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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봄 Ⅰ Vol.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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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명사가 만난 조병화

고교 시절 추억과 그의 처녀시집ㆍ마종기

28시인의 수필

봄, 외로운 사람끼리ㆍ조병화

32편운문학상 시터

제9회 수상자ㆍ이제하, 박영호

36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두 개의 삽화 두 개의 감동ㆍ유재영

39다시 읽는 조병화 시Ⅱ

지나는 길에

40조병화문학관 소장품전

럭비는 시인의 청춘ㆍ조진형

44전시광고

고향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고향을 빛낸다

02조병화 시와 그림

의자

04꿈의 향기

옹플뢰르 항구로의 여행ㆍ이가림

06시인의 육성을 듣다

이근배 시인 편ㆍ이혜미

11다시 읽는 조병화 시Ⅰ

12조병화론

조병화 시의 풍크툼과 의미구조ㆍ오형엽

18시로 그리는 조병화

인간으로서ㆍ박민정

23한 장의 사진

시인의 서(書)

2012 봄Ⅰ Vol. 13

Contents

2012 봄Ⅰ Vol. 13 등록번호 서울 사02178 발행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발행인 박철원 편집인 조진형 편집주간 김삼주

편집위원 김종회 박덕규 박주택 홍용희 편집장 박 준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2-1 (우)110-530 전화 (02) 762-0658

팩스 (02) 3673-0436 홈페이지 www.poetcho.com 이메일 [email protected] 디자인 GNA Communications (02) 395-2782

인쇄 금강인쇄(주) (02) 852-1051 발행일 2012년 3월 1일

『꿈』은 잡지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표지Ⅰ제자·그림_조병화

제9회

조병화

축제

<조병화의 문학세계> 강연회

조병화 시인의 제42시집부터 제47시집까지 총6권의 시집에 대하여 문학평론가와 시인들의 육성을 통하여 조병화 시의 궤적을 더듬어 보는 자리.

◉ 일시 및 장소 : 2012. 5. 2(수) 서울, 혜화동자치회관◉ 일시 및 장소 : 2012. 5. 12(토) 안성, 조병화문학관

<고향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고향을 빛낸다> 展

조병화 시인의 고향 난실리와 시인이 청소년 시절 품었던 꿈과 이야기를 담아낸 기획전시.

◉ 전시기간 : 2012. 5. 12 ~ 2012. 10. 31◉ 전시개막 : 2012. 5. 12(토)◉ 장소 : 조병화문학관

난실리 둘레길 걷기

경기도 남부 안성의 작은 마을 난실리 곳곳에 산재한 조병화 시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난실리의 산, 들, 호수, 나무, 꽃, 풀, 곤충, 새 등 자연과 친숙해지는 체험학습의 장.

◉ 일시 : 2012. 5. 13(일)◉ 장소 : 조병화문학관

제5회 꿈나무 시낭송대회

조병화 시인이 독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노래해 온 꿈과 사랑의 시정신을 선양하고 나아가 문학적 역량을지닌 안성시 관내 초등학생들이 시낭송과 친숙해지는기회를 제공하고자 펼치는 시낭송 경연 한마당.

◉ 일시 : 2012. 5. 11(금)◉ 장소 : 조병화문학관

제22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편운 조병화 시인의 문학에 대한 순수한 뜻에 따라 제정된 상으로 한국시의 새 지평을 연 시인과 문학평론가에게 매년 시상.

◉ 일시 : 2012. 5. 12(토) ◉ 장소 : 조병화문학관

제7회 편운 시 백일장

조병화 시인의 문학적 업적과 시혼을 이어 나갈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예고하는 글 잔치.

◉ 일시 : 2012. 5. 12(토)◉ 장소 : 조병화문학관

문 의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02-762-0658, E-mail: [email protected]

후 원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경기문화재단, 한국문학관협회,

한국시인협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한국문인협회 경기도지회,

안성문화원, 한국예총 안성시지부, 한국문인협회 안성시지부

주 최

조병화문학관·안성시

2012.5. 2수 , 5. 11금 ~ 5. 13일

“해마다 봄이 오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라고 이 땅 어머님들의 봄 교훈을 우리에게

들려주던 조병화 시인, 그분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한

제9회 조병화 시 축제에 그대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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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조병화 시와 그림

의자

2012 + Spring

꿈의 향기

글 이가림

1997년 봄. 나는 프랑스에 있었다. 그때 나는 파리 7대학 객

원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곳에 체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편운 조병화 선생으로부터 엽서가 한 장 날아왔다. 며

칠간 김삼주 교수와 함께 파리를 여행할 계획이니, 적당한 호텔

을 하나 예약해 놓으라는 분부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랴

부랴 몽파르나스로 가서 몇 군데를 둘러보다가 비싸지 않으면서

분위기가 있는 ‘아틀리에 몽파르나스 호텔’에 방을 예약했다. 그

방의 이름은 ‘폴 고갱’이었다.

그로부터 2주쯤 지나 편운 선생께서 파리에 도착하셨다. 선

생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파리를 방문하신 터라, 에펠탑이며 노

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이며 개선문 등 유명한 관광명소

를 구경하는 일은 초행인 김 교수를 위해서 온통 시간을 배려하

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비교적 잘 아는 노르망디 바닷가로 하

루쯤 문학기행을 떠나보시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마침 ‘맨

트래블 여행사’의 이춘건 대표가 흔쾌히 우리를 안내해 주겠다

고 나서는 바람에, 즉흥적으로 노르망디 해안을 향해 출발의 시

동을 걸었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의 무대인 ‘루앙’과 모파상의 『여자

의 일생』의 무대인 ‘에트르타’를 거쳐, ‘옹플뢰르 항구’에 도착

한 것은 파리에서 출발한지 채 세 시간이 안 되어서였다. 그날

따라 바다를 보고 싶은 욕망이 한껏 부풀었던 때문일까, 시속

120km 이상 달리는 차 안에서 아무도 속도를 제재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오 무렵의 옹플뢰르 항구는 보들레르가 「항구」

라는 산문시에서 묘사하고 있는바 그대로 “삶의 투쟁에 지친 영혼을 위한 매혹적인 거실”이 되어 기꺼이 우리 일행을 맞이

해 주었다.

나는 옹플뢰르에 관한 한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임을 자처하고 있었으므로, 편운 선생께 이것저것 설명

을 해드렸다. 인상파 화가치고 이 항구를 그리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클로드 모네의 스승으로서 ‘해변 화가’라 불리는 외젠

부댕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며, 보들레르의 노모 까롤린느가 말년에 살던 ‘메종 쥬쥬’장난감 집가 이곳에 있었으며, 무엇보다 보

들레르가 「1845년의 살롱」 등의 미술 비평을 비롯하여 여러 대표적인 시들을 이곳 등대가 바라보이는 ‘슈발 블랑’백마 호텔

이층에서 썼다는 등의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이런 잡학사전적인 얘기를 재밌게 듣고 계시던 편운 선생께서, “아아, 저 위대한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처럼 우리도

‘슈발 블랑’ 식당에 가서 점심이나 먹을까”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홍합이 나오는 해물 요리를 백포도주에 곁들여 먹게 되

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온유한 인상의 중년 부부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약간 들뜬 기분에 보들레르가 옹플

뢰르에서 쓴 유명한 시 「여행에의 초대」를 불어로 암송해 보겠노라고 호기를 부렸다. 편운 선생께서도 즐거우신 듯 “그것 참

멋있겠는데……. 옆 테이블 불란서 손님이 그 시를 알까? 아마 잘 모를 거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연을 암송하자,

그 중년부부가 어느 동양인이 보들레르 시를 줄줄 외우는 게 기특했는지, 막 박수를 치면서 브라보, 브라보를 연발했다. 그

러면서 포도주를 한 잔 대접해도 괜찮겠느냐며 우리 일행의 술잔에 각각 술을 정중히 따랐다. 물론 나도 처음 대면하는 그

프랑스 중년 부부에게 ‘비쥬’볼 키스를 하고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이런 노르망디 바닷가의 흥겨웠던 추억이 인상 깊게 생각되셨는지, 서울로 돌아오신 편운 선생께서는 여행기를 세세히 써

서 잡지에 발표하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옹플뢰르 항구의 ‘슈발 블랑’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갈까, 하시던 그 낭만적

인 농담을 무리를 해서라도 진담으로 실행했더라면 얼마나 더 멋있는 여행이 됐을까 아쉽기만 하다.

이 가 림

시인.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프랑스 루앙대 불문학 박사. 파리7대학 객원교수, 인하대 문과대학장, 한국불어불문학회장 역임. 시집 『빙하기』, 『유리창

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 별』 등. 산문집 『미술과 문학의 만남』, 『흰 비너스 검은 비너스』 등.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등.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펜번역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하대 프랑스문화학과 명예교수.

편운 선생과함께 한

옹플뢰르항구로의 여행

+ 54

1

2 3

1 슈발 블랑 호텔

2 아틀리에 몽파르나스 호텔

3 편운 선생님이 머무셨던 몽파르나스 호텔의 ‘폴 고갱’ 룸

2012 +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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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이근배 시인 편·인터뷰 이혜미

안녕하세요 이근배 선생님, 오늘 인터뷰를 맡게 된 이

혜미입니다. 반갑습니다.

아, 이혜미 시인이지요? 반갑습니다.

지난해 등단 50주년을 맞으시고 올해로 51년째를 맞

으십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부끄럽지요. 뭐.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 있어요.

국수가닥만 50년 뽑아도 달인이 될 텐데 50년 시 쓰면서 아

직도 모르고 부족한 부분이 많거든요. 그런데도 학생들한테

시를 가르치고 하니까, 아무래도 부끄럽지요.

등단 50주년을 기념하여 시서화전을 성대하게 여신

것으로 아는데, 시서화전을 열게 된 배경과 당시 정황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조병화 선생님은 시도 쓰시고 그림도 그리시고, 글

씨도 쓰시니 진정한 시서화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분이 우리나라에 전에는 많이 계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림

은 잘 그리지 못해서 좋은 화가 분들이 그림을 그리고 저는

글씨만 썼어요. 제 붓으로 제 시를 썼지요. 시서화전을 열

게 된 계기는 지난해 제가 등단 50주년에 <은관문화훈장>

을 받고, <만해대상>도 수여받게 되어서 주변 지인들이 무

언가 의미 있는 일을 좀 하자 해서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밥 먹자!’는 핑계로 시작한 것이

에요. (웃음)

시와 글씨·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옛 문인들

의 정취를 상상하게 합니다. 그 이전에도 정진규, 김종해, 이

건청, 허영자 등의 문인 분들과 극단을 만들어 시극을 상연하

기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서화전에서도 엿볼 수 있

듯 이전부터 시와 타 장르의 혼종과 융합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 그것은 1960년대에 시인 8명(김종해, 정진규,

이건청, 강우식, 이탄, 허영자, 김후란, 이근배)이 극단을

조직해서 공동으로 시극 운동을 했어요. ‘현대시를 위한 실

험무대’라는 제목 하에 돌아가면서 시극을 한 편씩 쓰고, 배

우들이 공연을 하는 거예요. 그 극단 이름이 ‘민예’입니다.

시낭송도 하고 독자와의 만남도 갖는 그런 시간을 가졌죠.

시 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문인극이라는게 있어요, 저도 여러 번 직접 출연한

것도 있습니다. 뭐 하나의 그냥 놀이였던 셈이죠. (웃음) 그

때만 해도 문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교과서에만 나오던

문인들, 그 사람들이 직접 분장하고 무대에 나와서 실수도

하고, 재미있게, 인간적인 모습들을 보이는 거예요. 저도

서너 번 이상 나갔던 것 같아요. 문학이 외롭고 하니까, 독

자들에게 다가가는 차원도 있고. 그런데 그런 것은 어디까

지나 잡사雜事고, 중요한 것은 물론 시 쓰는 것이죠.

네, 저도 다시 문학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웃음)

오랫동안 시와 시조를 병행하여 창작하신 것으로 압니다. 자

유시와 틀이 있는 정형시조는 아무래도 그 마음의 결을 씀에

있어서 다른 방향으로 흐를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한 인터뷰

에서 “자유시는 말고삐 없는 말과 같다. 시조는 말뚝으로 말

을 붙들어 그 날뜀을 조절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

것을 보았는데, 자유시와 시조는 결국 말言을 풀어두느냐 묶어

두느냐의 문제인 것일까요?

음……. 이혜미 씨도 신춘문예를 하셨지만, 우리나

라에는 등단이라는 형식, 일종의 라이센스가 있잖아요? 저

는 시조 부분에 당선이 되어서 시조를 썼고, 시 부분에도 당

선이 되어서 시를 같이 써 왔습니다. 양쪽을 다 활동했지요.

