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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873/tkl.2017. 77. 109> 한국문학논총 제77(2017. 12) 109~133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 박설매 ** ․김강 *** 차 례 1. 서론 2. 본론 1) 중세 청조와 조선조 선비들의 유교적 연대감 2) 타자로서의 청조에 대한 인식 변화 3) 주변부 언어에 대한 각성 3. 결론 국문초록 18세기 말, 조선조는 개명한 군주 정조의 통치 아래 다채롭고 번화한 문화상을 보였다. 북학파는 북으로 청조의 문물을 학습한다는 북학사상 을 내세우며 청조의 문인들과 밀접한 문화교류를 진행하였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북학파의 핵심성원으로서 청조로 출사하는 기회를 빌 어 청조의 문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연행록, 연행시가에 유토피아화, * 이 논문은 중국 국가프로젝트(17CWW019)와 연변대학 학교 프로젝트 (QN2016 004)의 지원을 받아서 완성되었음. ** 중국 연변대학 *** 중국 연변대학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2018-12-13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11 언어를 중시하지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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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논총 제77집(2017. 12) 109~133쪽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박설매**․김강***

    차 례

    1. 서론

    2. 본론

    1) 중세 청조와 조선조 선비들의

    유교적 연대감

    2) 타자로서의 청조에 대한 인식

    변화

    3) 주변부 언어에 대한 각성

    3. 결론

    국문초록

    18세기 말, 조선조는 개명한 군주 정조의 통치 아래 다채롭고 번화한

    문화상을 보였다. 북학파는 북으로 청조의 문물을 학습한다는 ‘북학’사상

    을 내세우며 청조의 문인들과 밀접한 문화교류를 진행하였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북학파의 핵심성원으로서 청조로 출사하는 기회를 빌

    어 청조의 문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연행록, 연행시가에 유토피아화, 이

    * 이 논문은 중국 국가프로젝트(17CWW019)와 연변대학 학교 프로젝트 (QN2016

    004)의 지원을 받아서 완성되었음.

    ** 중국 연변대학

    *** 중국 연변대학

  • 110 한국문학논총 제77집

    데올로기화 된 중국 형상을 그려냈다. 그들은 이 형상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조와 비교를 통해 여러 가지 개혁사상들을 제기하였다. 1778년 이덕

    무와 박제가의 연행을 시작으로 1801년 유득공과 박제가의 연행을 마감

    으로 모두 4차례 청조에 다녀왔는데 백여 명의 청조문인들과 교유를 진

    행하였다. 그들의 교유는 중세기 선비들의 끈끈한 유교적 연대감을 보여

    주고 있지만, 중세기적인 동아시아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민

    족으로서 자아를 인식하고 각성하는 자각도 보여주고 있다. 본고는 상술

    한 세 명의 조선 중세문인과 청조문인사이의 교유양상을 중심으로 그들

    이 각성하고 있는 근대의식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주제어 : ‘해동사가’, 중국체험, 타자인식, 변화

    1. 서론

    18세기 동아시아는 중세기로부터 근대로 이행하는 이행기에 들어섰

    다. 중세적인 질서의 틀인 화이질서와 신분제도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

    하였고 새로 출현한 근대적 요소들이 중세적인 낡은 가치관과 충돌하면

    서 신․구세력간의 문화충돌이 일어났다. 명나라의 멸망은 화이질서 중

    ‘화’를 대표하는 명나라 문화가 ‘이’를 대표하는 만족문화에 대체되었음

    을 시사하며 동아시아 각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자연발

    생적인 자본주의 요소의 출현은 ‘사농공상’의 중세적인 신분제도의 붕괴

    를 가속화하였다. 도서의 인쇄, 출판과 판매가 시장화되면서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는 인쇄물이 출현하였고 서서히 근대지향적인 사상들이 대

    두하기 시작하였다.1) 또한 문언문만 공식적인 통용어로 인정하고 민족

    1) 베네딕트 리처드 오고먼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상해인민출판사, 2001, 59-60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11

    언어를 중시하지 않던 데로부터 민족 언어의 가치를 인정하고 문언문

    속에 ‘조선풍’을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해동사가’는 북학파 중견문인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이서구를

    말한다. 이들은 백탑부근에서 모여 교류를 하면서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

    는 문학단체를 이루었다. 그들은 중세기 선비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문

    화이행기 사회문제를 고민하였으며 청조로 출사하는 기회를 빌어 동아

    시아 문인들과 교유를 하면서 중세적인 가치관을 반성하고 중세보편주

    의 사상에서 벗어나 타자로서의 청조를 발견하고 민족적인 자아의식을

    키워갔다. 그들은 인쇄물이 가지는 지식권력(話語權)을 인식하고 있었고

    주변 민족 언어의 각성도 감지하였으며 민족 언어의 가치를 발견, 발굴

    하는데 힘을 기울여 근대지향적인 미래상상을 하였다. 1778년부터 1801

    년까지 23년간을 거친 중국체험서사는 이 단체의 인식변화과정을 잘 보

    여주고 있다.

    중국, 한국, 북한에서의 ‘해동사가’ 연구는 비교적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풍부한 학술적 성과를 누적하였다. 한국의 경우 조선조후기 사가시연구(鄭良婉,성신여자대학출판부, 1983), 초정박제가연구(安大會, 성균관대출판부, 2013), 유득공시문학연구(宋寯鎬, 태학사, 1984), 이덕무 시문학 연구(李和炯, 집문당, 1994), 박지원과 후기사가문학사상연구(尹基洪, 박사논문, 1988) 등 여러 가지 논저가 있으며 5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이 연구들은 ‘해동사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깊이 있는 문학

    적 분석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체험이 그들의 근대의식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많이 논의되지 않았다. 북한의 경우 이조시대 한시연구(李京淑,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2008) 등 논저가 있으나 중국문화와의 관련

    연구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20세기 80년대 후기부터

    김병민 교수의 북학파문학과 중국문학관련연구를 시작하여 다양한 시각으로 북학파문학연구를 전개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는 박제가시론과 시가연구(樸齊家詩論及其詩歌研究)(정일남, 민족출판사, 2006), 이

