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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식지 1호museum.dongduk.ac.kr/newsletter/pdf/news01.pdf · 제는 인도·페르시아 문학이나 황제들의 궁중생활, 이슬람 성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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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소식지 1호

http://museum.dongduk.ac.kr/newsletter/news01/news01.htm [2008-06-16 오전 11: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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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전시회 안내

European 상상 꼬레아

2004. 9. 1 - 12. 26

서울역사박물관

http://www.museum.seoul.kr

전시내용 :

세계관의 확대 : 세계관의 확대과정, 서양 범선 모

형 전시.

서양지도 속 한국 : 섬에서 반도로 변해가는 우리

국토의 모습.

역사적 진실 : 동해 표기, 국호 표기의 변천과정.

유럽인들의 상상 속에 구체화되어가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이다. 근래에 서양 고지도가 동해 문

제나 독도, 간도 문제에 대한 객관적 사료로써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어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전시품은 서정철(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학과 명예교수)·김인환(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 명예교수) 부부가 70

년대부터 약 30여 년간 수집하여 기증한 유물들로, 16∼19세기까지 한국의 모습이 표시된 고지도·전적류 약 150

여 점 중 80여 점을 엄선한 것이다. 지금까지 서양 고지도 전시 중 가장 많은 수량일 뿐더러 보기 드문 희귀본 지도

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중요 유물로는 최초의 서양식 전도인 당빌의 <조선왕국전도>, 그리고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적시하고 있는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와 클라프로트의 <삼국총도>, 그리고 18세기 이후 우리의 동해 바다가 다양한 언어의 동해

·한국해로 표기된 지도들이 있다.

한편, 17세기 최초로 우리나라가 섬이 아닌 반도국임을 확증한 마르티니의 『중국지도첩』과 네덜란드의 블라우

가 제작한 「신지구전도」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채색으로 서양 고지도의 매력 속으로 우리

를 이끌 것이다.

전시는 크게 ‘서양고지도 속의 한국’과 ‘역사적 진실’이라는 커다란 두 개의 테마로 나누었다. 서양고지도 속

의 한국 부분에는 “황금의 섬, Sila(제1기)”, “동방의 나라, Corea(제2기)”, “조선왕국, Coree(제3기)”,

“우리 조상들이 그린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역사적 진실 부분에는 “우리의 바다, 동해”, “국호 이야

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 세밀화 특별전

2004. 10. 1- 2005. 1. 30

대원사 티벳박물관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061)852-3038

http://www.tibetan-museum.org

세밀화細密畵(miniature)는 인도·페르시아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회화 표현이다.

본래 이슬람교에서는 생명을 지닌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표현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었다.

16세기 인도에 이슬람왕조를 세운 무갈제국은 혈통적으로 유목민족인 티무르계 후손이지만 문화적으로는 페르시

아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를 받들고 예술인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무갈의 2대황제 후마윤은 정치적 영향으로 페르시아 궁정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그곳의 궁중화가들과 친교를 갖

고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인도에 돌아와서 페르시아의 화가들을 초대하고 회화를 장려하였다.

3대 악바르 황제 때는 무갈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고 더욱 많은 화가들을 초청하여 회화를 장려하였다. 그림의 주

제는 인도·페르시아 문학이나 황제들의 궁중생활, 이슬람 성자들의 이야기를 세밀화 표현으로 제작하였다. 4대 자

항기르 황제는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며 예술과 회화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 뒤 5대 황제 사자한은 기념비적인

타지마할을 건축하며 죽은 왕비에만 마음을 쏟은 나머지 그림의 질이 떨어지고 미인도나 수렵도 등의 회화가 발전

하였다.

6대 황제 아우랑제브는 열렬한 이슬람교 신봉자로 교리를 받들어 화가 집단을 해산시켜 버렸다. 그러나 지방의 귀

족들은 호화로운 생활 속에 화가들을 후원하여 수피성자를 그린 성자화나 축제 장면들 춘화들이 그림의 소재로 많

이 나타나게 되었다. 궁중의 화가들은 지방 성주들의 도시로 이동해서 인도의 토착미술과 접목되면서 힌두교의 신

화를 표현하는 등 근대의 여러 가지 형태의 회화로 발전하였다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인도 세밀화 100여점이 전시된다. 낙타 뼈와 상아를 연마해서 정밀하게 그려진 미인도와

왕의 행렬, 수피성자 그림 등을 확대경을 통해서 들여다보면 인도와 이슬람미술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저절로 빠져

들 것이다.

