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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장 황금인생 황금알을 낳는 황금시장

Gold Market_Gold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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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이

쓰고

‘인

생’이

라고

는다

황금

시장

금인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시장 사람들의 일상은 특별한 변화가 없습니다. 시장 안 점포

들은 그저 각자의 정해진 규칙을 통해 가게 앞을 쓸고 손님을 맞이한 다음 빈 자리에 물건을

채웁니다. 새벽 일찍 문을 열고 밤늦게 문을 닫는 반복 속에서 달력은 떨어지고 계절이 머물

렀다가 저절로 흘러갑니다. 어제도 같았고 오늘도 똑같은 그 세월을 시장 사람들은 인생이라

고 부릅니다.

전통시장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곳 황금시장에는 여전히

침착하게 자신이 그동안 해온 대로 오늘의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호들갑

스러운 사람들은 시대의 대세를 들먹이면서 전통시장은 곧 사라져 없어질 거라고 떠들곤 합

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똑똑한 말이 넘칩니다. 하지만 그 많은 똑똑한 말들을 존경할 수 없는

이유는 말하는 당사자가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 황금시장에는 대단히 유식한 어른은 없지만 배움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행동으로 도리

를 깨우친 어른들이 계십니다. 세상의 평지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버텨온 상인들입니

다.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지키며 말 없이 자기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의 얼굴에서 한없는 어머니의 모습과 한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세월이 묻거든, 얼굴의 주름살로 답하지 마십시오. 살아간다는 말이 무

슨 뜻이냐고 물어본다면 상인들은 아마도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버팀의 연속이라고. 힘들고 거친 세월을 버티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인생을 돌아볼 수

있노라고.

황금시장 황금인생

황금알을 낳는 황금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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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장황금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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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라 쓰고

‘인생’이라고 읽는다

김천시 황금동 황금시장에서 젊음과 세월을 다 바쳐

묵묵히 고단한 삶을 버텨온 너와 나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시장 상인들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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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시장’이라 쓰고

‘인생’이라고 읽는다

세상이 편리만을 추구하는 오늘 날. 흘러가는 세월의 운명 속에서 잊

혀져 가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전통시장의 모습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

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어머니 손을 잡고 발 디딜 틈 없이 붐비

던 장날의 풍경 속을 호기심 어린 발걸음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

던 귀한 추억이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전통

시장은 여전히 우리가 지난 날 걷고 있었던 그 자리에서 고향을 굽어보

는 당산나무처럼 굳건하게 뿌리 박고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시장 사람들의 일상은 특별한 변화가

없습니다. 시장 안 점포들은 그저 각자의 정해진 규칙을 통해 가게 앞을

쓸고 손님을 맞이한 다음 빈 자리에 물건을 채웁니다. 새벽 일찍 문을 열

고 밤늦게 문을 닫는 반복 속에서 달력은 떨어지고 계절이 머물렀다가

저절로 흘러갑니다. 어제도 같았고 오늘도 똑같은 그 세월을 시장 사람

들은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시장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

곳 황금시장에는 여전히 침착하게 자신이 그동안 해온 대로 오늘의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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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준비하는 상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호들갑스러운 사람들은 시대의 대세를 들먹이면서 전통시장은 곧 사

라져 없어질 거라고 떠들곤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똑똑한 말이 넘칩

니다. 하지만 그 많은 똑똑한 말들을 존경할 수 없는 이유는 말하는 당

사자가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 황금시장에는 대단히

유식한 어른은 없지만 배움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행동으로 도리를 깨

우친 어른들이 계십니다. 세상의 평지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버텨

온 상인들입니다.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지키며 말 없이 자기 자리를 지켜온 사

람들입니다. 이분들의 얼굴에서 한없는 어머니의 모습과 한없는 아버지

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세월이 묻거든,

얼굴의 주름살로 답하지 마십시오.

살아간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면 상인들은 아마도 이구동

성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버팀의 연속이라고.

힘들고 거친 세월을 버티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인생을 돌아볼 수 있노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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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시장’이라 쓰고 ‘인생’이라고 읽는다 006

동성 보일러·장갑 (이성임) 014

두둥실 뜬 달처럼 푸근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만나 지난 날 연애담을 청하다

황금알 직판장 황금알 부부 (김영운 부부) 028

동화 속 황금알은 못 먹지만 우리 집 황금알은 먹을 수 있습니다

국일식당 (정옥분) 038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려내는 일을 인륜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잊어야 하는 일과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족발뼈를 발라내며 깨우친 사람이 이곳에 있다

한국꽃화원 (박경자) 052

김천 황금동에 가면, 긴 머리를 한 타래로 묶은 여인이 착한 꽃집에서,

날 저문 하루에 관하여 시를 쓰고 있다

탑유통 (박진영) 062

세상의 큰 길은 나라 안에 있지 않고 나라 밖에 있다고 믿었던 남자가 오랜 외국 생활을 끝내고

입국했다. 떠나온 먼 길을 되짚으며 고향에 돌아온 남자, 이제서야 안식을 얻다

황금시장 21人삶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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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땅콩 (박근주 부부) 074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며 찾아오는 손님이 진심으로 고마운 한 쌍의

땅콩 부부가 중년의 삶을 돌아보다

지례옛날순대 (이영화) 086

매일 아침 구불구불 뜨겁게 익어가는 순대처럼 사연 많은

우리네 인생살이도 구불구불 먼 길을 바라본다

선산상회 (임상규) 096

나라 향해 애국심, 고향 위해 애향심. 알타리 무 전문가가 고백하는 김천 토박이의 한 세월

신광세탁소 (윤원식) 106

세상에 태어난 자리에서 철 들고 어른 되어 세상에 태어난 그 자리로 돌아와

아비의 생업을 물려받아 2대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

동해반점 (이동철) 116

어려서 한학을 배워 익혔으며 장성하여 진돗개 전문가가 된, 언제나 책 읽는 주방장님

진흥떡방앗간 (손권만) 128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지만, 곡식을 찧고 고추를 빻는 방앗간은,

삶의 한 켠에서 언제나 오롯이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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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수천그릇마트 (이봉석) 140

사람마다 가슴 속에 품은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고 했다

사람의 그릇을 찾아 황금동에 다녀왔다

황금종합식품 (여금자) 150

황금동 황금시장에 가면 ‘사랑방 손님과 콩나물’이라는 이야기가

따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갈무리식당 (이응준) 160

막역한 친구처럼 허물 없고 구수한 청국장으로

한 그릇 밥의 정성을 지어내는 겸손한 남자

보은식육점 (유정애) 172

혼자서도 잘해요. 당차게 일당백을 해내는 부지런한 여주인님

황금장식(강준규) 184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천지식당 (장재현) 199

우리의 배고픈 그 시절. 밥 장사할 마음 먹고 사나이 가슴처럼 뜨거운 국물을 끓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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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경북건어물 (이상덕) 211

선조의 지혜는 음식을 바람에 말려 상하기 쉬운 것들의 부패를 막았고

우리네 어머니는 세월의 풍화를 이기려고 매일 아침 가게문을 여신다

김천방짜유기 (이운형) 222

어려웠던 시기에 전통을 물려받으며 겪어야 했던 통과의례를 무사히 마치고

지금 다시 전통의 뿌리를 굳게 다지는 의로운 명인

뱅크DC마트 (윤기수) 234

가게 문 닫기 전 쓰레기통 비울 때가 제일로 기분 좋다 외치는 이색적인 사장님

대한사진관 (김태철) 244

사진 한 장으로 세상에 나왔다가 사진 한 장 남기고 돌아가는 우리네 인생

카메라 셔터로부터 시작된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순간으로 기록하며

고향을 지키는 여기 한 사람의 사진사가 있다

부록

황금시장 사람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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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보일러·장갑 (이성임)

두둥실 뜬 보름달처럼 푸근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만나 지난 날 연애담을 청해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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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키한 목소리에 조근조근한 말투가 인상 깊다. 살림하는 여자로서 집

에 있으면 몸이 쑤시고 아픈데 일하는 여자로서 가게에만 나오면 쑤신

몸이 낫는다고 했다. 신통한 체질의 그녀와 차 한 잔을 나누었다.

구미 선산에서 경북 김천으로 터를 옮기다.

결혼하고 우리 큰 애를 낳은 무렵 IMF가 터지는 바람에 닦아둔 기반

을 다 잃고 상주에 있는 시댁에 본의 아니게 얹혀 살아야했던 시기가 있

었어요. 시댁에서 지내다보니 좋긴 좋은데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 싶어 떳떳하게 재기 하기로 결심하고 다방면으로 알아봤어요.

하지만 가진 게 바닥난 상태라서 참 난처하더라고요. 여러 군데 수소문

해본 끝에 이곳 김천이 그래도 경기가 살아있어서 다시 시작할 터전으로

삼기에 흡족하다 싶어 이사를 결심하게 됐지요.

가지고 있던 돈에 친정 엄마가 보태준 돈을 합해서 사글세살이를 시작

했어요. 약간 남은 돈으로 전화를 넣으니까 생활이 금새 빠듯해지더라구

요. 두 식구만 있다면 모를까 애도 함께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 아니겠어

요. 그렇다고 생활이 원망스럽거나 내 처지를 비관하진 않았어요. 그저

다 순리대로 지나갈 거라고 봤어요. 그리고 김천에 와서 둘째를 낳았는

데, 둘째 낳고 애 많이 먹었어요. 남편 일이 기반을 못 잡은 시기였고 막

상 일감을 따내려니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어요. 어딜 가든 초기에 겪

는 그 지역 텃세가 있잖아요. 김천에서 자리 잡는 것 역시 힘들었어요.

처음엔 공사 견적 다 내놓고 공사 들어가려고 만나면 우리가 김천 사람

이 아닌 걸 알고 공사를 취소하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3년을 고생 했네요. 인생에 햇빛이 안 드는 시기였어요. 그 날 벌어 그

날 먹고 사는 시절이다보니 근근이 버틸 수밖에 없었고 일도 가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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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무조건 해야 했어요.

그럭저럭 밥 먹고 살아오다가 한순간에 없이 산다는 게 참 원통하잖

아요. 처녀 때는 나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고 살던 사람이었는데 돈이

없으니까 손발이 다 묶인 기분이 들고 괴로웠어요. 가슴 속에 울분이 나

서 이를 악물었던 어느 날. 보름달을 쳐다보며 다짐했지요.

“나는 앞으로 가난하게 안 산다. 부자는 못 되더라도 남의 손 빌려서

는 안 살아야지.”

그 날 이후로 항상 열심히 산다는 마음만 가지고 살아왔어요. 우리 첫

째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내 집을 마련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 집을 사게 된 거에요. 집이 생긴 뒤로는 형편이 차차 풀

렸어요. 다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고 매일매일 고단했지요.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 힘들고 피곤했을까요? 우리 남편이

저 고생 많이 시켰다고 지금도 미안해해요. 그래도 남편 덕에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맙죠. 남편이 없었어봐요. 제가 있겠

어요? 우리 가족이 있겠어요? 인생에 좋은 시절이 있고 나쁜 시절이 있

듯이 미우나 고우나 서로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이는 부부 밖에 없잖

아요.

이 가게를 개장할 때 고생이 극심했다면 극심했어요. 보기에는 작아보여

도 한 집안의 일로 놓고 보면 국토를 깎고 다듬는 대규모 토목 공사만큼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규모야 크던 작던 간에 말이죠.

장갑장사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그렇지만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 품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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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뭔가를 하긴 해야 될 것 같은데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고민을 오래 했어요. 반면에 애들 아빠는 주택 건설이 전문 분야이고 각

종 설비부터 거의 모든 건축 일을 다 소화해요. 우리 남편이라서 하는 얘

기가 아니라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아주 능력 있는 탁월한 기술자가 분명

해요. 아무 재주 없는 저와는 다르죠. 한 가지 흠이라면 1년 내내 자리에

잘 없어요. 늘 밖으로 바쁘게 다녀야 되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자연적으

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게 되고 이 무료한 시간을 보람 있게 채우는 방법

은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어느 날. 이 자리가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거에

요.

“여기에 장사를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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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 공간이 있으니 이 공간을 이용해서 뭔가를 해보자는 마음을 먹

었어요. 서울에서 양말 장사하는 이모한테 자문을 구했지요. “이모, 노느

니 집에서 과자 값이라도 벌어볼 생각인데 어때요? 내가 양말이라도 팔

아볼까?” 이모가 장날에 맞춰 김천에 내려왔어요. “성희야, 이곳은 사람

이 붐비는 곳이 아니지만 입소문이 나면 과자 값은 벌겠구나.” 그래서 시

작을 했죠.

햇빛 좋은 날. 물건을 들여 놓고 이제나 저제나 손님을 기다리던 날이

어제 같은데 이만큼 버틴 걸 보면 저한테도 제법 뚝심이 생겼네요.

어떤 날은 마수걸이도 못 하는 날이 있고 또 어떤 날은 매상이 기십 만

원도 넘으니까 영업 편차가 들쑥날쑥해요. 하지만 그 맛에 또 장사하는

재미가 나기 시작했어요. 내가 재미있어 하니까 신랑이 인테리어에 투자

를 많이 해줬어요.

어쨌든 장사는 처음보다 낫고 한 달 뒤가 낫고 1년 뒤가 나아지더라고

요. 어제도 오전 내내 손님이 없다가 오후에 한 손님한테 몇 만 원어치를

팔았어요. 그 손님을 보내고나서 속으로 생각했죠. ‘장사는 멀리 보고 해

야 한다’ 이 진리를 깨달은 거에요. 나는 액수에 상관없이 내 물건을 손

님에게 판다는 사실이 참 좋거든요. 장갑 하나를 사도 내 집에 와서 사

가잖아요. 그 사실이 짜릿한 거에요. 어제 왔던 손님이 오늘 오시고 내일

또 오시면 기분이 날아갈 거 같아요. 나는 그게 좋아요.

“어우 다시 오셨네요.”

내가 기억해 주면 손님도 좋아하세요. 이렇게 작은 규모지만 나름대로

잘 꾸려서 내실 있는 장사를 해볼 참이에요. 난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사

람이거든요. 지금 일하고 있다고 느끼니까 좋아요. 하루에 만 원을 벌어

도 좋고 천 원을 벌어도 좋아요. 항상 더 나아질 거라 믿어요. 제 가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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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평판을 얻고 입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면 멀리 대구에서

단골이 물건 사러 올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일에 대한 꿈을 꾸

는 거에요.

장갑이라는 게 지역 특성상 쓸모가 많아서 전망은 나쁘지 않다고 봐

요. 시골에서 들일 할 때 필요하고 근처에 많아진 공사장에서도 필요하

고 공단에서도 필요하니까요.

이 장사로 우리 애들 뒷바라지 한다는 생각은 아직 못하지만 작은 보

탬이나마 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큰 애가 중 3, 둘째가 중 2, 막내는 6

살. 요즘 시대가 그래선지 몰라도 막내한테도 제법 돈씀씀이가 바빠요.

이래저래 들어가는 용처가 많아요. 애들 아빠 일이란 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도 일 없을 땐 아주 휑할 정도인데, 거기에 맞춰 사는 요령이 아

직 없어 힘들긴 해요.그래도 이 장사가 자리를 잡으면 우리 가정에 보탬

이 되겠다는 희망이 있어서 보람 되죠.

우리 집에 이런 곡절이 있으면 다른 집엔 다른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

하면서 그래도 우리 집이 좋은 가정이라는 마음으로 항상 긍정하고 세상

을 밝게 보려고 애를 씁니다. 저는 자식들이 있고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

도 있으니까 제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로서 엄마

로서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으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사해서 처음 이 집에 들어서는 날. 이 작은 집이 대궐 같았어요. 아

마 내 집이라서 그런 마음이 들었나봐요. 시댁에서 살 때는 늦잠이란 걸

몰랐는데 내 집이 생기니까 그동안 아쉬웠던 늦잠이 막 쏟아지는 거에

요. 며칠은 늦잠을 원없이 자봤어요. 그런데 몸은 편해졌는데 마음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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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더라고요. 당장 우리 앞에 밀어닥친 생계를 걱정 안 할 수가 없으

니까요. 세상살이에 한 번씩 고비가 있잖아요. 그때가 고비였어요. 우리

둘째를 임신해서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시기였는데 부족한 형편 탓에 먹

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었어요. 그래도 나는 아무도 원망 안 해요.

살다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잖아요. 내 팔자가 왜 이러나? 하고 살기 보

다는 내 인생은 더 좋아질 거야 하고 사는 게 백 배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만해도 내 주머니에 1000원이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

도 있었어요. 하지만 세상을 긍정하고 매사에 힘을 내다보니 점차로 생

활이 풀리더라고요. 세상 일은 사람이 마음 먹기 달렸고 내가 노력한 만

큼 이뤄지고 마음 먹은 대로 돼요. “나는 앞으로 가난하게 안 산다. 부자

는 못 되더라도 남의 손 빌려서는 안 살아야지.” 여전히 이 다짐대로 살

고 있어요.

나는 내가 가난하던 그 시절. 만 원 들고 시장 가면 꼭 천 원을 남겼어요.

그래서 시장 열 번 가서 천 원 열 장을 모아 만 원을 만들고 만 원 열 장

모아서 십만 원 만들고 십만 원 열 장 모아서 백만 원을 만들었어요. 시

간은 좀 걸리겠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김천 와서 고

생한 기억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난 만 원짜리보다 천 원짜리가 더 좋아

요. 더 귀하고 가치 있어요.

우리 부부가 만난 사연은 참 우연하게 시작된 계기로부터 출발했어요.

제 여동생이 우리 작은아버지 인쇄소에 근무하던 시절인데 그때만해도

컴퓨터가 귀한 취급을 받았거든요. 여동생이 컴퓨터를 잘 다뤘어요. 그

때 우리 남편이 견적서 작성한다고 인쇄소에 드나들었나봐요. 그래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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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스럽게 남편이랑 여동생이 통성명을 하고 친해지게 된 거죠. 저는 남

편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한 날은 여동생이 저한테 와서 “언니야 언니야.

나이는 좀 있는데 나이 든 테가 하나도 안 나고, 건설하는 분인데 옷차림

이 개성 있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그런 사람이 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요. 근데 한 날

은 여동생이 찾아와서 “언니, 경리 업무할 만한 괜찮은 아가씨 없나.” 어

느 사무실에서 경리를 구한다면서, 내가 아는 후배들이 많으니까 부탁을

한 거죠. 그때 마침 아는 후배가 직장을 구한다고 해서, “후배야. 교동에

있는 동성건축이란 곳에서 직원을 구한다는데 너 면접 볼래?” 물으니까,

“언니, 나 혼자 가기는 쑥쓰럽고 언니랑 같이 가면 안 돼?” 그래서 같이

갔어요. 그때 신랑을 처음 보게 된 거였어요.

그때가 바로 운명적 만남의 출발선이었단 걸 나는 몰랐죠.

지금은 우리 신랑이 극구 부정 하는데 그 당시 분명히 신랑은 나만 쳐

다봤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그 눈빛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었어요.

경리를 구한다고 해서 후배 소개시켜주러 간 나는 면접 보러 온 사람도

아닌데 말이죠. 그날 신랑이 나를 눈여겨 본 거죠. 뭐 하여튼 간에 그렇

게 우연하게 시작됐죠. 사람을 보는데 있어서 첫인상이 다가 아니라지만

난 솔직히 첫인상에서 거부 반응이 좀 나더라고요. 나는 항상 우리 신랑

을 존경하고 위하지만, 그 당시에는 선입견이 있었어요. 당시 남편 나이

가 서른 여섯이었는데 머리를 빗자루 같이 세우고 코에서 반들반들 빛이

났었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어머나, 사람이 참 개성 있다.” 선뜻 다가

서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였어요. 나는 아가씨 때부터 수더분하게 티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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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었는데 뒤에 물어보니까 남편은 저의 그런 점이 좋았다고 하

더라고요.

토요일이었어요. 이 사람이 내가 다니던 직장 앞에 차를 대놓고 서 있으

니 내가 안 탈 수가 없었어요. 차를 타고 구미로 갔어요. 하필이면 전통

찻집에 들어가더라고요. 전통, 아마 그때 김천 전통 황금시장 올 팔자가

도사리고 있었나봐요.

처음 만난 그 다음날. 사무실로 전화가 왔어요. 나 어제 만났던 누군데

일단 만나자, 그러더라고요. 제차 이유를 물었지만 대뜸 만나자고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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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별 대답도 못하겠고 할 수 없이 전화를 끊었어요. 그날 사무실 앞에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토요일이었는데, 이 사람이 내가 다니던 직장 앞

에 차를 대놓고 서 있으니 사무실 사람들 이목도 있고해서 내가 안 탈 수

가 없었어요. 차를 타고 구미로 갔어요. 하필이면 전통 찻집에 들어가더

라고요. 전통, 아마 그때 김천 전통 황금시장 올 팔자가 도사리고 있었나

봐요.

찻집에서 이 사람은 십전대보탕을 시켰어요. “엄마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머리는 무스로 하늘 높이 치켜세운 사람이 취향은 굉장히 전통

적이네.” 난 산수유 차를 시켰어요. 찻집에서 말도 특별하게 나눈 기억이

없어요. 내 남편은 앉아서 십전대보탕 마시고 난 산수유 차 마시고, 대뜸

한다는 말이 다음 날 놀러가자면서 저한테 약속을 하라고 요구했어요.

“엄마야, 이 사람 뭐지? 자기가 날 언제 봤다고.” 그 때 내가 친구들하고

포항에 놀러가기로 했었거든요. 1박 2일로. 그런데 거기 가지 말고 자기

하고 놀러가재요.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친구들이랑 같이 포항에 놀러

간 거에요. 그때만 하더라도 삐삐가 있던 세상이잖아요. 밤 새도록 삐삐

가 왔어요. 못해도 수십 통은 됐을 거에요. 내 친구가 걱정을 하죠. “성

희야, 너 조심해. 남자가 나이도 직수긋하지. 인상도 매서워.” 그때 나는

친구 말에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공중 전화에서 삐삐를 확인해보니 전

부 다 내 남편이지 뭐에요. 남편이 놀러간 내가 걱정이 되서 삐삐 음성을

무지하게 남긴 거에요. 내가 음성 확인하면서 막 웃었어요. 사람이 매섭

고 날카로운 건 사실이지만 속마음은 따뜻하고 순수했어요. 그러다가 그

게 인연인가, 서로 속전속결로 짝이 됐어요. 지금껏 같이 살아왔지만 심

성이 선해요. 애를 셋 낳고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나

름대로 아름다운 추억의 일부분이에요. 남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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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 있고, 서로 간에 평생 함께 할 약속을 했던 시기였고 내 인생의 꽃

다웠던 시기에 남편을 만나서 참 잘 됐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살다가는 한 세상. 세월은 흘러가서 다시 안 오지만 우리 부부

가 만든 추억은 우리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다 남아있어요. 살다가 아프

면 한 번씩 둘만 아는 추억을 꺼내보고 생각하며 웃다가, 앞으로의 인생

을 더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는 거죠.

겉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만인의 진리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지키지 못하고 입바른 말만 거듭한다. 하지만 이 부부는 달랐다. 서로가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았고 서로의 순수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이곳에 정착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하는 부부의

건강한 너털웃음이 진실로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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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 직판장. 황금알을 낳는 부부 (김영운 부부)

동화 속 황금알은 먹을 수 없지만

우리 집 황금알은 먹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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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좋은 부부가 함께 지키는 가게 안은 각종 알의 천국이었다.

흔하지 않은 풍경에 이곳 저곳 휘둥그래 눈이 안 닿는 곳이 없는데 사

장님께서 인심 좋게 말씀하신다.

“구경할 게 뭐 있어요, 앉아서 이거나 한 잔 해요.”

선뜻 약초 달인 물을 권하신다. 뒤이어 잘 익은 포도 한 송이와 가게에

서 직접 구웠다는 계란을 쟁반에 푸짐하게 내오시며 경상도 특유의 무뚝

뚝함으로 한 마디 거드신다.

“들어요.”

구운 계란을 까서 먹어보았다. 식감이 쫄깃하고 노른자가 비리지 않고

고소했다. 구운 계란 하나를 다 먹고 약초물을 마시니 초면의 서먹함이

사라졌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사신 집이라고 해서 툭 터놓고 한 말씀 올렸다.

“손님을 대하는 모습이 느긋하고 편안해 보이십니다.”

나도 나이가 많지만 대부분의 상인들도 나이가 많아요. 나이 많은 사

람들이 산전수전 다 겪고 나니 서로에 대해서 관대해지는 거죠. 젊어서

많은 일을 겪으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이해의 폭도 커졌어요. 자녀들도

다 성장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나가게 되니 여유가 찾아오네요. 아무래도

내 마음에 여유가 있고 즐거움이 있으니 손님을 대할 때도 더 편안해져

요.

장사를 오래 해오다 보니 단골도 많고 이제는 손님들도 남이라는 생각

이 안 들어요. 손님이자 이웃이고 친구일 때도 있고 가끔은 우리 부모님

같기도 하고 내 자식 같기도 하지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손님을 대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도 점점 달라지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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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시장에서 젊은 사

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젊은 사람들이 우리 시장에 둥지를 새로 틀고 젊은이의 몫으로서 다양

한 역할들을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 시장에서 본래 상인들

과 힘을 합쳐서 함께 한다면 시장 전체가 활기를 띄고 빠르게 활성화 될

거라고 봅니다. 전통시장이란 곳은 아주 천천히 변화하는 곳이기 때문에

요즘처럼 매일매일 급변하는 시대에는 젊은이들의 젊은 감각이 꼭 필요

하죠.

“그동안 장사를 이어오시면서 얻은 지혜가 많으실 것 같아요.”

우리 집에서는 가격정찰제를 실시하고 있어요. 소비자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정확한 가격을 표시해두고, 항상 똑같은 가격을 통해 판

매자를 신뢰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요. 우리 집에서는 아

내가 장사를 해도, 딸이 장사를 해도 가격이 똑같아요. 장사를 하는데 있

어서 제일 중요한 점은 소비자와 신뢰를 형성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소비자와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도 정직 두 번째도 정직입니

다. 그래서 우리 황금알은 상품에 대한 정직함을 바탕으로 신선하고 믿

을 수 있는 물건을 준비하고, 정확한 가격을 매긴 다음 투명하고 정직하

게 물건을 판매하고 있어요

“말씀해주신 신용이야말로 상도덕의 전부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

은데요. 단골이 꽤나 될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정직함을 우선으로 적은 이윤을 남기더라도 좋은 물건을

싼 값에 팔았더니 자연스럽게 단골이 생겼어요. 단골 덕택에 입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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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도 했고 우리 집 물건을 이용하신 분들이 다른 이웃을 데려오기도

하면서 단골도 늘어났어요.