  • 112 한국문학논총 제77집

    덕무 문학연구(李德懋文學研究)(서동일,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3) 등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중국은 비교문학과 비교문화의 시각

    에서 ‘해동사가’와 청조 문학과 문화의 관련연구를 진행하여 풍성한 연

    구 성과를 이룩하였으나 작가 개인 연구에 치우치고 있으며 ‘해동사가’

    라는 시점에서 조명되지 않았다. 김병민 교수의 저작 북학파문학과 중국문학 관련 연구의 경우, 북학파라는 전체적인 시점에서 북학파와 중국문화와의 관계를 연구하고 그들의 근대의식을 분석하였으나 ‘해동사

    가’의 근대의식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논의하지 않았다. 하여 본고에서는

    중국체험서사를 통하여 그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와 민족각

    성의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2. 본론

    1) 중세 청조와 조선조 선비들의 유교적 연대감

    중세기의 선비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로 등

    용되어 왕권통치를 돕는 것과 학문에 정진하여 도를 깨쳐 만세태평(萬

    世太平)의 유토피아적인 대동세계(大同世界)의 구축을 위하여 힘을 이바

    지하는 것이다.2) 어느 길을 선택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선비로

    서 명예를 실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회적인 평판을 귀하게 여기는

    자세이다. 18세기 동아시아는 물질적인 부가 일정하게 누적되어 조선조

    문인들은 중국북경의 유리창에서 절강지역 상인이나 문인들과 교유를

    하면서 부유함을 경험하였다. 비록 그들은 조선조의 가난문제를 고민하

    여야 할 주요한 문제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으나, 국가적인 가난과 개

    인의 가난을 구분하여 국가적인 가난은 사회문제로 간주하고 개인의 가

    2) 中世紀的‘士’有兩條出路, 一是出仕爲‘吏’, 爲皇權效勞, 二是爲師重道, 鑽研學問。葛

    兆光, 중국사상상․제2권, 상해복단대학출판사, 2010, 187-192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13

    난은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연히 정신적인 재부에

    속하는 학문, 시적 재능 그리고 개인 수양 등을 우선순위에 놓고 자신보

    다 정신적 부를 갖춘 이를 선망하고 존경하는 중세적인 선비로서의 가

    치관을 숭상하였다.

    공헌배(孔憲培)는 공자의 72세손이다. 1790년 유득공과 박제가가 연행

    하러 왔을 때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유득공과 박제가가 공헌배를

    기념하여 적은 시구를 보면 공경의 정이 다분하다.

    유득공과 박제가의 원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정무난정」 탑본, 진품으로 명성 있고

    춘추금쇄는 소매 속의 보배라네가을 산곡부의 성남쪽길로

    금정교 타고 옥같은 사람 돌아가네.3)

    定武蘭亭響榻真,

    春秋金鎖袖中珍。

    秋山曲阜城南路,

    金丁橋歸玉貌人。

    어예뻐라 황금덮개 씌운 가마에

    단정히 올라 앉은 성인의 자손

    사람시켜 시초를 주라 명하며

    규문의 전적대해 말을 하누나.4)

    可憐金頂轎,

    端坐聖人孫。

    將命貽蓍草,

    奎文典籍雲。

    유득공의 시주(詩注)를 보면 공헌배는 30대 초반이라5)고 기록되어 있

    3) 유득공, 열하기행시주, 한국인문출판사, 2010, 231쪽.4) 박제가, 정유각집(중), 돌베개, 2010, 346쪽.

  • 114 한국문학논총 제77집

    다. 유득공이 1748년 태생이고 박제가가 1750년 태생인 것을 미루어 볼

    때 이때의 유득공과 박제가는 모두 불혹에 들어선 중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공헌배를 보는 시각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올려다보

    는 공경의 시각을 취하고 있다. 묘사를 볼 때 그들은 “금정교 탄 옥같은

    사람”, “어여뻐라 황금덮개 씌운 가마에 단정히 올라앉은 성인 자손 ”이

    라 시화하고 있는데, 인물묘사가 너무 초현실적이서 30대 초반의 남성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어느 성당에 모셔진 조각상에 가깝다. 유득공 시어

    속의 「정무난본」이나, 「춘추금쇄」 그리고 박제가 시어 속의 ‘규문전적’은

    모두 공헌배가 공자 72세손으로서 공자의 뒤를 이어 도통(道統)의 자리

    를 이어받은 만큼의 지식권력을 갖고 있다고 설명되어진다. 그리고 “사

    람을 시켜 시초를 주라 명하며”중의 ‘시초’는 선성묘(先聖墓)위의 시초를

    일컫는 말로써 그의 신분과 의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공헌배에 대한 묘사는 현실과 거리감을 두고 있으며 공경의 정이 다

    분하다. 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비공식적인 연행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묘사가 이렇게 공손하고, 깊이 있는 교제를 한 기록이 전무함에도 이토

    록 존경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공헌배에 대한 존경은 그 인간성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공자의 72세손이라는 문화적 부호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기효람(紀曉嵐)은 청조의 예부상서(禮部尚書)로서 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고 사고전서(四庫全書)편집을 맡고 있는데 그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대학자이다. 그러나 거리감을 두고 신성화 하는 공헌배에 비해 기효람

    (紀曉嵐)에 대한 묘사는 구체적이고 인간성이 넘친다. 박제가는 「회인시

    심여 장사전을 흉내내다․효람 기윤(懷人詩 仿蔣心餘)」6)에서 총 30자밖

    에 안되는 5언 시에 기효람이 사고(四庫) 품은 박식함, 소설 난양수록(灤陽隨錄)을 써 풍자하는 재치, 그리고 조선조문인에게 청조문단상황

    5) 유득공, 열하기행시주, 한국인문출판사, 2010, 231쪽.6) 박제가, 앞의 책, 160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15

    을 설명하여 주고 서적까지 도와 구입해주는 친절함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속회인시 18수(續懷人詩 十八首)중 「효람 기윤(紀曉嵐)」7)에서는 28자 4구밖에 안되는 7언 시에 기효람이 붓을 들어 조선조문인

    의 문제에 필답해주고 조선조문인의 회인시를 읽고 인정해주는 모습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기효람이 선물 한 벼루에 새겨진 ‘옥정(玉井)’이

