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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의 옛지명을 찾아 떠나다 · 여 ‘벌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퍼나 이 지 역은 지대가 얄아 비가 오면 잠겨서 현 재의 마을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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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향토사죠g사보급사업 }

  • 광명의옛지명을 찾아떠나다

    임행처광명문화원

    발행인이영희

    기획총혈 이효성

    흩판갑독윤철

    기획이정란

    편집디자인머스터드

    --

    추소 우편번호 423-062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683번지

    전화번호 02-2618-5800 I 02-898-9700

    팩스 02 898-0900

    암행일 2010년 12월

    짧 이 책은 광명시, 광영시의회 후원으로 제작되었으며,

    광명시지 및 마을동지를 참조하였음을 밝힐니다

  • ~ - -------------

    R흥많호바양만 려λ썩인 。!름 까|명운 왜 ‘얄0 }야활n~J1-?

    사람마다 이름이 다르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땅도 각각 고유의 이름을 지니고 있습

    니다. 그 이름을 우리는 지명이라고 하고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 왔기

    에 생활 속에 묻어있는 습관적인 이름이며 문화가 담긴 역사라고 말합니다.

    전국 어디에나 마찬가지지만 광명의 자연마을 곳곳에도 선조들이 정착한 삶의 터

    전과 숨은 이야기가 지명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 의미가 아직도 우리들 곁에서 살아

    숨쉬는 지명도 있고, 생활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지명도 있습니다. 이는 도시화 과

    정으로 인해 대부분 마을이 변화되거나 사라진 주변 환경에 따른 결과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몇몇 지명도 지역의 역사이며 문화의 표현이지만 언제 변화될지, 언제 역

    사의 기 억 속으로 사라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도시 개발로 인한 지명 변화에 따라 옛 지명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고 지

    명에 담긴 역사와 깊은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고자 한 권의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

    니다.

    광명의 지명 유래를 통해 조상들의 풍속이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아울러 광명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과 향토애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자료를 더욱 발굴하고 보완짜여 명실상부한 지명집이 되도록 노력을 아끼

    지 않을 것이며 , 문화콘텐츠로서의 재인식에 대한 화두는 미래의 과제로 남겁니다.

    2010. 12

    광명문화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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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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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가골 3 슬안 4 공석골 5 장터맡 6 노리샅

    7 가채풀 8 도고내 9 뒷골 10 벌밑

    ---------‘r

    .

  • 학들이 멍에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가골이라고 불렀고, 학의 서석처였다고

    한다. 미을 뒷산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

    이고, 가골과 동징L골 사이를 능골이라고 불렀다. 기학동이란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하였고, 원가학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기골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중기로 추측하고 있는데, 대부분

    설씨가 살았고, 지금도 순창 설씨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기골의 경우 예전의 자연부락 형태의 마을 모습을 비교적 보존하고 있으나,

    주택이 현대식으로 개조된 경우도 있고 구주택이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미을처럼 미을 모습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기골은 조선시대 시흥군 남면 가헥리였다가 몇 차례 변경된 후에 1981년 광

    명시 가학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마을 북쪽은 넘언말(능골) , 남쪽 지역을 아

    랫말, 동북쪽 지역을 웃말이라고 뀔렀다. 미을길로 원가학로가 있고, 원가학

    로 길을 따라 미을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 -- ‘- - ---

    뒷골을 지나 가학로 길을 북쪽 빙향으로

    약간의 오르막길이 나오고, 그 고개를

    골이 나온다. 공석골은 가학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

    로나뉘게된다.

    공석골은 조선 명종대에 군자감정을 지낸 성몽규

    군자김-에서 펼요로 하는 물자인 공물괴

    받아들이고 출납을 하였던 곳이라서 ‘공세동’ 이라 하였고, ‘공석’ 은

    ‘공세’ 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조선시대 시흥군 남면의 칭-고가 있었

    면 석

    가 공

    라 면

    따 민

    너口

    가살면서

    세금을

    까 교응 (원가학)

    《똥

    -

    던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창고는 남면 주민들과 인근 주민들이 세금으로

    낸 갖가지 곡식을 쌓아두던 곳이고 창고가 생기고 없어진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바없다.

    공석골은 조선시대에는 뒷을과 함께 유등리로 불렸는데,

    교o젝 교동 (공세동 유등리)

    이는미을동쪽에

    慘서식처 옹울·| 껏들·며 샤는 곳 렇혈 멍에 수컨|나 챈7 |를 끌7 | 추|화셔 마소~I 목 서| 얹는 구부러진 막ιH 군자감정 군깎감.;1 운 -,...~남풍 당하관 벼슬

    L.,, 군자감 조선시대에| 군수품二| 출납을 맡. ~보던 관. ~

    ----------- - -

  • ------마을에정착

    유등리였다가

    문화 류씨 선현묘가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고, 문화 류씨가 이

    한 것은 조선중기로 추정된다. 공석골은 조선시대 시흥군 남면

    여러 차례 명칭이 비-뀐 후 1981년 굉명시 가혁-동이 되었다.

    노리실은 공세동과 장터말 사이에 있고

    남쪽을 마주하고 있는 미을이다. 노리실

    은 동서로 길게 생긴 미을 모양을 하고 있

    는데, 동쪽은 윗말, 서쪽은 이랫말이라고

    불렀다. 노리실에는 간간이 조립식 공장

    이 있긴 하지만 그다지 많지 않고, 가학

    로에서 노리실로 들어서는 좁다란 마을

    진입로 길을 따라가띤 도로변과 달리 마을 모습이 드러난다. 옛 미을길의 길

    흐름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고, 그 길을 따라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

    부락 모습 당시의 미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매년 음력 10월초에 마을제를 지낸다.

    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당제훨 지냈지만, 나무가

    앞산에 당집을 짓고 그곳에서 군웅제를 지내고

    계속되고 있다.

    다른 미을에 비해서 노리실이 자연부락

    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마을의

    원주민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가능한 것인데, 이는 금녕 김씨

    집성촌이라고 하는 단합된 힘과- 주민들이

    자기 땅을 소유하고 있고, 이를 외지인에

    게 팔지 않고 직접 살고 있기에 기능하다.

    마을

    마을

    지금도

    ,뽑썼·

    (똥 노 허 시주 (노온곡 노온곡리 장곡리)

    처음에는 이

    이후에는

    딩제는

    소실된

    있으며

    --------- - -- - ----렇붉 마을제 o~즐 케|샤 ‘. 당제 마을을 7-1겪주는 인서|꺼| 마을사람들·| 관옹二로 7-1 L.\l는 제샤 쫓 당집 마을을 7-1겪주는 인슬 모인 곳

    1\뱉 군웅제 £|부로부터 을서소는 액즐 막o f주는 인서|꺼| 7-il..\l는 저|사

  • - - --- ---- - - •-----------

    기골에서 가학로를 따라 넘어가면 고갯길이

    고, 도고내길 표지판과 도고내 새길 표지판

    이 니-온다. 이곳이 비-로 도고내의 시작인데,

    도고내 새길을 따라 북쪽으로 마을 주택들이

    있고, 길 건너 남쪽으로논과밭이 있다. 예전의 자연부락모습을유지는하고

    있지만 현재 마을 모습이 많이 변하고 있는 중이다.

