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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인 - 들뢰즈의 미학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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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김재인 - 들뢰즈의 미학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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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의 미학

- 들뢰즈의 미학사상1)

김재인

1. 미학으로서의 철학

들뢰즈의 미학은 니체 미학의 가장 훌륭한 현대적 계승이다. 창조하는 자로서, 긍정하고

생성하는 삶을 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니체 미학의 알파와 오메가이다.2) 이런

이유에서 니체는 창작자, 예술 작품, 감상자의 구분을 용납하지 않는다. 니체의 미학은 이

셋의 융합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점은 ‘디오니소스’가 니체 사상의 중심에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들뢰즈는 미학, 예술론 저작을 많이 남기고 있다. 들뢰즈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많은 미

학적 저술을 남긴 사람이다. 가령 주요 단행본으로는 자허 마조흐 소개 (1967), 프루스트

와 기호들 (1964. 개정5판 1979), 카프카. 소수파의 문학을 위하여 (1975.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 대화 (1977. 1996년 개정판. 클레르 파르네와 나눈 대담), 화1. 운동-이미지

(1983), 화2. 시간-이미지 (1985),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1984. 2002년 개정판),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1988), 협상들 (1990), 비판과 진단 (1993)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의미의 논리 (1969)와 천 개의 고원 (1980)에 수록된 몇몇 들도 본격적인

미학, 예술론에 속한다.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1. 가타리와 공저)의 7장은 들뢰즈

의 가장 집약적인 미학 이론을 담고 있다. 다른 이론적 저술들도 미학적 색채로 가득 차 있

으며, 책으로 묶이지 않은 미학, 예술론 관련 도 많이 있다. 기본적으로 문학, 미술, 화,

음악은 들뢰즈 의 주요 전거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들뢰즈의 사상 전체에서 미학만 떼어 놓고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하겠

다. 사실 우리는 들뢰즈의 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 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철학적 표현의 새로운 수단에 대한 탐구는 니체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에는 연극이나 화 같은 몇몇 다른 예술들의 갱신과 관련해서 계속 추구되어야만 한다.” -

“현대의 예술 작품이 자신의 교체되는 계열들과 자신의 순환적인 구조들을 전개할 때, 그것

은 재현의 단념에 이르는 길을 철학에게 가리켜주고 있는 것이다.”3) 이 구절들은 들뢰즈

의 철학 중심에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하지만 들뢰즈는 문체에

있어 니체보다는 스피노자의 그것을 따르는 것 같다).

따라서 들뢰즈의 미학을 ‘진선미(眞善美)’를 구분하는 전통적인 미학의 차원에서 이해해서

는 안 된다. 서양의 근대를 거치면서 칸트에 의해 정립된 ‘진선미’의 역은 서로 침해해서

는 안 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역이었다. 이런 구분이 인식, 도덕 실천, 예술 각 분야의

자율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세 역이 삶의 차원에서 통합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많이 제기되었다. 이런 구분은 필연적으로 삶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1) 이 은 세계의 문학 95호(2000년 봄) 277-289쪽에 수록된 을 이번 강의를 위해 수정 보완한 것이다.

2003년 1월 7일 금요일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강좌 발표문.

2)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계속해서 다루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니체의 미학에 대한

훌륭한 연구로 전예완, 「<창조>를 중심으로 본 니체 사상의 미학적 함의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미

학과 석사학위논문, 1998을 참고할 수 있다.

3) G.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p. 4 및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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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과학주의, 도덕주의, 미학주의의 폐해는 그로부터 기인했다 해도 과

언이 아니다.

이런 경향에 반대해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적 실천 철학’과 니체의 ‘미학적 실천

철학’, 그리고 베르그송의 ‘다양체의 존재론’을 독특한 형태로 결합시켰다.4) 들뢰즈의 미학은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 정치-경제학, 미학을 구분한 뒤 성립하는 하위 분과가 아니라 이들

분과를 아우르는 상위 분야이다. 들뢰즈의 미학은 푸코의 미학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

을 재료로 해서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 가는 실험인 것이다(이 점

은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언급될 것이다).

2. 고원이란 무엇인가?

