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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과학문화재를 찾아서

신라의 과학문화재를 찾아서52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 54 골굴사 57 부 록 문 화 연 대 ․ 신 라 사 람 들 후 원: 문 화 관 광 부. 신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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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의 과학문화재를 찾아서

  • 1 대릉원1 황남대총(제98호분)2 천마총(제155호분)

    4 첨성대7 월성-석빙고9 안압지12 국립경주박물관

    12 고고관(본관)14 미술관15 안압지(월지)관15 야외정원

    18 석굴암18 석굴암은 우주다?19 석굴암은 과연 어떻게 조명을 해결 했을까?19 석굴암 본존불의 손은 크기가 다르다.20 토함산 석굴암 결로현상 / 석굴암은 숨쉬고 있다.22 물 위에 지어진 석굴암23 석굴암은 환기구를 가지고 있다?25 석굴암 두 번 죽다.26 석굴암! 왜 꼭 토함산이어야 하는가?26 석굴암의 조각상

    29 세계유산 불국사29 불국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있는 곳이 아니다.30 청운교, 백운교 / 연화교, 칠보교31 튼튼하게 만들자. 잘 만들자.31 축대의 돌을 보면서…31 범영루

    신라의 과학문화재를 찾아서

  • 32 연화교, 칠보교 아래서…33 극락전으로 가는 길, 석축34 극락전 안 회랑에서…35 극락전 석등 아래에 있는 것, 봉로대36 석가탑 앞에서…36 대웅전 앞에서…37 다보탑 앞에서…37 대웅전 지붕 아래에서…38 무설전 앞에서…38 관음전 앞에서…39 비로전 앞에서…

    40 양동마을43 괘릉45 경주남산 탑곡

    46 북면(남방, 정면)46 남면-석양에 채색된 부처님47 서면47 절 이름과 연대

    48 배리석불입상48 본존불49 협시보살

    50 감은사50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효심으로 지은 절50 통일의 힘이 느껴지는 동․서3층석탑(국보 제112호)

    52 대왕암52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

    54 골굴사57 부 록

    문화연대

    ․신라사람들

    후원 :

    문화관광부

  • 신라의 과학문화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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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경주시 황남동일대에 있는 고분군으

    로 사적 제40호이다. 현재 대소 30여기

    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고, 1973년 발굴

    이후 대릉원(大陵園)으로 조성되어 보존

    되고 있다. 직경 80m 높이20m에 이르

    는 왕릉급의 대형분에서부터 불과 수m

    의 소형분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양한

    데 여기에는 미추왕릉, 검총(100호분),

    황남대총, 천마총 등의 고분이 포함되어

    있다.

    1973년에는 155호분이 문화재 관리

    국에 의해 조사되었고, 또 같은해에 영남대 박물관과 부산대 박물관에 의하여 주변지역이

    조사되었다. 외형상 토총인 이 고분들의 내부구조는 발굴 결과 대부분 고신라 특유의 적석

    목곽분으로 밝혀졌지만 151호분은 횡구식 석곽분이었다.

    현재 지상에 남아있는 봉분의 수는 20여기이나 1973년도 고분공원 조성당시 지상에는

    흔적도 없는 고분들이 지하에서 수백기 발견된 바 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대형 고분

    들 사이사이 지표 아래에는 봉분이 파괴된 고분 또는 원래에 봉분이 없었거나 작았던 소형

    고분들이 무수히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 유물로는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고 금제 귀걸이와 환두대도,마

    구류, 토기류가 주로 나왔으며 상감이 되어 있는 유리구슬과 여러가지 형태의 옥이 출토되

    기도 했다. 고분 축조 방향은 월성에서 서북방향으로 축조되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남대총(제98호분)

    황남동 고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표주박처럼 조형한 고분이 98호 고분이며, 황남대

    총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남분의 높이는 23m이고, 북분의 높이는 22m로서 남분이 조금 높다. 황남대총의 긴지름

    은 120m이고 짭은 지름은 80m로서 고분공원 뿐만아니라 신라의 모든 고분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분이다.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 관리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황

    ▲대릉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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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총으로 명명하였으며, 현재는 외형이 복원

    되어 있다.

    남분과 북분중 남분이 먼저 축조되었고, 얼

    마후 남분을 북분에 연결시켜 축조하여 표형분

    의 형태가 된 것이다. 남분에서는 60세 전후로

    판단되는 남자의 유골이 안차되어 있고, 금동

    관, 금허리띠, 금으로 된 장식과 칼 등이 피장

    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북분에서는 금관, 은허리띠, 금구슬, 금팔

    찌, 금반지,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서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고 피장자가 칼을

    착용하지 않은 대신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락바퀴란 방추

    차라고도 하며, 실을 짖는데 쓰이는 도구이다. 게다가 은허리띠에 夫人帶라고 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여자의 무덤이었음을 뒷받참해 주고 있다. 따라서 황남대총은 부부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남편이 먼저 죽어 남분을 쌓았으며 그뒤 아내가 죽자 남분과 연결시켜 북

    분을 쌓아 전체모습이 표주박처럼 생긴 표형분이 되었다. 또한 남분주곽 내부에는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어 순장의 실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천마총(제155호분)

    황남동고분군의 발굴된 고분군중 유일하게 공

    개하고 있는 고분이 155호 고분인 천마총이다.

    1973년 발굴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말다래가 출

    토되었는데 말다래에 날개달린 말이 그려져 있어

    천마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말다래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늘

    어뜨려 놓는 마구를 말한다. 천마도가 그려진 말

    다래는 자작나무껍질을 여러겹 겹쳐 누벼서 만든

    것이며 국보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마총은

    바닥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인 원형봉토분이며,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이다.

    ▲황남대총-국내에서 제일 큰 무덤이죠!

    ▲천마총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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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총의 축조양식은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

    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에 다시 냇돌을 깔았다. 그

    리고 냇돌층위에 다시 목곽을 설치했다. 목곽내부에

    부장품을 넣은 궤와 시체를 넣은 목곽을 수직되게 안

    치했다. 목곽위를 다시 냇돌로써 쌓아 덮었으며, 그 냇

    돌층을 다시 진흙으로 발라 다졌다. 마지막으로 이 위

    에 흙을 쌓아 봉분으로 하였다.

    천마총은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천마도 말 아래

    를 위시하여 금관, 금모자, 새날개모양 관식, 금허리

    띠, 금동으로 된 신발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

    토되었다. 특히 천마총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중

    가장크고 화려한 것이다.

    천마총 금관은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이 두껍다. 금

    관의 앞면에는 4단으로 된 출자모양의 장식이 3줄있

    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2줄 있다. 그리고

    출자 모양의 장식에는 곡옥이 13개씩 달려있고, 사슴뿔 모양의 장식에는 곡옥이 5개 달려

    있다. 현재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은 경주민속공예촌에서 삼선방을 운영하던 고 김인태

    선생께서 제작하신 것이며, 진품은 경주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피장자의 주인공에

    대하여는 제20대 자비왕, 신라 제21대 소지왕 또는 제22대 지증왕이라는 설이 있다.

    실험

    - 천마총 : 부장품을 보관하기위한 방안과 누수문제해결의 열쇠를 파악.

    - 자루 달린 솥의 손잡이 굴곡이유를 실험으로 알아보자.

    실험내용

    천마총은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에 축조되었으며 현장답사를 통해 부장품의 안전한 보관을 위한 덧널사용과 누수현상을 막기 위한 점토층의 축조와 열전도성을 떨어뜨리기 위한 자루달린 솥의 굴곡이유를 구리철사 가열 실험을 통해 확인

    학습효과

    열의 전달과정과 습기와 부패의 정도를 비교분석할 수 있는 능력 배양

    강사 신라사람들

    소요시간

    1시간

    ▲천마총 출토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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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성대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대로서 석조건물높이

    는 9.5m이며 국보 제31호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

    두골, 비두거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북두칠성에 다

    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

    는 뜻이다.

    먼저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구조는 아래의 기단

    부, 술병형의 원통부, 다시 그위의 우물모양의 정상

    부로 나눌 수 있다. 기단부 아래의 땅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단부는 남쪽변이 정남에서 동쪽으

    로 19o정도 돌아서서 있는데, 이 방향은 북두칠성

    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도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변이 약 95cm 정방형의 창구가 나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

    으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정(井)자를 이루고 있다. 제 27단의 원통부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여진 정(井)자석이 두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정상부의 사각형을 이룬다. 이

    정자석은 민족항일기와 광복후에 자리를 바로 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수

    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도 정도 돌아간 방향을 하고 있다.

    석재의 갯수는 음력 일년 평균날 수와 같은 362개가 사용됐다.