    미을 명칭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하는데 첫째는 미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미을의 모양이 독안처럼 생겼다고 하여 도구내라고 히-였고, 둘째는 이 미을의

    동쪽인 솔안을 지니- 소하동 서러리(설윌리)로 가는 산 고갯길이 있는데, 이 고

    개를 도고내 고개라고 하였다. 지끔은 교통의 발달과 함께 고갯길을 넘는 곳

    에 군부대가 있어 돌이서 가야 하기 때문에 거의 시용되지 않지만 예전에는

    이 미을 주민들이 구로구 시흥동이나 소하동 서러리에 갈 때, 또는 안산의 염

    부들이 소금을 싣고 서울 염창동에 갈 때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이 고갯길은 중요히-계 사용되었고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지도와 함께 도고

    내라고 하는 하천멍이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고개로부터 흘러내리는 천이 있

    는데, 이 하천을 ‘도고내’ 라고 부븐다. 뒷골과 가골 사이에 위치한 도고내 마

    을은 조선시대 남띤 가혁리였다가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뀐 후 1981년 기-학동

    이되었다.

    광명시 남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 현재의 광

    명남부교회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100미

    터 지점의 허허벌핀-에 마을이 생겼다고 하

    여 ‘벌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퍼나 이 지

    역은 지대가 얄아 비가 오면 물에 잠겨서 현

    재의 마을자리로 해방 직전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동, 서, 북이 산으로에워싸여 있고, 남쪽을마주한마을로동쪽지역을

    웃말, 서쪽 지역을 아랫말이라 부르기도 했다.

    뚫도교내

    뚫맹바웅

    ~ -

    」 L

    힐콜 염부 소금고f 관련된 닐을 승f는 샤람

    - - ------------- -- -

  • lllm!!!!m ---점차적으로 지-연미을의 원래 모습이 훼손되고 있고 공장으로 들어오는 차

    량들로 인한 도로 훼손이나 차량 소음으로 주민들의 피해가 많이-지고 있다.

    아랫말에는 전란을 12번이나 겪었다는 은행나무가 있었고, 원벌밀-이 그 은행

    나무를 중심으로 생겼다고 하는 유래기- 있으나 1970년대 농지 정리를 하면

    서사라졌다고한다.

    장터말 길로 이어지는 길 주변의 대지는 밭농사와 논농사로 사용되고 있고,

    이 미을에는 최초로 정착한 밀양 손씨가 비교적 많이 살고 있다.

    -------

    도고내 동쪽으로 띠-을 뒷산을 따라 가띤 솔

    안이 니-온다. 솔안 뒷산인 가학산에는 옛 시

    흥광산이 있고, 산 밑 움푹 파여진 곳에 미을

    이 위치해 있으며, 미을 바로 위에 자윈회수

    시설이들어서 있다.

    원래 일제 식민지시대 초기에만 해도 이 마

    을 뒤에 소나부가 많았다 히여 ‘솔인캔公內) 이라고 불렀디고 한다. 또 시흥광

    산이 개발되기 시작히-고, 광부뜰이 시용하는 민기들이 들어서면서 ‘광산촌’ 이

    라고부르기도했다

    광명시에서 최초로 전기가 전해진 곳으로 알려져

    재배지나 하우스형 창고 등 소규모 공장들이 자리 잡고 있고

    택들은 거의 남이- 있지 않은 모습이다.

    있는이곳은현재 하우스

    예전의 미을주

    광명시 남쪽 끝에 위치한 미을굶 노리실과 시흥시 논곡동 논줄 사이에 위치해

    있고, 광명시에서 기-장 먼저 장시가 생겼다고 히-여 장터말이라고 불렀다고 한

    다. 당시 장시가 섰던 자리는 500여 평의 밭으로 변했는데, 이를 ‘장밭’ 이라

    고 부르기도 했다. 이곳에 장시가 번성하게 된 이유는 시흥시 금이동 칠리제

    저수지에서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신촌)에 이르는 신작로의 중간 지점이었고

    시흥시의 금이동, 무지동, 매화동 등 옛 소래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안양,

    (똥쇼Z아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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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조선 ιle.Ii 보촌 5딛마다 @경21 는 샤}널 f-.1한

  • - -- ----- •- - -~--- -------- - ----------

    과천 등지를 왕래하는 교통로였기 때문이라

    고한다.

    예전 자연부락의 미을 모습을 드러내는 곳

    은 장터말길 33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장터

    말 새마을회관을 지나면서다. 공장 건물로 훼손된 진입로에 비해 마을 안쪽은

    아직 예전의 모습을 일부 간직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마을이 변형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미을에 처음 정착한 성씨는 파주 염씨였고, 조선시대에 시흥군 남면 장기

    리였다가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뀐 후 1981년 광명시 가학동이 되었다.

    공석골 미을길을 지나 동쪽 방향으로 가면 서독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나온

    다. 공석골에서 보면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미을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부

    터 샘물이 잘나고 가재가 많아 가재골이라고 불렀고 이 이름을 따서 취락이

    형성된 후 마을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해방 후 공석골에 살던 창녕

    성씨가 분가를 해서 실-기 시작한 마을이다.

    뒷골은 서독로를 따라 기-학터널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가학터널 앞에 위치한 북

    동쪽 마을이다. 가학로를 따라 가면 도고내를 지나 뒷골로 들어가는 길이 나

    온다. 이 마을앞길은서독로와가학로가서로만나는지점이다. 가학로를따

    라 이 미을을 지나가면 공세동 미을-이 나오는데, 이 미을을 뒷골로 부른 것은

    공석골 뒤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뒷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가학로와 서독로기- 만니는 교통 ;환경을 이용해 도로변에 상가들이 자리 잡

    고 있고, 자연부락 당시의 주택도 간간이 눈에 띠고 새로 지은 주택도 눈에

    띠지만 자연미을의 모습은 점차 변하고 있는 중이다.

    뒷골은 공석골에 살던 창녕 성씨가 번성하여 분가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라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시흥군 서면 유등리였다가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뀐 후

    1981년 광명시 가학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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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훔? 분가 7「족~I 한 구션원·| 날럼슬 하려 따로 나감

    ----------

  • --

    11 원광명 12 신기촌 13 너부대

  • - - --·-- - - ·--~ _ _.._......_-=

    광명동 새터말과 노온사동 가락골 사

    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뒤에는

    서쪽을 마주한 도덕산이 둘러져 있다.

    미을은 동, 서로 길게 생겼는데 동쪽

    을 웃말, 서쪽을 아랫말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광명동 자연마을

    중에서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

    고 있고, 광명동에서 최초로 생긴 마

    을로 동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하여 ‘원광명’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광명시의 현재 명칭 역시 이 미을’r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고 ‘예로부터 해와

    달이 잘 비추는 곳으로 살기 좋은 땅’ 이라고 하여 불여졌다고 하나, 이 마을

    의 모양을 보면 동쪽으로 도덕산이 둘러싸고 있어 해와 달이 뜨는 광경을 보

    는 것이 쉽지 않다는 띤에서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반면 ‘팽매’

    라는 뭇은 미을의 지세로 보아 ‘광맹두’ 와 비슷하다고 보는 경우다. 광명두는

    나무로 만든 등잔걸이로 등잔을 얹어 놓는 기구를 말하는데, 미을의 모습이

    등잔 두 개를 얹어 놓은 모습이라고 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팽매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성씨는 괴산 음씨로 알려져 있고, 이후 고령

    신씨, 청주 한씨, 수원 백씨, 개성 왕씨 등이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띤서 살아

    왔다고한다.

    미을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 도덕산 아래에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예전

    에는 미을 주민들 중에서 부정하지 않은 시람을 당주로 선정하였으며 1980년

    대부터는 통장이 당주와 제주를 겸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넓은 들판이었다고 하여 너부대라고 불렀다고 하고, 보름이띤 들판에

    쥐불을 놓아 넓게 타는 불꽃이 장관을 이뤘다고 하여 광화대(廣火大)라고 부르

    기도하였다.