연당 쌍굴 - 사람, 동굴에 살다 -

2004년 11월 8일~ 12월 4일

연세대학교 박물관

(02)2123-3337,3340

http://museum.dongduk.ac.kr/newsletter/news01/so01g/so01g.htm [2008-06-16 오전 11:3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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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연혁

박물관 안내

본 대학 박물관은 1977년 5월 27일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인문관 2층에 있었으나, 1998년 3월 여성

학센터 4, 5층으로 이전하여 전시실을 확장하고 여성학 박물관으로 특성화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심현삼 관

장이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재임하면서 여성사 관련 유물을 지속적으로 수집 정리하여, 본 박물관은 여성

사 관련 유물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또한 도자기, 서화, 탁본 등 상당수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학교의 역사

와 관련된 서적, 유물 및 사진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전시실은 여성학박물관과 춘강기념관으로 구성되어있다. 여성학박물관에는 활옷, 원삼 등 고전 의상과 노리

개, 비녀 등 여성 장신구류, 가구, 가마, 물레, 베틀 등 생활 자료 등 여성사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춘강

기념관에는 춘강 조동식 선생의 유품 및 사진과 학교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 여성학박물관 * 춘강기념관

지금까지 박물관은 여성학 관련 유물을 수집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여 유물 전시의 기능에 중점을 두어왔다.

앞으로는 현대적 추세에 맞게 박물관 기능을 확대하여, 소식지 발행, 문화 강좌 등 교수, 직원, 학생들의 문화 공

간으로 대중성을 확보해 가고, 홈페이지 구축, 소장 유물 및 자료의 전산화 등 정보화를 추진하며, 소장 유물과

전통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해가는 연구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100년의 전통을 가진 동덕의 역사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교수, 학생, 직원, 동문 등 모든 동덕인이 학교

의 역사와 전통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

관람시간 10:30 ~ 16:00 (휴관일 : 토 · 일요일, 공휴일)

(136-714) 서울시 성북구 월곡동 23-1 동덕여자대학교 박물관

Tel : (02) 940-4231 Fax : (02) 940-4669

e mail : [email protected]

홈페이지는 준비중으로, 아래 박물관 게시판에 박물관 및 본 소식지에 대한 의견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박물관 게시판(클릭)

http://museum.dongduk.ac.kr/newsletter/news01/so01a/so01b.htm [2008-06-16 오전 11:3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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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전람회

[박물관소식지 01]

탁본 전람회 「실학시대의 서예」를 보고나서

이은주(국사학전공 4학년)

지난 10월 2일 토요일, 나와 몇몇 학우들은 김항수 교수님과 함께 수원에 있는 경기도 문화의 전당 대전시장

에 마련된 「실학 시대의 서예」라는 탁본전람회를 관람하게 되었다. 한신대학교 박물관에서 주최한 탁본 전람

회는 한신대 국사학과 탁본연구회원들이 조선시대 우리 전통 문화의 황금기를 누렸던 숙종ㆍ영조ㆍ정조 시대

의 국왕과 명신, 학자들의 비석 글씨들을 탁본한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성들여 전시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와 같은 일반인들이 왕이나 학자, 명필들의 글씨를 접하는 일은 매우 드물고, 또 여러 명필들의 예술

적이고 개성있는 글씨를 한 자리에서 보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기에 넓은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정교하고

도 아름다운 글씨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리고 그 예술적인 글씨의 획 하나 하나를 잘 살려내어 재현한 탁

본 솜씨도 수준급이었다.

탁본전람회에는 국왕에서부터 명신ㆍ학자가 쓴 수십점의 비석 탁본과, 소동파, 저수량, 김생, 한석봉 등 역대

명필의 글씨를 모아 만든 집자비, 수원 화성 및 정조 왕릉(건릉)의 비석과 문양 등을 다양하게 전시하였다. 또

한 실학시대 이전과 이후의 서예를 양쪽에 배치하여 비교하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고, 또 한편으로

는 조선을 이끌어갔던 노론ㆍ소론ㆍ남인 학자의 멋들어진 필체를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있는 전람회였

다.

- 진경시대(眞景時代)의 문화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사림학자들은 주자학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정치ㆍ사회ㆍ경제 체제를 정비해

나가며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소중화(小中華)'라는 사상적 자부심과 우리 문화에 대

한 자부심을 갖고 조선적인 성리학을 성립했고, 그에 대한 실천을 단행하여 조선의 국가적인 정체성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사회ㆍ경제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를 토대로 조선은 숙종ㆍ영조ㆍ정조시대의 100여년에 걸쳐 전통 문화ㆍ예술의 절정기를 맞게 되

었고 오늘날 우리의 고유 전통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숙종ㆍ영조ㆍ정조대에 탕평 정국

을 주도했던 서울ㆍ경기 지역의 '경화사족(京華士族)' 사림들은 당시를 '진경시대'라고 불리울 만큼 그들만의

사상적 학풍아래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진경시대에는 조선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문화가 각 방면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겸재 정선

(1676~1759)과 관아재 조영석(1686~1781), 공재 윤두서(1668~1715)의 풍속화로 대표되는 '동국진경

(東國眞景)',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진경시(眞景詩)' 그리고 서예에서는 윤순(1680~1741)과 이광사

(1705~1777)의 '동국진체(東國眞體)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성리학적 지식인들로서 선비 의식이 확고하

였다. 퇴계 이황,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으로 이어지는 남인 학자들,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등의 노론 계열 학자들, 그리고 우계 성혼을 연원으로 보만재 서명응, 이계 홍양호 등의 소론 학자

들은 국정에 앞장서며 조선 사회의 격변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학문적ㆍ사상적 노력을 쏟

았다.

