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
성경 상응 요약 해설 창세기-출애굽기-요한 계시록 Bible Interpretation by correspondence from the Writings of Emanuel Swedenborg 배제형 편역 도서 출판 벽옥

성경 상응 요약 해설 - Bayside Church · 2016-04-24 · 성경 상응 요약 해설 창세기-출애굽기-요한 계시록 Bible Interpretation by correspondence from the

  • Upload
    others

  • View
    4

  • Download
    0

Embed Size (px)

Citation preview

  • 성경 상응 요약 해설 창세기-출애굽기-요한 계시록

    Bible Interpretation by correspondence from the Writings of Emanuel Swedenborg

    배제형 편역도서 출판 벽옥

  • 성경 상응 요약 해설창세기-출애굽기-요한 계시록

    Bible Interpretationby correspondence

    from the Writings of Emanuel Swedenborg

    이마누엘 스웨덴볽 원저배제형 편저

    도서 출판 벽옥

  • Arcana Coelestia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the book of Genesis

    EMANUEL SWEDENBORG

    Volume 1(Numbers 1–-1113)

    Translated from the Original Latin byJohn Clowes

    Revised and Edited byJohn Faulkner PottsSTANDARD EDITION

    SWEDENBORG FOUNDATIONWestChester, Pennsylvania

  • Whoso readth, let him understand Matt 24:15

  •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본 서는 성서를 자기 신앙의 근간으로 삼아 성서 안에서 생명의 원리를 찾고자 성서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분들, 그리하여 이제는 통독의 범위를 넘어 정독을 선택하고 싶은 분들에게 다시 한번 새로운 각도에서, 다른 차원에서의 깨달음에 도전해보지 않겠느냐?..를 권하고 싶어 집필했다. 성서 읽기는 예배 시간이나 그룹의 성경 공부시간, 혹은 여느 목사의 녹음 테이프를 통해서, 등등으로 읽혀 질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성서 읽기는 자기 스스로 읽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 이유는 자신을 위해 주님께서 보낸 천사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직접적으로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 내용을 크게 나눈다면 성서는 세 의미를 담고 있다. 자연적 의미는 글자 의미,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재료로 하여 이루어진 의미,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 우리의 이해에 쉽게 와 닿는듯 여겨지는 의미, 자연계 삶을 위한 의미라 말할 수도 있는 의미인 바 어쩌면 인간 수준의 의미, 예수의 “겉옷”에 해당되기에 찢어 나누어 가짐이 허용된 의미여서 이를 통해 수많은 교파나 이견이 돌출된다. 그러나 영적 의미는 어느 누구의 이견의 섞임이 허용되지 않는 의미, “위에서부터 통으로 짜여진 예수의 속 옷”에 해당되므로 제비뽑는 방식, 즉 섭리로 보호되는 의미, 천국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재료로 하는 의미, 천사의 이해에 와닿는 의미, 인간 영혼의 거듭남, 또는 구원에 관련된 의미이다. 천적 의미는 가장 깊은 의미로서 주님 자신을 알려주는 의미이나 인간 지성으로는 이해가 힘들런지 모른다. (요한복음 19:23) 성서는 의미 측면에서 위와 같이 대체적으로 세 의미로 분류된다. 그러나 각각의 구절, 또는 문맥에 따라 자연적 의미만, 자연적 의미와 영적 의미가 함께, 자연적 의미에 영적 의미, 천적 의미까지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천적 의미만, 때로는 천적 의미 외에 영적 의미도, 혹은 영적 의미만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를 우리로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지표는 선견자, 스웨덴볽의 몫, 그의 사명이였을런지 모른다. 성서를 대체적으로 분류해보면, 자연적, 영적, 천적 의미를 담고 있는 성경은 모세 오경,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시편, 대,소 예언서 모두, 4복음과 계시록이다. 그 외의 성서는 거의 자연적 의미만을 우리에게 전달하는바 이 성경은 스웨덴볽의 설명이 꼭 요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성서의 세 의미 중에서 자연적 수준의 의미인 글자 의미는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의미인바, 여느 특별한 교단의 교리나 꽤 인기가 있어 권위가 있을듯 한 설교자의 강론 등등이 필요 없다. 정성스럽게 읽는 것, 그리고 깨우침을 기다리는 곧바른 심정(understanding heart)만이 요구될 뿐이다. (열왕기상 3:9) 그러나 영적 의미 또는 내적인 의미는 극히 일부만이 글자 의미를 위해 글자에 들어나 있다. 한 구절만 예를 든다면, 요나서 마지막 장의 마지막 절 같은 경우이다. 성서의 첫 다섯 권의 모세로부터 계시록의 사도 요한에 이르기 까지 많은 이들이 부름은 받아 성서 완성의 일부를 담당했었지만 말

  • 씀의 내적 의미에 통괄적으로의 접근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인간의 지성이 그 때까지에서는 가능하지 않아서였다. 인간 이성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은 성서가 글자 의미 외에 더 함유하고 있는 것, 즉 내적 의미가 있음을 알아채고 있다. 이렇게 알아채는 이들의 구원은 내적 의미를 알려 주고 각자의 이해력에 선택을 맡기는 도리 밖에 없다. 이를 위한 주님의 사전 준비가 이마누엘 스웨덴볽을 도구 삼아 있어진 것이다. 성서를 읽지 않으면 주님의 직접적인 손길, 즉 권능을 맛볼 수 없다. 주님의 오심, 즉 우리가 주님을 뵙는 길은 주님이 하늘로 올라 가셨듯 우리의 영이 한 단계 더 깊이, 또는 더 높이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 즉 성서의 글자 의미 보다 더 깊고 높은 의미인 영적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사도행전 1:11). 성서를 직접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또 하나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으로 구름에 오시기”때문이다. 주님은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우리에게 내려 오시는게 아니라 영의 “구름들에, on the clouds” 오신다. (마태복음 24:30) 이 구름들이란 성서의 글자이다. 우리는 성서의 글자 더 나아가 성서의 줄거리를 각자의 기억에 담아 놓으면 이것이 사다리가 되어 천사를 통한 주님과의 대화가 있게 되며 그분께서 주시는 행복과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 성서를 읽어 자기의 기억에 들어 앉힌 성서를 통해 주님께서 허락하신 만큼의 영적 의미를 깨닫는 것이 여러 방도의 오심의 섭리 중 각 개인을 위한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다. 주님께서는 260여년 전 이마누엘 스웨덴볽을 도구로 삼아 그를 통해 각 개인과 인류의 구원에 충분한 양의 영적 의미를 인류로 하여금 알 수 있게 설비해두셨다. 본 서는 1750-70여 년 경에 출판된 위 선견자의 저술, 즉 창세기, 출애굽기의 주석서라 할 수 있는 천국의 신비함(Arcana Coelestia, 또는 Secrets of Heaven), 그리고 요한 계시록 풀이(Apocalypse Revealed)로부터 결론 부분 만을 취합해 아주 간략히 성서의 내적 의미 (천적, 영적 의미) 를 전달하고 있다. 이 내적 의미의 전달을 위해 본서의 성서는 위 선견자께서 상응에 의거한 정확한 의미 파악을 위해 본인 스스로 라틴어로 번역 사용한 것의 영역을 직역했기에 읽기에는 다소 꺼끄러움을 느끼겠지만 성서는 주님의 생각과 뜻을 전달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쓰신 주님의 책인지라 여느 흥미진진하게 스토리를 전개해가는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정독하면 오히려 보탬이 될 것이다. 성서 본문 외 인용한 성서들은 참조 성서 구절로 대신하고 생략하고 있는데 이 인용 성서의 경우 위 선견자는 쉬밑(Schmidt)의 라틴어 번역본을 주로 사용하였고, 위 선견자의 라틴어 원본은 Rector of St. John's Church, Manchester, and Fellow of Trinity College, Cambridge 이였던 The Late Rev. John. Clowes, M.A.에 의해 최초로 영어로의 번역이 시도되었다. 오래 전의 일반 신자는 성직자가 낭독하는 것을 듣거나 성직자에게 문의하여 그 답으로 들려오는 몇 구절만으로 신성에의 접근이 있었다. 종교 개혁 이후 꾸준히 이에 대한 기독인의 갈증은 해소되어 이제는 거의 모

  • 든 이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성경을 읽고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속의 영적 의미는 아직 까지는 고집적인 교리들의 벽이 기독인의 합리적 생각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이 합리적 사고에 곱씹어 볼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본인의 목적이다. 창세기, 출애굽기가 성서의 첫 두 권임은 기독인이라면 다 아는 바이지만 이 두 권의 책이 어쩌면 나머지 성서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 보는 일은 흔치 않다. 다시 말해 이 두 책은 성서의 여러 책 중에서 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은 자료도 수집해보고 하여 생각을 다듬어 자신의 교리를 정리하고, 설교 등등에서도 보다 더 비중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본인의 소견이기에 난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이 책을 마무리지으려 노력해보았으나 아직 미완성일 뿐이다.

