소원이라도 푼 것처럼 몸을 뒤로 젖히며 <자빠졌네>와

미소를 짓습니다.“하늘 높이 날아보고 싶습니다.”<자빠졌네>는 신이 났습니다.“선배님, 너무 고맙습니다. 선배님은 역시 멋집니다. 선배님을 믿고 찾아온 보람이

있습니다.”“나도 만난 보람이 있네요.”이 세상에는 역시 <자빠졌네>만한 작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보니 젊은 놈이

사내답게 풍채가 좋습니다.풍채가 좋은 놈은 한바탕 자빠진 놈입니다.자빠진 놈이 어디서 생긴 의리일까요? 그 놈의 본명은 <기우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입니다.문을 나서며 <자빠졌네>는 <담배와 쏘가리>의 손을 꼭 잡고 말합니다. “우리 주인은 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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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라진 결혼반지

“다음은 사랑의 징표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결혼식에서 신랑 신부는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반지를 교환합니다. 새신랑이

반지를 끼워주니 새신부는 억수로 행복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영원하고 또 영원하리라.” 주례는 하늘을 향해 팔을 펼치고 억수로 외칩니다.“이 세상에 부러움이 없어라.”한바탕 식을 마치고 신랑 신부는 밀월 여행을 떠납니다.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달리는데 새 신부는 반지를 보고 또 봅니다. 마치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이. 손가락에서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립니다.“다이아몬드 예쁘다.”그녀는 감탄하더니 고개를 들고 새 신랑과 말합니다. “자기 반드시 반지를 끼고 다녀야 해. 안 끼고 다녔다간 죽을 줄 알아.”새 신랑은 사랑의 미소로 보답합니다.“억수로 명심하겠습니다.”리무진은 신랑 신부를 태우고 해안가 도로를 달립니다. 창밖에는 현대중공업의 조선소가 자랑스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새 신랑 까마귀는

조선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까마귀는 창 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습니다. - ‘울산 까마귀’가 쪼끄만 반지 하나 못 챙길까! 자기 남편은 10 만 톤짜리 선박을

만드는 남자 중의 남자야. 시야에 조선소 부두에 정박하고 있는 거대한 선박이 들어옵니다. 까마귀와

동료들의 설계로 완공된 대형 크루즈선입니다.크루즈선을 보니 까마귀는 가슴이 뿌듯합니다.까만 놈의 눈에 비친 화려한 크루즈선은 마치 한 폭의 예술작품 같습니다.선박은 날개가 달린 상상의 세계입니다.선박은 꿈의 세계로 통합니다.까마귀는 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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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울산 까마귀’는 ‘인생대사’를 치르고 여행을 떠납니다. 머나먼 남쪽나라에는 꿀처럼 달콤한 밀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까마귀는 한시가 급합니다.

*

- 사랑이란 무엇일까?눈 깜짝할 사이에 사랑 같은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밀월이 끝나며 신랑 신부는

그만 놀고 새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쉬워도 별 수 없습니다.이젠 할 일을 하며 제 집에서 놀 차례입니다. 새색시는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푸짐한 아침상을 차렸습니다. 아침을 만끽하고

새신랑이 출근하니 새색시는 다정히 버스정거장까지 바랩니다.“자기야, 오늘 늦지 마.”그나저나 새신랑이 ‘대사’을 치르고 출근하니 회사 동료들은 축하하며 난리입니다.

한바탕 술을 마실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새신랑 까마귀의 귀환을 위하여 오늘밤 회식입니다.”다들 회식의 매력에 끌려 일을 다그치니 어느새 해가 지고 퇴근시간이 되었습니다.까마귀는 동료들에게 끌려 회식장소로 갑니다. 다들 까마귀를 축하하여 맥주잔을

하늘높이 쳐들었습니다. “까마귀를 위하여.”“위하여.”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까마귀는 화장실로 달려갑니다.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며 새신랑은 거울 속의 까만 놈을 바라봅니다. 까마귀는

벌써 취기가 올라 있습니다.환락의 밤은 까마귀가 주인공입니다.주인공은 도망 못 갑니다.까마귀는 반지를 뽑아 호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합니다. 까만 놈은 한바탕 각오를

하고는 다시 술판으로 뛰어듭니다.“까마귀를 위하여.”“위하여.”결국은 그 놈의 ‘위하여’를 못 이기고 까만 놈은 한밤중에 동료들에게 업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머리가 빠개질 것 같습니다. 마누라는 남편에게 사랑이 듬뿍 담긴 해장국을 끓여줍니다.