이런 의미의 미학은 들뢰즈가 사용하는 ‘고원(plateau)’이란 말에 잘 나타난다.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쓴 자신의 주저 천 개의 고원 에서 ‘고원’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5)

(가) 고원은 중간에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리좀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다음과 같은 아주 특별한 것을 가리키기 위해 “고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 위에서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

들이 연속되는 지역. 베이트슨은 발리 섬의 문화를 예로 드는데, 이 섬에서는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성적 놀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툼은 이런 기묘하고도 강렬한 안정을 유지하면서 진행된

다. “강렬함이 연속되는 일종의 고원이 오르가슴을 대체한다.” 또 그것은 전쟁이나 정점을 대체

한다. 표현과 행위를 그것이 지닌 가치 자체에 따라 내재적인 판에서 평가하는 대신에 외부의

목적이나 초월적 목적에 관련시키는 것은 서양적 정신의 유감스런 특질이다.

(나) 자신을 정점을 향해 가게 하지도 않고 외적인 종결에 의해 중단되게 하지도 않는 그런 방

식으로 구성되는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역들을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고원이라고 부른

다. 발리 섬의 문화에서 행해지는 몇몇 성적인 과정들이나 공격적인 과정들이 이를 잘 보여준

다. 하나의 고원은 한 조각의 내재성이다. 각각의 CsO(=기관 없는 몸체)는 고원들로 만들어져

있다. 각각의 CsO 자체는 고른 판 위에서 다른 고원들과 소통하는 하나의 고원이다. CsO는 이

행의 성분인 것이다.

고원은 서구의 오르가슴 지향적인 리비도 경제와는 다른 경제이다. 오르가슴은 쾌락의 순

간적인 절정이기 때문에 그 강렬함이 흩어져버린 이후에 허탈감이 찾아온다. 여기에 일종의

4) 들뢰즈의 초기 저술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이 바로 니체, 베르그송, 스피노자이다. 니체와 철학

(1962), 니체 (1965), 베르그송주의 (1966),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968), 스피노자 (1970 - 이 책

은 훗날 스피노자. 실천 철학 (1981)으로 증보되어 나옴) 같은 일련의 노작들은 이 점을 잘 볼 수 있게

해준다.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는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국역본: 들뢰즈의 철학사상 , 이성민, 서창현 옮김, 갈무리, 1996)

에서 이 세 철학자를 들뢰즈의 중심축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하트는 들뢰즈가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

순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을 여러 곳에서 펼침으로써(국역본 pp. 17, 28, 31, 221 등) 들뢰즈에 대한 올

바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하트와는 달리 들뢰즈의 사유가 이들 세 철학자에게서 <변

주(variation)>되어 표현되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필자의 「긍정과 기쁨의 생성 - 들뢰즈의 스피노

자 해석」( 모색 2호, 갈무리, 2001) 참고.

5) Gilles Deleuze & Felix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국역본, 천 개의 고원 , 48쪽 및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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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구속(double bind)이 있게 된다. 도달해야 하면서도 결코 도달하면 안 되는 오르가슴의

변태성. 그래서 사람들은 오르가슴의 지속을 꿈꾸지만 그것은 헛된 노력이다. 애초부터 오르

가슴 지향적인 리비도 경제는 원리상(de juri) 지속과 양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

른 경제가 요청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원의 경제이다. 강렬함이 지극한 높이에 이르지만 정

점에 올랐다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외적인 우연에 의해 종결되거나 방해받지 않게 하는

리비도 경제.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존재할 수 있는 강렬한 상태들로 이루어진 구조

물을 창조하게 되면, 에너지의 고양이 충분히 지속되어 다른 행위들로 재투입될 수 있게 된

다.6) 이러한 결합을 ‘고름(consistance)’이라고 한다. 고름은 서로 흩어져 있는 요소들을 한

데 모아 묶어주는 것이자 그렇게 묶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종합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스타일이라 부를 수 있겠다. 물론 이 때 말하는 스타일은 문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화, 미술, 음악, 나아가 수학, 기술, 역사적 시기에도 해당된다.7)

스피노자의 윤리(Ethica) , 니체의 즐거운 지식(Die fröhliche Wissenschaft) 은 ‘고원의

철학’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기쁜 삶이다. 우리는 모두 기

쁜 삶을 꿈꾼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쁨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기 때

문이다. 대개의 경우 기쁨은 외부로부터 우연히 주어지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기쁨에 대

해 수동적이다. 이런 수동적인 기쁨은 슬픔과의 대조 속에서 빛을 발한다. 기쁨이란 슬픔으

로부터의 낙차에 의해 겨우 성립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슬픔이 적은, 또는 적어지는 그만큼

기쁘다고 느낄 뿐이다. 하지만 슬픔도 기쁨처럼 외부에서 우연히 닥쳐오는 것은 마찬가지이

며, 우리는 기쁨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슬픔을 방어할 준비도 하지 못한다.