    란 두 글자를 빌어 그의 고아한 품성을 노래하고 있다.연경잡절 임은수 자형과 헤어지며 주다. 옛 기억을 더듬어 붓을 달려 140수를 얻었다.(燕

    京雜絕 贈別任恩叟姊兄 追憶信筆 凡得一百四十首)8) 에서는 예부상서란 벼슬지위, 73세의 고령에 덕목, 존경받을 만한 모든 것을 갖춘 높은

    분이 말단직 서장관인 박제가를 “서권기가 많으니 해외에 있는 큰 인물

    이로다(多書卷氣 海外大有人在也)”9)고 치하한 내용을 적고 있으며‘외교

    에 의리가 없다(無外交之義)’10)라는 규정 때문에 감히 회답편지를 못해

    주는 박제가에게 해마다 안부편지를 전하는 따스함을 시화하고 있다.11)

    뿐만 아니라 기효람은 박제가가 추방당하였을 때 조선왕에게 서찰을 전

    해 달라고 부탁하는 방식으로 박제가를 도와주고 있다. 유득공의 열해기행시주에서는 기효람이 친히 조선조 사신의 처소에 찾아 온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12) 팔십 고령을 넘어선 고위급관원인 기효람과 서자출

    신의 하위급 서장관 사이의 막역지우는 도통(道統)을 추구하는 중세선

    비의 연대감에서 연유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대감은 청조문인들과의 시가를 통한 화답 활동에서도 잘 보

    7) 위의 책, 239쪽. 8) 위의 책, 319쪽. 9) 위의 책, 320쪽.10) 위의 책, 320쪽11) 원문은 아래와 같다. 기공은 이름이 윤이니 예부상서다. 호가 효람이다. 일찍이

    내 시를 일컬어 “서권기가 많으니, 해외에 있는 큰 인물이로다”라고 하였다. 매

    년 반드시 안부를 물으며 시를 부쳐 오는데, 나는 외교의 의리가 없는지라 감히

    답장을 못하고 있었다. 부쳐 온 시에 수인을 찍었는데, ‘을사천수지일’이라는 글

    귀가 있었다. 올해로 73세다. 위의 책, 320쪽.12) 유득공, 앞의 책, 226쪽.

  • 116 한국문학논총 제77집

    여 지고 있다. 유득공은 1790년 심양서원에 들리면서 십여 년 전 인

    1778년 심양서원의 청조문인들과 시로 화답하며 즐기던 장면을 풍아하

    게 그리었고13) 1801년 다시 심양서원에 들렸을 때 그 곳이 ‘금지(禁地)’

    로 된 것을 보고 못내 아쉬워했다. 북경에 도착한 뒤에는 유리창과 오류

    거 등 곳의 서점을 다니며 청조문인들과 교유하였다. 과거시험을 보러

    온 거인(舉人)들 중 ‘외교의 의리가 없다(無外交之義)’라는 규정이 저어

    되어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여 박제가와 유득공과 시문으로 화답하는 문

    인들이 적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박제가와 유득공의 시적재능과 학문에

    매료되어 지기(知己)로 품평해주면서 헤어지기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이런 정치적인 법도의 벽을 깨고 정신적인 교유를 하고 싶

    어하는 자세에서 중세기 선비로서의 연대감을 읽어낼 수 있으며 이들이

    선비적인 자세를 지식인의 기본 틀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러나 선비로서의 정신적 연대감은 점차 공공영역에서부터 개인영역으로

    교체되어 갔다. 명조가 멸망하기 전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는 ‘화의질서’로

    구축 된 보다 통일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만족정권이 정립되면서 화이질

    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중국은 만족문화와의 통합을 통하여 소위‘호

    속화(胡俗化)’하는 이질성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 문

    인들은 동(同)을 고집하던 데로부터 대동(大同)속의 부동(不同)을 인식

    하고 접수하면서 오직 ‘하나’가 아닌 공동체속의 ‘자아’와 ‘타자’를 구별

    짓고 ‘자아’의 가치를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2) 타자로서의 청조에 대한 인식 변화

    명나라의 멸망은 중세기 동아시아인들이 알고 있던 전통적인 ‘화이질

    서’의 틀을 흔들어 놓았다. 게다가 청조가 문화적으로 독단하면서 전제

    통치를 하였고 만족과 한족이 문화적으로 융합하면서 예의범절이나 풍

    속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이는 조선조 사람들에게 중국이 오랑캐화(胡

    13) 위의 책, 39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17

    變)되었다는 인상을 가지게 하였으며 조선 조 사람들이 정통적인 중화

    의 문화와 사상의 대를 이어 받는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심어 주어 자

    신의 문화를 다시 자각하게끔 하였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1778년에 청조로 왔는데 이덕무는 그 당시 ‘공자묘

    (孔子廟)’와 ‘서상관(庶常館)’을 방문하였다. 어려서부터 유가경전을 읽으

    면서 유가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터라 그들은 이 두 곳에 대한 동경

    (憧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그들에게 큰 좌절감을 안

    겨 주었다. 그들이 동안문태학(東安門太學)에 들어섰을 때 학생들이 즐

    비하게 늘어서서 학문을 연구한다고 전해들은 주랑(住廊)에는 아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잡초까지 우거져 있었다. 하여 인도를 하는 조교(助

    敎) 한 사람에게 사신이 역관(譯官) 김재협(金在協)을 시켜 “우리나라의

    성묘(聖廟)는 존엄하게 여겨 엄숙히 공경하는데 지금 이 묘전(廟殿)에

    잡인이 어지러운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물으니 조교는 처음에는 어이

    없는 표정을 짓다가 조금 후에는 노기를 띄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때 그 실망한 기분을 이덕무는 당연한 말을 했는데 왜서 조교가 이렇게

    분노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助教初覺無然, 後又怫

    然未可知)14) 뿐만 아니라 공자묘를 알현할 때 청조인들이 이상한 눈길

    로 쳐다보는 등의 일화에서 청조가 오랑캐화 되었다고 생각하고 실망의

    감정을 한 층 더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1801년 유득공과 박제

    가가 ‘동이(東夷)’로 자처하는 진선(陳鱣)을 만나서야 청조의 문화통제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진선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진

    선이 먼저 “귀국에서 학관에 진열 된 서적이 송유의 것을 씁니까? 한유

    의 것15)을 씁니까?”라고 묻기에 유득공과 박제가는 조선조에서 음운학

    과 고증학은 성현의 책을 읽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하였다.