약간 과장을 하자면, 김천 시민 중에서 황금알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요. 우리 집 계란을 안 먹은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우리 집 계란은 동

네의 작은 마트부터 규모가 큰 마트까지 납품되고 있고, 김천 시내 전 지

역의 다양한 음식점과 반찬가게에도 납품하기 때문에 우리 가게에 한 번

도 방문한 적이 없는 손님일 지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황금알의 신

선한 계란을 잡숫고 있는 거예요.

“장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장사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시작했으니 일찍부터 배운 셈이죠. 하고 싶

은 일이 생기면 꼭 해보는 성격인데다가 한번 시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빠져드는 편이에요. 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몰입해서

하다 보니 잘 된 것 같아요. 가끔 다른 사람들이 날더러 일 중독자라고

할 만큼 부지런히 일하는 편이에요.

평소 나는 모든 일은 본인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내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부지런히 하다보면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생

업이 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생기면 재미도 덩달아 따라오죠.

자연적으로 장사는 더 잘 되겠지요.

“장사를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세요?”

나병환자 집성촌에 있는 양계장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닭 키우는 일

을 배웠어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일을 했어요. 체력적

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고된 세월이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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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항상 즐겁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어느 정도 일

을 익히고 나서는 직접 사료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여러 방앗

간을 돌아다니면서 닭이 좋아하는 콩깻묵이나 쌀겨 같은 곡식으로 영양

가 높은 사료를 만들었어요. 사료를 만들어 사용하다보니 평균 2~3배의

시간이 더 소요되서 참 힘들었어요. 대신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

잖아요. 몸이 힘든 만큼 원가 경쟁력은 갖출 수 있었어요.

그때는 끊임없이 연구하며 성장한 시기였어요. 내가 하는 일에 열띤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공부를 했어요.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때도 그때인 것 같아요. 오늘까지만 하고 내일 관두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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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갔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날의 밑거름이 되었

다고 생각해요.

“기억에 남는 다른 경험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대구에서도 서울에서도 장사를 해봤고, 아내랑 별의별 장사를 다 해봤

어요. 88올림픽 때부터 1990년까지는 영남대학교 앞에서 오락실을 크게

했어요.

“동전 넣고 하는 오락실이요?”

그때는 오락실이 인기가 있어서 돈을 꽤 벌었어요. 돈을 버니까 고향

이 그리워지더라고요. 결국 김천으로 왔지만 예전의 고향과는 세태가 많

이 달라져있어 일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어요. 모르는 사람들을 단골로

만들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힘든 일이 많았지만 살면서 있었던 고통은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은 그 단골들 덕택에 이렇게 밥

먹고 살아요.

나를 속이게 되면 남을 속이기도 쉬워집니다. 그러니 남을 속여서도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상도의가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장사의 도리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장

사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면 당연히 남을 속이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사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장사하는 자기 자신을 속여선 안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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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니다. 나를 속이게 되면 남을 속이기도 쉬워집니다. 그러니 남을 속여

서도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서부

터 상도의가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물건이랑 가격을 항상 정직하게 유지한다면 자연스럽게 손님의 방문

이 이어질 겁니다. 거기에 서비스 정신이 가미된다면 그 가게는 백년을

내다볼 수 있는 가게가 되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옆집이 잘 될 수 있게 서로 도우며 장사하란 겁니다. 자

기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판단을 잘못하는 거에요. 옆집이

잘 살아야 나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손님이 장 보러 오면 이 집 저

집 둘러보게 되어 있어요. 옆집에서 물건을 사고 다른 집에는 뭐가 있나

둘러보다가

“어! 여기도 좋은 게 있네.” 해서 우리 집 물건도 한 번 더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옆집의 가게가 잘 되면 우리 집도 잘 될 가능성이 커

지는 거죠. 그게 공생이고, 상권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이에요.

상인들 간에도 서로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어요. 이 사람이 저 사람에

게 관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도 전통시장 공생의 한 부분이라

고 생각해요. 다 같이 더불어 잘 사는 게 제일 중요해요. 저희도 항상 공

생하려고 노력해요. 모든 분들께서 황금알 직판장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

고 혹시 저희 가게에 부족한 점이나 개선했으면 하는 의견이 있다면 허

심탄회하게 알려주세요. 대화에 몰두하다 보니 두서없이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내 말 중에서 글로 쓸 만한 내용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말씀해주신 이야기 가운데 쓸 만한 내용이 있냐는 어르신의 겸

손이, 바로 좋은 책 한 구절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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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일식당 (정옥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려내는 일을 인륜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잊어야 하는 일과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족발뼈를 발라내며 깨우친 사람이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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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자리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는 13년 정도 지났을까요. 정확히

2000년에 시작한 모양이에요. 세월이 덧없다 하지만 순식간에 10년이

흘러갔으니 꽤 오래 식당 일을 해오고 있네요.

자식 많은 우리 집이 이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남한테

손 벌리고 사는게 싫고 떳떳하게 내가 벌어서 공부를 시켜야겠단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초기엔 아무 것도 모르고 덤볐으니 그저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처음에는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놓고도 밖에 전시를 못

했어요. 부끄러워서 밖에 갖고 나가질 못한 거에요. 왜 그렇게 얼굴이 화

끈거렸는지 몰라요. 사실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죠. 초기

에는 양념한 족발을 밖에 못 들고 나갔어요. 집안 일만 하던 사람이 돈

을 벌겠다고 시장에 나와서 장사라는 걸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손에 안 익

겠어요. 사람들 눈을 마주보는 것도 의식이 되더라구요. 주부 노릇만 하

다가 상인 노릇을 하려니까 그 어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아무튼 처음엔 동생이 날 도와서 둘이 함께 일을 했는데 족발을 다 만

들어놓고도 못 가지고 나가서, 동생아, 네가 족발 가지고 나가라. 언니

야, 네가 가지고 나가라. 이렇게 서로 미뤘어요. 이런 웃지 못할 어설픈

드라마 장면이 하루에도 여러 번 벌어졌어요. 몰라도 너무할 정도로 몰

랐어요. 돈벌이라고 제대로 되겠어요? 가게 월세를 겨우 낼 정도로 벌이

도 신통찮았어요. 장사하는 요령을 모르니까 당연한 결과였지요.

족발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썰면 팔릴 줄

알았어요. 음식은 눈으로도 보는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만든 족

발은 한눈에도 모양이 들쭉날쭉이고 척 봐도 맛이 없게 생겼어요. 그렇

게 장만해놓은 걸 누가 돈주고 사겠어요. 이제는 10년 넘게 하다보니 요

령이 생겼지요. 지금은 장사가 재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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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예전 모습을 생각하면 한 가지 밖에 안 떠올라요. 부끄러움. 지

금 생각하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지요. 어떡하면 밖에 뭘 더 내놓을 게 없

나 싶어 두리번거리니까요.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넉살이 좋아졌지

요.

우리 부부가 이렇게 힘내서 열심히 장사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

식들 덕분이에요. 자식들이 남 앞에 부끄럽게 사고나 치고 다녔으면 일

할 용기가 없었을 텐데, 우리 애들이 부모를 따라주고 공부도 잘했으니

까 힘이 나더라고요.

황금시장이 예년에 비해 손님이 줄었지만 저희 가게는 큰 영향이 없는

편이에요.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가게 안이 좁아 손님을 많이 못 들인다

는 게 저희 집 흠이지요. 보시다시피 테이블 4개 들어갈 공간 밖에 안 됩

니다. 단체손님들은 엄두가 안 나죠. 덩치 큰 사람 서너 명만 앉으면 가

게 안이 꽉 차니까요. 그럼 손님들이 내부가 작아서 안 되겠다 다른 데로

옮기자 이러셔요. 그때가 제일 속상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저희 집은 포장 판매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죠. 요즘 새로운 메뉴를

냈는데 뭐냐하면 뼈없는 족발입니다. 이걸로 도시락을 만들었어요. 그게

요즘 인기가 많아요.

우리 집의 효자 상품은 뼈없는 족발입니다.

족발 뼈를 발라서 도시락 형태로 내놓으면 야유회를 간다든지 잔치나

술 안주, 등산 갈 때 이용하기 간편하죠. 아무래도 뼈가 있으면 부피에

부담이 가고 치울 때 쓰레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 덕분에 뼈 없는 족발

을 많이 찾으세요. 오래된 음식점에는 그 집만의 비법이 있듯이 저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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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비법이 있어요. 이제 족발 다루는 것도 자신 있어요. 칼질하는 기술도

물론이구요. 얼마나 자신 있냐 하면 농담 조금 보태서 한석봉 모친처럼

눈 감고도 썰 수 있어요. 세월이 약이라고, 10년이 넘다 보니 장사하며

서러워 흘렸던 눈물도 안 흘려요.

이만큼 일하고 있는 것도 자식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거에요. 자

식들에게 항상 깨끗한 거울이 되려고 열심히 일 했어요.

처음으로 이 장사를 내 장사라고 느끼면서 힘이 붙었던 날이 있었어

요. 그날 집에 돌아가 애들한테 말했지요. 엄마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만큼 너희도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게 없다. 엄마 아빠가 아침 8

시에 나오면 밤 12시나 되야 집에 들어온다. 아빠하고 엄마하고 열심히

사는 만큼 너희도 열심히 공부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 덕

분인지 애들이 공부를 잘해서 첫째는 성형외과 의사고, 둘째는 서울에서

특수교육학교 선생님이에요. 그만큼 잘 자라줬으니까 부모가 시장에서

용기를 내고 가슴을 펴고 사는 거죠. 요즘 저는 몸이 아주 안 좋아요. 우

리 아저씨 없으면 이 장사도 못 버텼을 거에요.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10년 동안 해왔네요. 이젠 힘든 걸 다

알아버려서 다른 데 가서 이렇게 새로 시작하라고 누가 권해도 아마 못

할 거에요. 더 큰 자리로 옮겨서 장사하라고 해도 못할 거에요. 우리 부

부는 큰 욕심 없어요. 원래 이곳에서 시작을 했으니까 이 자리를 지키면

서 마지막 일하는 날까지 제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우리 집 음식의 특징은 첫째로 아주 깨끗하게 음식을 만듭니다. 보통

두어 번 손이 가면 끝날 일인데 저희 집은 다섯 번 이상 손을 거쳐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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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 식구가 먹는 것이다 생각하면 입장이 달라지

잖아요. 우리 아저씨가 깔끔하고 꼼꼼한 성격이라서 족발이라면 아주 깐

깐하게 하십니다.

우리 집 순대국은 국물이 진국입니다. 처음에는 국물이 너무나 진한

나머지 믿기지 않으니까, 아지매, 여기 프리마 탔죠?, 우유 탔죠?, 밀가

루 탔죠? 이렇게 의심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음식으로 사람을 속이는 세

상이 되다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지만 요령 없을 때는 그런 말 듣

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어요. 쌓여있던 서운함이 집에 도착하면 왈칵 눈

물로 쏟아지곤 했거든요. 그게 아닌데 그걸 설명할 오기도 없었던 거에

요. 우리는 돼지 뼈만 이용해서 핏물 다 빼고 끈질기게 고아서 국물을 낸

다고 해도 말이 안 통했어요. 아무 것도 안 섞고 국물만 따로 진하게 끓

인다니까 다 의심하죠. 속상하지만 어쩌겠어요. 손님한테 내놓는 국물은

몇 시간 만에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누가 뭐라고 해도 국물은 은근하고

진하게 우려야 된다는 것이 우리 부부의 지론입니다. 지금도 그런 손님

이 계세요. 아줌마. 여기 밀가루 탔네, 우유 부었네. 그런데 이제는 웃으

면서 대답을 해요. 아저씨. 그러지 마시고 집에 돌아가셔서 우유 타서 드

셔 보시던지, 밀가루를 타서 드셔 보시던지 프리마를 타셔 드셔보세요.

그러면 우리 국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실 겁니다. 장난 안 친 국물은

날이 추우면 저절로 응고가 되고, 프리마 탄 국물과 이 국물이 서로 맛이

똑같은가 맛이 다른가 비교해 보면 되지 않느냐고 웃으면서 말씀을 드리

죠. 저도 나름대로 제 음식에 대한 논리가 생긴 거에요.

몇 년이 지나도 저희 집을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계세요. 1

년에 꼭 한 번씩 찾아오시는 손님이 작년에 왔는데 올해 또 왔다 말씀하

시면 참 고맙고 뿌듯하죠. 이 집 음식은 어디 가서도 비교할 수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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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씀하실 때면 아이고, 누가 뭐래도 이대로가 좋다 싶기도 해요.

음식 만드는 일에는 거짓말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뼈 없는 족발은 우리 집이 특허라고 봐야 합니다. 조금 전에도 일하는

거 보셨지만 우리 아저씨하고 서너 시간을 꼼짝않고 앉아서 일해야 되

요. 털을 면도날로 밀고 뼈를 일일이 손으로 다 발라낸 다음 족발 모양까

지 일정하게 다듬고나서야 삶을 준비가 되죠. 뒷정리를 깨끗이 하고 마

무리를 지으면 몸살이 날 정도가 됩니다. 그만큼 정성이 안 들어가면 이

족발은 완성할 수 없어요. 음식 만드는 일에는 거짓말이 끼어들면 안 됩

니다. 보기엔 뻔한데 막상 해보면 잘 따라할 수 없는 음식이 우리 집 족

발이에요. 그만큼 손도 많이 가는 작업이라서 혼자는 절대 못해요. 우리

아저씨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도와줘야 가능해요.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 아저씨가 고맙고 은혜롭습니다.

이 가게를 언제까지 계속할 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 막내 대학교 졸

업할 때까지는 해야 되는데, 건강이 안 따라 줄까봐 걱정이에요. 제가 허

리 상태가 아주 안 좋거든요. 다른 상인들도 한 가지씩 잔병은 갖고 계시

겠지만 허리 아픈 건 진정 고통스러워요. 아픈 몸을 참고 나와서 일하고

있는 거에요.

며칠 안 하고 집에서 쉬면 아픈 몸이 더 쑤시고 아파요. 괜히 가게 걱

정이 되고 몸 한 구석이 근질거리니까요. 그동안 습관처럼 해온 일이라

서 그런가 봐요. 그래서 다시 일을 나오는 거에요. 막상 가게에 나와 일

을 하면 또 몸이 아파요. 그러면 마음 속으로 내일은 그만 쉴까 하는 거

죠. 몸이 아플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거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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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다고 집에서 쉬면 조금이라도 회복이 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더 아

파요. 요즘은 집에서 쉬느니 일하는 게 더 낫다 싶어요. 이래서 진퇴양난

이란 말이 있나봐요. 이래도 아프고 저래도 아픈 게 엄마의 운명인가 싶

죠.

큰 맘 먹고 하루 쉴 때도 편히 쉴 수 없는 제일 큰 이유는 가끔 특별 주

문이 들어오고 멀리서 찾아오시는 손님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손

을 놓을 수 없어요. 그런 말 있잖아요. “일 나오면 돈이다.” 이런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놔야 건강에도 도움이 될 텐데, 되도록이면 가게 문은 열

어야 한다는 신조는 못 버리고 있어요.

매상이 어느 정도 올라오면 너무 욕심부려도 안 되잖아요. 저는 이 장

사를 하면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달성했다고 봐요. 이 장사하며 자식 셋

대학 공부 시켰으니까요. 아직 공부가 남아있는 우리 막내만 대학을 마

치면 공식적인 제 임무는 끝나죠. 지금은 우리 쓸 용돈도 조금 모았어요.

처음에 첫째 의과대학 시키면서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마이너스 통장으

로 살았죠. 그래도 이 장사 덕분에 애들을 키울 수 있었어요. 이 장사를

안 했으면 어디서 그 많은 돈을 댔겠나 싶어요. 다른 집에선 자식 셋 대

학 보내는 게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 목표는 오직 애들 학비 마련

이었어요. 사람이 목표가 너무 많아도 안 되잖아요. 만족하고 살아야지.

예를 들자면 내가 하루에 100만원 벌고 싶다고 100만원이 수중에 들어

오는 것도 아니에요. 욕심내면 마음만 더 괴롭답니다. 그래도 이나마 사

는 것에 감사해요. 황금시장 손님이 다른 시장에 비해 조금 더 많으니까.

일하는 동안은 그저 열심히 일한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시장 안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가

게 파장하는 순서입니다. 우리가 경쟁의식을 갖고 일하는 게 아닌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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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하고 마감을 하고 보면 대체로 우리 가게가 제일 마지막이더라구요.

이 순서가 점차로 굳어져서 시장 안에서 맨 마지막으로 나오는 집이 우

리 집이 됐어요. 집안에 사정이 있거나 큰 볼 일이 아닌 다음에야 이 순

서는 거의 지켜지는 편입니다. 장사 하면서 느끼고 있지만 갈수록 외국

사람들이 많아져요. 주로 동남아 사람들이죠. 도통 말이 안 통해요. 그런

데 팔기는 팔아야 한단 말이죠. 예를 들어서 손님이 돼지머리를 요구하

세요. 언어가 다르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잖아요. 그럼 눈치로 알아들어

야 되요. 손짓 발짓은 물론이고 온몸을 이용해서 손님이 원하는 부위를

바디랭귀지로 소통하는 거에요. 외국 사람들은 내장 종류를 좋아해요.

혓바닥, 귀때기, 코. 이런 부위를 설명할 때 혀를 원하면 내 혀를 내밀어

서 에- 하고, 내 코를 만지고 귀를 만져요. 그럼 손님이 알아듣고 물건

을 사가시는 거에요. 또 이런 경우가 있어요. 손님이 닭을 원하는데 영계

와 노계에 대해서 말로도 그렇고 몸으로도 그렇고 설명하기 애매하잖아

요. 퍼뜩 생각나는 말이 할머니닭? 아가씨닭? 이렇게 말했더니 신기하

게도 알아들으시더라고요. 다음에는 손님이 먼저 할머니닭을 주문하면

서 웃어요. 그렇게 또 대화가 되더라고요. 장사하는 재미죠.

또 이따금 오시는 청각장애인들이 계세요. 내가 수화를 모르니까. 어

쩔 수 없이 고기 뜯는 모습을 흉내내거든요. 그럼 또 대번에 알아들으세

요. 그럴 때 한 번 더 웃게 되죠. 장사하면서 여러모로 재미난 일이 많아

요.

날이 갈수록 외국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요. 우리나라 아가씨들은 큰 마

트에 가거나 백화점을 찾아가지 시장에 잘 안 와요. 그런데 나어린 애들

데리고 장보러 나오는 새댁들, 아가씨들, 총각들을 살펴보면 거의 다 외

국 사람들이에요. 스리랑카, 베트남, 필리핀, 중국, 일본, 하물며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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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도 한 번씩 견학을 와요. 다문화 가정이 그만큼 늘어나는 추세라

고 봐야겠지요. 주말에 한 번씩 오는 그 손님들 만나는 재미가 또 남다르

더라구요.

장사를 이때까지 해오면서 깨달은 건 세상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그저

순리대로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겁니다.

외국인이 많아지는 시골 풍경은 어쩌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운명일

지도 몰라요. 하지만 타국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을 거리낌없이 대하는

것도 장사하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열심히 살고 있는 것

처럼 그 분들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살기 위해 먼 타향 땅에 오신 분들이

니까요. 그 분들이 우리 김천을 제 2 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더 애정을 가지고 우리나라 이미지에 누가 되지 않게 더욱 더 양심적으

로 음식을 만들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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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꽃화원 (박경자)

김천 황금시장에 가면, 긴 머리를 한 타래로 묶은 여인이

착한 꽃집에서, 날 저문 하루에 관하여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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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앞만 보고 산다지만, 돌아보지 않고 살아온 탓일까. 달리

기만 하는 세월에 불현듯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잊기 위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잊는 것일까. 이제는 중년이 된 꽃집의 여인은 과

거를 묻는 질문에 기억이 흐려졌습니다.

가만 있자, 그러고보니 꽃집을 시작한 지 몇 년이 됐나. 묵은 서류철에

서 사업자등록증을 꺼내 살피신다. 날짜를 보니 97년 4월 1일로 기록되

어 있구나. 햇수로 17년. 얼마 안 있음 20년이네요. 가는 세월을 까맣게

잊고 살았어요. 어려서부터 야생화를 무척 좋아했지만 취미로 배운 꽃꽂

이가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루는 길을 지나는데 큰 길 옆에

이사 간 빈 점포가 눈에 띄었어요. 이 공간에 꽃을 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일사천리로 꽃가게 간판을 달았지요.

일을 시작하고 얼마쯤 지났을까 난처한 일이 생겼어요. 경조 화환 리

본에 붓글씨 쓰는 일이었지요. 요즘처럼 컴퓨터로 출력할 수 있는 시스

템이 없었던 때니까요. 당장 서실부터 찾아가 등록을 했어요. 경험 없이

시작한 일이라 무척 힘들었지만 낮에는 꽃과 식물을 가꾸고 저녁엔 붓글

씨를 열심히 배웠어요. 막연하게 꽃을 사랑했을 뿐, 식물에 관한 전문 지

식이나, 가게 운영에 대한 요령조차 없이 시작한 일이긴 했어도 취미가

아닌 돈벌이를 위한 꽃꽂이에 새로이 재도전을 했고 꽃꽂이 사범증을 수

료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어요. 무척 고단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꽃

에 관한 모든 걸 하나씩 배워가기로 다짐했어요.

그 결과 몇 개의 사범증을 더 따게 되었지요.

종이접기, 페이퍼 플라워, 볼륨아트, 종이인형까지 시간에 쫓기면서도

최선을 다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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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장사하면서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냈겠어요.

얼마간 세월이 지나고 보니 꽃에 대한 의미 역시 달라지더라구요. 취

미로 할 때는 즐기면서 가볍게 생각했던 부분이었지만 돈과 연관이 되고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로 하는 일이라 능수능란하게 손님의 마음을 읽어

내지 못해 놓치기 다반사였어요. 본디 말수가 적고 부끄러움이 많아 어

려웠던 만큼 정말 많은 노력을 했어요.

취미로 바라보는 꽃 한 송이는 그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지만 직업으로

바라보는 꽃 한 송이는 우리 가정의 저녁 반찬값이요, 아이들 학비요, 내

노후에 쓰일 준비 자금이에요. 그러니 이보다 더 현실적인 꽃 한 송이는

세상에 없는 셈이죠.

식물을 관리하고 꽃을 가꾸면서 숙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어느 순간 저는 꽃 한 송이를 생각했던 낭만적인 사람에서 가족의 생계

에 보탬이 되려고 몹시 애를 쓰는 실존적인 사람으로 변해 가면서 책을

가까이 하게 되었어요. 전문지식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

어요. 주경야독을 하며 2002년 9월에서 2004년 4월 대입 검정고시 합격

을 시작으로 05학번으로 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입학해 2009년 1월 서울

88올림픽체육관에서 졸업 학사모를 썼어요. 이만하면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것 같죠? 그리고 생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의미하기도 해요.

요즘은 모든 것이 자동화 되어 사람 손이 덜 가는 시대지만 꽃가게 일

은 전부 수작업으로 하는 일이라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지요. 분갈이를

할 때면 농사일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어요. 그뿐인가요. 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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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화분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놓았다 반복 해야 되죠. 그러다 보니

낭만은 옛말이 되었어요. 어느 날인가 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꽃집 아줌마는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다고. 누구나 남이 하는 일에 대

해선 장미빛으로만 동경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나날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20여년 가까이 버틴 힘은 도대체 뭘까. 생

각해보니 답은 간단하더라고요.

힘들고 어렵지만 식물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니 뭐랄까요. 제 마음이 식

물성으로 변했다고 해야 하나요. 저는 가게 안에 있는 식물들을 자식처

럼 대해요. 말 못 하는 꽃과 분재들을 만지면서 서로 대화도 하고 걱정도

나누고 덕분에 시름도 덜게 되죠. 그래서 제가 오래도록 이 일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되죠. 그뿐인가요. 든든한 버팀목

이 되어주는 가족들과 꽃을 사러 오시는 손님들이 있으니, 저는 당당히

행복하다 말할 수 있지요.

예전에는 꽃다발 들고 가는 사람에게 공연스레 핀잔을 주는 못마땅한

사회적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죠. 의식주가

중요하듯이 아름다움을 누릴 권리도 필요한 세상이잖아요.

이곳 김천에 사시는 분들은 최근 들어 꽃을 많이 사가셔요. 삶이 힘들

더라도 꽃을 바라보며 위안도 얻고 안식도 얻는거죠. 하지만 예전에 비

해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다들 살기가 팍팍하다고 야단들이랍니

다.

그렇지만 눈에 띄는 변화도 있어요. 그 중 하나가 중장년층 남자 분들

이 직접 꽃을 사신다는 사실이에요. 이런저런 집안 대소사나 결혼기념

일. 생일 등등 자주 찾아오시는 분도 계세요. 술 한잔 기분 좋게 드시고

귀가하실 때 부인을 위해 꽃 한 다발 품에 안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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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참 뿌듯해요. 어느 날은 멋쟁이 어르신이 오셔서 꽃을 달라고 하셨어

요. 멋스럽게 포장해 드리면 꽃송이가 보이지 않게 다시 해 달라고 요구

하세요. 그러면 저는 군말 없이 해드려요. 그게 뭐겠어요. 꽃을 사고는

싶은데 멋쩍고 부끄러우니, 행여 누가 볼세라 포장지를 덮은 꽃을 가슴

에 안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뻐하실 할머니가 계신 댁으로 돌아 가시는거

죠. 요즘 사람들이 낭만적이라니까요.

어느 늦은 밤 누군가 문을 두드렸어요. 웬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젊은

아저씨에요. 아내가 단단히 삐쳤는데 꽃을 바치고 사과해야 할 것 같아

밤중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다고 말씀 하시더라구요. 그럴 땐 격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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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느껴져요. 제가 지금 50대 중반인데 우리 때는 미담으로 기억할 만

한 그런 일이 없었어요. 꽃 한 송이 사느니 차라리 국수 한 다발 사들고

들어간다는 시대였으니까요.

가게에 책이 좀 많은 편이죠. 요즘은 통 바빠서 읽지 못했어요. 주변

정리를 해야 되는데 늘 일손이 부족해 당분간은 이대로 모셔두려구요.