    본 서에는 간략한 주석과 함께 참조 성서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은 위 선견자께서 해당 구절의 의미 파악을 위해 발췌했던 구절들이 많으므로 이해 여부를 떠나 한,두절이라도 찾아 읽는 정성을 발휘해 보시라. (요한복음 3:27). 홀로 예배를 위한 훌륭한 설교도 대신해 줄 것이다. 본서는 내용을 섭렵해보는 측면에 비중을 둔 관계상 이해의 깊이를 위해 다른 번역서 및 영역 내지 라틴 및 히브리어 성서까지 동원해 보아 비교 생각하는 꼼꼼함도 가끔은 꼭 필요하므로 빠른 읽기 보다는 오히려 대단히 천천히 읽으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thinker), 끈질김도 필요할지 모른다. (출애굽기 26장 1절)

    한가지 독자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책은 역자 혼자 만의 완성본이기에 많은 오류나 실수가 섞일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자 스스로 감독한다는 차원에서 미흡하다 싶은 점은 스스로 고쳐 더 완성된 당신 만의 책을 집필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어쨋건 성서라는 책 만큼은 인간의 재주로 가르치려드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주님의 책이기에 주님으로부터 성서 독자에게 직접 전달됨이 가장 완벽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부피 관계상 영어 원문이 대부분 생략되고 있어 좀더 깊이 살피려는 독자에게는 답답할지 모른다. 그러나 스웨덴볽의 라틴어역 성경의 영,한글판도 따로 출간했는바 영역은 그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본서의 최초 출판 라틴 원서 및 영문서 등등의 더 많은 자료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 바란다. WWW.BAYSIDECHURCH.ORG 다시 한번 더 부탁하고픈 말이 있다. 역자가 나름대로 최선의 번역을 시도한다 했지만 되돌아 보면 뭔가 부족한 것을 자주 발견하기에 주님께 무척 송구할 뿐이다. 역자 역시 평범한 사람이기에 생활에 쫒기긴 마찬가지이다. 단지 여행이나 취미생활을 모두 접고 그것을 이 번역 시간에 모두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불완전한 번역은 피하기 쉽지 않다. 하여, 이 번역서는 독자들의 원서 읽기에 참고하여 스스로 더 완전한 번역본을 소장하는 기쁨을 누려보길 바란다.

  • 6. 19. 2011. 뉴욕 베이사이드에서 배제형

  • 이마누엘 스웨덴볽 (Emanuel Swedenborg, 1688-1772)..... 그는 비상한 재능들을 부여받았었는데, 이 재능은 아주 독특하고 다양하기도 해서, 저명한 학자들은 그를 다방면에서 천재이다 라고 평가되는 아주 희귀한 몇 사람들 사이에 끼여 분류했다. 백과사전들은 많은 주요한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그의 비옥한 지성의 잘 익은 열매들로 진열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물질에 관한 근대 역학 개념을 예상했다; 혹성의 형성에 관한 성운설을 암시했다; 야금술 분야에서 처음 포괄적 작업들을 일궈낸 광산 엔지니어였다; 대수학에 관한 스웨덴의 교과서를 처음 준비한 수학자였다; 그리고 두뇌의 몇 구역의 기능과 관이 없는 선(glands)들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과학의 가장 바깥 영역들에 까지 이르는 한편, 스웨덴볽은 혼(soul)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위한 탐구에도 몰두했다. 이 탐구는 그가 영(spirit)의 아주 방대한 영역으로 돌아서고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영적 실재를 알아 채게 될 때 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었다. 그는 이 영적 실재를 “영적 시각” (영적으로 봄) 이라 불렀다. 그는 인간 혼의 발단과 성장에 관한 가장 완전한 서술이 성서에 있음을 발견했다. 스웨덴볽이 우리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그가 쓴 것들은 거기에 실제로 있는 것의 파편 조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파편 조각의 실재를 움켜쥔 애독자, 자신의 생명과 그 성장이 이 저술 안에서 반사(mirrored)되고 있음을 찾아내는 독자들은 성서를 위한 가장 드높은 이름인 “하느님의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인간의 진행에 대한 자비로운 이해를 발견할 것이다.

  • Emanuel Swedenborg (1688-1772) was endowed with extraordinary talents, so unique and varied that notable scholars have placed him among the vary few who qualify as a universal genius. Encyclopedias catalog the many major scientific discoveries and inventions - the ripened fruits of his fertile mind. He anticipated the modern dynamic concept of matter; suggested a nubular theory of the formation of the planets; was a mining engineer who produced the first exhaustive works on metallurgy; a mathematician who prepared the first Swedish text on algebra; and he discovered the function of several areas of the brain and ductless glands. While reaching the outermost boundaries of science, Swedenborg pursued his search for a rational explanation of the workings of the soul. It eluded him until he turned to the vaster realm of the spirit and became directly and intensively aware of spiritual realty, which he called "spiritual sight." He found the most complete description of the genesis and growth of the human soul as contained in the Bible. Swedenborg carefully reminds us that what he writes is merely a fragment of what is actually there. But the reader who grasps the reality of this fragment, who finds his own life and growth mirrored in this work, will discover a compassionate understanding of the human process that gives new significance to the loftiest name for the Bible - "The Word of God.'

  • - 13 -창세기

    1

    1 시작에서 하느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공허하고 텅비었고, 그리고 짙은 어둠이 깊음의 얼굴들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얼굴들 위에서 움직이셨다..

    3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4 그리고 하느님께서 빛을 보시

    창세기1

    내적 의미 해설1 “시작”은 가장 오래된 시간 (태고의 때, the most ancient time)을 말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옛 시절” 또는 “영원의 시절”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시작”은 인간이 거듭나아 가는 시기 중에서 처음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새로이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남 그 자체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라 불리운다. 참조 성서. 이사야 43장 7,15절, 시편 102편 18절, 104편 30절.2 “공허하고 텅빈 땅”이란 거듭나기 전의 인간이다. 또는 선과 진리의 어떤 것도 뿌려지지 않은 땅(ground)이라 말할 수도 있다. “공허, void"는 선이 전혀 없는 것을, ”텅빈, empty”은 진리가 전혀 없는 것을 명시 한다. 그런고로 있게 되는 것은 “짙은 어둠”, 즉 어리석음, 그리고 주님에 대한 믿음에 관련하여 모든 것에 무지함, 그 결과 영적인 것, 그리고 천국에 관한 모든 것에 무지함 뿐이다. “깊음의 얼굴들”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탐욕, 그리고 이 탐욕을 근원으로 하여 나오는 거짓이다. “하느님의 영”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한다. 암탉이 병아리가 부화될 때까지 알을 그의 깃털로 감싸서 내리 덮고 있듯 주님의 은총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물로서 감추어 두신 것을 움직(운행,move)이신다. 주님께서 보물로서 감추어 두신 것이 말씀에서 아껴두신 것(remains)로 불리우고 있다. 인간과 더불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인데, 이것은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결코 빛으로 오지 않는다. 이런 지식들이 여기서 “물들의 얼굴들‘이라 불리고 있다. 참조 성서. 예레미야 4장 22,23절, 이사야 51장 9-11절.3 “빛의 있음”이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인데, 이는 인간이 선한 것과 참된 것이 보다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할 때이다. 외적 인간은 선하고 참된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그는 자아사랑과 세상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선이라고, 이 사랑들을 좋아하는 모든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바, 이러한 선이 악이요, 이러한 진리가 거짓임을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새로운 것을 품기 시작하면, 그는 우선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해왔던 선은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 그가 빛에로 더 나아가면 그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 그분이 선과 진리 자체이시다는 것도 알기 시작한다. 참조 성서. 요한복음 8장 24절, 1장 1,3,4,9절.4,5 빛이 “선(good)”이라 불리웠는데 그 이유는 빛은 선 자체되시는

  • 창세기 1- 14 -니, 그것은 선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 사이를 구별하셨다.

    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그분은 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이었다.

    6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고, 그것이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를 구별되게 하라.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광활한 공간 아래에 있은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은 물들 사이에 구분이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8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둘째 날이었다.