재주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시조시인협회’ 회장도 지

냈고, 조병화 선생님도 회장을 하셨던 ‘한국시인협회’ 회장

도 지냈어요. 문단에서 이 양쪽 회장을 다 지낸 사람은 저 하

나입니다. ‘경계인’이라고도 했지요.

“말고삐 없는 말”에 대한 얘기는 이런 겁니다. 요즘

젊은 시들, 자유시가 점차 산문화되어가고 난해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독자를 외면하고 자꾸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詩原

무척이나 쌀쌀했던 겨울 오후였다. 추운 바람을 뚫고 오랜 시력詩歷의 시인을 찾아가는 것은

긴장되고 또한 설레는 일이었다. 1960년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시작으로 『노래여 노래여』1981,

『동해 바닷 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1982, 『한강』1985,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2004, 『종소리는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2006 등의 시집을 상재하며 시와 시조를 오가는 왕성한 시작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의

시원詩原이 궁금했다. 넓은 마당을 갖은 조병화 시인의 생전 자택에서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먼저 와 기다리다가

지긋이 웃으며 따듯한 커피 한 잔을 권하던 이근배 시인은, 준엄한 첫 인상과 달리 인터뷰 내내 유쾌한 입담을

보여주었다.

이근배 시인은 194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에

시와 시조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동화출판사 주간, 『월간문학』 편집위원, 『한국문학』 발행인 겸 주간, 재능대학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

했다. 가람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시조대상, 고산문학대상, 만해대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은관문화훈장을 서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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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려 하지 않지요. 하지만 시라는 것은 ‘운문’이거든요.

리듬이 있고, 정서가 있는 장르지요. T.S.엘리엇이 “시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전달되는 것이다”라고 했거든요. 그러

면은 시가 독자와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다가올 수 있어야 한

다는 것이죠. 그런데 시라는 것이 생물이고 진화하다 보니까

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자꾸 나아가는 와중에 독자들로부터

유리되는 점도 있고요. 시라고 하는 본령과 독자적 정체성,

시가 가진 생명력으로부터 너무 이탈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시조는 형식이라는 것이 있고 하니까, 자유시가 고삐 풀린

말처럼 막 달아나버리는 것을 잡아주고, 말하자면 말뚝처럼

그것을 통해 원점에 붙들어질 수 있다. 그런 말이었어요.

형식 속으로 들어감으로서 오히려 많은 것들을 풍요

롭게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고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습니다.

그건 형식 덕이기도 하지만 모국어가 가진 생명력

과 힘에 더 관계되는 일이지요.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

는 모국어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응축되어서 시조라고 하

는 형식을 탄생시킨 것이지요. 한 개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

닙니다. 오랜 옛날의 향가라든지 하는 것들로부터 흘러내려

온 것이죠. 옛것으로 그저 묶여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

전에 한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화분에

서 풀잎을 하나 따더니, 그걸로 풀피리를 부는 거예요. 그런

데 아……. 그 소리가, 어떤 악기보다도 더 화려하고 아름다

운 소리가 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이 풀잎 하나만으로 그

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거죠. 또 예를 들면 해금이라는 악기도

줄 하나만으로도 복잡한 소리를 내거든요. 아무리 좋은 피

아노를 가져다준다 한들 실력이 없으면 좋은 소리를 내겠습

니까? 악기는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 소리에 천변만화가 있

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시조라는 것은 오래되고 낡은 악기고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시대를 넘어서는 효용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시조

는 다 담아낼 수 있는 진폭을 가지고 있어요. 이은상 시조 시

인이 “시조는 정형定型이 비정형非定型이고, 비정형이 정형이

다”. 라는 말을 했지요. 고정되어 있는가 하고 봤더니 고정

되어 있지 않고, 고정되지 않았는가 하고 봤더니 고정되어

있더라는 거예요. 틀과 룰이 있으니까. 기승전결도 있고요.

가람 이병기 같은 시인은 정형시조를 고정할 정定자를 쓰지

않고 가지런할 정整자를 써서 정형시整型詩라고 했어요.

시조에 대한 마음이 정말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가끔 지방이나 이런 데에서 강연하고 하면 주부님들

이 많이 계세요.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여러분, 큰 아들은

돈도 잘 벌고, 벼슬도 하고, 차도 좋은 거 몰고 다닙니다. 근

데 작은 아들은 말썽부리고 뜯어가고 있는 데로 속을 썩여

요. 그러면 이 두 아들 중에 마음이 어디 가 있어요?” 그러

면 다들 이구동성으로 작은 아들이라고 해요. (웃음) 사실 호

적상으로는 시조가 장손입니다. 육당 최남선으로부터 시작

되어서 역사가 깊으니까. 그런데 동생인 자유시가 나타나서

집안을 장악해버렸단 말이에요. 그래도 물론 시조가 그 정

도로 천대받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시에 비해 마음이 더 가

는 건 있지요.

장편서사시집 『한강漢江』을 1985년에 내셨어요. 한국

근대사를 아우르는 호흡이 긴 시집으로 알고 있는데, 시조와

장편서사시를 넘나드시는 필력이 놀라운 대목입니다.

에이, 그런 건 아니에요……. 1984년에, 『한국일

보』에서 소설이 아니라 시를 연재하게 됐어요. 우리나라 신

문사상 처음으로 있는 일입니다. 그 신문 1면에 매일 시가

한 편씩 나오는 때였어요. 1년을 꼬박 했죠.

사실 서사시epic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산문이

나 소설 그리고 서정시lyric등으로 분화되지 않았습니까. 서

사시라는 것은 그래서 좀 애매하고 정답이 없어요. “이것이

서사시다”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서사시는 스토리,

그리고 팩트fact를 가지고 있으면서 시적 표현으로 만드는 일

이기 때문에 시도해 본 것이죠. 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다른 민족과 다르게 우리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요. 또한 ‘우리 말 그 자체가 시’라는 얘기를 제가

많이 합니다. 하늘, 바람, 꽃, 별, 흙, 바다 …… ‘하늘’ 하면

하늘 같고, ‘바다’하면 정말 바다 같잖아요. “꽃”하면 꽃 같고

요. 정지용 시인이 바다에 가서 “바~다~”해보라고 했어요.

바다에 가서 “바~다~”하면 정말 바다에 온 것 같지요. 그런

데 외국말로는 바다가 뭐에요. “씨sea”죠. 제가 그래요. “욕

하니?” (웃음) 그러니까 우리는 말 자체가 그대로 시어다. 찰

랑찰랑, 철렁철렁, 칠렁칠렁 ……. 미각만 해도 고소하다,

꼬스름하다 등등……. 이런 것들도 우리는 모두 말로 표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자는 다르죠. 일본어도 그렇고. 우

리가 가진 언어와 글자의 우수성, 그리고 아름다움. 그런 것

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쉽게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고 깨

달으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또, 전 세계에서 ‘거지 주제가’가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을 거예요. 거지 타령이지요. 거지들이 와서 그

냥 ‘돈 좀 줍쇼’가 아니잖아요. “일 자나 두 자나 들고나 보

니/일선에 가신 우리 낭군/돌아오기만 기다린다.//얼씨구

씨구 들어간다/작년에 왔던 각설이/죽지도 않고 또 왔네” 이

런 것 말이에요. 그런데 누가 이런 것을 거지들한테 가르쳤

겠어요? 자기들이 다 만든 거지요. 그렇게 자기들의 주제가

가 있다는 것이 대단하지요. 우리 민족은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과 다른 우리만의 DNA가 있는 것이, 뭐랄까 신기神氣라

할까요? 정이 많고 가지고 있는 신명이 많은 거예요. 그 신

명이, 노래를 부른다든가 춤을 춘다든가 그림을 그린다든가

시를 쓰는 것으로 나오는 것이지요.

시조를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말에 대한 애정도 각별

하시네요. 선생님은 또한 벼루나 문방사우文房四友에도 관심이

아주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벼루 이야기를 좀 하면, 제 시 「자화상」에도 나오지

만요. 제가 아버지 얼굴을 열 살 때 처음 봤어요. 그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어요. 숙모님 눈칫밥 먹으면서요.

고아처럼 자랐죠. 그래도 할아버지께 천자문도 배우고, 그

때 벼루, 연적 이런 것들을 접하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그

런 영향이 있지요. 해서 붓글씨를 좀 써보겠다고 벼루를 하

나 사려고 했어요. 그런데 벼루라는 것이 어마어마하더라고

요. 옛날 사람들은 “연전硯田”이라는 말을 쓰는데, 농부에게

논밭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듯이 “붓으로 밭을 간다以筆

爲耕”라는 말을 하여 선비들이 글을 쓰는 데 벼루를 가장 중

요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또 ‘연전’이라는 말에는 ‘시인’이라

는 뜻도 있어요. ‘벼루밭’이라고 하는 거죠. 어쨌든 그래서

딱 한 점만 가지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점점 빠져들고 홀리

게 된 것입니다.

아까 말씀해주신 「자화상」이라는 시가 선생님의 유년

을 잘 담아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많

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근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어머니’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생각나는 정도가 아니지요.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

도 눈물이 난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아흔한 살에 돌아가

셨어요. 「자화상」에 나오듯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와

“지아비 옥바라지에 한숨 마를 날 없는 어머니”로 사신 거

죠.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덕을 쌓은 어머니가, 남편 때문

에도 고생하셨지만……. 무엇보다 제가 사실 좀 망나니였거

든요. (웃음) 불효막심한 아들을 두어서 고생 많이 하셨지요.

요즘도 나는 학생들 앞에서 늘 이야기합니다. “불효자 올림

픽이 있다면 제가 금메달일 거다.” 제 시 중에 「천벌」이라는

시가 있어요. 천벌은 뭐에요, 하늘에서 벼락 내리는 것이 천

벌 아닙니까. 이런 겁니다.

용서하세요, 어머니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서울 적십자병원 제4분향실

시인의 육성을 듣다

이근배 시인 편·인터뷰 이혜미

+ 1110

국화꽃으로 치장한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천 길 낭떠러지 솟구치는 통곡 씹으며

하늘은 왜 그 번개회초리도 내려치지 않는지

용서하세요 어머니

용서하세요 어머니

어머니의 용서가

제게는 천벌입니다.

-「천벌」 전문

제가 그렇게 불효막심했을 때, 어머니가 저를 원망

이라도 했으면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요. 어머니는 늘 저를

용서했거든요. 그렇게 불효자를 남들한테는 효자인 양, 자

랑을 하고 그러셨죠. 어머니 얘기는 「냉이꽃」이라는 시에도

썼고 제 시에 늘 많이 나오지요.

어머니에 대한 선생님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져서 저

까지 함께 마음이 찡해집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등단하기 전

21살에 첫 시집을 내시고, 등단한 후에는 20년 동안이나 시집

을 내지 않으셨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내신 첫 시집 『노

래여 노래여』의 서문에서 지난 시간을 “뒷걸음질 친 20년”이

라고 하셨고 “치열하게 아플 때마다 시를 썼다”고 하셔서 그

동안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때 왜 그랬냐면, 그때 고은 시인도 저한테 자청해

서 두 번이나 해설을 주고 이어령 씨도 써 주고 그랬어요. 그

때가 1960년대 말입니다. 시집을 한참 준비하다가, 표지까

지 다 해 놓고 하다가 그만둔 일이 있었어요. 또 제가 출판사

에 있고 그랬을 때인데 그래서 그런지 책을 내는 것이 오히

려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좀 자신이 없더라도 유

명하다는 출판사 같은 곳에 줄서기를 잘 했으면 지금 제가

지금보다 더 유명해졌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 것을 우

습게 봤어요. 관심이 안 가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미련 맞았

다고 할까? 아니면 게을렀다고 할까요? 문학평론가 김현 선

생이 유언처럼 저한테 했던 말이 있어요. “야, 넌 너무 클린

해서 탈이야”. 너무 깨끗하다 이거지요. 제가 다른 문인들

번역도 시켜주고 돈벌이하게 해 주고 아르바이트하게 해 주

고 했지만 정작 제가 어디 기웃거리고 뭐 부탁하고 그런 일

이 없었거든요.

올해는 조병화 시인이 별세하신지 9주기를 맞이하였

고요, 벌써 탄생 91주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10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하신 바 있는데, 조병화 시인과의 인

연을 좀 듣고 싶습니다.