    도시개발로 인한 주거지역의 변화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현재 너부

    《슐낀젠광명(팽매)

    뚫 너 HT 대 壘 당주와 제주 마을즐 1백주는 인을 모인 콧二l 주인고f 저l사二l 주헤h 「 도l는 헛 번째 사람

    ------------ -----

  • 대의 예전 마을 모습은 보이지 않는

    다. 옛 마을 이름을 딴 너부대공원이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으며, 너부대 마을 축제가 생져

    들이 문화생활을 활발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도웅이 되고 있다.

    처음 이 미을에 정착한 성씨에 대

    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자료는 없으

    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씨라고 하고, 가장 번창한 성씨는 광주

    안씨 감찰공피- 후손들이라고 한다.

    너부대는 본래 시흥군 서면 평화대리였다가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뀐 후 1981

    년 광명시 광명동이 되었고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대한주택공사에서 약38

    만평 규모의 택지조성을 하면서 자연마을이 사라지고, 현재의 주거 모습으로

    변하였다

    。1λλ

    주민

    신기촌은 광명동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미을이다. 식민지 시기 초에 광산 김

    씨, 남양 홍씨, 원주 원씨 등이 정착해 살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새

    말이라고 했다가, 그 후 새터말, 신기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가난한 사

    람들이 사는 마을이었지만 식민지 시기에도 이 지역에서는 문맹퇴치교육이

    실시되기도 하였고, 1903년 광명에서 가징- 오래된 교회인 광명교회가 설립되

    기도 하였다. 1970년 전후 굉-l정동 지역 택지조성시-업 으로 인해 자연마을의

    모습은 사라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룡 샌 기 호L (새터마르

    ---------렇플 문맹퇴치교육 배수지 못하여 글을 2~r-I냐 쓸 줄 모르는 사람을 배수오록 함 繼、 택지조성사업 논· |나 밭 등 집을 7-1을 딴· I • f닌 %}슬 칩을 7-1을 딴로 만들7 | 수|해

    ~~二l ,..~질을 변화ι|큐|는 닐

  • IV

    14 가락률 15 사둘 16 가운데알 π 동창훌 18 논사건|

    19 윗장힐리 20 아랫장절리 21 능말

  • --- -= --- --- --

    광명로와 밤일로기- 교차하는 지점을 지나면

    변선소가 나오고, 이어 가락골이 나온다. 북

    쪽으로 원광명, 동쪽으로 하안동 밤일미-을,

    남쪽으로 원노옹사동(노온사리, 큰멜이 인접

    해 있다. 동, 남, 북이 산으로 둘러싸고 있고, 서쪽으로 트여 있으띠 미을 앞으

    로광명로가있다.

    기존 자연마을의 주택들이 일부 남아 있지만 조림식 창고나 소규모 공장 건

    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 많이- 기촌 자연마을의 모습은 점차 시-리-지고 있다.

    원래 이 미을에 터를 집-은 성씨는 전주 이씨로 일려져 있는데, 이후 분성 김씨

    가 살기 시작하면서 전주 이씨는 대부분 미을을 떠났다고 한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이 미을은 가난한사람들이 사는곳이었

    는데, 마을 서쪽에 전응조(1522∼ 1612)의 숭콰단을 조성한 이후 미을이 번성

    했다고 하며, 착히-고 성실한 사람들이 많이 살이-가던 골이라는 딸이 가럭-골로

    변천되었다고한다.

    능촌사거리와 인접히-고 능발과 연결되어 있

    는 마을로서 능말과 새터말 사이에 있다고

    하여 가운데말이라고 불렀다, 광맹동, 히-안

    동, 시흥을 잇는 도로인 노안로가 서로 교차

    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광명로렐 사이에

    두고 새터밀-과 미-주보고 있다.

    이 미을에는 선능 잔봉을 역임힌- 급천 강씨의 후손들이 처음에 터를 집-고 들

    어와 살았다. 이후 김해 김씨, 남원 양씨 등이 들어와 살기는 했지만, 금천 강

    씨가 비교적 많이 실-았으며 금천 강씨 제를 음력 10월 2일 능말 영회원 입구

    에서 지내고있다.

    광맹로와 노안로 등 교통이 편리하고 시내버스 이용도 비교적 양호한 주변

    환경에 따라 원주민들이 비교적 마쓸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까 꽉교동

    .룰; ---

    ---

    ----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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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 중 폐 양 (中村)

    닿혈 변전소 교류 진력을 석합한 헌납二효 바꾸셔서 내보내는 ιl넣

    숭모단 선조.!.I 뜻을 71(!1"11 구|등H 흙 •I나 올..!~ 딸’ f 올린 7'~C! I

    참봉 조선 f.. I c.ll ·격러 관· f서| 운 존구품 벼슬j료 능, 원, 종친부 동서| 우성다

    ---------- --------

  • -논사리는 서쪽을 마주한 마을로 동, 남, 북이

    시-으로 에워싸여 있다. 이 마을은 동, 서도

    길게 생긴 마을이고, 동쪽은 웃-말, 서쪽은 아

    랫말로부르기도한다.

    이 미을은 본래 서남쪽으로 약 700미터 α

    어진 곳에 있었는데 현재는 밭으로 변해 미

    A에서는 대말밭, 또는 대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미을에는 민가가 없

    었고, 웃말에 노온사라고 하는 절만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은 미을이 들어서자

    폐시-되었다고 히-고‘ 미을 명칭은 이 시찰에서 취한 것이디-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집은 성씨는 경주 최씨로 알려졌고 이후 교하 성씨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았으나, 경주 최씨가 가장 번성하였으며, oj을 가구 수

    도 아직은 비교적 많은 편에 속한다. -

  • - - - - ----- -------• ---------

    사들은 능촌과 동징L골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모래밭 위에 터를 잡고

    을이라고 하여 시들이라고 불렀다. 마을 안쪽으로 익=간의 밭이 있어

    으 재배할 수 있고, 미을 아래에는 밭농사 비

    닐하우스 동이 설치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논들이 있다.

    혀재 미을의 모습은 예전에 비해 많은 변화

    - 겪은 모습이고, 예전에는 중규모 미-을이

    었으나, 현재는 미을의 변화로 인해 주민들

    이 시내로 빠져 나간 상황이다. 특히 마을 뒷

    산과 연결된 지형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교차로와 서울-안산간 고속국도

    의 개통으로 갈라져 분리된 모습이다. 4치-선 도로 동쪽에는 조선후기 영의정

    으 지낸 경산 정원용(향토유적 2호)과 아들 정기세의 묘소가 있다. 괴-거에느

    마을에 정원용 선생의 99칸 집이 있었다고 하나 개발의 영향으로 남이- 있지

    않다.

    미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초에 미을 입구에 있는 도당나무에서 당제를

    지내오다가 1990년 도당나무가 말라 죽은 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있는마

    밭직-물

    축제로 승화시켰다.

    동죠낼은 동, 남, 북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서쪽을 마주하고 있다. 동칭l골과

    윗장절리로 이어지는 동칭골길에 서천사라고 히-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비

    어있는상황이다.

    이 미을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 분성 김씨 11세손인 김계

    욱(1835∼1892)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선조의 유훈을 받틀기 위해 자신의

    집과 마주 보이는 동쪽에 선조의 공덕을 흠모하여 영모재라는 이름의 사당을

    《앓」사드Z

    《앓」동샤딩교Z

    ......

    지었다.