    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모두 한 장소로 모이고, 마른 [토지]가 나타나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인간이 새로이 태어나기 전 자신에게 빛 같이 나타났던 모든 것, 인간 자체에 어울리는 모든 것을 뜻한다. 그러나 주님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낮”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낮은 빛에 속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 고유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밤”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밤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이다.5 이제는 “저녁”과 “아침”이 의미하는 것을 식별할 수 있다. “저녁”은 앞서 있는 모든 상태를 뜻한다. 그 이유는 저녁은 그늘 같은 상태, 또는 거짓에 속한 상태, 믿음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침”은 뒤이어 있는 상태, 빛에 속한 상태, 진리에 속한 것, 믿음의 지식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일반적 의미에서 “저녁”은 인간 자체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침”은 주님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참조 성서. 사무엘하 23장 2-4절, 다니엘 8장 14,25절, 이사야 8장6,9,13,22절, 23장 7,15절, 예레미야 6장 4절, 23장 7,15절, 33장 20,25절, 예레미야애가 5장 21절.6 주님의 자비(하느님의 영)은 낮으로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을 있게 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주신 빛은 주님이 계신다는 것, 그분은 선 자체시고, 진리 자체이시다는 것, 그분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떤 선도, 진리도 없다는 것이다. 참조 성서. 이사야 44장 24절.7 이제 그분께서는 내적 인간(internal man)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사이에 구분을 만드셨다. 다시 말해 내적 인간에 있는 주관적 지식(the knowledges)과 외적 인간에 있는 객관적 지식(the memory-knowledges, 기억 속의 지식)은 차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적 인간이 “광활한 공간”이라 불리우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주관적 지식은 “광활한 공간 위의 물”로, 외적 인간에 있는 객관적 지식은 “광활한 공간 아래의 물”로 불리우고 있다. 참조 성서. 이사야 43장 3,5절.8 이 구절은 5절과 같으나, 한가지만 더 첨가 한다. 인간 거듭남은 저녁으로부터 아침으로, 즉 객관적 지식으로부터 주관적 지식으로,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지상으로부터 천국으로,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매 단계에서나 매 순간에서나 공히 진행되어 간다. 그러므로 광활한 공간, 즉 내적 인간이 다음 절에서 “하늘(heaven)"이라 불리워지고 있다.9 인간이 자기에게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다는 것, 참된 것과 선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해 외적 인간으로 흐른다는 것이 알려 질 때 당사자에게 나타나 보이는 것은 그렇지가 못하다. 따라서 진리와 선들, 즉 거듭나는 인간에 있는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주관적 지식은 그의 기억에 저장되고 그의 객관적 지식인 듯 분류되어 있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의 기억에 은근히 심어진 것들, 그것이

  • 창세기 1 - 15 -

    10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른 [토지]를 땅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것은 선이었다.11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부드러운 풀잎을 내고, 풀잎은 씨를 맺으라, 그리고 과일 나무는 땅에서 그 자체 안에 씨를 가진 과일을 그 종류대로 맺으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12 그래서 땅은 부드러운 풀잎,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풀잎을, 그 자체 안에 씨가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놓았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이것은 선이었다.

    13 저녁과 아침은 셋째날 이었다.14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 낮과 밤이 구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표시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 있게 하라.15 그리고 그것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있는 발광체들을 위해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주님에 관련되는) 것이든, 무엇이든 거기서는 객관적 지식으로 있는다. 그런다음 주님께서 인간 거듭남을 위해 필요하실 때 꺼내진다. 이 지식들이 “한 장소로 함께 모인 물들”이다. 그리고 “바다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외적 인간 자체는 “마른 장소”라 불리웠지만 다음 절부터는 “땅, earth”으로 불리우고 있다.10 “물들”이 지식들(주관적, 객관적 지식 모두)을 의미하는 경우는 말씀에서 아주 많다. 따라서 이런 지식들이 쌓인 것이 “바다”로 불리워지고 있다. 참조 성서. 이사야 11장 9절, 19장 5,6절, 학개 2장 6,7절, 스가랴 14장 7,8 절 시편 69편 33,34절, 스가랴 12장 1절.11,12 “땅”, 즉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천적(celestial)인 씨를 받도록, 그리고 선하고 참된 것에 속한 어떤 것을 생산하도록 준비되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먼저 연약한 어떤 것이 돌출되게 하신다. 이것이 “부드러운 풀잎”이라 불리워 진다. 더 상세하게 말하면 결실을 맺는 선한 어떤 것인데 이것이 “과일을 내는 나무, 그 종류대로 그 자체 씨를 지닌 과일”이라 불리워 진다. 거듭 나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처음 있게 되는 자질은 자신이 행한 선, 자기가 말한 진리가 자신으로부터라고 여기는 것이다. 실지로 선과 진리는 그 자체 되시는 주님으로부터인데 자신의 것인 냥 여길 경우 이는 참된 믿음의 생명을 아직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나 차후 참 생명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는 지금 믿음의 생명을 받을 준비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런 상태는 생명 없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믿음의 상태는 생명 있는 것이다. 인간의 거듭나는 세 번째 단계는 회개하는 상태, 즉 그늘에서 밝음으로, 저녁으로부터 아침을 맞는 상태이다. 참조 성서. 마태복음 13장 19-24, 37-39절, 마가복음 4장 14-21절, 누가복음 8장 11-16절, 마가복음 4장 26-28절, 누가복음 17장 20,21절.13절. 5절 참조.14-17 “큰 발광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믿음이 새로이 창조되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지를 먼저 알아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의 참 본질과 그 생명은 주님 바로 그분이신바,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가질 수 없다. 새로이 창조되고 있는 이들에서의 믿음의 발전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선하고 참된 것만이 생명이 있을 뿐, 거짓과 악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은

  • 창세기 1- 16 -있게 하여 땅에 빛을 주게 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1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개의 큰 발광체를 만드시고,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고, 보다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땅에 빛을 주도록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두었다.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수단으로 생명을 받는데, 처음에는 지식에 불과 할 뿐인 기억 속의 믿음을 수단으로, 그다음 지적인 믿음인 이해함에 있는 믿음을 수단으로, 마지막으로 구원하는 믿음인 사랑의 믿음, 즉 심정에 있는 믿음을 수단으로 생명을 받는다. 위 세 종류의 첫째와 둘째 단계의 믿음은 생명 없는 것을 수단으로 3절로부터 13절에 걸쳐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나 생명 있는 것을 수단으로 20절로부터 25절에 표현되어져 있는 것은 사랑을 수단으로 살아 있는 믿음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믿음이 먼저 취급되는데, “발광체들”이라 불리우고, 그 중 사랑은 “낮을 규율하는 더 큰 발광체”,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믿음은 “밤을 규율하는 보다 작은 발광체”로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발광체는 하나를 만들어야 하기에 복수가 아닌 단수로 말해지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사랑과 믿음은 외적, 육체적 인간에 있는 열과 빛 같다. 그런 이유로 사랑과 믿음은 열과 빛을 수단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 발광체들을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둔다”라고, 또는 내적 인간 안에 놓는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즉 큰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의지에, 작은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이해함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이 발광체가 의지와 이해함에서 나타나는 것은 마치 태양의 빛과 그 빛을 받는 대상과의 관계에서와 같은 경우에서만이다. 사랑을 가지고 의지에, 진리 또는 믿음을 가지고 이해함에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 뿐이다. 사랑과 믿음이 처음에는 “큰 발광체들”이라고 불리우고, 그후 사랑은 “더 큰 발광체”로, 믿음은 “보다 작은 발광체”로 불리우고, 사랑은 “낮을 규율하고,” 믿음은 “밤을 규율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태고 교회(most ancient church)는 사랑 자체 만을 믿음으로 인정했다. 천적인 천사들(celestial angels)은 사랑 속에 있는 믿음 외에는 믿음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보편적인 천국은 사랑의 천국인데 그 이유는 사랑의 생명 외에 더 다른 생명은 천국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의 모든 행복이 파생되는데 이 행복은 너무나 크고 위대해서 여느 인간의 생각으로 그려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이들, 심정(heart)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든 사랑, 모든 생명, 모든 행복은 오로지 주님 만 으로부터 올 뿐, 자신들로부터는 조금도 오지 않음을 지각하여 알고, 선언하기 까지 한다. 사랑과 믿음의 분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둘의 구성 요소는 똑같은 것인바 하나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광체”들이 처음 언급될 때 이들은 하나로서 간주되어 말해졌다. 발광체들은 “표시와 계절과 날들과 해들을 위해” 있을 것이라고 말해졌다. 이 말들은 글자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비쳐지지만 지금

  • 창세기 1 - 17 -

    18 낮에 규율함, 그리고 밤에 규율함,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분함;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선이었음을 보셨다.19 저녁과 아침은 넷째 날이었다.20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은 기는 것(동물),(과) 살아 있는 혼(soul)을 기게 하는 원인이 되라. 그리고 새(fowl)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의 위쪽, 땅 위에서 날으라.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큰 고래들, 그리고 물들이 각 종류대로 기게 한 기는 모든 살아 있는 혼, 그리고 날개 달린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것은 선이었다.22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것들에 복주셨고 말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그리고 바다들