슬픔과 기쁨은 우리를 거처 삼아 수시로 들랑날랑한다. 아직까지 우리는 슬픔과 기쁨이 오

가는 빈 방이요 정거장이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 앞에서 무력한 존재이다.

요컨대 우리는 스스로 기쁜 삶을 만드는 법을 모른다. 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들뢰즈에

게 철학은 기쁜 삶을 만들어내는 기술(ars)이다. 스스로 기뻐지기(스피노자가 신이라고 불

던 존재는 스스로 낳고 기뻐지는 존재를 가리킨다). 이들의 저술을 꼼꼼히 성실히 용기 있

게 따라가 보면 그 비법이 발견된다.

하지만 고원의 철학은 단순한 인식론도 아니요 단순한 이론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

종의 행동 지침이요 변신의 기법이다. 이 철학은 마르크스와 아주 가까이 있다. ‘살펴 보라,

그러면 알 것이다’가 아니라 ‘행해 보라, 그러면 알 것이다’인 것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대한 작은 책에 스피노자. 실천 철학 이라는 제목을 붙 다. 그러나

넓게 보면 철학은 모두 ‘실천 철학’이다. 이 때의 ‘실천’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 그러니까

‘프락시스(praxis)’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기 삶을 운용하는 기술’이랄까 아니면 푸

코가 말했듯 ‘자기 삶을 재료로 삼아 행하는 예술 행위’랄까….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전통

적으로 실천의 기술이라고 이해되어 온 ‘윤리’는 창조의 기술인 ‘미학’과 별개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또한 이러한 ‘실천’이 세계 속에서,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이 필연적이라 할 때 윤리-미학은 ‘정치’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라틴어로 표현하자

면 호모 폴리티코-에티코-아이스테티쿠스(homo politico-ethico-aestheticus)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기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존재이

6) 마조히즘 분석에서 출발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이론은 철저하게 ‘고원’적이라 할 수 있다. 자세한 내

용은 천 개의 고원 287-317쪽 참조.

7) Brian Massumi, “Pleasures of Philosophy,” p. xiv, Preface to The Thousand Plateaus(University

of Minesota Pres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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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들뢰즈에게 사유는 의식의 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의식에 대한 평

가 절하를 통해 사유를 옹호하려 했다고 말한다(들뢰즈는 니체도 마찬가지로 해석한다. 들

뢰즈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니체를 해석하며 니체의 관점에서 스피노자를 해석하는 성향이

있다). 사유는 의식의 역을 뛰어넘는다. 의식은 본성상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을 알

지 못한다. 의식은 단지 ‘부적합한 관념’만을 갖게 되며 원인을 모른다는 점에서 불안에 떠

는 노예일 뿐이다. “의식은 정보의 가치만을 가지며, 그것도 필연적으로 혼란스럽고 절단된

정보만을 갖는다.”8) 나아가 들뢰즈가 ‘유목민적 사유’를 말할 때 그것은 철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유는 화, 회화, 문학, 수학,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에 속하며 몸에 속한다. 푸코나

블랑쇼가 ‘달리 생각하기’와 ‘바깥의 사유’를 말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도 그것이다. 이 철학

자들이 예술을 자기 철학의 중심에 놓았던 까닭을 이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기쁨과 슬픔의 본성은 과연 무엇일까?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니체를 따라 자신의

역량(potentia, puissance) 또는 권력(Macht, puissance)이 증대되는 느낌을 기쁨이라 부르며

감소하는 느낌을 슬픔이라 부른다. 특히 슬픔은 연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나쁘

다(그런데 모든 연민은 자기 연민이다. 이것이 니체가 연민을 비판하는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것은 자신이 약해지는 느낌, 또는 약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한편 기쁨은 쾌와 관련된

다. 그것은 지극한 경지이며 힘이 있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경지이다. 따라서 기쁨은 좋