    14) 이덕무, 입연기, 林基中, 燕行錄全集․第五十七卷, 東國大學校出版部, 2001, 287-289쪽.

    15) 유득공, 연대재유록, 林基中, 燕行錄全集․第六十卷, 東國大學校出版部, 2001, 290쪽.

  • 118 한국문학논총 제77집

    청조의 고증학이나 음운학 쪽으로 기울고 있는 학풍에 서운함을 느끼던

    유득공이 문자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향인이 서원을 만들어 제향

    받드는 일이 없는가고 묻자 진선은 “장래에는 반드시 공자의 묘정에 배

    향하게 될 겁니다. 오직 이 분은 바로 경제할 인물이므로 대유라 이르는

    것인데 앉아서 말하고 일어서서 실행하는 분이지요.(將來必配食孔子廟

    庭, 惟此公即屬經濟。所以謂之大儒, 坐言起行)”16)라고 하면서 자신이 고

    증학 쪽으로 기우는 것이 막부득이한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이들은 청조학풍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예악(禮樂)’

    이나 풍속의 변화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1790년 유득공과 박제가는 원명

    원에서 개최되고 있는 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다. 이 공연은 8월 1일부터

    8월 11일까지 지속되었는데 출연종목으로는 서유기의 ‘승평보벌(升平寶

    筏)’이다. 서유기공연은 열하루동안 지속되었는데, 만족관원들이 서유기

    라는 희곡에 심취되어 있는 장면과 이런 공연을 관람시킨 청조정부에

    대해 유득공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원문의 기록을 보면 아래

    와 같다.

    화신의 아들 부마는 경박한 소년이다. 연회의 자리에서 나를 보더니

    달려와서 묻기를 “본국에 연희가 있는가 없는가?”라고 하여 내가 있다

    고 대답하니 또 “중국의 것과 같은가 다른가? 좋은가 안 좋은가 ?”라고

    물었다. 내가 같은 것도 있고 같지 않은 것도 있으며 좋은 것도 있고 좋

    지 않은 것도 있다고 대답하니 곧 웃으면서 다른 곳을 향하여 달려갔다.

    복장안은 또 통역관을 불러 연희에 사용하려고 조선 사신들의 다리(髢)

    를 빌려갔다. 청국대신들의 행동거지가 이와 같았다. 황제가 손오공, 저

    팔계의 황탄무계한 일들을 공연하게 하고 번왕 만객들과 함께 그것을

    관람하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和珅之子駙馬輕躁少年, 見餘於宴班, 走來問, “本國有無戲?”餘答曰有,

    複問, “與中國, 同不同好不好?”餘答以有同有不同, 有好有不好, 則笑而走

    向他處。福長安等, 紛紛求扇藥樂於使臣, 長安又使通官, 屢求東髢, 欲爲

    16) 위의 책, 264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19

    戲子髥, 中朝大臣舉動如此, 帝方與藩王蠻客扮孫悟空、豬八戒不經之事而

    觀之, 未知其何如也。17)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 이들이 보기에 외국손님을 접견하는 장소는

    공식적인 장소이므로 오락성이 농후한 희곡을 보이기에는 적합하지 않

    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화신(和珅)의 아들은 부마로서 조

    선에는 희곡이 있느냐, 중국의 희곡과 어떤 다른 점들이 있느냐는 말들

    을 걸어오고 있으니 이들 눈에는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차세대 후계자들 중 가장 유망주로 지목되는 복장안(福長安)이

    조선 사신들의 의복을 연출용으로 빌려가고 있으니 의복을 신분의 상징

    으로 보는 중세기 지성인들한테는 한심한 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흥미

    로운 것은 청조가 외국손님을 접대하는 방식이 체통에 어긋난다고 혀를

    차는 유득공의 기록과는 달리 정사로 출사한 서호수의 기록에서는 사신

    들한테 보여준 희곡은 민간에서 연출되고 있는 희곡종목들과 완전히 다

    른 것이라면서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유득공과 같은 서장

    관일 경우 연행일기가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므로 자신의 감정을 더 솔

    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청조와 조선조는 동일한 동아시아공동체속의 일원으로 서로를 바라보

    던 시각이 1801년에 들어 바뀌고 있었다. 1801년 박제가와 유득공이 재

    차 청조로 출사하였을 때 묵장과 함께 청조와 조선양국의 풍속의 차이

    를 두고 담론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1778년 이덕무가 쓴 입연기와 1790년 유득공이 쓴 열하기행시주에 비해 1801년의 담론은 감정이 한결 더 평탄하고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묵장은 또 나에게 물었다. “귀국의 부녀자들은 귀를 뚫소?”

    “혹 더러 뚫지요, 그러나 사족은 절대 없고요”

    “발을 싸매는 가요?”

    17) 유득공, 앞의 책, 2010, 219쪽.

  • 120 한국문학논총 제77집

    “그런 풍속은 절대 없지요.”

    “절부 열녀를 숭상합니까?”

    “우리나라 부녀들은 두 번 시집가지 않는 것을 떳떳한 일로 여기지

    요. 그러므로 반드시 하종하여야만 ‘열’이라 일컫지요.”

    “한층 더 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대개 따라 죽는 것이란 옛사람의 폐

    습이지요. 그러나 ‘열’이라 아니 할 수는 없겠지요.” 묵장은 또 물었다.

    “귀국에도 기생이 있습니까?”

    “있고 말고요” 나는 묻기를 “이곳에서 토기를 표자라고 이르는데 표

    란 무슨 뜻이오?”

    “표란 아름다운 여자의 호칭이지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사랑해서

    음탕해지므로 ‘표’가 나쁜 버릇을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좋아하는 자의 과실이지요. ‘표’야 어찌 죄라 하겠소?” 온 좌

    중이 크게 웃었다.