이마의 식은 땀을 닦으며 열심히 먹고 있는데 마누라가 불쑥 묻습니다.“반지가 왜 안 보여?”“반지?”까마귀는 먹다 말고 생각난다는 듯이 말합니다.“세비로 호주머니에 있어.”마누라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침실로 향합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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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볼 판인 까마귀는 정신 없이 해장국을 입에 퍼 넣습니다.살고 볼 판이라니까요.침실에서 마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호주머니에 없는데…….”“무슨 소리야?”까마귀는 먹다 말고 일어나 침실로 걸어갑니다. 지난 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호주머니를 마구 뒤집니다. 하지만 기억 속의 반지는 종적조차 없습니다.- 무슨 일이야!불안한 까마귀는 뒤지고 또 뒤집니다.뒤지고 뒤져도 없다니까요.“지난 밤에 호주머니에 넣은 거 틀림없는데…….”까마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등 뒤에서 마누라가 한마디 합니다.“잃어버린 거 아니야?”“그럴 리 없어.”까마귀는 까옥~ 합니다.“화장실에서 호주머니에 간직한 거 틀림없는데…….”“반지는 왜 뺐어?”마누라는 남편과 묻습니다. “총각행세를 했구나.”

*

“총각행세라니…….”남편은 바삐 변명합니다.“설계실 동료들이 신혼을 축하한다며 벌인 술판이야.”“왜 반지를 뺐어?”“손을 씻으며 잠시 뺀 거야.”“뺐으면 제자리에 끼워 넣어야지 호주머니에 왜 넣었어? 총각행세를 하려 한 거 맞잖아.”

“아니라니까.”“아니면 반지를 내놔.”까마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우리 약속한 거 잊었어?”“무슨 약속…….”마누라가 정색하자 까마귀는 바보웃음을 합니다.“반지를 안 끼고 다니면 죽어.”“한번만 봐주면 안돼?”“반지나 내놔.”“오늘 반드시 찾아올 테니 한번만 봐주라.”“약속은 약속이야.”마누라는 남편을 똑바로 쳐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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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무슨 날인지 알아? 우리 결혼하고 새 생활을 시작한 첫날이야. 첫날부터 술을 퍼먹고 반지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살아. 살 거야, 말 거야?”

“살 거야.”까마귀는 말합니다.“우리 둘이 오순도순 사랑하며 천년 만년을 살자.”“웃기고 자빠졌네.”마누라는 억수로 눈알을 부라립니다.“당장 엎드리지 못할까?”“알겠습니다.”죄를 지은 까마귀는 얌전히 침대 위에 올라가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마누라는 남편을 가로타고 앉아 한바탕 엉덩이를 두드립니다.

“나 죽는다.”“죽으라고 때리는 거야.”“나 죽으면 자기 과부로 살 거야?”“시집 갈 거다, 왜?”여자 주먹이라고 얕잡아보고 엉덩이를 맡긴 것이 실수였습니다. 주먹은 작아도 얼마나 매서운지 까마귀는 돼지 멱을 따는 소리를 지릅니다.

“나 죽는다……. 제발 좀 살려주라.”“죽고 싶어 환장했지.”

*

“출근 안 할 거야?” “엉덩이가 아파 못 일어나겠다.”“덜 맞았구나.”까마귀는 제꺽 일어나 바지를 입고 출근 준비를 합니다. 준비를 하며 여전히

반지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호주머니에 넣은 거 틀림 없는데…….생각하면 할수록 두리뭉실해지며 알 수가 없습니다. 까마귀가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서는데 마누라가 뒤에서 불러 세웁니다. “지갑을 두고 가면 어떡해?”“깜빡 했네.”까마귀는 지갑을 받아 엉덩이에 쑤셔 넣습니다.“나 간다.”“반지를 찾으면 연락해.”