    밝혀 아는 것을 훨씬 넘는 신비로움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극히 간단한 몇마디만 언급하겠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세부적으로 교차하는데 이것이 날과 해의 바뀜에 비교되고 있다. 날은 아침으로부터 정오를 지나 저녁이 되고, 밤을 통과해 다른 아침으로 교차된다. 해의 바뀜도 이와 비슷해서 봄으로부터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을 통과하여 다른 봄과 교차한다. 이로부터 열과 빛의 교차도 있는다. 이런 바뀜이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교차에 비유되고 있다. 이와같은 변화와 다양해짐이 없는 생명은 일정 불변하여 결과적으로 생명 자체가 없다. 따라서 선과 진리를 식별함도, 구별함도 가능하지 않다. 이와같은 교차가 예언서에서 “정해진 일(ordinance)"이라 불려지고 있다. 참조 성서. 요한복음 3장 36절, 에스겔 32장 7,8절, 이사야 13장 9,10절, 요엘 2장 1,2,10절, 이사야 60장 1-3,20절, 시편 136편 5-9절, 148편 3,4절, 출애굽기 27장 20,21절, 마태복음 24장 29절, 마태복음 17장 2절, 마태복음 7장 21,22절, 마가복음 13장 18,19절, 마가복음 12장 29-31절, 마태복음 22장 37-41절, 예레미야 31장 35,36절.18 “낮”은 선을, 밤은 악을 의미하는 바, 선은 낮의 일이고 악은 밤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빛”은 진리를, “어둠”은 거짓을 의미한다. 참조 성서. 요한복음 3장 19,21절.19 5절 참조.20 “물들이 내놓은 기는 것들”이란 외적 인간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새”들은 내적 인간에 속하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바 여기서 “생 혼, living soul”으로 의미되고, 생 혼도 육체가 지니는 종류들을 가지고 있는 바 “그 자체 움직이는 것”, 또는 “기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참조 성서. 마태복음 13장 37절, 누가복음 18장 19절, 이사야 50장 2,3절, 에스겔 47장 8-10절, 예레미야 4장 25절, 호세아 2장 18절.21 “물고기들”, 즉 기억 속의 지식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수단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큰 고래들”이란 기억된 지식의 일반적인 원리들을 의미한다. 세세한 원리들은 이 원리에 종속되어 있게 된다. 참조 성서. 에스겔 29: 3, 32: 2, 이사야 27장 1절, 예레미야 51장 34절.

    22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그 자체 광대하게 열매 맺고 번성한다. 이는 인간이 육체를 지닌 때 뿐만 아니라 다른 삶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말씀에서 “열매 맺음”은 사랑에 속한 것을, “번

  • 창세기 1- 18 -에 있는 물들을 채우라, 그리고 새는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23 저녁과 아침은 다섯째 날이었다.24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그 종류대로 살아 있는 혼을 내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그 자체 움직이는 것,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2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것은 선이었다.

    성함”은 믿음에 속한 것을 서술한다. 사랑에 속한 “열매”는 “씨”를 함유하고, 이 씨를 수단으로 그 자체 굉장하게 번성한다. 말씀에서 주님의 “복 주심” 역시 열매맺음과 번성함을 의미한다.23 5절참조24,25 인간은 땅 처럼 그 자신으로 하여금 믿어져 행동하게 하는 믿음에 관한 지식이 자기 안에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에 관련되는 어떤 것도 생산할 수 없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함 쪽이 담당하고, 들은 것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의지 쪽이 담당한다. 이해에 속하는 것은 “물이 내놓은 기는 것”과 “땅 위, 그리고 광활한 공간의 새들”이다. 의지에 속하는 것은 “땅이 생산하는 생 혼”, 그리고 “짐승”과 “기는 것”, “땅의 야생 동물”로 의미되고 있다. 짐승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해를 주는 악한 것, 해를 주지 않는 선한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악들은 악한 짐승, 즉 곰, 늑대, 개 등등으로 의미되고, 선하고 온화한 것은 양, 송아지 등등으로 의미된다. 이 구절의 “짐승”은 거듭남에 관련되므로 선하고 온화한 애착심(affection)을 의미한다. 인간 안의 보다 더 낮은 수준의 애착심은 육체에 더 가까운 연결을 지니므로 “땅의 야생 동물”로 불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탐욕과 쾌락(cupidities and pleasures)이다. 이 구절은 같은 단어들이 반복되는데, 24절에는 “생 혼 -> 짐승 -> 땅의 야생 동물”의 순서로 내놓은데 비해, 25절은 순서가 바뀌어 하느님께서 “땅의 야생 동물 -> 짐승”의 순서로 창조하셨다. 이는 거듭남이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어 내적 인간으로 진행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인간의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 즉 그가 믿음의 원리로부터 말할 때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 원리는 이해성에 속하는 원리인데, 이로부터 그는 참되고 선한 것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이런 사람이 내놓는 것들은 살아 움직이는 바 “바다의 고기”, “하늘의 새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러면 그는 여섯째 상태로 넘어간다. 즉 그는 이해성에 속하는 믿음으로부터, 파생되어지되 의지에 속하는 것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 이때 그가 내놓는 것은 “생 혼”, 그리고 “짐승”이라 불리운다. 그다음 그가 믿음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하기 시작할 때 그는 영적 인간이 되는데 이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이라 불리우는데 다음 절이 취급한다. 참조 성서. 마태복음 7장 24,26절, 에스겔 36장 9,11절, 요엘 2장 22절, 시편 73장 22절, 호세아 2장 18절, 욥 5장 22,23절, 에스겔 34장 25절, 이사야 43장 20절, 에스겔 31장 6절, 시편 148편 2,7,9,10절, 계시록 7장 11절, 19장 4절, 마가복음 14장 15절.

  • 창세기 1 - 19 -26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형상에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와 하늘들의 새와 짐승과 모든 땅,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자

    2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분 고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형상 안에서 그분은 그를 창조하셨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계속 채우라(replenish),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하늘들의 새, 땅위에서 기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려라.2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에게 온 땅의 얼굴들에 있는 씨를 맺는 모든 풀잎, 그리고 열매 있는 모든 나무를 준다; 씨를 산출하는 나무, 그것

    26 형상(image)은 모습(likeness)은 아니고, 모습에 의거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모습을 따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이 “형상”에 해당되고,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이 “모습”에 해당된다. 본 장에서는 영적 인간이,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이 취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형상”에 해당되는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 또는 “친구”라 부르시고 있다. 그 반면 주님께서는 “모습”에 해당되는 천적 인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시고 있다. 영적 인간의 다스림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다스림의 순서가 바다의 고기 -> 하늘의 새 -> 짐승 -> 온 땅 -> 땅을 기는 것들로 이어지고 있으나, 천적 인간이 될 경우 그는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하는바, 그의 다스림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으로 진행되기에 주님께서는 이를 시편에서 짐승 -> 하늘의 새 -> 바다의 고기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으시다. 참조 성서. 요한복음 12장 35,36절, 14장 14,15절, 요한복음 1장 12,13절, 시편 8편 6-8절, 예레미야 4장 23,25절, 에스겔 1장 26절, 다니엘 7장 13,14절, 마태복음 24장 30절, 이사야 44장 24절, 요한복음 12장 35,36절 요한복음 15장 14,15절, 1장 12,13절, 시편 8편 6-8절.27 여기서 “형상”이 두 번 언급되어 잘못 기록된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거듭 말해진 이유는 이해성에 속하는 것인 믿음은 “그분의 형상”에 해당되는 한편, 의지에 속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형상”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에서는 사랑이 믿음의 뒤를 잇지만 천적 인간에서는 사랑이 믿음에 앞선다. 영적 인간의 이해는 “남성”에 해당되고, 의지는 “여성”에 해당된다. 이 둘이 하나로서 행동될 때, 태고 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서는 이를 결혼이라 불렀다.28 태고 교회 사람들은 이해함과 의지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불렀는바, 그들은 이 결혼으로부터 생산된 선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열매 맺음”이라 말했고, 진리로부터의 모든 것을 “번성함”이라 말했다. 참조 성서 에스겔 36장 11,12절, 마태복음 13장 31,32절, 이사야 62장 4절.

    29 천적 인간은 그의 생명에 일치하는 것인 천적인 것으로만 기쁨을 갖는바 그의 양식은 천적 양식이라 불리운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을 가지고 기쁨을 갖는다. 따라서 영적 양식이 그의 생명과 일치한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인 것으로 기쁨을 향유한다. 자연적인 것이 그의 생명

  • 창세기 1- 20 -은 너에게 양식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30 그리고 땅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에게, 그리고 살아 있는 혼이 있는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 푸른 모든 풀잎은 양식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고, 바라보니 그것은 참 선이었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여섯째 날 이었다.

    과 같은바 양식이라 불리우고 통상 기억 속의 지식에 있다. 이 장에서는 영적 인간이 다루어지는 바 그의 영적 양식이 유사물(representative), 즉 “씨맺는 풀잎”, “열매 있는 나무”, “씨를 산출하는 나무”를 가지고 묘사되고 있다. 그의 자연적인 양식은 30절에서 묘사된다. “씨를 맺는 풀잎”이란 사용(use)하고 있는 모든 진리이다. “열매 있는 나무”란 믿음으로부터의 선이다. “열매”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양식이다. 한편 “열매를 생산하는 씨”는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양식이다. 그러므로해서 “씨를 산출하는 나무는 너에게 양식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조 성서. 에스겔 47장 12절, 시편 23편 1,2절.30 영적 인간의 음식이 여기서 묘사되고 있다. 그의 자연성이 “땅의 야생 동물”과 “하늘의 새”를 수단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양식으로 야채와 풀잎의 푸름이 주어지고 있다. 참조 성서. 시편 104편 11-15절.

