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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리지』를 통해 본 이중환의 역사인식

    - 인물과 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

    시1)신시 신 병 주*

    1. 머리말

    2. 이중환의 가계와 생애

    3.「팔도총론」에 나타난 역사인식

    4.「복거총론」과 「사민총론」에 나타난 역

    사인식

    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기록들

    6. 함흥차사와 홍순언 관련 기록 분석

    7. 맺음말

    1. 머리말

    18세기의 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이 쓴 택리지(擇里志)는 우리의 산천과 그 곳에서 살아갔던 사람들까지를 담아낸 인문지리서로 알려져 있다. ‘무릇

    살아갈 터를 잡는 데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生利:그 땅에

    서 생산되는 이익)가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는 인심(人心)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

    은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1) 라는 서술에서도 보이듯이 저자 학자 이중환은 복거(卜居)의

    조건으로 지리, 생리, 산수, 인심 네 가지를 지목하였다. 우리 국토를 두루 답사하

    면서 팔도의 자연과 환경, 인물을 세밀하게 정리하여 250 여 년 전 조선의 산천을

    *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1) 擇里志, 「卜居總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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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생히 복원할 수 있게 한 학자 이중환. 이중환은 국토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바

    탕으로 우리 산천과 그 곳을 살아갔던 인물들의 역사와 당대 사람들의 정서까지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다.

    이제까지 『택리지』에 대한 연구는 인문지리서라는 관점에서 주로 진행되었

    다. 진단학회에서 주관한 3회 한국고전 심포지움에서 『택리지』를 연구 주제로

    삼으면서 이중환의 정치적 위치와 『택리지』 저술, 『택리지』의 팔도총론과 생

    리조(生利條)에 대한 고찰, 『택리지』: 한국적 인문지리서의 3개 논문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며,2) 이후에도 인문지리서의 관점에서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

    다.3) 최근 역사학 분야에서 이중환과 『택리지』의 의미를 살피는 연구가 진행되

    고 있어서 『택리지』 연구의 폭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중환의 가계와 정치적 위

    상을 분석한 연구,4) 『택리지』의 필사본 비교 연구5)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

    전히 『택리지』에 나타난 이중환의 역사 관련 기록과 역사인식을 살펴보는 연구

    는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본 연구는 지리지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택리지』

    에 대해서는 역사 분야의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략한 편인 점을 감안하여, 『택리

    지』 곳곳에서 저자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는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검토

    2) 진단학회 편, 『한국고전심포지움 3집- 동국지리지, 택리지, 성호사설, 해동역사, 연려실기

    술을 중심으로』, 일조각, 1991.

    3) 권정화, 「이중환의 국토 편력과 지리사상」, 『국토』, 1999.

    김정심, 「이중환의 택리지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노무지, 「淸潭 李重煥의 擇里誌에 對한 考察」, 사회과학논충 2․ 3, 1987.

    박영한, 「청담 이중환의 지리사상에 관한 연구」, 『지리학논총』제 4호, 1977.

    신은경, 「地理空間의 談論化 과정에 대한 一考察」 : 『新增東國輿地勝覽』과 『擇里志』

    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제 32권, 2009.

    4) 김학수, 「성호 이익의 학문연원-가학의 연원과 사우관계를 중심으로-」, 『성호학보』1,

    2005.

    박광용, 「이중환의 정치적 위치와 『택리지』저술」, 『진단학보』69, 1990.

    배우성, 「이중환의 청년기 생애와 사상: 詩社활동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57,

    2005.

    5) 배우성, 「擇里志에 대한 역사학적 讀法 : 필사본 비교연구를 중심으로」, 한국문화 제 33

    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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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보고자 한다. 특히 『택리지』의 내용 곳곳에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

    록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서 저자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많아서 이

    들 자료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연구

    는 역사 연구 자료로서의 『택리지』의 가능성을 살펴보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2. 이중환의 가계와 생애

    이중환의 본관은 경기도 여주(驪州)로, 자는 휘조(輝祖)이며 호는 청담(淸潭),

    청화산인(靑華山人) 또는 청화자(靑華子)6)이다. 이중환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생

    활을 한 명문가로, 당색은 북인에서 전향한 남인에 속한다. 이중환의 5대조 이상의

    (李尙毅)는 광해군대 북인으로 활약하였고 관직이 의정부 좌참찬에 올랐다. 할아

    버지 이영(李泳)은 1657년(효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예산현감과 이조참판을,

    아버지 이진휴(李震休)는 1682년(숙종 6)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

    참판,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진휴는 남인 관료 집안의 딸인 함양 오씨

    오상주(吳相冑)의 딸과 혼인해 1690년에 이중환을 낳았다. 이중환은 사천 목씨(睦

    氏) 목임일(睦林一, 1646-?)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2명과 딸 2명을 두었고, 후처로

    문화 류씨를 맞이하여 딸 1명을 두었다. 사천 목씨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남인 집

    안으로 장인인 목임일은 대사헌을 지냈다. 실학자로 명망이 높은 이익(李

    瀷:1681~1763)은 이중환에게 재종조부(再從祖)가 되지만 나이는 아홉 살 위였다.

    이중환은 일찍부터 이익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익 또한 이중환의 시문(詩文)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익이 『택리지』의 서문과 발문(跋文), 그리고 이중환의 묘갈

    6) 청화산인과 청화자라는 호는 청화산(靑華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청화산은 충청북도 괴산군, 경상북도 상주시, 문경시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이중환은 자신의 거처인 사송정(四松亭 : 금강 근처의 정자로, 현재의 충남 연기군 근처)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청화산을 복지(福地)라고 격찬하면서 자신의 호에 ‘청화’가 들어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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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까지 써 준 것에서 보듯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다. 이익 또한 같은 남인인 목

    천건(睦天健, ?-?)의 딸을 후처로 맞아 사천 목씨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사천

    목씨와 혼맥을 형성한 것은 이중환이 당쟁에 깊이 연루되는 단서가 되게 된다.

    1713년 이중환은 24세의 나이로 증광시의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에 들어

    섰다. 관직 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1717년 김천도 찰방(金泉道 察訪)이 되었고,

    주서(注書), 전적(典籍) 등을 거쳐 1722년 병조좌랑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1722년

    에 일어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 사건은 그의 생애에 큰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이중환이 살았던 숙종, 경종 연간은 당쟁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로서, 정권이 교체

    되는 환국(換局)의 형태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중환이 속한 남인 세력은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크게 탄압을 받았다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694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정치적 숙청

    을 당했다. 숙종 후반에는 서인 세력에서 분화한 소론측과 연계하여 경종의 즉위

    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소론과 남인들이 정계에 진출하였

    는데, 노론 세력은 경종이 허약하고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소론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여 1721년

    (경종1) 김일경(金一鏡:1662-1724)이 노론을 역모죄로 공격하였고, 뒤를 이어 남

    인 목호룡(睦虎龍:1684-1724)이 고변서를 올려 노론측이 숙종 말년에 세자(훗날

    경종)를 해치려고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노론의 4대신인 김창집

    (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가 처형되고 노론의

    자제들 170여 명이 처벌되는 임인옥사(壬寅獄事)가 일어났다. 그러나 1723년(경종

    4)에 목호룡의 고변이 무고였음이 판정되면서 정국은 다시 노론의 주도하에 들어

    가게 되었다. 소론에 대한 노론의 강경한 정치 보복의 과정에서 이중환은 목호룡

    의 고변사건에 깊이 가담한 혐의를 받으면서 정치 인생에 위기를 맞았다.7) 다행

    히 이때는 혐의가 입증이 되지 않아 곧 석방되었으나, 노론의 지원을 받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이중환은 다시 당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임인옥사의 재조사 과정에

    7) 이중환과 목호룡의 친분에 대해서는 『경종실록』경종 2년 4월 17일(신미) 및 경종 3년 5

    월 11일(기축)의 실록 기사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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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김일경과 목호룡은 대역죄로 처형을 당하여고, 이중환은 처남인 목천임(睦天

    任)과 함께 수사망에 올랐다. 특히 집안이 남인의 핵심이었고, 노론세력을 맹렬하

    게 비판하다가 처형을 당한 이잠(李潛, 이익의 형)의 재종손이라는 점까지 불리하

    게 작용하여, 1726년(영조2) 이중환은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이중환은 유배에서 풀려나지

    만 바로 그 해에 사헌부의 논계(論啓)로 다시 절도(絶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영조의 즉위라는 정국의 전환기에 이중환은 당쟁의 후폭풍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

    었던 것이다. 유배 후에도 이중환은 정치 참여를 포기할 만큼 당쟁의 상처는 컸다.