제가 1961년에 등단했습니다. 신춘문예 사상 굉장히 큰

호평을 받고 꽤 날렸죠. 그때 ‘신춘시 동인’이라는 게 있었어

요. 당대 좋은 시인들이 많았지요. 그때만 해도 문인들이 숫

자가 적었어요. 그런데 동인 모임도 하고 어디 나가서 조병

화 선생님을 뵈면 반갑게 “이리 와, 이리 와” 하시면서 뽀뽀

도 해 주고 (웃음) 술도 사 주시고 막그러셨죠. 요새는 시인도

많이 나오고 해서 누가 누군지 잘 모르고 하지만 그때만 해

도 누구 하나 확 튀었다 하면 ‘와~’ 이러면서 막 회자되고 할

때에요. 그렇게 조병화 선생님이 저를 좀 예뻐하셨는데, 그

때 제가 마침 출판사 편집장이 된 거예요. 동화출판사라고

있었죠. 그 출판사 할 때 선생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때 조병화 선생님은 『사랑이 가기 전에』로 베스트셀러 시

인에 올라 계셨죠. 당시로서는 정말 대단했어요. 또 베레모

도 쓰시고 얼마나 멋쟁이이셨어요? 저는 그런 조병화 선생

님한테 에세이집을 내자고 부탁을 드렸어요. 그러고 나서는

시집도 만들고 시화집도 만들어드리면서 선생님하고 가까워

졌습니다. 늘 그렇게 예뻐해 주시고 해서 지금 생각해도 너

무 감사하지요. 편운문학상 받을 때도 “야, 10회다, 10회!”

이러면서 기뻐해 주시고. 다른 누가 와서 “돈으로 양쪽 뺨을

때려도” 제가 하는 출판사에서 책 내 주시고. 다른 사람들

원고도 “야, 그거 그냥 근배 줘라”그러시고. 그렇게 제가 조

병화 선생님 은혜를 많이 입었어요.

선생님과 조병화 시인과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오늘

의 이 자리가 더 뜻 깊습니다. 선생님, 오랜 시간 좋은 말씀 정

말 감사드립니다.

이 혜 미

시인.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보라의 바깥』.

우리는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삶이라는 혹은 사랑이라는 늪 속에

발을 들인 우리는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한 평생 발버둥 치는 것인지 모릅니다.

늪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삽상(颯爽)한 여름날

들길을 걷다가 우연히 물꽃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곳이 늪인지도 모르고 물꽃에게

다가갑니다. 그렇게 늪에 빠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얻으려면 비로소 사랑을 놓아주고

삶의 구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아이러니를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시 읽는 조병화 시Ⅰ

해설 임경섭

임 경 섭

시인. 1981년 원주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동대학원 수료.

200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12 + Spring

시인의 육성을 듣다

이근배 시인 편·인터뷰 이혜미

+ 1312

조병화론

글 오형엽

구조

의미 풍

크툼과

조병화 시의

시간

의식

단독자의

1. 조병화 시의 풍크툼

편운片雲 조병화 시인은 1949년에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산호장을 출간한 이후 2003년에 작고하기 전까지 총 50

여권의 시집을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시작 활동을 펼쳤다.

그는 시집뿐만 아니라 시선집과 수필집 등을 활발히 출간했

고, 시화 및 유화에도 조예가 깊어 여러 차례 회화전을 열 정

도로 다방면에 뛰어난 예술적 능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조병화의 시세계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심층적

인 연구가 진행되어 많은 성과가 축적되었다.1

총 50여 권의 시집을 남긴 조병화 시인의 방대한 시세계

를 탐구할 때, 우리는 우선 그 전개 과정에 따른 변모 양상

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기존의 연구들 중에서 이런 관점을

통해 조병화 시세계의 특성을 탐구하여 중요한 성과를 얻은

글들이 다수 있다. 한편으로 조병화의 시세계를 탐구할 때

그 전개과정에 따른 변화의 양상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일관성에 주목할 수도 있다. 이 글은 이처럼 시작

활동의 전 시기를 통해 일관되는 조병화 시세계의 특성을 살

피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조병화 시세계의 핵심적인 의미구조를

해명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시도하는 분석 방법은 조병화

시의 풍크툼punctum에 주목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사진의 이미지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스투

디움studium과 풍크툼이 그것이다. 스투디움이 누구나 동의

할 수 있을 만큼 관습화되고 일반화된 상징이라면, 풍크툼

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불가사의하고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다. 원래 풍크툼은 라틴어로 날카롭고 뾰족한 물체에 찔려

생긴 상처를 의미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이미지 중에서 이처

럼 관객의 의식 및 무의식을 찌르며 상처를 입히는 이미지를

주목하고, 이 우연하고 돌발적인 이미지가 바로 그 작품 세

계의 숨은 비밀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선행 연구의 중요한 성과들을 토대로 조병

화 시의 풍크툼에 해당하는 이미지들을 분석함으로써 조병

화 시세계의 핵심적인 의미구조를 추출하여 기존의 연구 성

과에 작은 하나의 의견을 첨가하고자 한다.2

2. 단독자- 견인주의적 운명애와 내성적 자존自存

조병화 시세계의 숨은 비밀을 엿볼 수 있는 첫 번째 풍크

툼은 ‘스스로’와 ‘홀로’이다. 대부분의 선행 연구들도 조병화

시의 특성으로 ‘고독’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조병화 시의 ‘고독’이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뜻하는 ‘소

외의식’뿐만 아니라, 시적 자아가 내면적 성찰을 통해 자신

을 외부세계와 독립시키며 단련시키는 ‘자존의식’을 내포하

고 있다는 점이다. 조병화 시에서 소외의식과 자존의식은 상

호 대립하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하면서 시적 자아의 존재론

적 양상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은 ‘고독’이라는 단어

가 이러한 자존의 존재론적 양상을 온전히 표현하기 어렵다

고 판단하여, 이를 ‘단독자 의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조

병화의 시에서 단독자 의식은 주로 ‘스스로’와 ‘홀로’라는 단

어를 통해 표현된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운명이 아닌 운명을 숨겨 품고

1 조병화 시에 대한 선행 연구 중 중요한 성과에 해당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김광림, 「평범 속의 진리」,『현대시학』, 1978.11; 박이도, 「시간, 그 우상화의 형상」, 『한국 대표시 평설』, 정한모·김재홍 편, 문학세계사, 1983; 김윤식, 「편지의 형식

과 여행의 형식」, 『현대문학』, 1983.8; 오세영, 「조병화론」, 『현대시와 실천비평』, 이우출판사, 1983; 김재홍, 「낭만주의의 생철학」, 『시와 진실』, 이우출판사, 1984;

이승훈, 「고독의 시학」, 『한국시와 구조 분석』, 종로서적, 1987; 원형갑, 「조병화의 자기소모와 스키조 시대의 시인」, 『월간문학』, 1990.10; 이형기, 「고독한 나그네

의 꿈」, 시선집 『숨어서 우는 노래』, 미래사, 1991; 유지현, 「시적 공간의 변전과 시의식의 심화」, 『1950년대 시인들』, 송하춘·이남호 편, 나남, 1994; 임헌영, 「영

혼의 안식을 위한 소요」, 시선집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2 이 글의 주요 텍스트로는 조병화, 시선집 『숨어서 우는 노래』, 미래사, 1991과 조병화, 시선집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를 사용한다.

2012 + Spring

+ 1514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밑도끝도 없는 영원을 향하여

길을 떠나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해를 가며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죽음의 장소로 가까이 가는 거

-「남남 7」부분, 1-86 3

이 시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살다가 죽

는다’라는 상식적인 내용을 평이하게 전달하는 듯하지만, 이

러한 상식과 평범을 뛰어넘는 알 수 없는 의지와 결기가 느

껴진다. 이 느낌은 2, 4, 7, 9행에 한 행으로 처리되며 4

번 반복되는 “각자”와, 3, 5, 8, 10행에 각각 2번씩 총 8

번 반복되는 “스스로”라는 단어에서 기인한다. “각자”와 “스

스로”는 긴밀히 연결되는 단어로서 한 연에서 이처럼 많이

반복할 만큼 조병화 시인은 단독자로서의 인간의 속성을 강

조하고 있다. 시인은 ‘나’와 ‘너’의 관계성을 추구하면서 완

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갈망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

지 않고 좌절시키는 듯이 보인다. ‘나’와 ‘너’의 관계성이 불

가능한 것은 사회역사적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가

진 존재론적 본질로부터 기인한다. 이것을 시인은 “운명”이

라고 말하는데, 어쩌면 조병화 시인에게 “운명”은 존재론적

단독성을 가진 인간이 “영원을 향하여” “해를 가며” “죽음의

장소로 가까이 가는” 인생의 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인지

도 모른다. 니체F.W.Nietzsche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긍정

하고 감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

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병화의 시에 나

타나는 단독자의 운명에 대한 이해는 자기 인생을 걸고 영

원을 추구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니체적

의미의 운명애amor fati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병화 시에

서 단독자의 운명애는 종교의 경지에까지 승화되는 경우를

종종 보여준다.

겨울나무는 종교처럼

하늘로 하늘로 솟아오른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

냉랭한 대기 속에서

세찬 눈보라 속에서

오로지 곧은 이념

묵묵히

카랑카랑한 기침 소리를 내부로

내부로 숨기며, 죽이며

의연한 모습으로

겨울나무는 스스로의 종교처럼

하늘로 하늘로 솟아오른다

안으로 안으로 스스로의 하늘을 넓히며

파릇파릇 생명을 닦으며

밤에도 잠자지 않는 꿈을 품고

투명한 영원으로, 쉬임 없이

겨울나무는 스스로의 종교처럼

스스로의 하늘로 솟아오른다

-「겨울나무」전문, 2-116 4

시적 화자는 겨울나무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모습을

“종교처럼”이라고 표현한다. 겨울나무를 “종교”에 비유한

이유는 “매서운 바람”과 “냉랭한 대기”와 “세찬 눈보라” 속

에서 “곧은 이념”을 견지하는 “의연한 모습” 때문이다. 종교

적 순례자와 같이 “묵묵히” 자신의 길로 매진하는 자세는 2

연의 “내부로 숨기며, 죽이며”와 “스스로”, 3연의 “안으로”

와 “스스로”라는 단어를 통해 풍크툼을 드러낸다. 풍크툼은

시인 자신의 내밀한 비밀을 감추듯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의

의식 및 무의식에 상처를 입히며 파문을 일으킨다. 2연의

“내부로 숨기며, 죽이며”라는 구절은 겨울나무가 “카랑카랑

한 기침 소리”뿐만 아니라 “곧은 이념”까지도 자신의 내부로

끌어안고 인내하는 견인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엿보

게 한다. 겨울나무의 “종교처럼” “의연한” 모습은 이처럼 상

처까지도 자기 몸 내부로 받아들여 단련시키는 내성적 자존

과 강고한 의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3연에서 2번 반복

되는 “안으로”와 3번 반복되는 “스스로”는 “꿈을 품고” “영

원”을 향해 “솟아오”르는 겨울나무가 가진 단독자의 견인주

의와 내성적 자존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왜 “스스로의 종교”와 “스스로의 하늘”이라고 표현하

는 것일까? 조병화의 시에서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귀의하

고 의지하는 일반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단독자로서의 인간

이 각자의 “꿈”과 “영원”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

다. 다음과 같은 시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신은, 신이옵고

사람은 사람이옵니다

신은, 기원이나 기도가 아니옵고

그것은 스스로의 마음 안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어서

가장 마음이 놓이는 위안이옵니다

어려울 때나 슬플 때나

스스로 마음 놓고 불러보는 이름,

아늑한 그 위안이옵니다.

홀로.

-「신神은,」전문, 2-180

시적 화자는 신과 사람을 구분하고, 신이 기원이나 기도

를 통해 접근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 안에 있는”

“이웃”이라고 말한다. 조병화 시인에게 있어 종교가 “스스로

의 종교”인 것처럼, 신은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가까운 이

웃”이고 “위안”인 것이다. 이 시에도 풍크툼으로서 “스스로”

가 2번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단 하나의 단어로

종결되는 “홀로”가 또 다시 풍크툼을 형성한다. 이 “홀로”라

는 단어는 “스스로”와 대등한 의미를 가지면서 이 시 전체의

주제를 결정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하여

“홀로”는 단독자로서의 견인주의적 운명애와 내성적 자존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병화 시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서 ‘고독’과 ‘허무’가 부각되었고, 그 내포적 의미로서 외로

움, 쓸쓸함, 슬픔, 애착 등의 감상적 정서들이 거론되어 왔

다. 그러나 이 글이 조명하는 ‘스스로’와 ‘홀로’라는 풍크툼은

‘고독’과 ‘허무’의 의미로서 감상적 정서 내부에 우주적 단독

자로서의 견인주의적 운명애와 내성적 자존 및 정신적 의지

가 내포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3. 시간 의식- 기억과 망각, 기대와 회의 사이의

역설padadox

조병화 시세계의 숨은 비밀을 엿볼 수 있는 두 번째 풍크

툼은 ‘익잖는 추억’과 ‘오잖는 기다림’이다. 대부분의 선행 연

구들도 조병화 시의 특성으로 ‘시간 의식’을 언급하고 있지

만,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조병화 시의 ‘시간 의식’이 추억에

대한 망각, 집착을 버림, 미래에 대한 기대 등과 개별적으로

연결되면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성과 독립적으로, 혹

은 그 순차적 시간성과 평면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추

억’과 ‘익지 않음’, ‘기다림’과 ‘오지 않음’이라는 이율배반적

대립 항이 복합적으로 충돌하는 내면적 역설paradox의 긴장

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병화 시에서 이율배반적 대

립 항이 복합적으로 충돌하는 내면적 역설paradox의 긴장3 조병화, 시선집 『숨어서 우는 노래』, 미래사, 1991, 86면. 이후 이 책에서의 인용은 1-86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4 조병화, 시선집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116면. 이후 이 책에서의 인용은 2-116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조병화론

글 오형엽

2012 + Spring

16 2012 + Spring 16 + 17

은 ‘시간 의식’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이를 둘러싸고 있

는 ‘고독’, ‘허무’, ‘죽음’ 등 거의 대부분의 중요 테마에도 깊

이 작용하고 있다. 이 글은 특히 과거, 현재, 미래와 연관되

는 ‘시간 의식’을 중심으로 조병화 시의 숨은 비밀인 내면적

역설paradox의 긴장을 살펴보려 한다.