    31 이 상태가 앞의 구절에서 “선, good”이라 불리운 것과 달리 “참 선, very good”이라 불리워 선이 강조된 이유는 믿음 속에 있는 것들이 사랑 속에 있는 것들과 하나를 이루어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혼이 결과되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지식에 관련되는 모든 것은 영적인 것(spiritual)이라 불리우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관련되는 모든 것은 천적인 것(celestial)이라 부르는데, 전자는 인간의 이해함(understanding)에, 후자는 인간의 의지(will)에 속한다. 인간 거듭남의 때와 상태는 일반적으로나 특수적으로나 여섯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이것이 인간 창조의 6일이라 불리운다. 즉 처음의 인간은 전혀 사람이 아니나 차츰 차츰 사람이 되어가서 결국 여섯째 수준에 도달되어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인간이 여섯째 수준에 이르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를 위해 악과 거짓과 싸워 주신다. 주님께서는 전투를 수단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한다. 전투하는 시기는 주님께서 일하시는 때 이다. 그러므로 예언서에서 거듭나는 인간을 하느님의 손가락의 일이라 부르고 있다. 그분은 인간이 사랑을 제일 원리로 해서 행동할 때까지 절대 쉬시지 않는다. 주님의 일이 대단한 진전을 하게 되어 믿음이 사랑과 결합될 때, 이것이야말로 “참 선, very good”이라 불리운다. 그렇게 불리우는 이유는 이제 주님께서 그를 그분의 모습으로 움직이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 마지막에서 악령은 그를 떠나

  • 창세기 1 - 21 -가고 선한 영이 악령의 자리에 대신 들어 앉고, 이 인간은 천국에, 천적 낙원에 소개 되어지는데 이는 다음 장의 관심사 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야말로 최고의 참 생명(veriest life)이다. 이 의미는 글자의 의미로부터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의미는 너무나 신비스러운 바 확연하게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우리는 매우 간단한 정도, 즉 이 장에서는 거듭남이 취급된다는 것, 이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진행된다는 것,등등만 확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천사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지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성경의 글자 한 자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말씀에 있는 나라들 도시들, 강들, 사람들을 알지 못하나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 만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낙원에 있는 아담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태고 교회를 지각하나 그것도 그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 속의 것, 즉 주님에 대한 믿음을 지각할 뿐이다. 노아를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의 남은 후손들로부터 아브람의 때 이전까지 있었던 교회를 지각한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을 수단으로 말씀을 지각하되 아브라함이라는 역사 인물이 아닌 그가 표현했던 것, 즉 구원하는 믿음을 지각한다. 이런 식으로 천사들은 단어나 이름 등등과는 동떨어진 영적이고 천적인 것만을 지각한다. 일반적으로 말씀에는 네 가지 다른 문체(style)가 있다. 첫째는 태고 교회의 유형이다. 그들은 지상의 생물이나 세상의 것이 언급될 때 그 즉시 그것들이 표현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해낸다. 그러므로 그들은 표현물들을 가지고 자신들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일종의 역사적 시리즈로 꿰어 자신들에게 더 많은 생명을 주게 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 지극히 높은 수준의 기쁨을 안겨 주었다. 한나가 예언했던 문체에서 그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높은 것을 말하라! 높음이여! 고대의 것이 네 입에서 나오게 하라.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사무엘상 2:3). 이와같은 표현들이 다윗서에서 “알기 어려운 옛 말, Dark sayings of old”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시편 78:2-4 참조). 모세는 창조에 관한 세부사항들, 에덴의 동산,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오는 일련의 말씀들을 태고 교회의 후손들로부터 가졌다. 둘째 유형은 역사적인 것들 이다. 이는 아브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모세의 책,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그리고 열왕기서에서 발견된다.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은 글자의 의미와 똑같다. 그럼에도 그 책들 모두는 내적 의미를 지녔는데 이 의미는 글자 의미와는 아주 다르다. 셋째 유형은 예언적인 유형이다. 이 문체는 태고 교회에서 아주 소중하게 간직했었던 문체로부터 태어났다. 어쨌든 이 문체는 문장끼리 연결되는 것도 없고 태고적 문체 같은 역사적 윤곽을 가지기는 했으나 깨져 있고 내적 의미를

  • 창세기 1- 22 -제외하면 지성으로는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주 깊은 신비를 담고 매우 매끈한 순서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교회의 여러 다른 상태들에, 천국 자체에, 그리고 주님에 대한 아주 깊은 의미에 관련을 맺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가 지닌 유형이다. 이 문체는 예언적 문체와 보통의 언어의 중간쯤 된다.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고 있다.

    내적 의미 요약 인간의 거듭남은 아주 많은 상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를 아주 간단히 요약한 것이 본문의 여섯 날, 또는 여섯 시기이다. 첫 상태는 유아의 상태를 포함하여 거듭남 이전 즉시 선행되는 상태이다. 이것이 “공허, void”, “텅빔, emptiness”, 그리고 “짙은 어둠, thick darkness”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자비인 첫 활동은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얼굴들 위에서 움직인다” 이다. 둘째 상태는 주님에 속하는 것들과 인간에게 적절한 것들 사이에 구분이 지어지는 때이다. 주님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아껴두신 것, remains”이라 불리고 있다. 여기서 특별하게는 믿음에 관한 지식이다. 이것은 유아 시기에 배워진 것인데, 이것은 (장래 쓰여지기 위해 소중히) 간직되고, 인간이 이 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 까지 당사자에게 좀처럼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이나, 불행, 슬픔, 같은 것 없이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시험, 불행, 슬픔 등등을 수단으로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 즉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것들은 정지 상태를 가져오는데, 마치 그것들이 죽은 듯 하다. 이리하여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이 내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로부터 분리되어진다. 이 때에, 장차 사용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내적 인간 안에 “아껴두신 것”을 저장하신다. 셋째 상태는 회개에 관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으로부터 경건하게 진심어리게 말하고, 선행의 일들 같은 선들을 산출한다, 이것이 선에 속한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없다, 그 이유는 그는 그 선이 자신으로부터 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선들이 “부드러운 풀, grass”이라 불리고 있고, 또한 “씨를 산출하는 풀잎, herb", 그 후 “열매를 맺는 나무”라 불리고 있다. 넷째 상태는 인간이 사랑으로 감동되고 믿음을 수단으로 계발되는 상태이다. 그는 참으로 경건하게 말도 하고, 선들도 생산하나,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시험과 곤란함 아래 땀흘리다 있어진 결과에서 이었을 뿐, 믿음과 선행 (faith and charity)으로부터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과 선행이 그의 내적 인간 안에서 점화되고 있다. 이것이 두 발광체들 이다.

  • 창세기 2 - 23 -

    2

    1절. 하늘과 땅은 마무리되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

    2절.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느님께서는 만들어 가시던 그분의 일을 끝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일곱째 날에 만드시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

    다섯째 상태는 인간이 믿음으로부터 강연을 하고, 그럼으로 해서 자신을 선과 진리 안에서 확증할 때이다. 그 다음 그 자신에 의해 생산되는 것들은 살아 있어 움직인다, 그래서 “바다의 고기” 그리고 “하늘들(천국들)의 새들, birds of heavens”이라 불린다. 여섯째 상태는 믿음으로부터,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그가 참인 것을 말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상태이다. 이리하여 그가 산출하는 것들은 “생 혼, living soul”과 “짐승”이라 불리고 있다. 그 다음 그가 믿음과 사랑, 모두로부터, 함께, 동시에 행동하기 시작할 때, 그는 영적 인간이 되어간다. 이 인간이 “모양, image"이라 불리고 있다. 그의 영적 생명은 믿음에 관한 지식과 선행의 일들에 속하는 것들을 수단으로 지탱되고 기쁨도 있는다. 이것이 그의 ”음식“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자연적 생명은 육체와 감각에 속하는 것들에 의해 지탱되고 기쁨도 얻는다. 이때로부터 전투가 발생되고, 이 전투는 사랑이 지배권을 획득할 때 까지 이다. 그리고 그는 천적 인간이 되어간다. 거듭나아가고 있는 이들이다 해서 모두가 한결같이 여섯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아주 많은 이들이 첫째 상태에만 도착한다. 그 다음 얼마의 사람들이 둘째 상태에, 셋째 상태에, 넷째 상태에, 다섯째 상태에 도착하고 극히 일부는 여섯째 상태에, 일곱째 상태에 도달하는 자는 거의 없다.

    2내적 의미 해설

    1 이 구절은 이제 인간이 여섯째 날을 통과하여 영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늘”은 그의 내적 인간이고, “땅”은 그의 외적 인간이다. “그들 속의 모든 것”이란 사랑, 믿음, 그리고 사랑과 믿음에 관한 지식이다. 이 세 가지는 앞 장에서 “큰 발광체”와 “별”로 의미되었었다. 이 구절은 “...마무리되어졌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여섯째 날”에 이르면 사랑과 믿음이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를 이루면 믿음이 아닌 사랑이, 바꿔 말하면 영적 수준의 원리가 아닌 천적 수준의 원리가 그의 제일 가는 원리가 된다. 즉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되는 것이다. 참조 성서. 이사야 13장 12,13절, 2장 13,16절.2,3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 주님께서 육 일 동안 일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모든 전투가 중단되었으므로 주님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신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기에 일곱째 날은 성별되었고 안식일 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어에서 안식일은 쉼

  • 창세기 2- 24 -셨다.3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만드시고 창조하셨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 때문이다.4절. 하늘과 땅의 태생(nativities)이 이러하다, 즉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던 그 날, 그분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이다.