    墨莊問曰。貴處婦女穿耳否。答或有之。士族則否。又問裹腳否。答無

    此風。又問尙節烈否。答我國婦女不再嫁。視以爲常。故必須下從。然後

    稱烈。墨莊曰。可謂加一等矣。殉是古人弊俗。然不得不謂之烈矣。墨莊

    又問貴處有妓女否。答有之。餘問此處土妓謂之嫖子。嫖是何義。墨莊

    曰。嫖爲美女之稱。愛其美而淫之。故嫖爲惡習。餘曰。愛之者過耳。嫖

    豈罪也哉。一坐大笑。18)

    유득공은 중국과 조선의 풍속이나 예의범절상의 차이를 논함에 있어

    서 보다 평이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더는 청조의 예의범절이 옛 법과

    어긋나는 것에 대해 경악해 하거나 비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공통

    된 부분은 보류하고 상이한 부분에 대해서는 기꺼이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중국과 조선을 ‘화의질서’중의 하나로 인식하던 데서 점차 ‘타자’

    의 시각으로 바꾸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북학파와 청조문인간의 연

    결고리를 열어 준 홍대용이 청조에 출사하여 엄성, 반성균과 육비 등 청

    조문인들과 교류할 때만 보더라도 이들은 ‘사장, 의리’등과 같은 보다 유

    18) 유득공, 앞의 책, 2001, 279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21

    교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담론을 벌였다. 북학파의 성원들은 홍대용

    과 청조 문인들 간의 교유내용을 엮은 회우록을 읽고 청조에 대한 동경을 키워갔으며 마침내 연행길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제껏 이들의 마

    음속에서 청조는 ‘타자’가 아닌 중세기 지성인으로서의 자신을 알아줄

    수 있는 ‘천애지기’, 다른 하나의 ‘나’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하여

    1778년과 1790년의 연행길은 자신과 다른 ‘타자’로서의 청조를 발견하고

    다르다는 것에 실망의 감정을 역력히 보여준다. 그러나 1801년 이들이

    다시금 연행길에 올라섰을 때 ‘타자’로서의 청조를 보다 자연스럽게 바

    라보게 되었으며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보다는 청조에서 유행하고 있는

    고증학이나, 음운학 혹은 순수한 시가창작만 토론하게 되었다.

    3) 주변부 언어에 대한 각성

    베네딕트 리처드 오고먼 앤더슨(Benedict Richard O'Gorman Anderson)

    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에서 중세기는 문화공동체로부터 민족공동체로 이행하고 있는 단계라고 하였다. 인쇄술의 발전은 문화공동체언어 뿐

    만이 아닌 주변부언어(민족어나 방언)에도 인쇄, 발간 될 수 있는 기회

    를 주었으며 이렇게 인쇄된 언어를 중심으로 민족공동체가 서서히 구축

    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19) 18세기의 동아시아에서도 주변부 언어가

    천천히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북경의 유리창에서는 문언문이 아닌 반백

    화문으로 된 소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만족언어, 몽고족언어, 회회언

    어와 같은 소수민족언어들도 여러 가지 편어나 비문에 나타나기 시작하

    였다. 조선 문인들도 조선어에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였으며 주변부언어

    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인쇄기술이 발전하면서 조선에는 소설을 창작하고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 도서판매상들이 출현하였으며 도서시장도 천천히 규모

    를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덕무, 유득공과 박제가는 매번 청조에 출

    19) 베네딕트 리처드 오고먼 앤더슨, 앞의 책, 59-60쪽.

  • 122 한국문학논총 제77집

    사할 때마다 청조의 유리창 부근의 도서시장에 들러 서적을 구매하였고

    그곳의 도서상인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이덕무의 입연기 기록에 따르면 이덕무와 박제가는 하루의 시간을 이용하여 북경의 14개 서점을 돌

    아보았고 조선에 유입되지 않은 도서 총 106권을 찾아냈다. 하루 사이에

    조선 도서시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국도서를 정리하였다는 것은 그들

    이 조선의 도서시장을 손금 보듯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며 중국의 도서

    에 깊은 관심과 인쇄품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20) 뿐만 아니

    라 이들은 당보(唐報)21) 등과 같은 중국의 간행물을 통하여 청조의 상황

    을 요해하고 있으며 청조문인들과 교유 중 인쇄물에서 담론되고 있는

    청조의 책들이나 문인들의 평판을 자세히 물어보고 있는데 이는 1801년

    유득공과 박제가가 기효람의 집에서 교류하는 내용과 이묵장과의 교류

    에서 잘 체현되고 있다.

    유득공과 박제가는 1801년 북경에 도착한 뒤 기효람을 방문하여 그들

    이 구하고자 하는 주자선본을 살 수 있는 지와 그들의 친구인 옹방강(翁

    潭溪), 손성연(孫星衍), 손형(孫衡), 공협(孔協)등과 같은 사람들의 근황

    을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청조에서 비교적 유명한 칠자사(七子社)

    의 허실, 전신미(錢辛楣)의 저작 이십삼사간오(二十三史刊誤)의 출판 상황 등에 대해서도 문의하였다. 그들이 이묵장(李墨莊)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들은 그들과 친분이 있는 몇몇 친우들의 도서출판 상황에 대

    해 담론하였고 이미 발간된 책들을 품평하였다. 예를 들면 대동원(戴東

    原)이 주필한 방언주(方言注)의 연구범위가 좁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책 제목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행길에 올라

    서기 전에 이미 숙독하였고 분석과 논증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22) 이로

    20) 이덕무, 입연기, 林基中, 燕行錄全集․第五十七卷, 東國大學校出版部, 2001, 278-283쪽.