    ‘서울은 사색(四色)이 모여 살므로 풍속이 고르지 못하며, 지방을 말하면 서·북 삼

    도는 말할 것이 없고, 동·남 오도에 사색이 나뉘어 살고 있다.’8) 거나, ‘보통 사대

    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죄없는 자를 가

    두고, 권세를 부려 영세민을 침노하기도 한다. 자신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남이 자기를 논의함을 미워하고 한 지방의 패권 잡기를 좋아한다. 다른 당파와는

    같은 고장에 함께 살지 못하며, 동리와 골목에서 서로 나무라고 헐뜯어서 측량할

    수가 없다.’9)고 한 것은 이중환의 당쟁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중환은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좌절 속에서 전국을 방랑했다. 30여 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는 불우한 신세였지만, 우리 산천의 모습을 정리하고 시대를 살아간

    인물과 대화를 하며 아픔을 달랬다. 그리고 불후의 저술 『택리지』를 세상에 내

    놓았다. 이중환은 30대 후반에 유배된 후부터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 간 전국을 방랑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택리지에 담았다. 택리지를 저술한 정확한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저자 자신이 쓴 발문에서 ‘내가 황산강

    (黃山江) 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팔괘정(八卦亭)에 올라 더위

    8) 『擇里志』,「卜居總論」, 人心

    京城則四色合聚 俗睡盱不均 而外方則捨西北三道 四色分處 於東南五道之間

    9) 『擇里志』, 「卜居總論」, 人心

    大凡士大夫所在處 人心無不壞敗 植朋黨 以收遊客 張權利 以侵小民 旣不能檢飭 又惡人議己

    皆喜獨觀 一方或不能同處 一鄕則里 閈毁叵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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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하였다’10)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적힌 백양(白

    羊)은 신미년(1751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61세 되던 무렵에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3. 「팔도총론」에 나타난 역사인식

    택리지는 크게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총론(總論)의 네 분야로 나누어져 있다. 사민총론 에서는 사대부의 신분이 농공

    상민(農工商民)과 갈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 사대부의 역할과 사명, 사대부가 살

    만한 곳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사민총론을 앞머리에 쓴 것은 이중환의 사대부적

    인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중환은 ‘사대부는 살 만한 곳을 만든다. 그러나 시

    세(時勢)에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고 지역에 좋고 나쁨이 있으며 인사(人事)에도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나는 시기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본 저술의 주

    요 목적이 실세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면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

    아보는 것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팔도총론 에서는 우리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개

    관한 다음, 당시의 행정구역인 팔도의 산맥과 물의 흐름을 말하고 관계있는 역사

    적 인물과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팔도총론」에서는 우리 역사의 시작부터를 언급하고 있다.

    「곤륜산 한 지맥이 대사막의 남쪽으로 뻗어 동쪽으로 의무려산이 되었고, 여기

    에서부터 크게 끊어져 이에 요동(遼東)의 들이 되었다. 들을 지나서 솟아 백두산

    이 되었는데, 『산해경』에서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라는 것이 이곳이다.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달려가며 두 강을 끼었고, 남쪽을 향하여 영고탑(寧固塔)이 되

    었으며, 등 뒤로 한 가지를 뻗어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되었다. 팔도가 있는데, 평안

    10) 『擇里志』, 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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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는 심양과 이웃하였고, 함경도는 여진과 이웃하였으며, 다음으로 강원도는 함경

    도와 이어졌다. 황해도는 평안도와 이어졌고, 경기도는 강원도와 황해도의 남쪽에

    있다. 경기도의 남쪽은 충청도 및 전라도이며, 전라도의 동쪽은 바로 경상도이다.

    경상도는 바로 옛날 변한ㆍ진한 땅이었고, 경기ㆍ충청ㆍ전라도는 바로 옛 마한과

    백제 땅이었다. 함경ㆍ평안ㆍ황해도는 바로 고조선ㆍ고구려 땅이었고, 강원도는 별

    도로 예맥 땅이었다. 그 흥하고 멸망함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나라 말기에 태

    조 왕건이 나가서 삼한을 통합하여 고려를 세웠으며, 우리 왕조가 운(運)을 계승

    하였다. 동ㆍ남ㆍ서쪽은 모두 바다이고, 홀로 북쪽 한 길만이 여진ㆍ요동ㆍ심양과

    통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으며, 그 백성은 유순하고 근신한다. 지역이 길이는

    뻗쳐 3천리를 재촉하나, 동서는 천 리도 못된다. 바다와 닿은 남쪽은 (중국) 절강

    성의 오현ㆍ회계현의 사이와 맞닿을 수 있다. 평안도의 북쪽 의주는 국경 수읍(首

    邑)이며, 대략 청주(靑州)와 당면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대저 일본과 중국의 사이

    에 있다.」11)

    이중환은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팔도의 각 지

    역에서 존재했던 국가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어서 고려 태조의 삼한 통합, 조선의

    고려 계승 등 역사적 뿌리를 기록하고 있다. 팔도에 관한 기록이면서도 우리 민족

    의 뿌리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데, 그래서인지 단군에 관한 기록도 매우

    자세하다.

    11) 『택리지』, 八道總論

    崑崙山一枝 行大漠之南 東爲醫巫閭山 自此大斷 是爲遼東之野. 渡野 起爲白頭山 卽山海經

    所謂不咸山 是也. 精氣北走千里 挾二江 向南爲寧固塔 背後抽一枝 爲朝鮮山脈之首. 有八道

    曰平安 隣瀋陽 曰咸鏡 隣女眞 次則曰江原 承咸鏡. 曰黃海 承平安 曰京畿 在江原黃海之南.

    京畿之南則曰忠淸及全羅 全羅之東 卽慶尙也. 慶尙 卽古卞韓辰韓地 京畿忠淸全羅 卽古馬

    韓百濟地. 咸鏡平安黃海 卽古朝鮮高句麗地 江原別爲濊貊地. 其興滅未詳 唐末王太祖 出而

    統合三韓 爲高麗 而我朝繼運矣. 東南西皆海 獨北一路 通女眞遼瀋. 多山少野 其民柔謹. 局

    促長亘三千里 東西不滿千里. 際海而南者 可値浙江吳會之間. 平安之北義州 爲界首邑 約可

    當靑州. 國大抵 在日本中國之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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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요임금 때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평안도 개천현 묘향산 박달나무 아래

    석굴에서 변화하여 태어났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고 마침내 구이(九夷)의 군장

    이 되었는데, 연대와 자손은 기록할 수 없었다. 후에 기자가 나와서 조선에 봉해져

    서 평양을 도읍으로 삼고 손자 기준(箕準)에까지 이르렀는데, 진나라 때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축출 되었다. 바다를 건너 전라도 익산군에 도읍을 옮기고, 이름하

    기를 마한이라 하였다. 기씨 땅의 경계는 『사기(史記)』에 상세하지 않지만, 진한

    ㆍ변한과 더불어 이를 삼한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한 나라 선제 때 일어나, 경상도

    를 다 점유하였다. 진한ㆍ변한 여러 지역을 신하로 복종시켜, 신라라 이름 하고 경

    주를 도읍으로 삼았다. 박(朴)ㆍ석(昔)ㆍ김(金) 세 개 성씨가 다시 번갈아가면서

    왕이 되었다. 위씨는 한나라 무제 때 멸망했다. 한나라에서 백성만 옮겨가고 땅은

    버림에 미쳐, 주몽이란 자가 말갈로부터 평양에 근거를 두어 고구려라 이름하고

    칭하였다. 주몽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 온조가 또 한수(漢水) 이남에 나누어 근거

    하여, 마한을 멸망시키고 백제라 이름 하였으며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당나라 고종 때 멸망하였다. (당나라에서) 땅을 버리고 철수하여 돌

    아가자, 두 나라 땅은 다 신라로 들어왔다. 말기에 궁예와 견훤이 나눈 바가 되었

    는데, 고려에 이르러 그것을 통일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건치연혁의 대략이다