    1962년 12월 당시 경주박물관장이던 홍사준선생과 정영호, 유문룡등이 확인한바에 따르

    면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매,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정자석 8매, 중간

    정자석 8매, 남측 문주 2매, 27단의 판석1매로서 도합 401매이다.

    다음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첨성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

    사 三國遺事 선덕여왕지기삼사조(善德女王知幾三事條)에 나타난다. 내용 말미에 별기 別記 를 인용하면서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왕력편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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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대 나물마립간릉 위치와 관련하여 첨성대라고 기

    록되어 있다. 그 뒤의 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조에는 부의 동남 3리에 있다, 고 하였다.끝으로 기능면에서는 1970년대 초반까지는 대체

    적으로 천문대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1974년 이후 불교제단, 기념물, 불교관

    계건축물 등의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종

    전의 전통적인 입장인 천문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

    한 제설들이 나온 배경은 다음과 같다.

    1.현존하는 첨성대가 평지에 있다는 것.

    2.첨성대의 자체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

    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3.전체적인 외형이 불교의 수미산과 유사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환경은 나라마다 첨성대 또

    는 점성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첨성대일 가능성

    이 높다. 고대 천문학은 크게 천문과 역법으로 양분

    이 된다. 중국의 사서에도 역지, 율력지, 천문지가 뚜

    렷하게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다. 천문관측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수 있는데 첫번째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태양,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점성이란 이름이 가르키는 바와 같이 항성의 배치로 정해진 별자리를 지방 또는 국가로 분

    배하고 그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반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이러한 점

    성은 조선 초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고대로 올라 갈수록 비중이 컷다. 그러므로 이 미신적인

    또는 고대인의 자연철학적인 천문 관측이 국가나 왕조에게는 매우 중요했으며 되도록이면

    왕궁에 가까워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첨성대의 들여쌓기

    ▲첨성대의 출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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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첨성대 : 고대 별자리 관측방법과 건축물의 높이 측정방법.

    실험내용

    산이나 건물의 높이를 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있다. 기압계를 이용해 그차이를 계산하는 방법, 수학적인 방법과 모형을 만들어서 산의 높이를 잴 수 있다.

    중학교 수준의 수학인 삼각함수를 이용해서 구할 수도 있고, 초등학교 수준의 수학을 이용해서 구할 수도 있다.

    먼저 삼각함수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옆의 첫 그림처럼 산에서 멀리 떨어진 점 a에서

    수평과 산꼭데기 사이의 각a를 측정하고 또 a와 d사이의 거리를 재면 산의 높이 ed를 계산할 수 있다. 즉, 산의 높이 de 는 ad길이 곱하기 탄젠트a가 됩니다. 여기서 a와 d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잴 것인가?

    옆의 그림처럼 산꼭데기에서부터 경사면을 내려오면서 여러 번에 나누어 수평길이를 재면 된다.

    또, 초등학교 수준의 수학을 이용하려면, 옆의 첫 그림처럼 a에서 가까운 거리에 막대 끝 점c가 선분 ae에 일치

    하도록 막대bc를 세운다. 그러면 삼각형 abc와 삼각형 ade는 닮은꼴이기 때문에 두 삼각형의 대응되는 변의 비가 같다는 사실을 적용하면 된다. 즉, ab : bc = ad : de 가 되는데, 산의 높이 de= (bc곱하기ad)나누기ab이다.

    여러 방법중 우리 실험은 거리와 각도를 이용해 물체의 높이를 측정하게 되는데 높이를 알고 있는 물체를 측정하고자 하는 물체에 세워놓고 사진기를 이용해 촬영한 후 높이를 계산하게 된다.

    이때 사진기의 각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므로 이러한 현상을 없애기 위해 가능한 멀리 떨어져 촬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습효과

    거리와 각도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크기와 위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인지하여 사람이 어떤 원리로 크기와 위치를 알 수 있는지 확인

    강사

    최승욱(신라사람들대표)

    소요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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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성-석빙고반월성 북쪽 성루 중간지점에 성루를 잘

    라서 남쪽에 입구를 내고 안으로 들어갈수

    록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물이 성밖으로 배

    출되도록 바닥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된 석

    빙고가 있는데 보물 66호이다. 내부는 동서

    로 홍예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

    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 환기구를 설치하였

    는데 현재 배기공 위에 덮어놓은 석재는 근

    래의 수리 때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한 것으

    로 원래의 것은 아니다. 출입구는 높이는

    1.78m, 너비 2.01m의 크기로 만들고 계단

    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三國遺事 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 때

    부터 얼음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三國史記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신라시대는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석빙고 좌측에 있는 석비에 의하면 1738년

    (영조14년)에 당시 경주부윤이던 조명겸이 목조의

    빙고를 석조의 빙고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

    하게 기록되어 있고 빙고 입구 이맛돌에는 숭정기

    원후재신유추이기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

    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정도 옮

    겨 현 위치에 재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

    의 옛 위치는 서쪽에 남아있다. 현재까지 신라시대

    석빙고의 위치 확인과 이 석빙고와 구조면에서 어

    떠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석빙고

    ▲월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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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빙고 : 얼음을 보관하겠다는 발상의 전환과 오랜 기간 얼음 저장법 파악.

    실험내용

    석빙고는 겨울의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하기위해 축조된 발명품으로 먼저 얼음을 보관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높이 평가한 후 공기의 순환을 이용한 천정부근의 환기구를 만든 이유와 (뜨거운 공기는 상승) 석빙고 아래쪽 바닥에 구멍이 뚫린 이유를 파악하는데 방법은 생수병 2개를 얼린 후 한쪽은 녹은 물을 계속 따라내고, 한쪽은 그냥 둔 후 얼음의 녹는 속도를 측정하면 이유를 알 수 있다.

    학습효과

    공기층의 단열효과와 대기의 흐름, 얼음의 보관 이유 등을 학습

    강사 신라사람들

    소요시간

    10분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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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압지경주시 인왕동 26번지에 위치하며, 사

    적 제18호로 지정된 임해전 및 주변부속

    건물지와 안압지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터인 신월성의 동북편에 위치하고 있

    다. 임해전의 확실한 모습은 오늘날 확인

    할 길이 없으며 발굴된 건물지로 추정만

    할 뿐이다. 안압지의 창건 연대와 명칭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창

    건연대에 대해서 대표적인 것은 신라 제30

    대 문무왕 14년 2월인 674년설과 문무왕

    19년 8월의 679년설을 꼽을 수 있다. 학계는 두 견해 중 대체적으로 전자인 674년설을 받아

    들이고 있다.

    명칭에 대해서는 학계 및 신라문화동인회 모두 삼국사기에 보이는 월지(月池)라는 견해

    를 받아들이고 있어 이의가 제기되지 않고 있다. 즉 안압지에 대한 명칭은 신라시대에는 월

    지라 칭하였다.

    추정하고 있는 월지와 임해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직관지 등에서

    찿을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30대 文武王 14년 2월(674) :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

    文武王 19년 8월(679) : 동궁을 짓고 궁궐 안밖 여러문의 이름을 지었다.

    2. 제32대 효소왕 6년 9월(697) :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3. 제35대 경덕왕 11년 8월(752) : 동궁아를 설치하고 상대사(12관등) 1인과 차대사 1인

    을 두었다.

    4. 제36대 혜공왕 5년 3월(769) :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놓고 진치를 베풀다.

    5. 제39대 소성왕 2년 4월(800) : 폭풍으로 임해, 인화 두 문이 파괴되었다.

    6. 제40대 애장왕 5년 7월(804) : 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 만수방을 지었다.

    7. 제41대 헌덕왕 14년 1월(822) : 동생 수종을 부군(太子)으로 삼고 월지궁으로 들였다.

    ▲동쪽에서 본 서편 안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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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제46대 문성왕 9년 2월(847) :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9. 제47대 헌안왕 4년 9월(860) :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아았다.

    10. 제48대 경문왕 7년 1월(867) : 임해전을 중수했다.

    11. 제49대 헌강왕 7년 3월(881) : 임해전에서 향연을 베풀었다.

    12. 제56대 경순왕 5년 2월(931) : 고려태조를 임해전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13. 잡지제8, 직관(中) : 동궁관, 동궁아, 세택, 월지전, 승방전, 월지악전등이 보인다

    이상의 기록에서 임해전이 왕궁의 면모를 갖춘

    채 신라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며 신라말기의 어지

    러웠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50대 정강왕 이후에

    는 50여년 동안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가

    경순왕대에 와서 고려태조를 초빙하여 연회를 베

    푼 것이 사실상 마지막 기록임을 알 수가 있다. 그

    이후 조선시대 기록으로는 조선 단종때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의 시

    문(詩文) 「안하지구지(安夏池舊址)」 그리고 성종 17년(148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 ,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안압지

    (雁鴨池)라는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명칭외적

    기록으로는 조선 현종 10년(1669)에 경주부사 민

    주면이 경주의 향교중수때 임해전터의 초석을 많

    이 옮겨갔던 사실과 숙종때 부윤 권이진은 이곳을

    둘러보고 고궁옛터라고 하였던 것과 조선말기의

    한학자였던 강위가 지은 시가 남아 전해온다.

