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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 請求論文 指導敎授 金 東 洙 韓國 茶道文化에 관한 思想的 考察 成均館大學校 儒學大學院 東洋思想學科 中國思想 專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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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 請求論文

指導敎授 金 東 洙

韓國 茶道文化에 관한 思想的 考察

成均館大學校 儒學大學院

東洋思想學科 中國思想 專攻

吳 洋 嘉

碩士學位 請求論文

指導敎授 金 東 洙

韓國 茶道文化에 관한 思想的 考察

A Study on the Korea Dado(茶道) Culture Thought

成均館大學校 儒學大學院

東洋思想學科 中國思想 專攻

吳 洋 嘉

碩士學位 請求論文

指導敎授 金 東 洙

韓國 茶道文化에 관한 思想的 考察

A Study on the Korea Dado(茶道) Culture Thought

이 論文을 文學 碩士學位 請求論文으로 提出합니다.

2002 年 1 月 日

成均館大學校 儒學大學院

東洋思想學科 中國思想 專攻

吳 洋 嘉

이 論文을 吳洋嘉의 文學

碩士學位 論文으로 認定함

2002 年 1 月 日

審査委員長

審査委員

審査委員

-韓國 茶道文化에 關한 思想的 考察

목 차

Ⅰ. 서론 ···························································································································· 1

1. 연구목적 ······················································································································ 1

2. 연구방법 및 범위 ······································································································ 3

Ⅱ. 茶道이론에 대한 전반적 고찰 ·············································································· 5

1. 현대의 茶論 ················································································································ 5

(1) 茶의 정의 및 종류 ······························································································ 5

(2) 茶의 유래 및 기원 ···························································································· 13

(3) 飮茶의 효능 및 목적 ························································································ 17

2. 전통적 茶道이론 ······································································································ 22

(1) 茶德론 ·················································································································· 22

(2) 陸羽의 茶經 ···································································································· 30

(3) 中 日의 茶文化 비교 ························································································· 36

Ⅲ. 한국의 茶文化史 ···································································································· 42

1. 삼국시대까지의 茶文化 ·························································································· 42

(1) 한국 茶(文化)의 기원과 전래 ········································································· 42

(2) 신라 茶文化의 전개양상 ·················································································· 45

(3) 삼국시대의 茶人들 ···························································································· 50

2. 고려시대의 茶文化 ·································································································· 51

(1) 茶의 종류 및 산지, 製茶法과 茶具 ······························································· 51

(2) 고려 茶文化의 전개양상 ·················································································· 54

(3) 고려시대의 茶人들 ···························································································· 57

3. 조선시대의 茶文化 ·································································································· 59

(1) 茶의 종류 및 산지, 製茶法과 茶具 ······························································· 59

(2) 朝鮮 茶文化의 전개양상 ·················································································· 60

(3) 조선시대의 茶人들 ···························································································· 64

Ⅳ. 韓國의 茶道文化思想 ···························································································· 67

1. 儒家的 사상 ·············································································································· 69

(1) 思無邪 ·················································································································· 69

(2) 中和 ······················································································································ 72

(3) 淸廉과 安貧樂道 ································································································ 76

2. 佛家的 사상 ·············································································································· 79

(1) 茶禪一如 ·············································································································· 79

(2) 喫茶去의 話頭 禪機 ··························································································· 83

3. 道家的 사상 ·············································································································· 86

(1) 忘과 無爲 ············································································································ 86

(2) 隱逸自適 ·············································································································· 89

(3) 神仙 仙人사상 ····································································································· 91

Ⅴ. 結論 ·························································································································· 94

【참고문헌】 ················································································································· 98

【中文抄錄】 ··············································································································· 103

Ⅰ. 서론

1. 연구목적

본 연구는 韓國의 茶道文化에 관련된 사상적 요소에 대한 고찰을 주요 목적

으로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茶道文化로부터 어떠한 사상적 요소가

도출되고 있으며, 동시에 茶道라는 정신세계에 문화적 기반을 제공하는 근거

로서 작용하고 있는 主流 思想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연구이다.

인류가 茶라는 기호음료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기록상으로도 2천여 년이 넘

는다. 물론 처음부터 茶가 기호식품으로 이용되었던 것은 아니며, 식용식물로

서 병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특유의 향과 맛, 각성효

과, 그리고 생산의 용이함 등으로 茶는 기호음료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차를 만들고 끓이고 마시는 절차가 하나의 문화-飮茶문화-로서 형

성, 발달하게 되었다.

즉 ‘茶文化’란 茶를 따서 製茶하고 물을 길어서 끓이고 마시는 모든 과정에

의해 생겨나는 정신적 물질적인 양식과 내용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茶와 관련

된 여러 기구와 행동과 사상, 그리고 풍속과 제도 등이 포함된다.1) 따라서 한

지역에 사는 민족의 오랜 飮茶文化는 그 민족의 생활관습과 민족적 특성, 심

미적(審美的) 능력, 정신적 가치체계 등 크게 변하지 않는 내면적 바탕을 지니

게 된다. 그러나 문화의 외적 현상은 인접문화나 정치적 상황, 경제와 사회현

상 등의 지배를 받아, 포용 전이 창조를 거쳐 변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기록상

으로 신라 때 이후로는 茶에 관련된 문화가 형성2)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므

로, 적어도 1400년 이상의 茶文化史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

사속에 우리 나라 고유의 茶(道)文化가 성립된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茶道는 이와 같은 飮茶文化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정신세계라 할 수

있으며, 茶道文化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문화를 질적으로 더욱 고급

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茶道라는 정신세계에 내포된 思想은, 우선 茶의 효능이나 특성, 그리

고 飮茶절차 등으로부터 특정한 의의를 도출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茶道 자체

에 내포된 본래적 의의를 재확인 또는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 現在 存在하는 모든 문화는 現在的 時代思想으로부터 그 存在에 대하

여 어떠한 형태로든 認可를 받게 마련이다. 만일 어떤 문화가 시대사상으로부

터 존재에 대한 용인을 얻어내지 못하면, 비주류로서 소외되어 끝내는 소멸되

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主流의 문화는 당시 시대사상의 절대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으며, 主流 思想으로부터 이론적 근거를 부여받음으로써, 그 문

화의 존재성에 대한 확인과 보장을 획득하는 것이다. 茶道文化 역시 당시의

主流 思想으로부터 철학적 의미를 제공받았으며, 이들 思想을 토대로 하여 茶

道理論에 대한 깊이와 공고성을 더하였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와 같이 茶道文化에 내포된 사상적 요소, 그리고 茶道이론

과 관련된 思想에 대한 고찰이 주된 기조를 이루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論者가

특히 관심을 두는 부분은 한국의 茶道文化와 관련된 사상이다. 즉, 茶라는 기

호음료 자체의 특성이 한국이라는 문화적 토양에서 어떠한 사상적 배경과 결

부되어 茶道로 理論化되었는가라는 점이다.

물론 茶道이론은 이미 중국에서 먼저 성립되었으며, 한국과 일본의 茶道이

론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陸羽의 茶經 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

다. 또한 主流思想이라는 점에서도 儒家 佛家 道家의 思想 자체가 中國에서 형

성되어 전파된 것이며, 더 나아가 文化圈 자체가 중국의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성립된 이른바 漢字文化圈 안에 속해있기 때문에, 중국적 茶道理論과 茶道文

化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중국의 文

化 圈域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고유의 특질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사상적 특질이나 문화적 정체성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면, 茶道

文化에 관해서도 한국에서의 독창적인 전개양상과, 그 이론적 근거로서 한국

의 儒家 佛家 道家 思想에 대한 연구도 가능할 것이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본 연구에서는 韓國 茶道文化와 관련된 思想的 요소를 주요대상으로 삼는

다. 이를 위하여 먼저 논문의 본론 전체를 3개의 장으로 나누어 茶道이론 전

반에 대한 고찰과, 韓國의 茶史, 韓國 茶道文化의 사상적 요소라는 구조를 갖

추었다.

Ⅱ장은 현대의 茶論과 陸羽의 茶經 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茶道이론에 대

한 연구로 구성되어 있다. 1절에서는 茶의 정의와 종류, 기원 및 유래, 茶의

효능에 대한 고찰이 주를 이룬다. 2절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의 茶德에 대한 관

점을 고찰함으로써 飮茶의 목적 및 효능에 관한 전통적 관점을 살펴볼 것이

고, 陸羽의 茶經 을 비롯, 중국과 일본의 茶文化의 전개와 각각의 茶道論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시도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와 고대의 茶道이론에

대한 전반적 고찰을 통하여, 茶道 내지 飮茶文化에 대한 도입적 역할을 담당

하게 된다.

Ⅲ장에서는 韓國의 茶文化史에 대하여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순서

로 고찰하였다. 이 장에서는 한국의 茶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이론으로부터

시대별 茶文化의 전개양상에 대하여 史的考察을 시도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시대별 중요한 茶人들과 行茶 및 飮茶의 주도적 전개양상에 대한 고찰도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마지막 절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茶道를 즐기며, 이와

관련된 사상을 제시하였거나 문장을 많이 발표한 茶人들에 대한 연구를 통하

여 韓國의 茶道文化의 모습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였다.

Ⅳ장 韓國의 茶道文化思想은 본 논문의 가장 중요한 본론부분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본 연구에서는 韓國의 茶道文化에 내포된 사상적 요소, 그리

고 茶道이론과 관련된 思想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

에서는 韓國의 茶道思想을 각각 儒家적 사상과 佛家적 사상, 그리고 道家적

사상으로 분석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儒家思想적 요소로는 思無邪, 中和,

淸廉과 安貧樂道를, 佛家思想적 요소로는 茶禪一如, 喫茶去의 話頭 禪機를, 道

家思想的 요소로는 忘과 無爲, 隱逸自適, 神仙 仙人사상으로 분석하였다.

본 장에서 주로 행하는 것은 茶(道)文化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사상에 대한

연구인데, 연구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외적

인 문화소산물로 茶具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으며, 습관이나 예절, 풍속(풍

습) 등이라는 측면에서 茶禮, 즉 飮茶와 行茶의 절차 전반에 관하여 연구를

할 수도 있다. 또한 현재 전해지고 있는 茶人들의 문헌 저술을 통해 연구하는

문헌학적인 방법도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 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세 번

째의 방법으로 茶人들의 茶와 관련된 저술에 관한 연구이다.

또한 연구의 과정에 있어서, 儒佛道 사상들 사이의 자체적인 상호 영향 및

교섭의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다. 즉, 儒佛道 사상이 역사적인 발전과 변천과정

속에서 각자의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각각 상호간의 영향과 교섭

을 통해 사상적인 도약과 질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儒家와 道家思想은 先秦 이전의 시기부터 접촉이 있었으며, 이는

論語 에서 이미 隱者的 생활모습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함께 섞여 드러난다는 점, 그리고 시대적으로 더 이후에 성립된 周易 繫辭

傳 의 경우 그 형성과정에 儒家와 道家의 사상적 만남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외에도 최근 고고학적인 연구성과의 하나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先秦時期 出土資料인 郭店 楚簡本 老子 에는 현재 通行本 老

子 와 달리 儒家적 요소가 많이 섞여 있는 점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儒家사상

과 道家사상의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후 唐代 불교의 흥성을 거쳐

禪佛敎의 등장과 宋明시기 新儒學의 등장, 全眞敎의 등장 등을 살펴 볼 때, 특

히 불교나 도교3)에서 이야기하는 三敎合一 또는 불교와 도교에 대한 援佛入

儒 援道入儒라는 성리학의 입장을 고려해보면, 또 한 차례의 儒佛道 三敎의 상

호영향 및 교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이 儒佛道 사상의 경계선 긋기

나 순수성을 찾는 작업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茶人, 즉 한 사상

가의 정신세계에서 儒佛道의 한 가지 사상만 나타나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무

리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여러 사상적 요소가 혼합 혼융되어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편의상 茶道文

化思想에 관하여 儒佛道 사상의 주된 경향성에 따라서 儒家‘的 要所’, 道家‘的

要所’, 佛家‘的 要所’로 구분을 하였다.

Ⅱ. 茶道이론에 대한 전반적 고찰

본 장에서는 한국의 다도문화와 사상을 논의하기에 앞서 茶道의 이론에 대

한 전반적인 고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의 茶論과 전통적인 茶道을 살

펴보게 될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茶의 효능과 飮茶의 목적에 대한 현대와

전통적인 관점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1. 현대의 茶論

(1) 茶의 정의 및 종류

본 절에서는 茶라는 용어의 정의와 차나무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茶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차의 종류를 발효의 유무나 정도, 제조방법, 찻잎의 채

취시기 및 품질, 산지 등에 따라 분류하였다.

오늘날 '차'라고 하는 것은 식사 후나 여가 시에 즐겨 마시는 기호음료를 말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차'라고 하는 것은 산다화과(山茶花科)에 속하

는 상록관엽수인 차나무(Camellia Sinensis (L))의 어린잎을 따서 가공하여

만든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차나무의 어린 싹을 가공하여 말린 것, 즉 손질

된 찻잎 또는 찻가루나 찻덩이를 마른차 또는 찻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

른 차에 물과 어울려서 만든 마실거리를 찻물이라고 부른다. 찻물에는 잎차나

떡차를 우리거나 끓인 맑은 차탕(茶湯)과, 가루차(末茶)에 뜨거운 물을 부어

휘저어 마시는 탁한 차유(茶乳)가 있다.1)

차나무의 학명은 Cammellia Sinensis(L)로서 린네(C.V. Linne)의 분류에

의하면 차나무과(Theaceae) 차나무속(Thea) 차나무(Sinensis)이다. 차나무는

사철 잎이 푸른 다년생 종자식물로서 잎은 어긋나기이며 긴 타원형으로 끝이

뾰죽하고 잎둘레에 톱니가 있다. 꽃은 9월에서 11월 사이에 걸쳐 흰장미나 흰

찔레꽃 같은 꽃이 피며, 동백나무 씨앗같은 열매는 꽃이 핀 이듬해인 10월˜

11월 사이에 영글므로 가을에 새 꽃과 열매가 만난 후(實花相逢樹)익어 터진

다. 지름은 1cm정도이며 번식 외에 기름을 짜서 쓰며, 그 찌꺼기는 비료로 쓴

다. 뿌리는 세근(細根)이 적고 깊이 흙 속에 내리며 주근은 2˜4m까지 뿌리를

내리는 심근성(深根性)이어서 이식이 어렵다. 그러나 교잡은 쉬워 잡종과 변종

이 많다2).

차나무에는 수십 미터의 교목이 있는가 하면 30cm 밖에 안 되는 관목이 있

고, 차 잎의 길이도 25cm의 대엽종이 있는가 하면 3cm 정도밖에 안 되는 소

엽종도 있다.차나무 품종은 차 잎의 크기에 따라 중국 소엽종과 대엽종 및 인

도 아샘종(인도대엽종) 버어마산종의 4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중국소엽종(Var.

bohea)은 여러 개의 줄기로 된 떨기나무(multistem : 관목) 이며, 길이 4˜5

센터미터의 단단하고 짙푸른 잎이 8˜12개 마주 달려 있으며 잎줄기는 6˜8

쌍이다. 나무크기가 2˜3m밖에 안되고 겨울철 추위에도 비교적 강한 편이라

품종을 개량하여 다량 생산할 수 있는 좋은 수종이다. 재배할 때는 수익성 때

문에 줄기와 가지를 잘라 1m 정도로 키운다. 중국의 동남부와 한국, 일본, 타

이완 등에 분포되어 있으며 주로 녹차용으로 쓰인다. 중국대엽종(VAr,

macrophylla) 또는 운남대엽종은 키가 5˜32m까지 자라는 큰키나무이며, 길

이 13˜15cm(엽장), 넓이 5˜6.5cm의 타원형의 큰 잎을 가지고 있으며 잎줄

기는 8˜9쌍이다. 중국의 사천성, 운남성에 분포하고 있다. 인도 아샘종(Var,

Assamica)은 높이가 10˜20m까지 자라며 줄기가 하나인 큰키나무(single :

교목)와 여러 가지 변종이 있다. 잎은 넓어서 22˜30cm이며, 엽질은 엷고 부

드러우며, 잎색은 짙은 농녹색이고 잎줄기는 12˜16쌍이다. 인도의 아샘

(Assam), 매니푸(Maipur), 카차르(Cachar) 지방에서 주로 생육된다. 버마산

(Shan)종은 높이가 4˜10m에 달하고 잎은 비교적 넓어서 15cm내외가 되고

엽색은 엷은 녹색이며 잎줄기는 열 쌍이다. 버마의 샨 공원이나 타이 북부지

방에 분포되어 있다

또한 차나무 재배의 북방한계는 북위 45°에 위치한 소련의 크라스노다르에

서 남위 30°에 가까운 아프리카의 나탈과 북부 아르헨티나이다. 많이 생산되

는 곳으로는 인도 스리랑카 공화국(실론섬 포함), 중국, 일본, 아프리카 여러

나라, 소련의 코카서스 지방, 남아메리카 일부 지방이다. 우리나라의 북방한계

는 북위30°30′˜35°30′로써 동경 126°10′˜128°10′이내의 지역에서 차나무가

자랐다. 한반도에서는 같은 위도에서도 겨울의 저온, 일교차, 봄의 지나친 건

조와 늦서리, 강우량 부족 등의 생육 제한조건 때문에 차나무의 북방한계는

북위 33°선 이남인 전라북도의 김제, 남원, 경상남도의 함양, 울산 이남에서

제주도까지이다.

그런데 이외에도 일반적으로 '전통차'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인삼차, 율

무차, 칡차, 유자차, 둥굴레차, 치커리차, 감잎차 등은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본래적 의미의 ‘차’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차대신 곡류나 식

물의 열매 혹은 뿌리 등 약재의 성분이 강한 다른 재료를 뜨거운 물에 끓여서

먹으므로 대용차(代用茶)라 부를 수 있다3). 이러한 대용차는 차가 쇠퇴하기

시작한 조선 중엽이후 성행하게 된 것이다. 근래에 유행하고 있는 커피나 코

코아 역시 茶와 더불어 3대 기호음료로 꼽히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차’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 린네가 분류한 학명 Camellia Sinensis에 포함된 차나무는 수천 종

이다. 품종마다 다 특성이 있지만, 차나무의 잎을 기준으로 잎이 큰 대엽종과

작은 소엽종으로 나눠보면 우리나라와 일본은 소엽종이고, 인도와 중국 일부

는 대엽종이다. 중국은 영토가 넓어 소엽종도 생산된다. 찻잎의 크기에 따라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이외에도 차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색(色), 향(香), 맛

(味)이 달라지고 또 이름도 다르게 부른다. 찻잎을 발효시켜 만드는가 발효시

키지 않고 만드는가에 따라 다르며, 또 쪄서 만드는가 볶아서 만드는가에 따

라, 제조방법 및 품질에 따라서도 구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茶의 종류는 산

지와 제조방법, 찻잎을 따는 시기 등에 따라 분류방법이 다양할 수 있지만, 발

효의 유무 또는 정도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먼저 발효를 기준으로 차의 종류를 나누어보면, 불발효차, 반(부분)발효차,

완전발효차, 후발효차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발효(醱酵)란, 적당한 온도와

습도에서 찻잎 속에 들어있는 탄닌(폴리페놀) 성분이 산화효소인 폴리페놀 옥

시디아제에 의해 산화되어 녹색이 누런 색(데아플라빈)이나 붉은 색(데아루비

킨)으로 변하면서 복잡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독특한 향기와 맛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발효가 많이 된 것일수록 마른 차는 검붉은 색이 되며 차 탕은 홍

색이 진하다. 발효가 적게 된 것은 차탕이 녹황색이나 황금색이다.

① 불발효차

불발효차란, 찻잎을 전혀 발효시키지 않고 엽록소를 그대로 보존시켜서 만

든 차이다. 한국, 일본, 중국북부지방과 베트남 등지에서 생산되는 녹차계열

(葉茶, 末茶)이 이에 속한다. 녹차는 찻잎을 뜨거운 솥에 넣어 덖거나 증기에

찐다. 열에 의해 잎 속에 들어 있는 효소의 산화작용을 억제시키기 때문에 발

효가 되지 않고 녹차가 된다. 녹차는 잎차(葉茶)와 가루차(末茶)로 나눌 수 있

는데, 잎차를 만드는 방법은 몇 가지이다. 찻잎을 솥에서 덖어 비벼 말리는 덖

음차와 햇볕에 말리는 일쇄차(日殺茶), 증기로 찌는 증차(蒸茶), 또는 증제차

(蒸製茶)가 있다4). 또한 녹차는 차를 따는 시기에 따라 차의 등급이 결정된다.

새봄 일찍 딴 차일수록 상품(上品)에 속한다. 우전(雨前), 세작(細作) 등은 4월

말에서 5월 초순에 처음 올라온 새순을 따서 만든 차이다.

② 반발효차

반발효차는 발효를 반만 시킨 차라는 뜻이지만, 실은 약 10퍼센트부터 65˜

70 퍼센트까지 다양하다. 찻잎을 햇빛이나 실내에서 시들리기와 교반을 하여

차잎의 폴리페놀 성분을 10˜70% 정도 발효시켜서 만든 것이다. 즉, 반발효

차는 우리의 장류처럼 효모에 의한 발효가 아니라, 찻잎을 따서 햇볕에 시들

리는 과정에서 잎 속의 성분 중에 일부가 산화되고, 그 과정에서 특유의 과일

향이 나며 어느 정도 산화가 되면 솥에 넣어 덖어 산화를 중지시킨다. 자스민

차는 15˜20%, 포종차는 30˜40%, 우롱차는 60˜70%, 황차는 85% 발효시

킨 부분 발효차이다. 대표적인 반발효차는 중국의 복건성과 광동성, 그리고 대

만에서 주로 생산되는 우롱차이다. 이외에도 발효의 정도와 찻잎의 종류, 제조

방법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차 색깔도 발효 정도에 따라 노란빛을 띤

녹색에서 자황금까지 다양하다.

③ 강발효차

찻잎을 완전히 발효시켜서 만든 홍차계열이 이에 속한다. 각국에서 생산되

는 홍차(black tea)는 95%이상을 발효시킨 차이다. 홍차의 제조과정은 시들리

기, 비비기 발효, 건조의 순서이다. 즉 홍차는 찻잎을 햇빛에 말리면서 손으로

비벼 잎 속에 들어 있는 효소 활동을 촉진시켜 건조하는데, 홍차의 특유한 향

기는 시들리기와 발효에 의한 것이고 맛은 탄닌 성분에 의한 것이다. 홍차는

1610년 전후 중국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에서 시작되어, 1828년 인도네시아

에 전래된 뒤 1834년 인도에 전파되었다.

④ 후발효차

녹차의 제조방법과 같이 효소를 파괴시킨 뒤 차잎을 퇴적하여 공기중에 있

는 미생물의 번식을 유도해 다시 발효가 일어나게 만든 차이다. 대표적인 차

는 보이차(普餌茶)이다. 원산지는 중국 운남성이며 현재는 광동과 사천지방에

서도 생산된다. 시들리지 않고, 녹차처럼 솥에 덖어 수분을 보유시켜 대나무

통이나 상자에 넣고 쌓아 공기 중의 미생물에 의한 발효가 일어나도록 숙성시

킨다. 숙성 기간이 길수록 고급으로 보는데, 따라서 약간 곰팡이 냄새가 나며,

차색은 붉은색을 띤다. 보이차를 생산하는 것은 변방 소수 민족들이 우유에

타서 마시기 때문이다. 우유에 타면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사라진다고 한다.

다음으로 제조방법에 따라 분류해본다면, 잎 차(葉茶)와 가루차(末茶)와 떡

차(餠茶)로 나눌 수 있다. 잎 차는 차나무의 잎을 그대로 볶거나 찌거나 발효

시키기도 하여 찻잎의 모양을 변형시키지 않고 원래대로 보전된 것을 말한다.