*

- 반지가 어디 있지?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까마귀는 동료들을 찾아 다니며 알아봅니다.“어제 내 결혼반지 못 봤어?”“반지를 잃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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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실 때까지는 있었는데……”소문은 금시 설계실에 퍼지며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까마귀는

영예롭게도 당일 뉴스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습니다.“까마귀가 결혼반지를 잃어버렸대.”“큰 일 났구나.”“결혼반지를 어떻게?”“마누라가 보통이 아니라며…….”하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반지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신 동정이

어린 것 같은 눈길이 전부였습니다.“까마귀야, 조급해 말고 천천히 생각해 봐.”“생각 밖의 곳에 있을 거야.”“결혼이란 원래 풍파가 있는 거 알지?”“결혼해봤어?”“결혼이 뭐가 대단하다구.”실망한 까마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쉽니다.곁에서 보다못해 30년 전에 결혼하고 머리가 다 빠진 대선배가 다가와 후배를

위안합니다.“반지는 요정과 같아 눈 앞에서 사라질 때가 많다. 반짝하며 사라졌다 때가 되면

반짝하며 나타난다.”말씀대로 반짝하며 나타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반짝하며 살아졌으면…….그나저나 퇴근하면 호랑이 같은 마누라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지를 못 찾으면 엉덩이나 맞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하여튼 큰 일이 났습니다.죽고 싶지 않은 까마귀는 핸드폰을 들고 방법을 시도합니다.“실례지만 지난 번에 결혼반지를 부탁 드린 까마귀인데요. 오늘 내로 저의 것과 똑

같은 거 하나 구입할 수 없을까요?”“똑 같은 거 없어요.”전화를 받은 아가씨는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린 주문을 받고 손님이 디자인을 선택해요. 선택하고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두 주일은 걸려요.”“알겠습니다.”핸드폰을 닫고 까마귀는 실망한 모습으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쉽니다. “반지가 어디 갔지?”

*

까마귀가 잠시 반지의 존재를 회피하고 일을 하고 있는데, 테이블 위의 핸드폰이 부르릉거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고 알립니다.

보나마나 마누라의 메시지입니다. - 반지를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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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없는 까마귀는 핸드폰을 닫아버리고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좀 있으니 핸드폰이 또 부르릉거립니다.

까마귀는 잠시 주저하다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합니다.- 혹시 지갑에 넣어놓은 거 아니야?“말도 안 되는 소리…….”까마귀는 갸웃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습니다.근데 이게 웬 일이지요? 지갑을 열고 보니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며 그 놈의 결혼반지가 억수로 주인을

반기네요. 결혼사진을 배경으로 하고……. 순간 까마귀는 아침에 출근하며 마누라가 지갑을 주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

모습은 걱정은커녕 승리자의 모습입니다.“나쁜 계집애, 반지를 감춰놓고 내 엉덩이를 구타했구나.”할 말이 없는 까마귀는 재수 없는 고개를 쳐들고, 화창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까옥~ 합니다.“불쌍한 내 엉덩이를 어쩌지?”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넣으며 까마귀는 엉덩이를 위안합니다.“엉덩이야, 억수로 억울하지? 억울해도 잠시 참아. 까마귀는 엉덩이와 약속한다. 오늘 밤 반드시 원수를 갚아줄 게.”

그나저나 반지 걱정이 사라지니 속이 다시 쓰려 나며 못 참겠습니다. 지난 밤에 한바탕 먹은 술은 억수로 해장국을 부릅니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

*집필 수기*

“누구시지요?”<사라진 반지>가 커피숍에서 한가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맞은 켠 빈 자리에

이상한 놈이 털썩 엉덩이를 내립니다.자빠질 것처럼…….“<사라진 반지>님 맞지요?”“그런데요?”“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동생인데 <기우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라고 합니다.”“그런 동생 있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형님처럼 한바탕 상을 받은 적이 없으니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까마귀의