철학개론일랑 말라

면사포를 벗어 버린 목련이란다

지나간 남풍이 서러워

익잖는 추억같이 피었어라

베아트리체보다 곱던 날의 을남乙男이는

흰 블라우스만 입으면 목련화이었어라

황홀한 화관花冠에

사월은 오잖는 기다림을 주어 놓고

아름다운 것은 지네 지네

호올로

-「목련화」전문, 2-47

시적 화자는 사월의 봄날에 화사하게 피어난 목련화를 보

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철학개론”으로 대변되는 관념과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면사포를 벗어 버린 목련”으로 상징

되는 삶의 실존을 중시한다. 이 대목은 온갖 이념과 이데올

로기를 멀리하고 구체적 현실 속의 삶을 노래하는 조병화 시

의 기본 특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적 화자는 2~3연

에서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4연에서는 미래의 그리움을

현재의 고독과 함께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2연의 “익잖는 추억”과 4연

의 “오잖는 기다림”이다. 시적 화자가 목련화를 보면서 되

살리는 과거의 추억이 익지 않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상

식적으로 추억은 이미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의 심정에 무

르익어 있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 의미를 “지나간 남풍

이 서러워”라는 문장에서 유추해야 할 것이다. “지나간 남

풍”이 과거의 아름다운 경험이라면, “서러워”는 현재 시점

에서 그 경험을 재생하고 회복하지 못하는 현실적 좌절에

서 생겨나는 감정인 듯하다. 그런데 “익잖는 추억”은 현실

적 좌절로부터 파생되는 단순히 수동적인 감정에서 일보 전

진하여 스스로 그것을 차단시키는 정신적 의지가 개입된 것

이다. 따라서 “익잖는 추억”은 봄날의 목련화를 보면서 과

거의 아름다운 사랑을 추억하는 기억의 벡터vector와 그것을

스스로 단절시키려는 망각의 벡터가 상호 충돌하여 생겨나

는 시구인 것이다.

상호 충돌하는 양극의 심리적 벡터는 4연의 “오잖는 기다

림”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사월”은 “황홀한 화관花冠”으로

비유된 목련화에 “오잖는 기다림을 주어 놓”고 있지만, “아

름다운” 꽃잎은 떨어진다. 여기서 “오잖는 기다림”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서 “기다림”과 그 희망이 현실에서 끝내 성취되

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는 회의가 충돌하여 생겨나는 표현이

다. 다시 말해, 이 표현은 미래를 기약하는 기대의 벡터와

그것이 미래의 현실태에서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예

감하는 회의의 벡터가 상호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버린 카렌다 속에

모오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너와 나는」부분, 1-20

이 시의 1연에는 조병화 시의 이별이 가지는 이율배반적

역설의 긴장이 풍크툼으로 드러난다. 시적 화자에게 있

어 “이별”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경험 및 추억과 단절시키는

과거와의 작별이다. 따라서 그것이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

키는 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이다. 그런데 화자는 “슬픈 시절

은 이미 늦었다”라고 말한다. “슬픈” 감정은 단지 화자가 현

재 느끼는 정서 자체로 표현되지 않고 “시절” 즉 시간적 차원

과 결부되어 표현되는데, 이것은 조병화 시에서 정서가 시

간 의식과 밀접히 상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

서 시간 의식은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느 하나의 시

간대와 연결되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복합적으로 중첩되면

서 기억과 망각이 충돌하며 교차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런 차원에서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라는 문장이 생겨나

는 것이다.

이처럼 1연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기억과 망각이라는

이율배반성이 충돌하는 역설적 긴장을 내면적으로 숨기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2연의 “내일”에 대한 기대로도 전이

되고 있다. 2연은 표면적으로 화자가 과거와 동일하게 반

복되는 현재의 일상적 현실 속에서 내일을 기대하며 모든

사랑과 작별해야 한다는 각오를 표현한다. “기도”로 맞이

하는 “그날”은 “내일”이라는 미래이다. 그러나 “그날이 있

을 것만 같이”라는 문장의 어조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확신

이 아니라 회의를 동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 1연이 기억과 망각의 이율배반성을 통해 과거와

의 작별을 표현하고 2연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표현

하는 듯하지만, 내면적으로는 2연도 미래적 기대와 미래적

회의가 복합적으로 중첩되면서 이율배반성을 통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영속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조병화 시세계

를 지배하는 ‘고독’과 ‘허무’는 바로 이러한 역설의 비밀로부

터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의식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조병화 시인이 단순히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성과 독립적으로, 혹은 그 순차적

시간성과 평면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라는 이중적 시간성이 중첩되는 복합적 시간성

속에서 ‘추억’과 ‘익지 않음’, ‘기다림’과 ‘오지 않음’이라는 이

율배반적인 심리적 벡터가 충돌함으로써 역설의 긴장을 발

생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결국 조병화 시의 ‘미

완의 사랑’, 혹은 ‘꿈과 허무’와 결부되어 형상화되는 시간 의

식은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와 현재 사이에서 기억과 망각,

기대와 회의라는 이율배반적 대립 항이 복합적으로 충돌하

는 내면적 역설paradox의 긴장을 동반하는 것이다.

오 형 엽

문학평론가. 1994년 『현대시』 신인상,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젊은 평론가상, 편운문학상 수상. 현재 수원대

학교 국문과 교수.

조병화론

글 오형엽

+ 1918

시로 그리는 조병화

글 박민정

1. 位置위치

따발총에 쫓겨온

산부인과 여원장이 송도 길가에

여원장 남편이

아무렇게나 써 버린 간판을 걸던 날엔

비가 내렸다.

마을 풍속을 따라

여원장 남편은 송도 의원이라 하자 한다.

이 마을의 풍속에선

고동 냄새가 난다.

송도 의원

여원장은 어린애를 뱄다.

돈들이 없는 날엔

여원장 남편은

돈이 사는 부산으로 간다.

여원장 남편이 돌아올 땐

돈 대신에

언제나 그럴듯한 거짓말을 준비한다.

폐를 상한 남자가

송도 의원에 들린 날이 있다.

환자와 여원장의 대화가 있다.

여원장 남편은 매트리스에 누워 눈을 감는다.

비가 유리창 안을 기웃거린다.

“인생이 고독하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실연을 하신 기억이 가시지 않으셨군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알으십니까.”

“모릅니다.”

“이 책입니다. 꼭 한 번 읽어 주십시오. 모든 인생이 있읍니다.”

“인생이요? 네 고맙습니다.”

환자와 여원장의 대화가 없다.

출입구가 열리는 소리에

빗소리가 들어온다.

매트리스에 누운 여원장 남편은 눈을 뜬다.

진찰대 위엔 암파 문고가 뒤남아 있다.

환자가 돌아가는 뒷모양이 있다.

뒤페의 그림이 있다고 여원장 남편은 생각한다.

여원장 남편은 담배를 꺼낸다.

미장원에 나갈 때마다

송도 의원에 들르는 여환자가 있다.

긴 다리와 하얀 피부에

샹들리에 병이 전염한 것이라고 여원장 남편은 생각한다.

여환자는 여원장에게 담배를 권한다.

여원장은 담배를 받아 진찰대에 놓는다.

(으례 그 담배는 여원장 남편이 피워 준다.)

이 날에도 여환자는 파란 달러를 세고 간다.

송도 의원이

비내리는 오후 하얀 고동이 되어 가는 날이 있다.

폐를 상한 환자가 비맞은 생선처럼 문을 연다.

고독이 연거푸 와서 여원장이 그리워졌다 한다.

여원장은 어리석은 사나이라고 생각한다.

여원장 남편은 가엾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책을 다 읽으셨읍니까.”

“살아가기에 바빠서……”

“돈입니까.”

“돈이 있어야 고독도 사 보겠어요.”

환자는 책을 가져 가겠다고 한다.

여원장은 소독장 위에 먼지를 맞은 채 얹힌

암파 문고를 내린다.

날개 있는 세균처럼 먼지가 내린다.

송도 의원 조병화

2012 + Spring

여원장 남편은 여환자가 두고 간 모리스를 피운다.

동백꽃이 제일 좋다는

여간호원이 바닷가서 동백꽃을 꺾어 온다.

화병 아래서

여간호원은 여원장 남편이 쓴 시집을 읽는다.

여간호원은 여원장 남편의 시가 구미에 당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원장 남편은 椿姬춘희보다

쟌느 마두가 좋다 한다.

여원장은 라비크와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 한다.

여원장 남편은 그럼 라비크가 되겠다고 한다.

여원장은 그것은 싫다 한다.

여원장 남편은 한 여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송도 의원에

환자 하나 없는

그러한 날이 이 마을의 풍속같이 있다.

그러한 날엔

여원장 남편은 여원장을 자꾸만 웃긴다.

도회지 소식이

마을 소녀들이 기다리는

편지 배달꾼처럼 오고 가는 곳에

송도가 있고

송도 의원 여원장은

외로와하는 습관이 있는 듯하다.

쟌느 마두.

여원장 남편은

암석에 바다가 깨지는 그 바다 기슭을 돌아

돈이 사는 부산으로 간다.

마음의 식민지가 있어……

2. 遺産유산

아를르의 봄날 같은

그러한 날이 송도에 머문다

여원장 아들이

바다에 버섯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니

바다에 나가자 한다.

여원장과

여원장 아들을 따라

여원장 남편은 바다로 간다.

여원장은 그것은 버섯이 아니고

해녀라고 한다.

여원장 남편은 확실히 버섯이라고

생각해 본다.

여원장은 아들에게

남편의 유산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원장 남편은

여원장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을 미워한다.

여원장 남편은

여원장 남편의 유산이

고향이 없는 어머니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원장 남편에겐 어머니가 없다.

아니 바다의 버섯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파란 바다에

온종일 버섯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고

바다 기슭엔

조개 껍질처럼 하얀 집들이 늘어 간다.

여원장 남편은 해가 지도록

바다의 버섯이 되고 싶어한다.

송도에 아를르의 봄날 같은

그러한 날이 호올로 머문다.

+ 2120

시로 그리는 조병화

글 박민정

“나는 복수를 했고, 사랑을 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

으로서 이 이상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

라비크의 말이었다. 그가 자신의 과거를 살해한 후에 남긴 말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했

다. 그가 보지 못한 개선문을 떠올린다. 나로 말하자면 물론, 상징으로도 실재로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 역시 앙테르나쇼날에 유배된 이방인이라고, 잠시 그렇게 생각해 본

다. 오늘, 이곳에는 환자가 없다. 따라서 손님도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신을 태워주길

기다리는 담배도 없다. 국경의 바깥만을 어슬렁거리던 라비크처럼 이곳 주변을 어슬렁거리

던 내가 오늘 정착한다. 나는 오늘 걷지 않고 앉아 있다. 나는 그녀와 독대한다. 마치 환자

처럼. 아니 손님처럼. 환자, 아니 손님들이 채워주던 고독이 없다. 내가 그녀 고독의 일부

가 될 수 있을까.

간혹 병자, 이렇게 말해도 될까, 손님들은 책을 두고 가기도 했다. 자신의 생을 읽어주기

를 바라는 것처럼. 여의사가 건네는 질문에 대한 답이 그 책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이

자신의 알리바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부조하고 있다고 믿는 건 외롭고 가엾은 일이다. 한 권의

책을 한 번 읽는 일이 인생을 부감하는 일이라고 믿는 것

역시. 그러나 나의 이런 정의가 가장 외롭고 가엾은 것인

지도 모른다. 나는 인생이란 것이 아직도, 보다 고독하고

특별한 기간이리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소설로는, 시로

는 감당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나는 내심 그들을 비웃어

왔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 모든 인생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 그런 병든 자들을. 그러나 오늘, 손님들이 찾아오

지 않는 오늘 그녀와 독대한 내가 꺼내려는 이야기도 그런

것이다. 서두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한 여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이야.”