잎차의 종류는 부초 차, 증제차, 부분발효차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잎 차는

조선시대부터 성행하던 것으로 지금은 거의 모두가 이 잎 차를 많이 애음하고

있다. 잎 차의 재료는 차나무의 잎 오직 한 가지로서 제다 방법, 차나무 산지,

제다한 사람, 제다 회사, 찻잎을 채취한 시기 등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가루차는 시루에서 쪄낸 찻잎을 그늘에서 말린 다음 가루를 내어 만든

차로 점다(鮎茶)하여 차유(茶乳)로 마신다. 가루차는 떡차를 가루내서 만들기

도 하고 다른 하나는 잎차를 가루내서 만들기도 한다. 떡차를 가루내서 만든

가루차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루 차이고 잎차를 가루내서 만든 가루차는

요즘에 일본에서 유입된 방법이다. 이 분말 차는 삼국시대부터 애음해오던 것

으로 그 제조방법이 복잡하고 사용법이 까다로워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들어

쇠퇴5)해 버렸으나 앞으로 잎 차와 더불어 널리 보급되어야 할 것이다. 떡차란

찻잎을 시루에 넣고 수증기로 익혀서 절구에 넣어 떡처럼 찧어서 틀에다 박아

낸 고형차이다. 고려때에는 뇌원다(腦原茶), 유다(孺茶), 청태전(靑苔錢) 등의

떡차가 있었다. 동전모양으로 만들면 돈차(錢茶), 둥글게 만들면 단차(團茶),

인절미모양으로 만들면 병차(餠茶)가 되고, 벽돌이나 판자모양으로 만들면 전

차(塼茶)가 된다. 돈차는 삼국시대부터 유래된 것으로 이러한 차들 은 먹을 때

가루를 내어 마시기도 하고 그냥 그대로 덩어리로 우려 마시기도 하고, 전차

는 칼로 깎거나 부스러뜨려 끓여 마신다.

찻잎의 채취시기에 따라서도 분류해볼 수 있는데,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네 가지또는 다섯 가지로 나눈다. 봄차는 첫물차와 두물차로 나누며, 첫물차는

양력 4월 하순(곡우)˜5월 상순까지 사이에, 두물차는 양력 5월 하순˜6월 상

순까지 사이에 딴다. 여름차(세물차)는 양력 6월 하순˜7월 사이에, 가을차(끝

물차)는 양력 8월 하순(처서)˜9월 상순(백로) 사이에 잎을 딴 것이다. 찻잎을

일찍 딸수록 전질소 함유량이 많아서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찻잎의 채취시기에 따라 찻잎의 품질, 즉 찻잎의 여리고 굳은 정도가 달라진

다. 여기에 착안하여 구분해보면, 세작, 중작, 하작으로 나눌 수도 있다. 세작

(細作,上雀)은 곡우˜입하경에 딴 차로 잎이 다 펴지지 않은 창(槍)과 기(旗)만

을 따서 만든 차다. 우리나라의 곡우 5일전에 딴 것을 작설차라 하는데 이는

중국 다인들이 송나라 때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러온 이름으로 이는 싹의

모 양이 참새의 혀 모양을 한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중작(中雀, 보통차)은 잎

이 좀 더 자란 후 창(槍)과 기(旗)6)가 펴진 잎을 한두 장 함께 따서 만든 차

로 일명 명차(銘茶)라고도 한다. 하작(下雀, 거친 차) 은 중차보다 더 굳은 잎

을 딴 것으로 조차(粗茶)라고도 한다. 만일 찻잎을 따는 시기를 다섯으로 분류

하며, 그에 따라 품질의 분류도 좀 더 자세히 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다.

맏물차; 곡우전후 딴다.(4월20일전후) --- 우전 - 잎이 덜 핀 것이라 맛이

순하다.

첫물차; 5월5일전후(입하전후에 딴다) --- 세작(새의 혀처럼 생김)잎이 거

의 형태를 다 이룬 것

두물차; 5월 중순에 딴 차 --- 중작(세작보다 좀더 큰잎)

세물차; 5월 하순 6월초에 딴차 --- 대작(아주 잘 자란 큰잎)

끝물차; 8월하순-9월상순에 딴차 --- 막차 - 잎이 너무 세기 때문에

발효함

차의 채엽시기에 따라 카페인 아미노산등의 성분이 많고 적어지므로 품질이

좋고 나쁜 것이 구별되는데 첫물차와 두물차 등으로 분류하는 이유가 차의 맛

을 내는 함량이 높고 향기성분의 함량도 높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造茶, 즉 제다법에 따라 분류해보면, 부초차(釜炒茶: 덖음차와 볶

음차), 일쇄차(日殺茶: 햇볕에 말려서 만든 차), 증제차(蒸製茶: 찻잎을 수증기

로 찌는 법), 발효차(醱酵茶: 차잎에 있는 산화효소를 파괴하여 발효를 시킨

차), 자비차(煮沸茶: 뜨거운 물에 데쳐서 만든 차), 기타 유산균 발효차, 국균

발효차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차의 제조 공정과 제품의 색상에 따라 백차, 녹차, 황차,

청차, 홍차, 흑차, 향편차(花茶) 등의 7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백차는 솜털이

덮인 차의 어린 싹을 따서 덖거나 비비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건조한 것이며,

찻잎이 은색의 광택을 낸다. 향기가 맑고 맛이 산뜻하며 여름철에 열을 내려

주는 작용이 강하여 한약재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정

화(政和), 복정 등이 주산지이다. 녹차는 찻잎을 따서 바로 증기로 찌거나 솥

에서 덖어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차의 성분이 그대로 남아 있어 비

타민 C가 레몬의 5배˜8배나 함유되어 있고, 노화 억제나 암 예방, 식중독 방

지 등 여러 가지 질병의 예방과 억제 효과를 나타내는 카테킨 성분이 다량 함

유되어 있는 기능성이 큰 차이다. 황차(黃茶)는 녹차와는 달리 차잎을 쌓아두

는 퇴적 과정을 거쳐 습열(濕熱) 상태에서 차엽의 성분 변화가 일어나 특유의

품질을 나타내게 된다. 녹차와 우롱차의 중간에 해당되는 차로서 차엽 중의

엽록소가 파괴되어 황색을 띠고, 쓰고 떫은 맛을 내는 카테킨 성분이 약 50˜

60% 감소되므로 차의 맛이 순하고 부드럽다. 황차(黃茶)는 차잎의 색상과 우

려낸 수색, 그리고 차엽 찌꺼기의 세 가지 색이 모두 황색을 띤다. 우롱차(烏

龍茶)는 녹차와 홍차의 중간으로 발효정도가 20%˜65% 사이의 차를 말하며

반발효차로 분류된다. 중국 남부의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 그리고

대만에서만 생산되고 있는 중국 고유의 차로 차잎의 모양이 까마귀와 같이 검

고 용처럼 구부러져 있다고 하여 이처럼 불렸다는 설이 있다. 원래 우롱차는

60% 가량으로 발효 정도가 높은 차를 일컫지만 지금은 발효가 낮은 포종차

(包種茶)류를 포함해서 모두 우롱차로 불리워지고 있다. 황차에는 문산포종차

(文山包種茶)와 철관음차(鐵觀音茶)도 포함된다. 홍차는 발효정도가 85% 이상

으로 떫은 맛이 강하고 등홍색의 수색을 나타내는 차이다. 인도의 다즐링

(dazzeling), 중국의 기문(祁門),스리랑카의 우바(Uva) 홍차가 세계 3대 홍차

로 꼽히며, 차엽 그대로 우려 마시는 스트레이트티와 밀크를 첨가시켜 마시는

밀크티 형태가 있다. 흑차(黑茶)는 보이긴압차가 대표적이며, 찻잎이 흑갈색을

나타내고 수색은 갈황색이나 갈홍색을 띤다. 처음 마실 때에는 곰팡이 냄새로

인해 약간 역겨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몇 번 마시다 보면 독특한 풍미와 부드

러운 차맛을 느낄 수 있다. 중국에서는 잎차류보다 차를 압착하여 덩어리로

만든 고형차가 주로 생산되며 저장기간이 오래 될 수록 고급차로 간주된다.

또한 산지에 따라서도 차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 유명한 차

생산지(茶區)는 江北茶區, 江南茶區, 華南茶區, 西南茶區의 네 지역이다. 강북

차구란 장강을 기준으로 장강의 이북지역을 말하며, 하남성, 산동성일부, 섬서

성 일부가 이에 속한다. 차나무가 자라기에는 좀 추운 지방이다. 소엽종이 주

류를 이룬다. 중,소엽종은 영하16도에도 견딘다. 한국은 영하 18도에도 견딘

다. (소엽종)질소의 신진대사가 빨라 질 좋은 녹차를 생산한다. 강남차구는 장

강을 기준으로 강의 남쪽을 말하며 주로 상해부근이다. 중국의 남쪽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의 남부로 나뉜다. 홍차, 녹차, 무이차 등이 생산되며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여 연평균기온이 16-18도를 유지하고 강우량은

1300-1800ml으로 수분이 많다. 홍,황,갈색 토질로 녹차가 많이 생산된다. 중

소엽종으로 기문홍차 서호용정 군산은침이 주종이다. 화남차구는, 남령산 이남

에 있고 광동성, 복건성, 대만, 광서장족자치구, 해남성 등이 여기에 속한다.

주요 차는 우룡차이며, 소수의 홍차 녹차 화차도 생산된다. 서남차구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茶區이며, 야생 차밭이 많다. 운남성과 사천성, 서장자치구 일부

로 나뉜다. 운남성 남쪽(보이현-서상반나(思茅))에 1700년된 차나무가 발견되

었고 그곳은 특색이 있는 소수민족이 산다. 이 민족의 음다법은 원시적이며

다구도 특별하다. 사천성 쪽은 산악지대이다. 해발 700M 아래는 열대, 700M

는 온대, 700M 위는 한대로 나뉜다. 이 지역의 남쪽은 녹차, 서쪽은 타차가

질 좋은 무공해산이다.

(2) 茶의 유래 및 기원

본 절에서는 ‘茶’라는 말의 유래와 차나무 및 飮茶습관의 기원에 대하여 고

찰하였다.

‘차’라는 말의 유래는 중국의 복건성과 광동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에서

는 중국 내에서 생산된 차가 광동성(육로)과 복건성(해로)의 항구를 통해 세계

각국에 전파되므로 복건성의 발음인 'Tay'가 한국의 'Ta'발음에 영향을 주어 '

차' 혹은 '다'로 부르게 되었다. 그 외 각국에서 부르는 말을 보면 영국은 tea,

독일은 thee, 프랑스는 The로 중국은 cha (관동어계) 또는 Te (복건어계), 일

본은 cha (복건어계)로 부르고 있다. 이외에도 차를 가리키는 말로는 불경에

나오는 '알가(閼伽)'라는 것이 있고, 영어로는 '티(TEA)'와 세계 각국의 공용학

술어로 '데아(THEA)'가 있다. 세계 최초의 茶관련 서적인 陸羽의 茶經 에는

대부분 다(茶)나 씀바귀 도( )로 기록하고 있으며, 茶라는 용어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차를 나타내는 글자는 초두(艸)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무목(木)변을 쓰기

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초두와 나무목변을 합하여 쓰는 경우도 있다. 초두로 적으

면 당연히 차(茶)자가 되는데 그 글자는 개원문자음의(開元文字音義) 7)에 나온

다. 나무목변으로 적으면 도(木 )가 만들어 지는데 그 글자는 본초(本草) 8)에

나온다. 초두와 나무목변을 다 합치면 다(木茶)가 되는데, 그 글자는 이아(爾雅)

9)에 나온다.10)

차나무는 산다속(山茶屬)에 속하며 중생대 말기에서 신생대 초기에 생겨

난 식물로 식물학적인 기원은 대개 6천만˜7천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차나무(茶樹)의 원산지에 대해서는 19세기 이전의 학설은 없었다.

다만 차의 원산지는 중국이라고 여겨져 왔다. 1824년 영국군인(부루스)이 인

도에 와서 야생차나무를 발견했다. 그 이후부터는 차나무의 기원이 인도라고

알려 졌다. 그 후, 1892년 미국의 월쉬(J.M.Walsh)는 차의 역사와 비결 , 프

랑스 지나인의 식물 자연분류 , 그리고, 일본의 시무라 하시모또 등의 연구

보고에서 중국이 차나무의 원산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차나무의 육종

연구와 세포 염색체의 비교결과 중국종과 인도종은 같은 2n=30염색체를 가지

고 있고 세포 유전학상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으며, 형태학적인 연구 결과에

서도 구별 한계가 없기 때문에 차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의 운남, 사천일대라고

주장하였다11). 최근에는 중국학자들을 중심으로 유전 자원조사에 기초한 차나

무의 기원과 원산지론이 발표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에서 시작

된 차는 승려들이 불교를 전파하면서 함께 전해지거나 통상무역의 발전에 따

라 세계 각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당시 수양을 하는 승려들은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없애준다고 하여 차를 애용하였기 때문에 사원에는 항상 차가 준

비되어 있었다.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가 티벳왕에게 시집을 가면서 차

를 가지고 가면서 티벳에 음다 풍습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차가 외국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갖는 차를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시는 음료로서 이용된 것은 아니고,

음식과 약의 기능을 갖는 '식약동원(食藥同源)'소재로서 이용되기 시작하여, 天

地 神과 조상의 제례에 사용하면서 점차 일상의 생활 중에 마시는 기호 음료

로 정착되었다. 중국의 陸羽가 지은 다경(茶經) 중에서는 B.C. 2700년의 신

농(神農)시대부터 마셨다고 하는데, 실제적으로 신농시대 이전부터 차나무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5천년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신농씨(神農氏)가 처음으로 차를 마시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

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그 당시에는 먹을 것도 부족하고 음식에 대한 지식

도 적었기 때문에 신농은 산천을 다니면서 초목을 직접 입에 넣고 씹어 봄으

로서 식용 또는 약용으로 가능한 것인지를 실험하였다. 하루는 신농이 1백 가

지 풀을 먹고 이 중 72가지 독초에 중독되어 큰 나무 밑에서 휴식을 하고 있

었는데 마침 강풍이 불어서 나뭇잎이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 입안에 넣고 씹

어 본 결과 맛은 쓰고 떫으며, 향기가 있었으며 먹은 뒤에는 정신이 들게 되

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차에 대한 효능이 알려지고 널리 음용 되었다는 것이

다.

또 하나는 신농시대의 경우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병자들은 약재를 구해서

끓여 마시곤 하였다. 신농씨가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큰 나무 아래서 불을

지펴 물을 끓이고 있을 때, 몇 잎의 나뭇잎이 솥 안으로 떨어지면서 연한 황

색을 띄었다. 신농이 그 물을 퍼서 마셔 보니 맛이 쓰고 떫었으나, 뒷맛이 달

며 해갈 작용과 더불어 정신을 맑게 하는 작용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뒤부

터 음용 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러한 전설은 당시에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

라 말로만 전해 내려온 것이므로, 그 진실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도 증명할 수

는 없다. 그러나 과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약초의 주용 독성분이 알칼

로이드(Alkaloids)이므로 차의 폴리페놀(Poly phenols)성분과 쉽게 결합해 해

독의 효과를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폴리페놀 이외에도 카페인 등에 의

해 뇌에 대한 자극이나 강심작용으로 소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원시시대에는 약이라는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알려

진 효능을 통해 점차 차의 섭취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깊은 관계를 유지해 온 이유도 바로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용으로 이용된 보건

성 음료였기 때문이다.

문자상으로 나타난 차의 기록은 B.C. 1115년 주공단(周公旦)의 『이아석목

편(爾雅釋木編)』중에 보이고, 사기(史記)에 의하면 B.C.1066년 " 서주의 파

촉(지금의 중경, 성도 부근)지방에서 차의 재배가 행해졌다"고 하며, 이후 "춘

추전국시대(B.C. 722˜221년)에 한민족과 소수 민족에 의해 차의 재배가 본

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들은 인용된 책의 성립연대

나 차를 가리키는 글자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차문화에 대해 문헌상에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인 BC 59년 전한(前漢)시대 선제

(宣帝) 때에 왕포라는 선비가 만든 노예매매계약서 「동약( 約)」12)이다. 부

호이며 유명한 문장가인 선비 왕포가 과부인 楊惠로부터 노비인 便了라는 종

을 샀는데, 이 계약서에는 편료라는 남자종이 하는 일들이 조목조목 證文으로

적혀 있다. 그 중 한 가지 일로, “무양(武陽)에서 차를 사오고, 손님이 오면

차를 대접하는 일(烹茶)”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당시 이미

사천(四川)일대에서는 차가 사대부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시장에서 상품화되었

고 매매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차 마시는 풍습이 전한 시대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수서(隋書)에 등장하는 수나라 문제의 이야기가 있다. 수나라 문제가 황제

로 등극하기 전(581년 황제 등극), 꿈에 귀신이 나타나 그의 뇌골을 바꾸면서

부터 머리가 아팠다. 문득 만난 스님이 이르기를 "산 속에서 차가 있사오니

달여 잡수시면 마땅히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수문제가 이를 먹었더니 효

험이 있었다13).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차를 마시어 천하에서

차 마시기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고사는 스님으로부터 차 마시기를 권유를 받은 것, 차를 약으로 마셨다

는 것, 차 마시기의 풍습이 확산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독일의 브레트슈나이

데르(Bletschneider)는 이 글을 차 마시기의 기원으로 삼기도 하였다14).

인류가 처음 차를 복용할 때에는 차를 씹어서 먹었다가, 생것을 먹다가, 익

혀서 먹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마실 때는 솥에 삶아서 먹고, 우려서 마시게

되는 4-5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인류가 차를 마시게 된 것은 처음부터

마시는 기호음료로서 이용된 것은 아니고, 어린 찻잎을 먹어보아 해가 없고

특별한 효능이 있으므로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이다가 천지 신과 조상의 제례

에 사용되면서 점차 일상의 생활 중에 마시는 기호음료로 정착되었다. 그러므

로 음료 차의 유래는 농경사회의 식생활 문화와 더불어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飮茶의 효능 및 목적

본 절에서는 먼저 茶의 성분과 그에 따른 효능을 과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하

였고, 飮茶의 효능 및 목적에 대하여 현대적인 의미와 시각으로 고찰하였다.

다엽은 75%의 수분과 25%의 고형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5%의 고형

성분 가운데에는 폴리페놀, 카페인, 아미노산과 질소 화합물, 엽록소, 비타민,

불소 등의 무기질, 방향유, 유기산, 효소 등 300여 종류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차의 성분은 차나무의 품종, 재배조건, 채엽 시기15), 토질, 제조방법에

따라 다소 달라진다.

차의 성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폴리페놀(Polyphenol)이다. 탄닌(Tannin)

이라고도 하는 이 성분은 광합성의 양에 따라 증감되는 것으로, 일조량에 따

라 함유량이 많아 채엽시기가 늦어질수록 함량이 높아지며, 90℃이상의 고온

에서 용출된다. 폴리페놀은 카테킨, 플라보놀, 뉴코안토시아닌, 페놀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 중에서 카테킨(Catechin)이 75퍼센트로 제일 많다. 차의 카데

친류는 화학 구조상 수산기(-OH)를 많이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 물질과 쉽게

결합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중금속 제거나 항산화 작

용, 발암성분의 무력화, 해독작 용 등의 약리작용을 나타내게 된다.

다음으로 탄닌과 함께 차를 상징하는 중요 성분으로, 카페인(Caffeine)을 들

수 있다. 茶素(thein)라고도 하며, 상쾌한 쓴 맛을 나타내고 더운 물에 거의

100% 용출된다. 탄닌과는 반대로 채엽시기가 빠를수록 함량이 많고 또 차광

재배하면 증가한다. 그러므로 일찍 딴 고급차나 해가림 재배한 고급차에 카페

인이 더 많은 것이다. 차엽 중의 카페인은 1827년 오드리(Oudry)에 의해 발

견되었으며, 카페인 외에 카페인과 유사한 화학 구조와 생리작용을 하는 데오

브로민과 데오피린이 함유되어 있다. 그러나 커피에는 카페인, 코코아에는 데

오브로민만 들어있다. 이들의 생리작용을 살펴보면 대외 중추 신경 흥분작용

은 카페인, 데이피린, 데오브로민 순으로 나타나며 호흡기 흥분작용, 이뇨작

용, 기관지 및 혈관 확대작용은 데오피린이 가장 강하고 그 다음에 데오브로

민, 카페인 순이다. 따라서 차에 함유된 카페인의 대뇌중추신경에 대한 흥분

강심 이뇨 및 혈관 확대작용등은 카페인만 들어있는 커피를 섭취했을 때보다

그 작용이 완만하게 일어나며 지속 시간도 짧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녹차의 카페인 함량은 커피콩에 비해 높은 편이지만, 녹차의 카페인은

커피의 카페인과는 다른 결합형으로, 차에 포함된 아미노산의 하나인 데아닌

이 흡수를 억제하고, 데오피린이 중화를 시켜 흡수가 늦고 또 낮으며 중독성

도 없다. 녹차의 카페인은 아미노산 외에 폴리페놀, 비타민과도 결합해서 크림

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에, 낮은 온도에서 용해되지 않고, 체내 흡수도 잘 되지

않아 커피의 카페인과 같은 부작용은 발생하지 않는다16). 그리고 카페인은 물

이나 알콜 등에 잘 용해되며 특히 뜨거운 물에 잘 녹는 편이다. 그런데, 차를

우릴 때에는 낮은 온도로 우리기 때문에 차엽 중의 카페인 성분이 60˜70%

정도만 우러나 한 잔 당 카페인 함량 자체도 녹차가 커피보다 훨씬 적은 편이

다. 한 잔 당 카페인 함유량을 비교할 경우 차는 대개 27㎎ 정도인데 비해

(인스턴트) 커피는 66㎎으로 녹차보다 월등히 많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비타민이다. 녹차에는 비타민 A, B1, B2, E, P, 판토

텐산, 니코틴산, 엽산, 비오틴 등이 있지만, 가장 많이 포함된 것이 비타민 C

이다. 녹차에 함유된 비타민 C는 레몬에 비해 5˜8배나 많이 함유되어 일찍

부터 괴혈병의 치료제로 차가 이용되어 왔다. 물론 발효 정도나 재배 방법에

따라 비타민 C의 함량이 다르다. 찻잎을 찌거나 덖는 과정에서 효소의 작용을

불활성화시켜 건조시키므로 일반 채소 침출액 중의 비타민 C에 비하여 안정

되어 있으며, 90퍼센트가 효력이 큰 환원형이다. 이것은 침출액 중에 녹아있

는 카페인이나 탄닌, 당질등의 혼합물이 산화되는 것을 막아 한층 그 효과를

높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홍차의 비타민 C는 발효과정에서 산화효

소의 작용에 의해 산화되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비타민 C는 일찍 딴 차보

다 늦게 딴 차일수록 많이 포함되어 있다. 비타민 C는 반발효차보다 녹차에

월등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비타민B1 또한 정신건강에 중요한 성분

으로 당질 대사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에 당뇨병 치료의 보조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결핍되면 정신이 산만해지고 권태로워지며 집중력이 저하된다. 또 비

타민 P의 작용을 가진 루틴은 혈관벽을 강화시킨다. 비타민 E는 지용성이지

만 항노화, 항불임 및 항암 작용의 기능이 있다.

녹차에는 또한 아미노산과 질소화합물이 있다. 이것은 차의 독특한 감칠 맛

과 향미 성분의 주체로서 차의 품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미노산과 아미

드, 핵산, 단백질로 나눌 수 있지만, 단백질은 물에 용해되지 않고 아미노산과

아미드만이 수용성으로 용출된다. 25종류의 아미노산 중 데아닌(theanine, 단

감칠맛)이 60%정도로 차 맛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외에 글루타민산(신 감칠

맛)이 8.67% , 아스파라긴산(신 감칠맛)이 9.4%, 아르기닌(쓴 감칠 맛)이

13.4%, 그리고 세린이 8.14%등이다. 채엽시기가 빠른 차일수록 아미노산 함

량이 많아 여름차가 봄차에 비해 맛이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 차잎을 따기 전

검은 망을 쳐서 직사광선을 차단하면 아미노산이 풍부해져 차맛이 더 좋아진

다. 데아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작용은 카페인의 작용을 억제 즉, 카페인에 의

한 중추신경의 자극을 저해시키는 작용을 한다. 아미노산은 60℃정도의 저 온

에서도 잘 용출된다.

차엽 중에는 다양한 무기질(미네랄) 성분도 들어 있다. 칼륨, 망간, 마그네

슘, 철, 요오드, 셀렌, 아연, 사포닌, 불소, 칼슘, 나트륨 등이 5˜6% 정도 함

유되어 있다. 이 중 60˜70% 정도가 뜨거운 물에 용출되어 신진대사 및 차의

맛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구강보건성 성분인 불소가 수용성 형태로 40˜

200ppm 정도 들어 있어 치아 부식 예방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불소는 경화

한 잎으로 만든 여름차 등에 많이 함유되어 있다. 이 외에도 생체에 필요한

미량 필수 원소인 셀렌(항산화 및 암 예방), 망간(효소의 활성화) 그리고 아연

(피부염 방지 면역기능 저 하 억제)등도 다른 식물에 비해 많은 편이다.