    5절. 땅에는 들판의 관목이 아직 없었고, 그리고 성장하는 들판의 풀잎이 아직 없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6절. 그리고 그분께서는 땅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오게 하시어 지면의 모든 얼굴은 적시워졌다.7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지면으로부터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그의 코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living soul) 되었다.

    8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에덴 안에

    을 의미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창조되었고, 형태를 갖추었고, 만들어졌다. 참조 성서. 마가복음 2장27절서, 민수기 10장 35,36절, 이사야 58장 13,14절, 45장 11,12,18,21절, 43장 7절.

    4 “하늘과 땅의 태생"은 천적 인간의 형성(formation)이다. 이 인간의 형성이 여기서 취급된다는 것은 뒤 이은 구절의 세부 사항들로부터서 명백해진다. 즉 풀잎이 아직 자라지 않았다... 경작할 사람이 없다...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내신 후에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 사실 짐승이나 새 등은 이미 앞 장에서 창조되었었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명백한 것은 여기서 또 다른 사람이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명백한 것은 여기서 주님이 처음으로 ”여호와 하느님“이라 불리워지는 점이다. 이에 비해 영적 인간을 다룬 앞장에서는 주님이 단순히 “하느님”이라 불렸다. 또한 앞 장에서 “땅(earth)”이라 말해졌는데 여기서는 "들판(field)"과 "지면(ground)"이 언급되고 있다. 이 절에서는 “땅”에 앞서 “하늘”이 먼저 언급된 후 “하늘” 앞에 “땅”이 등장한다. 이런 이유는 “땅”은 외적 인간을 의미하고, “하늘”은 내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 인간의 재구성(reformation)은 “땅”, 즉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데 비해 천적 인간의 재구성은 “하늘”, 즉 내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5,6 “들판의 관목”, “들판의 풀잎”은 그의 외적 인간이 생산하는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 영적 수준에 머물고 있을 경우 그의 외적 인간은 “땅”이라 불리워진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될 경우 그의 외적 인간은 “들판”, 또는 “지면”이라 불리워 진다. 후에 “안개”로 불리워 지는 “비”는 전투가 중단될 때 오는 평화의 고요함 이다. 천적 인간의 상태에는 우선 평화의 고요함이 선물되고 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다. 그리하여 악과 거짓된 것의 노예됨에서 해방된다. 참조 성서. 에스겔 34장 25-27,31절, 호세아 6장 2,3절, 에스겔 16장 7절, 이사야 60장 21절.7 “지면(ground)의 먼지로부터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의 외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 인간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는”것은 그에게 믿음과 사랑이라는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생 혼이 되었다”란 그의 외적 인간 또한 살아 있게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참조 성서. 예레미야 애가 4장 20절, 요한복음 20장 22절, 3장 8절, 시편 104편 29,30절, 욥 32장 8절, 33장 4절.8 “동산”은 총명을, “에덴”은 사랑을, “동쪽”은 주님을 의미한다. 그런

  • 창세기 2 - 25 -동쪽으로 동산을 심으셨다, 그리고 거기에 그분은 그분께서 만드신 사람을 두셨다.9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바라보기에 바람직하고 양식으로 좋은 모든 나무가 자라게 하셨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생명들(lives)의 나무가 있었고, 그리고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10절. 강이 에덴으로부터 나와서 동산을 적셨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머리가 되었다.

    11,12절.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다. 이 강은 금이 있는 곳, 하윌라 온 땅을 에워싸고 있다.12 이 땅의 금은 선(good)이다. 거기에는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onyx stone)도 있었다.

    13절. 그리고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고. 구스 온 땅을 에워싸고 있다.

    14절. 셋째 강의 이름은 히데겔이고, 이 강은 아시리아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이다.

    고로 “에덴의 동산 동쪽으로”에 의해서는 천적 인간의 총명을 의미하게 된다. 이 총명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천적 인간 안으로 흘러든다. 참조 성서. 이사야 51장 3절, 에스겔 43장 1,2,4절.9 “나무”는 지각(perception)을 의미한다. “바라보기에 바람직한 나무”란 진리를 지각함을, “양식을 위한 좋은 나무”란 선을 지각함을, “생명들의 나무, tree of lives”란 지각함에서 파생된 사랑과 믿음을,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란 오감에서 끌어낸 믿음, 또는 기억 속의 지식(객관적 지식)으로부터 끌어낸 믿음을 의미한다.10 “에덴으로부터의 강”이란 사랑으로부터의 지혜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에덴”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동산을 적심”은 총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네 머리로 갈라졌다”는 것은 네 강을 수단으로 하는 총명에 대한 묘사이다. 참조 성서. 이사야 58장 10,11절, 민수기 24장 6절, 예레미야 17장 7,8절, 에스겔 31장 4,7-9절, 47장 1,8,9,12절, 계시록 22장 1,2절.11,12 “첫째 강” 또는 “비손”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믿음 속의 총명을 의미한다. “하윌라의 땅”은 마음(mind)을 의미한다. “금”은 선을, “벧엘리엄과 호마노 돌”은 진리를 의미한다. “금”이 두 번 언급된 이유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있고, 사랑으로부터의 믿음에서 나오는 선이 있기 때문이다. “벧엘리엄과 호마노 돌”의 경우, 전자는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를, 후자는 사랑으로부터의 믿음에서 나온 진리를 의미한다. 이와같은 인간이 천적 인간이다. 참조 성서. 에스겔 28장 4절, 이사야 60장 6절, 마태복음 2장 1,11절, 시편 72편 15절, 출애굽기 28장 9-22절, 에스겔 28장 12,13,15절.13 “기혼”이라 불리는 “둘째 강”은 선하고 참된 것, 또는 사랑과 믿음에 속하는 모든 것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구스 땅”이란 마음(mind) 또는 능력(faculty)을 의미한다. 마음은 의지(력)과 이해(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강에 관계있는 것이 의지이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이해에 관계되는 둘째 강에 속한다. 참조성서. 스바냐 3장 5,9,10절, 다니엘 11장 43절, 에스겔 27장 22절, 시편 72편 7,10절, 열왕기상 10장 1,2절14 “히데겔 강”은 이성(reason), 더 뾰족이 말하면 이성의 명민함(clearrightedness)이다. “아시리아”는 합리적인 마음(rational mind)이다. “아시리아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는 강”이란 이성의 명민함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합리적인 마음에 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외적 인간에 속한다. “브라데”, 또는 “유브라데”는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것은 궁극점(ultimate), 경계선(boundary)이다.

  • 창세기 2- 26 -

    15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놓으셨다.

    16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하시기를.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를 먹어도 된다.

    17절. 그러나 너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는 먹지 말라, 그 이유는 그것을 먹는 그 날에 너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도움(도울 자)을 만들리라.19,20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들판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들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그에게 데려왔

    참조 성서. 에스겔 31장 3,4절, 이사야 19장 23-25절, 미가 7장 10-12절, 예레미야 2장 18절, 시편 80편 8,11절, 창세기 15장 18절, 신명기 1장 13,15절, 출애굽기 31장 3절, 35장 31절, 36장 1,2절.15 “에덴의 동산”은 천적 인간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동산을 경작하고 돌본다”는 것은 천적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을 즐기도록 허락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인간이 소유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참조 성서. 마태복음 21장 33절, 요한복음 16장 13,14절, 3장 27절.16 “나무를 먹음”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 것인지를 지각으로부터 아는 것이다. “나무”가 지각을 의미함은 이미 살폈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계시를 수단으로 참된 믿음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주님과 천사들과 대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환상과 꿈을 수단으로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가르침이야말로 그들에게 최고의 기쁨이 되어 주었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되는 지각을 가져 그들의 기억에 보물로서 쌓아둔바 어느 것이 참되고 선한 것인지를 즉각적으로 알아챘다. 거짓된 어떤 것이 그 자체 그들에게 표출될 경우 그들은 혐오하여 피했다. 이것은 천사들의 경우와 상태가 똑같다. 그 뒤 이러한 태고 교회의 지각을 계승한 것은 이전에 계시 받았던 것으로부터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이었다. 그리고 그 뒤 말씀에서 계시된 것으로부터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이 있게 되었다.17 위에서 설명한 것 까지 취합해서 생각하면 이 구절의 말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지각을 수단으로 참되고 선한 것을 아는 것은 허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감에 속한 것이나 기억에 속한 것(객관적 지식)을 도구로 해서 믿음의 신비들을 조사(탐구)하려 들면 안 된다 는 말이다. 그 이유는 그럴 경우 믿음 속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참조 성서. 에스겔 29장 3,9절, 31장 16,18절.*****************************************************18 “홀로”란 주님에 의하여 인도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자아와 세상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란 인간 고유의 것(man's Own)을 의미하는데, 곧 뒤이어 “갈비가 여자로 건축됨”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참조 성서. 신명기 33장 28절, 민수기 23장 9절.19,20 “짐승”은 천적인 애착(affection)들을, “하늘의 새”는 영적인 애착들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짐승”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새”는 이해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보기 위해 사람에게 데려 옴”이란 사람에게 의지와 이해 속의 것들에 관한 품질을 알 권리를 주었음을 뜻한다. 그가 “그것들에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그가

  • 창세기 2 - 27 -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살아있는 혼을 부르자,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20 그리고 사람은 모든 짐승에게, 하늘의 새에게,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 할 도움(도울 자))은 발견되지 않았다.21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깊은 잠이 사람에게 떨어지게 하자, 그는 잤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갈비 중 하나를 취하셨고, 그 대신 그곳을 살로 폐쇄하셨다(메우셨다).