    제반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가 망하고 고려

    시대가 되자 이곳이 궁궐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게 되고, 또한 건물의 보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비바람 등으로 폐허가 된 것 같다. 월지는 신라가 망한 후 천여년이 지나는 동안 주

    변의 무산십이봉에서 흘러 내려온 흙과 월지 서편의 동궁이 자연재해 등으로 허물어지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못 안이 거의 흙으로 매몰된 상태에 이르게 된 것 같다. 이러한 못에 갈

    대와 부평초가 무성하였고 이 사이로 오리와 기러기들이 날아다닌 것을 본 조선시대의 시인

    ▲안압지 가운데의 섬

    ▲안압지 서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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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객들에 의해 오늘날의 안압지가 된 것이다.

    그 후 일제시대 철도부설작업으로 건물지 일부

    가 파손되었고 1974년 당시 경주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안압지와 주변건물터에 대한 준설작업

    및 정화작업이 있었는데 도중 신라시대의 유물들

    이 출토되었다. 그리하여 1975년 3월 24일부터

    1976년 12월 30일까지 2년여에 걸쳐서 문화재연

    구소에서 연못안과 주변 건물지에 대해 발굴을 하

    였다. 이 발굴조사로 못의 전체면적이 4,738평이

    며 3개의 섬을 포함한 호안석축 길이가 1,285m임

    이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은 와전류를 포함하여 3만여점이 되었다. 그리고 건물지 26동 담

    장터 8개소, 배수로 시설 2개소, 입수구 시설 1기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소요경비는 당시 금

    액으로 1억7백7십6만4천원이었다.

    발굴을 마친 후 3년 뒤인 1980년에는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문화재 관리국에서 복원

    정화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5년 뒤 1985년 국립경주박물관내 단위 유적에 대한 최초의 독립 전시관인 안압지 별관

    을 세웠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고 나룻배를 비롯한 대표적인 유물 7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 안압지 : 수로의 넓이와 물의 양에 따른 물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실험내용

    안압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월성 안에 축조한 인공연못으로 물이들어 오는 입수구와 나가는 출수구를 비롯한 다양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입수구를 보면 똑같은 양이 물이 들어오지만 유속은 구역마다 틀리다. 이유는 수로의 넓이 차이 때문이다. 여기서는 현장의 상황을 이용해 설명한다. 물은 입구가 좁으면 빠르게 흐르고 넓으면 천천히 흐른다. 안압지는 유속의 흐름을 좋게 하기위해 물이 들어오는 입구에 작은 섬을 만들어 입구를 좁게 하는 방법으로 유속을 증가시켜 물의 흐름을 좋게 했다.

    학습효과

    물의 흐름과 배수를 이해하여, 홍수예방을 위한 제방의 축조나 배수시설의 필요성 인식

    강사 신라사람들

    소요시간

    1시간

    ▲안압지 입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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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보려면

    박물관을 꼭 관람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

    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는 경주박물관은 필수사항이다. 그러나 박

    물관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못하다. 그

    이유는 눈으로 보기만 하는 1회성 관람이

    위주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관람할 때 해당 유물을 설명하

    는 음성기기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며 그 유물 앞에서 해당 자료를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어느

    전시관에 어떤 유물이 전시돼 있는지 정도

    는 알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글은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를 갈무리 한 글을 정리한 것이다.

    (http://gyeongju.museum.go.kr)

    고고관(본관)

    1) 선사 · 원삼국실 : 경주와 주변일대에서 출토된 신석기, 청동기, 초기철기시대의 선사

    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의 모형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실에는 신석기 · 청동기 · 초기철기의 선사시대 및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지만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그리 많지 않고 전시유물의 대부분은 초기철기시대

    와 원삼국시대의 유물들이다.

    이 전시실에는 지금까지의 고정된 전시개념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토기들을 한 곳에 모

    아 전시함으로써 관람객들이 경주지역의 토기문화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주 사라리고분, 구정동고분, 포항 옥성리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철 갑

    옷, 투구, 말머리가리개, 철칼 등의 무기류를 전시함으로써 신라가 주변 소국을 정복하고 고

    ▲미술관 전경

    2002년 6월 개관한 곳으로 신라조각 ․ 공예 걸작품을 전시해 놓은 공간으로 1층에는 불상, 2층에는 불교

    관련 공예품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으며 황룡사의 모

    형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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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을 보여

    주고 있다.

    2) 고분실 : 경주일대의 고분과 각 유적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을 비롯한 금장신구 등 삼국시

    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명품들을 종류별,

    시대별, 주제별로 엄선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실은 현재 경주 시내 곳곳에 남아 있는 거

    대한 무덤들 가운데 발굴조사를 거쳐 출토된 부

    장품(副葬品)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다.

    즉, 금관총(金冠塚), 서봉총(瑞鳳塚), 천마총

    (天馬塚), 황남대총(皇南大塚), 교동(校洞)고분,

    계림로(鷄林路)고분군, 월성로(月城路)고분군

    등 경주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서 출토된 유물들과, 용강동(龍江洞)고분·황성동(隍城洞)고분, 포항 냉수리고분 등 돌방무덤

    [石室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황성동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신라초기

    의 제철관련 유물과 유구들을 모형과 함께 전시하여 철기 제작공정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금관 · 관장식 · 관모 · 허리띠 · 귀걸이 등의 금제 장신구와 자루솥·다리미 등의 청동용

    기류, 합·굽다리접시등의 금동용기류, 말갖춤류, 무기류, 토기, 유리컵, 각종 구슬 등 화려하

    고 풍부한 유물을 통해서 당시 예술의 뛰어난 면모와 대외문화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3) 국은기념실 : 고 국은 이양선박사가 생전에 수집한 귀중한 문화재 666점을 기증한 높

    은 뜻을 기려 마련한 전시실로서 국보 275호 말탄 무사모양 토기가 눈에 띈다.

    이 박사는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수집품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문화재의 공공성을 깊이 생

    각한 나머지 절약과 검소 속에서 30여년 동안 모아온 수집품을 경주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박물관에서는 그의 고마운 뜻을 기리기 위하여 기증유물실을 마련, 상설전시하고 있다.

    중요한 유물로는 기마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경주 안계리(安溪里), 죽동리(竹東里), 대

    구 지산동(池山洞) 출토의 청동기 일괄유물, 일본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말해주는 모자곡옥

    (母子曲玉), 도가니, 와질토기, 기와틀, 청동에 옻칠한 발걸이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한국

    의 고고학, 미술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금제관모

    고고관은 국립경주박물관의 본관으로 신라금관

    을 비롯한 각종 금제유물과 각종 토기등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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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

    1) 역사자료실 : 왕경을 중심으로 찬란하고 화려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왕경 모형,

    도로유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임신서기석, 남산신성비 등 금석

    문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특히 신라왕경의 복원 모형을 통해 당시에 이미 도시계획이 상

    당히 발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2) 조각실 Ⅰ :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제작된 소형 금동 불상이 주제별, 시기별로

    전시되어 있어 금동불상의 양식적 변화과정 및

    명칭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3) 조각실 Ⅱ :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

    지의 석조유물(불상, 능묘조각)을 전시하고 있다.

    장창골 석조미륵 삼존불을 비롯하여 송화산

    석조미륵 반가사유상, 서악동고분 출토 신장상

    문비석 등 신라 석조미술이 최고수준에 달했음을

    느낄 수 있다.

    4) 금속공예실 : 신라 금속공예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사리장엄구를 비롯하여 범종 및 불교의

    식에 사용되는 각종 불구류와 와전류가 전시돼

    있다. 감은사 동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를 비

    롯하여 신라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금속공예품들

    과 와전류를 통해 뛰어난 신라인의 공예기술을

    이해할 수 있다.

    5) 황룡사실 : 황룡사는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황룡사

    실에서는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사리구, 불상, 지진구, 기와등이 전시돼 있다.

    황룡사는 553년에 창건된 대표적인 신라의 호국사찰로서 진흥왕 14년에 새 궁궐을 지으

    려다가 황룡(黃龍)이 나타나 계획을 바꾸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었으나 복원된 황룡사 모형을 통해 거대

    한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습과 당시 최고조에 달했던 목조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애기부처

    친근한 미소로 박물관 유물 중 가장 인기 있는

    부처님으로 경주 남산 장창골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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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압지(월지)관

    안압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3만여점의 유물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700여점을 선별하

    여 전시해 놓았다. 이들 유물은 고분 유물과는 달리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 당시 신라

    시대 궁중생활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하는 실생활용품들이며 그 종류도 다양하다.