시집은 독서라기보다는 제가 공부하는 교과서에 가까워요. 5년째 시공

부를 하고 있어요. 꼭 시인으로 등단한다는 의지보다는 그저 살면서, 세

상의 순리에 고개 숙이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배우고 있는 거에요.

훗날 제가 한가해지면 애착을 가지고 글을 써보려고 해요. 어릴 때부

터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많았어요. 시를 좋아했지만 글을 쓴다는 생각

은 미처 해보질 못했던 시절 막연한 동경심만 가졌던 한때가 있었어요.

잘 쓰지는 못하지만 남의 글을 듣고 보면서 공감할 줄 알고, 내가 쓴 문

장을 스스로 첨삭할 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참 기뻐요.

오늘의 세상은 먹고 사는 일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문학을 가치 없다 말

하고 가치 없는 문학은 저문 날의 한 페이지로 노곤한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

현재는 황금전통시장 상인회 사무국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어요. 남들

은 가장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데 매니저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개인적으

로 참 감사한 경우가 많답니다. 상인회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몸으로 많

이 뛰었어요. 그렇지만 복 많은 사무국장이기도 해요. 또한 강준규회장

님께서 제 몫까지 챙기시며 안팎으로 많이 뛰고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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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은 사무국장님이 다 하신다 말씀하시고

사무국장님은 회장님이 일을 다 하신다고 서로 미룬다.

내가 가장 행복할 때요?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 싶을 때 정말 행복해요.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기쁨 또한 살아가는 의미라고 해도 좋을 것 같네요.

때론 열심히 살아 온 거 같은데, 마음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가끔 있지

요. 제가 너무 욕심이 많아서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때도 있어요. 지나

온 세월이 덧없다하여 인생무상이라 했던가요? 돌아보면 이유 없이 허

한 마음이 들 때 가끔 긁적거려 흔적을 남기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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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둥지

박 경자

돌아보면 허한 마음

욕심이란 굴레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삶 속에 고리처럼 걸려

삼백 예순 날이

하루 같진 않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샘은

저만치 홀로 아리랑

지워진 시간에 떠밀려

세월이란 덫에

앙팡지게 걸렸다

하늘 위로 솟은 가지에

까치집으로

덩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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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수첩을 귀하게 내놓았다.

이게 내가 시 단상을 적는 수첩이에요. 생각나는 대로 적어두지 않으

면 금방 까먹어요. 요즘은 어린 시절이 자주 생각나요. 방과후 친구들이

랑 모여서 놀아본 적이 몇 손가락 안에 꼽혀요. 저희들 어릴 적엔 일손이

부족해 동생들 돌보거나 청소를 하거나 감자를 긁어놓거나 물 길어 놓는

일처럼 여러 가지 도울 일이 참 많았어요. 새벽일 가신 아버지 대신 아침

에는 졸린 눈 비비며 쇠죽을 끓이기도 했죠. 그 시절에 알게 되었던 꽃들

은 지금도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피어나는데 꽃을 알았던 저는 그 시절

에 비하면 몰라보게 달라졌네요. 어쩌겠어요. 사람의 한 일생 한 운명.

더 열심히 살아야죠.

내가 사랑하는 꽃들과 함께!

사무국장께선 평소에 고맙고 감사하셨던 분들을 한 분 한 분 말씀 하

셨다. 이 지면보다 더 무거운 은혜이기에 마음에서 꺼내 비쳤던 고마움

과 감사를 마음에 도로 담아 넣으시고 대신 상인회장님의 인사 말씀으로

미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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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유통 (박진영)

세상의 큰 길은 나라 안에 있지 않고 나라 밖에 있다고 믿었던

남자가 오랜 외국 생활을 끝내고 입국했다.

떠나온 먼 길을 되짚으며 고향에 돌아온 남자, 이제서야 안식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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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미래를 암중모색하다, 심사숙고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여러 일을 잠깐씩 했어요. 그 당시 앞으로

의 국내 시국 상황과 경제 전망이 썩 밝지가 않았어요. 다른 살 길이 없

을까 다양하게 생각을 했는데 결론은 일본으로 가자는 것이었어요.

처음 일본행을 결심하고 사회적 분위기와 그 나라의 고유한 특색을 익

히려고 일본에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도 하며 오래 머물러 있었어요.

소규모로 무역을 개시해볼 계획을 갖고 일시적으로 입국을 한 다음 국내

판로를 알아볼 찰나에 일본 본토에서 일이 터진 겁니다. 쓰나미가 일본

을 뒤흔들었죠.

일본에서 수입하려고 했던 것은 스테인레스 스크랩이라는 일종의 고

철이에요. 공작기계가 스테인레스 철판을 모양대로 자르고 남은 자투리

금속을 스크랩이라고 말하는데 일본에는 그런 게 많거든요. 그걸 가지고

들어와서 고철 쪽으로 판로를 개척해볼 생각이었어요. 수입 절차를 진행

하고 있었는데 쓰나미가 덮쳐서 모조리 물거품이 된 거죠.

일본에서 돌아와 잠시 숨죽이고 있던 찰나에 서울에서 백화점에 멸치

를 납품하는 외삼촌께서 용돈벌이로 생각하고 해보라며 멸치 선별을 맡

기셨어요. 지금 이곳도 처음부터 가게를 하려던 목적은 없었고 멸치를

선별하고 포장하는 임시 작업장으로 쓰려고 차린 거였어요. 문을 연 지

는 한 3년 됐네요. 1, 2년 어머니에게 이 일을 가르쳐드렸어요. 사실은

이 가게도 제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 소일거리 하시라고 차려놨

던 것인데, 찾아오는 고객들이 자꾸 멸치 말고 다른 품목을 찾으세요. 건

어물집이니까. 그래서 구색에 맞춰 다른 품목을 들이다 보니 주체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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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여기까지 온 겁니다.

일본에서 쓰나미의 충격이 잠잠해질 무렵에 또다른 계획이었던 학원

사업을 해볼 생각으로 다시 일본행을 실행했죠. 들어가봤더니 일본 내의

상황이 아주 고약했어요. 쓰나미보다 더 큰 방사능 문제가 터진 겁니다.

일단은 먹거리가 제일 불안했고 사회 통념상 이방인이 더 머물고 있으면

큰일날 분위기더라고요. 장가도 안 갔는데 여기 더 머물다간 큰 사고라

도 당하겠다 싶어 얼른 귀국했지요.

대학 학부 생활 하면서 공대에서 화학공학을 이수했어요. 그러니까 지

금 하고 있는 이 장사와 공대 졸업장이 아무 연관성이 없고 뜬금없는 것

도 있지만 아주 관련이 없다고 볼 수도 없어요. 공학과 마찬가지로 장사

란 본래 기계적이고 공업적이고 수학적인 거니까요. 가게에 물건을 진열

하고 재고를 처리하고 새 물건을 저장하는 노하우는 학부 생활에서 터득

한 거라고 봐야죠.

저는 스무살 때부터 수산물과 인연이 깊었습니다. 첫 알바가 백화점

에서 멸치 파는 일이었으니까요. 본래 제가 이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동기는 유별납니다. 멸치는 크기별로 선별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서울에서 멸치 유통을 크게 하시는 외삼촌 내외께서 선

별 작업도 같이 하시는데 일손보다 일이 많으니 힘이 드셨던 겁니다. 제

가 마침 사회적인 정체성도 없이 방황하고 있을 시기였는데, 외삼촌께서

하시는 말씀이 정 그러면 멸치 가져다가 선별이라도 하라고 권하신 겁니

다. 그래서 고향 김천에 마땅한 자리를 찾다가 이 가게를 만나고 급기야

이곳에 멸치 업장을 차린 겁니다. 마침 이곳이 전통시장이니까 멸치를

가져다 팔면 판로에는 무리가 없겠다고 생각했고, 멸치 선별을 해야 하

니까 작게나마 선별장을 마련한 거지요. 정리를 하자면 선별장이 목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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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지 이런 형태의 건어물 가게는 아니었단 거죠. 이런 경우만 봐도 참 세

상살이는 어떻게 변할 지 알 수 없다니까요.

나름대로 깔끔하고 청결하게 정돈하는 요령은 일본에서 배운 겁니다.

또 손님을 대할 때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도 그렇구요. 일본에서 배운 건

그 두 가지 밖에 없네요.

사실 내 속마음은 이 멸치 장사 마진이 예전만큼 좋은 게 아니기 때문

에 곧 퇴직하시는 아버님께 넘겨드리고 다른 걸 하고 싶기도 해요. 이 장

사를 통해서 아버지 어머니, 저 이렇게 세 식구가 먹고 살 수는 있는데

그다지 희망적인 종목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딴생각이 떠오르는 거죠.

멸치 산지에서 중도매인을 하면 제법 돈이 되는데 그 일을 하려면 막대

한 초기 자본이 필요하니까. 여러 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지요.

이곳 황금시장에서 정착해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나이도 먹

어서 그런가, 꼼짝도 하기 싫어요. 내가 그동안 뜨거운 삶에 너무 익었는

가? 항상 새로운 일에 호기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저도 정착하고 싶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이 건어물 유통도 초반에는 자리잡기까지 아주 힘들었

어요. 3년을 꼬박 하니까 이제서야 단골손님도 생기고 가게가 안정이 됐

어요. 전부터 꿈꾸며 하려던 일이 다 틀어지고 나서는 오로지 여기에 매

진을 하고 있거든요.

내 주종목이 ‘가이리 멸치’라고, 볶아먹는 멸치입니다. 보통 멸치는 통

영 멸치가 있고 여수 멸치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품질은 여수 멸

치가 좋고 가격 면에선 통영 멸치가 저렴해요. 저희 집에서는 여수 물건

을 고집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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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사의 원칙은 건어물은 응달에서 취급해야 한다는 겁니다. 햇빛에

말렸다고 해서 건어물이라고 착각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햇빛을 쬐이면

물건들이 다 상합니다. 김 같은 경우 햇빛을 보면 그냥 빨갛게 변질이 돼

요. 멸치는 약간의 수분이 있어야 더 맛이 있어요. 멸치가 햇빛에 마르면

소금기 때문에 더 짜지고 큼큼한 냄새도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멸치

는 항상 냉장고에 보관합니다.

김천 사람들은 7, 8월 멸치가 제일 좋은 줄 알아요. 그걸 초사리 멸치

라고 부르는데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리자면, 한 마디로 별로입니다. 기

름기가 많기 때문에. 김천은 내륙지방이다 보니 옛부터 멸치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가 없어요. 절었는 거, 완전히 누런 거. 그런 걸 황금멸치라

고 부르면서 제일 좋은 멸치라고 오해를 하시거든요. 중간 유통을 통해

김천까지 올라오면서 절은 멸치를 최상품으로 오해하시는 거죠. 신선한

걸 가져오면 이건 맛없는 멸치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계시더라고요. 멸

치도 배에서 바로 잡아 쪄낸 것보다 냉동실에서 좀 묵힌 멸치가 더 맛있

어요. 묵은 거라고 해서 나쁜 게 아니에요. 멸치를 보면 색이 빨갛게 된

게 있어요. 그건 아주 절은 것입니다. 반면에 배가 노란 게 있어요. 전체

적으로 노란 빛을 띄면서 윤기가 나는 멸치는 좋은 멸치예요.

지금 가게에 있는 냉장 냉동 시설을 갖추는 게 올해 소원이었어요. 다

행히 소원을 이룬 셈이죠. 가게 절반이 냉동고에요. 올해 내부 증축까지

했으니 큰 돈 들었어요. 큰 돈 들었지만 투자를 해야 새로운 고객도 확보

할 수 있다는 게 제 평소 철학입니다.

인터넷 사이트도 있어요. 그런데 혼자 하니까 감당을 못 하고 있어요.

오후에 어머니가 가게 나오시면 제가 배달을 갑니다. 보통 장날은 아주

바쁘니까 인터넷까지 혼자하기는 조금 벅차요. 사이트 관리는 못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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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요. 이럴 때 와이프하고 둘이서 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그런데

아직 여자도 제대로 못 만나봤어요.

저의 바람은 우선 젊은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시장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었으면 한다는 거죠. 그건 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고 우리 시장 전체가 합심해서 극복해야할 문제라고 봅니다.

젊은 고객이 안 오면 앞으로 황금시장의 전망은 불투명하다고 보고 있으

니까 이제부터라도 젊은 고객을 모객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방법을 찾아

야죠.

앞으로의 목표는 결혼을 해서 와이프하고 같이 열심히 장사를 하는 거

죠. 아직까지 큰 포부라고 밝힐 만한 건 없고 이제 자리가 겨우 잡혔으니

까. 가게가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거죠.

지난 날을 생각해보니 제가 그동안 틈새길을 많이 다녔어요. 희한하게

그런 데만 끌려요. 이 일도 어떻게 보면 젊은 사람이 저걸 왜 하냐? 그렇

게 생각하실 지도 몰라요. 그런데 깊이 생각을 해보니 젊은 제가 열심히

노력만 하면 장차 우리 시장 안에서 제가 하는 장사가 어느 정도 경쟁력

도 생기리라 봤고, 대박은 아니더라도 먹고 살 만큼은 충분히 돈을 벌겠

다는 희망을 봤어요.

대부분 어른들은 묵묵히 근면성실하면 성공한다 하시는데 저는 모험

심이 있어요. 해봐야 알잖아요. 젊은 날 멀리 돌아다닌 시간은 제 입장에

선 경험을 저축한 거라고 믿고 있어요. 앞으로는 사기 안 당할 자신도 있

으니까요.

저는 오랫동안 전국으로 일을 많이 다녔어요. 저는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일에는 매력을 못 느꼈어요. 젊은 사람들은 동전 넣고 배팅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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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가 쏘는 공을 타석에서 방망이로 쳐본 기억이 다 있을 겁니다. 그 야구

연습장을 지으러 다닌 게 기억에 남네요. 전국을 다 돌아다녔어요. 그 일

이 의외로 돈벌이가 짭짤해요. 전국에 전문업자가 몇 명 없거든요. 거기

서 번 돈으로 외국 나갈 밑천을 마련했던 거죠.

이제는 나이를 먹으니 그동안 겪었던 외국 생활이 광활한 사막에서 오

아시스를 찾으려다 신기루에 홀리고 말았던 동방상인의 고난이 아니었

나 하고 되짚어보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단기간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고 생각

하실 수도 있는데 사실은 단기간이 아니에요. 외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오래 했어요. 졸업장 받고 일본에서 2년 반 머물다 입국해서 다시 동남

아 여러 국가로 출국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필리핀에 해삼 잡으러 간 적도 있습니다. 해녀 같이 바닷속에 들어가

해삼을 직접 따오는 건 아니고 당시 필리핀에 제가 소유한 배가 있었어

요. 배를 타고 해삼 어장에 나가면 제가 고용했던 필리핀 사람들이 바다

에 들어가 잡아오는 거였어요. 잡은 해삼을 건조한 다음 중국 상인에게

팔았어요. 중국 사람들이 말린 해삼을 즐겨 먹잖아요. 일본에 있을 때도

잠깐 해삼 채취를 했었어요. 일본 해삼이 알아주거든요. 북해도에 가면

뿔이 여섯 개짜리 해삼이 있어요. 그게 가장 상급품인데 100g에 100만

원정도 해요. 그걸 우리나라로 잘 들고 들어오면 150만 원 받으니까. 그

런데 그 해삼은 일본 야쿠자와 관련이 깊어요. 억 대의 돈이 왔다갔다 하

니 그냥 둘 리 없는 사업이잖아요. 1kg만 채취해도 얼마에요. 하지만 돈

되는 일에 틈새시장이 있을 수 없죠. 더 깊이 관계를 하다 보니 야쿠자와

마주치게 되더라고요. 사람이 자기 명대로 살긴 살아야 하잖아요. 할 수

없이 접었어요. 필리핀에 있을 땐 민다나오라고, 반군 세력이 장악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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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안 가는 지역인데, 거기서 배를 타고

인도네시아로 넘어갔어요. 사실 밀항이죠. 거기서 해삼을 잡아 중국 상

인들 모여있는 장소에서 거래를 했습니다만 얼마 안 있다 결국 중국상인

들이 직접 거대 자본을 쏟아부으며 뛰어드니 그 세력을 이길 수가 없게

됐죠. 그래서 해삼 채취 사업을 접으려던 찰나에 결정적으로 접게 된 이

유는 배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덕분에 경찰서에 1주

일인가 있었어요. 하마터면 국제 미아될 뻔 했어요.

젊어서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또 금도 캐러 떠나갔었네요. 필리핀에서 해삼 잡을 때 쓰던 배랑 세간

살이 다 정리하고 비행기를 타고 인도네시아에 갑니다. 마나도라는 곳에

서 차를 타고 열 시간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면 정글 골드가 있습니다. 정

글에 있는 금 캐는 동네입니다. 서부개척시대의 골드러쉬랑 같은 말이

죠. 거기 가니까 곳곳에서 사금이 나와요. 펌프하고 장비 메고 열 명 정

도 인원을 꾸려서 정글에 들어가 금을 캔 겁니다. 생각보다 생산성이 떨

어져요. 하루에 3g, 한 돈 정도 사금을 캤어요. 하다보니 알게 되는 거

죠. 결국 금이 잘 나올 때 3g이고 아니면 아예 없는 땅이라는 것을. 계산

을 따져보니 금은 금인데 들어가는 경비를 제하면 이윤은 남는 게 하나

도 없어요. 결국은 비자 문제도 있고 자금 문제도 있어서 귀국했는데 손

에 남은 거라곤 금 3g만 남아있었어요. 그 고생을 사서 하고 인생의 쓴

맛은 다 맛 본 기분이었어요. 참으로 골치 아픈 지난 날이었던 건 분명해

요.

한 인간이 경험적인 측면에서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일을 했다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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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겠네요. 동남아에서 지낼 땐 사기도 많이 당했어요.

어째서 외국으로만 나돌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쩌다 보니 졸

업 이후 연속해서 외국으로만 나돌았어요. 그때는 겁도 없이 신나게 돌

아다녔어요. 인도네시아 밤 거리는 무척 위험한데도 혼자 다녔던 걸 보

면 그 시절 저는 모험을 하고 있단 사실이 무척 행복했었나봐요.

저 스스로 저의 과거 떠돌이 기록을 정확하게 기억 못 하는 이유는 워낙

에 두서없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뛰어다닌 이유도 물론이고 매년 정신없

이 숨가쁘게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한동안은 저 스스로가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치기어린 충동으로 헛되

이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뼈저리게 후회

한다고 해서 되돌릴 수도 없고 당장 남은 앞날을 잘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평생 겪을 시행착오를 다 겪었으니 이제는 잘 풀릴 일만 남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을 다니면서 얻은 경험이 장차로 제 인생에서

여러모로 다양하게 쓰일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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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땅콩 (박근주 부부)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며, 찾아오는 손님이 진심으로 고마운

한 쌍의 땅콩 부부가 중년의 삶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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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이 두꺼운 안경너머로 소박하고 겸손한 태도로 말을 잇는 사장님께

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침착하고 결이 정

돈된 목소리와 나누는 문답은 듣는 이를 편하게 했다.

남편 제가 아버님께 이 장사를 물려 받을 때도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좇지 말고 더 멀리 10년 후 20년 후를 보고 손님을 맞으라는 말씀

을 듣고 지금도 그 마음으로 장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장사로군요. 고향이 김천이신지요?”

남편 태어나길 모암동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장사를 시작 하신 게 거

의 40년 가까이 되죠. 40년. 제가 물려 받은 건 올해로 25년이고

요. 77년도 말에 큰 형님이 공장을 하면서 부도가 나 온 살림이 폭

삭 내려 앉았지요.

그 와중에 연세 많은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서 오래 해오신 장사

를 그만 접으시려는 게 안타까워서 제가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이

장사를 이어 받으려고 낙향을 했지요. 직장 일이라면 안 해본 일

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해봤기 때문에 별로 겁이 안 났어요. 그

래서 무작정 이 일에 달려들게 되었죠.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더 침착해지는 성격이라서 막연하게나마 장사를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내려왔었죠.

젊을 때부터 한 지역에서 오랜 시간 정착을 못하는 성격이라서 전

국적으로 안 다녀본 데가 없어요. 그런데 고향에서 나무뿌리처럼

자리 잡고 장사할 줄은 몰랐죠. 앞날은 예측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말로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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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아버님이 둘째 아주버님께 이 일을 맡기려고 했는데 거절하셨어

요. 결국은 부모가 하시던 장사를 막내가 이어받았지요. 우리가

집안에서 막내거든요. 막내인데 이어받았어요.

남편 사실은 그 부분도 좀 있어요. 안식구 보는 앞에서 내가 이야기하

지만 형들 객지 나가 있고 누나들 시집가고 어른들 연세 많아지

고. 저는 옛날부터 부모님처럼 살고 싶은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

에 언젠가 고향에 내려와서 부모님 모시고 같이 살 작정이었는데,

그 시기가 일찍 와버린 거지요. 운 좋게도 제가 좋은 안식구를 만

나서 부모님에게 죄스러운 세월은 아니었습니다. 연로하신 어머

니 아버지, 전부 우리 안식구 손으로 보내드렸어요. 작년에 우리

어머니, 91세로 돌아가셨는데 우리 안식구 손으로 보내고, 13년

전에 아버지 80세로 돌아가실 때 역시 안식구 손으로 보내드렸습

니다. 제 안식구 덕분에 부모 공양은 어디 나가서도 할 말이 있습

니다.

효도라는 것이 본래 위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흘러가야 하는 물길이잖

아요. 저희도 자식이 있는 입장이니 이 물을 정성으로 받아서 밑으로 이

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아내 얘기할까요. 결혼할 때는 5년만 살고나면 나가 살자고 했거든요.

5년만 살고 분가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5년 지나 내가 분가하자

고 하니까 승락을 안 하더라고요. 우리 남편이 결정을 못한 이유

를 제가 안사람으로서 이해를 했어요. 효도라는 것이 본래 위로부

터 시작해서 아래로 흘러가야 하는 물길이잖아요. 저희도 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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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입장이니 이 물을 정성으로 받아서 밑으로 이어주고 싶은 심

정이었지요. 그래서 며느리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두 분 다 돌아가

시는 그날까지 성심성의껏 모셨어요.

“땅콩은 재배도 같이 하시나요?”

아내 우리 아버님 대에는 지례 5개 면에서 과일 농사를 막 시작할 무렵

이었어요. 그때 당시는 과수원들의 과일 나무가 어려서 과일 나무

가지에 과실이 맺히려면 기나긴 세월이 필요했어요. 그 바람에 공

교롭게도 과수원들이 거의 다 땅콩농사를 지었어요. 그래서 아버

님하고 애기아빠하고 촌에 땅콩을 사러 들어갔어요. 농사꾼들이

수확한 것을 우리가 매입해서 땅콩공장에 일을 맡긴 다음 팔기 좋

게 껍질을 까서 볶은 땅콩을 받아와서 장사를 했어요. 그런데 세

월이 가고 과일 나무가 다 자라 과수원들이 자리를 잡은 뒤로 땅

콩농사를 더 이상 안 지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전국 각지 전라도,

경기도 이런 지역에서 물건을 가져다가 장사를 하는 거에요. 그

전에는 인근의 촌에서 땅콩을 다 사들이고 장사를 재미나게 했지

요.

남편 옛날에는 전국서 금릉군이 땅콩 소출이 제일 많았어요.

아내 지금은 전라도, 경기도가 많이 나잖아요.

남편 옛날에는 선산. 이런 데서 나는 땅콩이 대단했어요.

나도 식구를 가져야겠다.

남편 내가 이 장사를 시작해야겠단 마음을 먹은 게 28살 때였어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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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십대 중반까지는 까불고 놀았죠. 그러다 28살 되면서 주위

에 친구들을 찾으니까 하나둘 자꾸 없어지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

니까 전부 결혼하면서 장래를 생각한 거에요. 아 이거 나도 아니

다 싶어서 그때부터 장래에 대한 마음을 먹게 됐죠. 집에 들어가

야겠다. 나도 식구를 가져야겠다. 그때가 바로 어머니, 아버지 장

사 그만두려고 폐업을 준비하는 단계였어요.

아내 우리 어머님 아버님이 땅콩장사 하면서 지역에서 인심을 안 잃었

어요. 정말로 사람들한테 잘해주셨어요. 여기 황금동 계신 분들한

테 말하면 아 그 분 하면서 다 알 거야. 우리 아버님.

남편 시내 전역이 거의 다 알아요. 하도 오래되서.

“처음 가게 물려받고 사장님 손으로 문 열었을 때 기억 나시는지요?”

남편 처음 5년 동안은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시고 집안 살림만 맡아서

했지요. 아무래도 두 분 어른이 연로하시다 보니 장사 쪽으로도

일손을 거들게 됐죠. 덕분에 자연스럽게 일을 물려받게 되고 5년

후에는 우리 부부가 직접 장사를 맡아서 하게 됐지요.

아내 땅콩 가게를 제가 하는데 이걸 해서 먹고 살까 싶은 마음에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내가 땅콩가게를 해서 먹고 살 수 있겠나? 이런

생각이 드는 찰나에 희한하게 손님이 오는 거야. 너무 반갑고 좋

은 거에요. 그 당시에 손님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어요. 8개월

동안 문 닫은 땅콩가게. 그런데 신통하게 손님이 와요. 일찍 문을

열었는데도 사람이 오는 거에요. 그 전에 시부모님이 하실 때는

중간에 밥 해서 갖다 드리는 것 뿐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내

가 직접 손님을 받았잖아요. 막 너무나 고마운 거에요. 그 손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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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 그런데 이 손님 가시고 또 와요. 고마운 손님이. 그러면서 며

칠 장사 해보고 그만 안심을 했지요. 이래서 내가 먹고 살겠구나.

굶어죽지는 않겠다. 너무 좋더라고요. 땅콩 되질을 하는데 처음엔

손이 덜덜 떨리더라고요. 첫 손님이 오는데, 막무가내 퍼담았으니

까 되를 봉지에 잘 넣지도 못했어요. 그땐 서툴렀으니까. 그때 그

손님 너무 고마워서, 그때 그 순간을 지금도 내가 잊을 수 없어요.

내가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네. 어느 날은 일찍 일어나서 호

기심에 가게 문을 아주 일찍 열면서, 가게 문을 일찍 열면 손님이

없겠지 싶었는데 의외로 손님이 제법 있었어요. 아유, 정말 그때

생각난다. 되질을 잘 하지도 못했거든요. 처음 손님이라 얼마나

수북하게 땅콩을 드렸는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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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나로 봐서는 모든 게 아버지가 터 닦아 놓은 밑바닥에 있는 거지.