* 낭선군 이우의 글씨

또한 정조대 무렵에는 북학의 수용으로 새로운 학풍과 문체, 서체 등 문화 예술이 싹트기 시작하여 순조대에

가서는 추사 김정희, 혜강 최한기 같은 인물들이 독특한 학풍과 문화를 발전시켜가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전람회는 이러한 조선시대의 문화적 역량과 사상적인 흐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전람회였다.

- 국왕의 글씨

전람회장을 들어서니 먼저 조선시대의 국왕의 글씨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면, 우선 '무안왕묘비(武安王廟碑)'는 무안왕 즉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모신 사당에 세

운 비석이다. 관우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무신(武神)으로 신격화되어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는 임진왜란때 무신인 관우가 명나라 군대와 조선 군대를 보호했다고 하여 여러 곳에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정조는 1785년 동묘와 남묘에 숙종, 영조의 어필비와 사도세자와 자신 즉 정조의 어제 어필비를 세웠다. 이 어

제어필비는 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東廟)에 보관되어있다.

전시장에는 숙종과 영조, 사도세자, 정조가 쓴 네개의 비석 글씨를 나란히 전시하였는데, 각 왕의 글씨는 저마

다의 다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숙종의 글씨는 글자 획 하나하나의 흐름이 여성스러우면서도 매우

아름다웠다.

* 무안왕묘비 : 숙종 글씨(좌)와 사도세자 글씨(우)

또한 영조 어제 어필의 탕평비는 영조가 탕평책을 펴면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경계하도록 성균관에 세운 비석

이다. 현재 성균관 대학교 정문안에 있다.

* 영조 어제 어필 탕평비

- 조선 선비의 글씨

당대 명필로 유명했던 선비들의 글씨도 있었는데 부드러운 느낌의 글씨, 힘이 있고 기운이 넘쳐 보이는 남성

다움이 마구 느껴지는 글씨가 있었고, 또 모두 정갈해 보이면서도 그 글씨가 주는 느낌은 각기 다른...... 뭐라 말

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글자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듯한 느낌에, 비록 해석하기 어려운 글자였음에도 어느

새 나는 눈으로 글자의 획 하나하나를 따라 내려가며 글씨 쓰는 선비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섬세하면서도

힘 있고 강렬해 보이는 글씨만큼이나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의 느낌!

* 정조 어제 어필의 대로사비(大老祠碑), 우암 송시열 초상.

동국진체를 성립시킨 서예가인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송하 조윤형

(松下 曹允亨) 등의 글씨가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물 흐르듯 써 내려간 윤순의 글씨가 매우 유연해 보이면서 곧

아 보였다.

도암 이재(1680~1746)라는 학자가 쓴 암각자(바위에 새긴 글씨)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글씨도 인상적이었다. 광풍제월이란, 비온

뒤 하늘의 맑고 청명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선비가 지녀야 할 인품이

나 기상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 글씨는 크고 시원

시원하게 뻗은 글자의 획과 그 뜻이 어우러져, 청렴하고 지조 있는 조선

시대 선비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현종 2년(1661)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척주동해비(陟

州東海碑)'의 힘 있고 위엄 있는 글씨는 이번 탁본전람회에서의 많은 명

필의 글씨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카리스마

넘치는 글씨가 눈에 선하다. 허목은 원시 유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퇴

계 선생의 학통을 이어 성호 이익에게 연결시켰으며 남인 실학파의 기

반을 마련하였던 학자이다.

척주동해비는 예송논쟁 후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그가 삼

척부사로 부임하여 세운 것이었다.

당시 삼척에는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 강의 입구

가 막히고 하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큰 재

앙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방 수령으로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

목은 그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의 극치를 담은 오묘한 문장인 동

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글)을 짓고는 그가 개발한 독특한

전서체(篆書體)에 담아 비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이

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허목이 척주동해비를 세운 이후 신기하

게도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나는

척주

동해

비문

의 글

씨를

한참 들여다보면서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허목의 글씨에서 강렬한 카리스

마가 마구 뻗쳐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글씨가 이렇

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앞

에 서 있던 내가 너무 작다는 기분까지 들기

도 했다. 고통 받는 백성을 생각하는 허목의

넓은 마음에 담긴 글씨여서 였을까? 어쨌든

그냥 갈 수 없었던 나는 친구와 척주동해비

앞에서 기념 사진을 한 장 남겼다.

또 숙종ㆍ영조ㆍ정조대에 활동한 16명의 명

사들의 글과 글씨를 모아 만든 '유철 만시비

(兪철挽詩碑)'의 글씨는 꼭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매우 특징 있어 보였다. 유철

의 손자인 유최기, 유척기가 명사들로부터 시

와 글씨를 받아 세운 비석인데 숙종 영조대

학자들의 다양한 글씨체를 하나의 비석에 새

긴 희귀하면서도 재미있는 작품이다.

- 실학자의 글씨

실학자들의 서예로는 유형원, 홍대용, 정약용 등의 다양한 필체를 볼 수 있었다.