    아울러 이 유물들은 통일신라문화를 밝혀줄 뿐 아니라 그 당시 당(唐) 및 일본과의 문화

    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실생활과 관계된 금속공예품,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불상과 불

    구류, 목제 건축부재, 목간(木簡) 등을 비롯한 목제품, 철제품, 토제품 등 다양한 유물이 전

    시되고 있다. 특히 출토 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와전류(瓦塼類)는 통일신라 와전의 집합

    체라 할 수 있다.

    1) 14면체 주사위 : 용도는 귀족들이 놀이판을 벌일 때 이 주사위를 굴려서 나오는 글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는 놀이이다. 총 14면의 주사위에는 각 면에 재미나는 글들이 쓰여져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삼잔일거’ : 술 세잔 한꺼번에 마시기

    ‘음진대소’ : 술 한잔 마시고 크게 웃기

    ‘양잔즉방’ : 상에 술 두잔 이상 놓지 않기 등등…

    야외정원

    박물관 정원에는 경주 일대의 궁궐터나

    절터에서 옮겨온 400여점의 석조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범종

    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을 비롯하

    여 경주지역의 절터 궁궐터 등에서 옮겨온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석조유물은 대부분이 불교관계 조각물

    로서 석불, 석탑, 석조, 석등, 비석받침 등

    이며 이밖에 주춧돌, 계단석과 같은 건축

    부재도 다수 있다.

    장항리 석조여래입상, 낭산 출토 관음보

    ▲고선사지 3층석탑

    덕동댐 건설로 고선사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7년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층 몸돌에는 문모양이 양각되

    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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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입상, 분황사 우물에서 출토된 20여구의 불상, 고선사터삼층석탑, 사자·공작무늬돌 등이

    그 대표적인 전시물이다.

    1)성덕대왕신종(국보 29호)

    국립경주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들어오는 것이 있다.

    성덕대왕신종을 매달고 있는 종각이

    다.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35대 경덕

    왕이 부친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

    하여 큰 종을 만들기 시작해 혜공왕

    7년(771)에 완성하였다. 처음 봉덕

    사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

    고도 한다. 현재의 박물관이 완성되

    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 것

    이다.

    신종의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 무

    늬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 무늬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꽃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돌렸다.

    종의 위에는 용이 음관을 감고 있고 몸체에는 당초무늬의 띠가 있고 그 아래 4개의 유곽 안

    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유두를 넣었으며 대

    칭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가 있다.

    당좌는 종을 치는 자리이다. 당좌는 앞면과 뒷

    면 두 곳에 있는데 종 높이의 1/3쯤 되는 곳에

    보상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연꽃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꽃으로 종소리가 온 누리에 맑게 퍼져

    부처님 말씀을 전하려는 뜻일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이 4구 조각되어 있

    다.비천은 연꽃 방석에 앉아 꽃구름을 타고 옷자

    락을 휘날리며 향로를 받들고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을하고 있다. 비천상 사이의 두 곳에 1천자

    가 넘는 글씨가 있는데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과 글쓴이 등이 있다.

    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종소리는 ‘일승원음(一乘圓音)’이라 하고 그 뜻은 이 소리를 들으

    ▲성덕대왕신종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재물로 바쳤다고 해 에밀레종이라

    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성덕대왕신종 음관

    음관과 용뉴는 우리나라 종에만 있는 특징으

    로 중국, 일본종에는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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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 곧 바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진리를 포함한 둥근 소리란 뜻이니 곧 바

    로 부처님의 음성이 된다.

    신종의 종소리는 단연 세계최고이다.

    맑은 종소리의 비결은 음관에 있다고 한

    다. 중국과 일본 종에는 음관이 없다. 유

    독 우리 종에만 음관이 있어 음관이 있는

    종을 특별히 한국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음관에 대한 정밀 검사를 한 결과 음관

    을 덮었을 때는 깡통 깨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열었을 때는 막힌 숨이 탁 트인 듯

    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또한 신종의 맥놀이파의 청음은 사람이 참선이나 수면에 돌입했을

    때의 뇌파 주파수와 동일하다는 결과가 나와 종소리의 신비를 밝혀주는 기회가 되었다.

    - 성덕대왕신종 : 맥놀이의 원리와 음파의 움직임 확인.

    실험내용

    종소리는 정확한 타점과 비례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밀랍을 이용한 새로운 공법으로 주조하였으며 컴퓨터를 이용한 음파의 분석으로 어떻게 맥놀이(소리울림)가 발생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종소리를 녹음하여 컴퓨터에 입력한 후 이를 그래프화 시켜 고음과 저음의 교차상태와 소리의 울림관계를 분석한다.

    학습효과

    공기의 떨림이 소리라는 원리와 사람의 귀에 오래 동안 소리가 들리도록 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강사 신라사람들

    소요시간

    1시간

    ▲성덕대왕신종 이전 광경

    1915년 봉황대에서 동부동 구 박물관으로 옮겨가는 모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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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석굴암은 우주다?

    앞쪽은 네모, 뒤는 원형. 신라인들을 비

    롯한 고대인들은 땅은 네모라고 하늘은 둥

    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평선 넘어 나간

    뱃사람이 폭포로 떨어져 수없이 많은 사람

    이 죽었으리라.

    둥근 형태인 주실 즉 부처님나라로 들어

    가려면 사천왕이 있는 곳을 지나야한다. 불

    교에서는 색계육천이라 하여 인간들의 관

    념으로 볼 수 있는 여섯 하늘이 있다.

    제일아래가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 도리

    천, 야마천, 도솔천, 타화자재천, 낙변화재

    천. 사왕천부터가 바로 부처님의 나라다.

    그래서 사천왕들은 부처님 나라 외곽의

    동, 서, 남, 북을 빈틈없이 지키고 있다. 외

    곽 경비책임자다. 무보수로 일한다.

    석굴암 부처님은 주실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

    석굴암은 우리가 보는 것 이상으로 과학적이고, 섬세하다.

    관념적인 부처는 하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석굴암 본존불은 주실 즉 하늘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왜일까?

    사람의 눈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대표적인 것이 만화영화다.

    한 장 한 장의 멈춰있는 그림을 빠르게 움직이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인식한다. 하지만 멈춰있

    는 그림이다. 또한 그림을 그릴 때도 명암을 넣으

    면 어두운 곳은 들어가 보이고, 밝은 부분은 튀어

    ▲석굴암의 평면도

    ▲석굴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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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입체적으로 보인다. 착시현상은 불국사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 해보자.

    석굴암은 과연 어떻게 조명을 해결 했을까?

    현재는 전실부분에 목조 전각이 설치되어 있고 상부는 무덤형태로 돔을 이루고 있다. 따

    라서 태양광이 본존불에 직접 닿기는 어려운 구조다. 현재의 목조전실은 없던 것을 잘못 지

    은 것이다. 신라인들은 반사광을 이용해 조명을 해결했다. 아래 사진처럼 석굴암은 전실부

    분이 개방된 상태로 되어있고 바닥의 화강암을 잘 다듬고, 문질러 거울효과가 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빛이 주실로 들어온다. 그러면 본존불의 앞면은 햇볕을 받아 밝아

    지고 뒤는 그늘져 어둡다. 여기서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어두운 곳은 물러나 보이고 밝은

    곳은 앞으로 튀어나 보이므로 약간 뒤로 물려놓으면 실제는 중앙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

    라인들은 석굴암 본존불이 최대한 중생의 눈에 완벽한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했다. 모든 소

    원을 들어주고, 영원히 나라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으면서. 그래서 중앙보다 약

    간 뒤로 모셔 놓은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의 손은 크기가 다르다.

    석굴암 부처님이 완벽해 보이도록 노력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처님의 수인을 보면 촉지항마인(觸地降魔印)을 하고

    있다.

    왼손을 단전근처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을 짚고 있다.

    기도객의 위치에서 보면 오른손이 가깝게, 왼손은 멀게 보

    인다. 여기서 착시현상이 또 나온다.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자 이제 생각해 보자 석굴암 부처님의 양손 중 어느 것

    이 클 것인지. 당연히 왼손이 약 2Cm크다. 석굴암을 수없

    이 설명했지만 왜 손의 크기가 차이가 나는지 물어온 사람

    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또한 두광의 연꽃광배를 불상에

    직접 붙이는 일반적 방법과는 달리 간격을 두고 멀리 배치

    하여 더 입체적인 조화를 느끼게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

    은 광배의 둘레를 돌아가며 장식한 연꽃잎을 위로 올라 갈▲석굴암 본존은 왼손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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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록 크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작게 한 것이다. 이도 역시 아래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착시현

    상을 이용한 것이다.