나는 라비크를 인용해, 여자를 사랑하는 일, 남자 일반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누구도 한 여자만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태도일까, 행위일까. 공시적일까, 통시적일까.

어떤 개념을 본떠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개념으로

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어떻게 행동되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걸 한다고 생각한다. 전제의 정합성을 의심하지도 않

은 채 우리는 멋대로 사랑 이후를 전개한다. 그러므로, 누구도 한 여자만 사랑하지 않는다.

그건 애초에 ‘언어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나는.

라비크와 마두, 쟌느 마두, 깔바도스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녀와 마주 앉은 오늘, 환자가

없는 지금, 우리가 소환할 수 있는 그들의 낭만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집어치우고, 나는 라비크를 본뜨고 그녀는 마두를 본뜬다.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가장 명확

한 개념 중 하나. 만들어진 인물. 그러나 그녀는, 라비크에게서 무엇을 봤던 걸까. 나는 이

미 알고 있다. 그녀가 무엇을 봤는지. 그녀가 조망하는 라비크의 전체상에 빠질 수 없는 것

들. 그런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것과 그런 남자를 사랑하겠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겠

지. 나는 라비크를 일부 모방해야 한다. 그는 환자가 마취되었을 때만 나타났다. 그는 사랑

인간으로서

송도의원에서

2012 + Spring

2012 + Spring

의 징후를 사실로 거둬들이지 않고, 마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사랑이다. 우리는 지금 현실에 있다.

비가 오는 송도, 고동 냄새가 나는,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붉은 동백꽃

이 자리한. 딱딱한 공간. 분명한 소리. 지상의 명확한 실체들. 생활의 징

후들. 거래 가능한 물건들. 개선문보다 분명한 기호들. 개선문은 라비크

에게 아무것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송도 의원에서, 내 주변

의 물건들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다. 결국 삶이다. 그녀가 유

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오늘 환자, 아니 손님이 없다. 그녀는 그들과 대화하고, 진단하고 처방

한다. 간혹 산파가 된다. 멋진 일이다. 아이를 밴 여자들을 살펴보고, 달

이 찰 때까지 함께 기다려준다는 것은. 비로소 아이가 아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꼴을 하고 세상에 튀어나오는 모습을 목격한다는 것도. 명쾌한 일이

다. 그녀 역시 아이를 배고, 그것을 낳았다. 산부인과 여의사. 멋진 조어

다. 일종의 영업장으로 의원을 운영해야 하는 부담과 관계없이, 산파로

서, 상담 선생으로서, 의사는 매력적인 이름이다. 그녀는 간혹 산파가 되

므로, 출산의 경험은 거듭된다. 현실적인 일이다. 그녀의 일은 현실적인 일이며, 물론 현실의

일이다.

나는 그녀가 지탱하는 현실에서 간혹 무력하게 누워 빗소리를 듣고, 이따금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할 시를 쓰고, 담배를 피울 뿐이다. 이것은 현실인가. 오늘 손님이 없고, 담배도 없다.

누군가 선물하는 척하면서 위탁하고 간 고독이 없다. 빗소리가 들려오는 날에는 더욱, 담배를

피우고 싶다. 폐색이 짙은 얼굴로, 짐승처럼 누워서. 가장 담배에 걸맞는 그런 모습으로. 빗소

리만 들으면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지렁이처럼, 가장 지렁이답게, 여하간 지렁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동작으로. 그것을 모방해서. 대개의 침상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풍긴다. 환자가 아닌,

손님도 아닌, 도스토예프스키나 운운하는 병자가 와서 내게 담배를 건네준다면 좋겠다. 깔바도

스, 그것을 맛보고 싶다.

이런 모습까지도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여주는 그녀, 그것이 나의 아내라면. 나의 현실은 그녀

를 통해 현실화된다. 내가 할 일은,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녀 고독의 일부가 되

어주는 일. 그것이리라고 확신한다. 그녀는 습관처럼 잔느 마두를 불러온다. 그것이 그녀가 표

현할 수 있는 고독의 임계점이리라고 생각한다. 빗소리는 소독약 냄새를 씻어주지 않는다. 서

로 다른 영역의 일이다. 그녀가 입은 흰 가운을 나는 입지 않는다. 그것도 서로 다른 영역의 일

이다. 현실의 라비크가 아닌 소설의 라비크를 일부 모방해서, 그녀가 인식하는 라비크의 낭만적

인 부분만을 부조하는 일. 라비크의 일부를 닮은 내가 마두의 전부를 닮은 그녀를 위로하는 일.

내가 할 일은 그것 같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잔느 마두를 닮았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으로서 이 이상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

22 + 23

한 장의 사진

시인의 서(書)

시인은 시를 쓰다가 막힘이 생기면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다

감흥이 떨어지면 먹을 갈았다.

조병화 시인의 서書에는 시인 특유의 방랑과

자유의 미감이 녹아 있는 듯하다.

차분한 먹색과 끊길 듯하다 다시 흐르는

운필運筆로 글씨를 쓰는 시인의 손.

저 붓끝에서 운雲자가 다 써지면

또 시인이 떠나온 어디인가에서

비가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시로 그리는 조병화

글 박민정

박 민 정

소설가. 1985년 서울 출생.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 오정석

+ 2524

명사가 만난 조병화

글 마종기

언제인가 조병화 시인의 처녀시집 『버리고 싶은 遺産』에

관한 연구나 비평문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

그 편지를 받고 저는 여러 가지로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째로, 저는 조병화 시인의 시에 대해 전문적인 연구를 해 본 적 없

고, 무엇보다도 저는 그때까지 다른 시인의 시나 시집에 대한 연

구논문은커녕 짧은 비평문 한 장도 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청탁이 저에게는 전연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또 확실한 것은 당시 그 청탁을 받은 후 2

주일 가까이 선생님 생각과 더불어 그 생기발랄하던 제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글을 쓰고 싶다고 밤을 지새우던 서울중학교·서울고등학교

시절, 몇 해의 전란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의 절망과 무질서 속에서 말도 안 되는 허황한 꿈

에 부풀어있던 저에게 용기를 주신 훌륭한 선생님의 한 본보기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문예반과 신문반을 휘돌며 한창 시건방져 있을 때 선생님의 혜화동 댁 서

재로 몇 번 찾아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파이프를 피우시며 선생님이 직접 그린

그림들과 럭비선수 시절의 사진과 많은 책들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리고 아마 그 한두 해가 제가 선생님을 가장 가까이 모셨던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문사를 맴돌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엉뚱하게도 의과대학에 가게 되었고 그

학업의 6년과 그 이후 군의관 3년간의 생활 중에는 선생님을 조용히 뵙고 인사드릴 시간도 얻

지 못했고, 선생님의 제자들 속에 끼어 말씀을 들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엉뚱하

게도 저는 미국에 오게 되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조병화 선생님의 첫 시집을 다시 꺼내 봅니다. 『버리고 싶은 遺産』은 1949년에 시인 김

기림 씨가 장정을 맡아 꾸미시고 출판사 산호장에서 출간한 1천 부 한정판 시집입니다.

철학개론일랑 말라

면사포를 벗어버린 목련이란다

지나간 남풍이 서러워

익잖은 추억같이 피었어라

-「목련화」 중에서

귀에 익은 구절들로 시작되는 이 처녀시집에는 선생님 청년기의 26편의 시가 실려 있

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시대가 2차 대전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그 혼란의 공백기 중에 새 정부

가 겨우 세워지고 아직도 정치적·경제적 아수라장이 계속되는 불안정한 시기에 명문으로 이름

난 일본의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선생님은 우리말로 한 편 한 편 시를 쓰고 계셨지요. 그

리고 아직 20대인 선생님이 선배나 스승의 뒷받침도 없이 스스로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세상

그의

처녀시집

고교시절의추억과

서울고등학교 재학 시절, 조병화 선생님과 필자

2012 + Spring

+ 2726

에 내어 놓은 것이 바로 처녀시집 『버리고 싶은 遺産』이 되었고 이것이 선생님의 긴 시업의 첫

발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우선 선생님의 첫 시집 제목인 『버리고 싶은 遺産』에 주목이 갑니다. 망해

버렸던 나라가 남의 힘에 의해서 겨우 생명을 건진 역사적 유산이 20대 청년이었던 선생님의

눈에 어떻게 보였던 것일까요. 조선조의 끊임없는 혼돈과 식민지 시대의 수난의 와중에서 서울

과 동경을 오가며 공부를 마친 이 시인에게 이런 정치적 혼란의 유산은 필요 없는 것이었고 거

기에 따르는 피폐한 이데올로기나 문화적 · 관습적 유산도 종국에는 버려져야 한다고, 그래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한 젊은 시인의 의지 같은 것을 이 시집의 제목에서 보게 됩니다. 그

래서 기왕의 억압된 정신적인 조락과 생활의 안이한 정착을 탈피하려는 용기 있는 계획이 이 의

미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자세의 시작이 결국은 모든 우여곡절의

생활 중에서도 선생님이 시를 잡고 시를 놓치지 않고 아직까지 시를 써 나갈 힘을 가지게 된 것

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집을 펴면 첫 페이지에 “이 작은 시집을 삼가 김준 님께 드리나이다.”라고 적혀 있습

니다. 물론 김준 님은 사모님의 성함이십니다. 자기의 첫 시집을 부모에게 바친다든지 이름 높

은 스승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사랑하는 부인에게 그것도 이름까지 밝혀서 헌정했다

는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선생님의 그 대담한 용기와 솔직성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

이 요즘이었다면 혹은 서양에서 그랬다면 크게 놀라거나 입에 오를 일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1940년도의 한국에서 감히 여인에게 책을 바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가 않았을 것은 너무나 당

연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선생님을 제가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선생님은 이렇게 자신

에게 언제나 솔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솔직함은 당신의 수십 년간의 시업에서 끊이지 않

고 이어온 생명력 같은 것이었습니다.

혹자는 선생님의 시에서 생활인의 시적 에스프리가 뛰어나다고 하고, 혹자는 시의 대상

을 평범한 곳에서 찾는 겸손을, 혹자는 그런 소재를 알기 쉽게 쓰기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인으로 손꼽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또 시인으로 존경하

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인생에 대한 그리고 문학에 대한 솔직성,

그 솔직한 감성을 선생님이 믿고 있는 시의 생성과정을 통해 의심 없이 담백하게 펼쳐내는 그 용

기,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지 않고 누가 뭐라고 하든 초지일관해서 믿는 대로 쓰고 그

시를 생활하는 선생님의 여린 듯하면서도 강인한 자기 주장, 자기 신념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향방 없이 기고만장해 하던 청년기 때의 저는 선생님의 시를 읽고 무

척이나 불만이 많았었습니다. 매번 사랑이니 고독이니 슬픔이니 하시고 이국정취의 나긋한 향

수 같은 데만 젖어 계시는 듯한 선생님이 공연히 짜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그랬을 정도니

고매하다는 딴 분들은 얼마나 했겠습니까. 우스운 소리 같지만 제가 만약에 선생님이었다면 그

런 말 계속 들어가면서 같은 톤과 같은 색채의 시들을 그렇게 오래, 그렇게 많이는 절대로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만한 신념이나 용기가 제게는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차츰 알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때때로 선생님의 시에 대한 악평과 놀림

의 시평을 보시고 괴로워하시다가도 다시 일어나 쓰시고, 의연한 자세로 몸을 다시 가다듬으셔

서, 참, 때때로는 너무나 고지식하게 꾸미지도 않고 잔재주 하나 부리지 않으시고 자기의 페이1 이 글은 『편운 조병화 시인』(정음사, 1981)에 실린 마종기 시인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편집자 주)

마 종 기

시인. 1939년 도쿄 출생.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교수 역임. 시집 『두 번째 겨울』, 『모여서 사

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늘의 맨살』 등. 편운

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등 수상.

명사가 만난 조병화

글 마종기

스를 찾아 한 편 한 편 나름대로 정성들여 쓰신 것을 보면, 선생님의 그 끈질김에 우선 압도당하

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든가, 시는 이래야 한다든가 하는 것은 선생님께는 어떻게 보면

거의 지엽적인 문제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는 아예 시 작업 그 자체가 인생이고 시

를 그 자체로 생활하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제가 한 가지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끈질김과 생활과의 일체감 속에서 자기의 시의 신념을 꺾지 않고 지켜 오신 선생님의 정신

적 승리 같은 것입니다.