'丁石 (정석)'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암각자 글씨도 볼 수 있었는데, 다

산의 강진 유배 시절에 다산초당 뒤에 있는 바위에 다산 선생이 직접 새

겨놓은 것이다.

지난 번 국사학과 답사 때 다산 초당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글자였다. 탁

본된 '丁石'이란 글씨를 보고 있자니 지난 답사 때 다산 초당 마루에 걸터

앉아 '사르르'하고 바람에 스치우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잠깐이나마 다

산 선생의 체취를 느껴보고자 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초당을 떠나기가

아쉬워서 다른 학우들이 하나 둘 산을 내려갈 때에도 마지막까지 초당 마

루에 앉아 있다가 혹 뒤쳐져 일행을 따라가지 못할까봐 다산 초당을 떠

나 허겁지겁 산을 뛰어 내려갔던 기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 '정석' 탁본(좌)과 사진(우)

또한 동국진체의 전통을 바탕으로 청조 고증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서

체를 창안한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멋있었고, 추사의 제자인 흥선대원군의 글씨도 좋았다.

* 추사 김정희의 백파선사비(좌)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김좌근 묘비(우)

- 글을 맺으며

탁본전람회를 통해 우리의 전통 문화의 기틀을 다지고 새롭게 창조해 낸 조선의 선비들과 실학자들의 개성있

고 예술적인 글씨들을 보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동안 여러 번의 답사를 통해 많은 비석문과 다양한 곳에 새겨

진 글씨 등을 보아 왔음에도 글씨를 눈여겨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거였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비문의 글씨 하나에서도 그 글씨를 쓴 사람과 시대ㆍ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게 되었다. 또 앞으로 이런 전람회를 통해서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 문화를 이해하고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융릉(장조 : 사도세자의 릉) 병풍석

전람회를 보고나서 나와 다른 학우들은 한신대학교 국사학과 탁본연구회 친구들의 친절한 설명과 도움으로

비록 처음이라 미흡했지만, 석상 받침대에 새겨진 멋진 꽃문양도 탁본해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고 왠

지 얼마 안 있으면 졸업이라 답사를 다니며 탁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

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아끼는 즐거운 토요일 오후를 정말 보람되게 보낸 것 같아 왠지 뿌듯했

고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돌아간다는 마음에 스스로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본의 식민지사 왜곡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의 문제로 우리의 올바른 역사 세우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요

즘, 더 다양한 소재의 역사와 전통 문화에 관련된 전시회나 직접 체험하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문화 행사를 만

들어 일반인과 학생들에게도 우리의 오랜 역사와 우수한 전통 문화를 제대로 일깨워 주고, 우리 것에 대한 자부

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역사ㆍ문화 관련단체와 역사가들, 나아가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단순한 '보여주기'식

이상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2004. 10. 15)

* 참고문헌 : 실학시대의 서예(한신대학교 박물관, 2004. 9)

2004. 11

http://museum.dongduk.ac.kr/newsletter/news01/so01d/so01_d01.htm [2008-06-16 오전 11:3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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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100년

[박물관소식지 01]

사진으로 보는 동덕 100년 (1)

초창기의 동덕김항수(박물관장)

* 우리 동덕은 1908년 개교하여 2008년이면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이에 소식지에 동덕 100년을 정리하는 "사진으로 보는 동덕 100년"을 연재하고자 한다.

一. 동덕의 뿌리

우리 동덕은 한말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 운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을사조

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여러 방면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으니, 학

교 설립을 통한 인재 양성은 국권 회복을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국가, 왕실, 외국인 선교사, 민간인 등

이 학교를 설립했는데, 우리 동덕은 민간인에 의해 민간 자본으로 설립된 학교로서 1908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96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동덕은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이란 이름으로 1908년 3월 12일에 설립되었다. 이재극, 김인화 선생등

이 여성 교육의 뜻을 모아 원남동에 있는 김인화 여사 소유의 초가 10간에서 수업 연한 3년의 보통과정(현재

의 초등학교 과정)으로 학교를 개교한 것이다. 당시에는 학교 설립이 자유로웠는데, 사립학교령이 공포됨에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 인정규정'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해 9월에는 대광교(현재의 광교 네거리) 서북쪽 서린동 36번지에 있던 궁내부 소유의 19간 기와집을 빌어

이전하였다. 비록 학교 소유의 건물은 아니었지만, 초가 10간에서 기와집 19간으로 규모가 늘어난 것이다.

다음 해인 1909년 4월에는 동원(東媛)여자의숙을 합병한다. 동원여자의숙은 조동식 선생이 소안동(현재의

안국동 부근)에 초가 1간을 빌어 문을 연 보통과정 야학이었다.

* 위의 초가집 사진은 동원여자의숙이라 전해지는 사진으로, 동덕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왼쪽과 오른쪽은 같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오른쪽 사진에는 "동원여

학교(東媛女學校)"란 팻말이 붙어있는데, 사진 찍은 각도와 팻말 붙은 각도가 어색할 뿐 아니라 "동덕여자

의숙"에 "동원여학교"란 팻말을 붙인 것도 이상하다. 팻말 글씨 부분은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 분명한데,

2000년에 발간된 "동덕 90년사"에는 오른쪽 사진이 동원여자의숙으로 소개되어있다.