주요 색소 성분은 엽록소 플라보놀 데아플라빈 등의 카데친 산화물 안토시안

등이며, 차 제품의 외관과 차 침출액의 색깔 등 품질평가의 기준이 되며 차의

맛과 향에 영향을 미친다. 색소 성분인 엽록소의 함량을 높이기 위해 검은 망

을 쳐서 재배하기도 한다. 발효를 시키면 붉은 색으로 변화하는 카로틴은 녹

차에는 풍부하지만, 홍차에는 거의 없고 반발효차에는 아주 적은 양이 들어있

다. 녹차의 경우는 차잎을 바로 열처리하여 산화효소를 파괴시킴으로써 엽록

소가 남아 녹색을 띤다. 반면 우롱차나 홍차는 시들리기나 비비기를 하는 과

정에서 엽록소가 급격히 분해되어 흑색이나 갈색으로 변화되고, 또 카테킨의

산화에 의한 발효 작용으로 오렌지색과 선홍색의 성분이 생기게 된다.

이외에도 향기성분인 방향유가 함유되어 있다. 차엽 중의 향기 성분은 녹차

는 약 200종, 홍차의 경우에는 300종이 확인되고 있으며 알콜류가 전체의

80% 정도로 가장 많으며 기타 카보닐화합물 케톤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

적으로는 매우 적어 0.005˜0.03%에 불과하다. 유기산, 탄수화물인 다당류,

효소 등의 많은 성분이 있다.

또한 사포닌이 차잎중에 0.1%정도 함유되어 있는데, 가루를 마실 때 나는

거품의 주요 성분으로 약간의 쓴 맛과 아린 맛을 낸다. 거품을 형성하는 작용

이 있기 때문에 가루차(末茶)를 마실 때 차선으로 저어 거품을 내어 마시고

있다. 사포닌에는 거담 작용이나 소염 작용, 항균작용이 있다.

그리고, 생차잎을 알루미늄 봉투에 넣고 진공 상태에서 처리하면 고혈압 치

료 성분인 r-Aminobutylic acid가 생성된다. 여기에는 혈압 강하작용이 있다.

그 외에, 탄수화물과 유기산도 포함되어 있다.

茶의 효능은 앞서 신농씨의 해독 살균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먼

저 藥用적인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이는 예로부터 다경 을 비롯하여 東

醫寶鑑 , 本草 와 같은 의학서적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며, 현대에 와서

는 과학의 발달로 더욱 다양하고 정확한 효능이 밝혀지고 있다. 차의 효능 중,

오늘날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항암효과이다. 항암효과는 차의 성분 중

카테킨에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고 다음으로 사포닌, 셀렌, 카로틴, 비타민,

그리고 찻잎의 엽록소나 섬유소 등에도 있다.

그리고, 차를 마시면 카페인의 각성 강심 이뇨작용에 의해 대뇌중추신경을 알

맞게 흥분시켜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 매우 효과적이다. 따라서 사고력 판단력

이 증진되고 혈액의 순환과 신장의 기능을 높여 배뇨를 활발하게 하여 피로물

질의 체외 배출을 촉진함으로써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활동력을 증진시킨다.

일반적으로 차를 마시고 40분 후에 흥분 및 각성 작용이 나타나 1시간 30분

정도 지속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차의 카페인은 비타민 C와 폴리페놀 등의

유효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커피의 카페인과는 달리 신체의 기능저하나 부작

용도 없으며, 오히려 간의 약물대사 기능을 향상시킨다고 한다17).

그리고 이러한 카페인의 중추신경흥분 및 이뇨작용과 탄닌 성분에 의한 주

독(酒毒)의 해독작용이 이루어지고, 비타민C의 상승효과에 의해 간장의 알코

올 분해효소의 활성 및 배설이 촉진되어 숙취에 효과적이다.

차에는 살균 및 방부, 항염 작용도 들어 있다. 탄닌 성분은 우롱차, 홍차의

산화형 폴리페놀 성분보다 항염성 및 항균성 효과가 크며 장내 세균의 생육을

억제하는 작용이 있다. 차의 살균력에 대하여 오오사까 시립 위생소 야마구찌

박사의 보고에 따르면, 이질痢疾균을 진하고 찬 茶汁에 넣으면 홍차는 이 균

이 20분, 녹차에서는 30분이면 완전히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커피에는 아무

런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18)

또한 탄닌 성분은 유독물질과 결합하여 장에서 흡수되지 않는 화합물이 됨

으로써 해독작용도 한다. 유기수은, 카드뮴, 납, 구리 등과 같이 호흡기나 소

화기를 통해 체내에 들어가게 되면 배설되지 않고 축적되는 중금속, 담배, 모

르핀 등의 독성물질과 쉽게 결합하여 침전물을 생성한다.

그리고 차의 탄닌 성분은 긴장성을 높여 위 운동을 활발하게 하여 식욕을

촉진시키고 위 점막을 보호하며 장관에 대해서는 긴장성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어 신경성 변비에도 효과가 기대된다.

차에는 노화 방지 및 피부 미용 효과도 있다. 노화는 산화되기 쉬운 불포화

지방산을 섭취했을 때 생기는 과산화지질에 의해 세포조직 중에 세포막이 파

괴되므로써 일어나는데 녹차는 탄닌 성분인 카데친에 의해 과산화지질의 생성

이 억제되어 노화가 방지되며 또 커피에는 없는 비타민 C가 있어 항산화력을

높여 준다. 또 녹차는 알카리성 무기질, 비타민C을 비롯한 B군을 함유한 알카

리성 음료로 피부에 탄력성을 주며 멜라닌 색소의 생성을 저해하여 피부를 곱

게 하여 준다. 이와 같이 차의 카테킨과 비타민 C, E, 셀렌, 폴리페놀이 가지

고 있는 항산화작용은 뇌와 피부 등 우리 몸의 노화를 예방하며, 기억력과 판

단력도 증진시킨다.

차에는 충치 예방효과도 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차에 구강보건성

성분인 불소가 가용성 형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 치아가

단단해지고 산에 대해서 저항하는 힘이 커지게 되어 치아우식이 예방된다.

그 외에도 차의 탄닌 성분 및 엽록소는 강력한 방취 및 탈취작용을 한다.

이처럼 茶 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능 외에도 飮茶가 가져다 주는 효과는 또

있다. 사람들이 차를 마실 때, 단순히 건강만을 위해서 마시는 것이 아닌 것처

럼, 신체적인 건강 외에도 마음의 안정을 포함한 정신적인 효과 역시 飮茶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 역시 전통적으로 강조된 차의 공덕(茶德)이라

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스트레스(stress)라는 측면에서 살펴

보겠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문명은 현대인에게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감을 유

발시키고, 인간관계에서도 극도의 불안감과 소외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러한

스트레스에 대하여 飮茶는 분명 일정정도의 효과가 있다고 하겠다. 물을 보고

따르고, 마시면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긴장을 이완시키며 뇌파를 안정시킬 수

있다. 이는 반드시 녹차가 아닌 대용차로서도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하

겠다. 또한 녹차는 어느 정도의 각성효과도 겸하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후

나 정신이 해이해졌을 때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19)

2. 전통적 茶道이론

(1) 茶德론

飮茶의 절차와 과정 전반에 걸쳐 정성스러운 행동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수

행하며, 그 가운데 형이상학적(또는 철학적)인 관념을 투영하는 것이 茶道라

면, 茶德은 茶道를 통해 드러난 작용이며 飮茶의 현실적인 목적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즉 茶의 효능과 飮茶의 효능에 대하여, 전통적인 사고

에 입각하여 표현한 것이 茶德이라는 개념이다. 茶德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

으로는, 정영선씨의 다음과 같은 정리가 돋보인다. 茶의 덕은 마른 茶 혹은 찻

물의 품성으로 인해 생겨나는 茶의 유익한 능력을 말한다. 茶의 덕은 茶의 功

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며, 때로는 茶의 덕이 茶가 지닌 본래적 성질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 茶의 性이라고도 한다. 茶의 德은 마른 茶나 찻물이 지니는 본래

적인 性으로 인한 것이 있고, 그러한 性의 茶를 끓이는 행위에서 얻어지는 것

을 포함한 것이 있다20). 즉 茶德, 茶功, 茶性 등으로 표현되는 개념은 茶의 본

래적 성질과 또한 飮茶生活에서 주어지는 효능이라는 두 측면을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차는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분이 건강증진에 좋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서와 이성을 본연으로 잡아주는 역할까지 해 주므로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

인 면으로 인간을 건강하게 해 주는 음료이다. 그러므로, 茶의 性으로 인한 德

은 주로 육체적인 건강에 효과가 있는 것이며, 또한 茶의 性과 차를 끓이는

일이 결합된 茶생활에서 연유하는 德은 주로 인간의 정신적 정서적인 측면에

효력을 미치는 것이라 하겠다.

먼저 前者인 茶의 性으로 인한 德에 대해서만 살펴보면, 茶란 앞서의 신농

씨 이야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해독과 살균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동

의보감 에도 茶의 효능에 대하여 ‘숙식을 소화하며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소

변을 잘 나오게 하며 갈증을 멎게 하고 잠을 적게 하며 독을 해독시켜 준다’

‘졸음이 덜 오게 한다. 따뜻하게 하여 먹으면 잘 조는 것을 멎게 한다’21) 는

등의 효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초의선사는 東茶頌 에서 다음과 같이 차

의 9가지 德을 지적하고 있다.

1 머리를 맑게 해 준다.(利腦)

2 눈을 밝게 해 준다.(明眼)

3 귀를 밝게 해 준다.(明耳)

4 밥맛과 소화를 촉진시켜 준다.(口味助長)

5 술을 깨게 해 준다.(醒酒)

6 추위를 막아준다.(防寒)

7 갈증을 멈춰 준다.(止渴)

8 피로를 풀어 준다.(解勞)

9 더위를 물리친다.(斥暑)22)

정조의 사위인 洪顯周의 어머니 令壽閤 徐氏(1793-1865) 역시 ‘여러 해 동

안 차를 끓였으니 神功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茶德이 있음을 확신하였다.23)

그리고 경남 함양군 마천 지방에서 김기원씨가 채집한 차민요에도 차가 약

으로 쓰인 흔적이 남아있다.

초엽 따서 상전께 주고

중엽 따서 부모께 주고

말엽 따서 남편께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지어

봉지 봉지 담아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병 고치고

무럭무럭 자라나서

경상감사 되어주오.24)

그 외에도 당나라의 육우가 저술한『茶經』에서는 차의 효용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차의 용도에 대해서는, 맛(성품)이 지극히 차서 행실이 바르고 검소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합하다. 만약 열이 나고 갈증이 나거

나 번민하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눈이 껄끄럽거나 팔다리가 번거로워 뼈마

디가 잘 펴지지 않으면 너댓 번만 마셔도 제호25)나 감로처럼 효과가 있

다26).

‘맛이 지극히 차다(味至寒)’라는 부분은 음식물이나 약물의 성질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본초학에서는 약품을 성(性 氣)과 미(味)로 구분하는데, 性에는

寒 熱 溫 凉 平의 네 가지가 있고, 이 가운데 寒은 열성경향인 양증(陽症)을 다

스린다. 그런데, 차의 맛은 쓰고 성질은 차다. 즉 味苦性寒하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차의 성미(性味)를 味至寒으로 나타낸 것은 표현상 약간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리고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행실이 바르고 검소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

이 마시기에 가장 적합하다(爲飮最宜精行儉德之人)’라는 부분은 茶가 정신수양

을 위한 형이상학적인 도덕음료라는 것을 암시해주는 부분임과 동시에 육우의

다도정신을 ‘검덕’으로 규정짓게 해주는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위

에서 이야기했듯이 茶의 性과 차를 끓이는 일이 결합된 茶생활에서 연유하는

德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茶德을 가장 잘 드러낸

경우로 唐나라 末期 劉貞亮의 차가 일으키는 10가지 덕목(茶扇十德) 을 들

수 있다.

첫째, 차는 막힌 기운을 풀어준다.(以茶散鬱氣)

둘째, 차는 졸음을 깨게 한다.(以茶覺睡氣)

셋째, 차는 생기를 길러 준다.(以茶陽生氣)

넷째, 차는 병을 제거한다.(以茶除病氣)

다섯째, 차는 예절에 이롭다.(以茶利禮)

여섯째, 차로써 공경을 표현한다.(以茶表敬)

일곱째, 차는 맛을 흠상한다.(以茶嘗味)

여덟째, 차로써 몸을 닦는다.(以茶修身)

아홉째, 차는 마음을 바르게 한다(以茶雅心)

열째, 차로써 도를 행한다.(以茶行道)27)

여기에서는, 茶에 병을 치유하는 원리도 있지만 차로써 정신을 맑게 하고

생기를 기르는 내적인(약리적) 효능과 수양의 덕을 갖추고 바른 길로 향하는

전인적인 역할을 만드는 외적인(수행적) 효능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알려 주

고 있다.

한편, 일본 華嚴宗의 승려 묘우에(明惠)上人(1173-1232)는 다음과 같은

茶の十德 28)을 차솥에 새겼다고 한다.

첫째, 여러 하늘이 보호하신다.(諸天加護)

둘째, 부모님을 효성스럽게 봉양한다(父母孝養)

셋째, 악마는 항복한다(惡魔降伏)

넷째, 잠을 절로 제거한다.(睡眠自除)

다섯째, 오장이 조화된다(五臟調和).

여섯째, 병이 없어지고 재앙이 그친다.(無病息災)

일곱째, 친구와 화합한다(朋友和合)

여덟째,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다.(正心修身)

아홉째, 번뇌가 소멸된다(煩惱消滅)

열째, 죽음에 임하여 환란이 없다.(臨終不亂)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諸天의 보호와 악마의 항복등 주술적 의미가 부여

된 것이라 할 수 있다.29) 한편 묘우에 스님의 茶德論은 唐代 劉貞亮의 차가

일으키는 10가지 덕목(茶扇十德) 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며 죠우오우(紹 ,

1502-1555)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茶の十德 을 일본의 茶德論으로 제기한

경우30)도 있다.

첫째, 여러 부처가 보호해준다.(諸佛加護)

둘째, 부모님을 효성스럽게 봉양한다(孝養父母)

셋째, 마왕을 항복하게 한다(天魔隨身)

넷째, 수면이 조절된다.(睡眠自在)

다섯째, 오장이 조화된다(五臟調和).

여섯째, 재앙이 그치고 목숨을 늘인다.(息災延命)

일곱째, 오래 산다(壽命延長)

여덟째, 하늘에서 보호한다(諸天加護)

아홉째, 번뇌에서 자유롭다(煩惱自在)

열째, 죽음에 임하여 침착하다.(臨終不亂)31)

이것 역시 차를 마시면 항상 임종의 대비가 되어 있다고 한 점과 주술적 의

미가 부여된 점에서 묘우에의 것과 일치한다. 사실상 대략적인 내용에 있어서

둘은 매우 흡사하며, 만일 묘우에의 茶德論이 劉貞亮의 茶扇十德 을 요약한

것이라면, 죠우오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한편 金宗直

(1411-1492)의 제자인 李穆(1471-1498)은 茶賦 를 지었는데, 이는 중국이

나 일본의 茶德과 비교하여 매우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

다.32) 李穆은 먼저 차의 공과 덕을 구분하였는데, 직접적인 효능으로 5功을

들고 이어서 6德을 들었다33).

그 서늘함이 옥당에서 일어남을 당하여, 밤늦게 책상에서 만 권 책을 독파

하려고 잠시도 그치지 않으며 동생34)은 입술이 썩고 한자35)는 이빨 사이

가 열리도록 되풀이하여 읽을 때도 그대가 없었다면 누가 그 목마름을 풀

어주었으랴 그 공이 첫 번째이다.

다음은 그 부를 한나라의 궁전에서 읽고 양나라의 감옥에서 글월을 올림에

그 모양이 물기가 마르고 그 빛깔이 초췌하여 창자가 하루에 아홉 번 구부

러져 도는데, 마치 불길이 답답한 가슴에 타오르는 듯 하였으니, 그대가 없

다면 누가 그 울적함을 풀어 주었으랴. 그 공이 두 번째이다.

다음은 한 통의 편지를 여러 나라에 펴서, 사신과 인연을 맺어 여러 제후

에게 분부를 전하니, 받들어 임하여 읍하고 사양하는 예를 이미 베풀고, 계

절의 안부로 위문함을 장차 마치려 함에 네가 없다면 손님과 주인의 정을

누구한테 모으랴. 그 공이 셋째이다.

다음은 天台(절강성)의 幽人(은자)과 靑城(사천성)의 羽客(신선)이 돌 모서

리에서 숨을 내쉬고, 솔부리를 곱게 이겨 주머니 속의 방법으로 시험하고

자 함에 뱃속에서 우레소리가 갑자기 울리니, 그대가 없다면 삼팽의 벌레

를 누가 정복하였으랴. 그 공이 넷째이다.

다음은 금곡의 잔치가 파하고 토원의 옛날 법도로 돌아가니 숙취는 아직

깨지 않아서 간과 폐가 찢어질 듯하였으니, 네가 없다면 오경의 숙취를 누

가 그치게 하였으랴. 그 공이 다섯째이다36).

茶賦 에 적힌 5功을 요약해보면 첫째 책을 볼 때 갈증을 없앤다, 둘째 울

분을 풀어준다, 셋째 손님과 주인의 정을 화합하게 한다, 넷째 뱃속 기생충으

로 인한 고통을 없애준다, 다섯째 취한 술을 깨게 한다는 것들이다. 이어서 6

德에 관한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다.

나는 그 후에 차가 또 여섯 가지 덕이 있음을 알았다. 첫째로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같은 덕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고

둘째로 유부(兪附, 黃帝때 명의)나 편작(扁鵲, 전국시대의 명의)과 같은 덕

이 있어 병을 낫게 하고

셋째로 백이나 揚震과 같은 덕이 있어 기운을 맑게 하고

넷째로 이로(二老 : 伯夷와 呂望)나 사호(四晧 : 東園公, 綺里季, 夏黃公,

角里先生)와 같은 덕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다섯째는 황제나 노자와 같은 덕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신선과 같게 하

여섯째는 주공이나 공자와 같은 덕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예의롭게 한

다37).

李穆은 중국이나 일본의 茶德論과는 달리 섬세한 부분까지 차의 功과 德을

분류하고 있다. 그의 茶德論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심신을 수양하는 도구로

써 사용된 茶의 덕행과 효능에 대한 덕목이다. 이와 같은 心身修養의 측면은

茶山 정약용이 ‘茶가 나쁜 버릇을 고치는 公은 기록할만 하다38)’라고 한 것이

나 宋代 朱熹(1130-1200)가 ‘건차는 중용의 덕과 같고 강차는 백이숙제의 淸

德과 같다’39)고 한 것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드러난다.

이상에서 보면 전통적으로 생각해 온 茶德에는 신체적 건강을 위한 보건약

리적 측면, 사회적 의사소통과 화합의 도구적 측면, 정신적인 평화와 자유 그

리고 道의 수행이라는 형이상학적 수양적 측면 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陸羽의 茶經

陸羽의 茶經 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茶에 관한 전문서적이며, 중국의 다

도40)는 陸羽가 茶經 을 짓고(760년), 호주지사인 안진경이 삼계정을 지어 육

우에게 기증한 773년 호주의 소계에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41). 누노메

죠후(布目朝 譯)의 中國の茶書 에서 ‘茶經 이후의 茶書의 역사는 茶經의 各

論的 전개라 하겠다’라고 하여, 茶經 이후의 茶書가 茶經의 각론적 해설적 보

완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42).

먼저 陸羽가 어떤 사람인지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그가 저술한 茶經 의 구

조 체계와 대략적인 내용, 그리고 의의와 茶經 에 드러나는 茶道이론에 대하

여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陸羽의 일생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출생년도나 집안, 출생지는 알 수 없다.

상원 2년(761년)에 스스로 저술한 陸文學自傳 이라는 자서전이 있긴 하지만,

이에 대하여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新唐書 陸羽傳 에

는 그의 姓인 陸씨도 그를 양육한 호북성 천문현의 복주경릉(復州竟陵)에 있

는 용개사(龍蓋寺)의 지적선사(智積禪師)의 姓을 따른 것으로 되어 있다.43)

당나라 현종황제의 개원 15년(727년) 새벽에 지적선사가 산책을 하다가 갈

대밭 속에서 시끄러운 기러기 울음 소리와 갓난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듣고 아

기가 버려져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아기를 데려와 기르기로 하고 성은

陸으로 하기로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姓이 다른 양자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

았으나 주운 아이는 세 살 이하의 경우에 한해서 주워 키운 사람의 姓을 따른

다고 하였다.44) 이렇게 하여 육우는 용개사의 지적선사 아래에서 양육되었으

며, 9살 때부터 불경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불경 외의 유학의 경전

을 배우고 싶어하였고, 이를 허락하지 않던 지적선사는 육우에게 절간의 마당

쓸기, 뒷간 청소, 흙벽 바르기, 기왓장 갈아입히기, 120마리의 소 기르기 등의

수행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소를 먹이면서도, 대나무 채찍으로 소의 등에 글

을 쓰면서 유학을 공부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 용개사를 뛰쳐나

와 광대패(伶黨)의 일원이 되었다. 한때 스님이 찾아와 불경외에 外典공부를

허락할 테니 樂工 노릇을 그만두고 돌아올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으나 거절하

였다. 장성한 그는 이름을 짓기 위해 점을 쳐서 건괘가 점괘로 나아간다(蹇

之漸) 는 괘를 얻었다. 이 괘에는 큰 기러기(鴻)가 뭍(陸)으로 나아간(漸)다

그 깃(羽)은 거동에 쓸 수 있으니 길하다 라는 해설이 달려있는데, 여기에 기

인하여 이름을 羽라 짓고, 字를 鴻漸이라고 지었다. 당 현종의 천보 년간

(742-755), 영( )땅에 사는 사람들이 창랑(滄浪)에 모여서 술을 마실 때, 도

읍의 관리가 육우를 초빙하여 주연 광대의 사범으로 삼았다. 그 당시 관객 중

에는 왕실의 일족으로서 경릉으로 좌천되어 내려온 李齊物이 있었는데, 그가

육우를 기특하게 보아 육우에게 詩集을 주면서 공부하기를 권했다. 육우는 이

제물의 후원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비서가 되어 민정시찰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 그 후 천보 연간에 왕한(王 )의 모반에 즈음하여 그의

형인 왕홍(王 )과 근친이라는 이유로 강릉의 태수로 좌천된 崔國輔와 교분을

맺게 되어 함께 차시며 찻물을 품평하곤 하였다. 이처럼 당대의 명사와 교류

를 시작하였고, 이들의 천거로45) 숙종 상원 2년(761년) 정육품인 太子文學이

라는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를 陸文學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이 때 임명된 벼슬 때문이다. 그 후 대력 7년(772년)에 安眞卿이 호주자

사로 부임한 후 그와 교분을 맺게 되어 안진경의 휘하에서 韻海鏡原 360권의

편찬에 종사하였다. 안진경은 또한 茶經 만 저술하고 아직 茶室을 마련하지

못한 육우를 위해 대력 8년(773년) 호주의 서남 30리 지점에 있는 저산( 山)

묘희사(妙喜寺)의 동남쪽 경내에 삼계정(三癸亭)이라는 茶亭을 지어 육우에게

기부하였다. 육우는 만년을 소주 지방에서 보내다가 당나라 덕종 정원 19년

(803년) 사망하였다.

그는 살아 있을 때에는 茶仙으로, 죽은 후에는 茶神으로 숭앙받았다. 그의

외모는 추하며, 말더듬이였으나 말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 대하여 엄격할 정도로 잘 지켰다고 한다. 만구지(蠻 志) 의 차에 불

을 당긴 사내 종을 묶어서 불에 던지다(茶 縛奴投火) 條에는 다음과 같은 일

화가 보인다.46)

육홍점이 월강의 차를 따서 작은 사내 종으로 하여금 불에 쬐어 말리는 것

을 지켜보게 하였는데, 사내종의 잘못으로 졸아서 차가 그을리고 빛나게

되었다. 화가 난 홍점은 사내 종을 쇠줄로 묶어 불 속에 던져 버렸다.

명나라의 도융(屠隆)은 고반여사(考槃餘事) 의 茶箋 에 이 대목을 인용하

고 ‘잔인하기가 이와 같았으니 그 밖의 일은 볼 것도 없으리라’라고 평하였다.