    22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부터 취한 갈비로 그분께서는 여자를 건축하셨고,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 왔다.

    23절.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내라 불리울 것인데 그 이유는 그녀가 남자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24절.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날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고, 그리

    그 품질을 알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가 주님에 의해 주어진 진리에 관한 지식과 선에 대한 애착들의 품질을 가늠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는 그 자신 쪽에 기울고 있었기에 앞 절과 똑같은 말, “거기에는 그와 함께 할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표현되어졌다. 참조 성서. 이사야 14장 3,4절, 62장 2절, 43장 1절, 40장 26절, 계시록 3장 4,5절.21 가슴 부분에 있는 뼈인 “갈비”란 인간 (고유의) 것(man's Own)을 의미한다. 이것 자체는 생명력이 거의 없으나, 인간은 이것을 대단히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 “갈비를 대신한 살”이란 생명력이 있는 자신을 뜻한다. “깊은 잠”이란 인간이 그 자신인 것을 가지는 것이 자기 스스로 해낸 듯 여겨짐이 허용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 상태는 흡사 잠든 것 같아 보인다. 그 이유가 그런 상태에 있는 동안 그는 자기가 사는 것,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등등이 자기 스스로 한 것이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아는 것들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잠에서 깨어 일어나게 된다. 참조 성서. 이사야 58장 11절, 66장 14절, 시편 35편 10절, 에스겔 37장 1,4-6절, 누가복음 24장 39절, 출애굽기 12장 46절, 이사야 29장 10절, 예레미야 51장 57절.22 “건축함(build)”은 뉘여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갈비”는 생기 없는 인간 자신을,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기 있게 된 인간 자체를 의미한다. “그분께서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 옴”이란 그 자신인 것을 그에게 수여했음을 뜻한다. 이 교회의 후손들은 그들 선조들 처럼 천적 인간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가 자기 스스로 인도하기를 원하여 자신 쪽으로 기울게 되었는바 그들이 원하는 것이 수여된 셈이다. 그럼에도 아직 인간 자신은 주님에 의해 생명력을 가지기 때문에 이를 “여자”라 불리웠는데 후에는 “아내”로 일컬어진다. 참조 성서. 이사야 61장 4절, 예레미야 31장 4,22절.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란 외적 인간 (고유)에 속한 것, 외적 인간 자체(Own)를 의미한다. “뼈”는 생기가 별로 있지 않은 인간 자신을, “살”은 생기 있는 인간 자신이다. 남자는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남자가 여자와 짝을 이룰 경우, 즉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짝을 하면 전에는 “여자”라 불려졌던 자신은 “아내”로 명명되어진다. “이제”란 상태의 변화가 결과되었음을 뜻한다. 참조 성서. 창세기 29장 14절, 사사기 9장 2절, 사무엘하 5장 1절, 이사야 41장 28절, 예레미야 5장 1절.24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남”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임신하여 낳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함”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것이다. “한

  • 창세기 2- 28 -고 그들은 한 몸이리라.

    25절. 그리고 그들, 남자와 그의 아내는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몸이다”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육체 안에 함께 있다. 다시 말해 전에는 내적 인간, 그리고 내적 인간으로부터 나온 외적 인간이 영(spirit)으로 있었는데 이제 그들은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하나로서 행동하도록 그 자신(own)에 대단히 가까이 인접해 있다. 참조 성서. 마가복음 10장 5-9절.25 그들이 “벌거벘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란 그들은 순진하였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순진을 받기 어려워함을 예방하시기 위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자신들 안으로 순진을 은근히 주입해 놓으셨다. 참조 성서. 마가복음 10장 14-16절.

    내적 의미 요약 죽어 있음으로부터 인간이 영적으로, 그 다음 천적으로 되어 가는 것이 취급되어 진다. (1절)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 이 날에 주님은 쉬신다. (2,3,절) 그의 지식과 그의 합리성이 안개로 적셔진 지면으로부터의 키가 작은 나무, shrub 와 풀잎, herb 으로 묘사되고 있다. (5,6,절)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음으로 묘사되고 있다. (7절) 그 후에 그의 총명이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안에서 시각을 즐겁게 하는 나무들은 진리를 지각함들이다, 그리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을 지각함들이다. 사랑은 생명들의 나무, the tree of lives 로, 믿음은 지식의 나무로 의미되고 있다. (8,9절) 지혜는 에덴에 있는 강으로 의미되고 있다. 거기로부터 네 강들이 있었다, 첫째 강은 선과 진리인 것, 둘째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믿음에 관한 모든 것들이다. 이것들은 내적 인간 속에 있다. 셋째는 추론이고, 넷째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 이것들은 외적 인간 속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있고, 이것은 주님 안에 있는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이다. (10-14절) 천적 인간이 위와 같은 동산이다. 그러나 동산은 주님의 것인바, 이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즐기도록 허락되어졌을 뿐, 그것들을 그 자신의 소유로 삼으라는 것은 아니다. (15절) 또한 그에게는 주님으로부터의 모든 지각을 수단으로 하여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허락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실시하되 자신과 세상으로부터는 안되며, 감각 속의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하여 믿음의 신비들을 수색해서도 안된다. 이런 짓은 그의 천적인 본성을 죽게 하는 원인이다. (16,17절)

  • 창세기 3 - 29 -

    3

    1 뱀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판의 여느 야생 동물 보다 더 미묘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너더러 동산의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

    2 그러자 여인이 뱀에게 말했다. 우리는 동산의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3 동산의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네가 죽지 않기 위해서이다.4 그리고 뱀이 여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5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네 눈들이 열려질 것이고, 네가 선과 악을 앎에서 하느님 같이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서이다.6 그리고 여인은 그 나무가 양식을 위해 좋고, 눈을 기쁘게하고, 총명을 주고 싶어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열매를 취해서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와 함께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그

    3내적 의미 해설

    1절. “뱀”은 여기서 인간의 감각적 부분을 뜻하고 있다. 인간은 이 부분을 신뢰한다. “들판의 야생 동물”은 외적 인간의 모든 애착(affecton)을, “여자”는 인간 자신을, “하느님께서 너더러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고 말했느냐?”란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태고 교회의 세 번째 후손들이다. 이 후손들은 자기들이 보았고 느꼈기에 그렇다 라고 하지 않으면 계시된 것일지라 해도 믿지 않기를 시작했다. 이들의 첫 상태의 하나인 의심함이 이 절과 다음 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참조 성서. 시편 140편 3절, 아모스 5장 19,20절, 예레미야 46장 22-24절, 욥 20장 16,17절, 마태복음 10장 16절.2,3절. “동산의 나무의 열매”는 태고 교회로부터 후손들에게 계시된 선과 진리이다. “동산의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 그들은 그 열매를 먹어서는 안된다”란 믿음 속의 선과 진리,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그들 스스로로부터 배워서는 안된다. “그 열매는 만지지 말라”란 믿음 속의 선과 진리는 그들 스스로로부터서, 또는 오감과 기억 속의 지식(객관적 지식)에 속하는 것으로는 생각해보는 것 조차도 금지되어 있다. “네가 죽지 않기 위해서”란 믿음, 또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 멸해지기 때문에...4,5절. 그들의 “눈이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열려진다”란 만일 그들이 감각 속의 것과 지식 속의 것으로부터, 즉 자신들 속의 것으로부터 믿음에 관한 것을 검사하려 한다면, 그들은 믿음에 관한 것들이 마치 오류투성이인 것처럼 명백히 보고야 말 것 임을 의미한다. 그들이 “선과 악을 앎에서 하느님 같이” 될 것이다란 만일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들은 하느님 인 냥 자신들을 인도할 것을 명시한다. 6절. “양식을 위해 좋은 것”이란 탐욕(cupidity)을 의미한다. “눈을 기쁘게 함”은 공상(phantasy)을 의미하고, “총명을 주고 싶어함”은 쾌락(pleasure)을 의미한다. 위의 것들이 인간 자신, 또는 “여자” 속에 있다. “남편이 먹음”은 합리성이 동의했음을 의미한다.

  • 창세기 3- 30 -리고 그는 먹었다.7 그리고 그들 모두의 눈이 열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꿰맸다. 그리고 자신들이 띠를 만들었다.

    8 그리고 그들은 낮의 공기에서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고 있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동산의 나무 사이에 자신들을 숨겼다.