* 서린동 교사 대문으로 알려진 사진이

다. 서린동 교사는 궁내부 소유의 19간 건

물이었다고 하니, 소슬 대문을 통해 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진에

도 오른쪽 문기둥에 길다랗게 네모진 부

분이 자연스럽지 않다. 예전 가옥에 네모

기둥을 세울 때 모서리가 정면으로 오지

않도록 똑바로 세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사진의 네모난 부분이 문기둥 면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왜 이런 모습

일까?

서린동 시절의 동덕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910년 6월 10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남부(南部) 대광교(大廣橋)에 있는 사립 동덕여자의숙은 근일 점차 발전하여 학업이 일취월장할뿐더러

여학생이 날로 증가하여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더라

- 초창기 동덕의 운영과 수업 광경

초창기의 동덕은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학교 운영비는 유지들의 찬조금으로 충당하였는데, 한달 수입은

15원 정도였다. 당시 교원의 수당은 평균 5원이었고,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과서, 학용

품 등도 학교에서 지급했다고 하니 재정적 상태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은 1909년 11월부터 매월 10원씩을 동덕에 기부하기 시작하였다. 그

리하여 유지들의 찬조금과 손병희 선생의 기부금을 합쳐 매달 총수입은 22-23원이 되었다.

손병희 선생의 정기적인 기부금 출연으로 재정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 동덕은, 1910년 4월 6일 일반 부녀자들

을 위해 수업 연한 1년의 고등속성과를 야간으로 설치했다. 그리고 1911년 3월 27일에는 동덕여자의숙을 "동

덕여학교"(同德女學校, 현재의 초등학교 과정)로 교명을 변경하고, 고등속성과를 개편하여 4월 1일에는 수업

연한 3년의 고등과(현재의 중고등학교 과정)를 병설하였다.

또한 손병희 선생의 배려로, 1910년 12월에는 천도교에서 관훈동 151번지의 대지와 기와집을 기부하고 매

월 70원씩을 보조하기로 하여 유지들의 찬조금을 사양할 정도로 재정적인 안정을 이루었고, 1911년 1월13일

에는 관훈동으로 이전하였다.

* 천도교에서 기부한 관훈동 교사의 사진으로, 왼쪽은 1910년 창립 3주년 기념 사진이고, 오른쪽은 1914

년 창립 6주년 기념 사진이다. 이 무렵에 오면 학생수가 제법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왼쪽 사진에서 맨 앞

줄 가운데 보통과 학생일 듯 싶은 어린 소녀가 교원인듯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정겹고, 오른

쪽 사진에서 앞쪽에는 어린 소녀들이고 뒷쪽은 조금 숙성한 학생들이어서 보통과와 고등과가 같이 찍은 사

진임을 알 수 있다.

서린동 시절 동덕에서 공부한 어느 졸업생의 회고담은 당시의 수업 광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때는 융희 2년(1908년)이니 20년전이다. 우리 조선의 교육 상태는 마치 농촌의 반짝이는 등불 같아서

학교의 존재도 알지 못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에 여학교라고는 겨우 5, 6개밖에 아니 되니 우리 동덕도

그 하나이었다.

처음 입학을 하니 교사는 광교 천변(청계천변)의 어떤 관가(官家)인데, 안방은 사무실이고 대청은 갑반

(甲班)이며 아랫방은 을반(乙班)이었다. 생도중에 연소한 자를 을반으로 하기 때문에 나는 아랫방 생도

가 되고 말았다.

교실에는 책상이니 의자이니 할 것 없이 온돌방 바닥에 죽 늘어 앉아서 식탁 같은 데다 책을 놓고 배웠

다. 선생님은 책상 가운데쯤 위치하여 머리에는 갓과 감투를 쓰시고 감투속으로는 고추같은 상투가 비치

며 손에는 장죽(長竹 : 담배대)을 드시고 다리는 책상다리를 하시고 방석에 앉으시니 영락없는 서당식이

다.(이경자, 우리 모교의 옛날을 회고한 감상)

< 다음 호에 계속>

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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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 동덕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식지 1호museum.dongduk.ac.kr/newsletter/pdf/news01.pdf · 제는 인도·페르시아 문학이나 황제들의 궁중생활, 이슬람 성자들의

노리개

[박물관소식지 01]

노 리 개

김항수(박물관장), 김세경(박물관 조교)

* 우리 대학 박물관은 수십점의 노리개를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소장 노리개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

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몸치장에 쓰여진 대표적인 장신구이다. 조선의 여인들은 다채로운 색상과 귀한 패

물로 장식한 노리개로 옷을 장식함으로써 화려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노리개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허리띠에 패물을 달던 장식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

다. 신라시대에는 허리띠(腰帶, 요대)에 요패(腰佩)를 달았고, 고려 초기에는 귀부인들이 금방울(金鐸, 금탁), 향

료를 넣은 비단 주머니(錦香囊, 금향낭)를 달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허리띠에 패물을 장식하는 풍습이 옷고름에

패물을 다는 노리개로 발달하였다고 한다. 즉 조선시대에 들어와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옷고름이 발달하면서 옷

고름에 노리개를 다는 풍습이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국가 의식이나 집안 경사가 있을 때 노리개로 치장하여 화려

하게 꾸미고 평상시에도 노리개를 달아 멋을 내기도 했는데, 일반 서민층 부녀자들도 혼례 등 경사시에 노리개를

달기도 했다.