    토함산과 석굴암 결로(結露)현상 / 석굴암은 쉼쉬고 있다.

    석굴암의 이슬 맺힘 현상과 토함산은 어떤 관계

    가 있을까?

    석굴암의 대다수 석재는 토함산 주변의 화강암이

    었지만, 남산의 화강암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밝

    혀졌다. 토함산의 화강암은 50%의 장석, 30%의 석

    영 그리고 나머지 20%는 흑운모와 기타 성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석굴암의 석재 중 50%의 장

    석,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이 장석이 H 2O와 만

    나면 고령토로 변한다. 그러므로 석굴암의 내부습기

    는 석굴암 보존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은 높이 745m로 경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토

    함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토함산과 인연이 깊은

    석 탈해왕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견해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탈해는 "한편

    토해(吐 解)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특히 『삼국유사』에서 토해라고 많이 쓰고 있다. 토해

    와 토함은 유사 음이니 토함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토함산의 명칭에 관한 또 다른 견해

    는 토함산의 경관에서 연유한 것이

    다.‘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

    이 토함산이다. 정말로 동해의 습기와

    바람은 변화무쌍하여 지척을 분별 못

    할 안개가 눈앞을 가리는가 하면 어느

    사이에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변덕

    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토함산의

    한자를 보면“토(吐) : 토해내다”,“함

    (含) : 머금다”라는 두 글자로 이루어

    ▲석굴암 전실의 금강역사와 팔부신중

    ▲석굴암의 옛 지붕모습(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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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져 있다.

    석굴암을 설명할 때 나는 두 번째 견

    해를 우선시 한다. 즉 토함산이‘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라는 해석

    이다. 실제로 석굴암에서 바다가 보이

    지만 잘 볼수 있는 날이 거의 없다. 그

    래서 석굴암 일출은 시간을 맞춰 올라

    온다고 모두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니

    다. 바다와 마주보고 있는 토함산은 낮

    에는 해풍이 불고 밤에는 육풍이 분다.

    즉 낮에는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밤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바람이 분다. 육지와 바다의

    기온상승 차이 때문이다. 토함산은 일반적으로 바위가 많은 산에 비해 토함산은 토(土)산이

    다. 흙은 불어오는 습한 해풍의 습기를 흡수한다. 다시 밤이 되면 바다 쪽으로 불어나가는

    육풍에 머금고 있던 습기를 토해낼 것이다. 즉 토함산은 숨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토함

    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석굴암 내부로 들어오는 공기는 토함산에 의해 어느 정도 제습된

    공기가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밤이 되면 석굴암은 산을 타고 내려가는 육풍에 의해

    낮아진 외부압력의 영향으로 내부에 가지고 있던 공기를 내뱉게 될 것이다. 석굴암은 기본

    적으로 앞으로 뚫려있는 개방형 구조이므로 석굴암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타

    당하다고 본다. 즉 석굴암도 역시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토함산이지만 결로현상을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토함산에는 구름과 안개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구름과 안개는 어떻게 만들어 질까?

    이들과 석굴암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되고, 반대로 수증기를 식히면 다시 물이 된다. 물에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되고, 열을 빼앗으면 물이 된다.

    하늘로 올라가면 온도가 내려간다. 또한 기압도 내려간다. 상승한 수증기는 온도가 내려

    가며 물로 변한다. 이런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게 구름이며 안개다.

    낮에 습기를 많이 머금은 바람이 토함산 자락을 타고 상승을 하면 온도가 내려가고, 기압

    이 낮아지면서 구름을 맺는다. 토함산은 이런 구조이다 보니 구름과 안개가 많이 생길 수밖

    에 없다.

    ▲석굴암 일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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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함산과 석굴암의 공기이동(낮)

    토함산과 석굴암의 공기이동(밤)

    그렇게 볼 때 석굴암의 건축학적위치는 별로 좋은 자리는 아니다. 신라인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법을 구상했을 것이고, 결국 해답을 찾았다. 습기문제를 해결한 방법

    이다.

    물 위에 지어진 석굴암

    신라당시에도 석굴암에는 결로(이슬맺힘)현상이 일어났다.

    단지 어디에 이슬이 맺히느냐하는 위치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석굴암은 감로수라고 불

    리우는 샘물 위에 지어졌다. 일반적으로 수맥 위에 건물을 짓는 일은 상식적으로 벗어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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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왜 샘물위에 건

    축을 했던 것일까?

    석굴암 바닥 밑에 흐르는 감로수는 석굴

    암 바닥을 12℃ 정도로 항상 유지시킨다.

    따라서 내부로 들어가는 공기는 상온(대략

    20℃)보다 낮은 바닥 쪽으로 끌려가게 되

    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바닥에 정체하면

    서, 바닥에 모든 습기를 빼앗긴다. 따라서

    오직 석굴암 바닥만이 결로현상에 의해 물

    방울이 맺히게 되며, 벽면의 부조들과 본존

    은 습기로부터 안전하다. 이러한 해석이 사실이라면, 샘물 위에 석굴암을 축조한 신라인들

    의 지혜가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실감케 한다. 자동차를 예를 들면 겨울철 꼭 유리창에만

    성에(이슬 맺힘)가 낀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기중의 수중기가 차가운 유리창에 온도를 빼앗

    기며 다시금 물로 돌아간 것뿐이다.

    석굴암은 환기구를 가지고 있다?

    석굴암은 내부적으로도 제작과 조형, 건축 뿐만 아니라, 보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놀라

    운 장치들을 가지고 있다. 즉 석굴암은 구조적으로도 통풍에 필요한 통풍구를 가지고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 어깨높이 쯤 되는 주변 벽에는 작을 구멍을 뚫어놓은 듯 감실이 10개 조성

    되어 있다. 감실 폭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돌 보다 두껍다.

    ▲작은 구멍 뒤쪽에 환기구가 보인다 ▲석굴암의 구부재(원래 석재)

    ▲석굴암의 용출수 연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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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감실과 감실을 받치고 있는 벽석 사이

    에는 틈이 생긴다. 놀랄 만큼의 정확성을 지닌

    신라인들이 실수로 이런 틈을 남겼다고는 볼 수

    없다. 결국 이러한 틈은 석굴암 내부의 정체층의

    공기순환을 위한 환기구라고 해석하면 되겠다.

    석굴암의 환기구라고 추정되는 곳이 또 한군

    데 있다. 석굴암의 돔형 구조 중 천개석 부분에

    작은 석재가 끼워져 있는 곳이 있다.

    실제로 돔형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 위와 같은 석재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석굴암

    을 보면 천개석 밑에 위와 같은 석재가 일정 간격으로 끼워져 있다. 이러한 돌들이 천개석

    과 바로 아래의 면석간의 일정간격 틈

    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이것이 환기구 역할을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또 낮과 같이 밖의 온도가 높고 석

    굴암 내부의 온도가 낮은 경우에, 공기

    는 위에서 언급한 천개석 틈이나 기타

    다른 순환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토함산 주변의

    정체된 공기들은 모두 습한 공기들이

    므로, 절대습도가 꽤 높은 공기가 석굴

    암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이때, 공기

    가 내부로 들어오는 동안, 차가운 절석

    들을 만나 절석들의 표면에 물기가 맺

    히게 되고, 석굴암 안으로 들어오는 공

    기는 석굴암 내부의 절석과 옥석들에

    의해 제습된 공기일 것이다. 다시 밤이

    되면, 석굴암 내부와 외부의 온도는 역

    전되게 되고, 내부의 건조한 공기는 절

    ▲석굴암 내부모습(현재)

    석굴암 외벽을 통한 공기순환(낮)

    석굴암 외벽을 통한 공기순환(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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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과 옥석에 맺힌 습기를 가지고 밖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이렇듯 석굴암의 외벽은 석굴암으로 유입되는 공기를 제습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이다. 즉 석굴암은 숨을 쉬는 것이다.

    석굴암 두 번 죽다.

    이상과 같이 석굴암의 자연 상태에서 지하

    용출수와 환기를 통해 습기문제를 해결했지만

    일제시대에 발견된 석굴암은 앞쪽 일부가 무너

    져 빗물이 새어 들어와 석굴안쪽이 이끼로 인

    해 온통 까맣게 훼손돼 있었다.