평생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땅콩을 먹고 당뇨가 떨어졌다.

“특히 기억에 남는 손님은 있으신지요?”

아내 예. 있어요. 한 17년 전인가. 양천 사는 분인데. 당뇨가 심하게 와

서 병원에서도 안 되고 한의원에 찾아가도 안 된다고 해서. 한의

원에서 동의보감인가 어디에서 나온다고. 땅콩을 주식으로 생각

하고 먹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분은 가게에 오면 한 말

씩 두 말씩 사 가지고 온 주머니에 땅콩을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

다 꺼내서 자신 모양이지요. 3년을 꼬박 잡숫고 우리 집에 땅콩

사러 와서 하는 얘기가, 고맙습니다. 땅콩을 먹고 당뇨가 떨어졌

다. 합병증까지 다 완치됐다고 하더라고요. 여기 내려와 장사하며

고맙다는 인사 듣기는 그 분한테 처음이었으니까. 얼마나 보람이

있고 내가 기분이 좋았겠어요. 그래서 자부심도 갖게 되고 더 자

신감 있게 살게 되는 계기가 되더라고요. 그 기억이 제일 크게 남

았어요. 그 손님이. 다 낫고 나서도 한 2년은 땅콩을 한 말씩 두

말씩 사 가셨어요.

남편 진짜 우리는 오리지날 국산을 파니까 생걸로 먹을 수 있거든요.

국산은 정말 믿고 파는거니까. 그리고 나도 생각나는 아줌마가 있

어요. 그 분이 위암 수술을 하셨어. 게다가 빼빼 말랐어요. 오실

때마다 항상 땅콩을 세 되씩 사 가지고 가셔서, 제가 궁금해서 물

었지요. 뭐하러 이렇게 많은 땅콩을 사가세요? 땅콩을 삶아서 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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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에 넣어두었다가 한 주먹씩 꺼내 수시로 자신다고 하더라고.

그 일을 계속 반복하다보니 그 분 모습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나중에는 너무너무 보기 좋으시더라고요.

그러더니 그 아줌마도 한 2,3년 잡수다가 완쾌하시고 집에서 농사

까지 짓게 되었다고 말씀을 전해주시더라고요. 당신 덕분에 살았

다면서. 그 아줌마는 아직도 땅콩을 삶아서 수시로 조금씩 잡수신

대요.

“양약, 한약을 이긴 기적의 땅콩이네요. 힘드셨던 적은 없으세요?”

아내 여기서 15년 장사해도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은 적 한 번도 없어

요. 그러니 한 자리에서 이렇게 오래 할 수 있었지요.

남편 뭐든지 힘들다 힘들다, 무조건 힘들다 생각하고 장사를 하면 오래

못 견뎌요. 뭐든지 항상 부지런함을 가지고 세상일을 긍정하면 죽

으란 법은 없더라고요. 한 손님 끊기면 또다른 손님이 오게 되어

있어요. 세상 일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요. 장사하면서 물건 안

속이고, 물건 품질에 신경을 쓰면 손님은 절대로 안 끊기고 찾아

오기 마련입니다. 모든 걸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계속 버티면 점점

형편이 풀리게 되어 있어요. 물론 그 지점까지 도달하는 게 힘들

죠.

결혼해 시댁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어요. 세상에 눈이 저렇게 나쁜 남

자가 있구나. 운전을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제가 사람을 보고 결혼을 한

거지 시력을 보고 결혼을 한 건 아니잖아요. 시력이야 좋고 나쁠 수 있지

만 사람 됨됨이는 시력보다 더 중요한 문제니까. 다른 방법으로 극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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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했어요.

아내 우리 애기 아빠 시력이 지나치게 나빠서 운전을 못 해요. 그런데

이 땅콩 일은 운전할 경우가 아주 많거든요. 솔직히 결혼하기 전

에는 눈이 저 정도로 나쁜 지는 몰랐어요. 결혼해 시댁에 들어와

서야 알게 되었어요. 세상에 눈이 저렇게 나쁜 남자가 있구나. 운

전을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제가 사람을 보고 결혼을 한 거지 시력

을 보고 결혼을 한 건 아니잖아요. 시력이야 좋고 나쁠 수 있지만

사람 됨됨이는 시력보다 더 중요한 문제니까. 다른 방법으로 극복

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 네살바기 딸내미 등에 업고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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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원 가서 직접 운전면허증을 땄어요. 그래서 제가 배달하고 물

건 사오는 일을 하려고 운전대를 잡았지요. 대신에 남편은 가게

운영에 더 몰두한 거에요. 그래도 나는 이 집안에 시집 온 운명을

후회한 적이 없고 언제나 동네에서 좋은 이미지로 일생을 살다 가

신 시부모님을 존경합니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 집이 없으면 김

천에서 좋은 땅콩을 살 수가 없어요. 그 명맥을 이어서 항상 정직

하게 좋은 물건을 구비하고 매일 같이 손님맞이를 합니다.

남편 사실 항상 고마워요 안식구한테. 내가 말은 안 했지만 마음 속으

로 항상 고마운 점은 부모님 모시고 끝까지 같이 살아줬죠, 나 같

은 사람 만나서 애들 예쁘게 잘 키워줬죠, 가게 일까지 도맡아서

다 해줬죠. 난 옆에 헛다리라니까. 그냥 폼만 잡고 있고. 진짜 모

든 공은 우리 안식구의 몫입니다. 앞으로 저의 희망사항은 내 장

사 그만두고 나서라도 뒤에 남은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깨끗이

장사하고 깨끗이 끝냈구나.” 그 얘기 듣는 게 제 바람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자기 집 땅콩을 맛보라며 생땅콩과 볶은

땅콩을 인심 좋게 나눠 담아주셨다. 양이 제법 많아 공짜로 들고 가기에

송구스러웠다. 돌아보면 거푸 인사를 하시는 사장님. 그 모습을 생각하

면 누구나 가슴 속에 이런 말이 벅차오를 것이다. 나도 바르게 살아야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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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옛날순대 (이영화)

매일 아침 구불구불 뜨겁게 익어가는 순대처럼 사연 많은

우리네 인생살이도 구불구불 먼 길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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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장 중앙 통로에는 돼지국밥 골목이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다. 매

일 새벽. 이 ‘국밥 골목’ 한 쪽에 자리잡은 ‘지례순대’ 가게 앞에서 순대의

장인은 그날 그날의 순대를 삶는다. 그가 처음 이곳 황금시장에 터전을

잡으려던 이유는 순대 장사가 아닌 낙지 도매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낙

지 장사는 갯가 음식이 발달하지 않은 이곳 김천의 시장 생태와는 불협

화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매일 일찍 문을 열어도 손님이 없는 장사였다.

하는 수없이 이곳과 어울리는 다른 일을 찾다보니 자연스레 순대 장사를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자기가 의도한 대로 삶이 흘러가

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겸하게 된다. 예기치 않

은 우연으로 필생의 생업을 찾은 셈이다.

점심 손님을 치르고 난 시간에 가게를 찾았다. 마주앉은 그의 얘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집집마다 간혹 돈사가 있어서 집에서 직접 돼지를 키웠어

요. 명절마다 한두 마리씩 돼지를 잡는데, 돼지 선지를 그릇에 받아놓고,

손질한 대창에 밀가루, 부추, 당면을 넣고 순대를 직접 해먹었어요.

오리지널 선지만 넣은 피순대는 경상북도에서도 이곳 밖에 없는 것이죠.

대구서는 보통 명절 제사상에 제일 귀하다 해서 세 가지인 간, 허파, 피

순대를 상에 올렸어요. 지금도 제사에 올린다고 대구에서 김천까지 피순

대 사러들 오시지요.

맨 처음 순대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하던 일 다 망하고

밑천이 있나? 신용이 있나? 방법이 없는 인생으로 전락한 거잖아요. 무

작정 1, 2년 정도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한다는 순대집을 찾아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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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마산, 천안, 서울, 전주. 나 같이 맛집 찾아가서 기술을 요구하는

사람이 한둘이었겠어요. 집집마다 한다는 말이, 순대를 배우겠다면 가르

쳐줄 수 있다. 대신 돈을 내라는 거였어요. 어느 집에선 대놓고 천만 원

을 요구하는 거에요. 그만큼 독자적인 기술이 중요한 세계인 거에요. 인

정으로 읍소한다고 아무한테나 도움을 주는 세계가 아니더라고요. 그래

서 방향을 바꿨지요. 내가 남한테 아쉬운 소리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느니

내가 직접 공부해서 순대를 만들어보자. 그때부터 나는 전국의 유명한

순대를 구입해서 집에 돌아와 혼자 속재료를 분석했어요. 거지가 남의

집 수채구멍 훑어내듯이 처량한 모습이었겠지요. 하여튼 내가 택한 방식

은 순대를 물 속에 다 풀어보는 거였어요. 국물 음식은 특별한 감식안이

필요하지만 건더기 음식은 거의 대부분 물에 씻어보면 재료를 뭐 썼는지

99퍼센트는 답이 나와요. 그렇게 한 군데 두 군데 차근차근 분석을 하다

보니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재료가 정리됐어요. 그 다음 특별히 비법으로

첨가한 재료가 구분이 됐고요. 이제는 길거리 지나다가 순대만 탁 봐도

속에 뭐가 들었는지 답이 척 나와요. 내가 독학으로 순대를 만들 준비를

끝낸 거에요.

내가 어째서 순대를 택하게 됐는지 오늘날 이렇게 순대 장사를 하게 됐

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이왕지사 시작한 거 순대 명인이 될 마음가

짐으로 일하고 있어요. 사람이 한 세상 호령해볼 꿈을 쫓는 것도 중요하

지만 이룰 수 있는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보람된 인생이라고 생

각해요.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고 순대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남들이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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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대는 특색 있는 메뉴가 뭘까 하고 고르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진 피순

대라는 걸 복원할 결심을 했어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순대는 당면과 야

채를 버무린 속을 채운 순대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피순대라는 것은 오

로지 선지 한 가지로만 맛을 내야 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워요. 음식은

재료가 단순하고 만드는 과정이 단순할 수록 아주 어렵거든요. 여차저차

해서 드디어 피순대를 소비자에게 팔 만한 수준으로 만들어 내놓게 됐어

요.

기대에 부풀어서 내놓긴 했는데 먹어본 사람들이 다 그래요. 순대가

뭐 이러냐? 속도 안 채우고. 처음 먹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생기는 거죠.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이 입소문을 내야겠다. 보통 신제품을 만들면 홍

보를 해야 제품이 알려지고 팔리게 되듯이 나 역시 홍보를 좀 해야겠다.

근데 수중에 광고비를 지불할 만한 돈은 없죠. 그래서 내놓은 복안이 순

대를 만들어서 무료로 손님들에게 나눠드려야겠다고 결론짓게 된 거죠.

약 5개월 동안 인근의 집집마다 시작해서 관공서까지 발로 뛰면서 맛을

보였어요. 나는 확신이 있었어요. 광고로 나가는 비용보다 무료로 만들

어서 나눠주는 비용이 더 저렴하다는 걸. 의도적으로 밑지는 장사를 한

거에요. 그렇게 세월이 3년 정도 지나니까 자리가 잡히는 거에요. 입소

문이 나고 어, 그거 맛있대. 맛있대. 그래서 피순대 하면 우리 집이 된 거

에요. 그러면서 13년 정도 이 자리에서 장사를 쭉 해온 거죠.

장사를 시작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점은 음식만 맛있다고 손님을 끌 수

없다. 전통시장의 특성상 위생관념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더 철저히 위생적으로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러면 손님도 좋

아하시고 만드는 저도 내 제품에 신뢰감을 줄 수 있잖아요. 보기에도 더

러운 도마에 순대를 썰어서 검은 비닐 봉지에 뭉텅뭉텅 담아낼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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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깨끗한 도마에 썰어서 깨끗한 용기에 담아서 음식을 내드리면 받는

사람도 기분 좋고, 파는 나도 즐겁죠.

내가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실하게 일해보자는 내 의지

도 있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자리잡기 힘들 었을 거에요. 중앙정부가

전통시장 개선 사업 때 비용을 지원해줬죠. 여러모로 도움이 있었기 때

문에 우리 가게가 이만큼 모양을 갖춘 거에요.

이 얘기는 빼면 안 되겠어요. 중앙 정부에서 전통시장 개선 사업이라

고 해서 집기류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

요. 그 덕을 많이 봤죠. 예전에는 우리 전통시장이 볼품이 없었지. 이제

는 지붕처럼 번듯한 아케이트도 있고 상인회도 생겨나게 됐어요. 환경이

개선된다는 점은 고마운 일이죠. 고마운 만큼 더 열심히 일을 해야겠지

요. 요즘 들어 보람이라면 사람들이 일부러라도 찾아주신단 거에요. 지

역에서 여러 계통에 종사하시는 손님들이 일부러라도 찾아오셔서 피순

대 한 접시 하고 막걸리 한 되 잡숫고 가신단 말이죠. 그 덕분에 음식 장

사하는 상인으로서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지요. 나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음식을 드시러 오시는 거니까 괜히 그 앞에서 읍소할 일

도 없고 나는 내 음식의 맛만 책임지는 겁니다. 한때는 옛날 순대를 좀더

연구해보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어요. 결론은 순대라고 하는 게 더 이

상 연구를 할 수 없는 음식이더라고요.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순대가

떡이 될 순 없어요. 순대는 순대예요. 대창에 각종 속재료를 넣고 익혀

낸 음식이란 말이죠. 순대를 순대처럼 만들지 않고는 순대라고 부를 수

도 없어요. 순대는 순대 자체의 법칙이 있단 말이죠. 퓨전이라고,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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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유행했던 식문화가 있잖아요. 시도해본 적 없는 식재료를 섞어서

남다른 맛을 만들어내는 노력들을 했지만 요즘 들어서 그런 식문화도 시

들해졌더군요. 우리나라 음식은 역시 본래의 맛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게

전통이고 융합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순대는 순대다.

내가 순대 배울 때 다녀보니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요. 이 지역은 김치

를 넣고 저 지역은 시래기를 삶아서 넣고, 나물 종류를 골고루 쓰기도 하

고 뭘 넣어도 순대는 다 되요. 내 생각에 레시피는 별로 중요한 노하우

가 아닌 거 같아. 순대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수분 조절을 잘 하

는 게 포인트입니다. 물기에 따라서 순대의 질감이 확 달라지니까. 물기

가 많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따른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이 비

법입니다. 순대는 예민합니다. 똑같은 야채라도 어떤 날은 수분이 많고

어떤 날은 적을 때가 있어요. 예민하니까. 지금은 10년 넘게 해오다보니

야채만 봐도 뭘 어떻게 해야겠다 딱 계산이 나오죠. 매일 새벽 순대를 삶

는단 말이죠. 그럼 순대를 썰어서 익은 단면을 보는 거야. 순대가 찰지고

맛있게 되는 날은 그것만큼 기분 좋은 날이 없어요. 반대로 순대가 내 마

음에 안 드는 날은 평소보다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죠. 음식 맛을 유지

하는 게 그만큼 어려운 거에요.

그동안 나한테 여러 가지 유혹이 많았어요. 체인점을 내자. 인터넷 판

매를 하자. 그런데 크게 벌인다고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내 나이가 54

살인데 섣불리 도전하기 보다는 좀 소박하더라도 내 일을 무리하지 않고

잘 꾸려나갈 수 있는 상태가 제일 좋다고 판단했어요. 그냥 이대로, 순대

만들어서 손님들 찾아오고 남한테 돈 빌리러 안 다니고 애들 뒷바라지

하고. 그만한 야망이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가게를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에요. 아들도 하고 딸도 하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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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지요.

나는 이곳 황금동에서 계속하고, 자식들은 자기네 뜻대로 어디든 가서

가게를 창업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전통을 이어가는 거라고 봐요. 이 순

대가 우리 집안의 전통이 되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는 게 꿈이에요.

일본에 가 보니까 라멘집인데 상호명은 없고 딱 그 라멘 모형 하나만

밖에 걸어놨어요. 그것도 먼지 들어간다고 유리상자에 딱 넣어놨더라고.

음식모형 보면 가격과 이름까지 딱 나와 있는 거에요. 굉장히 정돈된 느

낌을 받았어요. 우리나라 간판은 규칙이 없고 대동소이 하잖아요. 우리

황금동 전통시장도 라멘집에서 메뉴 고르듯이 아주 쉽게 소비자가 선택

할 수 있는 전통시장이 되야 한다고 봐요. 그러려면 일단 상인들 간에 단

합이 잘 되야 하겠지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완고해진다는데 나는 산에 가서 배웁니다. 올라갈

때는 꼭대기만 바라보고 뒤돌아보지 않고 올라갑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

러왔습니다. 요즘은 정상에 도착하면 어렴풋이 깨닫는 게 있습니다. 산

에 올라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산을 내려올 때 보이는 세상이 더 중요

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손아랫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유연해져야겠

단 다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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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상회 (임상규)

나라 향해 애국심, 고향 위해 애향심.

알타리 무 전문가가 고백하는 김천 토박이의 한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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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황금시장 역사는 반 백 년이에요. 무시무시한 숫자지. 50년. 세

계 어느 나라의 역사도 고개 숙이고 들어갈 만한 숫자잖아. 본래 이곳은

하천 지역이었어요.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가 전에는 도랑이 있고 생활

하수가 흘러내려서 접근을 꺼리는 장소였다고. 그랬던 자리를 어느 날부

터 복개천 공사를 해서 뚝딱뚝딱 건물을 세우고 해쳐모여 하듯이 각각의

점포가 자기 자리를 잡은 거지.

군을 제대하고 내 밥을 벌어먹으려고 곧바로 장사를 시작했어요. 시작

한 뒤로 줄곧 이 고장에서 장사를 해왔지요. 현재 이 자리에서 장사한 건

38년. 저 아래에서 장사한 2년을 합하면 40년. 흘러가는 세월에 강산이

네 번 변했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내가 18살이었던 적에는 시장의 형태

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두어 집이 소규모로 청과물을 팔았어요. 지

금 시장 안에 있는 쉼터 자리가 과일 팔고 야채 팔던 청과상이었어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몇 안 남았을 거에요.

한 25, 6년 전에는 유동인구가 굉장했어요. 벌이도 쏠쏠했고 재미도

짭짤했지. 장사꾼으로서 호시절이었으니까. 보통 하루 매상이 80만 원.

90만 원. 그랬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한산한 편이지. 세월에

는 장사가 없다고.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점차로 매출이 줄어들더니 그

시절의 절반이나 채울까 싶어요. 그것도 우리가 장사를 오래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그 정도 채우는 거지. 사실 이곳은 젊은 사람이 처음 장사를

꾸려나가기에는 힘든 곳이에요.

그는 천천히 말했다. 또한 조용하게 말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

는 보통의 인생을 말과 기억으로 차분하게 이어갔다. 표정에 별 변화가

없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뭔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고향에 계신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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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처럼 안심이 되었다.

돈 1000만 원 벌면 타지로 나가는 데가 김천이에요. 김천 땅에서 돈을

좀 모았다 싶으면 다 빠져나갔다고. 그들이 그 돈을 김천 시내에 투자했

으면 김천 시내가 이렇진 않아요. 훨씬 더 활성화 되었을 거에요. 김천에

서 긁어모은 뭉칫돈을 들고 전부 서울로 가고 대구로 가고 부산으로 가

고, 다 가버렸어요. 왜 그런 지는 모르겠는데 돈만 벌면 다 떠나요. 풍수

가 그런가 인심이 그런가. 돈이랑 김천은 안 어울리는 모양인가. 욕심 있

고 똑똑한 사람들은 길가에 벌인 난전으로도 돈 벌어서 갑부 됐어요. 그

만큼 이곳이 장사가 잘 됐어요. 지금도 황금시장은 다른 시장에 비해 활

성화 되어 있긴 해요. 과거의 부귀영화를 자꾸 말하면 구차하지만 지나

간 날이 아쉬운 건 사실이니까.

역사적으로 이 시장에서 건어물은 내가 제일 먼저 차렸지만 요즘 같은

경우 장사 재미는 야채 쪽이 더 나아요. 7월 8월을 제외하고 봄부터 가

을까지 알타리를 깎으면 하루 평균 100단이 나가요. 내가 손수 깎아요.

황금시장에서 알타리 깎는 남자는 나뿐이야. 내 생각이긴 하지만 열무

같은 것도 김천 시내 전체가 파는 물량이 내가 파는 물량의 절반 밖에 안

될 거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물량을 못 대줘요. 손님들이 선호하는

품목을 한 가지는 구비하고 있는 거지. 그럼 굶진 않는 거야. 그만큼 나

는 내 장사에 신념이 있고 더불어서 신용도 가지고 있다고.

봄으로 열무를 팔고, 김장철에 알타리 팔고. 내 장사는 그 재미야. 서

울서도 손님들이 알고 알타리를 보내달래서 택배로 보내줘요.

예전에는 김천 시민이 다 이곳에서 장을 봐 갔는데 지금은 동네 마트

에서 장을 보니까 아쉬운 거지요. 이런 추세가 전국적인 붐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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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인 유행이기도 하니까 나 개인이 아무리 하소연을 한들 별로 달라

진 건 없겠지만 전통시장의 명맥을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잘못된 것을 건

의하고 관계자들한테 요구를 해야되지 않겠어요. 그런 애정이 있었기 때

문에 황금시장이 다른 시장에 비해 살아있는 거잖아요.

앞으로 시장이 현상태를 유지하면서 발전을 하려면 작은 것부터 실천

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하면, 손님들한테 불친절하면 안 돼요. 손님

이 내 물건을 안 사간다고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에요. 손님이 왕이란 말

은 퇴색이 됐지만 그렇다고 손님이 내 원수도 아니잖아. 안 그래요? 상

인회에서 힘 쓰고 있지만 상인 인성 교육이 별 거요? 손님이 물건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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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원하면 바꿔주고 내가 못 먹는 걸 돈 받고 안 팔겠다는 양심만 있으면

되는 거요.

아쉬운 건 있지. 나도 전국을 여행해본 사람인데 우리 시장에도 지역

특산품을 사갈 수 있는 특정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장소가 있으

면 지역에서 포도 날 때 자두 날 때 한 군데 모아놓고 북적북적 왁자지껄

팔면 얼마나 장관이겠어요. 그러면 먼저 각 마을의 이장들과 대화를 해

야겠지요. 상인이 아니더라도 지역민이 이 시장 안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공간을 내줘야 해요. 그러면 당신들도 살고 우리들도 사는 거니

까요.

언젠가 나도 은퇴를 하고 이 가게 자리에 누군가 다른 상인이 들어오

겠지요. 적어도 망해가는 시장을 후대에 물려줄 순 없잖아요. 앞선 선배

가 후배들에게 욕을 안 얻어먹도록 기반을 정리해주고 나가야 돼요. 그

런 일엔 나도 충분히 발 벗고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을 말로 하는 겁니다.

내가 그건 자부를 해요. 후배들 와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놓

는 솔선수범 해야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한평생 장사해서 돈 벌었으니

타 도시로 휙 나가면서, 남은 너희가 한 번 해봐라. 이런 식으로 해서 나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언제나 은퇴 이후를 생각해요. 내가 있는 이 점포를 내가 관두고,

다른 상인에게 넘겨줄 때 나는 이 가게의 취급품목을 그대로 넘겨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신용은 고스란히 남겨서 전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내가

40년 동안 장사하며 배운 노하우를 다 전해주고 싶은 거에요.

황금시장 사람들 참 깐깐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딜 가나 매한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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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돌뱅이가 어리숙하면 먹고 살 수 없으니까. 반면에 남다른 정도 있다

고.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우리 황금시장이 역사를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상인들 간의 화합이 중요한 이유죠. 야생마를 경주마로 길들일 때 채찍

만 휘두르면 안 되요. 가끔 당근도 주면서. 서로 친목을 이어가야 앞날이

있는 거에요. 나는 희망이 있다고 봐요. 웬 줄 알아요? 여기 들어와 장사

해서 돈 못 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돈 다 벌었어요. 그러니 글자 그대

로 황금시장이에요.

역사적으로 김천은 이조 때부터 전국의 5대 시장 중 하나로 들어갔어

요. 뭐 어쩌고 저쩌고 입방아를 찧어도 전국에서 김천 5일장은 따라가지

를 못했어요. 지리적으로 교통 요충지니까. 김천을 안 거치면 서울에 물

건이 못 들어갔어요. 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품목이 김천을 안 거치

면 전국으로 뻗어나가질 못했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컴퓨터 있지요, 스

마트폰 있지요. 택배 기사들 있어요.

나는 참 아쉬워. 현재 김천에도 부자들이 있지만 김천을 위해서 돈을

쏟아부었으면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도시가 됐을 텐데. 김천서 돈 벌어

서울 가서 갑부된 사람들 가끔 만나요. 우리가 봤을 땐 그 사람들이 쓸쓸

하다 이거야. 고향을 등지고 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게 나는 별로 안

부러워요. 나는 어찌됐던 간에 고향에 있는 후배들이 황금시장에서 계속

장사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자식 공부는 서울서

시키더라도 공부를 마친 자식들이 고향에 돌아와 뜻을 펼칠 수 있게끔

살기에 윤택한 도시를 만들어주겠단 각오를 모든 상인들이 한 마음으로

해야 돼요. 그게 늙은 나의 바람이고 희망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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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으로 보면 답답한 게 내가 이 시장 상인 세대의 마지막 탑승객이

아닌가 할 때가 있어요. 김천이 혁신도시를 건설하고 있어요. 그러면 자

연적으로 구도심인 이곳 인구보다 거기 있는 인구들이 많을 거 아니에

요? 그러면 다들 짐 싸들고 거기 안 가겠나 싶어요. 그러니 우리가 사람

들이 이쪽으로 찾아오도록 스스로 노력을 해야 되요. 설령 시민들이 그

동네로 이사는 가더라도 장보기는 이곳으로 올 수 있게 해야 된다니까

요. 그걸 가능하도록 만드는 게 우리 상인들 몫이라 이거죠. 장날 하루만

이라도 손님들을 즐겁게 하고 웃으며 물건을 사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

는 게 우리 임무에요. 나는 여름에 항상 냉커피를 타 놔요. 우리집 물건

사는 손님이 아니라더라도 다 드실 수 있어요. 왜? 내가 물건을 팔기 위

해 커피를 드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이 시장에 오래 머물 수 있게

하는 게 내 임무라서 그러는 거에요. 거창한 게 아니라니까. 겨울에는 항

상 물 주전자가 펄펄 끓어요. 6가지 7가지 약재를 넣어 끓여요. 그렇게

드리면 기분이 좋아서 우리 집에서도 물건을 사고 이 시장에서도 사갈

수 있는 거에요. 사람이 작은 데서 감동을 해요. 농촌사람들은 특히 더

그래요. 나는 그런 것에 보람을 느끼고 서로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거

에요.