자식이고 형님의 동생인 건 틀림없습니다.”하늘에서 떨어진 동생을 바라보며 <사라진 반지>는 웃습니다.“용건이 뭐지요?”“형님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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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나 봅시다.”“다름이 아니라 형제들이 모여 단편소설집을 하나 내기로 했는데, 형님도 동참하면

어떨까 해서 문의를 드리는 바입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왜요?”“싫어서 아니라 저작권이 상을 준 주최 측에 잡혀있거든요. 주최사의 동의가

없으면 안 될 걸요.”“동의를 받으면 되지요.”“누가 동의한대요?”“그야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한번 알아볼까요?”“알아 봤자지…….”지난 일을 생각하니 <자빠졌네>는 재미가 없습니다. 상을 받고 항의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지요?뇌졸중환자니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씁쓸합니다.환자는 별 수 없다니까요.“알아도 안 보고 안 된다는 거에요?”<자빠졌네>는 많이 자빠져봤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 놈의 눈에는 대단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아무 것도 모르면서…….“제가 한번 알아보고 얘기를 드릴까요?” “동의하면 동참하지.” “감사합니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자빠졌네>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납니다. 한바탕 자빠질

것처럼 달려가더니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사라진 반지>는 콧방귀를 낍니다.“어림도 없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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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자위’에 ‘19 금’이 웬 일이야?

글을 쓰다 ‘자위하다’가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섹시한 놈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니 ‘19 금’ 창구가 뜹니다.

- 이게 웬 일이야?사이트에 로그인을 하니 그제야 검색이 가능합니다. 알고 보니 애들이 볼까 봐 ‘19

금’ 조치를 해놓은 거였습니다.까마귀는 이해가 됩니다.다른 나라도 아니고 고국의 사이트니 이해가 됩니다. ‘19 금’의 표준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하지만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자위하다’에 ‘19 금’ 문제가 생길 줄은 뜻밖입니다. ‘자위하다’에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다니까요.사전을 펼치니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하나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는 뜻으로서 색깔이 없이 순수한 ‘자위’행위를

말합니다.예를 들면 ‘항공사 측은 이번 사고에서 그나마 인명 피해가 없었던 것을 자위로 삼았다’입니다.

아무 느낌이 없지요?‘자위’를 맘대로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하나는 ‘수음’을 뜻하는데 예문 같은 거 아예 없습니다. 마치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는 듯이 감추며 수줍은 표정입니다.뭐가 부끄러운 거지요?존재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알고 넘어가면 안 되나요? 사전을 만든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나 봅니다.뭐가 그렇게 부끄럽지요?하여튼 자매는 대우가 다릅니다.그나저나 섹시한 둘째 때문에 담백한 첫째가 세인들에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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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까요? 오해를 받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장가를 못간 놈은 맨날 자위를 한다’라고 하면 그 놈의 ‘자위’는 도대체

무슨 행위지요?순수한 행위로 봐야 하는 건가요, 거시기한 행위로 인식해야 하나요?무슨 행위든 간에 ‘자위’를 한다니까요.안 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첫째는 항의합니다.- 이 ‘자위’는 저 ‘자위’와 달라요. 거시기와 관계 없다니까요. 한 집에서 한 침대를 쓰고 싶지 않아요.

어딘가 억지를 쓰는 거 같지 않습니까?뭐가 잘 났다고 야단이지요?그렇다면 둘째는 대접 같은 대접을 받는 걸까요? 다들 둘째의 존재 가치가

궁금하지 않습니까?대우가 다를 뿐 존재는 합니다.둘째도 항의합니다.- 독방에서 ‘자위’하고 싶어요. 곁에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요. 못난 놈과 한 집에서 한 침대를 쓰고 싶지 않아요.

둘째가 참 안 됐지요?살면서 ‘자위’도 마음대로 못 하고…….생각하고 또 해도 알 수 없는 ‘자위’입니다. 국경을 넘어온 놈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위’를 합니다.