    영모재는 김응수 기-계에 전해오는 고문서 15점괴- 함께 광명시 향토유적 5호

    -----

    --------- - - ----- - ------」n

    틸결 승화 서떤 닐슬 C::-1 높슴 냥f:H로 발전화는 낄

    도당나무 마슬.!.I 수호인슬 모ι|고 쩌|샤 -;.(L.H는 나무

    유훈 축슴 샤람•I 남낀 훈껴|

  • 로 지정되었는데 후손둡이 영.5:1..재를 지나 윗

    장절리로 넘어가는 산세의 지형이 뱀의 모잉=

    을 하고 영모재를 바리-보는 꼬양이라 좋지

    않디고 여겨, 영모재 딘-을 높이고 나부를 선

    었다고 한다. 영모재를 감씨-고 있는 신-은 징-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히-여 ‘장구

    산. 이라고불려지기도한다.

    동창골의 현재 모습은 여느 따을처럼 기존 자띤미을이 새로 들어옹 조립식

    공장과 창고 등으로 인해 많은 변호}를 겪고 있는 중이다.

    ----------

    -----

    광명로를 경제로 하여 동쪽 방향은 윗장절리이고 서쪽 방향은 아랫장절리이

    다. 장절리라는 1굉칭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외넘어, 윗장절리, 아랫장절리

    동서 방향을 띠-리- 길게 늘어선 미을 노

    ocf을 따서 ·장절’ 이라는 유래와 외넘어

    동쑥 간 200미터 지점에 ‘장절‘ 이라는

    처이 있었고, 그 절의 냉칭에서 유래되

    었디-는 섣이 있으니-, 대체로 길게 늘어

    선 마을의 보양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 유력해보인다.

    장절리는 외넘어, 윗장절리 , 이-랫장

    절리 세 미을을 통틀어 칭히는데, 그중 동%-골을 띠리-가띤 보이는 마을인 윗

    징-절리기- 먼저 생겼다고 하고, 마을의 규모는 큰 편이다.

    최초로 이 지 역에 터룹 집은 성씨는 알 수 없으니- 전주 이씨, 히동 정씨가 오

    랫동안 실아왔다고 한다. 비교적 기구나 창고 등의 조립건물이 디-른 미을에

    비해 적게 들어서 있고 논농시-외- 밭농사 벼 ---

    적이 넓은 편인데 , 넓은 농지로 인해 주택으

    ------------------

    몇가구가없다.

    기존 지-연미을의 형태는 전차 시라지고 있

    《·∼원장켈허와 야랭차O갱허

    --------------‘-------------

    !l끼

  • _..... -- ---------」 --•-------는 상황이며, 마을 입구에서 장절리 길을 따라 올라기-는 쪽이나 마을 안쪽에 마

    을의 모습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미을이 전체적으로 주택과 공장 등이 혼재되

    어 있는 양상이다. 또한 논의 경우도 대규모 매립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 --------

    22 가리대 23 영당멀 24 데부뚝마을 25 작은알 26 섣촌 27 한내 28 실월리

  • - - --- -…-- -• --- ------

    마주한

    구름산의 연봉인

    뾰죽산을 주산으로 하여

    산으로에워싸여 있다,

    미을명칭의 유래는지리

    적으로 마을 앞이 허해서

    복이 나가고 재앙이 들어온다고 하여 미을과 가리대 삼거리에 소나무, 벼드나

    무등을심어 마을앞을가렸다하여 ‘가리대리’ 라고하였다는유래와서러리

    (설윌리) 미을에서 갈리-져 나온 마을이라는 뭇이 전하고 있다.

    이 미을에 대대로 살았던 성씨로는 경주 김씨, 원주 변씨, 청주 한씨, 진주

    강씨 등이고, 마을의 모습은 가리대 삼거리에서 미을길을 중앙으로 가르는 도

    로가 새롭게 개통되었다. 이 가리대길을 따라 가리대 l길과 2길로 나뒤어지는

    데, 가리대 1길 주변은 예전의 미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0월초에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데 공회딩에서 출발해서 구름산 중턱에 있

    는 버드나무 근처에서 제를 지낸다.

    가리대는 동쪽을

    미-을로

    일직동 자경리와 신촌 사이에 있는 마을로 안양천 제방 밑에 형성된 미을이라

    고 하여 데부묵 미을로 이름을 지었다고 힌다. 데부뚝은 제빙-을 뭇하는 말로

    일본말 ‘데이보’ 의 변형된 말이다. 해방 직전에는 가구 수가 7호 정도로 적었

    으나, 기아산업이 생기고 기아산업과 석수 전칠역이 다리로 연결되면서 교통

    이 편리해지고 인구가 늘어났다.

    기이공장에서 기이솔길을 따라 성재신- 방

    향으로 걸어가면 운임-사 절이 있다. 기이솔

    길과 안양천 제방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면

    지금은 공장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데, 한국

    시문학사에서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요절시인 기형도가 생전에 살았던 집이 남아

    잊훌 까 져 대

    (슐 폐HT푹바--z

    뭘혈 연봉 축 ·|셔져 μ는 안본수근 l 燦i 공회당 윌반 c.\I종 •I 모낌을 할 ιH 샤흥화71 추|능H 7-1둔 칩 繼 제방 울7써| 흙 •I나 올, 콘크근|트 따|로 발 욱

    (".~ffi늬‘ 요절 젊슨 나·|서| 축슴

    ---- ---------

  • --있던 곳이다. 현재 시민들로 구성된 기형도기념사업회가 생가 복원 방안을 찾

    고, 시인을 기리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인-동과 구로구 독산동 그리고 가리대 사이

    에 있는 마을이다. 허허벌판에 형성된 마을

    로서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뽕나무받과 논이

    었는데, 해방 직전에 하안동 춤신의 평기현

    씨가 농사를 짓기 위해 처음으로 살기 시작

    하여 새롭게 생긴 미을이라고 하여 새말이라

    고 불렀다고 한다. 새말은 1964년 시흥군 서면 소하 2리였다가 여러 차례 명

    칭 변경 후 1981년 광명시 소히- l동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소규모 공장 집단과 낡은 주택들이 많고 인근에 국철 1호선

    시흥역이 있어 통행이 많고 상업지역이 성했던 곳이며 . 신촌본길과 안양천 뚝

    방길이 만나는 지점에는 제방 이래 미을이 형성되어 있다.

    설윌리는 ‘큰말’ 이라고 불렀고, 설윌리와 영

    당말 사이에 있는 마을을 작은말이라고 불렀

    다고 한다. 설윌리라고 하는 마을 이름에 대

    한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진다 첫째는 조선

    중기 명재상이었던 오리 이원익이 관직에서

    물러나 영당말에 살면서 호미로 이 미을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즉 호미 ‘서(鋼)’ 자

    를 따서 ‘서윌리’ 라 불렀다가 후대에 ‘설윌리’ 로 불렀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원익이 눈오는 밤에 이곳을 걸으며 사색에 짐기곤 했다 하여 ‘설윌리(雪月里)’

    로불렀다는것이다.

    예전에는 안산, 시흥 사람들이 서울을 갈 때면 이 마을을 거쳐야 했기 때문

    에 일찍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하였으며 식민지 시기에는 시흥군 서면사

    |%

    -(C--(C·

    (G)샌효L

    (《.)“섣인단허(서러리

    큰말)

    -------- -•-

  • - - ----- - -「- -- -- -----

    무소기-생기면서 미을이 발달하였디-고힌다.

    설윌리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전주 최씨를 비롯히-여 진주 류씨, 굉-신- 김씨

    로 알려져 있고, 그린벨트로 인해 많은 개발이 진행되지는 않아 에전의 미을

    모습을 비교적 많이 간직하고 있다.