『버리고 싶은 遺産』 이후 긴 세월동안 끊임없이 창작을 해오시면서 한국 시단에서의 질

시를 선생님은 나름대로 외롭게 이겨 내셨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시를 질타하던 그 몇 분이 오

히려 더 우스운 인생을 보냈다는 그런 비교에서가 아니라, 선생님 자신이 믿고 지켜온 시의 영

지가 선생님의 유니크한 색깔과 모양으로 정착되었고, 선생님이 아니면 딴 사람의 것이 될 수 없

는 그런 특별한 문학적 관계를 이루어 놓으신 이유 때문입니다.

화가에게는 유화만이 작품이 아니고 펜화도 수채화도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듯이, 구

상도 반구상도, 추상도, 팝아트도 그 나름대로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듯이, 비평을 하는 사람

들이 넓은 안목으로 작품 그 자체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인

이나 작가가 먼저 자기의 색깔을 지킬 줄 아는 준비와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껴 보게 됩니다.

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연락선이 왔다 간다는 항구로

남향열차는 쉴 새 없이 달렸습니다.

삼등실 좁은 차창에

빗물이 흐르고 흐르고

수족관에 뜬 어린 시같이

싹튼 보리밭이 보이고

-「옛 엽서」 중에서

또 『버리고 싶은 遺産』의 후기에는 사모님께 드리는 편지 형식을 빌려 이런 말을 쓰셨

습니다. “나는 다만 내 자신 속 깊이 자연히 생성하여 가는 그것을 살려고 애쓸 따름”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편운 선생님의 시를 보면 처녀시집 『버리고 싶은 遺産』에서 시작한 한 시인

의 긴 여정의 시와 언어가 이제는 아름다운 인간의 빛과 함께 병치되어 간 것을 볼 수가 있는 것

입니다.1

2012 + Spring

+ 292012 + Spring 28

시인의 수필

글 조병화

젊음, 그 고귀한 힘

봄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새로 시작이 되는 것으로 천지가 가득한 것이다. 얼마나 황홀한 새

로움인가. 모든 것이 약동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에 넘치고 있는 것이다. 빛, 빛, 빛, 새로운 빛

으로 눈부시게 자라고 있는 것들뿐이 아닌가. 그리고 모든 것이 솟아나는 생명들이 아닌가. 생

명의 창조들이 아닌가. 부지런히 부지런히 자라 오르는 생명, 그 꿈들이 아닌가. 꿈으로 온 천

지가 충만해서 호흡이 숨 가쁠 정도가 아닌가. 보이는 것이 꿈이요, 생명이요, 성장이요, 희열

이 아닌가. 들리는 것이 그것이요, 또한 느껴 오는 것들이 그것이 아닌가. 참으로 봄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교훈으로 가득 찬 희열의 계절인 것이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희열, 그 놀라움, 그 새로움,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닌가.

실로 삶은 꿈이다. 꿈이 있어야 삶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꿈이 있어야 삶의 보람을 느

낄 수 있는 것이다. 보람이 있는 곳에 인생이 있는 게 아닌가. 이것 없이는 모든 것이 허무, 바

로 그것이 아닌가.

인생의 허무, ‘시라는 것은 이 위대한 허무로부터 시작한다.’는 어느 외국 시인의 말을 기억

한다. 그러나 허무를 허무로 끝내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보람, 스스로가 내리는 위대한 만

족,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인간에게 만족이 있을까? 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보다 높은 만족, 보다 가

치 있는 만족, 보다 보람찬 만족을 향해서 매일매일, 우리 인간들은 노력을 하고, 쉬지 않고 일

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맑은 머리로 보다 많이 보고, 보다 많이 읽고, 보다 많이 생각하고, 보다 많이 만들고, 보다

많이 실천·행동하는 것 이외는 무슨 즐거움이, 그 보람이 있으랴.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허무를

이겨 나가는 또 하나의 위대한 작업인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 그림

영문법 책에서 ‘Spring has come, winter is gone.’이라는 문장을 본 기억이 있다. 그

러니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라 기억된다. 영어 독본 첫 페이지에 원색의 그림과 함께 아트지

에 인쇄되어 끼어 있었다.

봄 풍경이었다. 봄도 이른 봄, 연한 봄.

좁은 길이 있고, 길이 넘어간 둑이 있고, 둑 한편으론 개울이 흐르고, 둑엔 버드나무들, 이

른 봄의 파릇파릇한 녹색이 번지고 있는 연한 잎사귀들. 그리고 그 버드나무 사이사이로 보이

+ 3130

시인의 수필

글 조병화

2012 + Spring

는 둑 너머 넒은 하늘, 연한 푸른색이 아련한 그 깊이. 이러한 것들이 전개되어 있는 그러한 자

연의 한 구석, 그 풍경의 그림.

유화油畵였다. 그 당시엔 수채화인지 유화인지도 모르고 그저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 생각을 했

을 뿐이다. 물론 작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나 유심히 보아 두질 않았다. 그림의 제목도 적혀 있

었으나 그것에도 유심하질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그림이 좋아졌다. 끝없이, 끝없이 펼쳐 있는 연한 푸른 하늘. 그 하늘

에 날리고 있는 희끗희끗한 흰 구름. 이른 봄바람에 생글거리고 있는 버들 이파리들, 버들가지

들, 둑으로 둑 너머로 가늘게 길이 나 있는 가는 오솔길, 그리고 둑을 돌고 있는 시냇물……. 이

러한 풍경을 이 영어 독본을 꺼낼 때마다 한 번씩은 보고 넘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한

한 꿈을 허공에 던지곤 했다.

동경……. 꿈……. 확실히 이 그림은 나에게 영원한 방랑을 심어 주었다.

그림을 보는 것은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이

다. 자연도 아름답지만 이러한 천재들의 두뇌를 통해서 재창조되어 나오는 그 그림의 세계는 더

욱 더 아름답다. 그것은 무상의 희열을 우리 인간들에게 안겨 주곤 한다. 무한한 상상과 꿈과 동

경과 그 미지의 신비로움……. 이러한 것에 담뿍 취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이 따분한

현실에서 해방을 맛보게 해주고 휴식을 준다.

그 생생한 아름다움, 그 약동하는 기쁨, 그 청결한 순수의 생명……. 이러한 것들을 되찾게

해주곤 한다.

찔레꽃과 장미꽃

어느 날 장미넝쿨을 사라는 사람이 집에 들어왔다. 한창 동네 사람들이 나무를 사다 집에 심

을 무렵, 겨우 가지에 파릇파릇한 싹이 돋을 무렵이었다.

‘찔레나무가 아닙니까?’

내가 몇 번이고 물어도 그 사람은

‘장미넝쿨입니다.’

분명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꽃이 피면 알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의심이

많으냐고 오히려 되물어보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소박한 농부의 옷차림이었다.

아름다운 꽃을 사는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흐려서야 하는 마음에서 넝쿨을 달라는 대로 주고

샀다. 몇 주일이라는 시일이 지나는 동안 넝쿨 가지엔 봄이 지나가고 초여름이 돌아왔다. 뒤꼍

에 있는 아카시아 꽃들도 떨어지고, 살구 열매도 제법 통통하게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초여름,

넝쿨 넝쿨마다 꽃이 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꽃은 고향 울타리에서나 보던 찔레꽃이었지, 내가 바라던 장미꽃은 아니었다. 분명

히 장미넝쿨이어야 할 곳에서 찔레꽃이 속절없이 만발하기 시작했다. 꽃이 필 무렵엔 다시 온다

던 꽃장수, 뻐꾹새처럼 사라지고 다신 오지 않았다.

나는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장미넝쿨 장수, 아니 찔레꽃넝쿨 장수를 한때 마음속으로 미워했

다. 그러나 찔레꽃이 예쁘기도 하고 가엾어 보이기도해서 마음을 돌리곤 했었다. 이렇게 아름

다운 물건에도 거짓말 장수가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름다운 물건일수록 더 거짓말 장수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미넝쿨을 가지고 사기를 치다니……. 나는 그렇게 자책도 하고 원망도 하며 초여름이 오

는 것을 몇 해 더 지켜보았다. 그러던 것이 요즘 들어서는 찔레꽃넝쿨에서 찔레꽃이 피길 기다

린다. 2층에서 아침마다 이 찔레꽃넝쿨을 내려다보면서 자하문 밖에 산다던 그 농부, 어수룩하

게만 보였던 그 농부를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보았으면 하고, 그것은 무슨 악

의도 혹은 작은 분풀이의 마음도 아니다. 해마다 찔레꽃이 필 무렵이면 먼 산이 그리워지고, 먼

산이 그리워지면 먼 산 너머 고갯마루가 그리워지고, 고갯마루 저 편에서 들려오는 뻐꾹새, 그

울음이 그리워지는 까닭이다. 이러한 마음의 나는 오히려 장미꽃보다 찔레꽃을 더 사랑하고 있

는지도 모른다.

외로운 사람끼리

나는 내 연대年代를 지나가기 위하여 휴식이 있어야 했다. 휴식은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은 결

코 행복한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사랑은 생명을 지닌 외로운 사람들에게 삶의 소중한 힘을 주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은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 같이 살아가는 그것은

대단히 고마운 정인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의 목소리에선 항시 신비스러운 우리들의 말들이 묻

어 나온다.

‘쓸쓸한 적막에 인생은 그저 사랑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 외로운 당신 방에서 쉬었다 갑니

다.’ 하고.

+ 3332

편운문학상 시터

제9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본상 수상자

편운문학상 시터

제9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본상 수상자

시작노트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본능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 ‘무지無知’를 ‘운명’이라는 끈으로 비끌어 매고, 카뮈는 햇빛 속에 그것

을 적나라하게 끌어내 ‘부조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동양권에서는 요행이도 그 피난처가 될 수 있는 ‘여백餘白’이라는 것이 있다.

결국 내가 아직도 시라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도, 그런 피난처를 찾지 못한채 아직도 필사적으로 헤매고 있다는 의미

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이 제 하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홍익대 조각과, 서양학과 수학. 1958년 『현대문학』에 시가, 1960년 『한국일보』에 소설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문예』

편집위원, 월간 『수상隨想』, 『미술춘추』 주간, 명지대 겸임 교수 등을 역임했다.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시선집 『빈 들판』, 소설 『나그네

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광화사』 등 여러 책을 썼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2 + Spring

편운문학상 시터

글 우수상

+ 3534 2012 + Spring + 35

편운문학상 시터

제9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신인상 수상자

시작노트

모든 시인은 단 한편의 시를 꿈꾸며 살아간다. 사물을 가장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는 완벽한 언어의 구조물을 짓기 위하여 기다

린다. 어느 날 불현듯 나를 찾아 올 어떤 미지의 세계를 끈기 있게 기다린다. 가마솥으로 밥을 지을 때 맛이 좋은 밥을 지으려면 뜸

들이기를 잘 해야 한다. 뜸들이기는 경험도 필요하겠지만 아무 생각 없는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시는 기다림인 것이다.

박 영 호

1947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및 동대학원 수료. 199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산길에서 중얼거리다』 등. 편운문학상 등 수상.

편운문학상 시터

제9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신인상 수상자

2012 + Spring

+ 3736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글 유재영

혜화동의 전설

선생은 천천히 혜화동 길을 걸어 내려오셨다. 베레모 각

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잠시 실비집 유리창에 얼굴을

비춰 모자의 위치를 바로 잡고 다시 200미터쯤 지나 동양서

점 앞에 이르러 구두 수선집에 들어가 낡고 조금은 투박한

구두코를 내밀었다.

“어이쿠! 이건 밑창까지 바꾸셔야겠는데요.”

“아무렴 어떤가, 이런 가을날엔 낡은 구두가 제격이야”

중년의 나이를 훨씬 넘겼음직한 수선공은 이미 짐작이라

도 하고 있었듯이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헝겊을 손에 말

아 쥐었다.

“점심도 안 드신 모양이군, 웬 군고구만가?”

“웬걸요, 조금 전에 황금찬 선생님이 다녀가셨는걸요.”

“그 양반 좀 어떠시데……”

“아직도 걸음걸이는 여전하신 걸요. 눈이 조금씩 흐려져

돋보기 도수 자꾸 올라가 걱정이라고 하시데요.”

“장욱진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이 혜화동이 이렇

지는 않았는데.”

“혜화동이 뭐 어때서…… 그러고 보니 실비집 할망구의

<허공>도 들어본 지가 꽤 오래되긴 됐네……. 허허”

“실비집도 내놓은 지가 오래 되었는 걸요…… 요즘엔 웬

젊은 것들이 들어와 버릇없이 노는 꼴 보기 싫어 아예 다 정

리하고 떠날 요량 같습니다.”