    .」12)

    이중환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역사를 언급한 다음에는 삼한의 역사

    를 기술하고 있다.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한 기자조선의 정통을 마한이 계승했다

    12) 『택리지』, 「八道總論」

    古堯時 有神人 化生於平安道价川縣妙香山檀木下石窟中. 名曰檀君 遂爲九夷君長 年代子孫

    不可記. 後箕子出 封于朝鮮 都平壤 至孫箕準 秦時 爲燕人衛滿所逐. 赴海遷都於全羅益山郡

    號爲馬韓. 箕氏地界 不詳於史氏 與而辰卞 是爲三韓. 赫居世 興於漢宣帝時 盡有慶尙道 臣

    服辰卞諸地 號新羅 都慶州 朴昔金三姓 更迭而爲王. 衛氏 亡於漢武帝時 及漢移民棄地 有

    朱蒙者 自靺鞨 據平壤 號稱高句麗. 朱蒙沒 其次子溫祚 又分據漢水以南 滅馬韓 號百濟 都

    扶餘. 高句麗與百濟 俱滅於唐高宗時 棄地撤歸 二國地 盡入新羅. 末爲弓裔甄萱所分 至高麗

    一之. 此我國建置沿革之大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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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인식은 조선후기 남인 실학자들의 대체적인 역사인식이었다.13) 이것은 이익의

    『택리지』 서문에서 ‘기자가 은나라로부터 이 지역에 봉(封다)함을 받은 다음 8

    개 조목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 문질(文質)을 숭상하던 남은 교화가 지금에도

    없어지지 않았는 바 정전(井田)을 그었던 자취와 희옷을 입는 풍습에서 갖가지로

    알 수가 있다.’고 하여, 우리나라가 기자조선의 문화를 전수받은 점을 강조한 것과

    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중환이 총론에서 언급한 기자조선에 대한 내용은 「팔도

    총론」의 평안도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서술하고 있다. ‘기씨(箕氏)가 천 년, 위씨

    (衛氏) 및 고씨(高氏)가 800년 동안 도읍하였고, 한 나라의 중요한 진(鎭)이 된

    지도 천 년이 넘었다. 그리고 이 지방에는 아직도 기자가 만든 정전의 유지(遺址)

    와 기자의 무덤이 있다. 나라에서는 묘 곁에 숭인전(崇仁殿)을 짓고, 선우씨(鮮于

    氏)를 기자의 자손이라 하여 전관(殿官)으로 삼아 세습시켜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

    다. 중국 곡부(曲阜)의 공씨가 공자묘(孔子廟)를 받드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고

    하여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다.

    한편 「복거총론」의 ‘산수’ 항목에서도 이중환은 기자의 교화로 말미암아 임진

    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해 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14) 이어

    서 숙종대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운 상황을 기록하여15)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

    을 강조한 대목이 나타난다. 흔히 이중환은 실학자로 분류되지만 대명의리론의 문

    제에 있어서는 철저히 중화론자(中華論者)였다고 볼 수 있다. 「팔도총론」의 후

    반부는 고려의 역사가 중심을 이룬다.

    13) 특히 이중환의 재종형인 李瀷은 기자에서 마한으로 이어지는 三韓正統論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한영우, 18세기 전반 李瀷의 사론과 한국사 이해 조선후기 사학사 연구(일지사, 1989), 203~205쪽.

    14) 『택리지』, 「卜居總論」, 山水

    在海外別是一區 故箕子不欲臣周 至此爲君 是爲忠臣立節之鄕 流風餘韵 至我朝 雖服于淸

    然君臣上下 以不忘壬辰再造之恩 爲大義理

    15) 『택리지』, 「卜居總論」, 山水

    肅廟朝 適當甲申三月 明兦之周甲 建大報壇於宮城後苑之西 以太牢特祀萬歷皇帝 而仍命歲一祭焉 今上庚午又祔祭崇禎皇帝於傍 甚盛擧也 祭必以夜 而祭時雖天晴 輒陰風肅烈 濃雲晦

    暝 過祀卽淸明 最爲可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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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이전은 삼국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하여 문적(文蹟)이 적어, 고려

    부터에야 비로소 기록할 수 있었다. 고려 때는 사대부의 이름이 아직 크게 세워지

    지 않아서, 서리로부터 경상(卿相)이 된 자가 많이 발생했다. 한 번 경상이 되면

    그의 아들과 손자도 사대부가 되어, 다 경성에 집을 두어, 경성이 마침내 사대부의

    연못과 늪이 되었다. 외읍인(外邑人)은 드물게 조정에 등용된 자가 있었는데, 쌍기

    가 과거 제도를 만들어 선비를 취함에 미쳐서는 외방인도 점점 조정에서 두드러진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북에는 무신이 많고, 동남에는 문사가 많았다.

    말기에 문풍이 크게 떨침에 미쳐서는, 간간이 중원(中原)에서 지은 과거에 합격한

    자도 있었는데, 이것은 원나라와 통한 것의 효과였다. 지금에 이르러 세상에 대족

    (大族)으로 칭해지는 것은, 고려 경상(卿相)의 후예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대

    부의 자손이 갈라진 내력도 고려부터 비로소 기술할 수 있었다.」16)

    고려의 역사 서술에서는 쌍기가 과거제를 만들어 지방 출신도 관직에 등용된

    점을 지적한 것과, 이중환 당시 대족이 모두 고려시대 경상의 후예라고 지적한 것

    이 눈길을 끈다. 이중환이 『택리지』를 집필할 당시가 정치적으로 실세했기 때문

    인지 고려왕조의 멸망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고 조선의 건국을 부정적으로 인식

    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팔도총론」의 경기 개성부를 언급한 부분에서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홍무 임신년에 우리 태조가 공양왕에게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왕씨의 신하였던 세가(世家)와 대족(大族) 중에서 태조에게 복

    종하지 않는 자는 그냥 개성에 남아 따라가지 않았는데, 그들이 살던 동리를 지방

    사람들이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태조는 그들을 미워하여 개성 선비에게는

    16) 『택리지』, 「八道總論」

    新羅以前 三國戰爭 不休 然文蹟少 自高麗 而始可述矣. 高麗時 士大夫之名 未大立 多起自

    胥吏而爲卿相者. 一爲卿相 則其子與孫 爲士大夫 咸置家於京城 京城遂爲士大夫淵藪. 而外

    邑人 罕有登于朝者 及雙冀制科擧取士 外方人稍稍得顯仕于朝. 然西北多武臣 東南多文士矣.

    及季世文風大振 間有中中原制科者 此通元之效也. 至今 以大族稱於世者 多高麗卿相之後裔

    則士大夫之胄派來歷 自高麗 而始可述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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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17)거나, 정도전을 강하게 비판하고 정몽

    주의 죽음을 애석해 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가. 「가장 통탄할 것은 정도전이 목은 이색의 문인으로서, 고려말기에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왕검(王儉)과 저연(褚淵)이 하던 짓을 본받은 일이다. 나라를 팔

    아서 사리를 채우고 스승을 해하며 벗을 죽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가 망하자 왕

    씨의 종친을 없애는 계책까지 내었다. 자연도(紫燕島)에 귀양 보낸다고 핑계 대고

    서 큰 배 한 척에다 여러 왕씨를 가득 태워 바다에 띄운 다음, 몰래 보자기(燹水

    者)를 시켜 배 밑에 구멍을 파서 가라앉게 한 것이다.」

    나. 「성 안에 있는 선죽교(善竹橋)는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곳이다. 공양왕 때

    정공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혼자만 태조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 문하의

    여러 장수가 조영규를 시켜 다리 위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그러자 고려의 왕업

    이 드디어 이씨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본조에서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

    여 용인(龍仁)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자, 곧 벼락이 내려 부서져 버

    렸다. 정씨의 자손이 고려의 문하시중이라는 직명으로 고쳐 쓰기를 청하여 다시

    세웠더니 지금까지 무사하다. 충성스러운 혼과 굳센 넋이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또한 두려워할 일이다.」

    「팔도총론」의 각 도에 대한 기록에서도 지리적인 내용 보다는 경우에 따라

    서는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인 장치로서 지리를 언급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역사적인 상황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자신의 관점을 기록하는 경우

    가 다수 나타난다. 평안도 부분에서는 광해군과 박엽의 관계를, 함경도 부분에서

    함흥차사에 대한 내용을, 강원도 부분에서 태종과 원천석의 관계에 대해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

    17) 『택리지』, 「八道總論」, 京畿

  • - 12 -

    특히 박엽과 같이 역사적으로 비중이 크지 않는 인물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기록에서 보이듯, 이중환은 지리를 인물과 연결시키는 일정한 선을 넘어 지나치게

    자신의 이야기로 빠지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 있다. 박엽(朴燁:1570~1623)에 대해

    이중환은 우선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성천부에 와

    피란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부사 박엽에게 객관(客館) 옆 강선루(降仙樓)를

    크게 수리하게 하였다. 누각(樓閣)이 300여 칸이나 되고 지음새가 굉장하여 팔도

    누각 중에 으뜸이다. 강선루 앞에 흘골산(紇骨山) 12봉이 있으나 돌빛이 아담스럽

    지 못하고, 강이 얕고 빠르며 들판 또한 비좁아 평양보다 훨씬 못하다.’18)고 기록

    하여 지리와 인물을 가볍게 소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과도하게 자신

    이 알고 있는 역사적 일화를 풀어놓고 있음이 나타난다.