음(gut)이요 슬픔은 나쁨(schlecht)이다. 이런 구분이야말로 의식 차원에서의 평가, 도덕 차

원에서의 평가인 ‘선(gut)’과 ‘악(böse)’을 넘어 있다. 니체의 표현 ‘선악을 넘어서’는 ‘좋음과

나쁨을 넘어’를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 신체(corpus)에 적합한 외부 물체(corpus)인 음

식과 우리 신체에 부적합한 외부 물체인 독은 각각 좋음과 나쁨에 속한다(이렇게 나쁜 것의

예로는 악취, 나쁜 만남, 소화 불량, 중독, 관계의 해체 따위가 있다). 어린애 수준의 얕은

지성밖에 갖고 있지 않았던 아담은, 몸에 나쁘기 때문에 사과를 따먹지 말라는 자연 법칙에

입각한 신의 명령을 오해하여 임의적인 금지라고 여겨 그 명령을 어겼다. 바보 아담.

기쁨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역량 또는 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역량은 반드시 변용

한다(affecter). 그것이 역량의 본성이다. 변용하는 역량은 두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하나

는 작용을 가하는 역량(puissance d'agir, 행위 역량)이요 다른 하나는 작용을 겪는 역량

(puissance de pâtir, 수동 역량)이다. 그리고 이 둘은 반비례한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 속에

서, 세계 속에서 나쁜 만남과 좋은 만남을 겪는다. 나쁜 만남 속에서 우리의 행위 역량은 감

소하거나 방해를 받으며, 여기에 대응되는 정념은 슬픔이다. 반면 좋은 만남 속에서 우리의

행위 역량은 증대하거나 도움을 받으며, 여기에 대응되는 정념은 기쁨이다. 그런데 이 때 갖

게 되는 기쁨은 외부 원인을 갖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수동이다. 하지만 행위 역량이

증대되다 보면 우리는 변신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우리 역량의 주인이 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능동적인 기쁨이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기쁨이다. 실천의 비 , 변신의 비 , 생성

의 비 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Bildung)과 문화(cultura)의 문제이며 변증법이

설명하지 못하는 생성의 논리이다. 여기에는 지양도 소외도 없으며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

증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생성과 생성의 기쁨일 뿐이다.9)

이렇게 만들어진 능동적인 기쁨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강렬함이 지속되는 고원 상태이

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 역량, 창조 역량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지속력’을 갖는다.

8)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 박기순 옮김, 민음사. 제2장, 원제: 스피노자. 실천 철학 .

9) 이상의 내용은 「긍정과 기쁨의 생성 -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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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외부 환경을 적합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 그것은 어느 것에나 투입될

수 있는 역량에 기반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기쁨을 만들어낼 수 있다.

3. 예술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미학을 위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존에 ‘예술’이라 불렸던 인간 활동

이 다른 활동과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는 예술을 철학, 과학과 같은 다른

창조 활동과 구분한다. 철학, 과학, 예술은 모두 창조이며, 각각 개념, 함수, 감각을 창조한

다. 하지만 이것들은 서로 우열 관계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촉진적인 관계에 있다. 그

각각의 창조성은 경쟁적으로 다른 것에 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치 푸가처럼.

이제 철학, 과학, 예술 각각을 정의하고 그 상호 관계를 서술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의

한 구절을 보자.

사유를 정의하는 것, 사유의 세 가지 커다란 형식인 예술, 과학, 철학은 항상 카오스와 대적하

는 것, 하나의 판을 그리는 것, 카오스 위에서 하나의 판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무

한에 고름을 부여함으로써 무한을 구원하고자 한다. 철학은 내재성의 판(plan d'immanance)을

짜며, 그 판은 개념적 인물들의 작용 아래에서 사건들 또는 고른 개념들을 무한까지 데려간다.

반대로 과학은 지시 관계(référence)를 얻기 위해 무한을 포기한다. 그것은 단순하게 정의되지

않은 좌표의 판(plan de coordonnées)을 짜며, 그 판은 매번 부분적 관찰자의 작용 아래에서

사태들, 함수들, 또는 지시적 명제들을 정의한다. 예술은 무한을 다시 부여하는 유한을 창조하

고자 한다. 그것은 구성의 판(plan de composition)을 짜며, 그 판은 미적 형상(形象)들의 작용

아래에서 기념비들 또는 구성된 감각들(sensations composées)을 떠받치게 된다. (…) 사유한다

는 것은 개념들을 통해 또는 함수들을 통해 또는 감각들을 통해 사유한다는 것이며, 또 이들

사유들 가운데 어떤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좋거나 충만하다고, 또는 완전하거나 종합적인 ‘사