    산과 연결된 작은 천을 복개하여 길을 낸 설월리 미을길을 따라 올라가띤 참

    샘물 약수터가 니-오는데, 이 약수터는 본래의 자리에서 약긴- 위치를 옮긴 것

    인데, 암반수로서 지금도 물맛이 똥아 광명시민뿐만 아니라 구로 등 인근 지

    역 주민들도 많이 찾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약수터에서 빨래도 하고, 김장도

    담그고 목욕도 하면서 미을 사람들이 모이고 정을 나-누던 곳이었다고 힌다.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청백리 오리 이원익의 영정

    을 모신 영당(오리영우)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영당말’ 이라고 불렀다. 오리

    이원익 영정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모셔 왔으나 1970년대 말에 일시 도닌-당한

    이후 이원익의 13대 후손인 이승규가 설립한 충현박물관에 보관을 하고,

    사본을영당에두고있디.

    이 미을은 설월리가 그린벨트로 묶여 개발이 더디게 진행된 것에 비해 주거

    지역으로서 1988년 경부터 다기구 주택들이 미을길을 따라 빽빽히-게 들어서

    있다. 미을길들은 충현서원지를 끼고 서원길, 영당말길, 도당길, 도딩-원길 등

    광명시 새주소 부여시-업에 따라 새로운 이름

    으로불리고있다.

    미을에는 오리 이원익 영정을 모신 오리영

    우(도유형문화재 161호)를 비롯해 관감당과

    종택(도문화재자료 90호)이 있고, 셜윌리, 작

    은말 주민들과 함께 음력 7월 1일과 9월 1일

    두 차례 도당재에서 도당고사를 지냈다.

    (슐 넙7타·바흐

    보 0 17-1 산도록 함

    암반수 불뮤젝%| 굳·낸 바우l 바닥서|서 3홍러나농 울 壘청백리 ;>.\i울서l t:H한 흑님 •I 없고 곧고 끼H끗한 관E 영정 쩌|샤나 잔켠|를 7-1 널| ιH 추1nH t:H 인 샤땀~I 닐굴을 그런 족r.~

    룰붉 복7H 증f펀서! 덮7\i 구조물슬 쓰|텀 겉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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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설윌리가 ‘큰말’ 이라고 부른 것에 비해 오리동은 작은 미을이기 때문에 ‘작은

    말‘ 이라고 불렀고, 오리 이원익 정승이 살던 마을이라서 정승의 호를 따서 마

    을 이름을 오리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시흥군 서띤이었다가 여

    리 차례 맹칭 변경 후 1981년에는 광맹시 소

    히동이되었다.

    설윌리와 영딩말 주민들이 도당고시를 음

    력 7월 1일과 9월 1일에 지냈으나, 1989년

    구획정리사업으로 도딩-새가 없어지면서 제르

    지내지 않는다 영당말괴- 마친까지로 이-파트

    와 연립주택인 다기구 주택들이 새주소 부여

    사업에 따라 부여된 마을길인 작은밀길과 넙-작골길을 따라 주택가를 형성하

    고 있다. 전형적인 주거지역의 미을 모양이다.

    -----

    힌-내는 하안동 벌밀-괴- 소하동 신촌 사이에

    위치한 미을로서 광명시 보건소 앞 심-거리에

    서 한내길을 띠라 하안동과 소하}동이 경계늘

    이루고, 동으로는 구로구 독산똥과 경계하고

    있다.

    미-을 명칭은 마을이 한천변에 위치해 있다

    고 히-여 하천 이름을 따서 ‘한내 ’ 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내는 구름산과 일직동

    성재산에서 흘러 온 물이 신촌에서 만나 미-을 앞을 지나 하안동 벌말과 독산

    동을 거쳐 인-양천으로 흘러가는-데 , 여름에도

    발이 시릴 만람 차디-고 히-여 ‘힌내’ 라고 불렀

    다고한다.

    원래 한내는 소히동과 히-안동에 걸쳐 있었

    고, 이 중 하안동에 속한 지역은 198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헐 려 히-안동 이-파트형

    (앓」4씌운양(오리동)

    뚫한내

    ----------」 11

    득휠 도당재 마을=| 수호인을 모 f.I고 저|사흘 7-IL-H는 고7\1 ·1~ ~ ~ ~

  • ~...,...,,... -----~-- ~- --- -------------공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 미을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떨어진 곳에 한내다리와 농사를 짓기 위한

    한천보가 있었다고 한다. 한내디리는 1904년 9월 14일 시흥군민 1민- 여명이

    모여 일제와 그에 협조해서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에 항거해 농민봉기를

    일으키고, 시흥군 관이를 습격했던 역사적 현장으로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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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봉예골과 부평골 사이에 위치해 있는 두길은 구로구 천왕동에서 옥길로를 따

    라가면서 천왕통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중엽에 철산부사를

    지낸 히-섭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부평말 중앙에 연못을 파고 유유지적하게 살

    다가 그 후손들이 분기를 하여 두길에 정착하면서 생겼다고 힌다.

    미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두길과 식골 사이에 있는 봉예골에서 미을 앞을 지

    나 광명동 너부대를 왕래히는 길이 대로였으나 시흥시 금이동과 서울 오류동

    을 관통하는 길이 미을 중앙을 지나자 길 양편에 민가가 생기고 미을이 형성되

    면서 길 뒤에 있다고 하여 뒤길이라고 했다가 후대에 ‘두길’ 로 불렀다고 한다.

    미을에서는 해미-디- 음력 10월초에 좋은 닐-을 택해 가운데말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내왔는데 1980년대 이 일대에서 돼지를 기르게 되면서 악취가

    나고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면서 제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산

    신제를 지내던 야산을 깎아 공터로 만들어 밭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현재 두길의 모습은 비교적 자연마을의 모습을 간직히-고 있지만 옥길로를

    따라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다. 또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하는 공터외- 주변의

    밭 아래 미을인 가운데밀-에도 주택들과 함께 간간이 조립식 공장들이 들어선

    모습이다.

    동쪽은 광명동 너부대, 서는 구로구 궁동, 북은 구로구 천왕동, 그리고 남은

    두길과 인접한 마을이 부평말이다. 이 미을은 조선시대 부평군 계양변에 속했

    던 곳이라 하여 부평말로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구로구 천왕동과 옥길동

    에 각각 속해 있는데 1914년에는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1973년 시흥군 소

    래면 옥길리, 1983년에 광명시 옥깊동으로 명칭이 비-뀌었다.

    현재 이 미을도 다른 옥길동 마을과 유사하게 예전의 미을 주택들과 공장 건

    물들이 혼재되어 미을모습이 변하고 있다.

    - - ---------’-- - -듣줄겹 휴휴자적 • f무 속박성· I 뿌.냥배| 망· f간

    'llr>' •. -· - -

  • ----두길에서 옥길로를 따라 시흥 과림동 방향으

    로 나아가면 봉예골을 지나 식골이 나온다.

    옥길로에서 부천 범빅-동으로 ;갈라지는 갈림

    《똥 삭교Z

    옥길로변에 경인시멘트 공장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옥길로에서

    식골로 들어가는 식골길이 나온다. 식골길으

    따라 마을로 들어기면 미을길이 나오는데 마을길에는 비교적 옛 길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 미-을의 동쪽은 동편발 미낙을의 중앙은 기-운데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을의 주산은 만수산인데 이곳에 살면 만수를 누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다. 또한 굉-명동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배부른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을 하

    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산의 산봉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식골(곡)’ 이라고불렀다.