    「광해군은 박엽의 재능을 높이 사 평양 감사로 발탁하였다. 그때 만주에서는

    난을 꾸며 서쪽 방면에 일이 많았으나, 박엽의 재주와 슬기를 신임하여 무릇 10년

    동안이나 벼슬을 갈지 않았다. 박엽은 재물을 많이 써서 첩자를 잘 이용하였다. 한

    번은 지방을 순시하다가 구성(龜城)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청병(淸兵)이 성을 포

    위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호인(胡人) 하나가 성을 넘어 박엽의 침소에 들어와

    그의 귀에다 무엇을 말하고 갔다. 다음날 아침 박엽이 사람을 시켜, 술을 가지고

    가서 청병을 먹이도록 하였다. 또 쇠고기로 긴 꼬치적을 만들어 청국 군졸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는데,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군졸의 수와 같았다. 청나라 장수가

    크게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박엽을 신이라 하며, 곧 강화한 다음 포위를 풀고 가

    버렸다. 계해년에 박엽의 비장(裨將) 한 사람이 틈을 타 귀띔하기를, “지금 조정은

    패할 것입니다. 공은 지금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이니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청국과 내밀히 결탁하였다가, 만약에 조정에 일이 벌어지거든 이 지역을

    18) 『택리지』, 「八道總論」, 平安道

    光海 壬辰時 奉顧社主 避亂於府中 及卽位 使府使朴燁 大修降仙樓於客館傍樓 爲三百餘間

    結構宏壯 爲八道樓觀之首 前有紇骨山十二峯 然石色不雅 江旣淺駛 野又狹隈視平壤逈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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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국에 바치고 일부는 떼어서 공이 차지한다면 자립하기에 넉넉할 것입니다만 그

    렇지 않으면 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이에 박엽은 “나는 문관이다. 어찌

    나라를 배반하는 신하가 되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그 사람은 곧 박엽을 버리

    고 도망쳤고 얼마 후 인조반정으로 박엽은 임소(任所)에서 죽임을 당했다.」19)

    위와 같은 기록 방식은 「팔도총론」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팔도의 서술 순서

    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이다. 강원도에

    관한 기록 중에는 ‘누대(樓臺)와 정자(亭子) 등 훌륭한 경치가 많다. 흡곡 시중대,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청초호,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을 사람들이 관동팔경이라 부른다.’고 한 내용과 ‘지역이 또한 서울과

    멀어서, 예로부터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다. 오직 강릉에는 과거에 오른 사람이 제

    법 나왔다.’고 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에 관한 항목에서는 ‘좌도(左道)

    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비록 군색하게 살아도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

    우도(右)道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부유하나 호사하기를 좋아하고 게을러서 문학

    을 힘쓰지 않는 까닭으로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다.’라고 하였다. 경상도는 낙동강

    을 기준으로 좌도와 우도를 나누었는데, 이중환은 경상좌도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

    을 보였다. 이중환은 남인인 만큼 남인의 뿌리가 되는 영남지역 출신 인물에 대해

    서는 지역별로 자세히 설명하였다. 대표적으로 예안의 이황, 안동의 유성룡, 상주

    의 정경세와 이준, 성주의 김우옹과 정구, 삼가의 조식, 안음의 정온의 행적을 언

    급하고 있다.

    충청도에 대해서는 ‘남쪽의 반은 차령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19) 『택리지』, 「八道總論」, 平安道

    然光海 以燁爲能擢 爲平安監司 時値滿洲作梗西路多事 燁有才諝 光海倚以爲重 凡十年不遷

    燁多用貨 善用間 巡到龜城 適淸兵圍城 夜半 有一胡人 踰城入燁寢所 附耳語而去 明朝 燁

    令人持酒往犒 又以牛肉作長串炙 領於軍卒 不贏不縮 恰當軍數 胡將大驚怪 以爲神也 卽講

    和解去 癸亥間 燁裨將一人 請間說 以朝廷將敗 公主上寵臣 必與其禍 不如暗與淸結 若朝廷

    有事 則納地也 割據足以自存 不然則難乎免矣 燁曰 吾文官也 豈可作叛臣 不聽 其人卽棄燁

    而逃 未幾仁祖反正 卽發使斬燁於任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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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

    다. 그리고 여러 대로 서울에 사는 집으로서 이 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서

    생활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는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 만하다.’고 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

    하였다. 경기도에 관한 기록 중에는 강화부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다. 강화부의 자

    연적 조건을 서술한 다음, 고려시대 원나라를 피해 10년간 도읍지가 되었던 것, 조

    선시대 바닷길의 요충이라 하여 유수부로 삼은 내력, 병자호란과 강화도와의 관계,

    숙종대에 문수산성을 쌓은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4. 「복거총론」과 「사민총론」에 나타난 역사인식

    「팔도총론」 다음의 「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조건을 지리(地

    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의 네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살 만한 곳을 택하는 데 있어 첫째 조건으로 꼽은 것은 ‘지리’였다. 여기서 지리라는 것은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한 곳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지리가 아니라 풍수학적인 지리를 의미한다. 즉 ‘지리를 논하려면 먼저 수구(水口)

    를 보고, 다음에는 들판과 산의 형세를, 이어 흙빛과 물의 흐르는 방향과 형세를

    본다’고 기록하였다. 이어 ‘생리’를 살 만한 곳의 주요 조건으로 들었다.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닌 까닭으로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라고 생리를 조건

    으로 제시하였다. 기름진 땅으로는 전라도의 남원, 구례와 경상도 성주, 진주를 제

    일로 꼽았으며, 특산물로는 진안의 담배, 전주의 생강, 임천과 한산의 모시, 안동과

    예안의 왕골을 들었다.

    세 번째로는 ‘인심’을 들었다. 저자는 ‘그 곳 풍속이 좋지 못하면 자손에게도 해

    가 미친다’ 하여 풍속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팔도의 인심을 서로 비교하여 기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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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였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이나 풍속이 다른 점을 강조하면

    서, 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여 인심이 정상이 아님을 통탄하

    였다. ‘오히려 사대부가 없는 곳을 택해서 살며 교제를 끊고 제 몸이나 착하게 하

    면 즐거움이 그 중에 있다’고 한 대목에서도 보이듯이 이중환에게 있어서 집권 사

    대부의 권위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인심’ 항목은 남인 당인의 입장에 있었

    던 이중환의 당쟁에 대한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데, 실제로는 당쟁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이 분당된 것부터 시

    작하여 남인과 북인의 분열, 숙종대의 경신환국, 노론과 소론의 분열에 이어, 영조

    의 탕평책 성립까지를 압축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인심’ 부분은 마치 이건창의

    『당의통략』을 압축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당쟁의 폐

    해를 신랄히 지적하였다.

