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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루크너 완벽을 향한 머나먼 여정

브루크너 - aladin.co.krimage.aladin.co.kr/img/files/bruckner.pdf여러 해 동안 연세음악동우회 지도교수로 활동하면서, 나는 여러 회원 들이 가진 음악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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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완벽을향한머나먼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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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KNER브루크너완벽을향한머나먼여정

박진용음악칼럼

박진용유고집

그러나 하늘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데려가신다고 했던가요. 박

진용 군이 돌연히 떠나간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월의 속도를

실감하기 힘듭니다. 기쁘게도 그를 사랑했던 친우들이 유고를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묶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희미해질 수도 있는 그의 면모를 돌

아보고, 그가 사랑했던 음악 세계의 모습도 다시 느낄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위해 애쓴 연세음악동우회 동문 회원들에게 수고하셨다는 인사

를 전합니다. 고인도 다른 세상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박진용 군의 영원한

평안을 빕니다.

2014. 4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나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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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진실한열정으로음악을대했던한젊음을기억합니다

다양한 전공을 가진 젊은이들이 음악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 경험은 이들이 사회에 나간 뒤에도 마음의 고향이자

삶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여러 해 동안 연세음악동우회 지도교수로 활동하면서, 나는 여러 회원

들이 가진 음악에의 사랑과 열정에 깊이 공감하고 감탄하였습니다. 이들

이 가진 지식과 감식안은 때로 전문 비평가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습

니다. 실제로 이들 중 여러 사람이 졸업 후에 음악 칼럼니스트와 음반 비평

가로 활동했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이름 중 하나가 박진용 군이었

습니다.

입학 이후부터 연세음악동우회의 가장 활동적인 회원이었던 박진용 군

은 1988년 이 동우회의 회장을 맡았고 나와도 자주 만났습니다. 큰 키에 큰

체구, 털털한 웃음, 울림이 깊은 음성, 솔직하면서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진 그는 학우들로부터 깊은 신망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브루크너의 교향악을 비롯해 다가가기 쉽지 않은 대곡들을 사랑하고

깊이 있게 분석했던 점이 인상에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졸업 후에도 음

악 칼럼니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그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듣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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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하스킬고난을 극복한 불굴의 의지——149

블라디미르호로비츠러시안 스쿨의 최고봉——155

나탄밀스타인거장 시대의 마지막 귀공자——160

야사하이페츠 20세기의 파가니니——166

피에르푸르니에황제가 아닌 황태자——172

다비드오이스트라흐음악만큼이나 따뜻한 인간미의 거장——178

루제로리치모차르트 이후 최고의 천재——184

아르투로베네디티미켈란젤리완벽을 추구한 기인——189

야노스슈타커진정한 코스모폴리탄——195

므스티슬라프로스트로포비치신념에 찬 무대 인생 60년——200

루치아노파바로티언제 어디서나 가장 사랑받는 테너——208

엘리아멜링가장 원초적인 악기의 소유자——214

미샤마이스키첼로를 든 음유 시인——220

이무지치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음악가들’——226

3부. 박진용을그리며

박진용의 음악 세계/브루크너와 푸르트벵글러의 영원한 애호가 이일호——232

선배가본박진용/‘서푼짜리’순진한사장이남기고간빈자리 정석호——238

후배가 본 박진용/ 참 밝고 유쾌하고 넉넉하던 사람 이명재——241

평론가 박진용에 대한 추억/ 지금도 그리운‘사람 냄새’나는 글들 정양원——245

음반업계에서 본 박진용/ 진정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던 친구 박종명——250