    21) 유득공의 연대재유록을 보면 중국에서 발행하고 있는 간행물에서 발췌한 내용

    을 연행록에 그대로 옮겨 쓰면서 자신의 논점을 증명하고 있다. 22) 유득공, 앞의 책, 2001, 281쪽. 戴東原注方言恐未必盡, 墨莊曰, 東原學問人多宗之,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23

    부터 이들이 청조의 도서시장에 대한 요해는 그들이 형이하학(形而下學)

    범주로 취급하고 있는 고증학(考據學), 금석학(金石學)까지 포함하여 널

    리 섭렵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제가의 연행시에 출현한 76명 청

    조문인 중에는 옹방강(翁方綱), 강추석(江秋石), 심포존(沈匏尊), 진백공

    (陳伯恭)등과 같은 금석학 연구자가 있는가하면 황비열(黃丕烈), 이묵장

    (李墨莊)등과 같이 고증학에 심취하고 있는 문인들도 심심찮게 등장하

    고 있다. 유득공의 연행록을 보면 비록 고증학에 대하여 담론하는 장면

    이 세 번 밖에 출현하지 않지만, 이 세 장면이 전체 연행록에서 차지하

    는 비중은 아주 크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효람을 방문하였을 때 그가

    우루무치에서 얻었다는 한나라 비문을 보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기고

    있었다. 이들은 학문의 정통이라고 여겨지는 유가경전, 문학작품, 선비의

    도통(道统)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평가되는 형이하학(形而

    下學)적인 인쇄물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들이 시장에서 인

    쇄된 유가경전을 구하기 힘들어진 상황을 한탄하던 사실 등을 통해, 이

    들이 인쇄언어로 구축된 근대적인 지식권력의 흐름을 읽고 이에 참여하

    려 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 도서가 청조에서 출판 된 상황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연행록에는 청조문인이 조선의 도서출판 상황을 문의하는 장면

    이나 조선의 도서가 청조에서 간행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790년 유득공은 왕중당(王中堂)이 조선의 동국미사(東國秘史), 동국성시(東國聲詩), 포은과 목은 등의 저작을 문의하는 사건을 계기로 중국인이 조선 문집에 대한 인식과 오해 등을 담론한 적이 있다.

    사고전서사업의 개국이래 희귀한 책과 없어진 책을 두루 구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헌 중 중국으로 유입된 것이 많다고 여겨지는 데 유독

    화담집만이 편입되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원명원의 연회자리에서 중

    餘以爲未出廣庭尤少見也。

  • 124 한국문학논총 제77집

    당 왕걸이 동국비사와 동국성시에 관한 서적을 부사에게 요구하므로 본국에는 이 두 종류의 책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포은집과 목은 집을 요구할 때 내용에 서공이 혹 기휘 할 곳이라도 있을까 염려하여 모두 없다고 사양하였는데 왕중당이 또 다른 서적을 간곡하게 묻기

    에 마지못해 구입한 백겸이 가자정전도설이 있다고 응대하였다. 귀국 후에 경연에 아뢰고 유근, 허성, 이익 등의 설을 첨부한 다음 기전고라 명명하고 이를 간행해서 보냈다.동국성시란 것은 왕사정의 어양시화와 “조선의 사신이 지은 시구를 읽어보니 동국이 과연 시를 안다고 하겠구나”라고 하는 것인데 누군가 이 시의 구절을 따라 우리나라의

    시를 이름 붙인 것이다.

    ≪四庫全書≫ 開局以來, 傍求軼書, 我過文籍流傳中國者想多, 獨 ≪花

    潭集≫ 收入爲可異。圓明園宴班, 王中堂傑求 ≪東國秘史≫、≪東國聲

    詩≫於副使, 本國無此二種, 又求圃隱, 牧隱二集, 徐公或慮有忌諱處, 並辭

    以無, 王中堂懇祈他書, 不得已以韓久庵 ≪箕子井田圖說”應之, 既還筵席

    稟, 附以柳根許筬翼諸說, 名曰 ≪箕田考≫ 印送之, ≪東國聲詩≫者 ≪王

    漁洋詩話≫ 有曰“記得朝鮮使臣語, 果然東國解聲詩。”未知何人摘此語,

    以名東詩也。……23)

    같은 해 기효람은 유득공과 박제가한테도 서경덕의 작품집 화담집(花潭集)을 사고전서에 편집한 일을 거론했다. “귀국은 서경덕의 작품집 화담집은 이미 사고전서별집의 중외시집에 기록되었습니다.(歸國徐敬德 ≪花潭集≫ 已錄入 ≪四庫全書≫ 別集類中外詩集。)”24) 똑같

    은 사건을 여러 번 기술한데서 이들이 이 사건을 아주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제가의 연경잡절 임은수 자형과 헤어지며 주다. 옛 기억을 더듬어 붓을 달려 140수를 얻었다.(燕京雜絕 贈別任恩叟姊兄 追憶信

    筆 凡得一百四十首)를 보면 “영수사 온촌에서 갓끈 씻으니, 도화동엔 글귀가 새겨져 있네. 규방서 기다리는 어여쁜 임이 요서 땅 꿈 꾼 까닭

    모르겠구나.(濯纓靈壽寺, 泐句桃花洞, 不知閨裏人。真作遼西夢。)25)”라

    23) 유득공, 앞의 책, 2010, 227쪽.24) 위의 책, 226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25

    고 읊조리고 있는데 박제가가 평범해 보이는 영수사(靈壽寺)를 노래하

    는 이유는 시가 아래에 덧붙인 시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영수천은 영

    원부에서 동남쪽으로 십 오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온천으로 행궁이 있

    다. 도화동은 의무각에 있는데 북진묘에서 십리거리다. 황제의 어제집에

    는 조선인이 새겨놓은 글귀가 많다고 했으니,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靈

    壽泉在寧遠東南十五裏, 即溫泉有行宮, 桃花洞在醫巫閣, 距北鎮廟十裏, 皇

    帝禦制集雲, 多朝鮮人泐句, 盡記實也。)”26) 보다시피 이 건물이 박제가

    의 눈에 특별해 보인 이유는 다름 아닌 황제가 “조선인이 새겨놓은 글귀

    가 많다고 했으니,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朝鮮人泐句, 盡記實也。)”라고

    이름 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유득공 역시 연행록에서 여러 차례 왕어양

    (王漁洋)이 “과연 동국에서 시의 진미를 아는 구나 (果然東國解聲詩)”27)

    라고 한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연행록을 보면 조선의 작품이 중국에서 간행된 정황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박제가는 이우촌(李雨村)을 기념하는 시구에서 두

    번이나 이우촌이 편집한 함해집에 그들의 시구가 적혀 있다고 하며 하

    나는 「회인시 심여 장사전을 흉내내다․(懷人詩 仿蔣心餘)」 중 “그대들

    이 이야기를 들으려거든, 모름지기 함해에서 구해야 하리.(欲聞二三子, 須從函海來)”28)이고 다른 하나는연경잡절 임은수 자형과 헤어지며 주다. 옛 기억을 더듬어 붓을 달려 140수를 얻었다.(燕京雜絕 贈別任恩叟

    姊兄 追憶信筆 凡得一百四十首)중 시구“성도의 우촌노인 이조원선생, 방랑길 지금은 어떠하신지 만리 가는 배 무거웠네, 천추의 「함해」를 잔

    뜩 실어서.(成都雨村叟, 放浪今何如, 萬星歸舟重, 千秋函海書。)”29)이며

    시주를 “통정 이조원이 성도에 들어가니 풍류가 절로 호방하여 사람들

    25) 박제가, 앞의 책, 313쪽.26) 위의 책, 238쪽.27) 유득공, 앞의 책, 2010, 227쪽.28) 박제가, 앞의 책, 160쪽.29) 위의 책, 328쪽.

