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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s First Planned City Heritage 성을 쌓는 목적은 대부분 방어와 경계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은 그러한 기능에 충실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완공된 수원 화성 (華城)은 사정이 달랐다. 축성을 명한 정조는 화성에 자신의 이상과 염원을 투영하고자 했다. 사진 이진욱 기자 · 박상현 기자 수원 화성 정조와 실학자들이 꿈꾼 계획도시 1950~1960년대 화홍문 모습. 사진/수원화성박물관 제공 2014년 3월 17일 수원천에서 바라본 화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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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s First Planned City

Heritage

성을 쌓는 목적은 대부분 방어와 경계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은 그러한 기능에 충실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완공된 수원 화성

(華城)은 사정이 달랐다. 축성을 명한 정조는 화성에 자신의 이상과 염원을

투영하고자 했다. 사진 이진욱 기자 · 글 박상현 기자

수원 화성정조와 실학자들이 꿈꾼 계획도시

1950~1960년대 화홍문 모습. 사진/수원화성박물관 제공

2014년 3월 17일 수원천에서 바라본 화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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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늘날 서울시립대학교 뒤쪽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부 뒷산으로

옮기고자 했다. 윤선도가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라고 했던 지역이었다. 결국

정조는 1789년 천장을 결정하고, 묏자리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위해 새로운 도시를 조성

하기로 했다. 그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한성과 충청도, 전라도를 잇는 곳에 위치한 신도시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발전을 거듭했

다.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시전이 생겨나는 등 상업이 흥했다. 이에 호응해 정조는 도

읍의 명칭을 수원에서 화성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해 도시의 지위

를 높이고, 국왕의 호위부대인 장용영을 배치했다.

성벽 축조는 도시가 건설되고 5년이 흐른 뒤부터 실행

됐다. 정조는 화성 설계라는 막중한 임무를 홍문관에

서 근무하던 젊은 실학자인 정약용에게 맡겼다. 정약

용은 조선과 중국에서 발간된 여러 병서들을 검토해

계획안을 수립했다. 공사에는 거중기와 유형거 같은

신식 장비가 활용되고, 전국에서 최고의 기술을 지닌

장인이 소집됐다. 그 결과 화성을 완공하는 데는 2년

9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국가적인 대역사치고는 공

사 기간이 매우 짧았다.

효를 실천하고, 정치 실험을 꾀하다

1762년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 갇혔다. 태어난 지 14개월 만에 이복형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고, 15살

에 대리청정을 했던 그가 부왕에 의해 굶어죽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두려워했고, 영조

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은 자신들에게 비판적이었던 세자의 왕위

계승을 원치 않았다. 사도세자의 폐위와 사망은 틀어진 부자 관계와 정쟁이 원인이었다.

영조는 아들과 달리 세손은 끔찍이 아꼈다. 그가 1776년 즉위한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다. 11살

에 부친의 죽음을 목도했던 정조는 효성이 지극했다. 아버지를 사모하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강력한 배후 도시로 키우고자 했다. 그는 훗날 순조가

될 세자에게 왕권을 이양하고, 화성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화성의 일부 시설에

는 벽돌이 쓰였다(왼

쪽). 화홍문에 오르

면 기둥 사이로 수

원천과 주변 경치가

보인다(아래).

Suwon Hwa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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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은 소통을 중시하는 개방적인 면모를 띠었던 셈이다.

화성이 조선 읍성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차별화되는 점은 또 있

었다. 중심 건물이 남향이 아닌 동향이라는 사실이다. 한양도성

의 경복궁과 창덕궁은 정문이 남쪽을 향해 서 있지만, 수원 화

성의 행궁(行宮)은 팔달산 아래에 동쪽을 바라보도록 건축됐

다. 그래서 화성의 간선도로는 동서가 아닌 남북 방향으로 났

다. 이 길은 한성과 연결되는 대로 역할을 했다.

새로운 재료와 군사 시설의 도입도 수원 화성의 특징이었다.

한양도성은 영조의 이전 군주였던 숙종 대에 대대적으로 보수

됐다. 조선 초기에 비해 기법이 정교해지긴 했지만, 건축 자재

에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화성에는 보다 견고한 건축물을 제

작할 수 있는 벽돌이 쓰였다. 벽돌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

던 구조물을 쌓는 데 기여했다.