대담/ 마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우상원외, 정리이재훈——253

짧은 글/ 그리고, 남겨진 기억들——259

감사의 글 김홍래/순천향대학교 전자정보공학과 교수, 연세음악동우회 동문회장——262

——차례

추천사 나인용/연세대학교음악대학명예교수, 연세음악동우회지도교수——4

1부. 브루크너교향곡총론

완벽을향한머나먼여정 박진용, 이명재

안톤 브루크너의 생애와 음악 세계——11

교향곡별 판본——16

교향곡00번 f단조교향곡을 위한 연습——20

교향곡0번 d단조번호 없는 교향곡——25

교향곡1번 c단조밝고 건강한 활력——32

교향곡2번 c단조잊혀진 걸작——39

교향곡3번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바그너——52

교향곡4번‘로맨틱’브루크너를 대표하는 교향곡——65

교향곡5번B장조중세와 가톨릭, 그리고 코랄의 환상——80

교향곡6번결코 단순하지 않은 대담함——94

교향곡7번브루크너 최고의 걸작——105

교향곡8번신비로운 아다지오와 강렬한 스케르초——115

교향곡9번깊은 주관과 숭고함——125

2부. 20세기연주가열전

대신할수없는그들의빈자리 박진용

안드레스세고비아가장 대중적인 악기의 제왕——138

빌헬름켐프가장 독일적인 피아니즘 ——143

1부

브루크너교향곡총론완벽을 향한 머나먼 여정

안톤브루크너연표

1824년 9월 4일 오스트리아 안스페르덴에서 11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남

1837년 부친 타계 후 성 플로리안 교회 성가대로 들어감

1848∼55년 성 플로리안 교회 오르간 주자로 활동함

1856년 린츠 성당 오르간 주자로 부임

1861년 프로진 합창단의 지휘자 겸임

1863년 교향곡 00번 (Study symphony) 작곡

1866년 교향곡 1번 작곡 (77년, 91년, 93년 개정)

1868년 스승 제히터의 후임으로 빈 음악원 교수로 부임

1869년 교향곡 0번 작곡

1872년 교향곡 2번 작곡 (73년, 76년, 77년, 92년 개정)

1873년 교향곡 3번 작곡 (74년, 76년, 77년, 79년, 89년 개정)

1874년 교향곡 4번 작곡 (78년, 80년, 81년, 86년, 88년 개정)

1876년 교향곡 5번 작곡 (78년, 80년, 94년 개정)

1879년 현악5중주 작곡 (초연은 1885년)

1881년 교향곡 6번 작곡 (94년 개정)

1883년 교향곡 7번 작곡 (85년 개정)

1887년 교향곡 8번 작곡 (88년, 90년, 92년 개정)

1891년 빈 악우회 명예회원 추대, 명예박사 취득

1896년 교향곡 9번 작곡

1896년 10월 11일 72세로 타계

안톤브루크너의생애와음악세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브루크너’항목은“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아

홉 개의 교향곡과‘테 데움(Te Deum)’이 그의 대표작이다.”라는 설명으로

시작된다. 시기적으로 베르디, 브람스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했지만 브

루크너와 그의 작품들이 조명받은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모노 시

대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한스 크나퍼츠부쉬를 시작으로 1960년대까지

만 하더라도 칼 뵘, 오이겐 요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등 일부 지휘자들만

이 그의 교향곡들을 연주, 녹음했을 뿐이다. 유럽 대륙의 대중들 역시 그의

교향곡들이 그리 중요한 작품이라고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빈 필하모

닉과 함께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처음으로 녹음했던 피에르 불레즈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가 음악 교육을 받았던 프랑스에서는 브루크너 작품의

실제 연주를 한 번도 들을 기회가 없었고, 언급조차 거의 되지 않았다고 한

다. 불레즈는 런던을 방문했던 길에 참석했던 오토 클렘페러의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었다고 하니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는 동

양권의 상황은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CD가 대중적인 음악 소스로서 자리를 잡고, 디지털 녹음의 위력을 경험

하면서 청중들의 기호는 말러 등의 대규모 작품으로 조금씩 옮겨갔고, 브

루크너의 작품들 또한 이런 새로운 조류의 수혜를 받게 된다. 국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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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용이가장애착을가지고있었던작곡가는안톤브루크너였다. 한음악잡지에연재한 브루크너 교향곡에 대한 평론에는 이 젊은 음악 애호가가 가지고 있었던열정과 애착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원고는 애당초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까지그의 교향곡 11곡 전곡을 분석하려는 목표에서 시작되었지만 저자의 갑작스러운타계로교향곡5번에서중단되었다.