  • 126 한국문학논총 제77집

    이 숭암양신에 견주었다. 자신이 지은 저서 「함해」를 판각했는데 숭암이

    저술 50종과 자신의 저술 40종이 실려 있었다. (李通政調元, 入成都, 風

    流自豪人比之楊升菴, 刻其自著函海, 自升菴五十種, 自著四十餘種, 罷官載

    板, 入川中)”라고 달고 있다. 1801년 유득공의 연행록에서 이 사실은 재

    차 거론되고 있는데 “내가 우촌시화(雨村詩話)4권을 받아가지고 사관으로 돌아와서 보니, 근래의 일을 기록한 것이 특히 자상하여, 이무관(李

    懋官)의청비록(淸脾錄)과 나의 구저(舊著) 가상루고(歌商樓稿)도 역시 수록된 것이 많았다. 청조 사람이 동쪽 선비를 만나면 우리들의 성명

    을 선뜻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雨村詩

    話四卷, 攜歸館中見之, 記近事特詳, 李德懋清脾錄及餘舊著歌尚樓稿。亦

    多收入, 中州人遇東土, 輒舉吾輩姓名著, 蓋以此也)” 30) 이는 이들이 인쇄

    물의 출판을 따라 형성되고 있는 인쇄물의 지식권력을 감지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들이 쟁취하고 자 하는 것이 단지 조선의 저작이 청조에서 출판 인

    쇄되는 것이 아닌 지식권력임을 이들이 청조문인들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은 청조문인들이 단지 사고전서의 편집을 위하여 조선저작의

    목록을 요구하는 일은 아주 배척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동원(錢東垣)이

    유득공의 저작 목록을 요구할 때 유득공은 “내가 어찌 이름만 탐내는 사

    람이랴(我非瞰名客。)”고 불만을 토로했으며 이목장이 “나는 새로 이 바

    다를 건너가 귀국의 문헌을 얻어서 한 책을 만들어 외번(外藩)의 관면

    (冠冕)이 되게 하고자 하오.(吾新渡海, 欲望得貴國文獻, 勒成一書, 爲外藩

    冠冕。)”라고 제안을 하자 유득공은 “노자(老子)는, 한비자(韓非子)와 더

    불어 동전(同傳)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오.(老子羞於韓非同傳。)”라

    고 하면서 거절 하였다.31)

    베네딕트는 근대의 시작은 문화공동체의 주체언어가 점차 각성하는

    30) 유득공, 앞의 책, 2001, 275-276쪽.31) 위의 책, 272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27

    주변부 방언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을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한다고

    하였는데 방언이 인쇄 언어권에 들어서는 것을 첫 시작으로 하고 있

    다.32)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주변부언어에 대한 각성은 자신의 언어

    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에서 체현될 뿐만 아니라 주변부 기타 방언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서 잘 알려 진다.

    1778년 이덕무와 박제가가 청조에 사행(使行)하였을 때 청조의 문인

    들과 함께 운율을 사용하는 문제로 의논을 하였던 적이 있다. 이때 심순

    심(沈醇心)이 “조선에서 사용하고 있는 운율이 아직도 원나라 운율인가

    요(朝鮮用韻是否沿用元韻。)”라고 묻자 이덕무는 조선에서 사용하는 것

    은 삼운통고(三韻通考)인데 원나라 운율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심순심은 삼운통고(三韻通考)는 원나라 운율이며 그 중 틀린 부분이 많다고 지적하였다.33) 이덕무의 입연기에서는 이 대화내용만 기록하였을 뿐, 더 이상 토론을 부치지 않았다. 그러나 23년이 지난 1801년

    유득공이 박제가와 함께 다시 청조에 왔을 때는 일방적으로 설교를 듣

    는 상황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묵장이 “귀국에서는 율시(律詩)를

    지을 때 가(歌), 마(麻)를 아직도 통용합니까? 이 역시 여러분의 책임이

    지요. (貴處作律詩, 歌麻尚通否。是亦諸君之責也。)”34)라고 말하면서 조

    선에서 시를 짓는 운율이 틀렸는데 여태껏 틀린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가 청조에 왔다간 서장관들이 바로 잡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자,

    유득공은“각자의 통용인데, 우리와 무슨 관계란 말이요.(他自通, 何關鄙

    事)”35)라고 반박하고 있으며 청조의 시가 운율만을 따라야 하는 필요성

    을 부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묵장과 이야기를 할 때 이름은 똑같지

    만 지칭은 서로 다른 사물들을 예로 들면서 “눈으로 본다 해도 역시 결

    정짓기는 어려(天下一物一狀, 非親見, 不可妄議。)”36)우니 주변부의 방

    32) 베네딕트 리처드 오고먼 앤더슨, 앞의 책, 41-44쪽.33) 이덕무, 앞의 책, 310쪽. 34) 유득공, 앞의 책, 2001, 274쪽.35) 위의 책, 274쪽.

  • 128 한국문학논총 제77집

    언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유득공은 진선과 이야기를 나누

    면서 공양전(公羊傳)중 동곽유(東郭郵)가‘입을 열면서(口開)’, ‘거(莒)’자 발음을 하여 첩자한테 공략하고자 하는 곳이 ‘거(莒)’임을 간파 당한

    사실을 예로 들어 청조의 많은 고대 음이 조선을 비롯한 주변부 방언에

    많이 보존37)되어 있으므로 조선 문헌과 조선어의 학술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재차 피력하였다.