그러니까 우리 상인들이 합심을 해서 상인회를 밀어줘야 돼요. 어려운

점포 있으면 서로 어려움 없도록 해주고. 또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서로

지혜를 나누고. 상인 간에 반목이 생기면 서로 합의점을 찾아야 해요. 그

런 이해와 다툼을 중재하는 곳이 상인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재미난 얘기 해줄까요? 내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손님을 보면요. 이

물건이 친정에 가는가. 시집에 가는가. 다 알아요. 친정 가는 건 많이 사

요. 시집 가는 건 적게 사요. 이게 웃을 일이 아니에요. 내가 통계를 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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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열 사람의 젊은이가 들어오면 세 사람은 시집에 가는 걸 많이 사가려

고 하고. 일곱은 친정에 가는 걸 많이 사요. 내가 물어요. 아줌마, 이거

친정 가는 물건이죠? 예. 이건 시집에 가는 물건이죠? 예. 그러면 나는

그 자리에서 대꼬챙이가 돼서 한 마디 해요. 너도 자식 낳아 며느리를 봤

을 때 며느리가 그런 식으로 어른을 생각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 그

러면 아저씨는 장사나 하지 그런 걸 따지냐고 도로 따져물어요. 물론 그

럴 수 있어요. 그럼 나는 더 차분하게 말을 해요. 당신이 분명 내 말을 후

회할 날이 올 거다. 말을 듣기도 전에 딱 돌아서 가요. 나는 속으로 저 손

님은 다시는 내 가게 안 오겠구나. 하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내 가게에 물건 사러 와요. 자기가 느꼈거든.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내 말이 맞거든. 그때부터는 시댁이나 친정이나 똑같이 물건을

사는 거야. 그래서 내가 거기서 보람을 또 하나 느껴요. 그럼 마음이 참

좋죠. 내가 누구 말 마따나 백 원짜리 십 원짜리 받아가며 장사를 하지만

그때는 기분이 억만장자보다 더 흐뭇한 거에요. 괴로우나 즐거우나 장사

를 여지껏 40년 이어온 관록이 안 죽었단 걸 느끼게 되서요.

사람이 늙는다 하는 건 잠시 잠깐이에요. 그러니 인과응보 따지지 말

고 항상 베푼다 생각하면 나에게 덕이 와요. 그러면 나는 항상 성공해요.

한 고장에서 40년 희로애락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에는 일하는 사람의 행

복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심 없는 배려와 장사하는 사람의 자부

심이 조화롭게 녹아 있었다. 그의 깐깐한 눈매에는 더없는 신뢰가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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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세탁소 (윤원식)

세상에 태어난 자리에서 철 들고 어른 되어

세상에 태어난 그 자리로 돌아와

아비의 생업을 물려받아 2대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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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세탁소는 최근 리모델링을 했다. 어머니에게 재봉일을 배워 웬만한

수선은 직접 알아서 하는 기술자다. 본래 꼼꼼한 성격 탓에 한 벌을 세탁

하더라도 장난치지 않고 진심으로 일한다는 그는 현재 가게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네, 바로 이 자리입니다. 형제 중에 셋째로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이랑 누나는 다른 곳에서 태어났구요. 밑으로 남동생이 있고, 여동생

하나는 삼촌 딸이었는데 삼촌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가 키웠

습니다. 5형제인 셈이죠.

보시는 바와 같이 옛날 살던 집을 수리해 고쳤습니다만 집 구조는 크

게 손대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여전히 옛날식이죠. 그런 대로 살아오

면서 정이 들어 손을 못 대겠더군요.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성장하면서 고등 교육과정까지 마치고 대학은

대구에서 영남대 전자과를 마쳤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전자 계통은 취

직이 어려워 살기가 각박했는데 놀면 뭐하나 싶어 아버지 밑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일이 세탁이었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단 말은 책 속에나 있는 말이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세탁일은 약간 천대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어요. 한 30 여 년 전까지

만 해도. 그래서 아버지는 이 일을 배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나 역시 그

때는 성의가 없었어요. 단지 일을 거든다. 세상이 아직 나에게 때를 안

주고 있으니 때를 기다려보자는 심정으로 시간을 떼우겠다는 어리석음

도 있었을 거에요. 아버지가 일을 나오시면 기계 작동하는 법을 배우고,

드라이클리닝 하는 걸 도와드리며 차차 일을 익혔습니다. 옛날에 쓰던

구식 다리미가 생각이 나네요. 다리미 속에 조개탄을 넣고 태워서 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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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열하는 방식의 다리미가 있었지요. 지금은 민속박물관에 가야 있겠

지만 우리 어릴 땐 그게 없으면 옷을 못 다렸어요. 어릴 때부터 봐온 도

구였지만 사용하기 아주 불편하고 연탄가스 냄새도 굉장했어요. 그 당시

에는 그 냄새가 참 싫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것도 아름다운 추억

이에요. 지금이랑 비교해보면 옛날에는 어느 분야할 것 없이 다 일하는

환경이 열악했죠. 그 당시도 그렇지만 현재도 세탁일을 배우려 하는 사

람이 별로 없어요. 지금은 완전한 3D업종 군에 들어가버린 겁니다. 객관

적으로 소득에 비해서 일의 양이 많다보니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

지요.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자기 마음에 드는 일이 없다고 좌절부터 하는 젊은 사람들의 그런 비관

적 태도는 이해가 가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어요. 처음부터 쉬운

일은 없고 몸이 불편한 일이면 마음은 편할 수 있고 마음이 불편하면 상

대적으로 몸은 덜 불편하다 뿐이지 세상천지에 자기 마음에 꼭 맞는 직

업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불편함 속에서 보람을 얻고 오래도록 참고 견

디고나면 그 사람이 바로 이 사회가 좋아하고 우러러보는 전문가 아니겠

어요?

아들이 대학 학위를 받고도 집에서 놀고 있으니 당시 아버지 심정은

어땠겠어요. 그러니까 아버지 입장에선 후진양성이라 할 수는 없고, 자

식이 딱하니까 얼마간 데리고 있자고 생각하신 거겠지요. 처음에는 어깨

너머로 어머니 틀일 하는 걸 배웠어요. 경상도 말로 재봉질을 틀일이라

고 합니다. 사투리지요.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서 재봉일을 하셨거든요.

어머님이 눈이 노안이라 세밀한 작업은 제가 맡아서 하게 된 거죠.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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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이가 27살이었어요. 당시 상황은 암울했죠. 우리가 흔히 아는 번듯

한 직업도 아니었으니 장가 가기도 힘들었어요. 정말로 웃긴 건 세상에

일자리는 별로 없는데 일은 가려서 하라는 세상 풍토가 있었단 거에요.

직업에 귀천은 없다면서 양반 상놈을 그런 식으로 가린 거죠. 직업은 몇

가지 안 되는 시대에 직업으로 인정해주는 일은 몇 가지 안 되니까. 저는

그게 바로 우리 정신 문화에 뿌리박힌 유교 정신의 병폐라고 봐요.

묵묵히 일을 돕다가 마침 중매가 들어와 선을 본 다음 결혼을 했어요.

그 과정에도 내 개인적 거짓말이 섞여 있었어요. 그렇게 안 하면 여자가

시집을 안 올 거 같으니까, 미안하지만 속임수를 쓴 거에요.

결혼해서 아내가 들어와 보니 집안 환경이 열악하거든요. 말로 들었던

모습과 현실에 괴리가 있으니까 결혼 초기에는 힘들었어요. 지금에야 웃

으면서 떠올릴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심각했어요.

이 지면을 빌어서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합니다.

미안해. 여보, 전보다 더 사랑합니다.

내가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일단은 아버지가

혼자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워 아들로서 돕고 싶었고, 어머니도

같이 계시니, 월급쟁이로 살아갈 것인가? 벌이는 덜하더라도 아버지를

돕고 살 것인가? 이 두 가지 갈등을 하면서 오늘 이 날까지 지나온 거 같

아요. 이제는 어느 정도 일하는 사람의 신념도 생겼다고 봐야겠지요.

이 일을 혼자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즘에는 일을 가르쳐볼 생각

이 있지만 이 일을 배우겠단 사람이 안 나타나요. 그래도 저는 묵묵히 버

티면서 자연적으로 자가 경영을 하게 됐는데, 내가 이 일을 완전히 이어

받은 건 20년도 채 안 됐어요.

한 번씩 생각나는 게 있어요.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시면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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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한 번 해 봐라 하시는 겁니다. 다리미를 잡아보라고 권하시는 거에요.

처음 다리미를 잡는데 손에 익을 때까지 힘들더라고요. 아버지의 방식을

토대로 제 방식대로 익히려 하니까 1년 가까이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요즘 들어 세탁소 업계에 장인정신이란 말이 돌고 있나 보던데 그렇다

고 크게 나아진 건 없어요. IMF 때 보다 더 못해요. 세상이 갈수록 세탁

소에 맡길 필요 없이 집에서 편히 세탁할 수 있는 종류로 옷이 변화하고

있어요. 세탁소 올 필요가 없지요. 속된 말로 젊은 사람들이야 옷을 많이

갈아입고 멋을 내려고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멋 낼 필요도 덜 느끼고,

그러니 옷 한 벌로 한 계절을 지나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 무

렵은 일이 많아요. 집에서 세탁할 수 없는 종류가 아무래도 많으니까. 첫

추위 오기 전에 바쁘고 추위가 물러갈 적에 바쁘고 시기적으로 두 시즌

이 세탁소 일 년 매출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지요.

옷이 달라지면 세탁기법도 달라지고 쓰이는 기름도 달라지는데 김천

은 대도시만큼 따라가질 못합니다.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니에요. 56살인

데. 앞으로 10년 정도 버티면 내 아들 대에선 어찌될 지 모르겠어요. 2대

까지는 버티지만 2대라고 하는 게 정확한 매듭은 아니죠. 어느 직업이든

그렇잖아요.

내가 하는 일이 엔지니어는 아니지만 기술을 통해 일을 하고 기술을

대가로 돈을 받는 영업행위 아닙니까. 나는 쭉 자부심을 느끼고 생활하

거든요. 그런 면에서 나는 좀더 정성 들여 일을 하고 저희 집에 만들어

둔 원칙에 따라 타 세탁소와 다른 가격을 받지요. 그러면 어떤 분은 비싸

다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아, 이거 마음에 든다 하시는 분들도 있죠.

차이가 있습니다. 동종의 세탁소라 하더라도 똑같이 가격이 동일한 게

아니고. 어떤 집은 양복 한 벌에 6천 원 받는 분이 있고, 어떤 집은 7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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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8천 원 받는 게 있어요. 기술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은 내 책

임이고 그에 걸맞는 돈을 받아야 나도 보람있고 일도 신뢰할 수 있는 거

에요. 다름질 같은 경우 저는 다른 집과 비교해서 두 배의 노력과 시간을

투입합니다. 전문적인 이야기를 여기 다 할 수 없고 제가 돈을 조금 더

받더라도 손님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게 제 기술과 제 노동력

이 가진 경쟁력이겠지요.

소규모 점포를 운영하며 수입이 넉넉하지 못한 관계로 윤택한 생활은 기

대할 수 없지만 소신껏 살아왔어요. 군에 입대한 아들의 제대 날짜가 얼

마 남지 않았어요. 돈 많은 아버지도 좋지만 부지런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황금시장이 문화관광형 전통시장으로 탈바꿈한다 해

서 기대가 큽니다.

방금 옷 찾아가신 손님 같은 경우도 다림질은 보통 5천원 받는데 나

는 더 꼼꼼하게 페인트 묻은 부분까지 손질해서 정성껏 닦아주고 2천원

더 받거든요. 내가 부가가치를 더 창출하는 거지. 그러면 손님은 제 가게

에 대한 이미지가 더 좋아지는 셈이죠. 2천원 더 받았지만 손님이 이거

깨끗하다고 말씀하시죠. 당연히 일일이 손으로 다 약칠해서 닦아낸 거니

더 깔끔한 거에요. 그 2천원의 부가가치를 내가 스스로 얻은 거에요. 듣

기에 푼돈일 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소중한 이익이에요. 손님이 왜 이리

비싸. 그러면 내가 이러이러해서 뺐습니다. 7천원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

리면 어지간한 손님이 아니고선 거부감 없이 지불을 합니다. 수고를 더

한 만큼 더 받는 게 제 원칙이란 겁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어렸을 때 황금시장 들어가는 입구 쪽에 조그만한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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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가 있었고 실도랑이 흘렀어요. 그때에 비하면 참 격세지감이죠. 하

지만 저도 상인회 회원으로서 의견을 말하자면 아직도 낙후되어 있어요.

하나의 전통시장이라는 것은 전통성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고

도의 선진화, 전문화 과정 중인데 전통시장은 전통이란 말에 얽매여서

상인들 스스로 그동안 해온 일의 틀을 못 깨는 버릇이 있다고 해야 할까

요. 남의 말을 수용하고 자기를 돌아봐야 황금시장 전체도 영세성을 벗

어나서 살아나갈 방도가 생길 텐데 말이죠. 아직은 시장이 위기라는 생

각이 절실하지 않은 걸 수도 있어요. 우선은 시장이 깔끔한 이미지였으

면 좋겠어요. 한 사람이 가게에 방문하면 아, 다시 찾고 싶다. 이런 생각

이 들어야 하는데, 내가 세탁소를 이번에 새롭게 수리한 이유도 그런 목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손님들도 더러우면 안 갑니다. 내가 내 가

게 하는데 네가 무슨 간섭이냐? 독불장군 식의 장사는 이제 미래가 불투

명합니다. 전국적으로 전통시장이 다 어렵다고 하는데 이곳 황금시장 만

큼은 그런 일이 생겨선 안 되잖아요. 물론 좋아진 것도 있어요. 유동인구

가 줄었다곤 하지만 사람이 계속 몰리는 동네니까요. 밤이 되면 김천시

내에서 이쪽 황금시장 일대가 제일 밝다고들 하니까요.

내가 상인회 회원으로서 김천 지역민으로서, 세탁인의 입장에서 양심껏

일하고 고객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면 장사가 크게 번성

은 못한다 하더라도 차후에는 말이죠. 내가 그때 좀 더 잘할 걸. 이런 후

회는 안 할 거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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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반점 (이동철)

어려서 한학을 배워 익혔으며 장성하여

진돗개 전문가가 된, 언제나 책 읽는 주방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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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장사를 한 건 3년입니다. 우리 집사람이랑 결혼과 동시에

영업 경력이 시작됐으니까. 정확히 30년이네요. 여기서 서쪽으로 500m

가면 동산반점이라고 있었어요. 황금동 파출소 앞에서 한 25년 하고. 통

닭집을 한 2년 하기도 했고 추어탕집도 하다가 신통찮아서 여기 터를 삼

은 지 3년 된 거요. 태어나길 김천 모암동에서 태어났고, 12살에 이사 왔

으니 45년 됐네요. 이 황금동에서 산 지가.

진돗개 애호가로 사육장을 운영하며 한국애견연맹의 김천지역 지부장과

경상북도 지부장의 독특한 이력을 가지신 사장님

나는 개를 좋아해요. 진돗개 사육을 대규모로 하고 있지요. 한국애견

연맹이라고 있어요. 내가 김천 지역 지부장하고 진돗개 경상북도 지부장

을 겸직하고 있어요. 데리고 있는 진돗개가 지금 40마리 정도 되요.

사육장은 여기서 차로 3분 거리에 있죠. 국제도그쇼라는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애견 축제가 있어요. 지금은 한국에서도 국제전람회를 한 해

에 여덟 차례 여는데, 여덟 번 중에서 세 번 이상 우승하면 한국 챔피언

타이틀이 주어져요. 국내 챔피언은 1년 안에 획득이 가능해요. 대신 월

드챔피언은 조건이 달라요. 국제애견전람회에서 3년에 걸쳐 3번 우승해

야 출전 자격이 주어져요. 한 해에 3번이 아닌 3년에 걸쳐서 세 번. 굉

장히 까다롭죠. 그렇게 하면 월드챔피언이라고 미국이나 영국에서 개최

하는 도그쇼 출전자격이 주어지는 거에요. 또 힘든 게 뭐냐하면 국제전

람회를 개최하는 각국이 각각의 심사위원을 파견하는데 같은 심사위원

이 한 해 몇 번 안 와요. 늘 심사위원단이 바뀌어요. 전혀 다른 심사위원

으로부터 세 번 상을 받아야 월드챔피언이라는 자격이 주어지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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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받기 무척 힘들겠죠.

저기 붙은 포스터를 보세요. 개 종류가 다양하잖아요. 종류가 다양한

만큼 타이틀도 다양해요. 크게 반려견, 사냥견, 사역견, 이런 식으로 분

류를 해요. 그게 1그룹에서 14그룹까지가 있는데 예를 들어 진돗개 같은

경우는 국제 스피츠 5그룹에 들어가 있어요. 5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견

종이 주로 아시아 계통이에요. 주로 일본 개들, 또 중국의 차오차오, 시

베리안 허스키, 말라뮤트 그런 개들이 다 스피츠 종에 들어가요. 한국 개

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에도 고유견들이 많이 있어요. 제주 가면 제주개가 있고, 영

주 가면 영주 불개가 있고, 경주 가면 경주 동경이라고 있어요. 동경이라

고 이름 붙게 된 배경이 있는데, 신라가 멸망하고 후삼국으로 있다가 왕

건이 고려로 통일 시켰잖아요. 그때 평양은 서경이라고 부르고 경주는

동경이라고 불렀단 말이죠. 그러니까 경주가 동경이니 그 지역 개를 동

경이라고 불렀어요. 사투리로 댕견. 동경이 개 특징이 좀 유별나요. 선천

전으로 꼬리가 아예 없어요. 진돗개보다 체구는 더 커요. 지금 경주 자체

에서 그 개를 이용해 지역 문화제를 만들었어요. 경주시에서 지원사업을

시작하더라고요.

영주개는 불개라고 불러요. 털 색깔이 대체적으로 붉은 빛이 나고, 눈

동자도 진한 갈색. 그런 붉은 계통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서 불개라고

하고. 제주개나 영주불개나 진돗개랑 생긴 게 거의 흡사해요. 그런데 진

돗개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못했어요. 영주에 불개가 50여 마리 사육

되고 있다 하던데 그런 상태로는 근친교배가 많을 거에요. 자꾸 퇴화될

거라고.

개를 키운 지는 15년 째에요. 15년 전에 개판으로 뛰어든 거죠. 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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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이 마력이 있어요. 한 번 심취하면 못 빠져나가요. 벗어나질 못해요.

욕심이 생겨서. 사람도 미스코리아가 있듯이 개들의 세계에도 미스코리

아 감이 따로 있어요. 나 같은 사람들은 미스코리아 개를 보려고 용을 쓰

는 거란 말이지. 개가 한 해에 새끼를 가지는 시기가 봄철 가을철 두 번

이에요. 내가 데리고 있는 개들이 한 해 자견을 한 30마리 정도 생산을

하는데 개에 대한 조예가 없는 사람들은 진돗개라면 다 좋아보이거든.

나는 전문가니까 장점보다는 단점이 먼저 들어와요, 골라내면 30마리 중

한 마리도 못 건질 때가 있어요. 내 눈에 안 차는데 도그쇼에 나가 본들

순위에 들 수가 없지. 가만있자, 식당 인터뷰하러 왔는데 개 이야기만 하

고 있네.

요식업의 특성상 지역 경기를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경기 좋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김천은 도농복합형 지역인데다가 생산

시설이 별로 없기 때문에 농촌 주민들 덕을 봐야 경제가 살아나는 곳이

에요. 공단도 소규모 공단 밖에 없으니 지역 경제에 큰 영향력이 없다고.

황금시장이 전통시장이지만, 보통 지례 6개면에서 장보러 나오는 사람

들 보면 거의 70, 80대 노인들입니다.

제가 황금시장 상인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어요. 농촌이 걱정되는 이

유는 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 집에 주로 오는 고객들도 노년

층이란 말이에요. 앞으로 5년, 10년 후를 상상해 보세요. 농촌 인구가

노령화를 이기지 못하고 있어요. 곧 황금시장에 위기가 온다는 거죠. 강

준규 상인회장이나 나나 수석부회장이나 사무국장 같은 간부들이 국회

의사당, 도의회로 쫓아다니면서 신발이 다 닳을 지경이 되면서까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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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관광형 시장 선정되게 해달라고 애썼어요. 문화관광형 사업이 잘 되길

바래요. 역사적으로 황금시장은 지례 6개면을 보고 형성된 시장이에요.

조선시대 전국 5대 시장으로 들어갔단 말이죠. 김천시 전체가 옛날엔 시

장이었다고. 오늘날 명목상 남아있는 것이 감호시장, 평화시장, 용두시

장, 황금시장, 부곡시장. 그런데 그야말로 명맥 유지를 하고 있는 것은 2

개 시장 밖에 없어요. 황금시장하고 김천역 앞에 있는 평화시장. 정말로

제대로 된 재래시장은 감호시장이었어요. 대구 가는 길에 있는 감호시장

이 소위 아랫장터라고 불렸죠. 그 당시에는요. 소방서. 경찰서. 은행.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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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거기 몰려있었어요. 그만큼 대단했었어요. 지금은 다 없어져 버렸어.

때마다 제사 지내고 조상 모시는 문화 자체가 쇠퇴했고, 옛날에는 손으

로 짠 화문석이 가정마다 보통으로 깔려 있었어요. 온돌방에. 지금은 전

부 나일롱 장판, 전기장판 이런 거잖아요. 화문석 아랫장터 하면 우리 친

구들도 몇몇 집은 가게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김천 시 자체

가 자꾸 쇠퇴하니까. 특히 감호시장은 김천이 전국 5대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 대표성을 갖고 있었는데 안타까워요. 우리 황금시장은 그에 비

하면 소규모죠. 대로변을 포함해서 160여 점포를 유지하고 있는 게 기적

적으로 느껴진다니까요.

우리가 노력해서 문화관광형시장 사업을 따오긴 했는데 문제는 농촌

인구가 점점 감소할 거란 말이죠. 대도시 사람들이 귀농해온다는 보장도

없고. 이 지역에서라도 젊은 사람이 온다는 보장이 없어요. 혁신도시에

신시가지가 들어서면 여기는 구시가지니 공동화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

다고요. 혁신도시에 당장 아파트 몇 채가 들어섰는데 내 주위 사람들도

청약해서 들어간단 말이에요. 지금 김천인구가 15만이 안 되요. 전에 시

장님께서 설명할 때 정확하게 13만 8천 여명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당

장 인구 증가는 바랄 수 없더라도 더 이상의 인구 감소는 우리 상인들 입

장에서나 지역민 입장에서나 서로 안 좋은 일이라고. 그렇잖아요? KTX

열차가 서는 곳인데 인구가 자꾸 줄어드는 것도 문제 중의 문제 아니겠

어요?

문화관광형시장 사업을 따냈는데 예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우

리 황금시장이 3년에 걸쳐서 지원 받은 금액이 20억 원이에요. 한 편으

로는 이 돈으로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을 수

도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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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금액이긴 합니다만 어찌됐든 정해진 금액을 시장 발전의 용도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도 사업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스무 살 때 중화요리 주방장 하기 싫어서 서울 영등포에 있는 봉재

공장에 취직하려고 차비만 달랑 들고 상경했지요. 찾아간 회사 사장님의

신원보증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건방진 선배 재봉사 보기 싫어 3일 만에

관두고 서울 사는 친구에게 돈 700원을 얻어 김천 행 비둘기호 열차표를

샀어요. 지나고 보니 천직인지 아닌 지는 몰라도 다시 주방장 생활로 돌

아와 있더라고요.

흔한 말로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정신차리고

산 거에요. 한 5, 6년 혀가 빠지게 남의 집 주방장 생활 하다 우리 마누

라 만나 아이 셋 낳고, 개 키우는 농장도 있고, 집도 있고, 이만하면 부자

된 거죠.

세상에는 소울푸드라는 말이 있잖아요? 자장면하면 거의 모든 사람한

테 추억의 음식이에요. 공교롭게 나 역시도 자장면이 소울푸드요. 내가

여섯 살 무렵에 서당 공부를 했어요. 한학을 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동

네 훈장이셨어요. 초등학교 1학년쯤 됐나. 서당공부를 하다가 아버지한

테 죽도록 맞았어요. 뭘 잘못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잘못은 했으니

맞았겠죠. 대단한 잘못은 아니겠지만서도. 그래도 아버지가 날 위로한답

시고 내 손을 잡고 읍내 나가서 처음 사준 게 자장면이에요. 옛날 아랫장

터에 태평양반점이라고 있었어요. 거기서 자장면을 사줬는데 어쩜 그렇

게 맛있는지. 이건 뭐 별천지의 음식이라. 집에서는 항상 된장국에 밥만

먹다가 난생 처음 자장면이란 것을 먹어보니 말도 못하게 향긋하고 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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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 달라붙는데. 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먹으면서 속으로

나도 어른 되면 중국집 해야지. 정말 그랬어요. 내가 중국집을 하게 된

계기도, 어릴 때 그 염원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거에요. 처음 먹어본 자장

면 맛에 반해서 나중에 크면 꼭 중국집 해야지 그랬단 말야. 그 당시 김

천 시내에는 한국 사람이 하는 중국집은 거의 없었어요. 열 집 중에 한

집 빼고는 전부 중국사람이었어요. 지금 이 집도 중국사람이 건물주야.

영업을 하다가 나한테 넘기고 건강이 나빠져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요.

어려서 서당 공부를 하다보니까 문자에 익숙해서인지 몰라도 나는 글

이해가 빨라요. 첫째 글 쓰는 걸 좋아해요. 우리나라 말이 어차피 한자

용어로 되어 있잖아요. 내가 나이별로 시대별로 연도별로 자서전을 써보

려고 시도를 계속하고 있어요. 가게에도 책이 많지만 집에 가도 책이 많

습니다. 내 주변에는 항상 손 닿는 곳에 책이 있습니다. 결혼할 적에 내

살림은 책 보따리 밖에 없었어요. 이래저래 모은 책을 태풍 루사 때 다

내버렸지. 책 천 권을.