노리개는 장식품이면서도 부귀다남(富貴多男), 불로장생(不老長生) 등 조선 여인들의 염원이 담겨있는데, 패물

이 달린 노리개는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가보로 소중히 간직했다.

* 적의에 단 대삼작노리개

(복원)

* 활옷에 단 삼작노리개

(복원)

* 당의에 단 노리개

(고종 따님 덕혜옹주 사진)

一. 옛 그림속의 노리개

* 삼천주노리개(혜원 신윤복, 미인도) * 장도노리개(작자 미상, 미인도)

옛 그림에서도 노리개를 찾아볼 수 있다.

왼쪽 그림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로서, 얹은 머리를 한 여인이 갸름한 손으로 노리개를 살짝 잡

고 있다. 노리개는 굵은 진주 3알을 한 줄에 꿰어 만든 외줄 삼천주(三天珠) 노리개로서, 길게 드리운 옥색 술이

회청색 치마와 잘 어울린다. 삼천주 노리개는 불교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상징한다고 한다.

오른쪽 그림은 작자 미상의 미인도인데, 노리개를 한 여인이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있다. 노리개는 장도가 달

린 외줄 노리개로서, 옅은 황색의 장도와 붉은 색 술이 쪽빛 한복과 조화롭게 어울려 있다. 이 그림의 장도노리개

는 우리 박물관에서 소장한 상아장도노래개와 흡사한 형태이다.

- 노리개의 구성

노리개는 띠돈(帶金) · 패물, 끈(多繪 : 다회) , 매듭 , 술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띠돈은 노리개의 맨 윗부분에 달려 있는 장식으로, 노리개를 옷고름에 다는 고리 역할을 한다. 띠돈은 금, 은, 백

옥, 비취, 산호 등을 재료로 하여 사각형 원형 꽃형 나비형 등의 형태로 만드는데, 겉면에는 여러 가지 꽃 불로

초 용 등의 동식물 문양과 길상문양을 장식하였다.

노리개의 주체가 되는 패물은 한 개 또는 세 개를 다는데, 패물이 한 개인 것을 단작(單作)노리개(외줄노리개), 3

개인 것을 삼작(三作)노리개라 한다. 패물의 재료는 금 은 동 등의 금속류, 백옥, 비취옥, 홍옥, 공작석 등 옥석(玉

石)류, 산호, 진주, 호박 등의 보패(寶貝)류, 색실로 수놓은 주단 등으로 만드는데, 형태는 동자 박쥐 거북 오리 나

비 붕어 자라 매미 해태 원숭이 같은 동물 형태와 가지 고추 포도송이 도토리 호두 천도 연화 수련 청송 잣송이 같

은 식물 형태, 호리병 표주박 투호 방울 장도(칼) 방아다리 벼루 등 일상용품의 형태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띠돈과 패물은 끈으로 연결되는데, 색실을 짜서 만들었다고 하여 다회(多繪)라 한다. 패물의 위 아래에는 여러 모

양의 매듭을 지어 아름답게 장식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술을 달았다. 술은 둥그렇게 모은 봉술, 딸기 모양의 딸기

술, 방울 모양의 방울술과 끈술 등이 있는데, 끈술은 술끝이 낙지발같다고 하여 낙지발술이라고도 한다. 끈, 매듭

과 술은 홍색, 남색, 황색의 삼원색을 기본으로 하여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옥색 등으로 패물과 조화를 이루도록 만

들었다.

이렇게 각종 패물과 다채로운 색상으로 만든 노리개는, 위의 매듭과 패물 부분은 짧은 저고리 길이와, 훤칠하게 드

리운 술 부분은 긴 치마 길이와 비례를 이루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된다.

一. 삼작노리개

노리개는 패물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 예복용과 평복용으로 구분되며, 패물의 종류와 형태, 술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구분된다.

삼작노리개는 단작노리개 세 개를 하나로 모아 만든 모양의 노리개이다. 삼작노리개는 크기에 따라 대(大)삼작,

중(中)삼작, 소(小)삼작노리개로 구분되는데, 대삼작노리개는 가장 화려하고 큰 것으로 궁중이나 반가의 혼례 때

원삼이나 활옷 등의 예복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삼작노리개는 세가지 패물을 달았는데, 백옥나비 한 쌍, 밀화로 만든 불수(佛手, 부처님 손), 붉은 산호가지의 세

가지 패물을 단 노리개가 유명하며 투호, 나비, 장도 등 다른 패물을 달기도 하였다.