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세 가지 사유는 서로 교차하고 얽히지만 종합되거나 동일화되지

는 않는다. 철학은 개념들을 가지고 사건들을 생겨나게 하며, 예술은 감각들을 가지고 기념비

들을 세우며, 과학은 함수들을 가지고 사태들을 건설한다. (…) 그것은 이형 발생(hétérogènese)

으로서의 사유이다.10)

들뢰즈에게 있어 창조의 동의어인 사유는 세 가지 커다란 형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철

학, 과학, 예술이다. 이들 각각은 카오스에 대항해서 나름의 판을 짜는 일을 한다. 무의미와

죽음으로 상징될 수 있는 카오스에 대항해서. 내재성의 판, 좌표의 판, 구성의 판을. 이것들

은 모두 창조 활동인데, 왜냐하면 철학은 개념을 통해 사건을, 예술은 감각을 통해 기념비

를, 과학은 함수들을 통해 사태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이형 발생으로서의

사유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특징은 무엇일까? 들뢰즈가 예술을 규정하는 인상적인 첫 대목을 살펴보

면, 거기에는 들뢰즈의 예술관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7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화폭이 지속하는 한 청년은 화폭 위에서 미소 지을 것이다. 여인의 얼굴 피부 아래에서는 피가

뛸 것이고,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일군의 사내들은 떠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장편 소설

또는 화 속에서 청년은 미소를 거두겠지만, 소설의 그 페이지, 화의 그 순간을 다시 들추

10) Deleuze & Guattari, Qu'est ce que la philosophie?, p.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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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면 청년은 다시 미소 짓기 시작할 것이다. 예술은 보존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다. 사실상 예술은 돌, 화폭, 화학적 색채 등 그 소재와 질료가 지속하는

동안만 지속되지만(사실의 문제), 예술은 보존하며 그 자체로 보존된다(권리의 문제). 소녀는

5천년 전에 취했던 자세를, 더 이상 그녀에게 의존하지 않는 몸짓을 유지하고 있다. 대기는 작

년 이 날의 동요, 한 줄기 바람, 빛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날 아침 그것을 들이마셨던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예술이 보존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사물을 지속시키기 위해 하나의 실체를

덧붙이는 공업의 방식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사물은 자신의 ‘모델’과 무관하게 되었지만, 그것

은 또한 다른 잠재적 인물들, 말하자면 예술적 사물들, 그림의 대기를 들이마시는 그림의 인물

들과도 무관하다. 또한 그것은 현실적인 관객이나 청중과도 무관하다. 이들은 그럴 힘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나중에야 그것을 체험할 따름이다. 사물이건 예술 작품이건, 스스로 보존되는

것은 감각의 덩어리, 다시 말해 지각물들과 변용태들의 복합물이다.11)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술이 갖고 있는 ‘지속력’이다. 예술은 ‘감각’의 덩어리로서

지속력을 갖는다. 예술의 지속력과 관련해서 들뢰즈는 마약과 아동화(兒童畵)를 언급한다.

마약은 예술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마약이 예술에 도움이 되는가? 들뢰즈는 단호하게 부

정적인 답을 한다. 마약은 예술과 ‘무관’하다. 오히려 마약은 중독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

람을 노예로 만든다. 마약의 논리는 오르가슴 지향적인 리비도 경제의 논리를 따른다. 한편

아동의 그림은 어떠한가? 아동의 그림이 설사 클레(P. Klee)의 그림과 유사한 감각을 만들

어내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소치일 뿐이다. 아동의 그림은 반복해서

그려지지 못한다. 요컨대 마약이나 아동화는 ‘필연적인 자기 내적 지속성’을 갖는 예술 작품

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이 때 말하는 ‘지속력’이라는 것은 ‘고원’

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보론: 감각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예술론에 있어 핵심에 위치하고 있는 ‘감각(sensation)’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찌해서 ‘감각’이 예술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 이 문제는 프란시스 베이컨. 감

각의 논리 에서 특히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12) 그것을 아주 간략히 살펴보자.