이 일화로서도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육우가 자신의 일이나 어떤 규칙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며, 때로는 신경질적일 정도로 급한 성격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육우의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君臣契 3권, 姓源解 30권,

江表四姓譜 8권, 南北人物志 10권, 吳興歷官記 3권, 湖州刺史記 1권,

茶經 3권, 占夢 3권, 顧渚山茶記 2권, 山記 , 惠山記 , 虎邱山志 ,

水品 , 毁茶論 , 敎坊錄 , 唐五僧詩 , 靈隱天竺二寺記 이상의 책들은 육

우가 지은 陸文學自傳 과 南宋의 비곤(費袞)이 지은 梁谿漫志 에 보인다. 이

들 중 현재 전하는 것은 다경 과 육문학자전 , 그리고 고저산다기 의 일부

분 뿐이다.

육우의 茶經 이 저술된 것은 상원 2년(760년) 경으로 추정되며, 그 구성은

上中下의 세 권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조와 목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上卷

1.차의 기원

2.차의 도구

3.차를 만드는 법

中卷

4.차의 그릇

下卷

5.차를 삶는 방법

6.차의 효능 차 마시는 법

7.차의 역사

8.차의 지리적 환경 및 산지

9.차의 생략 略式

10.차에 대한 그림

이 가운데 1.차의 기원에서는 茶에 대한 식물학적인 설명과 문자학적인 정

의, 그리고 茶가 자라는 토양에 따라 생육방법과 효능등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다. 2.차의 도구에서는 차를 따서 담는 바구니, 차잎을 찌는 솥 등등 茶를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들을 열거하고 있다. 3.차를 만드는 법에서는 차를 따는

시기, 차를 딸 때의 날씨, 좋은 차와 나쁜 차의 구별, 종류, 차를 따는 일에서

부터 봉하기까지의 일곱단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4.차의 그릇에서는 탕

을 끓여 차를 찌기 위한 풍로, 그리고 풍로의 연료가 되는 숯을 넣는 숯바구

니, 숯을 쪼개는 도구인 탄과, 부젓가락, 솥, 교자상, 숯집게, 차를 저장하는

종이주머니, 고형차를 분말하는 차멧돌, 분량 도수등을 척도하는 則, 물통, 물

을 거르는 자루, 표주박, 대젓가락, 소금그릇, 숟갈, 물을 식히는 그릇, 찻잔,

찻잔을 담는 그릇, 札, 개숫물 그릇, 차 찌꺼기 담는 통, 차 행주, 차 진열상,

차 기구를 담는 모듬 바구니등을 열거하고 있다. 5.차를 삶는 방법에는 차를

구울 때 신중해야 한다는 것, 차를 불기운으로 건조시킬 때 불기가 통할 정도

에서 끓여야 한다는 것, 차를 달이는 불에는 숯을 쓰는 것이 좋고 그 다음은

굳은 장작을 쓰며 장작은 진이 많이 나오는 나무나 오래된 나무는 쓰지 않는

다는 등 재료 선택의 유의점을 들고, 차를 달이는 물에 대한 품평등을 논하고

있다. 6.차의 효능에서는 차의 종류와 효능과 마시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7.

차의 역사에서는 삼황시태부터 오나라 까지 차의 역사적 문헌을 열거하고 있

다. 8.차의 지리적 환경 및 산지에서는 陸羽 시대의 차의 산지에 관하여 소상

하게 언급하고 있다. 9.차의 생략 略式에서는 차를 만드는 도구를 생략할 수

있는 略의 형식을 말하고 있다. 10.차에 대한 그림에서는 茶經 의 본문을 적

어 茶席의 한쪽 벽에 걸어 놓는 그림을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고찰해 본 바와 같이, 茶經 은 최초의 茶관련 전문서적이라는 점

이외에도,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茶經 은 茶에 대한 단순한 정

의나 해설만이 나열된 것이 아니라, 茶道의 源流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茶와 飮茶에 대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이

서적은 중국의 풍속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茶經 을 통해 드러나는 陸羽의 茶道觀은 무엇보다도 中庸儉德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도정신과 관계되는 것은 茶經 卷一, 第一의 茶의 根源 및 第四

의 茶의 그릇 솥 부분 등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第一의 茶의 根源 을

살펴보면,

차의 용도에 대해서는, 맛(성품)이 지극히 차서 행실이 바르고 검소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합하다.47)

육우는 여기에서 다도정신을 직설적으로 精行儉德之人 으로 즉 행실이 깨

끗하고 검소한 덕을 지닌 사람 이라고 했다. 또한 茶經 第四의 차그릇 솥(복) 부분의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음유적(隱喩的)으로 다도정신을 표현

하고 있다.

솥 의 귀를 시작으로 하는 것은 규칙을 바로 잡기 쉽게 함이다. 솥전을

넓게 하는 것은 오래 견디기 위함이다. 솥의 배꼽을 길게 하는 것은 中和

또는 중용을 지키기 위함이다.48)

여기에 나오는 守中 이 바로 그의 다도정신을 음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즉 중화 또는 중용을 표현함이라 하겠다.

이외에도 또 육우의 茶經 第七의 茶의 옛일 부분에서는 茶는 儒佛仙과

깊은 관계 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즉, 茶의 기원 에서 말한 ‘행실이 바르고 검소한 덕을 가진 사람’이라는 표

현은, 그의 다도정신을 正善 儉德 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고 차의 그릇

에서 솥 부분의 正令 守中 이라는 음유(陰喩)적인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

중 守中 은 그의 다도정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 때의 中은 ‘中和’ 또는 ‘中庸’을 의미한다고 볼 때 茶經 에 나타난 陸羽의

茶道精神은 ‘中庸儉德’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3) 中 日의 茶文化 비교

본 절에서는 中國과 日本의 茶文化와 그 속에서 형성된 전통적 茶道이론에

대하여 비교 고찰해보도록 한다.

먼저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茶의 기원이나 飮茶의 기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으며, 믿을 수 있는 문헌기록으로는 前漢시대 촉나라 문인인 왕

포가 지은 동약 (기원전 59년)에 ‘차를 삶는다’ ‘차를 산다’는 말이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茶가 술로 代用된 일화가 있으며49), 서기 477년에 北魏의 박사

가 된 장읍이 지은 광아 에는 떡차가 보인다50). 東晉시대에는 양주목사 환온

이 茶菓로 손님접대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며51), 西晉 당시에는 2대 황제인 혜

제가 몽진하고 낙양에 돌아왔을 때 황문이 질바리에 차를 담아서 바쳤다는 기

록이 있다52). 이와 같이 늦어도 前漢시대로부터 비롯된 중국의 茶文化는 당대

의 떡차, 송대의 연고차, 명대의 잎차 등 3단계로 변천되었다.

육우에 의하면, 당나라에 이르러 飮茶의 풍습이 지역적으로는 장강유역의

산대지역에서 먼 화북일대까지 보급되고 장안과 낙양까지 이르렀으며, 飮茶의

계층 역시 상류층 뿐만 아니라 서민층까지 확산되었다53). 어사중승을 지낸 봉

연의 봉씨문견기 와 당말인 양화의 선부경 에 따르면 飮茶풍습은 개원 천보

의 시기(8세기 전반)에 대중으로 번졌으며, 한족, 위구르54), 티벳까지도 전파

되었다. 당시의 茶法 중에는 貢茶의 모습이 이미 보인다. 대중의 대력 5년

(770년), 양선산 기슭의 남악산 스님이 상주자사인 이서균에게 좋은 차를 바

쳤다는 기록이 있고55), 新唐書 의 지리지 에 따르면, 산남도, 회남도, 강후

동도, 건남도에서는 토공차를 바쳤다고 한다. 또한 稅茶, 즉 찻세가 있었다.

토공차가 조세차로 바뀐 茶法인데, 唐書 의 덕종본기 에 따르면, 덕종의 건

중 3년(782년)에 호부시랑인 조찬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하의 차 옻 대 나무에

대하여 10분의 1에 해당하는 세를 받아서 상평본전으로 삼았다. 그러나 백성

들의 원성으로 덕종의 흥원 1년(784년)에 찻세를 폐지하였다가 덕종의 정원

9년(793년)에는 찻세가 복구되었다. 또한 중국의 서북방지역에 사는 티벳, 몽

고(위구르)의 유목민족들과 茶馬무역이 성립되었다. 이들 유목민족은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일어나는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차가 필요했고, 중국의 軍

馬의 확보를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숙종의 지덕 원년(756년)에서 건원 원년

(759)간의 기간동안 이러한 다마무역의 기록이 보인다.56)

이와 같이 각종 茶法들의 신설 폐지 복구나, 茶와 관련된 무역이 이루어지는

등의 상황을 보더라도, 唐代에는 이미 飮茶풍속이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

으며, 따라서 각종의 茶文化도 풍성해졌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실제

로 중국의 茶道가 바로 이 시기에 陸羽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육우의 다도정

신은 中庸儉德이라 할 수 있다.57)

宋代에는 차겨루기(鬪茶, 茗戰) 풍습이 성행하였으며, 이 때는 물의 표면장

력의 승부, 차의 등급 매기기, 차의 향기와 맛 등으로 승부를 겨루었다. 남송

말기인 이종, 단종 때에는 금나라군이 남침하자 차장사꾼들이 의용군으로 입

대하여 茶商軍을 조직하고 금나라군의 남침을 저지한 일도 있었다.

元代에는 차의 서역전파가 이루어졌다. 요나라 출신으로 금나라, 원나라를

섬기면서 징기스칸의 서역원정에도 종군한 야율소재는 서역의 왕군옥으로부

터 차를 요청받고 그 운에서 비롯된 일곱 수 라는 시를 남겼다.58)

明代에는 茶馬무역이 규모가 커져 별도의 다마사를 설치하였다. 초기에는

섬서성의 여섯곳에 두었으나, 성조의 영락 3년(1401년)에는 만주의 개원, 광

령, 훗날에는 열하의 개평과 무순에도 마시를 두었다.

淸代에는 서양과의 통상으로 차의 수출량이 매우 늘어났다. 강희 7년(1668

년)부터 영국, 미국, 러시아 등으로 수출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茶道精神은 당나라 육우의 茶經 과 北宋의 徽宗 황제 趙佶이 지은

大觀茶論 59) 및 송나라의 趙汝礪가 지은 北苑別錄 60) 그리고 당나라 蘇이

( +異)의 저서 十六湯品 61) 등에서 엿볼 수 있다.

먼저 육우의 다경 에 담긴 다도정신은 앞서 정의했듯이, ‘中庸儉德’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송나라 휘종의 저서 대관다론 序文에서는

차는 ‘구’지방과 ‘민’지방의 뛰어난 기운과 산천의 연기를 모아서 가슴이

답답한 것을 씻어 시원하게 하며 또 맑고 온화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때

문에 용렬한 사람이나 어린 아기들은 그 진가를 쉽게 알 수 없다. 간결하

며 또 높고 고요한 운치는 소란한 시대에는 즐겨 숭상할 수 없다62)

즉 茶의 성질을 ‘맑음을 다하여, 화를 일깨워 준다(부드럽다)’는 ‘致淸導和’

와 ‘맑고 조촐함을 다하여 알맞고 화합함과 간결함을 일깨워준다’는 ‘ 澹簡

潔’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淸 和 靜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나라 조여려는

차잎을 찜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익으면 빛깔이 누르고 맛이 담백하다. 덜

익으면 빛깔이 파랗고 또 가라앉아 풀과 나무냄새가 난다. 다만 中을 이룬

것만이 알맞다.63)

차잎을 찌는데 있어 중화를 이룩한다64)

라고 하여 茶道精神으로서 中을 강조하였다.

또한 소이의 十六湯品 에도

대나무, 가는 대(篠)의 끝을 바람이나 불로 말려서 솥이나 병에 넣어 불로

때면 참 잘 탄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미가 약하고 또 가벼워서 중화의 기운이

없어져 차의 잔적이 된다65)

라고 하여 茶道精神으로서 中和정신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 중국의 茶文化 속에 흐르고 있는 茶道精神은 中 淸

和 靜 儉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일본의 茶文化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일본에 茶가 전래 보급된 것은 기록상으로 헤이안시대(平安時代 :

794-1192)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에도 日本書記 , 公事根源 , 東大

寺要綠 , 本朝文粹 등의 기록에 의하면 덴뾰우(天平)시대부터 茶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인조차도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본다.66) 그러

므로, 차를 마시는 풍습이 처음 일본에 전해진 것은 8세기라고 보아야 하며,

차나무가 처음 일본에 이식된 것은 헤이안 시대 초기로, 덴교우(傳敎)大師 崔

燈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차의 씨를 가져다 심은 805년이다. 그 후 차는 중

국에서 수입되어 귀족과 승려들이 한창 마셨으며, 894년 遺唐使 제도가 폐지

되면서 차를 마시는 일이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가마꾸라(鎌倉)시대

(1185-1136)에는, 臨濟宗을 일본에 전달한 에이사이(榮西) 禪師는 두 번째

송나라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질이 좋은 차와 도구를 가지고 돌아와 교토의

도가노오에서 양질의 차를 수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차의 본격적인 보

급은 이 당시, 1187년에서 1191년 사이에 喫茶 養生記 를 지은 에이사이 선

사(榮西禪師)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선사는 建仁 2년(1002) 가마꾸라

정부의 제2대 장군인 미나모도노 요리이에(源賴家, 1182-1204)의 분부에 따

라서 교또(京都)에 겐진寺를 세우려고 갔을 때 차씨 다섯알을 고우잔사(高山

寺)의 묘우에 스님에게 전하여 산 속에 심게 되었다. 이것이 전 일본으로 퍼

져 도가노오차(姆尾茶)를 本茶라 부르고 다른 차를 非茶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본차와 비차의 飮茶鑑別이 차 겨루기의 하나로 전래되고 있다67). 이렇게 점차

차의 생산이 가능하게 되자 건강회복을 위한 약으로서 차를 마시는 습관은 승

려계급과 상류사회에서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다도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찌시대(室町時代,

1396-1573)부터였다. 무로마찌 초기인 3대 장군 아시까가 요시미쓰(足利義

滿)의 기따야마(北山)시대에 싹튼 다도는 6대 장군인 아시까가 요시노리(足利

義敎)의 시대인 무로마찌 중기에 노우아미(能阿彌, 1397-1471)가 茶具의 감

별법, 點茶法, 차를 달여내는 臺子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8대장군인 아시까

가 요시마사(足利義政, 1436-1490)의 히가시야마시대(東山時代)에 나온 게이

아미(藝阿彌, 1431-1485)와 소우아미(相阿彌, ?-1525)가 히가시야마(東山)御

物의 정리를 비롯한 書院의 장식법과 點茶法을 만들어 마침내 히가시야마류

(東山流)의 다도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노우아미의 추천으로 아시까가

요시마사의 다도사범으로 있던 무라다 슈꼬우(村田珠光, 1433-1502)는 나라

류(奈良流)의 茶道를 창설하였다. 무라다의 다도는 볏집으로 이은 사방 한 길

(方丈)의 茶室, 즉 草庵에서의 자득차( 茶)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의

자득( び)는 ‘모자람에 만족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무

라다의 수제자인 다께노 죠우오우(武野紹鷗, 1502-1555)는 茶道 中興의 名人

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다다미화로가 있는 농가풍의 집을 茶室로 사용하며, 무

라다가 꿈꾸던 ‘자득’의 초암식 다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모야마시대(挑山時代, 1568-1603)에는 일본의 다도를 완성시킨 센노 리

규우(千利休, 1552-1591)가 활약했던 시기이다. 사카이(堺)라는 지방에서 태

어난 리큐우는 성을 田中, 이름을 與四郞으로 불리웠다. 어렸을 때부터 다도를

배우고 후에 나께노 죠우오우의 제자가 되어 약 15년동안 師事하였다. 1555

년 그가 34세 때 스승인 다께노 죠우오우가 죽었을 때 리큐우는 그 후계자로

서 茶名을 올렸다. 157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臣秀吉)에게 파격적인 대우

를 받으면서 그의 茶頭가 되었다. 도요토미가 리큐우를 우대한 까닭은 전국시

대 이래로 불안한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리큐우는 도요토미를 전장에 따라가서 진지안에서 차를 끓여 내기도 했으며,

처음 궁중에서 다도회를 개최했을 때 리큐우의 茶席도 마련했지만 유자격자가

아니면 궁중에 들어올 수 없었으므로 도요토미가 조정에 탄원을 하여 리큐우

는 새로이 리큐우거사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그 후 茶道를 모르면 무사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다도의 예는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28

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할복자살을 하게 된다.

리큐우 茶精神은 불완전이나 미완의 상태에 정신적인 최고의 경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스승인 죠우오우와 리큐우의 茶精神의 차이는, 죠우오우의 와비

( )는 화려한 세계에서 빠져나와 혼자 쓸쓸히 고원의 경지에 있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즉, 새로운 활동력이 부족한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리큐

우의 와비정신은 조용한 가운데서 새로운 활동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와비

에 대하여 무라다는 아집과 욕망에서 벗어나 담박해지는 깨달음의 높은 경지

라고 정의하였고, 다께노 죠우오우는 정직하고 신중하며 교만하지 않은 것68)

이라고 규정하였다. 리큐우는 초라하고 작은 다실에서 느끼는 차분하고 한적

한 멋을 구하는 것이 와비정신이라고 보았다69).

요약하면, 일본의 다도정신은 千利休(센노리큐우)의 스승이었던 무라다슈고

오(村田珠光)의 自得茶( 茶)에서 드러나는 와비( び)思想, 淸淨과 禮和70), 그

리고 일본 다성이라고 칭하고 있는 일본 우라센케(裏千家)의 교주인 센노리큐

우의 다도정신인 和 敬 淸 寂으로 정리할 수 있다.

Ⅲ. 한국의 茶文化史

본 장은 韓國의 茶道文化思想에 대한 硏究에 앞서, 韓國의 茶文化의 史的

考察을 통하여 茶文化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이해와, 시대별로 확인되는 茶

文化의 특징적 전개양상의 파악을 위한 것이다.

먼저 韓國의 茶 및 飮茶文化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이론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시대별로 나타나는 한국 茶文化의 변화의 흐름을 개관할 것이다. 그리고

각 시대별 行茶 飮茶 文化 가운데 나타나는 특징적 모습들과 대표적인 茶人에

대한 고찰도 진행할 것이다.

1. 삼국시대까지의 茶文化

(1) 한국 茶(文化)의 기원과 전래

우리나라에서의 차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본래 차나무가 자생했다는 자생설(自生說)과 가락국 김수로왕

의 왕비인 허황옥이 시집올 때 갖고 왔다는 남방전래설, 그리고 신라 흥덕왕

때 당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갖고 왔다는 북방전래설이 있

다.

구체적으로 자생설부터 살펴보면, 草衣禪師의 東茶頌 에 의하면 우리나라

固有의 茶로서 예로부터 長白山에 白山茶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長白山

중에 있는 나뭇잎을 따서 알맞게 다려 사람들이 마셨다는 것이다. 백산차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淸나라 乾隆帝 때 백산차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茶山의 雅言覺非 에 의하면 백산차는 석남차(石南茶)라는 이름으로 일본 중

국 등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安春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는데, 曉堂 崔凡述은 이 나무를 생강나무일 것이라 하고 應松 스님은 석남

과(石南科)에 속하는 철쭉꽃이라고 보았다. 정상구 선생1)은 백산차에 대하여

石南科의 식물잎으로 바위의 깨끗한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석남차라고 불리워

지기도 하였으며, 높이는 일장(一丈)이고 잎은 버들잎같고 맛은 약간 쓴 맛이

있으나 퍽 좋다고 설명하고 있다.

백산차 외에도 五穀을 볶아서 마시기도 했으며, 오갈피, 오미자, 구기자 열

매 등을 달여 마시기도 했다. 이상은 비록 정통 茶라고 볼 수 없는 대용차이

지만, 우리 民族이 韓半島에 移動하여 農耕生活을 하면서 정착하여 안정된 생

활을 영위하게 되면서 茶 마시는 풍속 즉 飮茶 生活과 文化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 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AD 48(유리왕 25

년 茶를 인도에서 가져와 백월산에 심었다는 남방전래설은 이능화

(1869-1943)가 朝鮮佛敎通史 2)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원래 伽倻가 위

치한 洛東江 下流 지방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주요 茶산지였으며, 가야에

는 일찍부터 飮茶 풍속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駕洛國記 에는 新羅 30代 文武王 元年(661)에, 삼국을 통일한 文武王은 金

官伽倻 始祖인 金首露王이 자신의 외가쪽 조상이므로 가야국 宗廟에 제사지내

도록 명령을 내려,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茶, 과일 등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가락왕(駕洛王) 17대 후손인 갱세급간( 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아 그

밭(제사지낼 자산)을 책임지고 맡아서 해마다 세시때면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 등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렸다.3)

위의 사실들을 볼 때에 이미 7C 때 제사의 제물로 茶를 올렸는데, 제례나

상례등의 형식이 정착되는 데 보통 3代이상 걸리는 것을 감안해볼 때, 가야는

이미 6세기 이전부터 차를 마신 것으로 추측된다.4) 洛東江 下流에 위치한 伽

倻地方은 토지가 비옥하고 중국 남쪽과 交易이 성하여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들어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발달하고 사회가 안정되었다. 이에 茶생활도

일찍 시작되어 土産茶를 재배하고 茶를 祭禮에도 사용하였으며 飮茶 풍속이

널리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문헌가운데 가장 신빙성있는 것은 북방전래

설이다. 이는 三國史記 에 신라 興德王 3년, 서기 828년 12월조에 당나라에

서 차가 들어왔으며, 선덕왕(632-647) 당시부터 茶가 있었다는 기록에 의거

한 것이다.

흥덕왕 3년(828년)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大兼이 차종

자를 가져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

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성하였다5).

신라의 사신인 大兼이 唐나라로부터 차종자를 가져와 王命에 의해 지리산에

심은 이후 雙溪寺와 華嚴寺 등 사찰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이는 주로

상류층 사이에서 飮茶의 풍속이 두루 전해졌다6). 그런데 7세기인 선덕왕

(632-647년) 당시에 이미 茶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는 설총이 화

왕계(花王戒) 에서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꽃을 의인

화하여 간접적으로 충고하였던 것을 보아도 7세기 무렵에 茶와 飮茶의 풍속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

高句麗의 茶文化는 아직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고구려의 귀족 분

묘에서 錢茶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死者가 生前에 茶를 좋아했거나 土神에게

茶를 바쳤다고 볼 수 있다.8) 이외에도 고구려 初期 首都 집안현(輯安縣)에서

굴뚝이 달린 이동식 화덕이 발견되어 야외(野外)에서 茶를 끓였거나 음식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시대의 비석에는 茗이라는 글자가 새겨

진 빗돌글이 남아 있다9). 고구려 시대의 飮茶 풍속은 부족국가시대에 있어서

우리 固有의 茶文化와 연결된다.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 집권적 귀족 중심의

사회로 발전됨에 따라 茶文化는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百濟의 茶文化는 記錄과 遺積은 없으나 일찍이 中國 南朝와 활발한 文化 交

流로 학문, 예술, 산업 등 文化 전반이 발달되고 귀족사회가 정착되었다. 특히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에 의하여 왕실과 귀족사회가 강화되고 6세기 이후

화려한 불교 문화의 융성을 이룩하면서 寺院과 귀족층에서 飮茶 풍속이 성행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茶에 대하여 짐작하게 해주는 기록으로는 중

국의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와 전쟁을 할 당시 지리산에 씨를

뿌린 절강차가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說이 있다.10) 또한 일본 東大寺要

錄 에는 百濟의 귀화승 행기(行基, 668 - 748)가 중생을 위하여 茶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百濟의 茶가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으로, 백제의 승려들이 이미 7세기 이전에 茶를 마셨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11).

(2) 신라 茶文化의 전개양상

新羅는 地理的 위치로 사회적, 文化的으로 그 발전이 고구려와 百濟에 비하

여 後進的 이었으나 6세기 초 佛敎의 公認과 더불어 왕권의 강화와 貴族사회

의 안정이 확립되고 文化가 전반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특히 眞興王(579 -

632)이후 花郞제도의 公認으로 청소년들의 인재양성과 佛敎의 護國的 信仰의

性格은 국가발전과 삼국통일의 토대가 되었다. 앞서 그 기원과 전래를 살펴보

았듯이 新羅初期부터 있어온 茶가 佛敎의 공인, 중국과의 文化交流의 확대에

의하여 6세기 이후부터 9세기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왕족, 귀족, 승려, 화랑等

귀족층뿐만 아니라 軍 民에 이르기까지 범사회적으로 飮茶풍속이 성행되었

고12), 佛敎寺院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獻茶行事와 팔관회 행사에서 헌다(獻茶)

행사가 행하여졌다. 또 儒佛仙 思想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花郞(화랑)들은

心身의 修練과 더불어 茶 생활을 즐겼으며, 이에 대한 유적으로는 江陵의 寒

松亭 四仙의 茶 유적을 들 수 있다.