내가 왜 독서를 열심히 했느냐면 중국집 주방장들 다 농땡이 꼴통들이

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요리사들은 다 꼴통들이라고 싸잡아 비

판했다고. 우리 세대를 어른들 세대가 가혹하게 평가한 거에요. 그때 뭐

사람 취급이나 했는 줄 알아요. 철가방 들고 다니면 철가방. 어이 바우

야, 이러고. 이름도 없어요. 바우야 꼬마야 이렇게 부르잖아. 주인이 이

군아, 이렇게 불러도 손님들이 꼬마야 이래요. 이름도 없어. 나이 있는

사람은 점잖게 부른다고 바우야.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도 비하하

는 말 있잖아요. 짱깨. 누가 짱깨 소리 하면 나한테 혼납니다. 지금도요.

젊은 사람들이 짱깨 먹자 이러면. 야. 너 짱깨가 어떤 용어인지 알고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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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대번 그 자리에서 막 나무라죠. 짱깨는 사람 비하할 때 쓰는 용어야.

앞으로 그런 용어 쓰지마. 그러면 젊은 아이들도 어른 말씀 새겨듣는 아

이들이면, 아 죄송합니다. 무심코 그런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사과

를 하죠. 여러분도 절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정말 사람 비하하는 소리

에요.

지금 나름대로 160여 개 점포 사장들이 전부 개인 사업하는 사장 아

닙니까. 상인회의 제안은 결국 시장 전체의 발전과 함께 시장 상인 구성

원 모두가 다 잘 되자고 하는 노력의 출발점입니다. 우리 상인들이 보다

열린 마음으로 상인회를 지지하고 힘을 보태주신다면 안 될 일도 다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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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지 않겠어요? 황금시장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상인

들도 교육이 제대로 되야 되요. 상인회에서 여러 교육 프로그램으로 상

인 교육을 실시 중입니다. 내가 제 2 기 상인대학 졸업생인데 어느 교육

장이든 가서 들어보면 배울 점들이 참 많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주머니

에 항상 필기도구를 가지고 다녀요.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공부를 함께 하

다 보면 그동안 안 되던 화합도 저절로 되는 변화가 생기겠지요. 그러니

우리 상인들도 매사에 원만하고 긍정하는 마음으로 상인회를 지지해주

면 시장 전체의 이익이란 면에서 좀더 나은 가치를 찾아낼 수 있지 않겠

어요.

우리 황금시장 자체가 발전하려면 요점은 간단합니다. 내 가게 장사

만 잘 되길 바랄 게 아니라 공통적으로 발전하길 바라야 된다 이 얘기란

말입니다. 그럼 시장 전체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으로 올라갈 거란 말이

지. 그런데 당장 나한테 어떤 이익이 안 돌아 온다고 해서 회피하고 시간

을 무마하려고만 한다면 우리 황금시장도 결국 도태되는 겁니다. 내년도

에도 황금시장에 상인대학이 개설될 지 모르겠지만 상인대학이 개설되

어 지금까지 상인 교육을 받지 않았던 상인들이 나가서 교육을 체험하셨

으면 좋겠어요. 좋은 말로 어떻게 하면 가게가 더 발전할 것인지, 시장이

어떻게 하면 더 발전할 것인지 좋은 이야기를 해 주는데 상인들도 적극

적으로 변해야 되요. 동참해야 합니다.

공공의 가치에 대해 손에 와닿는 말로 차분한 설명을 잇던 사장님.

자장면 한 그릇 먹고 가라고 거듭 권유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다.

자기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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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떡방앗간 (손권만)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지만

곡식을 찧고 고추를 빻는 방앗간은

삶의 한 켠에서 언제나 오롯이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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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명절을 앞두고 떡을 하려는 사람들이 방앗간 앞에 긴 줄을 이

은 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풍경이 따뜻한 기억으로 각인되

어 있다. 이미 과거의 풍경이 되었지만 방앗간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먼

지를 쓸어내고 곡식을 빻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른 대물림을 이어온 것일까. 황금시장

상인번영회 초대 회장이셨던 아버지를 닮아 본인 역시 상인회 회장을 수

행한 방앗간집 아드님을 만나뵈었다.

초대 회장은 작고하신 우리 아버님이셨어요. 현재 사무실에 역대 회장

들 사진을 걸어두면 역사적으로 상인회의 뿌리를 이어나간다는 의미도

생길 텐데. 아직은 여러 가지로 아쉬운 생각이 들어요. 제가 상인회 활

동할 때는 사무실이 없었어요. 그 당시 활동하던 시기에 사무실까지 받

은 뒤에 관뒀거든. 회장을 거치신 분은 다섯 분 정도 되네. 그때만 해도

철따라 물 있고 단풍 있는 데로 야유회를 다녔어요. 친목 그 자체에 목적

이 있었던 거지. 상인회 틀을 갖춘 건 제가 일을 넘겨 받으면서 진행됐어

요. 경상북도 상인회가 설립되면서 함께 시작한 거죠. 상인들도 뭉쳐서

한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취지로 단체가 생긴 겁니다. 사실 다른 시도에

는 다 있거든요. 경상북도가 늦었어요. 뜻있는 분들을 위시해서 상인회

경북지회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황금시장 같은 경우는 대한민국에

서 가장 작은 시장 축에 들었어요. 시장이 상인회를 만들기 위해선 공식

적으로 상인이 51명이 필요한데 우리가 53명 뜻을 모아서 출발을 한 겁

니다.

상인회는 생겼지만 뭐든지 처음 시작할 땐 모든 게 부족하죠. 체계가

있어요? 기율이 있어요? 저같은 경우엔 상인회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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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일은 빵점이지. 어쨌든 상인회의 내실을 튼튼하게 해보려고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 말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아닌

건 아닌 것이고 또 내가 잘못된 건 잘못 됐다고 인정하고 사는 게 사회생

활이라고 믿었어요. 내가 떳떳하면 어디 가서도 큰소리칠 수 있는 거잖

아요. 조금이라도 도리에 어긋난 짓을 했다면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얘기해보자면 우리 황금시장은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고

인위적으로 생긴 시장입니다. 몇몇 뜻있는 분들이 만든 거예요. 왜냐하

면 완전히 불모지였어요. 현재 시장 안에 분수대 자리 있죠. 거기가 옛날

에 장옥이었어요. 장옥이 뭐냐하면 지붕만 길게 이어서 지붕 아래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자그마하게 집에서 가져온 물건을 팔았다고. 그게 장거

리가 된 겁니다.

양념시장의 기원은 간단해요. 사통팔달 길이 좋았기 때문에 사방의 고추

마늘이 길 위로 모여들기 시작한 거죠. 판로가 좋으니까.

시장이 처음 출발할 때는 청과부터 시작했어요 청과. 이쪽 지방에 과

일 생산이 많아요. 그래서 과일을 팔기 시작한 게 황금시장 시발점이에

요. 그리고 고추 마늘은 김천에서 생산이 안 됐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집에서 먹으려고 재배했지 판매할 정도로 농사를 짓진 않았어요.

주변 지역에 있는 고추 마늘 산지에서 물건을 가져와서 김천을 중심으

로 서울로 가고 부산으로 갔어요. 교통이 좋으니까. 신기하게 물건의 산

지가 없는데도 물건들이 김천으로 다 모였어요. 그런 식으로 고추 마늘

시장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양념시장으로 진화한 거예요. 한창 때는

사람이 무진장 많았어요. 끓어 넘친단 표현이 맞을 텐데. 그런 풍경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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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히 잦아들면서 세월이 더해서 쇠퇴한 거에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황금

시장이라는 전통시장이 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겁니다.

내가 회장 할 때 대화를 하려고 하면 입이 거친 장사꾼들이 있었어요.

어떨 땐 태도가 포악하게 나와요. 그럼 나 역시 못 참아요. 이렇게 나오

단 거냐? 그럼 너도 팔지 말고 나도 팔지 말자. 나를 굳이 삼국지에 나오

는 장수로 구분짓자면 용장, 맹장이었지. 상인회장은 강단이 있어야 한

다고 믿습니다. 나는 황금시장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받은 모

욕을 감수하고 내 생활의 불편을 인내했어요. 저는 사람들에게 누누이

말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발벗고 뛰는 이유는 우리가 다 잘 되자고 하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주셔야 할 점은 저는 월급 받고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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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노릇 하는 사람이 아니란 겁니다. 뜻 있는 사람들은 그걸 알고 제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셨죠.

지금 시장의 역사를 돌아보는 모양이죠? 김천이 조선시대 5대 시장에

드느냐 안 드느냐 아직도 말이 많아요. 원래 조선시대 5대 시장이라 하

면 김천이 맞아요. 황금시장 상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지

만, 원래 5대 시장은 아랫장터입니다. 그걸 좀 알았으면 해요. 김천이 5

대 시장이 맞는데 정확히는 김천의 아랫장터가 5대 시장이야. 왜냐하면

옛날에 소금배가 여기까지 올라왔어요. 배다리라고 있어요. 배가 서는

다리. 감천면에 배다리가 있었어요. 나는 어려서 모르니 어른들에게 물

었지. 어떻게 물도 얕은데 큰 배가 들어오겠습니까? 사람들이 소금배를

밧줄로 끌고 배다리까지 올라오는 거에요. 소금짐을 실은 배가 말이죠.

그런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을 못하고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 안타까워

요.

선대로부터 진흥상회를 물려받으며 고추, 마늘 같은 양념류를 배워 익혔

다. 물려받을 때 아버지에게 내건 조건은 운영에 대해 일체의 간섭을 하

지 않는다는 약속이었다.

제가 아버지에게 이 가게를 물려받은 지 20년 좀 넘었네. 돌아보면 저

도 독특한 고집이 있어요. 장사를 하면 어른들이 간섭을 하시려고 하잖

아요. 저는 아버지께서 간섭을 하면 절대 안 합니다. 뒤에서 감 놔라 배

놔라 자유를 간섭하는 건 제가 못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아버

지께서 저한테 “그럼 네가 맡아서 해보거라.” 기분 좋게 말씀을 하셨습니

다. 제가 응낙을 안 할 수가 없지요. “예. 맡아서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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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천리로 일을 물려받게 된 겁니다.

일을 이어 받고 한동안 손해를 많이 끼쳤어요. 그래도 우리 어른이 참

대단한 분이에요. 난 참 좋은 아버지 밑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밑지는 걸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밑지는 손해 자체를 공부라고 생각하셨으니까.

우리 상인들이 늘상 이야기하는 게 장사는 나까지만 하고 더 이상 안

한 대요. 자식들한테 왜 못 물려주냐 이겁니다. 나는 그런 결심이 잘못

됐다고 보는 편이에요. 자기가 떳떳하면 물려주면 되잖아요? 요즘 월급

쟁이 생활 힘들어요. 아들한테 말했어요. 아들이 서울 생활 하는데, 정

힘들면 집에 와서 엄마 하는 일 해라. 부모 좀 도와주고 꾸준히만 한다면

지역사회니까, 너희들 먹고 사는 건 별 어려움 없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나한테 말 한 마디 잘못해서 혼났지. 한다는 말이 아

버지, 뭐 하다하다 안 되면 내려와서 할 게요. 그 말에 내가 성이 났죠.

이노무자식! 너 뭐라 했어 지금. 하다하다 안 되면 할 일을 엄마 아버지

가 하는 줄 아냐. 말 대가리 그게 뭐냐. 그러니 대번에 아들이 잘못을 빌

죠. 내가 봤을 때 사실은 도시생활이 각박해. 부부끼리는 생활이 좋을 런

지 몰라도 모여사는 건 재미가 없어. 여기는 안 그렇잖아. 막걸리 한 잔

에도 정이 오가는 곳이니까. 어쨌든 장사꾼이라면 자식들한테도 물려줄

수 있는 떳떳한 장사를 하자는 게 신조입니다.

제가 물려받을 적에도 힘들게 이어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일흔. 고희

연 지나서 일을 관두셨는데 나는 혼도 많이 났어요. 그 당시 계산은 주산

이잖아요. 전자계산기는 좀 더 있다 나왔거든. 장사 오래 하신 분들은 대

충 뭉뚱그려 얼마라는 걸 알아요. 예를 들어 대강 물건값이 120만원이라

는 예측을 하셨는데 정작 계산하고 있는 내가 주판을 잘못 튕겨서 90만

원입니다. 이러면 난리가 나는 거에요. 뭐? 뭐라캤어 너 방금! 고함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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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세요. 소위 고등교육까지 받았다는 녀석이 산수도 못하느냐! 사자후를

지르면 온 시장이 떠들썩했어요. 그때 하도 큰 고함소리를 듣고 배워서

아직까지도 고추 몇 키로 하면 몇 근 하고 근수가 탁! 튀어 나와요. 몇 근

몇 킬로 하면 바로 튀어 나와요. 하도 고함소릴 들어서. 그러던 것이 계

산기가 나오고부터는 아버지가 내 계산에 의심을 안 하시더라고요. 전자

계산기가 나를 살린 겁니다.

옛날에는 방앗간이 부의 상징이었어요. 세도가의 한 종류였는데 요즘

은 당연히 별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

력은 어찌됐든 신용입니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본래 거래하던 집에 일을 맡겨요. 그러니까 기존에 찾

아주시는 고객만 잃지 않아도 가게의 명맥은 유지할 수 있지요. 내가 방

앗간 일로 고추 빻는 일은 했지만 떡은 그때 안 했어요. 떡을 하면 애를

먹는다고 외숙모가 하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안 했어요. 그런데 떡 찾

는 손님이 많았어요. 찾는 분이 많으니 아무래도 떡을 해야겠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어디가서 기술을 배운 적도 없으니 가게 문을 일주일 잠궈

놓고 연습을 했어요. 떡 만드는 모습이 어색한 걸 손님들한테 안 들키려

고 혼자 연습을 했어요. 어색하면 이상하잖아요. 막상 손님들 앞에서 떡

을 만들 때는 어디서 배워온 것처럼 행동했어요. 그랬던 일이 아직까지

아무 사고 없이 잘 지나왔어요.

내년에는 미숫가루도 양껏 물량을 내려고 해요. 참기름도 올해보다는

물량을 더 잡고. 그래서 내 용돈으로 쓸 생각이에요. 체계적으로 간판도

다시 달 생각이에요. 나는 돈하고는 별로 인연이 없어요. 원체 나돌아 다

녔으니까 돈하고 인연이 없었어요. 돈하고 인연을 지으려 하지도 않아

요. 그래서 우리 집 애들, 지금 시집 장가를 다 갔는데 학교 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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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학자금이 얼마 들어갔고 예물이 얼마 들어갔는지 나는 몰라요. 누가

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 거기 나올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애들 학교니 결

혼이니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는 우리 내외 노후에 쓸 것만 벌면 되지 다

른 큰 욕심은 없어요.

떡 방앗간 주력상품은 영양떡이에요. 여기는 시골이라서 서울 같은 대

도시처럼 감칠맛나게 하는 재주는 없어요. 떡 자체는 소박해요. 찹쌀이

들어가고 콩과 견과류 종류가 13가지 들어갑니다. 그런데 영양떡을 처음

시작할 때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맛이 달아요. 입맛이 변했다는 얘기죠.

떡 중에 가래떡 있죠. 또 그거 말고 절편 있잖아요. 그게 만들기가 제일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면 간 맞추기가 어려워요. 간을 잘 맞춰야 돼.

이 떡을 씹어보면,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게 간을 해야 돼요. 그 중간

을 찾는 게 어려운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는데 사실 이게 가

장 어려운 거에요. 그 떡을 또 손님들이 제일 많이 찾아요. 우리가 소금

구이하고 양념갈비를 먹으면 처음엔 갈비가 감칠맛이 더 나잖아요. 그런

데 먹는 건 소금구이를 더 양껏 먹어요. 그러니까 사람 입맛이란 게 소금

에 간이 더 잘 맞아요. 이치가 똑같아요. 소금 간을 잘 맞추는 게 어렵기

도 한 반면에 일하는 재미도 더불어 있어요.

한 지역에서 오래 장사를 해오고 있지만 만나보면 사람도 좋은 사람들

이 더 많다는 걸 느낍니다. 왜 그런 지 알아요? 어떤 사람이 정신이 없어

서 그랬는지 돈 천 원을 갖고 와서 만 원을 줬다 하거든. 우리 집사람도

분명히 돈 천 원을 받았지만 만 원을 줬다고 우기는 데도 안 싸워요. 내

가 그러죠. 줘라. 그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다음에 와서 분명히 돌려줄

것이고 안 돌려줄 사람이면 안 올 것이다. 그런 사람 같으면 우리 집에

안 오는 게 낫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기는 당사자들이 나중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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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찾아와서 사과하고 차액을 돌려주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그래서 좋

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겁니다. 반면에 질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일이 있었냐면, 고추씨 기름은 우리 집만 짜는 품목이에요. 고추씨

기름은 가져가는 사람만 가져가요. 어느 날은 처음 보는 사람이 그걸 안

먹는다고 돈으로 바꾸러 왔더라니까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본

래 거래하던 사람도 아니었어요. 그냥 몰래 가져갔던 겁니다. 그거 대단

한 사람이잖아요? 내가 단박에 말했지요. 두고 가세요. 그냥 가요. 그러

니까 왜 돈 안 돌려주냐고 따지거든요. 제가 화가 나서 말했죠. 보세요.

아주머니. 고추기름 짜는 집은 우리 집 밖에 없고 이걸 먹는 집은 다 정

해져 있어요. 고추기름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우리가 그걸

알잖아요. 더는 말하기 싫으니 그냥 놔두고 가라고 했지. 확실한 거니까.

어쩌니 저쩌니 간에 이런 짓 하지 마세요. 그래도 뭐라고 자꾸 말씀을 하

시거든. 딱 한 마디 하고 내보냈어요. 참 대단하십니다.

내가 원래 가게문을 열어 놓고 다니거든요. 그렇지만 어디 하나 빈 게

있으면 직감적으로 보이게 되어 있어요. 원래 우리 집은 365일 항상 문

이 열려 있어요. 문 잠그는 거 없어요. 계속 열어놓고 살아요. 습관이 돼

서 그런 거죠. 어떨 땐 차 키도 그냥 꽂아 놓고 다녔는데 그건 우리 집사

람이 잔소리를 많이 해서 고치긴 했어요. 생각하면 나 스스로가 우습기

도 해요. 어른도 아니면서 어른 행세를 하려 하니까.

황금시장에 대한 애착을 갖고 열띤 대화를 이어가던 그는 다른 시장과

비교해 아쉬운 것이 있다 했다.

우리 황금시장에 오래된 이야기나 전설, 미담, 이런 게 없어요.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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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 됐는데 시장 속에 남다른 이야기가 풍성했으면 좋겠어요. 사람 냄

새나는 시장의 모습은 앞으로 더욱 귀한 풍경이 될 겁니다. 시장 안에 좋

은 물건이 다양해야 하고 물건 파는 상인들은 친절해야 하고 장바닥은

깨끗하면 더 좋고, 고객이 신용카드로 물건 살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

요.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 같아요. 앞으로 젊은이들은 더더욱 신

용카드를 사용할 테니까 지금부터라도 카드 단말기 문제를 잘 해결해서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는 의견을 드립니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방앗간의 명맥을 유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

군가는 시대착오적인 업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언젠가는 이 자

리도 다른 목적의 건물이 들어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있는 한 이

자리는 언제나 방앗간일 것입니다. 명맥을 잇고 전통을 이어나간다는 건

결국엔 터를 지키는 사람의 뚝심도 한몫 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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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그릇마트 (이봉석)

사람마다 가슴 속에 품은 그릇의 크기는 다르다고 했다.

정직한 상인이 품은 그릇을 찾아 황금동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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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와의 인연, 그리 행복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운명적

만남이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지가 벌써 34년이 흘렀습니다. 1979년 12월부터 시

작했으니 우리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업으로 삼아 왔습니다. 장사

를 처음 시작할 때 특별한 동기나 대단한 각오를 품었던 것은 아니었습

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 시절에 배움의 깊이가 얕은 청년에

게는 일을 하고 싶어도 직업군이 다양하지 못했습니다. 300만원 전세로

가게를 시작하고는 남의 집에 살림을 차려 이사를 많이 다녔어도 경기는

나쁘지 않아 제법 장사하는 맛이 있었습니다.

지금 가게는 20년 전에 장만했는데 김천이라는 소도시 치고는 토지

가격이 꽤 비싼 자리라 많은 빚을 얻어 계약을 했습니다. 금융권 이자가

고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시장이 활황세를 띄던 시절이라 큰 걱정이

없었습니다. 매매대금의 반이 빚이었지만 채무를 정리하는데는 4년 밖

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이제는 자식들도 장성하였으니 우리 부

부가 일상 생활을 꾸려가는데 있어 필요한 소득 정도만 유지하는 게 이

장사의 소박한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크게 돈 벌겠다

는 생각에서 벗어난 지 오래거니와, 거대유통자본이 전통시장을 장악해

가는 와중에 우리 같은 소자본은 발 붙일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기 때

문입니다.

주방용품 장사를 하기 전에는 열네 살 때부터 상회에서 점원 생활을

했습니다. 상회를 요즘 말로 풀이하자면 슈퍼의 옛날 모습이라고 상상하

면 쉬울 겁니다. 상회에서 5, 6년 근무하다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공장에 취직해 일하다가 화상도 입었고, 차 운전을 배우다가 교통사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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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등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상심한 마음에 귀향을 했는

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가 표준어로 은근히 변해 있었던 겁니다. 그

런데 변화된 제 자신이 오히려 전화위복이랄까요. 부드러워진 말투 덕을

보게 된 겁니다. 김천에서 가게를 시작했는데 부드러운 표준어 때문에

지역민들에게 서비스가 좋다는 인상을 심어준 겁니다.

저는 군 제대 이후에 그릇가게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남의 돈으

로 장사를 하다 보니 이자 갚느라고 버티면서 여기까지 왔고, 34년 장사

했으면 돈도 많이 모았다고 생각하실 지 몰라도 저희 내외가 생활할 만

큼만 벌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가정이나 식당에서 사용하는 그릇 종류가 엄청나죠? 그릇도 디자인에

영향을 많이 받는 물품인지라 자연스럽게 유행을 타게 되니 신제품 나오

면 안 받을 수도 없고 난처한 상황이 많습니다. ‘저렴하게 재고를 처리하

고 신제품만 진열하면 되지 않나.’ 하시는데 이따금씩 예전 스타일의 그

릇을 찾는 손님도 계시기 때문에 냉정하게 구제품을 내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유행도 좇아야 하고 복고풍도 구비해야 하는, 구색 맞추기 어려

운 장사입니다.

요즘 대형마트가 곳곳에 문을 열면서 많은 고객들이 전통시장에서 멀

어졌습니다. 노년층이 그나마 찾아주시는 고객이라고 봐야 하는데, 예전

에 많이 팔리던 고급 그릇 세트의 수요는 거의 없고 플라스틱 종류가 가

장 많이 팔립니다.

아침 7시부터 보통 밤 9시까지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게 이 장

사의 특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장사가 어렵지만 그릇가게에도 남모를 애

환이 많습니다. 손님이 없으면 재고정리나 진열을 해야 하고, 손님이 오

시면 기호에 맞게 기분을 살펴 드려야 하니, 잠시도 쉴 시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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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게 자리가 장사하기엔 최적의 조건인데, 어떤 장사라도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하면 먹고 살 수 있는 터라고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제

가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는 큰길 옆 요지에서 장사를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상업을 해오면서 터득한

이치가 몇 개 있습니다. 장사를 수십 년 한다고 돈을 계속 버는 건 아닙

니다. 우리도 10년 간 돈 벌어 가게와 집을 장만했습니다만 이제와 돌아

보니 젊은 시절, 항상 이자 갚기 바쁘고 돈에 허덕이던 10년 동안의 장

사가 어찌보면 가장 큰 전성기가 아니었나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기업

이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투자를 잘 해야 하듯이 장사꾼도 매한가지 벌

어놓은 이익금으로 투자를 잘 해야 되는데, 장사에만 몰두 하다 보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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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방식으로 투자를 못해서 큰 돈을 만지지는 못했습니다.

IMF 때도 큰 영향이 없던 곳이 황금시장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2000년 초반까지 황금시장이 호황이었는데 대형마트와 홈쇼핑 때문에

점점 위축되고 있습니다. 그릇 구경 오시는 손님들도 홈쇼핑에 나온 제

품이 있냐고 물어보곤 하시니 소상공인들은 앞으로 미디어와 유통자본

에게 더욱 큰 영향력을 느끼게 될 것 같습니다.

평생 못 배운 한! 문득 뒤돌아보니 배움에는 끝이 없고,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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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초등학교 졸업장만 있고 가정형편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

습니다. 2003년 나이 50을 코앞에 두고 늘푸른 야학교에 나가 공부를

시작하고,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김천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습니

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주위에 봉사할 수 있는 사회복지사 2급을 취득

하였습니다.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게 저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부담이

되었으나, 한으로 남을 뻔 했던 공부를 마무리하니 후련한 마음이 듭니

다. 특히 안사람에게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정규교육처럼 수

년 간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지는 못했어도 검정고시와 야간대학을 통해

짧은 기간에 교육 과정을 끝마친 나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가끔 많은

분들께서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흔들리지 않고 마무리 한 저를 인

정해 주시니 제 마음도 뿌듯하고 행복합니다.

우리네 인생과 같은 그릇, 그리고 인품의 크기

우리네 인생과 그릇은 서로 닮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개인 인품의 크

기를 그릇에 비유하여 표현하곤 합니다. 좋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란 자

기 희생을 감수하면서 뒤로 상처주지 않고, 절망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

며 항상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싸게 달라고 사정하면 덤으로 드릴 수 있는, 안 팔리는 오래된 그릇들

이 있습니다. 비록 가치는 낮은 그릇이나, 새로운 생명이 덧입혀져서 어

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곤 합니다. 제 그릇이 어느 정

도 크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위 사람들에게 그릇이 크고 넓은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게 작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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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는 선뜻 권하고 싶지 않은 장사

이 장사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장사보다 더 어

렵단 사실은 문제삼지 않더라도 신경 쓸 것도 많고 들이는 품에 비해 부

가가치는 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의 기력이 허락하

는 순간까지는 열심히 할 생각이고, 그게 우리 부부의 숙명으로 느껴집

니다.

시대의 변화에 일희일비 하지는 말되 시대를 멀리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

하다

젊은 사람들에게 과연 전통시장은 어떤 추억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

각을 합니다. 이들은 전통시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세대가 아닙니

다. 마트나 인터넷을 활용하여 장을 보는 게 자연스러운 라이프 스타일

이므로 저는 황금시장에 대한 걱정이 앞섭니다.