    9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소리치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디있느냐? 라고 말하셨다.10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나는

    7절. 그들의 “눈이 열려짐”은 내면의 지령으로부터 “자기들이 벌거벘었다는 것”, 즉 자기들은 더 이상 순진함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내면의 지령(interior dictate)으로부터 알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뭇잎을 꿰관매는”것은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다. “무화과 나무”는 자연적인 선을, “그들 자신들이 띠를 만듬”은 부끄럽다고 생각 하였음을 의미한다. 태고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말했고 그 교회의 후손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는데, 그들은 오래전에 즐겼던 순진함 대신 이제는 자연적 선함 만을 소유했고, 이 선함을 수단으로 그들의 악은 숨겨졌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적 선에 있는 것 때문에 부끄러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참조 성서. 민수기 24장 3절, 사무엘상 14장 29절, 시편 13편 3절, 에스겔 12장 2절, 이사야 6장 10절, 신명기 29장 4절, 이사야 42장 7절, 29장 18절, 에스겔 16장 22절, 23장 29절, 계시록 3장 18절, 16장 15절, 신명기 24장 1절, 출애굽기 28장 42,43절, 이사야 5장 21절, 47장 10,11절, 예레미야 51장 17절, 마태복음 21장 19절, 예레미야 8장 12,13절, 호세아 9장 10절, 요엘 2장 22절.8절.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리가 그 자체 동산에서 거닐고 있다”란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 내적 지령(internal dictate)을 의미한다. 이 지령은 그들이 소유했던 지각의 찌꺼기이다. “낮”의 “공기, air” 또는 “숨, breath”이란 그 교회가 아직 지각의 찌꺼기의 얼마 만큼을 소유했던 시기를 명시하고 있다. “자신들을 여호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숨겼다”란 지령을 두려워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자기 안의 것이 악 임을 눈치 챈 이들에게 따라 붙는 두려움과 비슷할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동산의 나무 사이,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 가장 안쪽인 것이 “...사이”라 불리고 있다. “나무”가 지각을 의미함은 이미 살핀바 있다. 그러나 이 지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인바 본문에서 나무들 사이라 말하지 않고 단수로 표현해서 나무 사이라 말하여 지각이 흡사 한 개 밖에 남은 것이 없는 듯 우리로 느끼도록 하고 있다. 참조 성서. 계시록 10장 3,7절, 시편 68편 32,33절, 29편 3-5, 7-9절, 이사야 30장 30,31절, 40장 3,6절, 요한복음 9장 4절, 민수기 6장 25,26절, 시편 67편 1절, 4편 6절, 이사야 63장 7-9절, 59장 2절, 예레미야 8장 12,13절.9,10절. “소리침”, “동산에서 목소리”, “벌거벗어 두려워함”, “자신을 숨김”등은 이미 앞에서 살핀바 있어 생략한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맨 먼저 인간에게 묻는 것은 말씀에서 매우 흔한 일에 속한다. 묻는 까닭은 그가 그에 대해 고백하고 인정해야 하기 때

  • 창세기 3 - 31 -동산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벌거벘었기에 나는 두려워져서 나자신을 숨겼습니다.11 그리고 그분께서 말하셨다, 누가 네가 벌거벘었다고 너에게 말했느냐? 너는 내가 먹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한 나무룰 먹었느냐?12 그리고 남자가 말했다, 당신께서 나에게 여자를 주셨고, 그녀가 나에게 나무를 주어 내가 먹었습니다.13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말했다, 왜 너는 이런 짓을 했느냐? 그리고 여자가 말했다, 뱀이 나를 꾀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먹었습니다.

    ****************************14 그래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셨다, 네가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너는 모든 짐승,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을 초월하여(above) 저주되고, 배로 다닐 것

    문이다.

    11-13절. 위 말들의 의미는 전에 설명했던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인간의 합리성이 자기 자신에 의해 속임을 당하도록 자신을 고통받게 했다. 그 이유는 보여지고 느껴지는 것을 친애(dear)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느님이 뱀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 아예 뱀이 있지 않았다는 것, 또는 그분께서 뱀으로 의미된 감각적인 부분에 말을 건 것은 아닐 거다 라는 것 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위 말씀의 의미를 보충 설명하면 이렇다. 그들은 오감에 의해 자신들이 속고 있음을 지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 사랑 때문에 그들은 그분에 관한 믿음, 자기들이 주님에 관하여 들었던 것에 관한 진리를 자기들이 믿어 주기에 앞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내적 의미 요약 태고 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취급되는데, 이 교회는 어떤 것을 사랑하는 만큼 그것이 자기 자신이기를 바랬다. 자아를 사랑함, 즉 그들은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감각을 수단으로 납득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감각적인 부분은 “뱀”으로, 자아 사랑 또는 그들 자신의 사랑은 “여자”로, 합리적인 것은 “남자”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뱀”, 또는 감각적인 부분은 주님에 관련된 신앙에 속하는 내용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여부를 조회해보라고 설득했다. 이것이 “지식의 나무를 먹음”으로, 남자의 합리성이 동의함이 “그가 먹었다”로 의미되었다. (1-6절)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악 안에 있다는 것을 지각했다. 이로부터의 지각의 잔존물이 그들의 “눈이 열려짐”으로,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음”으로 의미되고 있다. (7,8절),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띠를 만든 무화과 나뭇잎으로부터, (7절) 그리고 그들의 부끄러워함, 또는 동산의 한가운데에서 숨음으로부터, (8,9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정하고 고백함으로부터 (10-13절) 명백한 것은 자연적인 선함은 아직 그들 안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14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셨다”란 그들은 (자기들의 타락의) 원인이 자기들의 감각적인 부분(sensuous part)에 있음을 지각했음을 의미한다. “뱀은 모든 짐승과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과는 달리(above) 저주했다”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이 스스로 천국적인 것으로부터 비켜 육체(body) 속에 있는 것들 쪽으로 돌아 섬으로 스스로

  • 창세기 3- 32 -이며, 네 사는 날 동안 너는 먼지를 먹게 되리라.

    15 그리고 나는 너와 여자 사이에, 그리고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증오(enmity)를 놓을 것이다. 그는 네 머리를 짓밟을 것이고, 너는 그의 뒤꿈치에 상처를 입힐 것이다.

    16 그리고 여자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내가 슬픔과 임신을 크게 늘릴 것이다. 슬픔 가운데 너는 아들들을 낳을 것이고, 너의 순종함이 너의 사람(남자)에게 있어,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

    저주했음을 의미한다. 전과 같이 여기서도 “짐승”, “들판의 야생 동물”은 애착들을 의미한다. “뱀이 배로 다님”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은 더 이상 천국에 속하는 위 쪽을 쳐다볼 수 없고 오로지 육체와 땅에 속한 아래 쪽만을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 사는 날 동안 먼지를 먹는다”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은 육체와 땅에 속한 것 말고는 그 어떤 것 가지고도 살 수 없게 되었음을, 바꿔 말하면 그것은 지옥(infernal)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참조 성서. 시편 68편 9,10절, 44편 24-26절, 요나 2장2절, 레우기 26장 13절, 미가 2장 3절, 예레미야 애가 1장 8,13절, 이사야 44장 24,25절, 미가 7장 14,16,17절, 시편 72편 9절, 이사야 65장 25절, 마태복음 10장 14절.15절. 이 구절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의 강림에 관한 첫 예언임은 대체로 많은 이들이 알아채고 있다. 그런 이유가 이 구절의 단어들은 단어 자체 만으로도 너무나 분명해서 유대인들 조차도 이 구절로부터 메시아의 오심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구절의 단어들, 즉 “뱀”, “여자”,“뱀의 씨”, “여자의 씨”, “짓밟아 뭉개질 뱀의 머리”, “뱀이 상처 입힐 뒤꿈치”등등이 무엇을 특별히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자가 없는 바 설명을 추가한다. 이 구절의 “뱀”은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악을 뜻하는데, 더 뾰족히 말하면 자아를 사랑함(love of self)을 뜻한다. “여자”는 교회를 뜻한다. “뱀의 씨”는 모든 불신앙 (infidelity)을, “여인의 씨”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그, He”는 주님 자신을, “뱀의 머리”는 일반적으로 악의 지배(권력)을, 특별히 자아 사랑이 지배함을, “짓밟음”은 의기소침됨(depression)을, 짓밟은 이유는 “배로 다니고 먼지를 먹도록”하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뒤꿈치”란 가장 낮은 자연(the lowest natural), 예를 들면 유형적, 육체적 물질적(corporeal)인 것을 뜻하는데, 뱀은 이런 것들에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뿐이다. 참조 성서. 이사야 14장 29절, 59장 5절, 계시록 12장 1,4,13절, 이사야 54장 5,6절, 말라기 2장 14절, 계시록 21장 2,9절,이사야 1장 4절 57장 3,4절, 14장 19,20절, 말라기 2장 14,15절, 이사야 44장 3절, 계시록 12장 17절, 시편 89편 3,4,29,36절, 이사야 14장 12-15절, 계시록 12장 3,9절, 시편 110편 1,2,6,7편, 이사야 26장 4-6절, 28장 2,3절, 창세기 49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