또한 統一후의 新羅(676 - 935) 전쟁이 없는 平和스러운 생활 가운데 영토

의 확장 경제활동의 확대, 귀족사회의 고착 등 많은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불교의 문화의 융성과 화려한 귀족사회의 발전은 예술 문화전반이 발달

하여 사회 전반에 茶文化가 만연하였다.

신라인이 마신 차의 종류는 국산차와 중국차를 막론하고 고형차였다. 금석

문자로는 최고의 기록인 崔致遠(875-?)이 지은 河東雙谿寺眞鑑國師

(775-850) 大空塔碑 의 비문에는 당시 신라인들이 떡차(餠茶)를 마셨던 사실

이 기록되어 있다.

다시금 중국차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섶나무로 돌솥에 불때어 가루를

만들지 않고 차를 달여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가를 가리지 않고

다만 배만 적실 뿐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

이 모두 이와 같았다.13)

이외에도 硏膏茶도 마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唐의 段成式(?=863)이 쓴 유

양잡조(酉陽雜俎) 의 異國奇聞 조에는 신라에 연고차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

을 시사해 준다.

요사이 어떤 바다 사람이 신라로 가는 길에 바람에 불려 한 섬 위에 이르니

산에 가득하게 흑칠 젓가락이 달린 큰 나무가 많았다. 그가 자세히 들여다 보

니 이 젓가락들은 모두 칠나무의 꽃이나 수염들이다. 그는 이내 백여쌍을 주

워 가지고 돌아와서 써보니 무거워서 쓸 수가 없었다. 뒤에 우연히 이 젓가락

으로 찻물을 젓다가 보니 녹아 버렸다.14)

떡차를 마시는 방법은 唐나라 陸羽의 茶經 에 적힌 煮茶法으로 달여 마셨

고15) 연고차는 北宋 때 蔡襄(1012-1067)이 지은 茶錄 의 點茶法에 의해서

달여 마셨을 것이다.16)

그리고 신라의 茶文化를 짐작케 해주는 茶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앞서 잠시 언급했던 四仙의 차화덕(茶 )이다. 여기서 사선이란 글자 그대로

네 사람의 仙人을 뜻하며, 즉 화랑인 永郞, 述郞, 南郞, 安詳을 말한다.17) 강

릉 경포대에 이들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돌화덕이 전해지고, 寒松亭에도 사

선의 유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의 金克己(1148-1209)가 지은 시를

참고해보면, 이미 12세기에 四仙이 쓰던 차화덕을 확인한 것이 있다.

여기가 四仙이 유람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다

酒臺는 쓰러져 풀 속에 묻혔고

차화덕은 내뒹굴어 이끼가 끼었구나18)

또한 李穀이 지은 東遊記 에 의하면

날이 아직 기울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옛날에는 대에 집이 없었는데

요즘은 好事者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옛날 선인의 石 가 있으니, 아마

도 차를 달이는 도구일 것이다. 삼일포와 경치가 막상막하로되 툭 트이고

훤칠한 점은 그보다 낫다. 비가 와서 하루를 묵고 강성을 나와 文殊堂을

구경하니, 사람들의 말이 文殊와 普賢의 두 석상이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

라 한다. 동쪽에 四仙碑가 있었으나 胡宗旦이란 자가 물 속에 넣어버리고

오직 귀부(龜趺 :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돌)가 남아 있을 뿐이다.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했다. 이 정자 또한 사선이 유람하던 곳인데, 고을 사람은 구경꾼

들이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집을 헐어버렸고 소나무도 들불에 타버렸다.

오직 서리 내리는 밤의 달이 맑을 뿐이었다. 다만 돌화덕, 돌연못과 두 개

의 돌우물이 그 곁에 남아 있는데 역시 四仙의 茶具이다.19)

라고 하여 돌화덕, 돌못, 돌우물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와 관련되어서는 고려말의 문신이었던 안축(安軸, 1282-1348)20)의 詩도

전해진다.

한송정21)

四仙이 모여 단련하던 곳, 仙客들이 모여드니 맹상군(전국시대 제나라 정

치가)의 집을 방불케 하였도다

사선의 발자취는 구름 속에 없어지고

차가마(茶釜)엔 불이 꺼졌도다

옛날을 생각하니 어느덧 황혼, 차를 달이던 우물터만이 옛날 그대로 돌담

밑에 있을 뿐

또한 이외에도 신라의 茶文化를 짐작케 해주는 茶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로

는 경주 석굴암의 문수보살상의 오른손에 찻잔이 있는 것, 합천 청량사의 부

처님 좌대의 석조보살상의 잔, 속리산 법주사의 희견보살 석상이 머리에 이고

있는 큰 돌 찻잔, 경주 창림사터에 다연원(茶淵院)이라 쓰여진 기와조각과 화

랑과 승려가 머물던 다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신라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茶具로 찻주발(茶 )이 발견되

었는데, 경주의 안압지에서 貞言茶라는 銘文이 있는 토기와 황용사터에서는

한반도에서 구워진 햇무리굽의 청자완(靑磁 )이 출토되었다. 또한 李齊賢의

妙蓮寺石池 記 에는 개성 묘련사에 있는 신라 화랑의 茶具 모양과 크기를 나

타낸 기록에 따르면22), 신라의 茶具는 同時代 唐나라의 茶具와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것으로써, 화랑의 수행 덕목인, 山川遊覽에 맞도록 이동할 수 있게

야외용으로 고안된 것이다.

신라 시대 茶文化는 獻茶儀式이 매우 발달했으며, 절에서 부처에게 차를 바

치는 것은 물론이며, 각종 의례에서도 차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무왕 때 김수로왕의 時祭에 차를 올린 종묘다례가 있었고 종교

적 茶禮로는 화엄신도의 차공양(獻茶)과 미륵신도의 차공양(獻茶)이 보인다.

그리고 각종 의식다례가 끝난 후 回飮禮가 행해지기도 하였는데, 회음례란 차

나 술을 하나의 큰 잔에 담아 돌아가며 마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으로 잔입술의 직경이 16.8cm나 되는 커다란 의식다례용 찻잔이 있

다. 이것은 차를 神明(天神, 地神, 龍王神), 鬼神, 三神, 부처께 올린 후 참석한

사람들은 신이 내린 복을 나눈다는 ‘分福’의 의미로 차를 나누어 飮福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더 나아가 同盟을 결의할 때 역시 이

러한 의식(回飮禮)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三國遺事 에는 화엄종의 신도인 화랑도들이 문수보살에게 차공양을 했다는

설화가 나타난다. 신문왕의 왕자인 寶川과 孝明 형제는 속세를 등질 생각으로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두 왕자를 따르던 천 명의 화랑들은 갈팡질팡하

다가 서라벌(경주)로 돌아가고, 두 왕자는 오대산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면서

날마다 골짜기의 물을 길어서 차를 달여 문수보살에게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진여원에는 문수보살이 36형으로 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예배하고 날

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1만 진신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하였다23).

또한 三國遺事 의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조에는 미륵신도인 충담이 삼

짇날과 중구일에 미륵부처께 차를 올린 종교적 獻茶도 보이며, 三國遺事 제

5권 月明師 兜率歌 에 의하면 경덕왕 19년 경자(760) 4월 2일 해가 두 개가

나란히 떠서 사라지지 않았을 때 왕이 月明스님을 불러 기도문을 짓게 하였

다. 월명은 왕의 요청에 의해 미륵의 자비를 비는 도솔가, 즉 정성을 모아 꽃

을 뿌리며 멀리 도솔의 부처님인 彌勒座主를 모신다는 향가를 불러, 괴변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왕은 가상히 여겨 차도구 한 벌과 수정염주 108알을

내주었다24)는 기록이 있다. 특히 통일신라 사회에서는 彌勒佛(미륵불)에 獻茶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미륵불은 도탄에 빠진 民衆을 구제하는 理想佛이며

未來佛로서 미륵이 化身하여 花郞이 되고 화랑이 나라를 구한다는 民衆的信仰

으로써 신라인들은 화랑을 미륵불의 化身으로 생각하고 화랑을 삼국통일의 역

군으로 양성하여 이들은 통일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미륵불과 花郞, 茶를

연관시켜 본다면 신라인들이 미륵불에 올린 茶는 미래 이상세계를 믿고 기다

리는 신라인들의 염원을 미륵불에 전달하는 매개체로 볼 수 있다.

(3) 삼국시대의 茶人들

기록상에 나타난 신라의 茶人들로는 앞서 살펴본 사선(四仙) 즉, 영랑(永郞),

남랑(南郞), 술랑(述郞), 안상(安詳)을 가장 먼저 들 수 있다. 또한 뛰어난 학

자이자 고승인 원효(元曉, 627-686)도 빼놓을 수 없다. 원효는 和爭론을 주창

하여 韓國佛敎思想史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으로, 불교의 각종 다른

이론들을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보면 하나로 화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주장

하였으며,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기본원칙 위에 민중불교를 주장한 분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의 文人 李奎報의 南行月日記 의 元曉房의 기록에서 원효의

茶에 대한 경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원효의 아들이며 유학자인 설총(薛聰,

692 - 746) 역시 신라의 대표적 茶人으로 거론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설총은 神文王에게 花王戒라는 設話를 지어올려 훈계하였다. 그 내용 가운데

에 ‘임금께서 좋은 고기와 곡식으로 배를 부르게 하시지만 茶와 술로서 정신

을 맑게 하시라25)’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보천(寶川)과 효명(孝明)태자는

31대 神文王의 두 아들로서 강원도 오대산에 들어가서 佛道를 닦으면서 문수

보살(文殊菩薩)에게 매일 새벽 동중수(洞中水)26)를 길러다가 차를 달여 공양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35대 景德王(742 - 764)때 茶僧이자 詩心이 뛰어

난 鄕歌 (향가) 作家인 忠談師 역시 앞서 잠시 언급하였다. 일찍이 화랑도에

몸을 담아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을 찬양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지었다.

三國遺事 에 의하면 忠談師는 每年(매년) 3월 3일과 9월9일에 경주 南山 三

花領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茶공양을 올렸으며 경덕왕 24年에는 王에게

茶를 끓여 올리고 王의 요청으로 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忠談師가 삼짇날

(3.3)과 重陽節(중양절 9.9)에 미륵세존에게 茶를 올린 것은 불교적 獻茶의 儀

式만이 아니고 신라의 下層民인 大衆 구제에 대한 염원이 담겨져 있으며 지난

날 통일 전쟁에 희생된 신라 장정들의 넋을 위로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河東雙谿寺 眞鑑國師大空塔碑 를 지은 최치원(崔致遠,857-?)

은 13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고 과거에 급제하고 많은 벼슬을 받았다. 29세

때 귀국하여 한림학사 등을 지내며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다가 894년 時務10

條를 상소했으며, 그 후 관직을 내놓고 초야에 묻혔다. 그는 또한 화랑인 鸞郞

을 기념한 鸞郞碑序에서 화랑도는 유불도 삼교의 정신이 포함된 우리 고유의

풍류도이며, 원래의 지도자가 仙人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2. 고려시대의 茶文化

(1) 茶의 종류 및 산지, 製茶法과 茶具

고려왕조(918-1395)가 교류한 중국의 역대왕조는 五代(907-960), 거란(契

丹, 907-1125), 北宋(960-1126), 金나라(1115-1234), 南宋(1127-1279), 元

나라(1271-1367), 明나라(1368-1644) 등이다. 이 시기에는 연고차, 草茶, 말

차, 납차(蠟茶)의 點茶法을 비롯하여 茗茶의 茗煎法, 芽茶의 촬포법(撮泡法)과

포다법(泡茶法) 등이 성행하였다. 고려시대의 茶를 마실거리로서 구분한다면

차유(茶乳)와 차탕(茶湯)으로 나눌 수 있고, 모양에 따라서는 단차(團茶, 덩이

차 ; 떡차餠茶, 乳團茶), 葉茶, 末茶로 구분할 수 있으며, 발효정도에 따라 발

효차(뜸차)와 비발효차로 구분할 수도 있다.27) 茶乳란 고급 덩이차(乳團茶)나

잎차를 곱게 갈아 체로 쳐서 만든 가루차(末茶)를 끓인 물에 휘젓거나 혹은

차사발에 점다하여 거품을 일으켜 마시는 탁한 차를 말한다. 차유로 마실 차

는 이른 봄에 딴 섬유질이 아주 적은 차싹이라야 찻가루가 고와 가라앉지 않

으며 흰색의 거품이 잘 생긴다. 가루내어 쓰는 차유로 마시는 차는 덩이차건

잎차건 아주 고급품이어서 궁중에서 쓰거나 국제간의 예물로 주고 받는 어차

(御茶)가 대부분이다. 차탕은 거친 떡차나 잎차를 끓여 걸러낸 맑은 찻물을 말

한다. 고려 예종 12년(1117), 왕은 禪과 道를 즐기는 李資玄을 어렵게 만나

앉기를 권하고 ‘차탕’을 내어 이야기했으며, 1198년 李寅甫가 경주에서 山川

의 제사를 지내고 부석사에 들렀을 때 중이 ‘차탕’을 대접한 기록을 볼 수 있

다. 덩이차(團茶)는 곱게 가루내어 末茶로 만들어 차유로 마시는 유단차와 그

냥 끓여 맑은 차탕으로 마시는 떡차(餠茶)로 나눌 수 있다. 유단차는 주로 왕

이 마시는 ‘御茶’나 국제간의 예물 또는 하사품으로 쓰인 고급품이었으며 고려

초엽의 토산차인 뇌원차(腦原茶)도 유단차에 속한다. 덩이차를 말리거나 보관

하기 좋도록 가운데 구멍을 뚫은 것을 돈차 혹은 錢茶라고 부른다. 떡차는 찻

잎이 자라길 기다렸다가 따서 납작한 떡모양으로만든 조금 거친 차인데, 대강

부수거나 그냥 그대로 끓는 물에 넣어 끓여 맑은 차탕으로 마셨다. 떡차는 운

반(여행시)과 보관에 편리하며 대개 발효된 차였을 것이다. 葉茶는 12세기 무

렵 ‘雀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紫筍茶 역시 잎차에 속한다. 末茶는 유단

차나 고급잎차를 맷돌에 갈아 고운 체에 쳐서 만든 아주 미세한 찻가루이며,

茶乳로 마신다. 고려인들이 마신 茶의 구체적인 명칭을 살펴 보면, 腦原茶, 龍

團勝雪茶, 孺茶, 雀舌茶, 紫筍茶, 茶, 香茶, 雙角龍茶大茶, 曾坑茶, 靈芽茶,

露芽茶 등이 있다. 특히 용단승설차는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고, 대원군

(1819-1898)에 의하여 충남 덕산에 있던 옛탑에서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

다.

茶의 산지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차를 만들어서 나라에 바치던 茶所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에 옛 다소라고 기록된 고려의 다소를 살펴보면, 전

북의 용산과 재역, 전남의 와촌, 전남의 요량 수태칠백유 정산 가을평 운고 정화

창거 향여 웅점 가좌 거개 안칙곡이며, 남평현 다소, 화계 다소, 평교 다소가 있

어 모두 19개 지역이 넘는다.

차를 끓이는 법에 관해서는 시문에 전하는 단편적인 자료와 茶具를 중심으

로 살펴볼때 點茶法과 烹茶法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탈거리에 불씨를 붙여 불을 일으키는 것을 點火한다고 하듯이, 점다란, 찻가

루가 끓인 물와 어울려 휘저어져서 차거품을 일으켜 茶乳로 만드는 것을 말한

다. 물을 먼저 끓인 후 찻가루를 떨어뜨려 휘저어 끓여 마시는 방법과, 점다할

그릇에 찻가루를 먼저 넣고 끓인 물을 넣어 휘저어 거품내어 마시는 방법이

있다. 烹茶란 차를 맑은 차탕으로 마시기 위해 끓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오늘

날과 같이 차에 끓인 물을 부어 우려내어 마시기도 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고려시대 茶具의 특징은 최고의 품질과 멋을 지녔고 귀족적이며 몹시 아름

다웠다. 중국의 모방도 없지 않았으나 다구의 생김새나 만드는 기법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1123년에 송도를 다녀간 徐兢이 지은 高麗圖經 에는

고려인들은 차마시기를 무척 즐기어 더욱 다구를 만드는데, 금꽃문양이

있는 검은 잔(金花烏盞), 청자로 된 작은 잔(翡色小 ), 은화로(銀爐), 세발

차솥(湯鼎)등이다.28)

오늘날 남아 전해진 고려 다구의 대부분은 청자이며 백자가 드물게 있고 청

동으로 된 것과 쇠, 돌로 된 것 등도 전해진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궁실에서

쓰는 야외용 다구도 발달하였다. 왕이나 태자의 행차시나 태후의 책봉시 茶軍

士가 운반하는 화로나 絞床과 물주전자등이 들고 다니기에 좋도록 되어 있었

고, 솥 등은 두 개의 고리에 나무를 꿰어 짊어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때는

잘 깨어지지 않는 은그릇도 많이 사용한 것 같다. 당시의 茶具는 사용목적에

따라 神明이나 부처께 獻茶用, 君臣간 進茶用, 일상 飮茶用으로 구분할 수 있

으며, 다구의 종류로는 찻그릇, 찻병, 탕관, 차맷돌, 차술 등이 있다. 찻그릇은

차를 담아 마시는 찻잔 종류이며, 용도에 따라 進茶用과 日常用, 그리고 獻茶

用으로 나뉜다. 進茶用의 경우 왕에게 차를 올릴 때, 茶房參上員이 차를 들고

와서 내시가 뚜껑을 벗기고 집례가 어전에 올라가서 절하고 차들기를 권하고

내려왔으며 신하들에게도 進茶29)하였는데, 차를 잔에 들고 담아 가므로 차가

쏟아지지 않게 만든 모양의 잔과 잔받침을 사용했을 것이며, 잔뚜껑은 차의

향기가 달아나지 않고 식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불교 의례때 부처

에게 올리는 찻잔을 茶器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청자로 만든 것과 청동으로

만든 것이 있다. 들고갈 때 차의 향기가 달아나지 않고 식지 않게 뚜껑이 있

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들고 가서 뚜껑을 벗길 때 뚜껑 안쪽에 수증기가

서려 있으므로 뚜껑을 뒤집어 놓아 수평이 되도록 손잡이가 만들어져 있다.

굽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굽이 아주 높은 것은 天神, 地神, 龍王神들에게 올

리던 獻茶器가 아닌가 짐작된다.

(2) 고려 茶文化의 전개양상

고려시대는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茶文化의 전성기로 왕과 귀

족 관리 백성들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茶를 즐겨 마셨다. 고려사회에 茶文化

가 성행되었다는 사실은 仁宗(1122 - 1146)때 사신으로 왔던 徐兢이 지은

高麗圖經 의 行狀圖에 보는 바와 같이 茶가 성행되었으며 세계에 자랑하는 靑

磁도 茶文化 발달의 所産이라 볼 수 있다.

茶는 귀중한 예물로써 왕이 신하에게 茶를 下賜하였으며 宮中의 여러 行事

를 준비하는 茶房이란 관청을 두었고 일반 백성들이 茶를 사서 마실 수 있는

茶店을 설치하여 茶를 마시는 풍속이 사회전반에 성행하였다. 또 특히 나라의

큰 행사인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煙燈會)때 土神과 부처님께 獻茶하고 宮中

의 각종 의식에도 茶禮가 베풀어졌다.

또 귀족과 文人사회에도 獻茶(헌다) 풍속이 매우 성행하여 茗席(찻자리)을

마련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茶를 마시며 담소하기도 하였다. 茶를 마시는 모

임 혹은 찻자리를 흔히 茶筵 茶席 茗筵 茗席 이라 하였고, 茶를 끓여

마시기 위해 茶軒 이나 茶屋 을 따로 지었다. 그리고 특정 다연에 참석함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으며, 때로는 초대장을 보내어 예를 갖추기도 하여30) 미

리 약속하여 찻자리를 마련하였다. 또한 손님의 자격이나 앉는 자리를 정하였

으며, 茶禮도 규범과 절도가 있었다.

특히 寺院의 僧房(승방)에서 茶文化가 발달하여 茶禪一致의 경지에 이르렀

으며 수행시 茶로서 잠을 쫓기도 하였다. 그리고, 승려들은 수행할 때뿐만 아

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즐겨 마셨다. 또한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茗禪)이라는 풍속이 행해졌다. 이렇듯 사원에서는 차의 쓰임새가

많아지자 사원주변에는 차를 전공하기 위한 다촌(茶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차가 고려 궁중의식의 중요한 음식이 되면서 국가에 의식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진다의식(進茶儀式)이 따랐다. 進茶는 술과 과일을 임금님께 올리기 전

에 임금이 먼저 차를 청하면 신하가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하며 진다의식은 이

때 행하는 제반의식을 말한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궁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는데, 이때에도 진다의식이 행해졌다. 왕이 신이

나 부처에게 재(齋)를 올릴 때도 진다의식이 행해졌다. 또한 왕이 죄인에게 참

형을 결정하기 전에 신하들과 차를 마시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보다 공정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했으며, 정월 초하룻날 대궐에서 조회를 할 때의

의식인 원회의(元會儀)와 궁중의 연회 때도 신하가 왕에게 차를 올리고 신하

들은 황이 하사한 차를 마셨다.

관청에서도 차 마시는 풍습이 있어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날마다 한 번씩

차를 마시는 다시(茶時)를 가져 사안의 공정한 판결을 기했다. 차는 왕이 신하

와 백성에게 하사하는 귀중한 예물이어서 신하가 죽었을 때 왕이 차를 하사했

다. 또한 국제 외교상 중요한 예물로도 사용하여 송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예

물 중에 용봉차(龍鳳茶)가 들어 있었고, 고려가 원나라에 예물을 보낼 때도 예

물 속에 향차 등을 넣어 보냈다. 나라에서 사신을 맞을 때도 중국 왕의 조칙

을 가져온 사신에게는 진다의식을 갖추었고, 조칙을 가져오지 않은 사신에게

는 차를 베풀고 간단한 인사를 한 후 객관으로 안내했다.

이와 같이 궁중에서 차의 쓰임새가 많아지고 빈번해지자 차에 관한 일을

보는 관청이 생겼는데, 이를 다방(茶房)이라고 한다. 다방에는 의약과 치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태의감이 소속되어 있어 그 직무의 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와 짐을 나르는 차군사(茶軍士)가 소속되어 있었다. 茶軍士란 茶房에 소속

되어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茶具와 짐을

나르는 군인을 말한다. 왕이 행차할 때 따르는 의장대의 행렬 중에는 이들 차

군사가 뒤따랐으며, 이들에게는 軍役을 면제받는 특전이 있었다. 茶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도 가운데 조정이나 왕실의 찻일을 맡아보는 관청인 茶房, 왕의

행차시에 차짐을 운반하는 군인인 茶軍士, 茶를 貢物로 바치기 위한 특수행정

구역인 茶所 등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독특한 제도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왕과 귀족, 관리, 선비와

일반 백성들 모두가 일상적으로 차를 즐겨 마셨으나 초엽에는 대체로 귀족 중

심의 차문화였고 무신난이 일어난 중엽부터는 주로 선비들이 차문화를 꽃피웠

다. 또 한가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茶가 대중화됨에 따라 당시의 여성들도

飮茶문화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이 전사한 군인의 처

자에게 茶를 하사하기도 하였고, 茶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詩도 전해진다.

맑게 갠 봄날31)

휙 날라서 지나가는 것은 뉘집 제비이며

곧바로 날아드는 것은 어디의 꽃인가

깊숙한 院에 해는 길고 일이 없어

한 병의 봄 샘물로 차를 달인다네

이 글은 11세기 경 妓女 周氏가 차를 달이며 읊은 시로, 敎坊記 에 전해지

는데, 敎坊이란 女樂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또한 연등회나 팔관회, 공덕재나 기우재 때 신이나 부처에게 獻茶하는 경우

외에도 喪禮나 祭禮 때에도 茶를 썼으며, 절에서 고승의 제사 때에 獻茶한 기

록도 있다.