구두 수선집을 나와 다시 건널목에서 누군가와 눈인사를

나누고 동성학교 정문을 지나 건베이元坪집을 지나 이른 곳은

초밥 집 석정石井이었다. 이미 2층에는 김재홍 경희대 교수,

김종철 시인, SBS 앵커이자 시인인 유자효가 와 있었다. 한

쪽에 베레모를 벗어 놓으신 선생은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우리들이 한참 떠드는 동안 창밖에는 가을 어둠이 내려앉고

이윽고 선생의 흑장미 빛 파이프에서는 오랜 고요 같은 보랏

빛 연기가 향기롭게 퍼져나갔다.

몇 순배 따끈히 데운 정종이 돌고 김재홍 교수의 <목련화>

도 끝나가자 선생은 가벼운 이별처럼 진곤색 버버리를 챙겨

입으셨다. 이것으로 오늘 하루의 대학로 특강도 끝난 것이

다. 이윽고 혜화동 어둠 속을 향해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절

제와 엄숙한 한 시인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의 어깨 위로 커

다란 마른 잎 하나가 전설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왠지 가볍

지만 무거워 보였다.

편운 선생과 장정裝丁에 얽힌 이야기

내가 출판사 어문각에서 편집을 맡아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어문각은 편집 직원만 몇 십 명이 넘는 국내 굴지의 출

판사였다. 서른 살 남짓 나이에 잡지, 단행본, 문학전집, 어

린이 도서까지 편집 책임을 맡아 기획에서 디자인까지 총체

적으로 진행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업무상 실수가 나곤

했다. 당시 세 살 나이의 아들 녀석이 어느 날 아빠인 나를

몰라보는 일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

는 일이었다.

선생의 에세이집은 출판사가 야심차게 기획한 한국대표에

세이 중 한 권이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초판을 보통 5천 부

씩 찍었을 때였으니 교정, 제본, 장정 등에 상당한 신경을

써야만 했다. 어쨌든 조병화 에세이가 출판되자 서점에서 주

문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미처 선생께 출간된 책을 갖다드리

기 전에 재판을 준비할 지경에 이르렀다. 초판본 몇 권을 챙

겨들고 선생의 연구실에 찾아가 책을 보여드리는 순간. 바

로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표지 한자가 조병화 趙炳華로

되어있어야 할 것이 趙柄華로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

니까 불꽃 병 ‘炳’자가 자루 병 ‘柄’자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대형 사고였다. ‘이거 죽었구나’ 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나에게 뜻밖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유 군, 너무 걱정 말게 책이란 오자가 좀 있어야 재미가

있거든, 조병화가 한 두 권 책을 낸 사람인가 ”

“선생님…… 제가 죽일 놈입니다.”

“그런 소리 말게 내가 읽었던 성경도 오자투성이였고 공자

님 논어도 오자투성이였네, 하물며…… 허허허”

아마 그날 늦게까지 인근 술집에서 선생과 정종 대포를 마

셨는데 얼마나 송구스러웠든지 안주가 대구 머리였다는 것

과 나는 취했고 헤어질 때 선생의 손은 참으로 따뜻하고 부

드러웠다는 기억 밖에는 없었다.

대인이란 이런 것인가. 어느 출판사에서 첫 시집 냈을 때

한두 개 오자를 보고 얼굴을 붉혔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졌

다. 그런 일이 있었고 나서 나는 지금껏 편집자로 살아오면

서 교정의 오류로 직원들을 나무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뒤로도 선생의 시집과 수필집 등 네 권의 표지 디자인

을 해드렸는데 그 때마다 칭찬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중 문학수첩에서 나온 시집 『내일로 가는 밤길에서』를

받아보시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관상쟁이가 관

두 개의삽화 두 개의

감동

2012 + Spring

2012 + Spring

사랑은 늘 이별을 담보로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결한 사랑이라도 죽음은

그 숭고함에 반드시 균열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한 번 뿐인 생은

“어차피 가는/여정”일지 모르고, 해서

어차피 “외로운 당신 방에서 쉬었다”

가는 것은 이번 생의 가장 가치 있는

행위일지 모릅니다. 때문에 시인은

“인생에 정을 주고 거두지 않은 채”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고도 거두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말하는 최고의

휴식이자 최고의 안락일 것입니다.

다시 읽는 조병화 시Ⅱ

해설 임경섭

임 경 섭

시인. 1981년 원주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동대학원 수료.

200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38 + 39

상을 볼 때 ‘열흘을 함께 살라’는 말이 있다. 거기에는 그 사

람의 잠버릇부터 행동 하나하나까지 관찰한 다음 미래를 예

측하는 것이지 겉으로 얼굴만 보고 아니면 그만이란 식으로

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북 디자인도 마찬가지이

다. 나의 오랜 경험으로는 작가나 시인의 성향을 알기 위해

술도 함께 마시고 여행도 하고 오래도록 교류가 있어야 그

사람의 냄새가 나는 디자인이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의 특징 중 하나가 가는 선의 자화상과

사인이다. 특히 굵직하게 흘림체로 쓴 사인은 매력도 있거

니와 시각적으로 품격이 느껴진다. 『내일로 가는 밤길에서』

의 표지를 보신 이는 알겠지만 표지의 앞과 뒷면을 영문 서

명인 B. H. Cho로 아래부분을 꽉 채워 균형을 잡어 주었

다. 한글 사인도 좋아서 사용한 적도 있는데 그림 솜씨가 뛰

어난 선생은 이런 나의 파격적 구도를 특별히 좋아하셨다.

어느 봄날이었다. 우연히 광화문 교보문고 앞을 지나다

뜻밖의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교보문고에서는 건물 벽에

그때그때 맞는 좋은 글귀를 뽑아 플래카드로 크게 내 걸고

있는데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의 문장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 시선을 사로잡는 낮선 한 구절이 있었다.

‘더도 덜도 말고 봄만큼만 부지런 하라’ 누가 저런 거침없

는 표현을 했는가. 며칠 동안 궁금하다가 선생의 작품 중 일

부임을 떠올리고 감동을 주는 글이란 어려운 수사에서 나오

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삶의 짧은 말 한 마디가 만들

어 준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평

범한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봄’이라는 단어였다. ‘봄만큼만

부지런 하라’니 다시 생각해 볼수록 곱씹어지는 문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문장은 선생의 시 한 부분이자 선생

의 어머니인 진종 여사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더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의 어머니는 천성이 시인이셨으

리라. 선생이 그리도 그리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나 편운문학상을 타고 나는 한 편의 시를 선생의 영

전에 남겼다.

도미회를 잘 한다는

대학로 2층 초밥집 石井

김재홍, 김종철, 유재영

늦께 도착한 유자효와 이숭원

후래자 3배를 나누는 동안

베레모를 벗어 놓으신 채

선생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

그 날 지구에서

<패각> 하나 달랑 들고

외로운 시인이 왔다고

밤새 웅성대는 별이 있었다

데워 놓은 청주가

채 식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파이프엔

보랏빛 연기가

절반쯤 남아 있는데

*패각 ; 조병화의 시집 『패각의 침실』이 있음

-유재영,「시인」 전문

유 재 영

시인, 북디자이너. 1948년 충남 천안 출생. 1973년 시 박목월, 시조 이태극 선생 추천으로 등단. 시집 『한 방울의 피』, 『지상의 중심이 되어』, 『고욤꽃 떨어지는

소리』, 시조집 『햇빛 시간』, 『절반의 고요』 등. 이호우 문학상, 중앙일보 시조대상, 편운문학상, 가람상 등 수상.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글 유재영

+ 4140

조병화문학관 소장품전

글 조진형

시인이 시를 통해 자신

의 생애를 간단하게 요약

한 시입니다. 시에서 보

면 럭비는 조병화 시인의

청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나 봅니다.

평소 부지런하고 굳건했

던 시인의 성격은 젊은 시절 경험한 럭비가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조병화 시인은 미동공립보통학교지금의 미동초등학

교 시절부터 학교 릴레이 육상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면

서도 학년 수석을 놓치는 법이 없어 곧 명문으로 소문난 경

성사범학교 보통과에 진학을 하게 됩니다. 시인과 럭비의 만

남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경성사범학교는 일본인 80

명, 조선인 20명의 비율로 선발을 하던 학교였습니다. 당시

이 학교에서는 운동부 한 곳과 학술부 한 곳에 꼭 가입해야

했는데 시인은 운동부로는 육상부에, 학술부로는 미술부에

들어갔습니다. 육상부에서는 단거리종목인 2백 미터와 4백

미터를 연습했고, 미술부에서는 기초적인 실기를 상급생들

에 끼어 공부했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럭비부에서 부원

모집을 했는데 주력이 빠르다는 이유로 시인은 럭비부에 거

의 강제로 입회를 하게 됩니다. 시인이 럭비공이 타원형이

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때의 일입니다.

“경성사범학교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럭비 학교였다. 나

는 몰랐지만 내가 들어가기 전에 전 일본에서 3년을 연

거푸 우승을 한 강한 럭비 스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럭

비라면 양정·배재학교, 그리고 전문학교로선 보성전문

학교를 꼽는다. 그러나 그 당시엔 가장 강한 팀이 경성

사범학교였다.

나는 이러한 강한 팀의 윙으로 3학년부터 시합에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2학년부터는 자연히 미술부 생활은 중단

되었고, 교실과 기숙사·운동장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

였다. 참으로 시간이 귀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는 동안 일본 원정도 하고 요즘말로 크게 매스컴도

타고, 한 점 후회 없이 럭비를 통해 운동부 생활도 만끽

했다. 그 충만. 그 자신. 그 멋. 흔히들 말하길 요즘 운동선

수들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시대·사회·

환경 모든 것이 다 달라졌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었

다. 공부는 공부대로 시합하는 것처럼 열심히 하고, 운

동은 운동대로 우승을 목표로 열심히 했다. 제 자랑하

는 사람을 보고 ‘네가 양주동 박사냐’ 하는 말이 있지만,

이러한 맹렬한 운동생활 속에서도 좀 부끄러운 말로 전

학년 내내 수석을 했다. 운동과 공부, 그리고 자기 미래

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 그러한 것이 고학년에 올라갈수

록 심해져갔다.

- 「나의 20대」 중에서 (『구름이 흘린 것들』

현대문학사, 1985.)

이후 시인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로 진학합니다.

이 학교로의 진학은 훗날 시인이 ‘인생의 한 봉우리를 정복

한 기분’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기념비적인 일이었습니다. 조

선인은 몇 명 뽑지도 않았고 당시 일본에서도 수재들만 모이

는 학교인 까닭에 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시인은 이 학교로

진학이 결정되자마자 운동은 접어두고 공부에만 열중하겠다

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경성사범학교 선생이며, 럭비

감독으로 있었던 ‘시오사끼’라는 분이 동경고사 합격기념으

로 자기의 럭비유니폼을 내주며 ‘동경고사에서도 꼭 럭비를

해주길’ 하던 그 부탁 때문에, 그리고 의리 때문에 시인은 다

시 그곳에서도 럭비 선수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리화학 전

공의 특성상 강의실과 실험실을 분주하게 오가는 중에서도

시인은 럭비공을 들고 운동장을 달렸습니다.

“사실 내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경고등사범학

교 이과에 가서도 계속 럭비 선수 생활을 한 것은 시오

사끼 선생과의 의리 때문이었고, 내가 또한 럭비의 운동

정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은 그만큼

풍부했었고, 건강했었고, 낭만에 가득 찬 청춘의 풀밭이

었었다. 때문에 지금 이 자리 현실생활을 하면서도, 그때

그 당시를 회상함에 충족하고, 즐겁고, 후회 없고, 마냥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노 장군 같은 생각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운동을 장려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는 그러한 운동선수와 스포츠만은 싫어한다. 스포

츠는 어디까지나 인생의 멋이며 내지는 낭만이며, 즐거

움이지, 그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나 캠

브릿지의 운동선수들은 각과 B학점 이상이어야 선수될

자격이 있다고 한다. 사실 이래야만 멋있는 라가요, 선수

럭비는

시인의 청 춘

조병화문학관 전시실 한 가운데에는 럭비 관련 물건들로 채워진

진열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시인의 손때가 묻은 럭비공, 유니폼, 럭비 기념

브로치, 럭비와 관련된 시인의 사진 등 다양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인의 럭비에 대한 애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조병화

시인의 시 한 편을 떠올려 봅니다.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니는 나의 종교

- 「나의 생애」 중에서 (『아내의 방』, 동문선, 1997.)