KTX역전 혁신도시에 상가가 세워지는 규모를 보면 과연 전통시장은

앞으로 어떻게 그 역할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황금시장의 주요 고객은 지례 5개 면인데, 농촌에는 앞으로의 고객인 젊

은이들이 없기에 점점 상권이 쇠퇴하리란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

다. 현재의 고객층으로는 더 이상 시장이 커질 리도 없고 발전 역시 제한

적일 텐데, 이번에 문화관광형 시장이 됐다 하니 타지인들이 우리 시장

을 찾을 수 있는 근거는 마련됐다고 봅니다.

전주의 쇠퇴해가는 전통시장 옥상을 젊은이들이 개조해,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로 만든 사례는 우리 황금시장도 배우고 본받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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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골은 전국 어느 곳 할 것 없이 다 공동화 되고 있고 노령화 또

한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아무 노력 안 하고 있으면 저절로 말라 없어질

물줄기 옆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례 5개 면이라는 물줄기가

마르기 전에 시장 상인들이 화합하고 서로 뭉쳐서 멀리서 고객이 기차

타고 찾아올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뭐 대단히 배운 게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천그릇 내외가 성실하게 살았

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에 드리는 제언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

습니다.

제법 널직한 가게 내에는 특별히 앉아서 쉴만 한 공간은 물론이고 의자

도 안 보였다. 황금동에 뿌리내리고 꼿꼿하게 서 있는 사장님 내외가 강

직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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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합식품 (여금자)

황금동 황금시장에 가면 ‘사랑방 손님과 콩나물’이라는

이야기가 따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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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에 있는 황금동 황금시장에 가면 욕심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운영하

는 동네 사랑방 같은 식료품점이 있다. 오가는 손님 만나는 재미에 매일

나와 계신다는 주인 내외와, 이들을 만나러 일부러 찾아오는 고객들이

나누는 이 얘기 저 얘기가 정답고 따뜻하다.

이 얘기를 먼저 하고 말문을 터야겠네요. 우리 집은 시장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허물 없이 들어와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나누는 정겹고 따뜻한

사랑방입니다.

본래는 우리 내외가 식당을 20년 했습니다. 이 장사를 한 지는 8년.

도합해서 28년. 거의 30년을 사람과 어울려서 살았네요.

무슨 식당을 했냐하면 추어탕 장사를 했어요. 20년 했어요. 장사를 20

년 한 거면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봐야 되는데, 어쨌든 오래 했지요.

그랬는데 예전 이 가게에서 장사했던 사람이 장사를 관두고 이사를 떠난

다길래, 그럼 이 집을 우리가 얻어서 장사를 해보자는 결론에 따라 업종

을 바꾸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막상 바꾸고 보니 갖가지 꾐에 빠져서 엉뚱

하게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긴 들었어요. 살아온 삶이 순식간에 바뀐

거니 모든 면에서 힘들었어요. 구석기시대에 살던 사람이 아파트에 감금

당한 것처럼 불편했어요. 왜냐하면 식당할 적에는 점심시간 저녁시간만

바쁘고 나머지는 쉴 시간이 있었어요. 근데 이 장사는 콩나물 천 원! 하

면 누웠다가 일어나야 되고, 두부 한 모! 하면 벌떡 일어서야 되고. 어쨌

든지 항상 벌떡 일어났었어. 60년대 군대 내무반도 아닌데 말이지. 내가

처음에는 군대 다시 들어왔나 싶더라니까요. 웃기는 말이지만 누워서 콩

나물 드리고 누워서 두부 한 모를 드릴 수는 없잖아요. 아마도 그랬으면

당장에 우리 집을 시장 밖으로 내쫓아야 된다고 궐기대회 했을 거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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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니까 상상만 하자고.

추어탕 장사 할 적에는 추어탕만 끓여 두면 온종일 점심 한 때 바짝 장

사하고, 저녁 한 때 바짝 장사하고 자투리 시간에 쉴 짬이 났는데 이 장

사는 어찌된 장사인지 쉴 시간이 없어. 그게 요즘 좀 힘이 들어. 밥 먹다

가 일어서야 되니까. 입에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면서, 손에 잡으신 그건

가격이 얼마입니다. 그럴 때 민망해요.

공교롭게 인터뷰하는 지금은 의외로 조용하네요. 그런데 우리 집은 본

래 황금시장 사랑방이에요. 우리집에 오는 손님들은 스스럼없이 들어와

앉았다 가셔요.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보면 가게 안이 꽉 찰 때가 있어

요.

그래도 식당보다 식품점이 장점도 있어요. 일단 식당 일은 매일 장사

에 필요한 재료를 직접 사러 나가야 되요. 반면에 이 장사는 내가 물건을

떼오면 전부 다 이 공간에 있는 거잖아. 그거 하나는 좋아요.

우리 내외는 천성이 그런가 사람이 모여있는 게 좋아요. 추어탕집 할

때도 사람이 많이 모였어. 낮에는 일해야 하니 주로 저녁에 모이죠. 손님

이 오면 우리 집에서 윷 놀고 가는 게 일이었어요. 정월 달만 되면 농담

좀 곁들여서, 식당 안이 인파로 장관이었어요.

자기들이 계 모임을 하면 윷 놀고 가는 게 당연했고 우리 집은 항상 사

랑방이었어.

그렇게 살면 되지 달리 뭐가 있겠어. 항상 그런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우리 내외가 부부로 함께 인생을 출발한 시작점은 김천시 부안면이었

어요. 거기서 살다가 아들 둘 낳았지요. 마침 되는 대로 일은 해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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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경험도 없으니 무작정 추어탕 잘 한다는 집에 가서 어깨 너머 배운

다음 밥장사를 시작한 거에요. 가만 보자, 큰 애는 고등학교, 작은 애는

중학교 3학년 때일 거에요. 밥장사하는 동안 두 아들이 다 장성해서 군

대까지 갔다 왔어요.

남들하는 만큼 두 아들의 공부를 시키면서 살다 보니 밑천이 있을 리

없지요. 그래서 이 장사는 돈 한 푼 없이 시작했어요. 게다가 추어탕집

할 때 몸이 아파서 몇 년 동안 고생을 했어요. 여기 와서도 마찬가지고.

아주 죽다 살아났거든. 당뇨 때문에 신장이 안 좋아서 수원 아주대 병원

에 입원해 있었어요. 죽니 사니 하는 험한 상태까지 갔었어요. 지금은 많

이 호전됐어요. 힘이 덜 들어. 장사가 불티나면 신도 나고 건강에도 좋을

텐데 이 생업이 벌이가 예전보다 못해요. 처음에 이 장사 시작할 때만 해

도 매출이 제법 됐거든요. 그런데 작년보다 올해가 더 안 돼요. 장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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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택도 안 돼. 그전엔 납품 들어가는 곳도 많았는데 이젠 없다시피 해

요. 콩나물 사러 오시는 분들. 두부 한 모 사러 오시는 분도 별로 없다니

까. 그전에는 보통 하루에 콩나물 세 동이씩 네 동이씩 팔았거든. 처음에

이 장사를 시작하면서 내가 손해를 감수하면서 콩나물을 막 퍼줬어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콩나물 많이 주는 집이라고 소문나서 우리 집에 많이

찾으시게 됐어요. 그럴 정도로 내가 콩나물을 퍼줬어요. 콩나물에서는

본전을 안 남길 생각을 했단 말이죠. 이제는 많이들 찾아오세요. 그만큼

내가 우리 가게 이름을 널리 알려놓은 거죠. 대형마트 가면 미끼상품이

란 게 있다면서요? 나한테는 콩나물이 일종의 미끼상품이었지. 장사 초

기엔 매상이 수월하게 잘 오르더니만 어느 순간부터 그래프가 꺾이면서

점점 매출이 떨어져요. 그러더니 작년이랑 올해가 아주 나빴어요. 또 작

년엔 내가 병원에 있어서 한참 놀았고 설에도 장사 못 했어요. 병원에 있

느라고 대목을 못 봤는데 이번 추석에는 재미를 좀 봤지. 그렇게 살아온

거에요.

김천에는 그래도 유교 문화가 그런 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 제

수품 마련하러 많이들 오세요. 대부분 젊은이보다는 연세 지긋하신 분이

더 많지만요.

위치적으로 시장 제일 끝에 있고 가게도 그런 대로 제일 커요. 우리 집

에 오시는 분들은 전부 알고 찾아오시는 분들이야. 콩나물 많이 주는 집

이라고 부르시죠.

요즘은 살기가 더 힘들어요. 만만한 콩나물까지 값이 올랐어요. 어쨌

거나 스트레스 안 쌓이게 나 스스로가 무덤덤해지려고 욕심을 내려놓는

편이에요. 큰 돈 오가는 장사가 아니라서 스트레스가 별도로 있는 건 아

니지만 정도가 심하신 분들이 있어요. 더러 지나치게 억지를 쓰시고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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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내로 더 달라고 요구하시는 분들이 계셔도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노

력하는 편이죠. 그래도 우리 집은 재미난 집이에요. 주인이 가게 비우고

없으면 손님이 알아서 물건 찾아 돈 계산하고 가는 집이에요. 어떤 손님

은 주인이 있어도 부르지도 않고 스스로 물건 골라서 돈 탁 놓고 가요.

우리는 돈만 받아요. 그 정도로 젊은 사람들은 매사에 허물이 별로 없고

수월한 태도로 살더라고요. 그런 손님들이 기억에 남지요. 어떤 날은 먼

저 온 손님이 뒤에 온 다른 손님 물건 값을 계산해주고 정확하게 돈 놓고

가는 날도 있어요. 거스름돈 내줘야 되면 손님이 마치 내 장사인양 냉장

고 안에 있는 돈통에서 잔돈 꺼내서 거슬러줘요. 그럼 구태여 주인인 내

가 안 일어서도 돼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장사 해요. 어느 날부터 그런

편리한 문화가 우리 가게에 자리잡았어요. 그렇게 되니까 장사는 수월하

죠.

식당 할 적에도 그랬어. 밥을 같이 먹으면 설거지는 손님들이 하고 갔

어요. 수월하게 장사한 편이지. 장사를 조심스럽게 하려고 하면 오히려

안 되요. 우리는 장사도 만만한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예전 추어탕집 손님이셨던 분들이 알고서 지금도 많이 찾아와요. 식당

이름이 미양식당이었는데 지금 이 가게는 황금종합식품으로 했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미양식품으로 해야 통하는 데가 있어요. 간판을 잘못 했

나 싶어요. 미양식품으로 갈 걸, 후회하는 면도 있지.

어떤 손님들은 처음 와서 손님이 다른 손님 물건 값 계산하는 장면을

보고 재미 있다는 분들도 많아. 이런 가게 처음 본다면서.

포부는 있어요. 이 가게를 새 단장 해서 새롭게 장사를 해보고 싶은 마

음이 간절해요. 내가 식당일만 오래 해오다 보니 물건 진열하는 법을 아

직도 잘 몰라요. 자꾸 말하다 보니 핑계처럼 들리기도 한다만 내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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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안 해봤기 때문에 물건을 맵시 있게 진열을 못했어요. 이제는 배

워서라도 잘 해놓고 장사 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더군다나 우리 집은 젊

은 손님들이 많으니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요. 새댁들도 많이 오고,

나이 많은 부인들도 많이 오니까 사랑방이라고 부르는 거겠지요.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까탈스럽게 안 구니까 손님들도 편한 게 아니

겠어요.

장사하는 사람들이 신날 때는 장사 잘 될 때지. 안 그래요? 촌에서 각

종 농사 짓고 아들 키우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 별 즐거움이 있겠어요. 이

제는 건강 유지하며 편안하게 지내는 게 제일 옳은 일이에요. 내가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힘 쓰는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병이 나를 잘

거쳐갔어요. 처음에는 당뇨가 아니었어. 처음에는 중이염이 와서 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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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크게 했어요. 그때도 죽니사니 했거든요. 그래도 젊을 때는 남들처

럼 멋모르고 살았어요. 재밌게 살았지요. 사람이 모이면 항상 우리 집에

모였어요. 저녁에 모두 모여서 우리 집에서 놀았거든요. 보리쌀로 밥을

해놓으면 다 가져다 먹었어요. 강에서 동면에 든 개구리를 잡아다 우리

집에 와서 조리해 먹기도 했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사랑방으로 이름이

나더라고요. 이거 봐. 늙을 때까지 사랑방이잖아요.

오가던 사람끼리 만나는 재미가 끊이지 않는 우리 동네 사랑방. 이제는

기억 속으로 사라진 우리 동네 사랑방이, 김천시 황금동 황금시장에 아

직 있습니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면 콩나물 많이 주는

사랑방을 찾게 됩니다.

내가 본래 음식 해서 사람들 먹이는 걸 좋아했어요. 추어탕 장사할 때

도 한 그릇을 넘치게 퍼줘요. 그럼 어떤 분들은 많다고 불평을 하지만 실

제로는 다 드시고 가세요. 그런 게 즐거움 아니겠어요. 우리는 막 아등

바등 하며 그렇게 안 살았어요. 추어탕집 할 때도 먹고 사는 건 그럭저

럭 괜찮았으니까요. 이곳에 나와서도 어느 정도 돈은 버니까 괜찮아요.

중요한 건 인심을 안 잃는 장사 같아요. 추어탕집 할 때 방이 여러 개 있

는데 비가 오면 천장에서 비가 떨어져서 양동이를 갖다 놓고 빗물을 받

아냈어요. 그래도 손님이 한가득 찼다니까요. 아무도 불평불만을 안 하

시고 말이야. 어떨 때는 비가 너무 와서 빗물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 국그

릇을 들고 자기들 차에 가서 먹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사

람이 많았어요. 옛날에 한신아파트 지을 적에 현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다 우리 집에 왔었어요. 손님이 항상 북적거렸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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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때는 손님들 다 드시라고 옥수수를 꺾어다가 한 솥 쪄 놓는다고요. 나

는 작게는 절대 안 해요. 무조건 크게 벌여놔야 해요. 그래야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이 먹지요. 여기 장사하면서도 먹을 게 있으면 다 내 놔요. 그

럼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다 먹고 가세요. 장보러 오는 사람들이 우리 집

에 와서 뭐든 먹고 안 가면 서운하대요. 하도 먹는 걸 맨날 해놓으니까.

이런 제 성격도 다 바깥양반이 이해하니까 가능한 거에요. 우리는 중

매결혼 했어요. 잘 맞는 면이 있어요.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저 집은

언제 싸우나. 우리는 안 싸워요. 서로 이해해주니까 그렇지. 하나가 하나

를 이해하고. 또 하나가 부아가 치밀어서 암 말도 안 하고 있으면 하나가

다가와서 풀어주기도 하면서 살았어요.

우리 인생의 목표는 다른 거 없어요. 이 장사 끝까지 잘 하고, 자연적

으로 사랑방 같은 이 가게가 더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거에요. 어떤 날은

내 가게지만 내가 앉을 자리도 없어요. 그러니 누가 장사하는 집이라고

하겠어요. 사랑방이지. 그렇게 살아야지요. 혼자 후다닥후다닥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야. 사람 사는 게 그렇다고 생각해요. 뭐 잘했니 뭐 못

했니, 네가 나쁘니 내가 좋으니, 인생살이 크게 보면 그럴 것도 없고 마

음을 턱 놓고 그냥 살아가는 데로 살아가시라고 전해드리고 싶어요.

두 분 어르신은 손님이 온다고 해서 크게 동요하지 않으신다. 그저 인근

에 사는 편한 친척처럼 사람을 대하신다. 인간적 스타일이 독특하신 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점이 무척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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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식당 (이응준)

막역한 친구처럼 허물 없고 구수한 청국장으로

한 그릇 밥의 정성을 지어내는 겸손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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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식당을 한 시기는 1994년도였으니 햇수로 20년 가까이 되네요.

중간에 잠깐씩 쉴 때도 있었어요. 3개월 가량 관두고 쉴 때도 있었죠. 매

출은 안 나오는데 집안 사정은 급박하게 돌아가서 필연적으로 쉴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 가게 시작할 적에는 아주 작은 규모였어요. 요 앞에 있는

농우농약방이 예전에는 우리 가게 옆이었는데 농약방이 큰길 쪽으로 이

사를 나간 뒤 1996년도에 우리가 농약방 자리를 증축해서 장사를 시작

하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갈비집을 했는데 이 지역 풍토와는 잘 안 맞더라고요. 그래

서 한식만 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현지조사를 해보니 현재 시장 골목 안

에는 순대국집이 대부분이라서 사람들은 한식을 먹고 싶어도 마땅히 갈

식당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한식을 잘 연구해서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메뉴를 만들어보자는 각오로 여러 과정을 거쳐온 끝에 오늘 날 우리 집

메뉴가 나왔습니다.

저는 본래부터 김천토박입니다. 우리 종고모가 구미에서 갈비집을 하

다가 부산으로 가게를 옮긴 뒤에 다시 갈비 장사를 이어서 하셨어요. 예

식장 옆에서 갈비집을 했는데 마침 저도 철들었으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

어 부산에 내려가 종고모 식당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배우다보니 저도

제 장사를 해보고 싶어 일단 김천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나이가 스물 넷

이었는데 돌아온 뒤 얼마 안 있어 작은 국수집을 차립니다. 의욕적으로

장날에 국수를 팔았는데 그 당시 국수 가격이 천 원이었어요. 1994년도

구나. 우리 모친이 하루 종일 국수 배달까지 해가며 팔아도 나중에 매출

을 계산하면 계산할 것도 없이 5만원 밖에 안 되지요. 재료비를 빼고 나

면 이익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렇다고 제가 뭐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묵묵히 버티며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장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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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본들 밥만 먹고 살 정도밖에 안 되더라고요. 돈이 모일 수 있는 장사도

아니었고요. 거기다 집에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장사하려고 모아둔 밑천

을 다른 데 막아 쓸 때도 있었어요. 버티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런 이유로

2000년도에 국수 가게를 내놨어요. 가게가 금방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가게를 인수한 그 사람이 딱 3개월을 운영하더니만 가게 문을 닫아버려

요. 그래서 우리 누나가 가게를 다시 인수했어요. 뒷얘기에는 나름대로

속사정이 많이 있죠.

식당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태풍 루사가 김천을 덮쳤을 때입니

다. 당시 수해가 크게 났습니다. 예전 군청 자리에서 무료급식 봉사를 했

습니다. 사암 연합회로부터 물품과 식자재를 지원 받아 수해 입은 시민

들에게 무료급식을 했어요. 그날 이후로 저희 식당에 대해서 지역민들이

좋게 봐주시기 시작한 모양이에요. 그 이후로 입소문이 나서 손님이 자

주 찾아주시고 그 바람에 청국장도 하게 됐고 돌솥밥으로 바꾸게 됐습니

다. 그때 이후로 식당을 해오면서 어떡해서든 손님들에게 싸고 질 좋은

밥을 제공하자는 가게 정신이 생겼어요. 정성이 담겼지만 신속하게 내올

수 있는 저희 식당 나름대로의 메뉴얼이 갖춰진 출발점이 된 겁니다. 저

희 집 청국장을 드셔보신 분들은 대부분 다 만족을 하시는 편입니다.

우리 집이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조미료를

쓰긴 쓰되 최소한만 쓴다는 원칙은 늘 있습니다. 식당 운영의 특성상 모

든 사람의 입맛에 꼭 들어맞는 음식을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대

신에 반찬마다 간을 약간씩 다르게 한다든지 반찬의 구성을 맵고 짜고

싱거운 종류로 분류를 해서 다양하게 제공하는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손님들도 완전히 만족은 못하시겠지만 어느 정도의 만족감은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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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 주력 상품은 청국장입니다. 우리 작은 할머니가 김천 시골에

계세요. 처음에는 조금씩 얻어오다시피 해서 장사에 이용을 했는데 장사

가 점점 활기를 띄니까 작은 할머니께서 힘에 부친 나머지 청국장 물량

을 못 대는 지경이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작은 할머니에게 직접 전수

받아서 우리 집에서 자체적으로 청국장을 띄우고 있습니다.

손님들 대부분이 청국장에 만족을 하십니다. 우리 작은 할머니만의 비

법이 있더라고요. 보통 청국장은 금방 삶은 콩으로 이내 띄우는데,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안 하고 다른 독특한 비법이 있더라고요. 그렇다보니

청국장 특유의 고약한 냄새도 덜 나고 맛도 괜찮다 해서 따로 청국장을

팔라는 의견도 있으세요. 그런데 청국장 원재료만 팔기에는 양을 어떻게

정할 지가 일단 난처하고 한창 바쁜 시간에 청국장을 따로 준비해서 내

드리는 것 역시 일손 면에서 문제가 될 듯 해서 직접 팔지는 않습니다.

대신 평화동에 똑같은 가게가 하나 있어요. 구미에는 누나가 운영하는

가게가 하나 있고. 제가 독특한 비법이라고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좋은

음식의 공통점은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정성들여서 하고 열심히 하면 됩

니다.

이 자리는 어떻게 보면 외진 곳에 위치한 식당인데 손님은 끊이지 않

고 이어서 오시는 편입니다. 예전에는 이 앞길이 하루에 50명도 안 다니

는 후미진 뒷골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날에는 다니는 사람이 제법 되다

보니 우리 식당을 찾으시는 분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고, 다녀가신

분들이 식당 음식이 괜찮다고 하시니까 맛으로 인심을 잃지는 않았습니

다. 그랬더니 단골도 생기고 식당이 바빠졌지요. 일단은 음식 맛을 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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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유지하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 맛이 없는 식

당은 객관적으로 식당의 가치를 잃은 곳이니까요.

요즘은 예전보다 훨씬 바쁘게 지냅니다만 틈틈이 봉사활동을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전 태풍 루사가 왔을 때 지역민이 고생한 기

억도 있고 또 그 덕분에 식당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은혜도 있고 해서,

종교단체에서 하는 봉사에 되도록 참여를 하는 편입니다. 독거노인들 도

시락 배달도 10년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한 번씩 시니어 클럽이나 여타

단체에서 국수 좀 삶아 달라하시면 봉사활동도 겸해 정갈하게 해드리고

있습니다. 봉사를 하면 할수록 제 마음이 편안해지고 음식 장사를 하는

보람도 더불어 더 생기는 것 같아서 정신 건강에 도움이 큰 편입니다. 물

론 저는 편합니다만 저희 식당 식구들은 두 배로 피곤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 제가 식당 일에 더 신경을 써야겠지요.

어찌됐건 식당은 제일 신경써야 할 부분이 위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

리 집은 잔반을 다 버립니다. 그리고 해충이 나돌지 않게 해충 방재에도

굉장히 신경을 쓰는 편이고요. 아주 난처한 경우가 있는데요. 그게 뭐냐

면 노인분들이 식사하시고 남은 반찬 아깝다고 싸가신단 말이죠. 여름

같은 경우에는 음식이 금방 쉬잖아요. 노인분들은 또 버리기 아깝다고

쉰 걸 드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남은 음식을 싸달라고 말씀하시면 신신

당부를 해요. 가지고 가셔서 상했으면 절대 드시지 말라고. 다행스럽게

도 아직까지 그런 경우로 사고난 적은 없습니다.

가게가 하도 오래된 가게다 보니 청소를 해도 새 건물에 비해 품이 많

이 들고 표시도 잘 안 납니다. 미관상 흡족할 만큼 깨끗하진 않아도 우리

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생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숟가락도 끓는 물

에 삶고 그릇 세척기도 사용은 합니다만 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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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은 그릇을 한 번 더 헹구는 헹굼용으로만 그릇 세척기를 사용하는 편

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척기에 넣으면 보통 세제가 덜 씻깁니다. 세

제 그거 끈적끈적해요. 제가 그런 걸 아주 싫어합니다. 위생에 관해선 철

저한 편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아주머니들이 애를 많이 먹어요. 한 번

씻어서 헹군 다음 또 그릇을 세척기에 넣어서 뜨거운 물에 소독하는 거

랑 마찬가지잖아요. 그래도 그런 신경은 많이 쓸수록 이득이 되는 일이

니까 냉정하게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저도 장사를 하다보니 생각이 많습니다. 김천 같은 경우 수요가 예전

만 못하다보니까 앞으로 식당 일도 고전할 때가 올 거라고 보고 있습니

다. 2, 3년 전에는 점심 때 줄을 굉장히 길게 섰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

이 줄었어요. 갈수록 손님들은 더 줄어들 거란 말이죠. 그래서 젊은층을

겨냥해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생각입니다. 식당 일도 연구를 안 하면 저

절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게 그동안 쌓은 노하우라면 노하우지요.

이 일을 하면서 뿌듯한 점은 아무래도 외지 손님들이 소문을 듣고 우

리 집에 음식을 예약한다는 것이겠는데요. 예를 들면 운동 선수들이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해서 아침밥을 부탁합니다. 거리가 먼 데도 우리 집을

고수하시죠. 그리고 어린 선수들이 부모님한테 졸라서 갈무리 식당 가자

고 한다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 뿌듯하고 기분이 좋죠. 장사하는 사람은

다 그렇게 소박하고 사소한 것에서 기운을 얻나봅니다.

앞으로 장사를 후대가 이을 지는 모르겠어요. 우리 아들이 아직 대학

교 1학년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이 일이 굉장히 힘들어요. 시간도 많

이 들고요. 보통 월급 받는 생활은 출근했다가 퇴근하면 끝인데 이 일은

준비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보통 열두 시간 이상 걸리니까요. 아들들이

할런지 안 할런 지는 모르겠어요. 나중에 철이 들면 해보려고 할까,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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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진 기약이 없어요. 그리고 아직 내 나이 50도 안 됐으니까 그런 생각

을 안 해봤어요. 마음 속으로 준비하는 생각은 있지요. 만약에 한다하면

내가 잘 가르쳐주고, 청국장을 내가 띄우고 아들이 식당을 하면 저는 행

복하겠죠. 그런데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요. 군대도 안 갔으니까.

김천이 인구가 줄고 있고 손님도 줄고 있다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입니

다. 그 때문에 저는 장사에 큰 기대를 안 하고 순리대로 살아간다는 생

각을 품고 있습니다. 사실상 나이는 자꾸 먹어 가고 아들들은 이제 다 컸

잖아요. 그럼 용돈벌이 정도로만 일을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 정도로

일하면서 나이가 허락하는 때까지 한 번 해 봐야죠.