(3) 고려시대의 茶人들

고려의 茶人들은 우리 茶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하여 無我(무아)의 경

지에서 직접 茶를 끓여 마시며 하나의 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대표적인

茶人들로는 李奎報, 李仁老, 李穀, 鄭夢周, 李穡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茶

생활의 멋과 풍류를 읊은 茶詩를 많이 남기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大覺國師 義天(1055 -1101)을 들 수 있다. 고

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宋에 遊學하고 돌아와 불교 天台宗을 開創하고 續藏經

을 刊行하였다.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義天), 大覺은 시호이다. 義天은 詩

에서 ‘이슬 함초롬히 내린 봄아침이나, 달이 밝은 밤이 차 마시기에 좋은 때’

라고 읊고 있으며, 謝茶藥表文 을 비롯하여 文集에 茶에 관한 기록이 많아

그가 뛰어나 茶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빼놓을 수 없는 茶人으로, 李奎報(1168 - 1241)를 거론할 수 있

다. 그는 고려 중기의 大文章家로 號는 白雲山人, 白雲居士로 武臣政權시대에

큰 뜻을 펴지 못하였지만 뛰어난 文人으로 東國李相國集 , 白雲小說 , 麴先

生傳 등의 저서를 남겼다. 茶生活을 좋아하여 손수 茶를 끓여 마시고 ‘茶 맛은

道의 맛이다’ ‘차 한 사발은 바로 참선의 시작’, ‘차 맛은 선의 경지’라 하여

다선일여(茶禪一如) 다도일미(茶道一味)를 주장하고 茶時 40여편을 남기고 있

다. 특히 동국이상국집 에는 40여 편의 차시가 수록되어 있어 사대부와 승려

들의 차 생활을 알 수 있다. 고려말의 文人이며 性理學者인 李齊賢(1287 -

1367)는 호는 益齋, 낙옹( 翁) 초명은 之公. 자는 仲恩이며, 忠宣王때 元에

유학하였으며 益齋集 益齋亂蒿 , 역옹패설(轢翁稗設) 등의 문집을 남겼

다. 여러 높은 벼슬을 지내면서 여러 차례 元나라에 왕래, 당대 중국의 문장대

가들과 두터운 친교를 쌓는 한편, 당시 원나라에서 널리 쓰이던 작설차, 元나

라에서 火前春茶를 가져와 손수 달여 마시며 茶人들에게 나누어 준 기록도 있

다. 또한 송광사 景瑚禪師와 교유하며, 해마다 보내주는 차에 대한 고마움을

시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가 쓴 妙蓮寺石池 記 에는 개성 묘련사에 있는 신

라 화랑의 茶具 모양과 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보인다.

李仁老(1152-1220)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이며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서 문장, 시, 글씨에 뛰어났다. 초명은 得玉, 호는 雙明齋이며, 자는 眉 이다.

일찍 고아가 되어 스님 손에 길러졌고, 鄭仲夫가 난을 일으키자 한때 入山했

다가 還俗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그는 雙明耆老會32)에서 茶會를 열어 당시

의 茶風을 크게 일으켰다. 저서로는 銀臺集 雙明齋集 破閑集 등이 있다.

李穀(1298-1351)은 고려말의 학자로 호는 稼亭, 牧隱 李穡의 아버지이다.

초명은 芸白, 자는 仲父이다. 元나라 과거에 급제, 벼슬이 都僉議贊成事에 이

르렀다. 문장에 뛰어났고, 白 正, 鄭夢周 등과 함께 경학의 대가로 꼽힌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증수하고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을 편찬하였

다. 酒客이며 茶人인 이곡은 차의 성품을 술과 대비시켜 나타내고 있다. 假傳

體 소설인 竹夫人傳 이 전하며, 문집으로 稼亭集 20권이 있고 기행문인 東

遊記 에는 四仙의 차 도구에 관한 기록이 있다.

李穡(1328 - 1396)은 고려말 文人이며 性理學者로 이곡의 아들이다. 號는

牧隱이며 14세에 진사가 되어 국자감의 생원, 성균관 大事成 등을 지냈다. 성

리학에 정통하고 성균관의 학칙을 개혁하여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으며, 고려

가 멸망하자 節義를 지켜 朝鮮朝에 出仕하지 않았다. 69편의 茶詩가 전하는

데, 차를 몹시 좋아하여 松廣寺, 聞天寺의 여러 승려들로부터 차를 선물 받기

도 했고, 차가 떨어지면 家童을 시켜 차를 구해 오기도 했으며, 감사의 茶詩를

남기고 있다. 그는 飮茶에 있어 편견이 없어지고 마음이 밝아 생각에 그릇됨

이 없다는 無邪意, 즉 思無邪의 경지를 표현하였다.

혜심(慧諶, 1178-1234)은 고려 때 스님, 호는 無依子, 諡號는 眞覺國師이

며, 慧諶은 법호이다. 나주 화순현(和順縣)출신으로 普照國師의 법통을 이어

曹溪宗의 二世가 되었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차를 즐기던 茶僧으로 많은

茶詩를 남겼다. 지금 松廣寺에 碑가 있고 저서에 禪門綱要 , 선문염송(禪門

拈訟) , 眞覺國師語錄 이 있다.

3. 조선시대의 茶文化

(1) 茶의 종류 및 산지, 製茶法과 茶具

조선 왕조(1392-1910)가 교류한 중국의 역대 왕조는 明나라(1368-1644)

과 淸나라(1644-1911)이였으며, 이 시기에는 연고차, 蒸靑茶, 煮沸茶, 炒靑

茶, 烘靑茶, 靑茶 등의 녹차, 황차, 흑차, 청차, 백차, 홍차, 꽃차와 같은 일

곱 가지의 차가 유행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茶湯과 茶乳를 마셨다. 특히 차탕은

조선시대 음다생활의 주류를 이루었다. 모양과 製茶法에 따른 茶의 종류는 잎

차, 떡차, 말차로 크게 구분하고 잎차는 날잎을 시들리며 발효시켜 그대로 말

린 일쇄차(日 茶), 발효후 찌거나 덖어 말린 것, 살짝 덖거나 쪄서 도중 발효

시킨 것 등 세 가지 발효차가 있으며, 또한 전연 발효시키지 않은 녹차가 있

다. 여기에 속하는 조선시대의 茶로는 天地茶, 竹露茶, 寶林茶, 萬德茶, 白雲玉

板茶, 金陵月山茶 등이 있다. 떡차는 찻잎을 찌고 찧어서 둥글납작한 덩어리로

만든 차이다. 운반과 보관이 쉽고 끓여 마시기에 편리하여, 고려시대나 조선시

대에 즐겨 飮用되었다. 떡차는 團茶 또는 차떡(茶餠)이라고도 하며, 그냥 ‘차’

라고 불리기도 했다. 동그란 떡 모양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으므로 돈차(錢茶),

꼬챙이(串)에 꿰어 말리므로 곶차(串茶), 또는 끈(綱)에 꿰었으므로 벼리차(綱

茶)라고도 불렀다. 末茶는 차를 곱게 가루낸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성행하였으

나, 조선시대에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떡차의 종류로는 臘前茶, 小

龍團, 餠茶 등이 있다.

차의 생산에 대해서는 조선초의 세종실록지리지 에 보면, 차가 土貢物인

곳이 32개 군과 현이고 토산품이 차인 곳이 3군데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

은 거의 오늘날에도 차가 많이 생산되는 전남, 경남, 전북 지방으로 차가 나는

지역은 거의 토공으로 바쳤다. 세종실록지리지 보다 약 50년 뒤에 간행된

신증 동국여지승람 에 기록된 차산지는 39개 군현으로 지리지 보다 11군데가

추가되고 7군데가 삭제되었다. 또한 개인이 집 주변에 차나무를 심거나 차밭

을 가꾼 기록도 흔히 볼 수 있다. 매월달 김시습의 경우, 차밭에 울타리를 엮

어 차나무를 보호하고 일광도 차단하여 고급차를 생산하는 해가림재배를 하였

다.

末茶는 고려와 같이 點茶法으로 달여마셨고, 잎차는 泡茶法으로 우려 마셨

다.

末茶用의 茶具로는 點茶器와 點茶鍾 등이 있고, 잎차용 茶具는 금, 은, 도자

기제인 茶罐, 玉茶鍾, 茶亭, 銀茶鍾, 茶甁, 茶匙, 茶鍾盤, 茶甫兒, 茶椀, 표주박,

풍로 등이며 이들 다구들은 조정이나 사대부, 승려, 서민 등 여러 계층에서 다

양하게 사용되었다.33) 조선시대에는 말차가 쇠퇴하고 잎차와 떡차를 끓인 차

탕을 즐겨 마시게 됨에 따라, 다구도 고려처럼 귀족적이거나 화려하지 않고,

소담한 멋과 단아한 기품을 지니게 된다. 고려의 청자는 퇴조한 반면, 조선 초

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분청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청자의 바탕흙에 흰 흙(白

土)으로 분을 바른 것이다. 백자는 태토가 흰색으로 신라말부터 고려시대에도

간간이 생산되다가 15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발달되어 궁중용이거나 고급

그릇으로 쓰였다.

(2) 朝鮮 茶文化의 전개양상

조선 초기의 다도는 고려에서 외래 사신을 위한 다례의식을 그대로 답습하

였고 이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고려시대에는 飮茶의 풍속이 일반화되

었고 조선초기까지 飮茶風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민간에도 음다풍은 자연

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창건되고 李成桂를 중심으로 규합하

였던 신진 사대부들은 抑佛崇儒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불교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에 불교적 색채가 퇴화되면서 모든 의식이 유교적 성향으로 변모되어갔

다.34)

조선시대의 茶관련 제도와 시설은 궁중에 茶房, 茶色(일종의 茶母), 惠民局

의 茶母 등이 있고, 民間에는 男茶母, 女茶母와 茶市, 茶店이 있었다.

茶房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궁궐이나 태평관(사신의 숙소)에서 사신에게 다

례를 베푸는 일과 조정과 왕실의 다례를 주관하는 일을 하였다. 태종 15년에

는 임금이 무술을 연마할 때 다방의 관리는 어가를 수행하여 하루에 세 번 차

를 올리고 국가행사 때도 하루에 한 번씩 차를 올리도록 하였다. 다방에서는

왕실의 채소류와 반찬을 관리하고 쌀과 피륙의 출납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태조와 왕후의 위패를 모시는 魂殿을 지키는 일도 하였다. 세종 29년에 다방

을 사준원(司尊院:국가적 손님의 접대의례를 맡음)으로 고치고 외국사신에게

다례를 행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관청에는 茶時, 즉 차 마

시는 시간이 있었다. 태종 5년에는 서울에 있는 관청 모두 다시를 행하기도

했고, 16세기에는 惠民署에서도 다시를 행하였다.35) 특히, 사헌부의 茶時는

고종 때까지 계속되며 매우 중요시 되었다. 차를 마시는 의례를 행함으로써

치우침이 없고 엄정하며 신중한 판단을 얻고자 하는 의도에서 茶時가 행해졌

을 것으로 추정된다. 茶母란 각 관청에서 관리들의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

민계층에서 선발된 여성들이다. 태종 6년(1406)에 惠民局에서 醫女 가운데 성

적이 불량한 생도는 惠民局 茶母일을 보게 하다가 성적등급이 오르면 다시 女

醫生徒, 즉 醫女의 임무로 복귀시켰다. 국가의 제사나 諡號에 관한 일을 보던

봉상시(奉常寺)에도 茶母가 한 명 있었으며, 돗자리, 종이, 油紙 따위를 관리

하는 관청인 長興庫에도 茶母가 있었다36). 조선 중엽에는 茶母가 여자 형사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당시 茶母의 선발기준은 키가 5척이 되어야 하고 막걸리

세 사발을 단숨에 마셔야 하며, 쌀 다섯 말을 번쩍 들 정도로 기운이 센 남성

적인 여자를 기용했다. 포도청, 형조, 의금부 등에 있으면서 남의 집 안뜰에

들어갈 수 있어 그 집 종이나 식모 등을 유인하여 정탐하고 수색했다. 치마

속에는 2척 쯤 되는 쇠도리깨와 포승을 차고 다니다가 죄가 분명한 사람의 집

에 쇠도리깨로 들창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죄인을 포박해 올 수 있었다.37) 18

세기에는 茶母가 관리의 차시중 뿐만 아니라 수청을 들기도 했다. 말을 갈아

타는 驛에도 茶母가 있었다고 한다.

조정과 왕실에서 행해지던 茶禮에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事大交隣을 위한

茶禮와 會講茶禮 등이 있었다. 會講이란 한 달에 두 세 차례씩 왕세자가 스승

과 侍講院의 정1품 관리 및 賓客들을 모아놓고 經書와 史記를 복습하며 講論

하던 일인데, 이 때 다례를 행하고 술과 과일을 베풀었다.38) 중국 칙사를 위

한 사신맞이 다례는 太平館, 思政殿, 仁政殿 혹은 明倫堂 등에서 왕이나 왕자

가 중국 사신에게 ‘다례’라는 명칭으로 차를 대접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또한

중국 사신을 위한 遠接茶禮는 問禮官, 差備官을 평안북도 의주의 義順館까지

보내어 茶啖床을 베풀었다. 이들에게는 의주, 정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 홍

제원 등을 거치면서 茶禮를 베풀었다. 일본 사신을 위한 다례는 接慰差備官이

부산에 내려가 베푸는 下船茶禮는 書契를 바칠 때 거행되며, 下船宴은 進獻物

을 바칠 때, 돌아갈 때는 上船宴을 베풀어졌다. 궁에 도착하면 인정전, 便殿

접견 등에서 사신을 위한 다례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39)

또한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여럿이 모여 화합하고 결속하는 의미로 차를 모

시기도 하였다. 1616년에는 大北黨과 小北黨이 한때 한 자리에 모여 화해를

도모했는데, 매화향기 속에서 ‘仙茶’를 마시며 모임의 의의를 새긴 것을 볼 수

있다.40) 문인들은 契會를 조직하여 차를 마시며 시도 짓고 결속과 친목을 돈

독히 하였다. 계회란 공동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기 위

해 술 마시고 차도 마시며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는 모임이다. 茶山의 茶信契

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를 하던 기간 동안, 다

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18명의 제자가 있었다. 다산초당으로 옮겨 살 때부

터 떠날 때까지 11년 동안 수학을 한 사람들인데, 1818년 8월 드디어 스승이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가게 되자, 18명의 제자들은 서로 잊는다면 금수(禽

獸)와 같은 것이라며 전문 8조로 된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어 신의를 다짐한

다. 그들은 헤어질 때를 대비해 2년 전부터 1냥씩 내어 모은 35냥을 스승의

행장속에 넣어드리고, 스승은 서촌의 발 몇 구역을 그들이 신의를 삼을 '다신

계' 자본이 되게 한다. 만든 계의 규약에는 전토(田土)의 크기와 가격, 관리 방

법을 꼼꼼히 기록하고 헤어진 후에 할 일도 조목조목 기록하였다.

조선시대 여성의 茶 문화는 앞서 언급하였던 茶母이외에도, 여성이 의식다

례를 집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자가례 나 사례편람 에는 주부가 點茶하여

찻병을 들어 神位 앞에 차를 따르고, 혹은 맏며느리나 맏딸이 차를 따른다는

내용이 있어 일부 실행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누에를 칠 때에는 여성이

蠶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종교적인 茶禮중 불가의 다례는 智還師의 梵音集 과 白坡師의 龜鑑集 등

을 참조로 하여 거행하였다. 한편 국가의 통치이념을 유지하였던 유가는 朱熹

의 朱文公家禮 에 의거한 冠婚喪祭의 茶禮를 적극적으로 권장, 실시하였다.

이밖에 도가에서는 다례를 한양의 昭格署에서 도교의 격식에 따른 茶禮를 거

행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神에게 제사지낼 때는 ‘茶湯’

을 주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불가의 茶禮는 중국 것을 모방하지 않고 독특한

예법이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출가한 승려들에게 유교적 喪禮를 따르도

록 강요하였고 불가의 제사다례도 다분히 유교적이었다. 불가의 다례는 부처,

나한, 삼보 등에 차를 올릴 때와 돌아가신 스님의 제사를 지낼 때 행해졌으며

탑이나 부도에도 다례를 올렸다. 다례가 있을 때는 茶偈를 읊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유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고 점차 유교적인 윤리관념이 일반화되게

되면서, 16세기에는 주자가례 가 일반서민에게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정착되

었다. 가례란 집안에 일이 있을 때 거기에 준해서 행하는 예법으로 대개 관혼

상제의 예를 말한다. 17세기에는 가례언해 가례집람 등 이와 관련된 서적

도 많이 나왔다. 朱子家禮 에도 祭祠(제사), 婚禮(혼례), 祠堂(사당)의 祭禮

등에 茶를 올리는 獻茶의 법도가 있어 양반 관료 사회에 飮茶 풍속이 성행되

었다. 조선중기 倭亂, 胡亂 등 양란이후 경제적 사회적 혼란으로 茶생산이 감

소되어 茶文化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러나 寺院의 僧房에서 飮茶의 생활과 造

茶의 기술이 유지 발전되어 왔다. 조선 말기에 茶山丁若鏞, 秋史金正喜 草衣大

禪師가 쇠퇴한 茶文化를 다시 일으키고 특히 草衣禪師는 海南에 一枝庵을 중

건하고 40년 동안 茶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韓國茶文化를 中興시켰다. 대체로

조선왕조가 신라와 고려시대에 비하여 茶文化가 쇠퇴한 원인은 조선초기 불교

의 탄압과 寺院에 重稅를 부과하여 불교가 힘을 잃은 점과 일반가정의 祭禮에

서도 淸酒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담배와 술 같은 기호품의 성행과

韓國의 좋은 生水와 식탁에서 숭늉을 많이 마시는 등 한국인의 생활습관 등에

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또 조선후기 地方官吏 茶貢에 대한 지나친 수탈도

茶文化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조선시대의 茶人들

조선시대의 대표적 茶人으로는 매월당 김시습, 다산 정약용, 초의 의순, 추

사 김정희 등을 들 수 있다. 金時習(1435-1493)은 조선초기 生六臣의 한 사

람으로 호는 梅月堂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책을 불사

르고 중이 되었다. 47세 환속하였으나 2년 후 다시 방랑하다가 무량사에서 생

애를 마쳤다. 그는 수련적인 도교를 크게 중흥시켰으며, 저서로는 金鰲新話 ,

梅月堂集 이 있으며 60여수나 되는 많은 茶詩가 전해진다. 그는 ‘차나무 기

르기(養茶)’라는 시에서 울타리를 엮어 해가림 재배를 해서 맛이 좋은 고급차

를 키웠고, 색과 향기가 좋으면 될 터인데 관가에서는 槍(;제일 어린 뾰족한

싹)과 旗(;오그라진 어린 잎)만을 취함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손수 차를

끓여 부처님께 올리고 예배하였으며 때로는 돌솥에 말차를 끓여마셨다.

茶山 丁若鏞(1762 - 1836, 영조 38년 - 헌종 2년)은 경기도 양근(楊根 :

지금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태어났고, 정조 6년 文科에 급제하

였다. 호는 三眉, 興猶堂, 茶山樵夫 등이며, 22세 때 경의진사가 된 이후 예문

관 검열,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성균관 직강, 홍문관 부교리,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등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틈틈이 저술도 하였다.

1789년 天主敎信者라 하여 海美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등용되어 水源城을 설

계하고 西洋式 起重機를 사용하여 수원성 축조에 기여하였으며, 이후 承旨, 암

행어사 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가 오히려 화가 되어

몇 번의 좌천을 겪고, 마침내 정조가 죽자 투옥이 되고 만다. 얼마 후 투옥에

서 풀려나지만 천주교 문제로 포항 장기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 해 11

월, 즉 1801년(순조元年) 申酉邪獄에 연루되어 金南康津으로 유배되어 18년

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57세(1818)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살다가 1836년

75세로 별세하였다. 茶山은 18년간 유배생활동안 牧民心書 , 經世遺表 ,

欽欽新書 등 三部作외 5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44세(1805)때에 10살

아래인 大芚寺(대둔사 : 대흥사)의 兒庵 惠藏 스님을 만나 茶生活에 심취하게

되었다. 茶山은 兒庵에게 周易을 가르치고 茶를 얻어 마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암은 40세에 요절하였다. 그리고 48세(1809)때에 24세인 草衣를 만나 이때

에 草衣는 茶山이 德業이 나라안에 으뜸가고 文質이 빛나는 스승이라 했고,

그를 만난 기쁨을 “하늘이 나를 孟子 곁에 있게 했다.”라고 표현했다. 茶山은

茶가 나쁜 버릇을 고친다고 하였으며 茶를 잘 재배하면 中國의 말(馬)과 바꾸

어 나라살핌에 보탬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茶山이 1818년 유배생활에서 풀려

고향으로 귀향하자 康津의 제자 18명이 모여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

여 茶信契를 조직하고, 「茶信契節目 을 작성하였다.

金正喜(1786-1856, 정조 10년-철종 7년)는 書畵家이며 호는 阮堂, 秋史,

茶老, 勝雪學人, 古鼎室主人 등이다. 학문적으로는 實學派에 속하며 서예에서

는 독특한 秋史體를 대성하여, 隷書와 行書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저서

에 阮堂集 , 金石過錄 등이 있다. 秋史는 30세에 茶山의 아들 有山의 소개

로(1815) 草衣를 만나 친교가 두터워졌으며, 이후 해마다 茶를 얻어 마셨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갔을 때(1840-1848, 55세-63세) 草衣는 제주도에 찾아

가 같이 지내며 茶나무도 심고 참선도 하였다. ‘참선과 茶 끓이는 일로 한해를

보냈다’는 말이나 草衣에게 써준 茗禪 은 그의 생활이 차와 선으로 일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茗禪 의 오른 편에는 ‘草衣가 손수 만든 茶를 보내어 왔는

데 그 제다(製茶) 솜씨를 칭찬하고 글로써 이를 보답한다’고 쓰여있다. 그의

茶詩 20여수가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시는 다음과 같다.

고요히 앉아서 정좌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41)

草衣禪師(1786-1866, 정조 10년-고종 3년)의 본명은 장의순(張意恂)이며,

나주 삼향 사람으로 자는 중부(仲孚)요, 법호는 초의이다. 15세때 전라남도 남

평 15세에 출가하여 雲興寺에서 중이 되고 大興寺의 玩虎스님으로부터 具足

戒를 받고 草衣라는 法名을 받았다. 19세 때에는 운흥사의 본산인 海南 大興

寺에서 고승 완호에게 법을 받는 한편, 24세(1809) 때 완호선사와 친분이 두

터웠던 丁茶山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茶山草堂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그후 금

강산 비로봉을 비롯 경사의 여러 산을 두루 답습하는 한편 김추사(金秋史), 신

관호(申觀浩), 김명희(金命喜) 등의 명사들과도 사귀어 견문을 넓히는 한편 불

교와 선의 오묘(奧妙)함과 다도의 현모함을 깨우쳤다. 특히 39세에(1815) 두

륜산에서 폐허가 된 一枝庵하고 止觀을 닦기 40년 다생활에 높은 경지를 이

룩했다. 초의선사는 조선후기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禪風을 일으키고 명맥

만 유지해오던 韓國茶道를 中興시켰다. 초의는 詩, 佛畵, 書, 茶道에 뛰어나고

(四節) 서울의 많은 茶人, 학자들과 교류했는데 金正喜, 金命喜 형제, 茶山의

아들 丁有山, 洪顯周(홍현주 : 정조의 부마), 홍석주, 신관호 등이며 특히 秋史

金正喜와는 金蘭之交의 우정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茶에 관한 그의 저술로

東茶頌 이 있어 茶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하였다. 홍현주가 다도를 알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술한 동다송 에는 차나무의 생태, 차의 고사, 중국의

이름난 차, 우리 차의 우수함, 차 다루기의 어려움, 차 따기, 차 끓이기, 製茶

法 등을 서른 한 수의 詩로 썼으며, 각 시마다 註를 달아 상세히 설명했다.