    「대개 당색이란 것이 처음에는 매우 자질구레한 데서 일어난 것이나, 자손들

    이 그들 조상의 논의를 지킴으로써 200년 동안 마침내 깨뜨릴 수 없는 굳은 당파

    가 되었다.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분열한 지가 겨우 40여 년밖에 안 되어, 간혹

    형제나 숙질간에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자도 있다. 명색이 한번 갈라지면 심장

    이 초월(楚越) 같아서, 같은 색목끼리는 서로 의논하여도 지친 간에는 서로 말하

    지 않는다. 이에 이르러 윤기도 없어진 셈이 된 것이다. 근래에는 사색이 조정에

    함께 나아가서 오직 벼슬만 할 뿐이고, 각자 옛부터 지켜 오던 의리는 모두 고깔

    씌우듯 숨겨 버렸다.」20)

    이어서 이중환은 ‘개벽 이래로 천지간 여러 나라 중에 인심이 일그러지고 무너

    져 본성을 잃었다고 하지만 지금의 당파로 인한 환난과 같은 적은 없었다. 이를

    20) 『擇里志』, 「卜居總論」, 人心

    蓋黨色 初起甚微 因子孫守其祖先之論 二百年來 遂爲牢不可破之黨 老少則自西人分裂者 纔

    四十餘年 故或有兄弟叔姪間 分爲老少者 名色一分 則心腸楚越 與同色相議者 至親間不相

    及至是 則無有天常彝倫矣 挽近以來 則四色咸進 惟取官爵 將舊來各守之義理 一倂牟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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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한 모퉁이 탄환만한

    나라가 비록 작다 하지만, 생민이 100만인데 장차 그 본성을 다 잃어서 구제할 수

    없게 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다.’21)고 하여 당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하

    게 피력하였다. 특히 ‘지금의 당파로 인한 환난과 같은 적이 없었다.’고 하여 자신

    의 시대가 당쟁의 폐단이 극심한 시대임을 인식하고 있다.

    마지막 조건으로는 이중환은 ‘산수’를 들면서 ‘집 근처에 유람할만한 산수가 없

    으면 정서를 함양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저자는 산수의 경치가 훌륭한 곳으로는

    영동을 으뜸으로 삼았다.

    택리지 이전의 지리책은 각 군현별로 연혁,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역원, 능묘 등으로 나누어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택리지는 전국을 실지로 답사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을 토대로 한 설명과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또 단순한

    지역이나 산물에 대한 서술에 그치지 않고 사대부가 살 만한 이상향을 찾는 데 초

    점을 맞추었다. 지역구분 방식에서도 이중환은 각 지방이 지닌 개성과 질을 중요

    시하여 생활권 중심의 등질지역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국토를 생활권 단

    위로 지역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로서 생각한 것이 산줄기였다. 각 지역들은

    하천을 통해 동일한 생활권으로 연결되지만 산줄기들은 이 하천유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중환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과 이용에 대하

    여 자세한 관찰을 하고 있다. 또한 실생활에 이용될 수 있는 실용적인 측면을 강

    조한 면에서 종전의 지리지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또 각 지방의 토지 비옥도와

    산물, 수운과 교역 등 상업과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정치, 경제, 사회에 관

    한 폭넓은 식견을 피력하였다. 또한 누구나가 쉽고 흥미롭게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서술하였다. 이중환은 풍속이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

    을 강조하면서도 당쟁의 폐해에 따른 인심의 타락상을 경고하였다. 흔히 영조시대

    21) 擇里志』, 「卜居總論」, 人心

    自開闢以來 天地間萬國中 人心之乖敗 陷溺直失其常性者 莫如今世朋黨之患 遵是而無改則

    其將爲何如世界耶 一隔彈丸之國 雖蕞爾 生靈則百萬 將盡失其心性 無以救之 其亦可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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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탕평책의 시행으로 당쟁이 어느 정도 종식된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중환이 체감

    하는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이중환은 전형적인 남인 학자로 영조대 노론

    중심의 정치운영에서는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고, 택리지에서는 당쟁에 대해 부정적인 그의 시국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택리지』가 완성되자 여러 학자들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많은 사람들이

    베껴서 읽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책의 제목이 팔역지(八域志), 팔역가거지(八域可居志),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진유승람(震維勝覽) ,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요람(形家要覽) 등 10여 종이나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택리지를 필사하면서 제목을 자신의 취향대로 붙인 것이다. ‘둥국산수록’, ‘진유승람’ 등은 산수를 유람하기에 좋다는 의미에서, ‘동국총화록’은 우리나라의 물산이

    종합되었다는 의미로, 상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짐작된다. ‘형가요람’은 풍수지리에

    익숙한 사람이 지은 제목으로 보인다. 다양한 제목은 택리지가 그만큼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기록들

    『택리지』의 역사인식에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

    란에 관한 기록이 상세한 것이다. 팔도총론에는 지역을 개관하는 도중에,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에 관한 연고가 있으면 이에 대해 자세한 서술을 가하고 있는 장면을

    다수 볼 수 있다. 이중환이 살았던 시기가 양란이 일어난 지 100여 년 이상이 지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중환이 전쟁에 대해 상세한 기억들을 기록하고 있음이 주목

    된다. 먼저 전라도의 진도에 관한 기록을 보자.

    「해남현 삼주원(三洲院)에서 돌맥이 바다를 건너 진도군(珍島君)이 되었는데

    물길로 30리이며, 벽파정(碧波亭)이 그 목이 된다. 삼주원에서 벽파정 까지 물속에

    가로 뻗친 돌맥이 다리(梁) 같은데, 다리 위와 다리 밑은 끊어 지른 듯한 계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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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되었다. 바닷물이 밤낮 없이 동에서 서쪽으로 오며 폭포같이 쏟아져서 물살이

    매우 빠르다. 임진년에 왜적의 중 현소(玄蘇)가 평양에 와서 의주 행재소에 편지

    를 보내 “수군 10만 명이 또 서해로 오면 마땅히 수륙으로 함께 진격할 터인데,

    대왕의 수레는 장차 어디로 갈 것입니까?” 하였다. 이때 왜적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던 참이었다. 그때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 위에 머물면서 쇠사슬

    을 만들어 돌맥 다리에 가로질러 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적의 전선이 다

    리 위에 와서는 쇠사슬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낮은 곳이 보이지 않으므로, 거꾸로 엎어진 것은 보지 못하고

    다리를 넘어 순류에 바로 내려간 줄로 짐작하다가, 모두 거꾸로 엎어져 버렸다. 또

    다리 가까이엔 물살이 더욱 급하여, 배가 급류에 휩싸여 들면 돌아 나갈 틈이 없

    으므로 500여 척이나 되는 왜선들이 일시에 모두 침몰했고 갑옷 한 벌도 남지 않

    았다.」22)

    고 하여 이순신이 진도의 해협에 쇠사슬을 설치하여 왜적을 물리친 상황을 기

    록하고 있다. 이 정도의 기록은 진도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뒤

    이어 이 전투에 연관된 명나라 장수 심유경, 진린, 양호의 이야기 까지 자세히 기

    록을 하고 있다. 기록을 보자.

    「그때 심유경(沈惟敬))은 왜적의 사자를 꾀어서 평양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

    22) 『택리지』八道總論, 全羅道

    自海南縣三洲院石脈渡悔爲珍島郡 水路三十里而碧波亭實當其口水中石脈 自院至亭橫亘如梁

    而梁上梁下截如階級

    海水日夜 自東趨西 如垂瀑 而甚急 壬辰倭僧玄蘇 至平壤 抵書義州 行在所曰 水軍十萬 又

    從西海來 當水陸幷進

    不審 大王龍馭自此何之云云 時倭水軍 自南海北上 水軍大將李舜臣 住剳海上 打鐵銷橫亘於

    石梁上 以俟之

    倭船至梁上宵於鐵銷 卽倒覆於梁下 梁上船 不見低處 不知其倒覆 意其踰梁而順流直下皆倒

    覆 且水勢近梁益急

    船已入急流中不暇回旋 而五百餘艘 一時全沒隻 甲不存蓋

  • - 19 -

    였다. 왜적은 수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함께 북상할 계획이었으므로, 거짓으로

    약속을 지키는 척하면서 후일을 기다렸던 것이나, 수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하

    여 이여송(李如松)이 양쪽에서 서로 속이는 틈을 타 왜적을 격파하였으니, 이것은

    천운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왜적의 전선을 바다 가운데 엎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수십 일이 되지 않아 왜적의 수군이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적의 수

    군이 도착하였더라면 왜적이 어찌 심유경과의 약속을 지켜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

    으랴. 그때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구구하게 “왜국을 왕으로 봉하고 조공하는 것도

    허가한다”라는 말로써 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했으니 참으로 웃을 일이다.