로 이그나츠 또한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톤과 이그나츠 이후로 브

루크너 집안은 대가 끊기게 된다.

그렇다면 나름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음악가로서 명예로운 만년을 보낸

브루크너가 왜 평생 결혼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결혼 적

령기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장년기 이후에는 성격적인 문제가 그 핵심적인

이유였다. 안톤의 부친은 그가 열세 살이었던 1837년에 알콜 중독으로 타

계했는데, 가장을 잃은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안톤은 성 플로

리안 성당의 성가대로 보내졌다. 후일 오르간 주자 및 작곡가로 명성을 얻

기 전까지 브루크너는 여기에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으니

여자라고 하는 존재가 그의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

다. 또, 린츠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봉급을 받게 된 이후에는 틈틈이 빈에서

지몬 제히터에게 대위법과 화성학 등을 배우는 데에 얼마 안 되는 수입의

거의 전부가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잘 못하는 수줍음 많은

성격 또한 이성 교제를 방해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까지는 멜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누구나 이해할 만한 대목이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푸르트벵글러가 그의 교향곡 9번 연주를 마치고,

“이 작품은 교향곡이 아니라 종교 작품으로 분류해야 옳다”고 했을 정도로

가톨릭 신앙이 투철하게 배어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던 브루크너였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성격적인 결함이 있었다. 바로‘롤리타콤플렉스’였다. 오

늘날 원조 교제에 빠져드는 이들마냥 어린 소녀들만을 좋아하는 이 콤플렉

스로 인해 브루크너는 60이 넘은 1890년에 당시 14살의 소녀에게 청혼을

했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역시 10대의 호텔 종업원에게 구혼을 했다고 한

다. 그러니 그가 결혼이라는 결실을 얻어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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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비슷한 경향이 나타나는데, 요즈음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말러와 브루크

너,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을 듣지 않으면 대화에 참여할 수 없

을 정도로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까지 있다.

브루크너의 작품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일단 뒤로 미루고, 우선 그

의 삶과 독특한 성격, 그리고 브람스와 바그너라는 거대한 세력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음악적 노선의 문제들을 단편적인 소재에 따라 간략

히 훑어보는 것으로 브루크너 음악 여정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주

위 사람들의 평가에 쉽게 흔들린 성격 탓에 수없이 많은 개작을 단행, 한 작

품에서도 여러 가지 악보가 존재할 수밖에 없게 만든 교향곡 판본들을 알

기 쉽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판본 정리에 사용된 자료들은 데이비드 그리

겔의 1999년 판을 기준으로 사용했다.

대를끊어버린장남

브루크너 집안은 원래 프루크너(Pruckner)라는 성을 사용했다. 오스트

리아 남부지방에서 살았던 그의 조상들은 아마도 다리(橋) 근처에서 그 기

반을 닦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톤의 조부 때에 이르러 바꾼 브루크너라

는 성은 원래‘다리 놓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안톤 브루크너와

똑같은 이름을 사용했던 그의 아버지는 교사이자 오르간 연주자였고, 어머

니 테레지아는 아마추어 가수로 활동했다. 이 두 사람은 안톤을 시작으로

슬하에 11남매를 두지만 대부분 어린 나이에 죽고, 후일 안톤의 뒷바라지

를 도맡았던 여동생 안나와 성 플로리안 교회의 오르간에 바람을 불어넣는

일(당시만 하더라도 전기가 없었기에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직

분)을 했던 이그나츠 정도가 어른이 되도록 살아남았다. 안톤과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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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너에게 어떤 성의도 보여준 적이 없다는 점은 세상사에 그리 밝지 못