Ⅳ. 韓國의 茶道文化思想

본 장은 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본론에 해당하는 장으로서, 한국의 茶道

文化思想에 관하여 儒家 佛家 道家的 사상으로 분류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이

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고찰해봐야 할 것은 한국에

茶道 또는 茶文化 자체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朝鮮法制史稿 로써 이름난 아시미(淺見倫太郞, 1906-1918)박사는 朝鮮

古書解題 에서

조선에는 茶가 없다. 茶가 사용된 것은 근대의 일로서 일본인이 즐기는

바이다. 丁若鏞의 茶山 또는 茶亭이라고 이름한 것은 대개 康津에 있으면

서 山茶(동백나무)를 많이 심었기에 취한 것이다. 山茶에 대해서는 이 책(

雅言覺非 )의 山茶者南方之嘉木也云云條에 보인다. 山茶는 일본말의 椿(동

백)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에는 이와 같은 同文異義가 많다.

고 하였다.

그리고 民藝硏究家인 야니기(柳宗悅, 1889-1961)는 朝鮮陶磁號序 에서

조선에는 일본처럼 도자기를 애완(愛玩)하는 풍습이 없다. 수집가도 없

고 또한 다례와 같은 것도 없다

고 하였으며, 히사마쓰(久松眞一, 1889-1980) 박사는 茶道의 哲學 에서,

중국에도 점다(點茶)라는 것은 있다. 그러나 차의 문화라는 것은 일어나지

를 않았다. 茶道라는 것은 없다. 조선에도 없다. 차가 하나의 종합적 문화를

창조하였다는 것이 이것은 일본의 독특한 것이다1)

이러한 시각들은 주로 일본에서 제국주의가 팽창했을 때 제기되었던 것으

로,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에서도 인도의 釋迦보다 자신들의 日蓮이 먼저 나왔

다고 주장할 만큼 역사에 대한 왜곡과 억지주장이 심했던 때이다. 사실 한반

도에 고대국가 시절부터 飮茶가 성행하였고 독특한 茶文化가 형성되어 있었다

는 것은 3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茶道라는 용어 자체도 우리나라에

서는 18세기 초 艸衣禪師가 東茶頌 과 茶神傳 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먼저 茶神傳 을 보면,

차를 만드는 데에는 정성을 다하고 보관할 때에는 건조한 곳에 두어야

하며 탕을 끓일 때에는 청결하게 하여야 한다. 정성을 다하고 건조하게 보

관하면 청결하게 끓이게 되면 다도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다.2)

「다신전」끝부분에서도 다음과 같이 다도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 불가에도 혹은 조주의 풍이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다도를 완전

하게 알 수 없기에 써 보지만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3)

그리고 동다송 29송 포법 부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다도란 말이 나오고 있

다.

평해서 말하면 차를 달일 때에는 오묘함을 다하고 차를 만들 때에는

그 정기를 간직하며 물은 참된 물을 얻고 포법에는 중화를 얻으며 체와 신

이 즉, 차와 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웅건함과 신령스러움을 갖추니 이런

경지에 도달하면 다도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4).

이처럼 茶道라는 용어는 일본 고유의 말이 아니고 우리 조상들도 옛부터

다도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 유가적 사상

韓國의 茶道文化精神에 내포되어 있는 유가적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

어 볼 수 있다. 생각에 그릇됨이 없다는 것과 中和의 정신, 그리고 분수를 지

킨다는 것이다.

(1) 思無邪

思無邪란 말 그대로 생각에 그릇됨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論語 의 爲政

편에서 “詩經 삼백편을 한 마디로 통틀어 말하자면, 생각에 삿됨이 없다”5)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論語 의 이 구절은 詩經 魯頌 의 “아무 생각

없이 말은 달려 가고만 있네”6)에서 인용된 것이다. 思無邪에 대하여 朱子는

‘性情之正’이라고 하여, 惡을 버리고 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을 뜻한다고 보았

다. 이러한 의미가 우리 나라 茶道文化思想 가운데 드러나는 것으로는, 우선

고려시대 왕이 신하의 사형과 귀양을 결정하는 의례에서 왕과 신하가 격식을

갖춰 차를 마신 경우나, 고려와 조선시대에 관리와 백성의 죄를 논하는 사헌

부에서 茶時를 행한 일, 새로 임명받은 관리가 茶房을 거쳐 나가도록 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모두 茶가 참된 마음을 갖게하고 치우치

지 않는 바른 판단을 하게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제도로서 이해될 수 있다7).

또한 思無邪 정신은 고려시대 三隱의 하나였던 이색(李穡, 1328-1396)의

茶詩에서도 드러난다.

차를 마시고 난 후에 읊음

목은 이색(李穡)

작은 병에 샘물을 담아가지고

깨진 그릇에 노아차를 달이네

귓불에 청정한 기운이 돌 때

코에서는 신선의 자하를 보노라

별안간 눈에 어른거리는 것이 사라질 때

밖의 경지는 조그만 티도 없구나

혀로 차맛 음미하여 삼키니

뼈와 살이 참으로 달라지는 듯

가슴 속 영혼의 마음자리는

교교하게 밝아 생각에 그릇됨이 없구나

어느 겨를에 천하에 이 기운 미치리

군자는 응당 자기 집을 바로 잡아라8)

이 詩에서는 먼저 차가 지니고 있는 효능부터 차의 삼요소인 色, 香, 味를

포함하여 모든 오감을 즐겁게 하는 종합예술임을 말하고 있다. 눈으로는 차탕

의 색을 감상하고, 귀로는 물끓는 소리를 음악처럼 듣고, 코는 그윽한 차의 향

기를 맡고, 혀로 차의 달고 부드러운 맛을 음미하고, 손으로 그릇의 질감과 온

도를 느끼면, 눈으로 보는 사물이 저절로 사실적으로 보인다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차를 마신 후의 마음은 밝고 맑아지므로 思無邪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신체적 감각적인 즐거움을 넘어서 행동과 생각의 올바름까

지 생각이 미치고 있는 것인데, 실제 그는 차를 손수 끓여 마시는 일을 誠意-

正心-修身하는 일로 여기는 군자수신의 茶道觀을 가졌다. 여기서, 誠意-正心-

修身이란 儒家 經典의 하나인 大學 의 여덟 가지 조목에 해당하는 것이다.

大學 이란 禮記 의 제42편이었던 것을 宋의 사마 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따

로 떼어서 大學廣義 를 만들었으며, 그 후 朱子가 大學章句 를 만들어 경經

1章, 傳 10章으로 구별하여 註釋을 가하고 이를 尊崇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주자9)는, 大學 의 經 부분은 공자의 말을 曾子가 記述한 것

이고, 傳10)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경에서는

明明德(: 밝은 덕을 밝히는 일) 新民(: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11) 止於至善(:지극

한 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三綱領이라 하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

(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八條

目)으로 정리하여 유교의 윤곽을 제시하였다. 실천과정으로서는 8조목에 3강

령이 포함되고, 격물 즉 사물의 이치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평천하의 궁극 목적과 연결된다는 것이 대학의 논리이다. 따라

서 8조목이란, 儒家(특히, 性理學)적 입장에서 학문의 전 과정을 8가지로 순서

에 따라 나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이색에게 茶事는 유

학의 達道를 위한 실천적 공부방법이었던 것이다.

초의선사가 추사 김정희의 아우인 김명희에게 보낸 글에서도 “옛 성현들이

차를 좋아함은 차는 군자와 같아 그 됨됨이가 사기가 없었기 때문이다(茶如君

子性無邪)”라고 하였는데, 이 때의 無邪, 역시 올바름(正)을 뜻하는 동시에 義

와 善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 中和

초의는 佛僧이었음에도 불구하고, 儒家的 中道 中正 中和사상을 제창하였다.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초의가 김명희에게 보낸 詩의 全文을 살펴보면

예로부터 성현들이 모두 차를 좋아했나니

차는 군자와 같아서 성품에 삿됨이 없다네

깊은 곳에서 가볍고 부드러운 물을 길어 차를 끓이니

眞과 精이 和와 어울리어 水體와 茶神이 열리네

거친 것이 없어지고 정기가 들어오니

大道를 얻어 이룸이 어찌 멀리오12)

이 가운데 思無邪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를 하였으며, 여기서 水體와 茶神

에 대해서는 原註에는 眞水가 아니면 神이 나타나지 않고 精茶가 아니면 그

體를 엿볼 수 없다13)라고 하였다. 이 詩에서는 물과 茶가 적당하게 어울려야

참된 차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올바른 飮茶를 통하여 茶道의 본질

적 영역인 大道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大道에 이르는 첫걸음

은 물과 茶의 적절한 조화(中和)인 셈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초의선사의 東茶頌 을 보면

차 속에는 현미함이 있어 오묘함을 드러내기 어려우니

眞과 精은 體와 神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네

비록 茶의 水體와 茶의 神氣가 온전타 하여도 오히려 中正을 잃을까 두렵

중정은 건전함(健)과 신령스러움(靈)을 함께 지니는데 지나지 않는다네14)

여기서 體는 바로 우러난 찻물(茶湯)의 몸을 뜻하는 물이고, 신(神)은 우러

난 찻물의 찻기를 비유한 말이다. 따라서 좋은 물인 眞水와 정성들여 만든 차

인 精茶라야 비로소 좋은 찻물과 찻기, 즉 멋진 飮茶를 체험할 수 있다는 말

이다. 그리고 진수와 정차라 하더라도 우릴 때에 中正을 지키는 것이 중요함

을 그는 강조하였다. 그리고 훌륭한 차 한 잔을 體가 건강하고 神이 신령스럽

다고 표현하여 인간의 경우로 비유하고 있다. 다시 原註를 살펴보면,

泡法(우리기)편에 이르기를…총평해서 말하면, 차를 딸 때에는 그 오묘

함을 다하고, 만들 때에는 그 정성을 다하며, 물은 진수를 얻어야 하고, 우

릴 때는 中正을 얻어야 한다. 體와 神이 서로 어울리고 健과 靈이 함께 아

울러 갖추어져 한다. 여기에 이르면 茶道를 다하는 것이다.15)

여기서 포법 편이란 초의가 베껴 쓴 茶神傳 의 원전인 茶錄 에 나오는

포법 편으로,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 ‘총평해서 말하면’ 이하의 부분

은 초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기에서 선사는 차의 정신으로서 中正을 들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초의가 불승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학

적 측면을 보이는 원인은 다산을 스승으로 삼아 유학을 배웠으므로, 다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다산은 사람의 性의 구성요소를

體(마음)와 神을 들고,그것이 妙用의 道心에 의해 감응한다고 했는데, 초의도

茶湯의 性의 구성요소로 물을 體로 보고 茶를 神으로 보았다.16) 艸衣에 대하

여 당시 많은 유학자들은 그의 문장이나 사상에 유가적인 면이 있다고 여겨

호의적으로 평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다산이 바라본 초의의 모습은 다음의 시

에서 드러난다.

<증초의선>

축 늘어진 남루한 옷에

풀어 헤쳐진 민둥 머리

너의 중 껍데기를 벗기니

유생의 뼈가 들어 나는구나

오래 된 거울은 이미 닦이었고

새 도끼는 무디지 않다네

밝음을 보고 깊이 깨달으니

이것이 바로 제 이월이라네17)

이것은 칠순을 하루 앞 둔 섣달 그믐날 밤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초의에

게 준 시이다. 여기서 다산은 초의에 대하여 ‘중의 껍질을 벗기면 유생의 뼈가

드러난다’라고 평하였다. 다산이 굳이 불승인 초의를 유생을 보는 이유가, 다

산 자신이 불교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또한 초의가 실제로는 佛家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 지도 모

른다는 사실 역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당대의 유학자들이 초

의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위에서 전

술한 바와 같이 초의에게서 유교적 中和의식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유가에서 中과 和는 기본경전 중 하나인 中庸 에서 특히 강조된다. 中庸

은 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라 알려졌지만, 몇몇 異說도 있다. 오

늘날 전해지는 것은 五經 의 하나인 前漢시기의 유학자 대성이 저술한 禮記

에 수록되어 있던 한 편이다. 예기 는 총 49편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

제31편이 바로 중용으로, 이는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어 오다가 宋代의 朱

子에 의하여 大學 論語 孟子 와 함께 四書 로 불리고 있으며, 宋學의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中庸 은 大學 과 더불어 유교철학의 기본서이다. 대

학은 유가의 정치철학을 말해 주고 있는데 반하여 중용은 人性을 밝힘으로써

인간과 우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인간 역사화의 관계를 논하는 가운데 至

善(:지극한 선)이 실현되는 원리를 말하고 있다.

中庸 은 전부 3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 1장의 시작은 ‘天命之謂性(: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이라는 말로서 마지막 장까지 이 문제에 대하

여 깊이 있게 밝혀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의 1장에서 말하고 있는 요

지는 하늘에서 명하여 받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따르고 발휘시키는 것이 道

라는 것이다. 그리고, 中庸 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이 바로 中과 和이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을 中이라고 하고, 발동하였는데

모두 적절하게 맞는 것을 和라고 한다. 中이란 것은 천하의 大本이며 和라는

것은 천하의 達道이다. 中和에 이르게 되면, 천지가 여기서 제 자리를 찾고 만

물이 여기서 자라게 될 것이다.18)

中庸 은 儒學에게 형이상학적인 기초를 가장 먼저 제공한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송대 성리학에서 大學 과 함께 中庸 을 유가의 기본경

전인 四書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中和라는 개념은 中庸 가운데에서도 가장

首章에 나타나면서, 텍스트 전체를 개괄하고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天地 萬物이 中和를 근본으로 하여 비롯될 수 있으므로, 艸衣의

茶道정신 역시 이러한 中和라는 체계에 茶의 본질과 行茶절차를 그대로 적용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3) 淸廉과 安貧樂道

본 절에서는 茶道文化思想의 하나로 淸廉潔白과 儉素를 주로 하는 淸白吏

정신과 安貧樂道에 대하여 논의해 보겠다. 安貧樂道라 하면, 현재의 처한 상황

이 곤궁하다 하여도 비관하지 말고, 곤궁한 가운데에서도 道를 지니고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유학의 논의를 살펴보면

자공이 말했다. 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고 넉넉해도 교만하는 일이 없

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괜찮긴 하지만 가난하고도 道를

즐거워하고 넉넉하고도 禮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19)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삶이란 安貧과 正義의

덕목을 간직한 삶이라 할 수 있다. 흔히 安貧樂道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이 顔回의 삶이다. 공자도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

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도다 회야말로! 한 그릇의 도시락밥을 먹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면서 누추한 골목에서 살고 있는 것을, 남들은 그

시름을 이겨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구나. 어질구

나 회야!20)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이 ‘가난함’ 자체는 물론 아닐 것이다. 곤궁함을 견디

지 못하여 자신의 신념체계, 즉 道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며, 곤궁한

와중에서도 그 道를 즐거워하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을 칭찬한 것이다. 또한

공자 스스로도 安貧樂道의 삶을 경험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물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 굽혀 베개 삼아

누울지라도 즐거움이 이 가운데 있나니, 의롭지 않고서 富貴함은 나에게

저 뜬 구름과 같도다.21)

이들 儒家의 安貧樂道에는 분명 道家의 隱者的 기풍과도 어느 정도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이 安貧하는 목적은 老莊처럼 인위적인 관습이나 제도나 문화

따위를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도덕한 재물이나 권세로부터 스스로와

스스로의 신념을 지켜내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儉素하고 淸貧하면서 安貧樂道를 유지한 청백리들은 老莊的인 의미의 ‘安分知

足’이나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기풍22)’

과는 전혀 다른 의도와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고 하겠다.

우리 나라 3대 茶人 가운데 하나인 徐居正은, 대사헌을 두 번이나 하고 육

조 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6대에 걸쳐 임금을 모시는 등 45년 동안 높은 관직

에 있었다. 그러나 매우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40년간 초가집에서 궁핍

하게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茶具마저 다리 부러진 쇠솥과 금이 간 찻잔

을 썼다고 한다.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

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

……

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

한가롭게 게눈차를 끓인다네23)

이 시에는 지붕이 뚫린 초가집에서 살며 한가로이 글씨를 쓰며 차를 끓여

마신 청빈한 서거정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서거정은 궁핍함을 불편하게 여기

지 않고 조용하게 책을 읽고 차를 달이는 유유자적한 달관된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정신이 과거 선비들의 맑은 청백리 정신이라 하겠다.

이러한 경향은 李奎報에게서도 드러난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자 재상 벼

슬까지 지냈었지만, 식생활조차 곤궁하여 때로는 아내가 갓옷을 저당잡히기도

하고 절에서 쌀과 숯을 보내오기도 하였다24)고 한다.

<일암거사 정분군이 보낸 차에 사례하다>

그리운 소식 몇 천 리 날아 왔는고

하얀 종이 바른 함 붉은 실로 얽었구나

내 늙어 잠 많은 줄 알고서

새로 나온 찻잎을 달여 먹으라 구해 주었네

벼슬 높아도 가난하기 나만한 이 없거늘

본디 여느 먹거리도 없거든 하물며 仙茶이랴

해마다 홀로 어진 이 덕을 입으니

이제야 이 세상 재상집 구실 하누나25)

이 詩는 이규보가 정분에게 茶를 선사받고 감사의 뜻으로 보낸 글이다. 여

기에서도 재상답지 않은 곤궁한 생활과 그런 생활속에서 知人에게 茶를 선사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 속에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규

보가 이러한 생활을 만족해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신념을 바꿔 致

富나 蓄財를 할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어 보인다.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부

귀해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道가 없는 세상에서는 부귀한 것이 오히려 부끄러

워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26). 이것이 바로 儒家의 安貧樂道 정신이며,

이후 관직에 나아가서 淸白吏로 처신할 수 있는 근본정신인 것이다. 비록 삶

이 고단하게 여겨질수록, 飮茶를 통하여 마음의 여유를 찾고 차분히 자신의

본질적인 삶의 목적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선비 茶人들

이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특히 淸白吏들이 차를 몹시 즐긴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청백리는 일반적으로 청렴한 관리를 말하나, 옛날에는 의정부 등

의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와 사간원의 높은 관리들이 추천하여 선정하기도

하였다. 높은 직책을 맡은 그들은 부를 탐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차를 끓

여 마시는 생활 속에서 허욕을 버리고 즐거운 마음을 지녔다.

2. 佛家的 사상

한국 茶道文化思想의 불가적 요소는 주로 禪佛敎와 관련된 것이다. 본 장

에서는 茶禪一如와 喫茶去의 趙州茶風 話頭로 나누어 고찰할 것이다.

(1) 茶禪一如

茶禪一如는 茶禪一味, 茶禪三昧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이면서 조금씩

다른 것처럼 논의되기도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같은 범주로 보아 함께 고찰

할 것이다. 茶禪一如란 行茶와 飮茶의 전 과정 절차에 걸쳐서 禪定 三昧의 경

지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정영선씨의 경우 이것을 참선하는 자리에는

차가 있다는 것, 茶禪一如사상, 煎茶하여 三昧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등으로 三

分하고 있지만27), 이러한 분류가 별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그가 말했듯 茶와 禪이 같다는 것은 ‘茶事 자체도 참선으로 여겼을

것28)’이며, 따라서 行茶의 전 과정이 禪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면 굳이 煎茶하는 과정에서 三昧에 이를 수 있다는 三昧手 등의 개념 역시 茶

禪一味 또는 茶禪一如, 茶禪三昧라는 범주로 묶어서 논의하여도 큰 무리는 없

을 것이다. 참선하는 자리에 차가 있다는 것 역시 山谷 황정견의 ‘靜坐處 茶半

香初’29)가 가장 대표적이기는 하지만, 본래 참선을 하고 난 전후에 차를 마시

는 것이며, 만일 飮茶 자체도 禪의 한 과정이라고 간주된다면 역시 앞의 茶禪

三昧, 茶禪一味의 범주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먼저 禪이란 禪定을 일컫는 것으로, 靜慮 즉 고요히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는 마음을 다스리어 잡념을 일으키지 않고 無我 靜寂한 가운데서 진실한 자기

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선은 가만히 앉아서 행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四威儀인 行住坐臥, 즉 다니는 것, 머무르는 것, 앉는 것,

눕는 것 등 일상의 동작 가운데서 靜慮하는 것도 포함한다.30) 그러므로 茶禪

一如란 行茶 飮茶의 전 과정에서 이러한 禪定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흔히 茶와 禪을 연관시키는 것은 일본의 茶道를 떠올리지만, 우리나라의

다도문화사상 가운데 하나인 茶禪一如는 일본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일본에

서 茶禪一味를 최초로 뚜렷하게 드러한 사람은 다이규우(大休宗休)의 語錄인

見桃錄 에 나오는 ‘차는 禪의 맛을 아우를 수 있어 능히 속세의 티끌이 오는

것을 피한다31)’는 한 구절에 보이는 것이 가장 빠르다. 그런데 이는 15-16세

기 무렵에 해당하지만, 우리나라의 茶禪一如 또는 茶禪一味 사상은 12-13세

기의 이규보에게서 드러난다.

<장원 방연보의 화답을 보고 운을 이어서 이에 답하다>

초암의 다른 날 선방을 두드려

몇 권의 오묘한 책 깊은 뜻을 토론하리

늙기는 했어도 오히려 손수 샘물 뜰 수 있으니

한 사발은 곧 이것이 참선의 시초라네32).

이 시에서는 세계 최초로 茶禪三昧, 茶禪一如의 경지를 제창하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미시나(三品彰英, 1902-1971) 박사가 말하기를, “위에 든 모두

차와 禪의 同一味를 노래한 것으로…一 卽參禪始라는 시구를 소우단(宗旦)

의…茶禪一味라는 禪茶論과 함께 읽고 싶다33)”고 하였다. 그리고 구마꾸라(熊

倉功夫) 박사는 茶禪一味에 대한 양국의 제창시기를 비교하고 다음과 같이

“茶禪一味의 주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15,16세기의 무렵에 해당된다.

그러나 조선의 차에서 茶禪一味의 주장은 보다 오래되어 앞서 제시한 李相國

集에…一 卽參禪始라고 하였다.…대략 12,13세기의 무렵에는 일본에 앞서서

茶禪卽一味의 주장이 조선의 차에 나타나는 것이다34)”는 결론을 내렸다.35)

이러한 茶禪一如 정신이 드러나는 또다른 茶詩로는

시를 읊조리고 차를 마시는 것 모두 선의 맛이니

나도 인간세상에 사는 머리 긴 승이라네36)

이 시는 우리나라 7대 文士 茶人에 속하는 海居(道人) 洪顯周(1793-1865)

의 시이다. 그는 茶屋을 짓고 음다생활을 즐겼다 한다.

또한 초의 추사와 친분이 두터웠던 자하 신위도 다음과 같이 茶禪一如의 茶

詩를 남겼다.

수레수리가 조용해지니 진흙이 바다같고

차맛이 달큰하게 감돌아 졸리운 듯 하니 이것이 바로 선이구나37)

또한 단순히 茶와 禪이 그 분위기나 본질적인 향취가 동일하다는 직접적

언술 이외에도, 앞서 말했듯이 차를 끓이고 마시는 과정과 차를 마신 후 고요

히 생각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禪의 수행단계처럼 생각하기도 하였다. 따라

서 茶事에서 다탕의 풍미를 잘 내는 익숙한 솜씨를 흔히 ‘삼매의 솜씨(三昧

手)’라고 하였다. 이규보의 茶詩를 보면

벽돌 화로에 손수 끓이네

……

삼매의 솜씨가 이미 익숙해졌으니

노동의 일곱 잔 차의 맛에 어찌 비교가 되랴38).

여기서도 ‘삼매수’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자신의 차 끓이는 솜씨가 익

숙해져서 당나라의 七椀茶라는 茶詩로 유명한 盧仝39)보다 더 나은 맛을 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삼매’란 본래 불교용어인 ‘samadi'를 일컫는 말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마

음을 모아 망상에서 벗어나는 一心의 경지이다. 따라서 茶事의 과정에만 몰두

하다 보면 다른 잡념을 잊고 삼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런 경지의

손놀림, 손맛을 바로 三昧手라고 표현한 것일 것이다.

(2) 喫茶去의 話頭 禪機

唐나라 조주종심(趙州從 , 778-897)의 喫茶去 이야기가 指月錄 의 내용

가운데 전해진다.