    그런즉 이여송이 평양에서 전승한 공은 바로 이순신의 힘이었다. 그 후 명나라 장

    수 진린(陳璘)이 군사를 이끌고 바다 위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다. 병신년과 정

    유년 사이에 왜적의 수군이 바닷가 여러 고을을 잇달아 쳐들어왔지만 이순신이 수

    전(水戰)을 잘하여 여러 번 왜적을 쳐부수었다. 그리하여, 왜적의 머리를 노획하면

    번번이 진린에게 넘겨주어 공을 아뢰게 하였다. 그는 크게 기뻐하여 우리 조정에

    편지를 보내 “통제사는 천하를 경륜할 만한 재주이며, 나라와 임금에게 한없는 공

    이 있습니다” 하였다. 진린은 이순신의 덕으로 왜적의 머리를 가장 많이 노획하여

    무술년에 명나라 군사가 철수해 갈 때 여러 장수 중에서 왜적의 머리를 가장 많이

    바쳤다. 후일 명나라 사기(史記)에 동정(東征)한 공을 의논한 조목을 보니 진린을

    첫째라 하여 땅을 나누어 봉하기까지 하였는 바, 이것이 이순신의 공이라는 것을

    중국에서 어찌 알겠는가. 양호(楊鎬)는 공이 있었는데도 남의 참소를 받아 체포되

    어 돌아갔고, 진린은 남의 힘으로 공을 이루어 홀로 많은 상을 받았으니, 명나라도

    상주고 벌주는 데 질서 없음이 이와 같았다.」23)

    23) 『택리지』八道總論, 全羅道

    其時 沈惟敬 紿倭使久留平壤 倭則欲待水軍偕上 故又佯視守信欲紿之 以湏後而水軍久不至

    李如松於兩相紿中得間 而襲破之 此天也 苟非舜臣覆倭於洋中 則不越數十日 倭船可達平壞

    水軍至 則倭豈守惟敬之約 而不縱兵乎 其時又不知此 以區區封貢之說 謂倭情可得良 可晒也

    然則如松平壞之功 卽舜臣之力也 其後 天將陳璘 駐兵海上 丙申丁酉間 倭以水軍連犯海上諸

    縣 舜臣善水戰 屢破倭 獲倭級 輒以與璘使上功 璘大喜移書朝堂曰 統制使 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云云 璘以舜臣 故得賊級最多 及戊戌撤還 璘所上級 獨多於諸天將 後見明史論

  • - 20 -

    위의 기록에서는 진도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이여송의 평양성 전투까지 연

    계시키고 있음이 나타난다. 「팔도총론」의 경기 벽제령에 대한 기록에서는 이곳

    이 ‘임진년 왜란 때 이여송이 패전한 곳이다.’고 하면서 벽제관 전투의 상황을 언

    급하고 있다.

    병자호란에 대한 기록은 「팔도총론」 경기, 강화부의 기록에서 자세하다. 정

    묘년(1627년) 청나라 군사가 황해도 평산에 와서 형제국이 되기로 하고 강화한 다

    음 물러간 사실에서 시작하여, 병자년(1636년) 보내 청국에서 용골대를 보내 남한

    산성의 형편을 탐지하게 한 것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강화도와는 관계가 없는 병

    자호란의 뒷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중환이 지리지라는 형식을 빌려서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을 최대한 풀어놓는 장면은 『택리지』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만큼 역사에 대해 최대한 서술하고 싶은 이중환의 모

    습을 접할 수가 있다.

    6. 함흥차사와 홍순언 관련 기록 분석

    1) 『택리지』와 함흥차사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택리지』에서는 지역 설명을 해 나가면서 그 지역에 관

    계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 있으면 이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언급한 경우가 많다.

    태조와 태종의 갈등을 상징하는 함흥차사(咸興差使)에 관한 이야기도 함경도 부분

    에 자세히 나온다. 먼저 『택리지』의 언급을 보자.

    「들 복판에 우리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옛 집이 있다. 지금은 그 안에다

    東征功 以璘爲首 而至裂土受封 中國又何知此舜臣之功也 楊鎬有功 而被逮 陳璘因人而成功

    而獨受豊賞 皇明賞罰之顚倒 有如是矣

  • - 21 -

    태조의 화상(畵像)을 모셔 놓았고,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수호하며 때맞추어 제사

    하여, 본조의 풍패분유(豊沛賬楡)24)의 고을로 삼았다. 태조 정축년(1397년)에 신

    덕왕후 강씨 승하하자 공정대왕(恭定大王:태종)은 하륜의 계책대로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와 동시에 세자 방석이 세자의 지위를 내어놓았으나,

    그의 형 방번과 함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공정대왕(恭

    靖大王: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가까운 신하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가 버렸

    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공정대왕이 또 공정대왕(恭定大王)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공정대왕 왕위에 오른 후 태조에게 회란(回罽)25)하기를 청하는 사신을 보내면 가

    는 대로 모조리 베어 죽였다. 이러기를 무릇 10년이나 하였다. 공정대왕이 걱정한

    나머지 태조가 세력을 잡기 전, 한 동리 친구였던 박순(朴淳)을 함흥에 사신으로

    보냈다. 박순은 먼저 새끼 딸린 암말을 구해 가지고 가서, 망아지는 미리 태조가

    있는 궁문이 마주 보이는 곳에 매어 두고 어미 말만 타고 갔다. 궁문 밖에 이르러

    서는 말을 매 놓은 다음 들어가 태조를 뵈었다. 궁문은 그리 깊숙하지 않았다. 말

    하는 동안에 망아지는 어미 말을 바라보면서 울부짖고, 어미 말 또한 날뛰면서 길

    게 소리쳐서 매우 시끄러웠다. 태조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박순이 아

    뢰었다. “신이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타고 오다가 망아지를 마을에 매어 놓았더니,

    망아지는 어미 말을 생각해서 울부짖고 어미 말은 새끼를 사랑하여 저러합니다.

    지각없는 동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지극하신 자애로써 어찌 주상의 심정을 생각

    지 않으십니까?” 태조는 마음이 움직여 한참 있다가 돌아가기를 허락하였다. 그리

    고 “너는 내일 새벽닭이 울기 전에 이곳을 떠나서 오전 중으로 빨리 영흥(永興)

    용흥강(龍興江)을 지나도록 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하

    였다. 박순은 그날 밤에 말을 달려 되돌아갔다. 태조가 전일에 여러 번 사자를 베

    24)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 패주(沛州) 풍읍(豊邑) 분유(枌楡) 마을이었으므로, 이후

    에는 ‘풍패분유’라는 용어는 제왕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은

    물론이고, 이후에는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에 대해서도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 칭하였

    다.

    25) 왕이 타는 수레를 난가라 하며 수레를 돌리는 것을 회란이라 함.

  • - 22 -

    어 죽였으므로, 태조를 모신 여러 관원과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서로 격분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여러 관원이 박순을 베어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태조는 허락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러 차례 고집하므로 태조는 박순이 이미 영흥을 지나갔으

    리라 짐작하고 “만약에 용흥강을 지났거든 죽이지 말고 돌아오라” 하였다. 사자가

    말을 빨리 달려 강가에 도착하니 박순이 마침 배에 오르는 참이었다. 사자는 박순

    을 뱃전에 끌어내어 베어 죽였다. 박순이 형을 받을 때 사자에게 말하였다. “신은

    비록 죽으나 성상께서는 식언(食言)하시지 말기를 원합니다.” 태조는 그의 뜻을

    불쌍하게 여겨 곧 서울로 돌아간다는 명을 내렸다. 공정대왕 의롭게 여겨 박순의

    충성을 정표(旌表)하고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26)

    위에서 함흥차사에 관한 『택리지』의 내용을 인용했는데, 지리에 관한 정보에

    부연 설명을 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끌어오기 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기

    위한 보조적인 장치로 지리 항목이 등장했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 사건

    에 긴 내용을 할애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주요 내용은 태종이 부친과의 화해를 위하여 함흥으로 보내는 사신을 계속 죽

    이니까 태종의 친구인 박순을 보냈고, 박순은 말과 망아지를 데려가는 지혜를 써

    서 태조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택리지』에서는 박순이

    임무를 성공한 후 죽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태종실록』에는 박순이 조위총

    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섰다가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상호군(上護軍)

    박순을 동북면에 보냈는데, 저쪽 군중(軍中)에서 피살되었다. 순(淳)이 함주(咸州)

    에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 박만(朴蔓)과 주군(州郡) 수령에게 ‘사의(思義)를

    따르지 말라’고 교유(敎諭)하다가, 마침내 저쪽 군중(軍中)에 피살되었다.’고 하여,

    박순이 함흥으로 간 것을 분명하지만, 함흥차사의 임무로 인하여 피살된 것은 아

    님이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함흥차사의 이야기가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26) 『택리지』, 「八道總論」, 咸鏡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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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연려실기술』에는 태조의 ‘함흥주필(咸興

    駐蹕)’이라는 항목에서 함흥차사에 관한 여러 설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때 함흥

    차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성석린, 박순, 무학대사이다. 먼저 성석린이

    주인공인 이야기는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태조의 옛 친구인 성석

    린(成石璘)이 태종에게 자청하여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것과 성석린이 온 것을

    알고 태조가 변색하여,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 아니냐.”