했던 브루크너의 단면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만

날 때마다 그의 교향곡을 연주하겠다고 말했지만, 한 번도 이 약속을 실행

에 옮기지 않았다. 바그너는 스스로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데에만 정신

이 팔려 있었고, 자신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브루크너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 노력할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빈 필하모닉에 한 마디 언질을 준 적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로만 끝났을 뿐, 한슬릭의 날카로운 펜을 의식하

고 있던 빈 필하모닉이 그의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 움직일 리는 만무했다.

브루크너 역시 이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 풍으

로 작곡된 교향곡 3번을 전면적으로 개작해 10여 분을 줄이면서 바그너의

그림자를 지워내기도 했지만, 바그너에게 기울어져 있던 그의 마음은 평생

동안 변하지 않았다.

서로 우호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던 바그너와의 관계가 별 소득이 없었

던 데에 비해, 브람스와의 만남에서는 서로 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어놓

는 대화만을 주고받았다. 1872년에는 브람스가 지휘자로, 브루크너는 오르

간 주자로 나란히 한 무대에 선 일도 있었으나, 1889년 가을 화해의 기대에

부풀어 양자가 대면했던‘고슴도치’레스토랑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

야기라고는 메뉴에 대한 두 세 마디뿐이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브

루크너 교향곡 8번의 연주회가 끝난 뒤 브람스가“당신 교향곡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하자 브루크너는“당신의 교향곡들도 나에게는 너무 꼼꼼

하고, 꽉 막힌 것으로 보인다.”고 받아쳤다고 한다.

그럼 이제부터 남아 있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판본들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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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이고,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진 브루크너는 음악 외에 증명서

와 명함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부에게서는 참회와 교회에 열심이라는 증명

서를 받아냈고, 개인 교습 강사 정도의 관계인 제히터에게도 졸업 증명서

를 요구했으며, 학위나 훈장 등을 받으면 당장 명함부터 새로 인쇄했던 그

의 편력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결여, 즉 일종의 콤플렉스에서 출발한 것

으로 보인다.

바그너와브람스사이에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브루크너(1824∼1896),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간에는 각기 10년 정도의 터울이 있고, 브루크너는 그

가운데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음악계에 그 이름을 알린 것은 브루크너가 가

장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운 없게도 브루크너는 극단적인 반목 양상을 보이

고 있던 바그너-브람스 양 진영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하면서, 양측의 호된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열렬한 팬으로 음악 인

생을 시작했다. 브루크너는 린츠에 머물고 있던 1865년 한스 폰 뵐로가 지

휘를 맡았던‘트리스탄과 이졸데’초연을 접하고 난 후 바그너에게 사로잡

히게 된다. 그는 1873년 바그너를 직접 만난 것을 시작으로 매년 바이로이

트를 방문할 정도로 바그너에 빠져들었고, 교향곡 3번을 바그너에게 헌정

하는가 하면, 마지막 세 작품에는 바그너 튜바를 등장시켰다. 처절한 7번의

아다지오 악장 역시 바그너의 부고를 접한 브루크너의 한숨이었다.

브루크너는 이런 친바그너적 성향으로 인해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릭

을 선두 주자로 하는 브람스 파로부터 계속 위협을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바그너파로부터 받은 이익은 없었다. 바그너가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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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번 : 단일판본

노바크 (1863, 1973) [인발1991, 틴트너1998]

0번

뵈스(Woess) (1869, 1924) [하이팅크1966]

노바크 (1869, 1966) [샤이1988, 인발1990]

1번

하스/캐러건 (1866, 1998) [틴트너1998]

하스(린츠) (1865/66, 1934) [아바도1996, 바렌보임1980]

노바크(린츠) (1865/66, 1953) [요훔1965]

하스/브로쉐(빈) (1891, 1980) [반트1981]