    미을 서북쪽에 위치한 ‘해방촌’ 도 원래는

    흥시 과림동 마을도 같은 미을로 통칭되어

    식골에 속했고, 남쪽에 위치한 시

    이곳 시-람들이 식골을 ‘큰말’ 로 부

    나 고

    지 잡

    길을

    지-리 --------------------.

    ------------

    르기도했다.

    미을에서는 해미-다 음력 7월 1일에 가운데말 대동우물에서 우불고사를 지냈

    다. 그러나 이 우물 주변에 지하수를 파기 시작하자 샘물이 줄어들어 우물을

    이용하지 않게 되고 우물고사도 80년대 말부터 지내지 않게 되었다.

    음력 7월초외- 10월초에 미을의 안정을 기원히-는 도당고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 도당고시-는 식띤지 시기까지만 해도 4∼5일 정도

    도당굿을 거행할 민-큼 성행했으나 지금은 맹맥을 유지하는 정도리-고 한다.

    ------

    -------------------------

    ll끼

    --------• - -- -‘-

  • 32 구석말 33 얼동네 34 궁맡 35 새터밑 36 덕안

    37 앙진말 38 동흔 39 자경마올 40 모댐이 41 호몽골

  • - - ------ ------ -

    소히동과 안양을 잇는 광명의 간선도로인 오리로와 광명고속철도 역사를 지

    나 기-학동과 연결되는 서독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미을이다. 호봉골과 새

    터말 등 기존 자연미을과 조금 떨어져

    구석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히여

    ‘구석마을’ 이라고 불렀다.

    오리로가 마을을 가로질러 지나가게

    되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두 개로 나뉘

    어져 있고, 미을 잎- 서독로 길을 넘어

    서면 바로 고속철도 굉-명역사 건뀔과

    부지로 이어진다. 이 마을은 영당딸에

    살던 초계 정씨기- 분기-하여 정칙-한 후에 형성된 미을이라고 한다. 미을에서는

    동편말, 모탱이, 새터말, 호봉골 주민들과 함께 양진말 뒷산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l일에 산신제를 지낸다.

    덕안괴- 자정리 마을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

    로 알려지고 있다. 즉 소히동 영당말에 있던 전주 이씨 익령군 후손들이 분가

    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메마른 토지와 천수답

    이 많고 마을이 가난해서 ‘궁말(第村)’ 이라 했다가 ’궁촌(宮村)’ 이라고 불렀다

    는 설이 있는기- 하면 조선후기에 정조가 수원에 있는 융릉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잠시 머물렀다 히-여 ‘궁말(宮村)’ 이리- 불렀다고 한다.

    덕인-미을과 자경리마을 주민들과 함께 성재산 정상에서 음력 10월초에 산신

    제를지냈다.

    (똥1T젝바승

    《똥 -----양

    (宮村)

    / ‘ 틸월 천수답 빗물·~I 二|해서만 벼를 채닝H할 수 ;1는 논

    • 융릉 조선 21ιH ’검조二| 울빼 • ~을. 17'~ 22c.\I 션조二| 낸부인 한조간 그二| 닝| 헌7경판후=| 등

    - - ------------ - -

  • 성재산을 주신-으로 하고 남쪽웰 마주한 미을로 소하동 70동 미을과 호봉골 사

    이에 위치해 있다. 성재산을 뛰로 히-여 건너편은 자경마을이다. 고속철도 앞

    을 지나는 서독로에서 자경마을과 덕안마을로 나오는 길이 있는데, 성재산을

    끼고 덕안으로 기-는 옛 길을 따라가면 이 미을로 들어선다.

    ‘덕안’ 이라는 미을 명칭의 유래는 성재산 위에 ‘덕암總嚴)’ 이라고 새긴 바위

    가 있다고 하여 이 마을을 ·덕암’ 이라고 불렀다가 후에 덕안이 되었다고 한

    다. 덕안은 남, 북으로 길게 생겨 성재산 밑 북쪽은 웃말, 남쪽 지역은 아랫말

    로 불렀는데, 웃말을 덕안이라고 하고, 아랫말을 새터말이라고 부르기도 했

    동쪽을 마주한 마을이라고 하여 동촌이라고 불렀다. 동쪽으로

    벌동네, 서쪽으로 새터말, 남쪽으로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친목

    마을, 북쪽으로 호봉골이 위치해 있다. 이 미을에 터를 잡은 성

    씨는 남원 양씨로 알려졌고 이후 전주 최씨, 안동 권씨 등이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다.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이면 미을 뒷

    산인 도당산에서 인근 미을 주민들과 함께 산신제를 지냈다.

    현재 이 마을 자리에 광명역 고속철도 역시-가 세워져 미을

    모습은 없어졌고,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호봉골 이주단지로

    이주해서 실-고있다

    덕안 (德뿜)

    e잦r

    찢. 동 5 촌 : 東*#

    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전주 이씨 익녕군파로 알려지고 있다. 소하

    동 영당말에 살던 익녕군의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자경마을 주민들과 궁말 주민들은 매년 10월초에 성재산 정상에서 함께

    산신제를 지냈다. 웃말 아랫마을 사이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마을이분절되었다.

  • -------------- ---------- --= - --- -------동촌말과 함께 고속철도 광명역사로 인해 사라진 미을이다. 새터말, 호봉골,

    양진말, 구석말을 가려면 거쳐야 하는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모탱이라

    고 불렀다. 이 미을은 조선중기에 우의정을 지내 이후원(李훔源, 1598∼1660)

    의 묘를 삼석산(서독산의 다른 이름) 중턱에 쓴 후 그의 후손인 전주 이씨 광펑

    대군피들이 묘 아래 호봉골에 살다가 분기를 하여 터를 잡고 살면서 생긴 마을

    이다. 이후 남양 홍씨 상주 이씨 똥이 대대로 정착을 했다. 인근 마을 주민들

    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마을 뒷신인 주당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소히동과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사이의 도로 아래 구석말, 양진말, 동촌 입구

    에 있다. 허허벌판에 자리 잡은 마각을이어서 ‘벌동네’ 라고 불렀다. 동으로 안양

    시 하수종말처리장, 서로 모탱이, 남으로 안양시 박달동 친목마을, 북으로 덕

    안이 있다. 이곳에 처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972년이고, 경북

    의성 출신 김창식이 농시를 짓기 위해 들어와 살면서 생긴 미을이다.

    오리로를 사이에 두고 호봉골과 인접

    해 있는 마을이다. 호봉골이 먼저 생기

    고 이후 안동 권씨가 이곳에 자리룹 잡

    기 시작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딱고

    하여 새터말이라고 불렀다. 삼석신-을

    주산으로 하여 동쪽과 북쪽이 트여 있

    는마을이다.

    다른 마을에 비해 주택들이 많은 편이고, 빈집도 있고 조립식 칭-고 건물도

    들어와 있지만 비교적 예전의 마을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양진말, 모탱이, 호봉골, 구석말, 벌동네 주민들과 함께 마을 뒷산인 주당산

    에서 매년 10월초에 산신제를 지냈고, 지금도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C}

    =---?)}

    (.)R폐댐이 (모테이)(.)뱅동네

    ((.)새 터방 (新基)

    ---

    -------------

    ----------- --壘 하수종말처리장 셔러 곳서|셔 쓰고 버근|는 C.:-1랜 울슬 초l종석스로 해근|화는 곳

  • -(C}

    l

    --

    -(C-

    --

    (,.-‘젠양 (양달말)

    ((.차 갱바 으Z (自京里自

    警里

    自敬里)

    새터말과 구석밀- 사이에 동, 서로 길게

    생긴 마을이다. 예전에는 구석말, 동

    촌, 모탱이, 새터말, 호봉골을 통칭해

    서 양진말이라고 불렀다. 오랫동안 이

    곳에 정착한 성씨는 초계 정씨, 안동

    권씨, 전주 이씨리-고 알려져 있다. 인근마을 주민들과 함께 미을 뒷산에 있는

    주당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지금은 호봉골 뒷산으로 지-리를 옮겨 산신제를

    지낸다, 서독로와 오리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미을인데, 미을 입구에는

    대추나무가 자리 집-고 있다.