“나와 무슨 관계지?”솔직히 사전에까지 ‘19 금’을 설정한 건 이해가 안 되네요. 사전을 안 번져도 이

세상에는 ‘19 금’이 넘쳐납니다.사전에까지 한바탕 ‘19 금’이 필요한가요?사전이란 무엇이지요?지식의 보고이자 객관적인 존재로서 세상에 둘도 없는 참고서입니다. 참고서에 왜

주관이 마구 끼어드는지 모르겠습니다.사전은 객관적인 존재라니까요.하여튼 사전에 ‘19 금’이 존재하는 건 이상합니다. 요즘 애들의 사춘기가 빨라진 거 사전 때문이 아니지요? 사전에 ‘19 금’ 조치를

한다고 애들의 문제가 해결되나요?무슨 문제인가요?까마귀는 애들의 일은 알고도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19 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심심한데 ‘자위하다’로 표현이나 해볼까요?

*

오늘도 장가를 못간 놈은 골방에서 한바탕 ‘자위’를 했습니다. ‘자위’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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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도 못 하면 거시기 어떻게 살지요? 살면서 어느 누구나 ‘자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위’를 안 하는 인간은 존재 안

한다고 봐야지요. 이 세상은 ‘자위’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자위’는 날이 갈수록 필요 존재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결혼을 대체하고

지배자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거시기 살고 볼 판입니다.현실은 보시다시피 ‘자위’도 맘대로 못 하고 비현실적입니다.‘자위’도 못 하는 세상에서 사는 기분이 날까요? 장가도 못 가는데 ‘자위’도 안 하면

어떻게 살지요? 내 맘대로 ‘자위’도 못 해요?미안하지만 ‘자위’는 개인적인 일이고 거시기는 사유재산입니다. 무리의

문제도아닌데 ‘19 금’이 왜 필요하지요? 보란 듯이 들어내놓고 ‘자위’하는 거 아닌 줄 압니다. 들어내놓고 하면 어때서요?“장가는 아무나 가는 거 아니야. 가고 싶어도 별 수 없다니까. 올해에 가기 힘드니 내년에 가기로 하자. 거시기 자위하며 기다리자.”장가 못간 놈은 자위하고 또 합니다.거시기는 내 맘이라니까요.다들 그 놈의 ‘자위’가 이해 되셨습니까? 이해 안 되면 고민하느라 하지 마시고 ‘

자위’를 하세요. ‘자위’하면 고민이 사라져요.‘자위’는 개인적의 일이지 ‘19 금’과 관계없다니까요.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잡혀먹는 것도 아닙니다.쓸쓸하게 누워서 혼자 상상합니다.거시기는 상상합니다.우리 거시기는 한바탕 상상하는 동물이라니까요.그만 거시기 ‘자위하다’를 풀어주시는 거 어떻습니까? 가슴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엉덩이를 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혼자 논다니까요.

*집필 수기*

오늘도 까마귀가 가게에서 한바탕 글을 쓰고 있는데, 곁에서 가게 전화가 요란하게 울립니다.

수화기를 드니 <자빠졌네>입니다.“출간 준비가 되었는데 매수가 살짝 부족하대요. 200 자 원고지로 10매만 추가하면 된대요. 아빠, 부탁해도 되지요?”

아들이 아빠에게 부탁해 안 될 거 뭐가 있지요?부탁을 받고 아빠가 뚝딱하고 만든 것이 바로 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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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고 보니 작품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자위하는 거 아니라 아빠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자빠졌네>한테 보내줬더니 전화가 왔습니다.“역시 우리 아빠야. 못 쓰는 글이 없다니까. 세상에 따를 자가 없습니다. 하늘 높이

날 것 같습니다. 열심히 닦고 또 닦더니…….”그 동안 닦고 또 닦았습니다.때가 온 것 같습니다.하늘 높이 나는 놈은 한바탕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때가 오면 우리 아들의 자전거가

문제인가요?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 있습니다.눈 앞의 세상이 바뀌면 뭐가 걱정이 되지요? 걱정이 없는 세상에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믿습니다.

까마귀는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싶습니다.세상은 넓고 자유로우니 까마귀가 걱정이 있겠습니까? 걱정이 없는 세상에서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달아 다닙니다.아들이 신이 나면 아빠는 부러움이 없습니다.자위가 아니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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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억수로 허벌나게

단편소설집 <하늘 높이 나는 자전거>는 아시다시피 아빠와 아들의 합작이 낳은 소중한 결과입니다.