두 승려가 조주에게 왔다. 스승 조주가 묻기를 ‘여기에 처음 왔는가? 온

적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온 적이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스승이 ‘차나

한 잔 마시게(喫茶去)’라고 하였다. 또 물으니 다른 승려는 ‘온 적이 없다’

고 하였다. 스승이 ‘차나 한 잔 마시게’라고 하였다. 뒤에 院主가 묻기를

‘왜 온 적이 있다고 해도 차나 한 잔 마시라고 하고 온 적이 없다고 해도

차나 한 잔 마시라고 했습니까?’라고 하였다. 스승이 원주를 부르니 원주

가 대답했다. 그러자 스승이 ‘차나 한 잔 마시게’라고 하였다.40)

이후로부터 飮茶를 권하는 ‘喫茶去’가 선불교에서 유명한 하나의 화두로 정

착되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승려가 관음사까지 와서 조주를 만나 가르침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조주는 일관되게 ‘차나 한 잔 마시라’고 대답하였다. 심지

어 절의 여러 일들을 감독하는 원주에게도 동일한 대답을 건네주었는데,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禪佛敎의 話頭란 논리적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적 체험적으로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에 주어지는 하나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후 ‘趙州茶’ ‘趙州茶風’이라는 용어가 속출하였고, 이러한 개념에 대

하여 논리적인 분석을 시도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즉 趙州가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깨달음의 경지, 부처의 경지란 결국 平常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行住坐臥 자체가 禪이어야 하는데, 결국 어떤 외적인 특수한 경계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상적인 茶飯事 속에

궁극의 경지, 道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41).

이와 같은 趙州의 話頭라는 관점으로 茶를 바라본 경우로 태능의 茶詩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직접적으로 趙州茶라는 제목으로 詩를 지었다.

<趙州茶>

삼등급 찻잔이 눈동자를 바꾸니

그 말씀 받들어 입문한 사람이 몇이던고

임기응변으로 끝없이 교화하니

후대의 자손들 바로 쉽게 밝혀주네

사람을 만나면 사람마다 으레 차 마시고 가라 하지만

태평스런 세상의 한 곡조를 알아듣는 이 적구나

선원의 손님 대접 다만 이와 같이 하니

아득한 불가의 풍습 지금까지 전해오네42)

이 시는 사실 茶 자체가 주제라기 보다는 趙州의 喫茶去 일화가 더 주된

주제로 여겨질 만큼 趙州茶의 본래적 의미를 전달하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글에도 이러한 경향이 보인다.

<초의 선사를 기다림>

눈 앞의 흰 잔에 조주차를 마시고

손 안에는 수행의 꽃을 쥐고 있네

한 소리 가르침 받은 뒤로 점차 새로워져

봄바람 부니 어딘들 산가가 아니리오43)

여기서 山家란 스님이 거처하는 곳이다. 趙州가 喫茶去하라고 했던 그 茶

를 마신다는 것은 물론 趙州가 던져 준 話頭를 깨우치고 道를 터득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차 한잔 마시는(喫茶去)’ 飮茶를 화두로 생각하거나,

飮茶에 禪機를 담아 바라본 또 다른 예로 사명대사의 茶詩를 들 수 있다.

<지호선백에게 줌>

조계종을 이은 오랜 후손

가는 곳마다 사슴과 벗을 삼네

사람들아 헛되이 세월 보낸다고 말하지 마오

차를 달이고 그 여가에 구름 본다네44)

이 시에서는 직접적으로 喫茶去나 趙州에 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지만,

‘차를 달이고 그 여가에 구름을 본다’는 구절에서 行茶에 대하여 일종의 禪機

가 엿보인다. 하릴없이 차를 달이는 것이 무척이나 바쁜 일인 양 혹은 중요한

일인 양 몰두하여 간혹 여가가 나면 흰 구름을 바라본다는 표현에는 일종의

역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3. 도가적 사상

우리나라 다도문화사상 가운데 도가적 사상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

누어 고찰하였다. 첫째 忘形45), 忘物我, 坐忘46) 등으로 대표되는 忘과 無爲의

사상, 둘째, 隱逸自適하는 은자적 삶의 모습, 셋째, 신선 선인사상이다.

(1) 忘과 無爲

道家에서는 일체의 인위적인 행위를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의 흐름을 따라

無爲할 것을 주장한다. 어떠한 인위적인 행위나 사고도 없이 道 그 자체를 따

를 때,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47)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

한 無爲를 온전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무엇보다 ‘忘’의 중요성이 강조된

다. 구체적으로, 자아의식을 잊어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과 외계의 경계도

잊고, 모든 것을 앉은 채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는 坐忘의 방법이 莊子 에 제

시되고 있다.

안회가 말하였다. 회는 이익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중니가 말하였다. 무슨

말이냐? 회가 말하였다 저는 좌망하게 되었습니다. 중니가 놀라서 물었다. 무

엇을 좌망이라고 하느냐? 안회가 말하였다. 枝體를 잊고 인위적인 총명함을

물리치며, 외적인 형체를 떠나고 지식을 떠나며, 大通으로 동화되는 것, 이것

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동화하면 특별히 한가지로 치우쳐 좋아

하는 것이 없게 되고 화하면 무상하게 된다. 너는 과연 어질구나. 나는 너의

뒤를 따르겠노라.48)

정리해보면, 坐忘이란 ‘부단한 노력으로 일체의 物我 是非 差別을 잊고 외적

인 형상(形)을 떠나고 지식(知)을 버림으로써 大通, 즉 道와 함께 하는 것’49)

이라고 하겠다. 또한 좌망의 상태를 달리 표현하여 忘形이라고도 한다. 忘形이

란 자기의 몸이나 외물을 잊는 것으로, 보고 듣는다는 의식조차 없이 보고 듣

는 것을 말한다. 또한 忘機라고도 한다. 忘機란 機心,50) 즉 기회를 보고 움직

이는 마음을 버린 忘我의 경지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경지에 대하여 한국의 많은 茶人들이 詩로써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이숭인의 경우 茶生活을 통하여 坐忘의 경지로 접어들곤 했음을 표현하

고 있다.

<현성사 독서>

고목 천 그루에 오월이 서늘하고

작은 누각 팔 척에 다로가 향기롭네

읽다 남은 몇 장은 내버려 두고

슬그머니 눈 감기니 이것이 좌망이네51)

또한 매월당 김시습의 경우 자신과 외물을 모두 잊는 경지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이 표현하였다.

마음이 물처럼 맑으니

자유자재하여 막히고 걸림이 없네

바로 이것은 사물과 나를 잊는 경지이니

혼자서 잔에 차를 따라 마시니 좋구나52)

여기에서는 모두 자기의 형체를 잊고 자연에 합일되는 초월적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다음으로 이규보의 茶詩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忘과 無爲의

의미가 드러나고 있다.

韓退之의 쌍조부(雙鳥賦)는 싫증나고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는 구미에 맞노라.

타오르는 불에 끓인 향기로운 차는 바로 도의 맛이며

흰구름과 밝은 달은 곧 나의 가풍이로다.

생공의 설법은 예리하고 날카로우며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녀 육신이 해탈했네

그대를 만나 망형하고 애오라지 뜻을 이루었으니

그날은 방덕공에게 부끄럽지 않았다오 53)

여기서 장자의 소요유를 한퇴지의 쌍조부보다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현

실적인 세계관보다 淸虛와 靜寂의 노장사상에 심취해 감을 읊조린 것이며, 茶

의 맛을 道의 맛으로 승화시키는 청정한 그의 마음가짐은 흰구름과 밝은 달을

기풍으로 한다는 청정무구(淸靜無垢)한 무소득무아(無所得無我)의 경지를 가풍

으로 한다는 것을 읊조린 것이라 하겠다. 生公은 梁나라의 고승인 道生

(?-434)이다. 방덕공은 後漢 때의 사람으로 부부가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였는

데, 벼슬을 마다하고 소박하게 사는 편안함을 자손들에게도 물려주겠다고 하

였다. 忘形하고 뜻을 얻었다는 내용은 도가의 득도한 경지를 뜻한다.

이 詩에서 이규보는 장자의 설을 몹시 좋아하다고 밝히면서 老莊의 無爲自

然을 상징하는 흰 구름과 밝은 달이 곧 자신의 집이라고 하면서 이 老莊에 의

해서 겉모습을 벗어나서 참된 道를 얻으니, 형태를 잊어서 부끄럽지 않은 삶

을 살고 있노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2) 隱逸自適

茶事는 그 본래적인 특성상 ‘靜’적인 속성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

위적이고 번잡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고요히 隱逸自適하려는 경향성이

짙다. 따라서 수많은 茶詩에 道家적인 隱逸정신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나쁜 평판을 모두 허령한 마음 밖에 던지고 나니

오묘한 도는 오히려 눈앞에 있구나.

돌솥에 끓는 차는 향기롭고 흰 젖이 뜨고

벽돌 화로에 피는 불은 저녁놀 같이 붉구나

인간사의 영광과 욕됨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호수와 산을 유랑하는 늙은이가 되리라54)

이 詩는 이규보의 茶詩이다. 자신의 虛한 마음을 밖으로 던지고 나니 비로

소 도가 보이는데, 이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끓고 있는 茶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읊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인간사의 영광과 욕됨의 허

무함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거기에서 벗어나서 자연속 을 유랑하는 삶을 택하

겠다는 고고한 정신을 암시하였다.

다음은 서산대사의 茶詩이다.

걷고 걷고 또 걸어서

층층한 벼랑 몇 겹이더냐

구렁에 흰 구름 일어나

향로봉을 문득 잃었구나

산골물 길어 낙엽으로 태워

차 끓여 한잔 마시네

밤에는 바위밑에 자니

魂은 나르는 용을 탄 듯하네

내일 아침 천하를 굽어 살피면

온 고을이 벌집처럼 펼쳐 있으리.55)

이 詩에서는 우선 아주 깊숙한 산 속이 눈앞에 떠오르고, 맑은 그 산골물

을 손수 길어와 낙엽으로 茶를 끓이고, 밤이면 또 숲 속 바위 아래, 대자연의

품속에 안겨 잠을 자면서 정신만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경지를 또렷이 보여주

고 있다. 또한 반면 이튿날 대사는 천하를 굽어 살피면 어찌 온 마을이 벌집

처럼 모여 우글거리며 아귀다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대비된다.

마지막으로 이숭인의 茶詩를 보면,

<민망의 시를 차운하다>

누가 촌에 사는 것이 궁벽하다 하는가

참으로 나의 뜻에 맞기도 하이

구름이 한가로와 게으른 몸 깨닫고

산이 좋으니 눈이 더 맑아 진다.

시고는 읊어보고 고치게 하며,

찻잔은 밥 먹은 뒤에 기울려

벌써부터 이 재미를 알았더라면,

다시 공명을 구하려 하였겠나56)

그는 儒者이면서 道家적 은일의 대표자인 陶淵明(365-427)을 숭상하여 號

도 陶隱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벌써 隱逸自適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는 隱逸의 처세관을 나타낸 것이다.

(3) 神仙 仙人사상

마지막으로 한국 다도문화사상 가운데 드러난 道家의 神仙 仙人사상에 대하

여 논의할 것이다. 道家와 道敎의 구분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지만, 道家사상

을 노장에만 한정짓지 않고 조금 더 범위를 넓혀 神仙 仙人까지 포함시키도록

한다57).

우리 나라의 경우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신선사상은 신라의 四仙인 永

郞 述郞 南郞 安詳 등이다. 다만 이들에 대해서는 경포대와 한송정에 石池

등 유적이있음과 이후 茶人들의 기록이 있음을, 앞 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이

외에도 普雨(1515-1565) 역시 신라의 四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茶詩 가운

데 언급하였다.

이곳에 선경이 있다고 들었으니

나의 스승은 바로 영랑 선인이 아닌가58)

조선시대 서거정이 김시습으로부터 작설차를 선사받고 사례로 보낸 詩 가

운데에도 신선 선인 사상이 드러난다.

< 잠상인이 준 작설차에 사례한다>

한 모금에 내 영원히 막힌 가슴의 마음을 씻고

두 모금에 내 십년 묵은 고질병도 씻어내네

어찌 다만 문자 오천권이나 되는 노동의 굶주린 창자를 찾으랴

양쪽 겨드랑이에 돋힌 날개로 봉래산에 나르리59)

김시습이 경주의 남산 정사에 은거하면서 차광재배로 만든 작설차를 종이

에 싸서 서울의 서거정에게 선물로 보내자, 서거정이 詩로 답한 것이다. 차맷

돌로 갈아 달여 맛보니, 고질병도 고치고 절로 신선이 될 듯 하다는 표현 속

에는, 飮茶와 신선과의 관계를 매우 밀접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송강 정철의 茶詩에서는 멋지고 풍류있는 삶의 모습을 仙境으로 표현

하였다.

<이경빈에게 보이다>

조그만 집은 금귤나무에 둘러싸여 있고

명차를 옥같은 샘물에 끓이네

생애가 이와 같이 만족스러우니

그대는 바로 두메산골의 신선이로세60)

그런데 일반 백성들에게는 茶를 마시고 신선이 된다거나 신선은 茶를 마시

고 산다는 등의 민간신앙 내지 사고방식이 깔려 있었고, 도교라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여러 神에게 獻茶하여 복을 구한다는 민간신앙도 많이 퍼져 있었던

듯 하다. 이와 같이 祈福의 매개체로서 茶가 활용된 것은 神들이 차를 매우

좋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신을 내리게 하는 강신의례에서 茶를 썼던 점도

이를 증명한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茶 자체가 나쁜 액을 물리치는 邪의 부적으로 사용되

기도 하였다. 17세기 홍만종의 山林經濟 에는 ‘단오날 오시에 붉은 주사로 ’

茶‘字를 써서 붙이면 蛇蝎이 감히 접근하지 못한다’61)고 하였다. 이 부적은 실

제로 뱀과 전갈 따위 독충만을 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병마를 쫓아내는 데에

두루 사용되었다고 한다.

Ⅴ. 結論

본 연구의 목적은 韓國의 茶道文化에 관련된 사상적 요소를 분석 규정하는

데에 있다. 즉, 한국의 茶道文化로부터 어떠한 사상적 요소가 도출되고 있으

며, 동시에 茶道라는 정신세계에 문화적 기반을 제공하는 근거로서 작용하고

있는 主流 思想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茶道理論 전반에 대한 고찰과 우리나라의 茶文化史에 대

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Ⅱ장. 茶道理論에서는 먼저 茶의 정의와 종류, 기원과 유래 등을 고찰함으로

써 연구 대상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였으며 飮茶의 효능과 목적을 고찰함으

로써 茶道理論이 형성 성립될 수 있었던 근거 내지 출발점을 살펴보았다. 그리

고 다시 전통적인 다도이론에서 茶德論을 살펴보았다. 이는 전통적인 의미에

서의 飮茶의 목적과 효능, 그리고 나아가 茶 자체의 (功)德에 이르기까지, 고

대인들의 茶에 대한 시각과 관점을 확인함으로써 전통적인 茶道觀을 논의해보

고자 함이다. 또한 세계 최초의 茶관련 전문서적이자, 韓中日 茶道의 聖典이라

할 수 있는 陸羽의 茶經 에 대하여, 그 성립과정과 의의와 구성 등등에 대하

여 살펴보았다. Ⅱ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茶文化에

대하여 소절(小節)을 할애하여 고찰하였다

Ⅲ장. 우리나라의 茶文化史는 韓國의 茶道文化思想에 대한 硏究에 앞서, 韓

國의 茶文化의 史的 考察을 통하여 茶文化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이해와,

시대별로 확인되는 茶文化의 특징적 전개양상의 파악을 위한 것이다. 먼저 韓

國의 茶 및 飮茶文化의 기원 및 전래에 관한 몇 가지 이론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시대별로 나타나는 한국 茶文化의 변화의 흐름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각

시대별 行茶 飮茶 文化 가운데 나타나는 특징적 모습들과 대표적인 茶人에 대

해서도 함께 고찰하였다.

Ⅳ장. 韓國의 茶道文化思想에 대해서는 크게 儒家的 사상, 佛家的 사상, 道

家的 사상으로 분석하였으며, 유가적 사상은 思無邪와 中和, 그리고 청렴과 안

빈낙도로 규정지었다. 이는 주로 고려 이후에 유학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茶

道文化에 미친 영향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불가적 사상은 茶禪一如와 喫茶

去의 話頭 禪機등으로 분석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茶禪一如의 경우, 우리 나

라에서 가장 먼저 싹트고 진행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도가적 사상은 忘과

無爲, 隱逸自適, 神仙 仙人사상으로 분석하였다. 도가적 사상의 경우 노장적 사

상과 노장이전부터 있어왔던 隱者적 삶의 모습, 그리고 도교 및 우리의 전통

적인 선도와 샤머니즘까지 포괄하는 신선 선인사상을 모두 고찰하였다.

茶道文化思想이란, 茶(道)文化 속에 내포된 思想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겠

다. 하나의 思想은 종종 그 시대의 흐름을 해석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서 思想이란 그 시대의 사회 문화 정치적인 주요흐름을 대변해주는 것이며, 즉

체계화된 논리를 제공하여 그 시대의 존재양상을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담당하

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을 토대로 여러 가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과정

에서 발전의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연구주제로 삼고 있는 茶道文化思想은 飮茶生活 전반을 통해

체득된 思想인 동시에, 茶(道)文化의 존재성에 대한 이론적 사상적 차원에서의

정당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茶(道)文化의 존재에 대한 확인과 긍

정에서 출발하는 茶道文化思想의 귀결점은 儒佛道라는, 당시의 主流思想인 것

이 당연하다. 그런데, 동시에 茶道文化思想이 일정정도 사상으로서의 확고한

체계가 구축된 이후에는 오히려 主流思想에 대하여 더욱 풍부한 영감이나 계

기, 또는 세련된 사상적 표현방법을 제공해주거나, 간혹 그러한 사상들의 근본

적인 차원에 탄력성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본 논문에서는 아직 이러한 부분,

즉 韓國의 茶道文化思想이 逆으로 儒佛道 三家의 사상구조나 제도적 흐름에

대해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못했다. 이는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

기로 한다. 또 한가지 문제는 三國以前의 茶文化에 대해서는 자료부족으로 인

하여 명확한 규정을 짓지 못했다는 점인데, 이 역시 고고학을 비롯한 각종 연

구성과를 기다려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또한 앞서 한국의 茶文化史에서 조선시대 茶文化의 전개양상을 고찰하면서,

조선왕조가 신라와 고려시대에 비하여 대체로 茶文化가 쇠퇴한 원인을 몇 가

지 지적하였는데, 근대 이후 茶道文化나 茶道文化思想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

급을 하지 않았다. 사실 조선 말 이후로 점차 우리 민족의 삶에서 우리의 茶

文化가 主流로서 자리잡지 못하고 약화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

론 그렇다고 우리의 茶文化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1883년부터 農

商司에서는 차의 재배를 관장하고 차 재배를 위한 조사를 지시했고, 1885년

에는 청의 九江道에서 차나무 모종 6,000주를 수입하기도 했다. 이후 일제 식

민지 시대 총독부에 의해 또 한번 차산업이 장려되기도 했는데, 1912년 경에

는 無等茶院이, 1940년 경에는 寶城茶院이 日人들에 의해 경영되기도 하였다.

다만, 비자발적인 근대화를 겪으면서 우리 근현대의 茶道文化는 몇 가지 혼란

을 겪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우리 민족 고유의 茶文化가 점차 쇠퇴하

고 일제 강점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茶道문화가 역으로 한국에 유입되어 일

본식 茶道의 韓國化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간 ‘茶道’ ‘茶文化’

‘茶藝’ 등 명칭부터 비롯하여 구체적인 行茶節次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 우

리 고유의 茶道文化이고 어느 것이 일본의 茶道文化인지 논의가 분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의 과정은 우리의 茶道文化를 찾아내고 거부감이

나 어색함 없이 대중화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 근현대의 우리 茶道文化史에서 또 다른 변화를 겪었다면, ‘근대화’라는

점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근대화라는 과정을 거쳐 시민의 개인주체의식

이 자각되면서, 모든 文化는 특수한 계급이나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

모두를 위한 것으로 대중화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前近代시기에 소수 특권계

층을 위해 많은 시간과 물자와 노동력이 소비되었으며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

또한 복잡한 절차를 추구하였던 귀족문화와는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좀

더 손쉽고 간편하면서도 실용적이고 누구나 거부감없이 즐기면서 동시에 美的

가치를 지향하는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茶道文化 역시 이러한 시대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어떤 文化이건 主流 文化의 흐름에서 이탈한다면,

그 문화는 결국 소멸되거나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며, 이러한 의미

에서 思想 역시 시대사조의 主流的 질서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기란 매우 어

렵다. 그러므로 茶道文化나 茶道文化思想 역시 이러한 대중화의 길을 차츰 지

향해 가고 있는 실정1)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는 간편

하고 실용적이면서도 行茶 飮茶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즐거움)들을 향유하

고 또 더욱 확대시키도록 하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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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抄錄

關於韓國茶道文化的思想的考察

吳 洋 嘉

東洋哲學系 中國哲學專業

成均館大學校 儒學大學院

本硏究的主要目的是關於韓國茶道文化的思想因素之考察. 就是硏究從韓國茶道

文化提出甚 , 也是硏究對茶道提供文化精神構造的主流思想是甚 .

人類至小有2000年以上的飮茶歷史. 在製茶 行茶過程中就形成了一個特有的文

化, 就是茶文化. 茶文化包含製茶 飮茶過程中産生的精神的 物質的內容和樣式. 所

以, 有個民族的長久飮茶文化, 含有其民族固有的生活習慣 民族特性和氣質 固有的

審美能力 固有的精神價値體系.

韓國有1400年以上的飮茶歷史, 當然有關於飮茶(行茶)的文化, 也有韓國固有的

茶文化史. 在韓國固有的飮茶(行茶)文化的中心, 有韓國固有的茶道思想.

茶道思想對於茶文化提供理論根據, 把文化高級化(質的上乘). 本來, 某個文化爲

時代思潮(主流哲學)受了 大的影響, 甚至於主流思想容認其文化的存在與否, 還

是決定其存在樣式. 茶道文化(思想)亦是從當時主流思想提供哲學意義, 加强在茶

道理論的深度和鞏固性. 當時主流思想, 就是儒佛道三家思想, 也就是茶道文化(思

想)的理論根據. 結果, 韓國茶道文化思想也存在着這三家思想範圍內.

爲了詳細考察本主題, 對於韓國茶道文化和思想的論議以前, 首先全般地考察了

現代的茶論和傳統的茶道理論. 關於茶的功能和飮茶的目的, 用現代和傳統的觀點

說明. 更具體的話, 在現代的茶論的立場, 分析茶的定義和種類 起源和由來 飮茶的

目的和功能(功德). 在傳統的茶道理論的立場, 考察韓 中 日的茶德論, 考察陸羽 茶

經 的形成過程 意義 構成, 還有比較考察中國 日本的傳統的茶文化.

以後, 通過關於韓國茶文化史的全般考察, 理解了韓國茶文化的時代別展開樣相.

從三國時代以前, 經過高麗時代, 到朝鮮時代, 槪觀了各時代別行茶(飮茶)文化的

特徵的潮流, 把握了各時代別代表的主要茶人.

爲了本格的論議, 分析韓國的茶道思想各三個方面, 就是儒家的思想 佛家的思想

道家的思想. 但是, 規定儒佛道三家思想時, 不忽視三家思想在歷史發展中互相影

響和交涉過程. 還是, 一個茶人之思想(精神境界)中, 明明白白地分析和規定三家

思想, 更亂的, 有的時候不可能的. 却是混融 混合兩種以上的思想要素, 更是自然

的. 所以, 本硏究, 依甚 思想的主要傾向性, 規定儒家‘的因素’ 佛家‘的因素’ 道家

‘的因素’.

在韓國茶道思想中, 儒家思想的因素, 是‘思無邪’ ‘中和’ ‘淸廉’和‘安貧樂道’. 這樣

思想因素, 高麗時代以後儒學發展時, 對茶道文化産生了更大的影響. 佛家思想的

因素, 是‘茶禪一如’ ‘喫茶去’的話頭(禪機). 其中特別‘茶禪一如’, 在韓國最早出來的

思想. 道家思想的因素, 是‘忘’和‘無爲’ ‘隱逸自適’ ‘神仙(仙人)’思想. 在此範圍內,

包括了老莊思想 老莊以前的隱者的生活樣態 神仙和仙人思想(包括着道敎及韓國傳

統仙道和巫俗).

如此, 茶道文化思想的歸結, 就是當時主流思想. 這可以說當然的, 因爲茶道文化

思想是茶文化的正當化過程, 或是理論化過程. 不過, 同時茶道文化思想對於主流

時代思潮(儒佛道), 會提供了更豊富的靈感, 或是機會, 會提供了更精緻的表現方

式, 會提供了根源的柔軟性(彈性), 使之離脫敎條主義的敎義, 擴大了思想範疇. 韓

國茶道文化思想, 對於儒佛道三家的思想構造或是制度的變化, 甚 影響了? 這個

問題, 本論文還沒硏究了. 只剩下了以後的硏究課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