동경고등사범학교 럭비부 브로치

2012 + Spring

2012 + Spring 42 + 43

조병화문학관 소장품전

글 조진형

요, 스포츠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밥통은 아무리

운동을 했댔자 멋이 나지 않는 법, 무식하게 기운만 세어

도 소용이 없다. 스포츠는 힘이 아니다. 스포츠는 힘을

만들고, 힘을 절약하며, 힘을 사용하며, 힘을 이용함으로

서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인생의 미를 창조하는데 그

멋이 있는 법이다. (……) 스포츠맨의 멋진 인격, 애써서

쌓아올린 그 고귀하고 멋있는 품격, 좀처럼 가질 수 없는

그 멋있는 격, 오랜 세월이 걸려서 비로소 나타나는 그 멋

있는 격, 그 격을 스스로 땅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에선 그 스포츠맨 자신들이다.

그 수많은 시합에서, 그 수많은 선수들 사이에서, 그 수

많은 용기와 멋과, 기로서 쌓아올린 그 육체와 그 두되

와 그 격, 그것 같이 자랑스러운 인생의 명예가 어디 있

는가, 그 멋과 명예는 아는 사람만이 알고 바른 스포츠맨

이 아는 법이다. 사실 깡통들은 그 스스로의 멋을 모르는

법이다. 체육회의 싸움이나 어느 협회의 싸움 같은 것을

신문지상에서 볼 때 마다 그들의 꼴이 눈에 선해서 참으

로 한심스러운 때가 많다. 스포츠맨쉽이 무엇인가, 스포

츠맨 스피리트가 무엇인가, 스포츠맨의 멋이 무엇인가

를 알지도 못하고 그저 힘으로 스포츠를 한 사람들. 정신

으로 스포츠는 할 것이다. 그 멋을 알고, 그 멋을 위하여

스포츠를 할 것이다. 가장 의리가 있어야 할 스포츠맨이

가장 의리가 없고, 가장 정직해야 할 스포츠맨이 가장 정

직하지 못하고, 가장 판단이 옳아야할 스포츠맨이 가장

판단이 무디고, 가장 예리해야할 스포츠맨이 가장 예리

치 못하고 가장 신사적이어야 할 스포츠맨이 가장 신사

적이 못되는 내가 과거 이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니까

까불지 마, 하는 식의 힘의 깡통 스포츠맨은 좀 곤란하다

는 말이다. (……) 시합은 멋있는 팀하고 해야 멋이 나고

다치지도 않는다. 또한 세련된 팀 하고 해야 그 세련됨이

나타나고 다치지도 않는다. 또한 노련한 팀하고 해야 맛

이 나고 그 묘미를 깨닫고 다치지도 않는다.”

- 「럭비와 더불어 나의 청춘을」 중에서

(『나의 생애』 도서출판 영하, 1994.)

해방 후에도 시인은 대한럭비축구협회 이사로 도·시 대

항 서울 팀, 혹은 인천 팀의 선수로 럭비와의 인연을 이어

가게 됩니다. 서울 사대 럭비 감독을 지냈고 제물포고등학

교에 근무할 때에는 럭비부를 창설시켰으며 서울고등학교

에서도 럭비부를 창설, 우승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후 경

희대학교에서는 럭비부 부장을 역임했고 노년의 나이에 인

하대학교에 가서도 럭비부 창설을 꿈꾸며 학교 운동장에 럭

비 골대를 높이 세우곤 했습니다. 시인은 럭비의 원초적인

남성성, 단결, 희생, 속도감, 직선감, 지성감 등을 사랑했

나 봅니다. 늘 ‘감동의 율동, 직선의 율동’이라 럭비를 칭하

며 아꼈습니다.

1990년대부터는 케이블 방송 채널이 많이 늘어 럭비 경

기가 제법 자주 중계되었습니다. 주로 호주에서 벌어지는 럭

비 경기들이 자주 소개되었습니다. 평소 TV를 보지 않았던

조병화 시인도 이 럭비 중계만은 즐겨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2002년 11월, 절필 선언 이후 두 달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

간을 병원에서 보내며 마지막 순간을 아무 후회 없이 순수하

게 받아들인 것도 럭비를 통해 배양된 시인의 스포츠맨십과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 진 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현재 세종대학교 교수.

경성사범학교 럭비부 시절 전시실 내 럭비 전시장 일본동경 ‘不惑’ 팀과의 친선 경기

조병화문학관에서

장차 우리 시단을

이끌어 나갈

새로운 시인을 찾습니다!

일 시

2012. 5. 12토

오전 11시 ~ 오후 4시

당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공영주차장 출발

조병화문학관까지 교통편 제공. 점심 제공.

장소

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337번지

참가자격

예심에 통과한 미 등단 신인

참가방법

조병화문학관 홈페이지(www.poetcho.com)에서

참가신청서 양식을 다운받아

작품 2편과 함께 4월 20일(금)까지 우편이나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과거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을

대상으로 하며 주제는 자유입니다.

예심통과자는 E-mail로 개별 통보해 드리며

5월 12일(토) 열리는 백일장에 참가할

자격을 갖습니다.

예심작품 보내실 곳

우편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2-1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편운시백일장 담당자 앞

[email protected]

백일장 영예의 수상자에게는

아래와 같이 상금과 상장이 수여되며

장원수상작은 『꿈』 2012 가을호에

게재합니다.

장원 1명 상금 50만 원 및 상장

차상 1명 상금 30만 원 및 상장

차하 1명 상금 20만 원 및 상장

가작 5명 상품 및 상장

제 7 회편 운 시백 일 장

명예회장 김영수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회장 박철원 (주)에스텍시스템 회장

부회장 허영자 시인ㆍ성신여대 명예교수

감사 황상현 법부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고문 김양수 문학평론가

성춘복 시인

신봉승 작가ㆍ예술원 회원

이사 강대신 정원산업 회장

김삼주 시인ㆍ경원대 교수

김재홍 문학평론가ㆍ경희대교수

김종회 문학평론가ㆍ경희대교수

노정익 전 현대상선 사장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 회장

이병규 문화일보 사장

이완섭 (주)세이프라인 회장

이재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황영기 차병원그룹 부회장

Ⅰ편운 회원Ⅰ

강대신 (100만원)ㆍ김영수 (30만원)ㆍ김유항 (20만원)ㆍ박철원 (300만원)ㆍ이재후 (100만원)ㆍ조창환-영화기업 (100만원)

조성환 (300만원)ㆍ조진형 (1700만원)ㆍ허영자 (50만원)ㆍ홍성호 (100만원)ㆍ황상현 (100만원)ㆍ황영기 (100만원)

Ⅰ꿈 회원Ⅰ

강창희 (30만원)ㆍ김소원 (10만원)ㆍ김정일 (30만원)ㆍ박대열 (30만원)ㆍ박순화 (30만원)ㆍ박종규 (30만원)ㆍ이명규 (30만원)

장부웅 (30만원)ㆍ정영우 (50만원)ㆍ정준명 (30만원)

Ⅰ사랑 회원Ⅰ

김기인 (20만원)ㆍ김진성 (20만원)ㆍ김현곤 (20만원)ㆍ박병근 (20만원)ㆍ박현호 (24만원)ㆍ안창모 (20만원)ㆍ이규호 (20만원)

정구호 (20만원)ㆍ조성걸 (24만원)ㆍ주동설 (20만원)ㆍ최명안 (20만원)

Ⅰ멋 회원Ⅰ

고연수 (10만원)ㆍ고희수 (10만원)ㆍ권광중 (10만원)ㆍ김광영 (10만원)ㆍ김미란 (10만원)ㆍ김석진 (10만원)ㆍ김영남 (10만원)

김종환 (10만원)ㆍ김헌출 (10만원)ㆍ김현수 (10만원)ㆍ문창욱 (10만원)ㆍ박근준 (10만원)ㆍ박민규 (10만원)ㆍ박태흥 (10만원)

백인기 (10만원)ㆍ서경석 (10만원)ㆍ서석인 (10만원)ㆍ성낙현 (10만원)ㆍ손순자 (10만원)ㆍ송충석 (10만원)ㆍ신동성 (10만원)

신동욱 (10만원)ㆍ유범준 (10만원)ㆍ윤진석 (12만원)ㆍ이문희 (10만원)ㆍ이순재 (10만원)ㆍ이용기 (10만원)ㆍ이재복 (10만원)

이혜숙 (10만원)ㆍ이희자 (10만원)ㆍ임동승 (10만원)ㆍ임두영 (10만원)ㆍ정성화 (10만원)ㆍ정영기 (10만원)ㆍ정태경 (10만원)

조해인 (10만원)ㆍ주기영 (10만원)ㆍ차진도 (10만원)ㆍ최승범 (10만원)ㆍ최일곤 (10만원)ㆍ하미혜 (10만원)ㆍ한광석 (10만원)

한중진 (10만원)

Ⅰ기업 회원Ⅰ

(주)동아일렉콤 (400만원)ㆍ(주)웰빙테크 (200만원)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임원진귀하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간의 숙명적 본질인 고독과 허무에 맞서 반세기에 걸친

시작활동을 전개했던 우리 대표시인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성실성으로 후학들을 교육한 교육자이자 1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자 10여

회의 미술개인전을 연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교육계와 문단에서 이 땅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 법조계와 기업계 등 각 분야에서도 정치ㆍ경제ㆍ사

회ㆍ발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많은 독자들은 현대

적 삶 속에서도 그분의 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 꿈과 사랑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에 본인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모여 2006년 10월 사단법인을 설립했습니

다. 저희 법인에서는 기존에 유족들이 운영해 오던 편운문학상과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 할 수 있

는 여러 사업을 펴나갈 예정입니다.

귀하께서도 저희의 뜻에 동참하셔서 이 뜻 깊은 기념사업을 함께 이루어 주시

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꿈을 담아 주신 분들입니다.(2011년 1월 ~ 12월 후원 내역)고향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고향을 빛낸다

전시개막

2012. 5. 12토요일 오전 11시

전시기간 및 장소

2012. 5. 12 - 10. 31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 작은 마을 난실리에 꿈 많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보다 많은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발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은 책으로, 상상으로. 소년은 그림을 좋아했다.

자연과 인생은 그대로 소년의 교실이었다. 소년은 몸은 약했지만

달리기를 잘했다. 상급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육상경기부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럭비부에 발탁되어 선수생활을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지고 이기고 수 백번을 했다.

소년은 어느덧 자라서 청년이 되어 그 먼 꿈을 잡으려 바다를 건넜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어두운 시대 일본 식민지 조선인 학생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이 나고 돌아온 조국은 그립던

조국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이데올로기의 패싸움판.

청년이 된 꿈 많던 소년은 모든 유산을 버리고 시 속으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위안처럼 구원처럼.

소년은 가진 것 하나 없이 이 세상 나와서 돈들이지 않고

공부도 하고, 교수도 되고, 시도 누구보다 많이 써 굵은 상도

많이 타고, 태어난 고향도 문화마을이 되었다.

노인이 된 꿈 많던 소년은 그 많은 은혜를 다 합쳐 보답하기

위하여 문학상을 만들고, 문학관을 마련하고 다시 빈손으로

어머니 곁에 돌아와 영원히 누웠다.

회원가입신청서 및 약정서

절취

개인 회원

이 름 (남 / 여) 주민등록번호:

전 화 자택 직장

FAX:

휴대전화 E-mail:

주 소 자택 직장

후원종류

CMS매월납부

1만원(멋회원) 2만원(사랑회원) 3만원(꿈회원)

10만원(편운회원) 직접입력 _____________원

연간일시납부

10만원(멋회원) 20만원(사랑회원) 30만원(꿈회원)

100만원(편운회원) 직접입력 _____________원

기업/단체 회원

기업/단체명 사업자등록번호:

주 소

대표자이름 팩 스:

전화 이메일:

담당자이름 소 속:

전화 이메일:

후원종류

CMS매월납부

10만원(멋회원) 50만원(사랑회원) 100만원(꿈회원)

직접입력 _____________원

연간일시납부

100만원(멋회원) 500만원(사랑회원) 1000만원(꿈회원)

직접입력 _____________원

연간일시납입금은행

신한은행 100-024-522606 예금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우리은행 1005-901-100722 예금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후원금 CMS(Cash Management Service) 자동이체 동의서

CMS는 금융결제원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가 계약을 맺고 자동이체 출금을 의뢰하는 납부방식입니다. CMS 자동이체를 신청하시면 희원님이 직접 은행에 가시는 번거로움 없이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으며 출금 수수료가 들지 않습니다.

예금주 이름 예금주 주민등록번호

출금 은행 계좌번호

이체 금액 월 원 출금일 선택 10일 25일

본인은 위와 같이 CMS 출금이체를 이용하여 후원금을 납부하는데 동의합니다.

2012년 월 일 이름 (인)

위 사항과 같이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를 후원할 것을 약속하며, 귀 사업회의 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2012년 월 일 후 원 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인)

조병화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poetcho.com 에서도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110-530) 전화. 02-762-0658 팩스. 02-3673-0436 Email. [email protected]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Cho ByungHwa Foundation

우편

Fax 발

송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