    이들은 화의질서 중 ‘이’로 판단되고 있는 기타 주변부민족의 상황에

    도 많은 관심을 돌리고 있다. ‘당벽’으로 비판을 받고 있던 박제가의 회

    인시들을 둘러보면 장난삼아 왕어양의 세모회인시를 60수를 본떠 짓다(戲仿王漁陽歲暮懷人六十首)에서 시화한 57명중 44명이 조선인이고, 6명이 한족이며 2명이 만주족이고 5명이 일본사람이다.회인시 심여 장사전을 흉내내다(懷人詩․仿蔣心餘)를 보면 노래하고 있는 청조문인 42명중 6명이 만족이고 1명이 회회족이다. 속회인시(續懷人詩)에는 18명 청조문인 중 1명은 만족이고, 연경잡절(燕京雜絕)에는 한족문인 22명, 만족문인 1명이며 외번(外藩)이 11명이다. 박제가의 교유범위는 ‘화’

    를 대표하는 청조한족문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으며 ‘이’문화에도 주의

    를 돌리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유득공은 총 3차례 연행길에 올랐는

    데 마지막 두 번은 모두 박제가와 동행하여 교유한 사람들이 거의 겹쳐

    지고 있다.

    1778년 이덕무와 박제가가 청조에 왔을 때 교류한 사람이 25명밖에

    안 되며 교유내용도 사장(詞章)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1790년 열하를 출

    사하였을 때 유득공과 박제가는 40여명의 동아시아 사람들과 교유하였

    으며 그중 7명은 외번인(外番人)이었다. 마지막인 1801년, 유득공과 박

    제가가 교유한 사람은 51인데 그중 4명은 유규(琉球) 사신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의 교유내용은 점차 풍부해지고 있으며 1790년을 계기

    36) 위의 책, 281쪽.37) 위의 책, 292쪽.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29

    로 주변부인 만주, 몽고, 회회 등 여러 부족의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보

    여주기 시작하였다. 유득공은 여러 차례 만주 언어, 몽고족언어, 회회언

    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만주, 몽고, 회회 여러 부족

    왕들이 여러 가지 언어를 정통하고 조선어도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3. 결론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1778년부터 1801년까지 모두 4차례 연행을

    떠났으며 백여 명의 동아시아 문인들과 교류를 하였다. 교류내용은 사

    장, 의리 음운학 등 내용을 널리 섭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

    저작의 인쇄출판, 청조와 주변부 각 부족의 지리 문화 등 내용까지 포괄

    하고 있다. 비록 교류내용은 번다하지만, 중세기 동아시아문인들이 고집

    하는 ‘선비’의 교유 모식인 학문을 기초로 서로 교류하며 상호 가르치는

    방식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공동체 일

    원으로서 동일시되던 데로부터 점차 타자의 시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

    였다. 이러한 타자시각은 민족자아의 구축을 촉진하였으며 독립적인 두

    개 개체의 문화교류에 기초를 닦아주었고 상호적인 문화교류를 활발케

    하였다. 예를 들면 1778년 중국과 조선의 서로 다른 예속을 보고, 공자묘

    와 서상관의 몰락한 정경을 보고 안내원에게 직설적으로 비판을 하던

    것에서 1790년에는 보다 평온한 정서로 청조의 문화현상을 서술할 수

    있었으며 1801년에 들어서서는 다른 점을 보류하고 공통점을 추구하는

    보다 열린 자세로 서로의 차이에 대해 담론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이

    는 이십여 년간의 교류를 통하여 조선인들은 청조 조선사이의 ‘제(際)’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중세기적인 시각에서 점차 벗

    어나 민족자아를 인식하고 각성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

  • 130 한국문학논총 제77집

    여 1801년 다시 조선의 시가 운율 문제를 거론할 때 유득공은 침착한 태

    도로 조선에서 조선식의 운율을 사용하는데 굳이 무슨 문제가 되겠냐는

    반박할 수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조선의 학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피력할 수 있었다.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31

    참고문헌

    유득공, 열하기행시주, 한국인문출판사, 2010.유득공, 燕台再遊錄, 林基中, 燕行錄全集․第六十卷 ,東國大學校出

    版部, 2001.

    이덕무, 입연기, 林基中, 燕行錄全集․第五十七卷,東國大學校出版部, 2001.

    박제가, 정유각집(중), 돌베개, 2010.베네딕트 리처드 오고먼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상해인민출판사, 2011.조동일, 동아시아문명론, 지식산업사, 2010.葛兆光, 중국사상상․제2권, 상해복단대학출판사, 2010.

  • 132 한국문학논총 제77집

    A Study on Hai-Dong-Sa-Ga's

    Experience of China and Recognition of

    Others

    38)Park, Seol-Mae*․Kim, Gang**

    At the end of the 18th century in North Korea, under the guidance

    of the enlightened monarch, there was a culture of prosperity, even

    known as the cultural republic of North Korea.

    The north school, in order to learn from China, has conducted close

    cultural exchanges with Chinese literati.

    Lee Duk-Moon, Yu Deuk-Gong and Park Jea-Ga were the

    important members of the North School, through to the opportunity of

    China and the Chinese literati multi-party communication, or the

    utopia of China, or in ideological thoughts as he put forward a lot of

    reform in China. They made four trips to China, a starting point of

    Lee Duk-Moo and Park Jea-Ga to China in 1778, and a node of Yu

    Deuk-Gong and Park Jea-Ga to China in 1801, during the trips, they

    keep companionship with more than one hundred literati in China.

    They had not only the plot of “the scholar” of the medieval literati,

    but also the modern consciousness of awakening.

    This paper intends to analyze the modern consciousness of their

    gradual awakening, through the interplay between the three medieval

    * Yanbian University

    ** Yanbian University

  • 해동사가의 중국체험을 통한 타자인식 변화 연구 133

    literati of North Korea and Chinese literati.

    Key Words : Hai-dong-sa-ga, Experience of China, Recognition of

    Others, Change

    ❙논문접수 : 2017년 11월 17일

    ❙심사완료 : 2017년 12월 5일

    ❙게재확정 : 2017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