    하자, 성석린이 “신이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이 말을 믿었고, 태조와 태종이 이때부터 화합해졌

    으나, 뒤에 석린의 두 아들은 과연 눈이 멀었다.’고 하여 박순의 이야기와 성석린

    의 이야기가 섞여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함흥차사에 관한 『연려실기술』의 다음 이야기는 박순이 주인공으로 등장하

    는데, 『택리지』의 기록과 유사하다. 그 다음의 주인공은 무학(無學) 대사이다.

    문안사 중에 죽은 사람이 속출하자 무학 대사를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

    고, 태종의 간곡한 청으로 무학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뵈었다. 태조가 노하여 이르

    기를, “너도 또한 나를 달래러 왔구나.” 하니, 무학이 웃으면서 아뢰기를, “전하께

    서는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 빈도(貧道:승려가 겸손하게 자기를 가리키는 말)가

    전하와 더불어 서로 안 지가 수십 년인데, 오늘 특별히 전하를 위로하기 위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였다. 무학은 태조와 수일을 지내며 태조의 믿음을 샀고, 태종

    이 밉겠지만 이제 유일한 혈육이니 환궁할 것을 청하였다. 태조는 돌아갈 의향을

    보였으나 소요산 일대에 머물고 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어지는 이야

    기는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는 과정에

    서 벌어진 일화이다. 태종이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자 하륜 등이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차일(遮日)에 받치는 높은 기둥은 의당 큰 나무를 써

    야 할 것입니다.” 하였고, 결국 태조가 분노의 표시로 쏜 화살이 이 장막에 맞아

    태종이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이다.

    위에서 함흥차사에 관한 『택리지』의 기록을 실록 및 『연려실기술』과 비교

    해 보았다. 이중환은 함흥이라는 지역에 빠질 수 없는 이야기인 함흥차사의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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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였지만, 당시에 유포되던 모든 견해를 다 기록한 것

    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뽑아서 기록하였음을 볼 수가 있다.

    2) 역관 홍순언 관련 기록

    이중환은 『택리지』 곳곳에서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을 언급하였다. 그 중에

    서 눈에 띄는 대목은 역관 출신인 홍순언(洪純彦)에 관한 기록이다. 이중환은 ‘나

    는 석성(石星), 형개(邢玠), 양호(楊鎬), 이여송을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

    한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임진란에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다음 홍순언

    에 관해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의 기록을 보자.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역관 홍순언이 젊었을 때 연경에 들어가서 수천금으

    로 절세 미인을 구하였다. 그러자 중매하는 노파가 밤에 홍순언을 큰 저택으로 인

    도하여 한 처녀를 보게 하였다. 등불을 많이 밝히고 시비(侍婢)도 매우 많았다. 그

    런데 처녀가 홍순언을 보자 그만 우는 것이었다. 까닭을 물으니 처녀가 말하기를

    “아비는 사천(四川) 사람으로 벼슬이 주사主事였습니다. 이번에 부모가 함께 작고

    하였는데, 내 몸을 팔아 반장(返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저는 두 번 시집가지 않

    기로 맹세하였는 바, 오늘 밤에 저를 보고 나면 영 이별이 될 것이므로, 이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홍순언은 그 처녀가 귀한 집 딸인 것을 알고 크게

    놀라서 남매의 예로써 결의하기를 청하였다. 처녀는 사례하면서 응종(應從)하고,

    시비를 시켜 받았던 금을 돌려 주었다. 홍순언은 장사에 부의(賻儀)하기를 청하면

    서 물리치고 나왔다.」

    위의 기록에 의거하면 홍순언이 연경에 들어가 절세미인을 구하는 중에 어느

    노파의 중매로 절세 미인을 만났지만, 그녀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러 가야 함을 알

    고 많은 돈을 주고 돌아왔음이 나타난다. 이어서 『택리지』에는 홍순언이 도와

    준 여인과의 인연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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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임진년에 홍순언이 사신을 따라 병부 상서 석성의 집에 이르니, 석성

    이 홍순언과 함께 후당에 들어가 부인을 보게 하는데 바로 전일에 결의한 여동생

    이었다. 석성이 우리나라를 끝까지 힘껏 도운 것은 홍순언의 의기에 감동한 것이

    나, 필경에는 우리나라의 일 때문에 화를 당했으니 이것은 더구나 제사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석성의 부인이 평소에 손수 비단을 짜서 필(疋)마다 보은이라는 두

    글자를 수놓아 홍순언에게 선사하였는데 가치가 만금이었다. 정유에 선조께서 성

    안에다 형개·양호의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소사(素沙)에서 왜병을 격파한 공로

    에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실

    로 잘못된 일이었다.」

    한편 조선시대 역관들의 행적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정리한 기록인 『통문관

    지』에는 홍순언의 행적이 보다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27) 『통문관지』의 기록을

    따라가 보자.

    「홍순언은 젊어서 불우했으나 의기(義氣)가 있었다. 일찍이 연경에 가다가 통

    주(通州)에 이르러 밤에 청루(靑樓)를 노닐다가 자색이 매우 뛰어난 한 여자를 보

    고 마음에 즐거워하였다. 주인 할미에게 부탁하여 접대하게 하였는데, 그가 소복

    (素服)을 입은 것을 보고 물었다. 말하기를, “제 부모는 본디 절강(浙江) 사람인

    데, 명나라 연경에서 벼슬살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한때에 다 돌아가셔서 관

    이 객관에 있습니다. 저는 외동딸이고 고향으로 모셔가 장사지낼 밑천이 없으므로

    마지못하여 스스로 몸을 팝니다.” 말을 마치자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므로, 공이

    듣고 불쌍히 여겨 그 장례비를 물으니 3백 금을 써야 하겠기에 곧 전대를 털어서

    주고 끝내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여자가 성명을 물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는데,

    27) 通文館志는 조선 숙종 때 사역원의 역관인 김지남과 그의 아들 김경문이 중심이 되어편찬한 책으로, 외교 및 역관 담당 관청인 사역원의 연혁과 관제(官制), 고사(故事), 사

    대교린(事大交鄰)에 관한 외교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 사역원은 고려시대에는 통문관으

    로 불렀기 때문에 제목이 통문관지가 된 것이다. 통문관지의 권7에는 인물 이란 항목을 설정하여 최세진, 홍순언, 김근행 등 역대의 주요 역관들을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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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말하기를,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려 하시면 저도 감히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에 성만 말하고 나오니, 동행이 모두 그의 우활함을 비웃었

    다.」28)

    홍순언에 관한 기록의 첫 대목은 홍순언이 중국 통주에서 자색이 뛰어난 여자

    가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알고 선뜻 거금을 내어 도와주면서

    여자와 인연을 맺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에는 ‘역관 홍순언이 젊었을

    때 연경에 들어가서 수천금으로 절세 미인을 구하였다.’고 기록한 것에 비하여

    『통문관지』에는 홍순언이 통주에서 우연히 미인을 만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런데 이 여자는 뒤에 명나라의 정권 실세 석성(石星)의 첩이 되었고, 홍순언은 종

    계변무의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석성의 도움을 크게 받게 되었다.