    1913년 일제 때 무너진 석굴암의 보수를 위

    해 전면 해체에 돌입했다. 해체시 석굴암 바닥

    에 돌을 판판하게 배치하고 물이 골고루 흐르

    게 하기 위해서 사이사이로 물길을 다 내어 놓

    은 것을 보고 이끼의 원인이 이 지하수로 판단하고 물을 돌리고 그 당시로는 최신식 재료였

    던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동해로부터의 습한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랬더니 습기가 더 차게 되고 해방 후

    인 1962년 국내에서 석굴암을 수리하면서 다시 한번 시멘트로 에워쌌고 급기야 유리문을

    달아 관람객의 입장까지 막게 되었다. 결론

    적으로 석굴암의 결로 방지 시스템인 지하

    수와 환기장치 모두가 없어진 셈이다. 천년

    전 신라인들의 지혜로 천년이상을 내려온

    석굴암.

    지금은 대형 기계장치를 이용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있으니 천년 전 신라인들

    이 본다면 비웃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잘못된 석굴암의 복원으로 석굴암은 한

    번 죽었다. 그리고 석굴암의 전정한 면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람객들이 비싼 관람료를 내고 10여분 힘들게 걸어와서 본 석굴암을 볼

    ▲석굴암 수리 전 모습

    ▲석굴암 수리 후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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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없다거나, 관람료가 비싸다거나 하고 말하는 것은 석굴암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석굴암! 왜 꼭 토함산이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석굴암이 위치한 토함산은 습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지

    형이다. 석굴암을 축조하면 결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결로를

    막아냈다. 왜 꼭 토함산에 석굴암을 조성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토함산은 신라의 5악 중 유일하게 통일이후 까지 변동 없이 숭배되어

    왔으며, 부처님의 수인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신앙 구심점이며,

    동해바다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왜구나 외적

    의 침입시 가장 빠른 침투 루트가 감포쪽의 동

    해구가 된다. 여기에 석굴암 부처님을 조성하

    고, 동해바다를 항시 바라보며, 신라로 침입하

    는 모든 마귀(외적)를 물리쳐 영원한 신라를 꿈

    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기문제를 감수하고

    굳이 토함산에 조성한 것이다. 오직 나라를 지

    키고, 수호하기 위해서….

    석굴암의 조각상

    불국사의 좌경루 기둥과 같은 것이 석굴암에도 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같은 시대, 같은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양식은 같다.

    전실에는 관람객을 마주하고 금강역사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문지기다.

    문지기인 금강역사가 퇴근을 한다던지, 휴가를 간다면 부처님 나라의 경비가 소홀해 진

    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신라사람들은 금강역사에게 암호를 표시해 놨다.

    향 왼쪽 입 벌리고 있는 금강역사는 아금강역사이고, 오른쪽 입 다물고 있는 것은 훔금강

    역사이다.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다. (“아”와 “훔”은 인도말의 첫 글자와 끝 글자로 처음과

    끝의 의미이다. ex. ATOZ) 즉, 석굴암이 완성되어서 없어질 때까지 지킨다는 뜻이다.

    입을 벌린 금강역사는 주먹을 쥐고 있고 입을 다문 금강역사는 손을 펴고 있다.

    음양의 조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른손에 무기가 있었던 듯 잘려있다. 석탑이 본존불 앞

    ▲석굴암 수리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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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과 뒤쪽에 2개 있었으나 1개는 도난당했다. 감실상도 현재 10개중 8개 밖에 없다.

    본존불(여기서는 석가상이 아니고 본존불이라 해야 함, 부처의 존명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려움) :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게 만들었다. 일어서있는 주변의 10대 제자, 감실의 부처가

    작기 때문에….

    부처님은 손으로 말씀하신다. 그것을 手印이라

    고 한다. 기본적인 손 모습은 선정인.

    손을 들고 있는 것은 도를 깨치고 난 후, 내가

    깨달은 바를 말하겠다는 뜻. 설법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8상성도 중 마귀가 부처님

    의 깨달음을 방해하기 위해 처음에는 무력을 쓰

    다가 나중에 회유책으로 미인계를 쓴다. 절의 벽

    화에 자주 등장한다. 미인이 손에 거울을 들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마귀이다. 석굴암 부

    처님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뜻은 땅을 건드

    려 마귀를 항복시켰다는 뜻이다.

    항마촉지인 :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마귀에게서 항복을 받았다는 뜻.

    눈은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부처님이 마귀를 막아냈듯이 동해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적을 막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백 호 : 부처님 이마에 난 하얀 털. 하얀 털을 상징해서 수정이나 옥을 박아 넣기도 하

    고, 구멍만 파놓기도 한다.

    시선은 정확하게 동짓날 아침 해뜨는 방향을 향하고 있다. 옛날에는 일 년의 시작을 동짓

    날로 보았다. 동짓날은 밤이 제일 긴 날로, 반대로 동짓날은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로

    신라가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동짓날 팥죽안의 새알심을 나이수대로 먹

    는다.

    아미타부처님을 무량수불(or 무량광불 or 무량수불)-(무량수전은 아미타를 주존하는 사

    찰의 법당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빛과 목숨이 무한하다는 뜻. 아홉가지 손 모습을 한다.

    인간을 아홉 단계로 나눠서 그 단계에 맞춰 설법을 한다. 눈높이 교육의 창시자.

    ▲여인으로 변한 마귀들이 부처님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면(촉지항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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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굴암 : 석굴암의 결로현상과 에어컨의 원리 탐구.

    실험내용

    석굴암은 전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유산이며, 아름다움의 극치다. 또한 그속에 과학적인 요소까지 묻어나 더욱 가치가 있다. 석굴암은 내부에 습기가 차지 않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는 다르다. 습기는 차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한 것이다. 바로 바닥밑으로 지하수를 흐르게 하는 방법이다. 대기란 기압이 낮아지면 부피가 팽창하며 온도가 내려가고 반대로 기압이 높으면 기온이 올라간다. 이러한 사이에 결로현상이 일어난다. PET병을 이용해 공기의 압축과 팽창에 따른 온도변화와 결로현상을 살펴보고 에언컨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실험을 통해 알수 있다.

    학습효과

    공기의 압축과 기온의 변화, 고도와 기온의 변화등을 이용해 다양한 생활응용을 할 수 있다.

    강사 신라사람들

    소요시간

    2시간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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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유산 불국사

    불국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 부처님 나라는 신라밖에 없다.

    天王門안의 四天 : 天王이 넷 있다. 사왕천 : 사천왕이 사는 나라. 사왕천 아래가 인간세

    계. 사왕천이 부처님나라와 인간세계를 경계

    짓는 곳이다. 동서남북 어디에서든 사악한 마

    음을 갖고 불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붙잡힌다.

    밟혀있는 인간은 우리 마음속의 나쁜 생각이

    다.

    사천왕 중, 손에 용을 쥐고 있는 천왕은 부

    하가 용이라는 뜻이다.

    반드시 탑(부처님을 상징)을 들고 있는 천

    왕이 있다. → 북의 多聞천왕 : 부처님 얘기를

    ▲불국사 전경(수학여행 단골 단체촬영 장소)

    ▲사천왕 중 광목천왕과 다문천왕(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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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많이 들었다는 뜻. 북쪽이다. (다른 천왕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서로 바꿔 들 수 있다.)

    사천왕은 출입국 관리소의 입국 심사관이다. 마음이 밝고, 선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악인이라도 악을 버리면 출입이 가능하다.

    청운교, 백운교 / 연화교, 칠보교

    ▲아래가 청운교 / 위쪽이 백운교

    ▲아래가 연화교 / 위쪽이 칠보교

    어디가 청운교이며, 어디가 백운교인가?

    학교 다닐 때 열심히 외웠다. 불국사에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다

    는 것을 그러나 막상 어느 것이 청운교인지, 무엇이 백운교인지는 알지 못했다.

    불국사는 부처님 나라다. 부처님 나라는 하늘에 있다. 신라인들은 땅위에 부처님 나라를

    건설했지만, 땅이 하늘처럼 보이게 설계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가장 좋은 방법이 의미상의

    하늘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을 올라가려면 구름을 거쳐, 혹은 구름을 타고 올라가야 된다.

    그래서 청운교, 백운교다. 푸른 구름, 흰 구름 밝고 어서어서 올라가자 부처님 계신 하늘나

    라에 하늘은 높이니 축대도 높이 쌓아야지, 높아진 축대 무너지면 안 되니 튼튼하게 만들어

    야지, 부처님 나라 더없이 귀하고, 더없이 존귀하니 천년, 만년 이어질 부처님나라 만들어야

    지….

    천년, 만년 이어질 부처님 나라 건설 프로젝트

    기 획 자 : 김대성

    직 업: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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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력: 석굴암 설계, 장수사 건립

    후 원: 신라 35대 경덕왕

    설 계: 아사달

    자 문: 신림/표훈

    공사기간 : 751년 - 774년

    건설업체 : 신라건설 대표 아사달

    튼튼하게 만들자. 잘 만들자.