- 대삼작노리개

왼쪽의 노리개는 대삼작노리개로서, 대

례시에 쓰던 노리개이다.

옥으로 동그란 모양의 띠돈을 만들고, 황

색, 홍색, 남색의 색실로 끈, 매듭과 술을

달았다.

노리개 주체가 되는 패물은 붉은 산호가지

와 백옥 나비 한쌍, 밀화 불수를 달았는

데, 산호가지는 손바닥 크기이며, 백옥으

로 만든 옥나비에는 진주, 청강석(靑剛

石), 산호 구슬을 박았으며, 밀화 불수는

밀화(蜜花)로 만든 손모양을 하고 있다.

매듭은 조그맣게 만들어 커다란 패물과 조

화를 이루는데, 기품있는 낙지발술이 시원

스럽게 쭉쭉 뻗어내렸다.

대삼작노리개는 궁중에서 대례시에 사용

했다고 하는데, 노리개를 차는 데도 격식

이 있어 대삼작노리개는 큰머리 정장에 사

용했다고 한다.

* 대삼작노리개(34.7cm. 박물관 소장)

- 삼작노리개

* 삼작노리개(35.5cm. 박물관 소장) * 삼작노리개(33cm. 박물관 소장)

왼쪽의 삼작노리개는 칠보 장식을 한 나비 모양의 띠돈에 호랑이 발톱 귀면, 침통, 도끼 모양의 은으로 만든 패

물을 달았으며, 황, 적, 남색의 색실로 매듭과 낙지발술을 드리웠다. 호랑이 발톱은 악귀를 쫒는다고 하여 노리

개에 많이 사용되었고, 침통, 도끼는 일상 생활용품에서 따온 문양으로, 도끼는 다남(多男)의 뜻을 지니고 있

다고 한다.

오른쪽 삼작노리개는 사각형 띠돈에 은으로 만든 호랑이 발톱, 안경집, 원앙 한쌍의 패물을 달고 황, 남, 적색

의 매듭과 낙지발술을 달았다. 안경집은 일상 생활용품에서 따온 문양이다.

* 삼작노리개(37cm. 박물관 소장) * 삼작노리개(34.7cm. 박물관 소장)

왼쪽 삼작노리개는 장도, 방아다리와 투호를 달았는데, 술은 자색, 보라색, 녹색의 실로 쌍봉술로 마무리하였다.

오른쪽 삼작노리개는 은으로 만든 투호를 세개 단 투호 삼작노리개이다. 투호의 위 아래에는 옥구슬을 달았는

데, 술은 남색, 홍색, 황색 실로 만든 쌍봉술이다. 투호는 살을 던져 항아리에 넣는 놀이 기구이다.

一. 단작노리개(외줄노리개)

단작노리개는 패물을 한개 또는 두세개를 외줄에 단 노리개로서 외줄노리개라고도 한다.

궁중과 사대부 집안에서는 대례, 혼례 등 특별한 날에는 삼작노리개를 사용하였으나, 경사때는 한복의 색깔에 맞

춰 단작노리개를 패용하였고 평상시에도 단작노리개로 멋을 내기도 했다. 단작노리개는 멋을 내는 외에도 실용적

인 용도도 있었다.

- 방아다리 노리개

방아다리 노리개는 은으로 만

든 방아다리를 매달고 짙은 자

색 실로 낙지발술을 드리웠다.

방아다리는 귀이개 2개와 짝지

워져 있다.

노리개에는 호리병, 표주박,

안경집, 쪽집개, 벼루, 귀이개

등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물

품의 형태를 조그맣게 만들어

달기도 했는데, 방아다리에는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

으리라 짐작된다.

* 방아다리노리개

(박물관소장)

* 방아다리 패물(부분도)

- 장도 및 귀면 노리개

* 장도와 귀면 패물(부분도)

장도와 호랑이 발톱을 넣은 귀면을 단 노리개로서, 옥색 실로

낙지발술을 드리웠다.

장도는 은, 옥, 비취, 상아 등으로 만드는데, 은으로 많이 만들

어 흔히 은장도라고 한다. 은장도는 여성의 정절을 상징하기도

하고, 음식에 든 독의 유무를 분별하는 데도 사용했다.

* 장도 및 귀면 노리개

(박물관 소장)

- 상아장도 노리개

* 상아 장도 패물(부분도)

상아로 만든 장도를 단 노리개로서 붉은 색으로 쌍봉술을 지

었다. 황색 장도집과 붉은 색 술이 위 그림의 여인이 찬 장도노

리개와 흡사하다.

장도는 여성의 정절을 상징하여 여성들이 몸에 지니고 다녔는

데, 주머니에 넣은 장도를 낭도(囊刀)라 했고, 노리개에 단 장도

를 패도(佩刀)라 했다.

* 상아장도 노리개

(박물관 소장)

- 귀면 노리개

귀면 패물을 단 노리개로서 옥

색 실로 낙지발술을 드리웠다.

귀면은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상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

부터 귀면 장식을 사용하였다.