하스/도블링거(빈) (1983)

2번

캐러건 (1872) [아이히호른1991]

캐러건 (1873) [아이히호른1991]

하스 (1877, 1938) [반트1981, 하이팅크1969]

노바크 (1877, 1965) [요훔1980, 카라얀1981]

캐러건 (1877) [바렌보임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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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별판본

하스와노바크

가장 자주 사용되는 원전판 악보는 하스와 노바크 판본들이다. 음반에

따라서는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그저 오리지날 버전이라고만 표시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악보 사용 인세를 줄여보려는 방편일 뿐 그들만

의 특별한 스코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장이었던 로베르트 하스(Roberto Haas)는 빈

도서관장인 알프레드 오렐과 함께 1931년부터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을 하

나 하나 정리해나갔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전집을 완성시키

지는 못했다. 빠져 있던 3번은 종전 이후, 지휘자 프리츠 외저에 의해서 수

정 보완된다. 푸르트벵글러의 일부 녹음과 카라얀, 반트 등이 이 하스 판본

을 사용해 녹음한 음반들이다.

하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장을 맡은 레오폴드 노바크

(Leopold Nowak)는 원전 악보에 의한 또 다른 에디션을 출판했다. 이 에디

션은 대부분 하스 판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7번의 2악장에서의 타악기 사

용 문제 등 새로운 단편들을 추가시키고 있는데, 요훔, 바렌보임 등이 이 악

보를 자주 사용하는 지휘자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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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 안의연도는앞은자필악보완성시점, 뒤는에디션의출판시점. 주2) [ ] 안은해당판본으로녹음한대표적인지휘자와녹음시점.주3) 경미한변경의판본이나9번을4악장으로만든캐러건등의시도는제외.

7번

하스 (1883, 1944) [카라얀1975, 발터1961]

노바크 (1884/85, 1954) [줄리니1986, 뵘1976]

8번

노바크 (1887, 1977) [인발1982, 틴트너1996]

하스 (1887/90, 1935) [하이팅크1995, 카라얀1988]

노바크 (1890, 1955) [뵘1976, 클렘페러1970]

리나우 (1892, 1892) [푸르트벵글러1954, 크나퍼츠부쉬1955]

9번

오렐/하스 (1894, 1932) [발터1959, 푸르트벵글러1944]

노바크 (1894, 1951) [줄리니1988, 바렌보임1990]

19

캐러건 (1892)

3번

노바크 (1873, 1977) [노링턴1995, 인발1982]

외저 (1877, 1950) [도흐나니1993]

노바크 (1877, 1981) [아르농쿠르1994, 솔티1992]

노바크 (1888/9, 1959) [뵘1970, 첼리비다케1987]

레티히 (1888/9, 1890) [크나퍼츠부쉬1954, 셀1966]

4번

노바크 (1874, 1975) [인발1982, 길렌1994]

하스 (1878/80, 1944) [반트1998, 카라얀1975]

노바크 (1878/80, 1953) [뵘1973, 클렘페러1963]

구트만 (1886/88, 1889) [푸르트벵글러1951, 마타치치1954]

5번

하스 (1875/78, 1935) [푸르트벵글러1951]

노바크 (1875/78, 1952) [요훔1958, 반트1996]

도블링거 (1893, 1896) [크나퍼츠부쉬 1959]

6번

하스 (1881, 1935) [카라얀1979, 반트 1995]

노바크 (1881, 1952) [자발리쉬1981, 요훔1980]

히나이스 (1899,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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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쉬운 틴트너(Naxos)의 음반을 모델로 삼아 브루크너의 처녀작에 드러난

선배 작곡가들의 편린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첫 악장은 제1바이올린이 흥겨운 주제를 선창하고, 오케스트라 총주가

바로 뒤따라 등장하고 있는데, 이 주제들을 발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바

그너의 영향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3번 교향곡이‘바그너’라는 부제

로 불릴 만큼 유명하지만, 음악적으로만 살펴본다면 3번을 마지막으로 바

그너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 것에 더 가깝고, 그 이전 작품들에서 오히

려 바그너의 숨결들이 더 명확히 나타난다.