    「여자는 뒤에 예부시랑(禮部侍郞) 석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었는데, 시

    랑이 이 일을 들어서 알고 그 의리를 높이 여겨 번번이 우리나라의 사신을 보면

    반드시 홍통관(洪通官)이 왔는지를 물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종계변무(宗系卞

    誣) 때문에 전후 10여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하였는데, 만력 갑

    신년(1584년)에 공이 변무사(卞誣使)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을 따라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朝陽門) 밖을 바라보니, 금막(錦幕)이 높다랗게 구름에 이었는데,

    말을 타고 한 사람이 달려와서 홍 판사(洪判事)를 찾아 말하기를, “예부 석 시랑

    이 공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계집종 10여 명이 떼지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공이 놀

    라 피하려 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군(君)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

    오? 내가 부인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인데, 이제야 다행

    28) 『通文館志』, 권7, 人物, 洪純彦.

    洪純彦 小落拓有義氣 嘗赴燕 到通州 夜遊靑樓 見一女子極有殊色 意悅之 托主嫗要歡 見其

    衣素 問之則曰 妾父母本折江人 仕宦京師 不幸遘癘疾 一時俱沒 旅櫬在館 獨妾一身 返葬無

    資 不得已自鬻 言畢哽咽泣下 公聞之 愍然 問其葬費 可用三百金 卽傾槖與之 終不近焉 女

    請姓名 終不言 女曰 大人不肯言 妾亦不敢受賜 乃言姓而出 同行莫不嗤其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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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 서로 만나니 내 마음이 크게 위안됩니다.” 하였다. 부인이 보고는 곧 꿇어앉아

    절하므로 공이 부복하여 굳이 사양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이것은 은혜에 보답하

    여 군에게 절하는 것이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군

    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를 장사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으니, 어

    느 날엔들 잊겠습니까?” 하고는 곧 크게 잔치를 벌여 부인이 잔을 잡고 올렸다

    .」29)

    당시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선계를 바로잡는 종계변무가 외교의 최대 이

    슈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과 역관을 파견하였으나. 뚜

    렷한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순언은 중국 사신으로 갔고, 부인

    의 요청으로 홍순언을 찾고자 했던 석성과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시랑이 동방의 사신이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인지를 물으므로,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군은 염려하지 마시오.” 하였는데, 회동관

    (會同館)에 머무른 지 한 달 여만에 사신의 일로서 과연 청함을 허락받았다. 특명

    으로 새로 고친 『대명회전』에 기록하여 보인 것은 석공(石公)이 실로 그렇게 하

    도록 만든 것이다. 돌아올 때가 되어 그 집에 맞이하여 매우 후하게 예대(禮待)하

    고, 부인이 나전함 열 개에 각각 오색 비단 조각 열 필을 담아 주며 말하기를, “이

    것은 제가 손수 짜서 공이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을 공께 바치겠습니다.”

    하였으나, 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압록강 가에 돌아와 보니 대강군(擡杠軍:짐

    꾼)들이 따라와서 그 비단을 두고 갔는데,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

    29) 『통문관지』, 권7, 人物, 洪純彦

    女後爲禮部侍郞石星之繼室 侍郞聞知此事 而高其義 每見東使 必問洪通官來否 時本國以宗

    系辨誣 前後十餘使 皆未得請 萬曆甲申 公遂辨誣使黃芝川廷彧 到北京 望見朝陽門外 錦幕

    連雲 有一騎疾馳來 問洪判事言 禮部石侍郞 聞公來 與夫人迎候 俄見女奴十餘簇擁夫人 自

    帳中出 公驚愕欲退避 侍郞曰 君記通州施恩事乎 我聞夫人言君誠天下之義士 今幸相見 大

    慰我心 夫人見卽跪拜 公俯伏固辭 侍郞曰 此報恩拜 君不可不受 夫人曰 蒙君高義 得葬父母

    感結中心 何日忘也 乃大張宴 夫人執盃以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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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수놓아 있었다. 집에 돌아갔을 때에 비단을 사려는 자가 앞을 다투어 이르렀는

    데, 사람들이 그의 사는 동(洞)을 ‘보은단동(報恩段洞)’이라 불렀다 한다.」30)

    결국 석성의 도움으로 홍순언은 종계변무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고, 석성의

    부인은 홍순언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에서 비단을 짜서 보냈다. 그리고 ‘보은단

    동’의 유래가 홍순언과 중국 여자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록하였다.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파병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석성은 임진왜

    란 당시 병부상서의 자리에 있었고, 홍순언과의 인연을 생각해서인지, 명나라 원병

    의 파병에도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홍순언은 외교적인 공을 인정받아 광

    국공신에 책훈되고 당릉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통문관지』의 마지막 대목은 홍

    순언이 적절히 맺은 인연으로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광해군 때부터 중국

    사신에 대해 뇌물을 쓰는 풍조가 생기면서 외교적 폐단이 시작되었음을 기록하였

    다.31)

    위에서 보았듯이 『택리지』에는 홍순언과 명나라 병부시랑 석성의 첩과의 인

    연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지만, 통문관지에는 홍순언이 중국 여인과 맺은 인연이당시 최고의 외교 현안인 종계변무를 성공시키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참전을 이

    끌어내는데 큰 힘이 되었음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32) 전반적으로 『택리지』에

    30) 『통문관지』, 권7, 人物, 洪純彦

    侍郞問 東使差來 爲何事 公以實對 侍郞曰 君毋慮 留會同館月餘 使事果得准 特命錄示新改

    會典 石公實爲之地也 及還 邀之其家 禮待甚厚 夫人以鈿函十 各盛五色錦段十匹曰 此是妾

    手織以待公至願 以此獻公 公辭不受 還到鴨綠江邊 見擡杠軍隨 至置其段去 錦端悉刺報恩二

    字 旣歸買段者爭赴 人稱所居洞 爲報恩段洞云

    31) 『통문관지』, 권7, 人物, 洪純彦

    菊堂俳語曰 唐陵急人之義可嘉 而夫人之不忘其恩 而必報之者 如此 尤可尙已 先是 辨誣使

    累往不准請 朝議以爲非貨難成 公曰 此事唯可以至誠格天 何用賂爲 此外國事勢 與中國不同

    若開此路 其弊必至於國斃 至光海時 始開賂門 綜成難救之弊 荷潭金公時讓 以爲有先見君子

    32) 홍순언에 관한 일화는 『택리지』 이외에도 『성호사설』, 『열하일기』, 『청구야담』,

    『이향견문록』 등의 주요 기록에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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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된 인물과 사거에 대한 기록은 치밀하고 구체적이지 못한 점이 눈에 띈다. 지

    역 설명을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기록을 하

    려는 의욕은 강했지만 전거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서술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전해

    오는 이야기를 기억에 의존해 언급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택리지』가 역사서가

    아니라 인문지리서인 만큼 역사 기록에 대해 큰 책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이 책이 당대와 후대에 널리 유행한 점을 고려하면 이중환의 역사에 대한 이해

    와 인식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택리지』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기록은 실록이나 『연려실기술』 등 객관적인

    사료들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7. 맺음말

    이상에서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가계와 생애를 살펴보고 『택리지』의

    주요 구성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택리지』의 내용 중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관련 서술, 함흥차사와 홍순언에 관한 기록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 기록을 중심으

    로 이중환의 역사인식의 단면을 검토해 보았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택리

    지』는 기본적으로는 지리지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관련 서술이 상당히 많다는 점

    이다. 이것은 이중환이 그만큼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지역 정보에 떠

    오르는 역사적 사실과 단상(斷想)이 있으면 최대한 기록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몇 가지 역사 관련 기록을 다른 문헌들과 비교해 보면 내용상 차이가 나는

    것이 다수 발견되었다. 그러나 참고문헌이나 전거가 없이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어

    서 저자가 어떤 자료를 구체적으로 참고해 정리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자신의

    상식과 기억에 의존하였다면 이중환의 역사에 대한 식견과 관심을 대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택리지』가 광범위하게 유포된 책임을 고려하면 『택리지』에

    는 당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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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연려실기술』과 같은 역사서나 『성호사설』처럼 치밀한

    고증에 바탕을 두지 않아, 역사자료로 활용하기에는 허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택리지』에 정리된 다양한 내용의 역사 관련 기록들은 실록이나 『연려

    실기술』과 같은 기록과 비교하여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