공사 과정, 건물에 대한 설명을 세세하게 기록한 ‘화성성역

의궤(華城城役儀軌)’의 간행 또한 축성 역사상 처음 이루

어진 작업이었다. 의궤 덕분에 1970년대 벌어진 화성 복원

은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수원 화성, 한양도성과 이렇게 다르다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수원 화성과 건국 초기에 완성된 한양도성은 도시를 둘러싼 읍성(邑城)이라는 점이

같지만, 차이점이 더 많다. 수도를 에워싼 성곽인 한양도성은 길이가 약 18.6㎞에 이른다. 하지만 수원 화성

은 5.7㎞로 훨씬 짧다. 또 화성은 동서남북에 문이 하나씩 있지만, 도성에는 네 개의 소문(小門)이 추가로

세워졌다.

도시가 들어앉은 위치도 확연히 구분됐다. 한양도성은 사방에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이 솟아 있어서 전

통적인 명당에 해당됐다. 멀리는 북한산과 도봉산도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그러나 화성은 서쪽에 높이

146m의 낮은 팔달산이 있을 뿐, 삼면은 비교적 평탄했다. 도성이 방어에 초점을 맞춘 폐쇄적인 형태였다면,

수원 화성은 봄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두세 시간이면 일주가 가능하다.

성벽 옆으로 난 길을 걸으며 다양한 문화재와 도심 풍경, 화사하게 핀 꽃을 볼 수 있다.

Suwon Hwaseong

화성에서 가장 높

은 지점인 서장대

와 행궁 열차(왼

쪽).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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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won Hwaseong

조선 건축술의 집대성, 화성 순성

위에서 보면 버들잎을 닮은 화성은 하루에 순례하기 적당하다. 순성(巡城)에 특별한 규칙은 없는데, 대개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장안문은 남쪽의 팔달문(八達門)과 함께 화성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한양

도성의 숭례문보다 규모가 더 크다.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바깥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둘렀다. 옹성 가

운데 설치된 문에서 고개를 올리면 웅장함이 느껴진다. 장안문 양쪽에는 주위를 감시하고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

한 장치인 적대(敵臺)가 있다. 밖에서 보면 세로로 길게 홈이 나 있어서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화성 답사는 장안문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하는 것이 좋다. 화성의 주산인 팔달산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서문인

화서문(華西門)은 장안문에서 600m쯤 떨어져 있다. 두 문 사이에는 북서포루(北西砲樓)와 북포루(北鋪樓)가 있

는데, 모두 군사 시설이다. 포루(砲樓)는 대포를 쏘는 공간이고, 성벽의 돌출된 부분에 세워진 포루(鋪樓)는 병사

들이 몸을 숨긴 채 공격하는 곳이었다. 화성에는 포루(砲樓)와 포루(鋪樓)가 각각 5개씩 지어졌다.

팔달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화서문은 일제강점

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거의 훼손되지 않았

다. 과거에는 성문 밖이 황무지여서 이용하는 사

람이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장안문보

다 작고 소박하게 건설됐다. 화서문 근처에서 주

의 깊게 살펴야 할 건물은 오히려 바로 옆에 자리

한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다. ‘속이 비어 있는

돈대’라는 의미의 공심돈은 조선의 성곽 중 화성

에만 있다. 3층 높이에 망루를 지어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용이했다.

화서문부터는 팔달산 등산이 시작된다. 하지만

한양도성의 북악산이나 인왕산만큼 힘들지는 않

고, 낙산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다. 산

정에는 수원 화성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화성장

대(華城將臺)가 버티고 있다. 2층 누각으로 행궁

은 물론 수원 시가지가 발아래 펼쳐진다. 장대 뒤

쪽의 팔각형 시설은 활을 발사하는 노대(弩臺)다.

화성장대에서 하산하다 보면 화성 유일의 갈림길

이 나온다. 내리막을 택하면 팔달문으로 이어지

고, 암문(暗門)을 통과하면 성벽이 양옆에 있는 길

인 용도(甬道)가 뻗어 있다. 길지 않은 용도의 끝

에는 누대인 화양루(華陽樓)가 있다. 팔달문은 화

성에서 가장 볼만한 건축물이지만, 좌우의 성벽이

끊어져 홀로 서 있다. 장안문과 흡사하나 원형이

보존돼 있어서 가치가 더욱 높다.