바그너라는 도장이 가장 선명하게 찍혀 있는 곳은 1악장의 2:38 무렵이

다. 트럼펫과 호른이 연주하는 행진곡풍 멜로디가 등장하고, 현악기들이

잔 음표들로 따라붙는 두 번의 반복에서‘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금방 연

상할 수 있다. 또, 피날레 부분에서 한 번 숨을 죽이는 것으로 마지막 폭발

의 찬란함을 돋보이게 하는 수법이나 오케스트라의 울림은 슈만의 교향곡

에서 많이 보던 모습들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번갈아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 느린 2악장에서도 슈만의 그림자가 여실히 느껴진다. 현의 저음 위로

목관들이 어울리는 2분 남짓 부분이나 4:30에서 들려주는 두터운 화성의

오케스트라 총주의 색감은 슈만과 거의 똑같다.

클라리넷과 바순으로 시작되는 스케르초는 그의 후반기 작품들에서 들

을 수 있는 그대로이다. 부점 리듬이 주를 이루고 있는 무곡풍 주제와 트리

오가 병합된 브루크너 특유의 스케르초 양식은 이미 이 당시부터 굳어져

있던 것이 확실하다. 만약 제목을 모르고 듣던 중이라면 앞의 두 악장에서

는 향방을 종잡을 수 없었어도, 스케르초의 시작과 함께 브루크너의 개성

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히 감각적인 스케르초에 비해 마

지막 악장은 정리가 덜 되어 있다. 습작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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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00번 f단조

교향곡을위한연습

이 교향곡은 1863년에 완성되었다. 브루크너는 마흔이라는 나이에 이르

러서야 첫 교향곡을, 그것도‘습작(Study Symphony)’이라는 단서가 달려

있는 작품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거듭했던 소심한 성격은 그와 평생을 대립했던 라이벌 브람스

를 떠올리게끔 한다.

이 작품은 브루크너의 마지막 음악 스승인 오토 키츨러가 작곡 수업의

마지막 단계로 브루크너에게 부여한 숙제이기도 한데, 그가 요구한 것은

연주회용 서곡, 합창곡, 교향곡의 세 종류였다. 브루크너는 이 졸업 작품의

하나로 f단조 교향곡을 제출했다. 그 동안 쌓아왔던 실력을 모두 발휘한 것

이기는 하지만 키츨러에게 그리 큰 칭찬은 받지 못했고, 스케르초 악장만

은 무척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키츨러가 이렇게 칭찬에 인색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브

루크너는 한 사람의 작곡가로서 아직 독특한 색채와 개성을 확보하지 못하

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마구 끓어오르고 있었고, 그

용광로 속으로 모차르트, 슈만, 바그너 같은 선배 작곡가들의 단편들이 쏟

아져 들어가고는 있었지만, 그 재료들을 녹여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기에

는 섬세한 기술과 연륜이라는 연료들이 조금 부족했던 것이다. 가장 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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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스키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남부 유럽의 가톨릭 전통에 깊숙하게

뿌리 내린 브루크너를 슬라브 민족성이 쉽게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

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교향곡 00번을 포함한, 진정한 의미의 유일한 브루크너 전집

인 엘리아후 인발(Teldec)의 1992년 녹음이다. 인발의 후기 녹음들은 LP시

절 라이선스로도 선보인 바 있다. 그는 판본 선택에 있어서도 상당히 세심

한 면을 보인다. 오직 브루크너 자신의 최초 판본만을 녹음하고 있는 것이

다. 상당히 깔끔하고 상쾌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연주는 인발의 손을 거친

브루크너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 작품 역시 대단히 잘 정리돼 있다. 인발과

함께 전곡을 녹음한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은 에이스급 교향악단으로

분류되기는 힘들지만 일류에 가까운 기량과 소노리티를 들려준다. 틴트너

와 거의 비슷한 속도를 유지하지만 전체 연주 시간이 9분 정도 긴 것은 1악

장 전개 부분을 반복해서 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아고긱과

다이나믹의 재미가 그대로 살아 있는 이 작품 최고의 연주지만, 낱장은 모

두 폐반되어 찾기 힘들고, 전집조차 일부 해외 사이트에서만 구할 수 있다

는 문제가 있다.