모든 개별적인 감각 기관 역들을 넘어가고 가로지르는 생명의 힘(une puissance vitale)

이 존재한다. “이 힘은 시각, 청각 따위보다 깊은 것으로, ‘리듬’이다. 이 리듬은 청각 층위에

투자될 때는 음악으로 나타나며 시각 층위에 투자될 때는 회화로 나타난다.”13) 그리고 “리

듬 그 자체가 형상(Figure)이 되고 형상을 구성”14)하며, 이 리듬이 바로 감각의 리듬이다.

그런데 감각은 몸체(corps) 안에 있다. 하지만 그 몸체는 사람의 몸이 아니다. 감각은 느

끼는 자(sentant)와 느껴진 대상(senti)이 통일체를 이룬 몸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회화는

바로 그 몸-감각을 그려야 한다. 그 몸체가 ‘사과의 몸체’15)여도 상관이 없지만, 그것은 차

라리 아르토가 발견하고 명명한 “기관 없는 몸체”라고 보는 편이 낫다.

<몸체는 몸체이다 그것은 혼자이며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몸체는 유기체가 아니다 유

11) Deleuze & Guattari, Qu'est ce que la philosophie?, p. 154.

12) 서양의 회화사를 망라하고 있는 이 저술을 쉽게 요약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미간

행 원고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세폭화란 무엇인가?」를 참조.

13)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Ed. de la Différence, 1984, p. 31.

14) 같은 책, p. 48.

15) 같은 책, p. 27.

Page 7: 김재인 - 들뢰즈의 미학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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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는 몸체의 적이다.>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에 대립된다기보다는 우리가 유기체라 부르는

기관들의 유기적 구성에 대립된다. 그것은 강렬하고 집중된 몸체이다. 그것은 몸체 속에서 진

폭의 변주에 따라 층위들과 문턱들을 갖는 파동에 의해 주파된다. 따라서 몸체는 기관이 아니

라 문턱 또는 층위를 갖고 있다. 감각은 질적이거나 제한되어 있지(qualivative et qualifiée) 않

으며, 자기 안에서 재현적 여건들이 아니라 동질이형(同質異形)적 변주들(variations)을 결정하

는 강렬한 실재성만을 갖는다. 감각은 진동(vibration)이다. 우리는 알[卵]이 유기적 표상 ‘이전

의’ 바로 이러한 몸체 상태를 표현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16)

몸체 속에서 주파되는 파동의 한 층위가 외부의 힘과 만나면 감각이 발생한다. 그러나 기

관 없는 몸체에 실제로 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조직화

되지 않았으며 기관들은 기껏해야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기관일 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

다. “이것이 그림에 시간을 도입하는 방식이다. 베이컨에게는 시간의 커다란 힘이 있으며,

시간이 그려진다.”17) 여기서 시간이란 삶의 다른 이름이다.

감각이 느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의 층위가 변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때

감각은 ‘추락(chute)’의 경험으로 느껴진다. 추락은 몰락이나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층위의 차이의 경험이다. 그래서 상승감마저도 우리는 추락의 감각을 통해

느낀다. 그것은 베르그송적인 ‘생명의 도약’을 체감하는 순간에 가깝다. 작품 앞에서의 전율

감!

이 추락의 경험이 능동적 리듬을 구성한다. 이것에 반대되는 것이 수동적 리듬으로 결정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증인 리듬이 있다. 그리고 그림마다 이 세 리듬의 결정과 분배

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미리 주어진 선험적인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림과

마주했을 때 경험적으로 만나게 되는 ‘감각의 논리’에 따라 판별된다.

여기서 ‘증인’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래 증인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으면서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건 현장에 있다는 점에서 대상 역

에 속하지만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 주체 역에 속한다. 증인이 목격하고 이야기하

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이며, 또한 삶의 다른 이름인 ‘시간’이다. 베이컨의 회화에서

모든 리듬들을 종합하고 판정케 해주는 증인 리듬이 중심에 놓이는 까닭이 그것이다. 증인

의 높이가 곧 고원의 높이임을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높이를 만드는 것은 작가의 내공

과 질료의 ‘필연적인 우연적 결합’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감각’은 곧 삶, 그 고원의 전율이기에 예술의 본질일 수밖에 없다. 감각

만이 우리를 유한에서 무한으로 고양시키는 매개일 수 있는 것이다. (*)

16) 같은 책, p. 33. 우리는 ‘고원’을 정의하는 대목에서도 ‘기관 없는 몸체’의 결정적 역할을 보았었다.

17) 같은 책, p.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