    아치다리…

    아치다리의 사다리꼴 모양의 돌 → 아래가 좁고 위

    가 넓어서 역학적으로 밑으로 빠지진 않는데 지진 같

    은 압력으로 인해 위로 튕겨나가는 걸 막으려고 위쪽

    에 반대방향으로 된 돌이 하나 끼워져 있다. 저거 하나

    가 누름으로 아랫돌이 위로 튕겨나가지 않는다. 세계

    최초의 구조이다.

    축대의 돌을 보면서…

    아랫돌은 자연석, 윗부분은 조각한 돌이다. 그랭

    이법이라고 해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자연과 인공

    의 조화.

    물받이 아래에 자갈을 채워두었다. 돌이 울퉁불퉁

    해서 물이 떨어지면 물이 사방으로 튄다.

    그래서 물보라가 생기고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해

    가 뜨면 무지개가 생긴다. 무지개는 하늘에 생기는

    것.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늘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범영루

    뜰 범, 그림자 영, 누각 루, 구름모양의 기둥, 1593년 임진외란 당시 불탄 이후 1612년과

    1688년 두 번에 걸쳐 중창된 건물이다.

    ▲청운교의 아치다리

    ▲사다리꼴 모양의 돌-내진설계

    ▲자연석모양대로 장대석을 조각한 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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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 전설 : 석가탑이 이곳에 비칠려면 창틀이 아래에

    있거나 벽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 이곳이 영지일 확률이 높다. 구품연지라 불리고

    있다.

    연화교, 칠보교 아래에서…

    ▲연화교/칠보교 ▲연화교-연꽃무늬가 선명하다.

    천수경 대목 중“나는 결정코 안양에 태어나

    서…”(원아결정생안양, 원아속견아미타)라고 하

    는 대목이 있다. 안양=극락이라는 뜻. 이 문구를

    아는 사람은 저 안에 어떤 부처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극락은 어떤 사람이 가는가? 극락은 죽어야 간

    다. (죽는다고 다 가는 것은 아니고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중) 사후 극락세계이므로….

    당간지주는 절의 입구인 일주문 밖에 세운다.

    ▲범영루

    ▲불국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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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당간지주의 북쪽에 절이 위치한다.

    그러나 불국사의 당간지주는 일주문 안에 있다. 천왕문, 일주문은 1970년대 복원한 것이

    다. (불국사는 천왕문과 일주문은 신라당시에는 없었다.) 원래 신라시대 절은 범위가 이곳인

    것이다.

    4개의 당간지주가 모두 다르다. 그러므로 3개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다. 원래는 2개

    가 한 세트이다.

    극락전으로 가는 길 석축

    불국사는 산지를 이용한 계단식 사찰이다. 그래

    서 축대가 가장 중요하다. 대표적 계단식 사찰이

    영주 부석사이다.

    부처님나라로 오면서 오르막 눈높이에 맞춰서

    평지를 걷는 느낌이 들도록....

    돌못을 이용해 축대를 튼튼하게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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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전 안 회랑에서…

    ▲배흘림 기둥 ▲대웅전 앞 회랑 배흘림 기둥

    청운교, 백운교는 다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계단이다. 다리 아래쪽은 인간세계, 위는

    부처님의 세계. 불국사에서는 공간사이의 거리를 다리로 구분함으로….

    그랭이법은 사찰에서는 많이 안 쓰고 민가에서 많이 쓴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건

    물크기, 기둥크기 등에 제한을 두었다. 그때부터 민가에서는 조각한 돌은 못 쓰게 함으로

    그랭이법으로 이어진다.

    기둥높이를 제한함으로 단을 높이게 되었다. 민가에서는 색을 칠할 수 없다. 궁궐, 관공

    서, 사찰, 사당, 향교 등에서만 채색 가능하다. 둥근 것은 하늘이며, 네모진 것은 땅이다. 따

    라서 하늘과 관련된 곳에서만 둥근기둥을 쓴다. 관공서는 임금이 나랏일을 보시는 곳이므

    로….

    둥근기둥도 이런 곳에서만 쓴다. 민가에서는 사각기둥을 써야한다.

    배흘림기둥도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일직선기둥은 가운데가 가늘어 보인다. 배를

    불려놓으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사람도 배가 나와야 안정감 있어 보인다. 배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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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끝까지 우긴다. 인품이라고….

    탑이 없는 절이 많다. 없는 이유는?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는 탑이 없다. 옆에 있다. 탑은

    부처님의 무덤이다. 극락전의 부처를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무량수불이니 돌아가시는 않

    는 부처이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를 모셔놓은 공간에서는 탑이 없다.

    극락전 석등 아래에 있는 것, 봉로대

    안상(아래쪽에 파놓은 문양)은 교자상

    의 다리 같다.

    상이니 뭔가를 올려야하는데 향로와

    촛대를 올린다. 바깥에 나와 있는 봉로

    대다. 야단으로 설명해도 무관하다.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야외에 단을 마련하고 법문을 듣기 위

    해 席을 마련했다. (사람이 워낙 많이 왔

    음으로…. 한 마디씩만 하여도 시끄럽다

    그래서 야단법석…)

    극락전 안의 부처님과 비로전의 부처

    는 국보이다. 김대성 설계 때부터 있던 부처이다.

    극락전의 부처의 수인 : 아주 쉽게 설법하고 있는 부처이다.

    극락전 옆의 48계단 : 아미타불의 중생

    을 위한 48가지 願을 세움. 16단× 3 = 48

    원교.

    소원의 다리로 가운데는 임금과 주지스

    님만이 통행이 가능하다.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남을 위한 실천을

    하겠다는 의미를 다지라는 뜻.

    ▲불국사 극락전 전경

    ▲불국사 금동아미타 여래좌상(국보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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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탑 앞에서…

    연꽃문양에서 2중인 것이 있다.

    통도사(통할 통, 인도 도) 뒷산의 이름이 영취산=영축산

    인도에 있는 산으로 석가탑 아래에 있는 막돌은 인도의 영

    축산을 의미한다.

    볍화경에 보면 다보부처가 예언하기를 나 외에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탑을 보내어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리라고 예언하고 석가여래가 도를 깨친후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을 탑으로 만든 것이 석가탑. 그래서 설법탑.

    다보탑은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탑.

    석가탑은 1966년 2번에 걸친 도굴이 있었다. 미수로 끝

    났으나 이때 2층 지붕돌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

    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0년경 인쇄)이 나왔다. 그 전

    까지만 해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770년경 인쇄)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줄 알았었는

    데…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다라니

    경의 재료가 신라지역에서 생산한 닥종이며, 신라 고

    유의 종이 가공법인 도침법이 사용되었으므로, 우리나

    라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부 옆에 벌어진 곳에 보이는 쇠붙이는 2개의

    돌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걸쇠, 고정 장치이다. 탑마

    다 다 들어있다.

    신라의 전형적인 탑이다. 각층 하나의 돌이다. 나무

    로 탑을 만들면 기둥세우고 지붕을 올린다. 목조3층탑

    은 3층짜리 주택이다. 지붕돌아래 계단처럼 한 것은 전탑에서 발전한 석탑이기 때문….

    대웅전 앞에서…

    설법인 : 우주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부처 중에서 중생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은 석가여

    래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면 대웅전이다.

    ▲석가탑-석가여래상주설법탑

    ▲석가탑의 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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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과 석등사이의 거리 & 양 탑과의 거리

    는 같다. 정삼각형에서 석등이 중간에 있는 것.

    여기에도 야단이 있다. 여기에 앉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부처님 얼굴을 (정면에서)못 본다.

    실제로 석등에는 창문을 달아 문종이를 했던

    듯하다. 신라시대에는 귀족만이 법당 안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다보탑 앞에서…

    같은 유형의 탑이 없다. 이유는 미스테리이다. 귀퉁이의

    기둥 안에 구멍이 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일제 때 완전

    히 해체했다가 다시 복원했으므로 사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른다. 사자는 기본적으로 네 모서리에 세워놓는데, 여기는

    한 마리만이 중앙에 있다. (3마리가 없어져 한 마리만을 모서

    리에 놓으면, 보기 흉하므로 옮겨놓은 것이다.)

    다보탑의 층수는 안나와 있다. 모양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없다. 다만 법화경 견보탑품에 수없이 많은 난간과 더

    불어 화려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위는 8각 아래는 4각이다. 위로 가면 또 둥글어진다. 부처

    님의 마음처럼.

    대웅전 지붕 아래에서…

    용과 봉황이 보인다.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다. 반야용선(인간세계에서 부처님세계로 건

    너가는 배는 용이 끈다고 한다.) 여의주를 물고 있으면 해탈한 용이고, 물고기를 물고 있으

    면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세속을 못 벗어난) 용이란 뜻.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도 함께

    가자는 뜻이 있다. 등용문-중국전설에 황하강에 용문폭포가 있는데 폭포아래 사는 잉어가

    폭포를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그것이 바로 등용문이다. 신분의 급격한 변화.