시끌벅적한 시장을 지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쪽으로 화성 순례를 계속하면 군사 시설이 잇따라

나타난다. 하지만 팔달문과 창룡문 사이에는 커다란 굴뚝 5개가 있는 봉화대인 봉돈(烽墩) 외에는 유

다르게 다가오는 건물이 없다.

화성의 백미는 창룡문에서 장안문까지다. 시간이 없다면 이 구간만 걸어도 충분하다. 또 다른 공심돈

인 동북공심돈,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된 너른 터에 자리한 연무대(鍊武臺), 화성장대에 버금가는 경

치를 선사하는 동북포루(東北鋪樓)가 연이어 출현한다. 동북포루 아래에는 건축미와 조형미가 도드

라지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화홍문(華虹門)이 위치한다. 두 건물은 방어 시설이 아니라 풍광

좋은 곳에 만든 누정 같다. 특히 화홍문은 수원천이 흘러내리는 홍예 7개 위에 세워졌는데,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화성 순성을 갈무리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장안문은 한성을 떠난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대문이었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았지만,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복원돼 예스러운 모습을 되찾았다.

화성의 경관 조명은

일몰 무렵부터 순차적

으로 켜진다. 장안문

을 시작으로 북동포

루, 방화수류정이 차

례로 불을 밝힌다.화성 순례는 밤에

도 할 수 있다. 현

대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며 옛길을

호젓하게 거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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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조선의 이념과 미학이

구현된 곳이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건축술이 동원돼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시설이 만들어졌다.

정조는 화성 건설을 통해 효심을 발현하고, 강고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조선 후기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그는 새로운 세력을 등용해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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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화성의 중추, 화성 행궁

수원화성박물관, 화성의 비밀을 풀다

문루와 누대, 성벽이 수원 화성의 전부는 아니다. 본래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은 행궁이다. 경복궁을 지키기 위해 한양도성을 쌓은 것과 같은 이치다. 화성

행궁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할 때 머무는 임시 숙소였다. 일렬로 난 문

세 개를 지나야 정당(正堂)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르도록 설계됐는데, 봉수당은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붙인 이름이다. 그는 1795년 모

친의 회갑연을 화성 행궁에서 열기도 했다.

화성 행궁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행궁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

해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병원이 들어서면서 파괴됐다. 봉수당 북쪽의 낙남헌

(洛南軒)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졌다. 지금의 행궁은 10여 년 전에

복원된 것이다.

화성 행궁에서 광장을 지나면 왼쪽으로 2009년 개장한 수원화성박물관이 보인다. 1층은

기획전시실, 2층은 화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로 구획돼 있다. 1층에서 조선시대 화성의 모

습을 축소한 모형을 보고 계단을 오르면, 화성축성실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화성성역의궤

와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내린 명령서 등

이 전시돼 있다. 허허벌판이었던 화성이 도시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문화실에는 정조가 마련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장면이 패널과 모형으로 설명돼

있고, 장용영 군사들이 사용한 무기가 진열돼 있다. 또 조선 후기 국왕이 행차할 때 내걸

었던 커다란 황룡기도 볼 수 있다. 전시물은 박물관 바깥에도 있다. 정조의 태실을 비롯해

축성 시 사용됐던 거중기와 녹로가 재현돼 있다. 화성에 부임한 관리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도 늘어서 있다. Y

수원 화성 여행 길라잡이

관람 시간과 요금 화성, 행궁, 수원화성박물관

모두 3~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장한다. 수원화성박물관은 매월 첫째 주 월요

일에 쉰다. 3개 시설과 수원박물관을 더한 통합

관람권이 성인 3천500원, 군인과 청소년 2천 원,

어린이 600원이다.

가는 법 수원역에서 11, 13, 36번 버스를 탄다.

주차장은 행궁과 창룡문, 연무대에 있다.

수원 화성 여행 추가 정보

화성 열차 팔달산 성신사에서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을 거쳐 연무대까지 운행된다. 편도 30분

이 소요된다. 요금은 성인 1천500원, 군인과 청소년 1천100원, 어린이 700원이다.

함께 둘러볼 곳 화성박물관 인근에 수원의 새로운 명소인 행궁동 벽화골목이 있다. 팔달문 근처

에는 전통시장이 몰려 있어서 다양한 먹거리를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