건축, 고분 등에도 귀면을 새겨

장식한 경우가 많은데, 공예품

으로는 신라 고분에서 금제 귀

면 장식, 귀면을 장식한 연적이

발굴되었으며, 백제 무녕왕릉에

서도 은제 요패(허리띠)에 귀면

이 장식되어있다.

* 귀면노리개

(박물관 소장)

* 귀면 패물(부분도)

- 소고 노리개

* '다' '부' '귀'가 쓰인 소고(부분도)

은으로 만든 둥근 소고 모양에 '다(多)' '부(富)' '귀(貴)' 를 새

긴 패물을 단 노리개로서, 붉은 색실로 낙지발 술을 드리웠다.

소고 뒷면에도 '수(壽)' '남(男)' '자(子) 등의 글자가 있다.

노리개에 새긴 글자는 부귀와 다남(多男) 등을 상징하는데, 이

밖에도 '복(福)', '수(壽)' 등을 새긴 노리개도 있다.

* 소고노리개(박물관 소장)

- 산호 노리개

* 산호 패물(부분도)

손바닥 크기의 붉은 산호를 단 노리개로서, 화려한

당초문의 도금 장식으로 산호를 매달고 녹색 실로 낙

지발술을 달았다.

바다에서 나는 산호의 각질은 장식품으로 많이 사용

되었는데, 붉은 색 산호를 더욱 귀하게 생각했다. 서양

에서도 기원전부터 목걸이 등에 산호를 사용했고, 우

리나라에서도 비녀, 단추, 노리개 등에 산호를 많이 사

용했다.

* 산호노리개(박물관 소장)

- 향갑 노리개

향갑노리개는 향을 넣는 갑을 단 노리개이다.

향갑은 아랫 부분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만들거

나 앞뒤를 따로 만들어 그 속에 향을 넣을 수 있게

만들었다. 향갑안에는 사향, 목향 등 향을 넣어 은

은한 향이 배어나오도록 하였으며, 응급시에는 구

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향갑노리개

(박물관 소장)

* 향갑노리개

(박물관 소장)

- 향 노리개

향나무를 원통 모양으로 깍아 줄

에 꿰어 만든 향노리개이다. 향 구

슬 하나 하나는 형형의 색으로 감싸

고, 수놓은 비단으로 향줄을 고정시

켜 아기자기한 멋을 내었다.

줄향노리개는 청, 황, 적, 녹의 4색

실으로 감싼 향구슬을 끈에 꿰어 만

들고 아래에 황색술을 달았다. 3단

의 붉은 색 비단에는 모란을 수놓았

다.

비취발향노리개는 5개의 향줄을

발처럼 드리웠는데, 위에는 붉은

술 2개, 아래에는 5개의 색동술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3단의 붉은

비단에는 모란꽃과 '희(囍)'자를 수

놓았다.

궁중에서 상궁들이 치마안에 찼다

고 한다.

* 줄향노리개

(박물관 소장)

* 비취발향노리개

(박물관 소장)

* 박물관에 소장된 나머지 노리개는 다음에 계속해서 소개할 예정이다.

* 참고문헌

심현삼, 조선시대 여성 장신구 : 노리개

임명미, 한국의 복식문화 (1996, 경춘사)

백영자 최해율, 한국의 복식문화 (2001, 경춘사)

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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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인 사 말

안녕하십니까?

박물관에서는 2004년 11월부터 매월 초에 온라인 소식지를 발행하기로 하였습니다.

박물관에서는 박물관 대중화 사업의 일환으로 교수, 직원, 학생, 동문 등 학교 구성원을 대상으로 문화 강좌,

문화 기행 등을 계획하고 있는데, 소식지 발행은 '학교 구성원과 함께 하는 박물관'으로 가꾸어가기 위한 첫번

째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서는 소식지를 교수, 직원, 학생 등이 참여하는 온라인 문화 공간으로 가꾸어가고자 합니다. 소식지에

는 박물관의 현황 및 소장 유물에 대한 소개는 물론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읽을 거리를 제공해 드리

고자 합니다. 또한 교수, 직원, 학생 등이 박물관에 관한 좋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게시판을 운영하고 학교

구성원이 보내주신 글도 싣도록 운영해 갈 예정입니다. 소식지를 동덕인의 온라인 문화 공간으로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1호에서는 박물관 소장품중 여성사 관련 유물로 노리개를 소개하였고, 학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사진

으로 보는 동덕 100년'을 실었습니다. 또한 문화 탐방으로 탁본전람회를 다녀온 학생 글을 실었습니다. 전시회

소개는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안내하는 난으로, 앞으로도 가볼만한 전시회를 소개해 갈 예정입니다.

소식지는 교수, 직원들께 메일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혹 메일 주소가 바뀌었거나 소식지를 받지 못한 경우

에는 박물관으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모든 학생들에게 보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학생이 박물관에 연락하면 소식지를 보낼 예정입니다.

첫번째 소식지가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앞으로 더욱 충실해질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갖고 질정해 주시면 감

사하겠습니다.

2004. 11. 12

동덕여자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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