아들은 자전거가 욕심나고 아빠는 자전거를 사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줄 돈이 없습니다.

까마귀는 어쩌면 좋지요?<아빠와 아들>에서 보여준 것처럼 까마귀 네는 미니 3 인 가족입니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6살 아들입니다. 엄마도 아들도 잘 났는데 아빠는 못 났습니다.아빠는 뇌졸중환자입니다. 뇌졸중환자 까마귀는 반신이 불수여도 다행히 머리가 살아있습니다. 반신이 불수여도 머리가 살아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희망은 희망을 부릅니다.‘현대중공업 창사 40 주년 문예공모’에 <사라진 결혼반지>란 콩트를 하나 써서

보냈더니 입상할 줄은 몰랐습니다.대상이 아니고 우수상이 아니어도 입상만으로도 기쁩니다. 몇 년 만에 받은 상이지요?상금을 받자마자 마누라가 들고 가더니 집세를 내버렸습니다. 절름발이도 우리 집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까만 놈은 기쁩니다.까마귀는 머리로 일을 하다 쓰러진 사람입니다. 공모전에 입상했다는 건 까마귀의 머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얘기입니다.

심사위원님들이 바보인가요?바보에게 상을 줄 정도로 미련하지 않습니다. 미련하지 않은 건 물론 제대로 볼 줄을 아는 도를 닦은 분들입니다.

도인들의 눈에 들었다는 건 글을 쓸 수 있다는 신호입니다.파란 불이 반짝입니다.이 놈의 머리만 문제 없다면 무슨 일을 못 할까요? 까마귀는 머리로 일을 하다 쓰러진 사람입니다. 머리로 얼마든지 가족을 먹여 살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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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한 손가락으로 가족을 먹여 살린다니까요.신이 난 아빠는 아들과 약속합니다.“다음 공모전에서 상을 타면 아빠가 자전거를 사줄까?”아들의 두 눈이 반짝입니다.“아빠, 정말이지?”“아빠가 언제 거짓말 했어.”“약속이다.”“약속한다니까.”아빠는 자신만만해서 아들과 깍지를 겁니다.

*

말씀을 했으면 한대로 해야 아빠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아빠는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 열심히 글을 씁니다.글을 쓰며 혈압약을 밥 먹듯이 먹습니다.다시 쓰러지면 죽습니다.까마귀는 재수 없는 뇌졸중환자라고 했지요. 뇌졸중환자는 두 번 다시 쓰러지고 싶지 않습니다.

할 일이 생긴 아빠는 신이 났습니다.글이 잘 된다니까요.그 놈의 글이 대충 잘 되는 거 아니라 억수로 잘 됩니다. 허벌나게 글이 잘 되니 잘 돼도 너무 잘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잘 돼서 뭐하지요?돈도 안 되는데…….세상 일은 알 수 없다는 소리가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일입니다.‘글이 잘 돼봤자’입니다.무슨 놈의 세상인지 생각한 대로 안 된다니까요. 세상이 돌았는지 까마귀가

돌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써서 보내면 떨어지고 다시 써서 보내도 떨어집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집니다.하여튼 지난 2 개월 동안 많이도 떨어졌습니다. 떨어지는 재주라도 가진 것처럼 줄기차게 떨어졌습니다.안 내놓으니 더 이상 안 떨어지네요.보내는 거 아니었나요?하여튼 덕분에 오기가 생겨 까마귀는 글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공부를 하며 떨어진 놈들을 수정하고 또 합니다.

수정하고 또 하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갈수록 맑아지니 희망이 보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천재가 된 느낌입니다.그나저나 우리 아들의 자전거를 어쩌면 좋지요? 아빠는 아들과 한바탕 깍지를 걸고 약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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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하고 끝내 못 지켰습니다.보란 듯이 약속은 머리 위에서 마구 날아다닙니다. 눈 앞에서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녀도 절름발이는 잡을 수가 없습니다.현실은 억수로 비현실적입니다. 억수로 허벌나게…….

2012년 6월 5 일 허브 휴에서

(수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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