■나머지 두 녹음은 모두 1998년에 이루어졌다. 먼저 낙소스에서 출반

한 틴트너-로열 스코티시 오케스트라부터 살펴보자. 인발의 프랑트푸르트

에 비해서 로열 스코티시 국립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좀 탁하고 어두운 편

이지만 틴트너의 정확한 악보 읽기에서 브루크너에 대한 그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후반부에 필업되어 있는‘Volksfest’도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연주되고 있는 1878/80년 버전의 하스나 노바크 판본에서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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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할 수 있다.

스승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브루크너는 이 악보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 다른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도중에도 앞선 작품들을 거

듭 손질했던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 이 작품 역시 언젠가는 더 개

선시켜볼 의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개작은 없었고, 1893년

판본에 기초한 노바크 에디션(1973년)이 유일한 악보이다.

음반비교감상

현재 교향곡 00번의 CD는 모두 네 종류만 출반되어 있다. 유일한 노바

크의 악보가 1973년에야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 세대 이전 거장들은 이 작

품을 연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었다. 설사 악보가 있었다고 한들, 그

들은 이 초기 작품에는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을 것 같다. 푸르트벵글

러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3번 이후만 연주했고, 녹음은 4번부터만 했다.

그리고 첼리비다케 역시 3번 이전의 교향곡들은 아예 돌아보지 않았다.

■녹음 시기별로 정리해보자. 첫 테이프는 1983년 녹음인 로제스트벤스

키와 러시아 문화성 교향악단이 끊었다. 프랑스 하모니아 문디 계열의 샹

드 몽드(Chant de Monde) 음반이다. 하지만 이 음반은 첫 시작이라는 역사

적인 의의만 있을 뿐, 연주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시종일관 대단히 느

린 템포를 취하고 있고, 러시아 식의 공격적인 금관의 울림은 브루크너의

스타일을 살리기에 역부족이다. 연주는 성에 안 차지만 여기에서 음반 컬

렉션에 필요한 가이드라인 한 가지는 얻을 수 있다. 러시아 악단과 러시아

지휘자 음반의 브루크너 교향곡은 대부분 피해야 한다는 것. 천하의 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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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4악장의 원판으로 나중에 수정된 판본과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아쉬케나지-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음반(Ondine)은 대단

히 만족스럽다. 인발과 틴트너의 경우, 틴트너의 로열 스코티시는 골격은

대단히 우수하나 탁한 울림이라는 아쉬움이 남았고, 인발의 프랑크푸르트

는 상쾌하기는 하지만 브루크너 특유의 진득함이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

울 수가 없었다. 반면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의 울림은 양자의 아쉬움을 동

시에 해결해준다. 아쉬케나지의 역량보다는 오케스트라의 힘이 더 크게 작

용하고 있는 듯싶다.

1악장 바이올린의 긴장감 넘치는 첫 동기에 이어 등장하는 현의 풍요로

운 저음, 그리고, 확신에 찬 금관의 울림이 듣는 이를 뿌듯하게 해준다. 인

발과 비슷한 템포지만 두툼한 소노리티로 인해 더 우직함을 느끼게 하는

스케르초도 훌륭하고, 슈만풍의 마지막 악장 역시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게다가 이 음반의 말미에는 프리츠 외저가 현악 오케스트라 용으로 편곡한

브루크너의 현악 5중주 아다지오 악장까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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