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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3일~2월 11일 13특 집
많은 예술가들이 글, 그림, 음악, 몸을 도
구 삼아 자신들을 표현해 왔고 그런 작업
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오로지 스스로를
중심에 세워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관계 안에서의 자신을 바라보
는 시점을 표현하기도 한다.
자화상은 이처럼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뚜렷한 정의는 없는셈이다. 공통점이라면,
자신의 삶이 투영되고 자신의 사상에 기반
한다는 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
유(思惟)의 순간에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가 된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대변하려 한다.
필자 또한 이와 비슷한 생각에서 출발해
그림을 시작했다. 필자가 중학생 시절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순
간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놀
라움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저렇게 까
지 표현 할 수 있을까?” 너무 노골적이고
야한듯하지만, 그것의 이면이 보이는 것
도 같았다.
누군가는 해당작품의 작가를 성애자, 정
신분열증 환자, 변태 등 갖은 치욕스런 수
식어로 그를 멸시하고 있지만 어린 필자의
눈과 마음은 조금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그의 고통이 내
뼛속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시의 그것이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기
를 바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작
품은 28세 젊은 나이에 스페인 독감으로
일찍 생을 마감한 드로잉 천재 ‘에곤실레’
의 작품이다.
그의 자화상을 보자. 무엇이 느껴지는가.
해석은 각자의 몫이지만, 지나치게 부정적
으로 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삶
이 어땠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도 있겠다.
오곤실레는 일찍이 아버지와 형을 잃었
다. 그것도 매독이라는 성병으로 인한 죽음
이었다. 지극히도 사랑했던 가족을 매독으
로 잃은 그의 허탈감은 얼마나 컸을까.
그래서 한평생 죽음과 성(性)이라는 의
미가 그에겐 굉장히 두려운 공포 그 자체
로 작용했을 것이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고독한 외침, 그리고
그로인한 울림이 느껴진다.
혹여 그의 그림을 보고 그를 섹스(sex)
광으로 봤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인간의
적나라한 몸을 비틀린 선으로 비정상적이
게 그려내면서 죽음과 성(性)을 불가피한
유기적 관계로 표현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림 그렸을 오곤실레의 모습을 상상해 보
자. 표정, 몸짓.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것
이 없다. ‘약에라도 취해있나?’ 싶을 정도지
만 그는 온전한 정신으로 그림을 그려냈다
고 한다.
불안하고 튀틀린 선에서 그의 두려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죽음과 성(性)은 그의 삶
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피하고픈 처절
한 몸부림이자 두려움을 화폭에 그대로 담
아낸 듯하다. 작품 속에 그려진 그의 눈을
보라. 그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
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모든
생명의 깊이에 침잠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
러나 나를 원수 다루듯 사슬로 묶어 나 자
신의 것이 아닌 삶으로, 즉 하찮은 가치밖
에는 지니지 않고 그저 실리적일 뿐인, 예
술이 결여되어 있고 신이 부재하는 삶으로
나를 몰아넣고자 하는 강제를 혐오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
앉기를 원한다”
-1912년 4윌 27일 옥중에서-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자화상을 보자.
누구나 한번쯤은 봤을법한 작품, 자화상
하면 단연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윤두
서의 자화상 일 것이다. 작품 속에 그려진
그의 강직한 눈빛. 범의 모습을 한 그의 모
습은 당장이라도 보는 이를 해칠듯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하
지 않는가? 먼저 조선시대 그려졌던 다른
자화상들을 보자. 확연하게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 윤두서, 그는 선비였음에도 선비
다운 차림새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얼굴에
만 집중해 그렸다. 왜 그랬을까?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22세에 아내와의
사별을 시작으로 26년 동안 가족들과 친구
들이 무려 아홉 명이나 죽었다. 그리고 진
실이 왜곡된 역모에 휘말려 관모를 쓰지도
못했던 윤두서.
그는 시대가 낳은 비운의 선비였을 터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과 정치적 소용돌
이가 만연했던 윤두서의 삶. 그때문에 30
세에 이미 백발이 되었다고 전해지니 얼마
나 고단한 삶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그의 아들인 윤덕희(1685~1766) 그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가 훤칠한 키에
도량이 넓어서 나이가 어렸을 때에도 사람
들이 함부로 하지 못했고, 용모와 말씨가
중후하고 존엄하여 자연히 주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이밖에도 윤두서를 기록한
글은 더 있다.
공재 윤두서 행장(行狀)중에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묵은 빚 문서를 태워
버렸다”고 전하고, 시행장에는 “감정을 억
제하고 슬픔을 줄이려 하니, 머리가 반백이
되었으리...”고 전한다.
그를 묘사한 글과 그가 지은 시에서 그
의 인품이 느껴지지 않는가? 자중자애(自
重自愛). 자비(自卑)와 애민(愛民)의 마음
으로 시대적 답답함을 시와 그림을 통해
스스로 위안하면서 그 안에는 강한 의지와
다짐이 그의 눈빛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윤두서는 45세 자화상을 끝
으로 3년뒤 감기로 세상을 등진다. 그림으
로 그려내는 자화상은 사진의 그것과는 많
이 다르다.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다 녹여내어 눈빛,
입의 모양 그리고 배경 까지도 허투로 그
리지 않는다. 그가 죽은 뒤 친구 담헌 이하
곤은 애도하는 마음을 시로 전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어떻
게 죽을 것인가?’ ‘우리는 죽음을 미리 대
면하며 살고 있는가?’ 죽음 이라는 건 피할
수 없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됨을 알면서도
피하고 싶어하는 두려운 대상.
윤두서는 관조적인 태도로 죽음을 바라
보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죽음
을 삶의 일부분으로 대하는 순간 삶의 질
은 달라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한다.
굳이 연구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죽음을 미리 대비하고 겸허해 질 수 있다
면 살아있는 동안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
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고치속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처럼 우
리의 육신은 자기의 역할이 끝날 때가 오
지만 나를 지탱하던 영혼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정현채 교수-
그림을 보는 관점은 누구나 다르며 해석
또한 제각각이다. 정담은 없다. 죽은자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의 삶을 살았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들의 생을 알고 작품을 바라보면 비로
소 그들이 이해가 가고 그들과 교감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깊어질 것이다.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자화상Who am I ?내가 왜 사는가? 난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How to live? 나는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
겨울버찌와 자화상(1912)
뺨을 당기는 자화상(1910)
내 삶 속 그림 읽기
조성미 원장△덕원예술고등학교 미술과 졸업△한국예술종합학교 무대미술과 졸업△무대의상디자이너 겸△입시미술 지도경력 다수△달리미술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