    성재산을 뒷산으로 하여 동 남 북이 훤히 트인 미을이다. 고속철도 광벙역사

    가 생기면서 서독로가 이 미을 옆을 지난다.

    마을 멍칭은 옛〈시흥읍지〉에는 자경리(벼警뿔)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경

    (京)은 일제 강점 후부터 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광산김씨대종중 정묘보(1947년) 병지-보(1876년)에는 공경받는 선비 삼부자

    (김원록, 김대덕, 김대성)를 모신 곳이라 해서 성재산은 사경산(士敬山)으로, 마

    을은 사경촌(上敬村)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로 미루어보띤 세월이 지니-면서 시-경이 자경

    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l차 시지 당시 조사된 바에 띄하면 ‘왕도남

    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마을과

    미-주보고 있는 관악산이 서울찍 남쪽산으로

    불의 산이라 하여 재잉-이 미치게 되므로 성

    재산에 개기- 앉이- 있는 형상을 조각하여 관익-신-괴- 마주보게 하여 회-기를 박아

    마을의 무사를 기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미을을 사견우리(四大隔

    뿔, 石大偶里) 또는 개가 앉아 있는 조각을 했다고 히-여 죄견리(座大里)로 했는

    데, 후대에 내러오며서 자경리(自京뿔)가 되었다고 조사된 바 있다.

    ----------------------------

    -- ---- -- ----------

  • 현재 미을 옆으로 고속철도 광명 역사가 세

    워졌고, 서독로가 개통이 되어 마을괴- 자경

    저수지 사이를 지니-고 있다. 지-정저수지도

    역사 개발로 인해 예전의 규모에 비해 작은

    모습이다. 예전 마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외지인들도 많이 들어와 있

    다고한다.

    《슐 호 보b룡 (虎鳳감 虎뿔감)

    •-------- ---- - - --

  • -----

    42 쇠머리마올 43 뱀수 44 모세

  • - - --- ----- --「-- •- ---------동, 서로 길게 생긴 마을이어서 동쪽-을 아랫말, 서쪽을 웃말이라고 불렀다. 미

    을의 지세가 소의 머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소머리 쇠머리-쇠멀이라고 히-였

    고, ‘쇠’ 기- ‘철’ 로 ‘멀’ 이 ‘산’ 으로 뜰려

    지게 되어 철산이 되었다.

    한편 마을의 모양이 흡사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어서 쇠머리마을이라고 불

    렀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또는 절망산

    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는 서울 주변에 있는 ~들의 대부분 신-봉이 서울을 향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산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역산이라고 하여 조선시대에는 이 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조정에서 칠망을 쳤다고 하는데, 철신은 이 철밍-산을 뭇한다.

    쇠머리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성씨는 덕수 장씨 11세손인 장준(張埈, 제릉

    참봉 역임)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띄 후손들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덕

    수 장씨가 크게 이 지역에서 번성하였다고 한다.

    모세는 ‘연못이 세 개가 있었다. ’ 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한문으로는

    ‘연서’ 라고 했고, 연못 서쪽에 이 미을

    이 위치해 있어서 이와 같이 부르기도

    했다. 연못과 관련된 설은 자손이 궈하

    던 여흥 민씨 집안에 승려가 와서 우물

    을 세 개 파띤 번칭-할 것이라는 이야기

    에 따라 조성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

    다. 예전에는 이곳이 안양천의 범람으

    로 물이 자주 고여 있어서 자연스럽게

    연못이 형성되고 농사에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되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여겨진다.

    --」꾀버허바증(元鐵山 牛頭里)

    뚫 보셰(淵西)

    ~‘

    -------- - - ---------- - ----

  •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성씨는 여흥 민씨로 ‘민씨촌’ 으로 불릴 정도로 번성

    하기도 했다. 마을이 동서로 길게 생긴 모양이어서 동쪽을 이랫말, 서쪽을 웃

    밀-로 불렀다. 1970년대 말 도시계획으로 인해 미을이 없어지게 되었디.

    마을에서는 해미-다 음력 10월에 길일을 택해 미을 뒤에 있는 이석거리에서

    산신제를 지냈으나, 미을이 없어지띤서 지내지 않게 되었다.

    모세와 서울 구로구 고척동 사이에 있었던 미을이다. ‘뱀수’란 미을 이름은 장

    마철이면 뱀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붙

    여진 이름이리고 하는 유래외- 미을 뒷

    산의 지세가 뱀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또 ‘산속’ 이라는 뭇으로 받속-뱃속

    배수-뱀수로 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미을에 정착한 성씨로는 남양

    홍씨, 능성 구씨, 전주 이씨 등인데, 능

    성 구씨와 전주 이씨가 번성하였다고 한다. 1963년에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이 된후 대단위 이-파트가 조성되면서 인구가늘게 되었다.

    《똥 뱀AT (E省里)

    -------”---뿔 비석거리 닝 l석슬 서|텀 놓슴 큰 걷1 꺼근|

  • 쩔 -------

  • 45 샌이붙 46 급멍이 47 벌알 48 밤일 49 안터 50 안현

  • - - -------------

    현재 히-안 주공이-파트 5단지가 있는 지역이

    다. 도덕산이 미을을 김-싸 안고 있는 모양이

    고, 동쪽 방향으로 트여 있다

    예전의 마을모습은주위가산림으로우겨져 미-치 한폭의 그림처럼

    운 마을이라고 히-여 기럼동(佳林洞)이라고 불렀다. 또 이불을 캔 것처럼

    사람들이 예의가 바르고 매사에 빈틈이 없어 ‘캔이불’ 이라고 부르기도

    캔이불이라고 부르게 된 또 디-른 유래는 미을 어느 기정에서 개를 기르고 있

    었는데, 그 충직스런 개가 늙고 병뜰어 앓아 누웠을 때 주인이 이불을 덮어주

    며 긴-호를 했다고 하여 ‘캔이불’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 주민들은 미을 명칭의 유래처럼 예전부터 회목하고 상부상조하며

    지냈다고 한다. 정칙-해서 살던 연일 정씨들이 아파트 건립으로 미을을 떠나게

    되자 마을 유래비를 옛 터에 세워 기념하고 있다. 유래비에 따르면 도덕산이

    실내체육관 방향으로 뻗어 내린 곳윤 미을 사람들은 다림-산이라 불렀다.

    미을에는 해미-디- 음력 10월 3일이띤 마을 뒤 도덕산 중턱에 있는 소나무 앞

    에서산신제를지냈다.

    아름다

    미을

    했다.

    구름신을 끼고 있는 미을로서 광명시 간선도

    로인 노안로와 오리로가 그 옆을 지나가고

    교통접근이 편리하다.