    등용문 고시원, 등용문입시학원, 인재양성의 등용문 등으로 쓰인다.

    ▲불국사 대웅전 전경

    ▲다보탑-다보여래상주증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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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설전 앞에서…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이 차이

    신라시대 절의 기본배치는 중문, 탑, 금

    당, 강당이다. 무설전은 강당이다. 이름만 보

    면 말이 없는 집 즉 참선하는 곳이라 많이

    생각한다. 하지만 불국사에서 제일 말 많은

    곳이다. 이런곳의 이름이 무설전이라니 재미

    있는 것이다. 불교의 심오한 전신세계를 보

    여주는 것이다.

    신라불교는 교종불교, 선종불교와의 차이

    는 화장을 하고 안하고의 차이.

    (교종: 교리를 중점으로 공부, 스님은 스님일 뿐이므로 부처가 될 수 없어 화장을 하지

    않음.)

    (선종: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되니 부처님과 같은 방법으로 장례를 치러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꼭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불교 설화 중에서 부처님께서 꽃을 든 의미를 말하지 않았지만, 가섭이란 사람만이 알아

    들음. →염화시중, 염화미소, 이심전심. 견성성불, 불립문자

    관음전 앞에서…

    계단 경사가 급한 이유 : 보타락가산이므로… 경사를 급

    하게 함으로써 높아 보인다.

    천수천안관음상 : 일천 천→많다는 뜻. 실제로 손이 많은

    것이 아니라 의미상 많았으면 좋겠다는 뜻.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근심을 없애주고 싶다. 즉,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형상화한 것. 똑같은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았

    지만 속초 낙산사는 원통보전이다. 관음보살이 사찰의 중심

    도량이 모셔지면 원통보전이다. 부속된 건물에 모셔지면 관

    음전. 재밌게 표현하면 집주인 이면 원통보전, 전세살면 관

    음전이다. 불국사 관음보살은 전세 산다. 영구 무상임대다.

    ▲무설전-강당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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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전 앞에서…

    비로전안의 비로자나부처님은 1250년 전에 만들어졌다.

    손의 위치가 반대이다. 지권인 (손가락 지, 주먹 권)이다.

    손가락을 감싸 안은 손(오른손)은 부처님의 몸이고, 감

    싸인 손가락(왼손)은 중생이다. 모든 것은 하나요, 모르는

    것과 아는 것도 하나라는 뜻.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

    미다.

    지권인의 왼 손과 오른 손이 많이 떨어져 있을수록 오

    래된 것이다. 대일여래라고도 한다.

    (비로는 빛을 상징)

    진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형상화한 것이다. 청정법

    신비로자나불이다.

    금강산 최고 높은 봉우리는 비로봉이다. 화엄경 주불

    이 비로자나이고. 그 아래 제자가 1만2천이다. 그래서 금

    강산의 봉우리가 1만2천이죠.

    -실험시간

    실험내용

    불국사는 천상의 부처님나라를 수평적인 공간에 흩어놓은 사찰이다. 또한 산을 깍고 사찰을 조성한 산지가람이다 보니 축대의 중요성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축대구조의 안정성을 위해 사용한 그랭이 공법과 이중의 홍예구조로 건축된 청운교, 백운교의 원리를 관찰을 통해 확인한다. 또한 나무는 방향에 따라 강도가 틀린다. 물에 통나무를 띄워보면 항상 일정부분이 아래쪽으로 가라앉는다. 이유는 무겁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아래쪽으로 오도록 목재를 배치하면 같은 나무로 좀더 안정적인 건축을 할 수 있다. 또한 삭탑등 석조물도 구조적 안정감을 위해 나비장이나 돌못을 사용했다. 관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학습효과

    튼튼한 건축, 과학적 설계능력 배양

    강사 신라사람들

    소요시간

    2시간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국보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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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동마을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지정 민속마

    을로서 중요 민속자료 제189

    호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한 이래 지금까

    지 세거하여온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양대문벌을 이루

    어 그들의 동족집단마을로

    계승하여 왔다. 먼저 입향한

    손씨는 이씨의 외가로서 손.

    이 양씨는 지금까지도 상호

    통혼을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마을의 대소사에 협동해오고

    있는데, 간혹 갈등과 분쟁을 야기 시키기도 한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16KM쯤 떨어져 있으며 넓은 평야에 임한 거꾸로 勿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로 안은 지형이다. 이 역수지형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 믿어지고 있다. 마을의 서편에는 실제로 부의 상징인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대부분의 지주가 과거에는 손. 이 양씨였으므로 ‘역수의 부’는 관념이 아니

    라 현실이었던 것이었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은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도 깊어

    서 포항쪽의 고깃배들이 일상 내왕하였기 때문에 해산물의 공급이 불편 없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지금은 수량도 줄고 바닥도 높아져서 어선의 내왕이 불가능하다.

    마을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승되어 온 이야기에 의하면 양동은 역대로 ‘외손이 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실제로 근거가 분명한 입향조는 손소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손소는 1459

    년 문과에 급제하였고,1467년 함경도 길주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그는 뒤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지금으로부터 520여 년 전에 장인인 유복하

    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지금의 월성 손씨 종가를 지었다고 한다. 현재 풍덕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한편 손소의 딸은 여강이씨 번

    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맏이가 동방 18현(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

    ▲경주 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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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되고 있는 이언적이다. 그는 외가인 손씨 대종가에서 출

    생하였다고 하며, 10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

    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언적은 양산, 김해, 상

    주등 손중돈의 임지로 따라 다니면서 수학을 하였으며 24

    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마을의 집들은 ㅁ자형이 기본으로, 거꾸로 勿자형으

    로 뻗은 구릉의 능선이나 중허리에 배열되어 있는데 그 배

    치가 듬성하고 능선마다 우거진 숲이 있어 접근해야만 모

    습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1979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대

    종가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집들은 대부분 ㅁ자형을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건축규모는

    대략 50평 내외이며 방은 10개 정도이다. 대지안에 사당을 모신 대종가와 파종가는 4가구

    이다. 이들 대규모 주택들에는 원래 한 집안에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주거처인 ‘행랑채’와

    외거노비들이 사는 초가인 ‘가랍집’이 40여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철거되어 텃밭으로

    변하였고, 이따금 잔존하는 초가는 이미 거주자가 바뀌었으므로 과거의 상대적 신분관계는

    해소되고 없는 셈이다.

    집을 볼 때 대문은 얼굴이고 지붕은 헤어스타일이다.

    향단→지붕이 날일(日)자 모양이다. 그래서 마당이 2개. 해와 같은 기운들이 가득 들어오

    라는 뜻이다. 민가이면서도 전체가

    맞배지붕(궁궐에서 쓰임)이다.- 권

    위를 갖고 있는 집. 중종임금이 이

    건물을 하사한다.

    퇴계 이황이 본 적은 없으나 존

    경한다고 한 이언적 선생님이 경상

    도 감찰사로 왔을 때 임금님이 하사

    한 집이다. 임금님이 하사한 집은

    궁궐에서 쓴다거나 절에서 쓰는 걸

    하나정도 둔다.

    서양건물과 동양건물의 차이는 ▲양동 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

    ▲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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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에 있다. 비 오는 날 동양건물은 비를 피할 수 있다. 지붕을 볼 수 있는 것이 동양건물

    이다. 오페라하우스- 동양건물보고 연구하고 설계한 지붕이다.

    동양건물은 처마가 특징, 한 건물 안에서도 여러 형태의 지붕을 볼 수 있다.

    관가정(볼 관, 심을 가) : 자기 집의 자기 들을 바라본다는 뜻. 높은 곳에 있다. 앞이 트여

    있는 것이다.

    ▲양동마을 풍수해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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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릉‘릉’이라 부르는 무덤은 왕이

    나 왕비의 무덤으로 이름(혹은

    시호) 뒤에 ‘릉’자를 붙인다. 그

    러나 괘릉은 신라 38대 원성왕

    의 무덤으로 전하며 전설에 못이

    었다고 한다. 못을 메우고 무덤

    을 만들었는데, 물이 무덤 안으

    로 스며들어와 관을 바닥에 놓지

    못하고 무덤 벽에 걸어 놓았기

    때문에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

    (掛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경표라는 조선시대 산맥지

    도에는 괘릉이 자리한 언덕이

    산맥으로 표시되어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산맥과는 개념이 다른데 우리의 전통적인 산맥의 개념은 물이 갈라지는 지역이라

    고 한다. 괘릉, 영지, 순지, 북토로 이어지는 곳은 물이 발원하여 갈라지는 곳이다. 괘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