    미을의 유래는 마을 뒷산에서 알본인들이

    채굴을 하였는데 ‘ 금덩어리가 나와 ‘금멍이 ‘

    라고 불렀다. 미을 입구 왼편은 ‘해피내모퉁이’ 라고 부르고, 오른쪽 산모퉁이

    를 ‘부처모퉁이 ’ 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피내모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미을

    입구에 성황당이 있어 소원 성취를 기원한 데서 유래하였다. 부처모퉁이는 머

    리 없는 돌부처가 있었고 이 돌부처 뒤에 금당사란 절이 있었는데, 이 절 이

    름을 따서 미을 이름을 불렀다.

    (똥랜이폴(가림동)

    ----

    --0명이 (금당 ·금당리)

    특흙 채굴 딴슬 n~고 딴 속서l 묻혀 상는 관울 ι~-T-1를 구H냄

    • 성황당 서냥당~I 원말로셔 서당인을 모만 ~I

    -------- ----- - -

  • G쫓i 방 : t>J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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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 .} ....... . "£-1 :

    」TL

    도덕산과 구름산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보면 도덕산은 서북쪽

    에, 구름산은동남쪽에 있다. 미을을두산이

    사빙-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이고, 예전부터 빔나무가 많아 밤일마을로 불렀다

    노안로를 따라 광명 IC 빙향으로 기-는 길에 밤일미을로 들어가는 밤일로기

    나온다. 빔일마을의 서쪽을 웃발 동쪽을 이-랫말 가운데를 중천말이라고 부

    르기도 했는데 , 이-랫말은 인-터마을로 이어진다. 아랫말에 해당하는 지역은 그

    린벨트로 묶여 비교적 주택 개량도 덜 되어 있는 편이라서 지금도 비교적 예

    전의 자연미을 보습을 간직히-고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물맛이 흙고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지역이었다. 빔-일미낙을에는 충주 평씨가 터를 잡은 이래 충주 박씨,

    전주 이씨기- 들어와 살았는데 비교적 충주 평씨가 많이 살았다.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아랫말 논가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우불고사를

    내다가, 이후 마을 뒷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1970년대 도시화로 제를

    내지 않게 되었다. 밤일미을은 현재 전원주택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인-잉=천 제빙-을 따라 남 북으로 길게 생긴 미을로, 허허벌판에 생긴 미을이라

    하여 ‘벌말’ 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구로구 시흥동의 옛 이름으

    로 당시 시흥군관이-가 있었던 상평리 아래에 있는마을이라하여 하평리라고

    불렀고, 현재 히-안동의 ‘히-(下)’ 자는 여기서 유래힌- 것이다.

    서울시 구로구와 안현 사이에 위치한 벌발은 1914년에 시흥군 서면 하안리

    에 속했다가 광명시 하인-동으로 명칭이 비뀌었다

    구름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으로 트인 미을로 밤일과 안현 시이에 있다. 전란

    없고 인심이 좋아살

    또 삼태기처럼 오복힌-

    이 일어나도 미을이 안쪽에 있어 피해가 없었고 도둑이

    기에 편한 미을이라고 하여 ‘안터(安基)‘ 리고 불렀다.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안터라고 부르기도 했다.

    -------좋킬 삼태기 흙·|나 쓰면111, 꺼름 따추|를 임 .• ~ 나르는 선| 쓰는 71구

  • 안터는 조선전기 문신으로 병조판서

    를 역임하고 중종 원년(1506) 정국꽁신

    2등에 올라 운수군에 봉해진 이효성(李

    孝誠, 1445∼ 1517)의 묘를 마을 둬에

    쓴후그의후손들이묘이래실-기시

    작하면서 마을이 이뤄졌다. 이후 달성 서씨, 원주 원씨, 광산 김씨 등이 들어

    와 살띤서 호수가 늘어났다.

    마을은 안터길을 따라 새롭게 주택이 건축되어 있기도 하고, 아직 개량되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주택틀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시흥군 서면 율일리에 속했다가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뀐 후

    1981년 광명시 하안 l동이 되었다.

    - ---- -- -- - ---- ------

    하안동 단독필지와 광명시 실내체육관이 있는 지역으로 하안 1동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광명시 간선도로인 오리로와 노안로기- 마을 옆을 지난다. 기-람과

    인-터마을, 그리고 금딩-미-을과 인접해

    있다. 안현 뒷길 안터저수지 옆에 하안

    광림교회가 큰 규모로 지어져 있다.

    마을의 지세가 길마 형상이라고 하여

    ‘안현(黨뼈)‘ 이라고 하나, ‘안(속)고개’

    라고 부르다가 ‘인채’ 로 부르고, 이어

    서 ‘안현’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안현은 남, 북으로 길게 생긴 지역을

    안말, 서북쪽 지역을 넘언말이라고 불렀고, 미을에 대대로 정착한 성씨는 전

    주 이씨, 진주 깅-씨, 평신- 신씨, 경주 최씨 등이다. 이 마을은 1988년 도시화

    로 예전의 미을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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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떤는 -~ L:j 셔l셔 했나-고?

    ‘광명의 옛 지명을 찾이- 떠니-다’

    책을 통한 굉-명의 지명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었나요?

    책에 담긴 지명 유래를 통해 조상들이 살았던 광명의 옛 모습과 생활상을 들여

    다 보면서 주변 역시를 이해하고 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

    각됩니다.

    도시 개발로 인해 사라진 지명도 있고 아직까지 우리 곁에 살이- 숨쉬는 지명

    도 있지만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버렌 동네를 생각해 보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

    지가 살았던 역사의 뿌리이며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상들이 실-있-던 곳에 대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았

    을 것이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디에서 실-았을까,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

    다면풀렸을것이므

    1. 광명의 지명을하

  • ‘다 1\1[• 꽤A교씨\0.겐

    • \i\- 포. -~ o_-t-셔 송떼.,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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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지역문화의 디덤돌광명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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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명의 옛지명을 찾아 떠나다판권기문화가 담긴 역사적인 이름목차1. 가학동가골공석골노리실도고내벌말솔안장터말가재골뒷골

    2. 광명동원광명너부대신기촌

    3. 노온사동가락골가운데말논사리능말사들동창골윗장절리와 아랫장절리

    4. 소하동가리대데부뚝마을신촌설월리영당말작은말한내

    5. 옥길동두길부평말식골

    6. 일직동구석말궁말덕안동촌모텡이벌동네새터말양진말자경마을호봉골

    7. 철산동쇠머리마을모세뱀수

    8. 하안동갠이불금뎅이밤일벌말안터안현

    우리 동네 숨은 이야기

    뒷표지

    DC2015029154이효성외1명광명문화원광명의 옛지명을 찾아 떠나다2010광명의 옛지명을 찾아 떠나다판권기 3문화가 담긴 역사적인 이름 6목차 7 1. 가학동 9 가골 10 공석골 10 노리실 11 도고내 12 벌말 12 솔안 13 장터말 13 가재골 14 뒷골 14 2. 광명동 15 원광명 16 너부대 16 신기촌 17 3. 노온사동 19 가락골 20 가운데말 20 논사리 21 능말 21 사들 22 동창골 22 윗장절리와 아랫장절리 23 4. 소하동 25 가리대 26 데부뚝마을 26 신촌 27 설월리 27 영당말 28 작은말 29 한내 29 5. 옥길동 31 두길 32 부평말 32 식골 33 6. 일직동 35 구석말 36 궁말 36 덕안 37 동촌 37 모텡이 38 벌동네 38 새터말 38 양진말 39 자경마을 39 호봉골 40 7. 철산동 41 쇠머리마을 42 모세 42 뱀수 43 8. 하안동 45 갠이불 46 금뎅이 46 밤일 47 벌말 47 안터 47 안현 48 우리 동네 숨은 이야기 50뒷표지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