또 누가 이 일을 배우겠다 찾아오시면 가르쳐드릴 의향도 있어요. 설

령 제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꼭 한 번 해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확실하면

도와드릴 생각도 있어요. 그렇게 해서 그 분이 하는 장사가 잘 되면 그것

도 보람이잖아요. 제가 가진 돈이 많아서 체인점을 팍팍 내줄 수는 없지

만 그냥 기술을 알려주고 사람들이 하겠다 하면 열심히 도와드리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지금 황금시장이 전과 다르게 각성을 하고 변해가려는 과도기에 있습

니다. 예전에는 상인들이 전부 개인주의였는데 지금은 서로 합심하여 공

동의 변화를 모색하시는 것 같아요. 성과가 있다면 앞으로 시장을 찾으

시는 고객들이 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시에도 옛날에는

시장이 네댓 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화 되고 평화시장과 황

금시장 두 곳 밖에 없다시피해요. 중앙시장이란 곳이 아직 있긴 해도 거

의 다 폐업을 했고 그 옛날 그토록 거대한 규모였던 감호시장은 유명무

실해졌잖아요. 평화시장 황금시장 외에는 가봤자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다른 시장 다 사라졌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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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겠어요. 이제부터라도 고객 친화적인 전통시장 문화를 잘 만들어나가

면 고객이 찾아주실 거라고 믿어요. 전보다는 황금시장이 외형적으로 커

진 점은 있어요. 객관적으로 제가 봤을 때도 어느 정도 활성화가 이뤄진

편이에요. 예전에는 노점 중심의 시장이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각각의 점

포가 번듯하게 잘 정비되어 있으니까 희망이 있는 거에요. 다른 시하고

도 자매결연 맺는 것도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지지하는 편입니

다.

고향을 지키며 열심히 장사하고 싶다는 젊은 사장님의 포부는 현실적이

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향을 등지고 살

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밈없는 사장님의 말과 태도에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한 이십 년 뒤에는 김천은 물론 멀리 서울까지 유명세

를 떨치게 될 청국장 식당을 오늘 들렀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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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식육점 (유정애)

혼자서도 잘해요.

당차게 일당백을 해내는 부지런한 푸줏간 여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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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장 중앙 통로 한 켠에 자리 잡은 가게는 손이 많이 가게 생긴 구

조였다. 그럼에도 가게 안에는 달랑 여사장님 한 분만 계신다. 어찌된 일

일까? 일하시던 일손을 거두고 의자를 권하는 얼굴은, 큰 칼 들고 고기

살점을 다루는 전문가의 노련함을 엿보기에는 어딘가 기품이 있고, 한눈

에도 말수가 적어보이는 사장님이시다.

“이 큰 살림을 혼자 하시나요?”

그렇다고 봐야죠.

“보통 식육점 주인장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떠오릅니다.”

저는 혼자 여기서 매장을 지키고, 기사분들이 배달 나가고. 우리 아저

씨는 농장에서 직접 키우고요. 산지에서 받은 물건을 제가 파는 거예요.

살아온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농장은 여기서 가까운가요?”

예. 20분 거리예요. 직지사에 있어요. 한우랑 흑돼지를 판매하는데 호

응이 아주 좋아요. 손님이 꺼먹돼지 고기가 맛있다고 찾아오시고, 또 인

근 지역 식당에서도 많이 찾아주셔요. 반응이 좋아서 다른 데에서 거래

처를 뺏으려 해도 딱 잘라 거절하고 우리 고기가 더 신뢰가 간다고 다시

찾아오시더라고요. 여기서 24년 넘었죠. 처음에는 애로사항이 무척 많

고 고생 역시 많았는데 한우만 팔고 흑돼지만 전문적으로 하니까. 차츰

자리를 잡게 된 모양이에요.

“여기가 연고지가 아닌데 어째서 이곳에서 장사를 결심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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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에서 장사를 했는데 김천이 괜찮을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린

애 둘을 데리고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국경을 넘어왔지요. 한 3년 동안은

고생을 했어요. 내가 양심껏 일하다보니 고기가 좋다는 소문이 퍼져서

고맙게도 일하는 재미는 있었어요. 89년도 시작했는데 2006년이 되니까

손님이 넘치게 많았어요. 지역조합에서도 최고 우수한 한우만 판다고 인

정했지요. 시에서 89년도에 한 번, 99년도에 한 번, 비밀리에 조사를 했

어요. 조사 결과 젖소가 한 마리도 안 들어갔다고 해서 김천시에서 특별

지정을 해줬거든요. 김천시 지정. 그만큼 신용을 얻은 거죠.

장사 초기에는 고전을 숱하게 했어요. 돈 관계도 그렇고. 아무 것도 없

이 시작해 벌어서 이자 갚는 식이니까 처음엔 많이 힘들었죠. 빚으로 시

작했으니 벌어서 이자 갚고 원금 갚고, 그런 생활을 한 15년 동안 했지

요. 이젠 제법 기반이 잡혔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 너무 편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경험을

많이 쌓고 자기가 얻은 경험을 통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은 그만큼의

결과를 대가로 주더라구요.

“장사하기 전에 다른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7년 식당일을 했어요. 26살 때 시작했지요.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

는 뱃속에 가지고 있을 때 장사를 시작했는데 거기서도 빈손으로 시작했

지요. 여기 와서도 빈손으로 시작했고요. 열심히 하면 다 성공할 수 있더

라고요. 요새 젊은 사람들 너무 편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경험을 많이 쌓고 자기가 얻은 경험을 통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은

그만큼의 결과를 대가로 주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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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고생이란 단어와 노력이란 단어가 사무치게 와서 박힙니다.

보은식육점 시작은 어땠나요?”

예. 저처럼 재미없는 사람에게 사무치는 모습이 있는 줄 저도 몰랐네

요. 황금동에 왔을 때 가게 자리를 보러 사방으로 다녔어요. 본능적으로

이 자리다 싶어 이 가게를 계약하고 따로 방 얻을 돈은 없어 살림집을 겸

해 한 7년을 여기서 살았죠. 나중엔 애들도 점점 크고 교육 문제 때문에

살림집은 따로 전세를 얻어 나가 살게 되었지요. 시작할 때는 무조건 싼

데만 바라보고 왔는데 결과적으로 돌아보면 김천에서 성공했어요. 남들

보다 배로 일하고 피눈물 나게 고생을 했어요. 출근부도 없는 내 가게지

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 일찍 안 나오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어

요. 1년 365일인데도 한 서너 번 문 닫을까. 문 닫은 적이 없어요. 문을

닫으면 손님이 찾아오시고, 제가 일이 있어 어딜 가면 전화가 계속 걸려

와요. 대구에서 왔는데, 안동에서 오셨는데, 돌아가는 길에 고기를 사가

려 했는데 문이 닫혔다고 하시죠. 그래서 어지간하면 문 안 닫아요. 식당

에서 고기 사러 오셨다가 가게 문이 닫혀있으면 낭패잖아요. 그걸 알기

에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지요. 아침 6시에 나와서 제가 하는 일은 보시

는 것처럼 중노동이죠. 들어가 잘 때는 11시, 12시 반. 그렇게 노력을 했

어요. 어떤 다짐을 했는 줄 아세요. 내가 우리나라 공무원 2배의 일을 하

겠다. 한 국가를 건설한다는 심정으로 일했지요.

“표현을 재미나게 해주셨습니다. 장사도 종류가 많은데 고깃집을 택하

시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내가 23살 때 농사 지어먹는 집에 시집 왔어요. 얼마 안 있어 갓난아

기가 태어났는데 돈은 한푼도 없어요. 가난한 집인데도 엄청난 빚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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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더라고요. 천석꾼 만석꾼 같은 땅부자도 아니고 밭 한 뙈기 부쳐먹

는 소작농처럼 규모 없는 농사를 지어서 빚을 갚으려니까 빚이 줄겠어

요? 봄이 되면 역시 빚을 지게 되더라고요. 그러니 어떡해? 살 길이 없

잖아요. 들에 나가 일한다고 논두렁에 갓난아기를 눕혔는데 아기 다리

옆으로 뱀이 기어다녀요. 얼마나 기가 차겠어요. 23살에 시집을 와 3년

을 농사 지었는데 한숨만 더 커지고 이놈의 빚은 갚을 길이 없더라고요.

나는 또 누구 돈 떼어먹고 그런 성격이 아니거든요. 당시 우리 아저씨가

총각 무렵부터 돼지를 키웠어요. 주변에서 하는 말이 식육식당을 하면

돈을 번다고 그래요. 나는 나이가 26살 먹은 시골집 아낙 신세가 되었으

니 창피스럽고 불편하잖아요. 나는 그거 안한다고 정색을 했어요. 그랬

는데 우리 아저씨가 나 몰래 대출을 받았어요. 그때 당시 600만원을 은

행 가서 장사를 하려고 얻어온 거죠. 그래서 제가 성이 나서 방바닥에 돈

600만 원을 패대기를 치고 나는 안 한다고 했어요. 저도 성질이 있는 사

람이거든요. 우리 아저씨는 장사만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신신당부를 했

어요. 그래서 저도 마음을 고쳐먹고 부부가 함께 식당을 하게 됐지요. 처

음엔 손님 앞에 상 차려 내가는 것도 부끄러웠어요. 부끄러움 많은 제가

호락호락해 보였는지 밥값을 즉각 계산해주지도 않았어요. 대부분이 외

상으로 음식을 드세요. 면 소재지에서는 전부 외상을 하거든요. 돈 받으

러 다니면 안 갚고 버티는 사람도 많았어요. 한 7년 식당일을 해도 돈이

안 될 뿐더러 보람도 없고 너무나 고생스러운 거에요. 식당에 밥 먹으러

온 군인들이 있길래 보기에 딱해서 일부러 고기를 많이 넣고 찌개를 끓

여줬단 말이에요. 제대했다고 돈 받으러 가면 나는 먹은 적 없다고 밥값

을 안 주는 거에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해서 나중에는 속이 말이 아닌 거

에요. 신통치도 않은 식당하면서 속버릴 바에야 우리 아저씨가 돼지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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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솜씨가 있으니 축산을 규모있게 시작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게 수월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돈을 박박 긁어 돼지 축사를 짓고

언니에게 돈을 꾸어서 돼지 한 마리, 소 한 마리를 사들인 거에요. 돼지

한 마리 사면 돈이 똑 떨어지고 소 한 마리 사면 돈이 똑 떨어지고. 그런

세월이 15년 넘게 흘러온 거예요. 그 세월 덕분에 지금은 규모가 있는

축사를 운영하고 있지요.

힘이 들었지만 돼지를 실하게 키워서 내오고 소를 참하게 키워서 가게

에 내왔지요. 사료 값을 재하고도 돈이 굳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자리를

잡고 이곳이 제 2의 고향이 된 거죠.

“원래 고향은 어디신지요?”

충청도. 나는 괴산이고 우리 아저씨는 보은. 대전서 중매로 만났어요.

우리 아저씨는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막내로 자랐으니 딱히 벌어먹을 수

단도 없고 해서, 제가 시집 오자마자 생각해두었던 장사를 선택한 거죠.

그런데 장사는 너무 고생스러워요.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고 하지만 장

사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몸이 고된 중노동인데 잘 참으십니다.”

힘들어요. 남편이 농장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식육점에서

남자 일을 해야 되요. 요즘 사람들을 데리고 있으면 오래 안 있어요. 그

리고 이 일이 보기에 막일이기 때문에 선뜻 안 하려고 해요. 그러니 일주

일 하다 내빼고 한 달 하다 내빼죠.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제가 소, 돼

지를 부위별로 해체하는 기술을 제대로 배우게 됐어요. 여기 일은 전부

다 저 혼자 합니다. 우리 아저씨는 돼지 밥을 줘야 하니까 거기서 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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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수 없어요.

제가 하는 이 일만 해도 그래요. 이 일은 입을 움직여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죠. 그래서 묵묵히 몸을 써야 해요. 몸을 써서 일하려면 첫째 일찍

일어나야 하고 둘째는 힘든 순간을 매순간 참아야 해요. 근면성실이란

말은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몸을 통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농장 일을 다른 사람한테 맡겨 놓으니까 자기 일이 아니니 대

충대충 일을 소홀히 해요. 축산은 사료를 먹이고 새끼를 받는 일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그럴 바에는 우리 아저씨가 그곳에 붙박여 상주를 하면서

축사 돌보는데 집중을 하고 제가 여기서 판매를 책임지기로 서로 합의를

한 거에요.

우리 아저씨가 가끔은 일 없을 때 나와서 도와줘요. 기사 한 분이 계셔

서 따로 배달을 나가죠. 근데 사람이 너무 자주 바뀌어요. 일을 안 하려

고 해요. 편하고 돈 많이 버는 일만 찾아요. 그런데 세상에 편하고 돈 많

이 버는 일은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열심히 일하고 살아온 사람의 입장

에서 젊은 사람들한테 말해요. 무슨 일이든 꾸준하게 버티고 열심히만

하면 다 성공한다고. 노상 하는 얘기가 그런 말이죠. 그런데도 쉽게 돈

을 벌려고 하죠.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마음은 아닐 거라고 봐

요. 제가 하는 이 일만 해도 그래요. 이 일은 입을 움직여서 해결되는 일

이 아니죠. 그래서 묵묵히 몸을 써야 해요. 몸을 써서 일하려면 첫째 일

찍 일어나야 하고 둘째는 힘든 순간을 매순간 참아야 해요. 근면성실이

란 말은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몸을 통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이 시장 상인분들만 해도 그래요. 다들 부지런하고 성실하세요.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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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터를 잡고 오래 장사를 해오신 거겠죠. 사람은 고난을 극복하고 헤

쳐나가야 해요. 그게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천할

수 있는 힘은 다른 게 없어요.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외에는. 밥을 먹으

려면 일하는 수밖에 없어요.

시장 분들은 엄청 열심히 살아요. 나는 지금 햇수로 32년 접어들어요.

32년 접어들면서 이제 장사를 그만 하고 싶은 생각도 있는데 애들 생각

에 조금 더 해야겠다 싶은 거죠.

“장사를 하시면서 가장 보람 느끼실 때는 언제인가요?”

우리 집 고기를 드신 다음 잊지 않고 먼 타지에서 일부러 찾아오시는

경우죠. 먼 데서 맛있어서 왔다고 하면 제가 조금씩 더 드려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일부러 차 타고 그 먼 데서 오셨다고 말씀하시면 뿌듯

하죠. 저희는 직접 사육을 하기 때문에 단가도 다른 데 비해 저렴한 편이

에요. 저희가 키우기 때문에 값이 저렴한 거지, 고기가 나빠서 저렴한 건

아니에요. 이 말은 제 자존심이에요.

어떤 날은 18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날도 있어요. 쉬는 시간은 대개 6

시간. 많아야 8시간 밖에 못 쉬네요. 어느 누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돈을 못 벌겠어요.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래요. 맡은 일을 열심

히만 하면 성공할 수 있어요. 소홀히 말고 열심히만 하면.

우리 애들한테도 항상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죠. 허튼 모습 보이지 말

고 열심히 해라. 그래서 그런지 두 녀석이 열심히 살아요. 젊은 사람들은

단순한 진리만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어영부영하지 말고 열심히 하면 된다. 그게 성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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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앞뒤 없이 저런 말을 했다면 콧방귀를 뀔

수 있겠으나 유정애 사장님이 저런 말씀을 하셨을 때 마법처럼 귀에 쏙

쏙 박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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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장식 (강준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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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났다. 무엇보다 점포 안이 깨끗하고 상쾌했다. 황금시장 전체

를 통틀어 이만큼 규모가 있고 번듯한 가게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풍수지리적으로 회장이 나올 만한 자리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첫인상은 외로웠다. 지금 여기, 한 인간으로서의

그는 온데간데 없고 혼자 정신없이 시장 골목을 누비는 상인회장이란 직

함만 유독 눈에 띄는 모습이라고 할까.

그는 가장의 역할을 잠시 내려둔 모습이었고 내려놓은 가장의 역할은

사모님이 이어받은 듯 했다.

그에게서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시장 상인으로서의 삶은 잠시 동안

정지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의 목전에는 해결해야 할 궂은 일이 첩첩산중처럼 펼쳐져 있는 듯

했다.

세상은 어딜가나 두 사람 이상이 모인 장소를 거대 정치의 축소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자리에 앉아본 사람은 알고, 감투를 써본 사람도 안다.

입술이 진중한 그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회장직을 맡게 된 뒤 저 자신은 세 가지 물음에서 자유롭지 못했

어요. 첫째는 자유롭게 일하던 강준규 개인의 삶은 어디로 가있는가 하

는 물음이었고, 둘째는 개인의 삶을 잠시나마 내버리고 공동의 이익을

좇아 뛰어다니는, 다수 속의 나 강준규는 왜 항상 외로운 모습인가, 셋째

는 인간 강준규의 줏대는 어디에 맡겨두고 왔는가.”

‘황금알을 낳는 황금시장’은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기 위해 준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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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동안 황금시장 상인회의 전방위적인 노력이 있었다.

문화관광형시장이란 말을 저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우리 황금시장이

전통시장 문화를 회복하고 김천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시장 안에서 지역

민과 함께 나눈다는 취지가 합당할 겁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시장이 과거의 영광만 추억하면서 쇠락해 가고 있는

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 상권을 깨울 수 있다고 판단했지요.

이번 문화관광형시장사업을 따내려고 경상북도 7개 지역의 시장이 함

께 신청서를 냈습니다. 경쟁률이 높은 상황에서 김천 황금시장은 다른

지역 시장보다 규모 면에서 불리하다보니 사업권을 따내는데 말 못 할

고충이 참 많았습니다.

수면에 그린 듯이 앉아 헤엄치는 거위가 참 의젓하고 아름다워보여도

물 속에서는 죽어라 발을 휘젓고 있잖아요. 저는 아무리 마음고생이 있

어도 길에 다닐 때는 항상 웃으려고 노력해요. 속으론 죽겠는데 겉으론

웃는 거, 이거 사실 굉장한 중노동이에요.

문화관광형사업을 따내려고 이만저만 준비를 했어요. 우리 시장이 규

모가 작다보니 순수하게 서류만 제출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여

러모로 다양하게 발품을 팔았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나더러 안 들어도 될 소리 들어가면서 왜 고생하냐는

데, 내가 고개를 숙여서 이 사업을 따낼 수 있다면 백 번 천 번 숙일 수

있단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린 겁니다.

내가 이 정도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고 다녔어요. 시

장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시작은 했지만 이정도로 마음을 다치면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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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자괴감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맡은 일은 해야 하고, 하는 일은 잘 해야지.

발표 날짜는 다가오고, 여러 계통을 거쳐서 수소문해보니 비관적인 결

과는 아닐 것이라는 귀띔을 받았어요. 우리 시장 탈락하는 거 막으려고

용을 썼던 보람이 있었지요.

발표가 끝나니까 예상대로 우리 황금시장이 3등을 했어요. 처음엔 힘

이 빠지는 게 당연하죠. 경북에서는 2개 지역 밖에 못 주는 사업이라고

말합디다. 우리한텐 현실적으로 기회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이때 내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응수 했어요.

“더 잘 됐다. 3등한 등수를 한 계단 더 끌어올려서 우리 김천 황금시

장이 전통시장 활력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느냐. 우리 다 같이

안 된다 소리는 하지 말고 다 같이 노력해보자.”

서울 여의도에서 경상북도는 물론 경상남도까지 백방으로 찾아다니면

서 일을 성공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어요. 그렇지만 지역민으로서 분명

한 한계가 있어요. 당시 경상북도 공무원은 우리 지역이 어렵다고 예상

하고, 마음을 비우자는 뜻으로 한 얘기가 있습니다. 기억해보니 이런 내

용이었어요.

“올해는 우리 김천이 문화관광형시장사업권을 가져오기 어려울 것 같

으니 재수를 해야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딱 말했습니다. “재수할 생각으로 시험 쳐서 붙을

리가 있습니까? 전국에 유명한 시장 중에 이름난 관광지를 끼고 있는 곳

들이 많습니다. 그런 시장은 내버려둬도 저절로 잘 되는 시장 아닙니까?

거긴 알아서 관광도 잘 되는데 문화관광형이란 사업까지 내주면 전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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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 균형 발전이라는 형평성에 안 맞습니다. 부잣집에 돈 줘 봤자 아무

표시도 안 납니다. 가난한 집에 보태주면 고마워 할 줄 알고 그 돈으로

가난을 떨치고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겁니다. 이 사업권을 기반

으로 김천이 전국 5대 시장이었다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야 하지 않습

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발로 뛰어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내가 열심히 뛰

어다녀본들 안에서 문을 안 열어주면 들어갈 수 없는 게 세상의 원칙이

잖아요. 내가 좌절을 조금 했었어요. 그러다 생각을 다시 했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열어줄 기미가 안 보이는 걸 보면 혹시 내가 문 두

드리는 법을 잘 몰라서 그런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어요. 두드려서 열리

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 지역구

의원님에게 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드렸더니 흔쾌히 도움을 주셨

어요. 문 두드리는 법을 잘 아는 의원님이 우리 상인회를 도와서 열리지

않는 문을 함께두드려주셨어요.

문화관광형 시장에 걸맞는 아이디어를 고안하다

우리 지역구 의원께서 묘안을 하나 냈어요. 박정희 대통령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남아있는 황금시장을 콘텐츠로 되살려보자는 아이디어를 내셨

는데, 이 아이디어가 결국엔 문화관광형시장사업과도 자연스레 연계가

되므로 시장 활성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견 합의를 이룰 수 있었죠.

맞는 얘기인지는 고증을 거쳐야 알겠지만 내용이 현실적입니다. 얘기

가 이렇게 시작되요. 당시 아홉 살 박정희 군 친형이 형수랑 황금동 처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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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따라 온 거야. 사람이 북적이는 시장에서 아이스께끼 장수를 만났

대요. 날은 덥고 어린 동생이 안타까워서 없는 돈에 당시 어린 박정희 군

한테 친형이 아이스께끼를 사줬대요. 사긴 샀는데 세 개를 산 것도 아니

고 한 개를 사서 박정희 군한테 줬더니 아홉 살 어린 애가 혼자 다 안 먹

고 형님 한 입, 형수 한 입, 나눠먹었다는 거야.

이건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잖아요. 박정희 대통령께서 9살 때 황금시

장에 와서 아이스께끼를 사 드신 거에요.

그럼 이 작은 얘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께

서 신문에 회고담을 쓰시면서 황금시장의 어린 추억을 기고하셨는데 이

아이스께끼 일화를 직접 쓰신 겁니다. 대통령께도 이 황금시장이 의미가

있었듯이 우리 세대에게도 이 시장이 의미가 있는 곳이고 앞으로의 세대

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지역의 문화사업으로써의 가치가 있

다고 보는 겁니다.

나름대로 이런 의미있는 사연이 녹아있으니 충분히 사업권을 따낼 자

격이 있다고, 당국에 우리 시장의 의견을 전달했어요. 이런 미담 하나가

김천시 전체에 활력을 주고 지역 문화에 분명히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

다. 우리를 믿어달라고 제안을 한 거죠.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죠. 그 덕

택에 못 따낼 거라던 사업권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거참 든든하더만요.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 지역에 있는 국회의원께서 최우선

현안으로 문화관광형시장 유치에 매진을 하신 거니까요.

정치란 사소한 것으로부터 타협의 재료를 끌어내서 서로 다른 톱니의

이를 맞추는 조정 작업이잖아요.

어찌됐든 김천 황금시장이 소규모 시장이라는 약점을 딛고 발전의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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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어요.

근데 선정 됐다고 끝난 게 아니예요. 되고 난 뒤가 더 문제야. 실질적

으로 우리 시장을 둘러보면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시장이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뭘로 채워볼까. 나는 사업권 따서 지원 받는 돈으로 건물 몇 개

짓고 기념비 세우는 짓은 안 하고 싶었어요.

제가 볼 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상인 교육이라고 봤어요. 우리 시장은

분위기가 고지식해요. 장사를 몇 십 년씩 해오신 상인이 대부분이라서

젊은 사람들 상대하기에는 서비스가 부족한 게 사실이거든요.

기계가 하나 있다 칩시다. 하드웨어가 아무리 뛰어난들 하드웨어를 운용

할 소프트웨어가 엉망이면 기계는 무용지물이에요. 상인의 하드웨어는

뭘까요? 질 좋은 물건이죠. 그럼 상인의 소프트웨어는 뭘까요? 고객 응

대, 서비스 정신이란 말이에요. 시장이란 기계가 잘 돌아가려면 이 두 가

지가 확실히 받쳐줘야 한단 말입니다.

제 생각은 꼭 볼 게 많고 유명한 자원이 많아야만 시장이 발전한다고

는 생각 안 해요. 사람 사이에 정감이 있고 질 좋은 물건을 소비자가 원

하는 대로 공급할 수 있으면 좋은 시장이에요.

나는 본래 화려한 볼거리, 최첨단 시설도 중요하지만 상인의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 막 출발한 상태입니다만, 황금시장이 문화관광형 시장의 취지에

맞게 어떤 식으로 사업을 펼쳐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거죠.

황금시장이 황금시대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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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려서부터 이 땅에서 자라서 이곳에서 장사일을 하고 있기 때문

에 되돌아보면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죠.

제가 73년도에 시골 초등학교 졸업 후 중·고등학교는 김천 시내 삼

촌집에서 다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길에 아스팔트 포장이 안 돼 있

었어요. 길가에 자전거방, 소 달구지 고치는 집, 국수집 그런 상가들이

있었어요. 맑은 날. 국수집 앞에 국수를 길게 걸어놨는데 지금 생각해보

면 장관이었어요. 국수가 내 키보다 클 때예요. 그때는 보리쌀도 귀했으

니까. 국수가 제일 중요했지요. 국수가 값이 싸고 삶으면 양이 많거든요.

국수집이 돈 버는 시절이었어요. 그때 또 돈 많이 번 데가 자전거방. 차

가 없잖아요. 자전거 많이 타고 다녔죠. 운송수단은 소 달구지. 황금동에

정미소가 4개 있었어요. 뱅크할인마트 있는 자리에 대영정미소, 그 옆에

황금마트 있는 자리에 황금정미소. 기타등등 합쳐서 정미소 4개가 쭉 있

었어요. 날 밝으면 농사꾼들이 소달구지에 곡식을 싣고 와요. 많이 실어

봤자 아홉 가마. 그걸 다 팔고나면 말이에요. 정미소 옆에 선술집을 닮은

술집이 있었어요. 연탄 화덕에 돼지 비계를 구워서 막걸리 한 잔 먹고 저

녁 노을을 바라보면서 집에 돌아가는 거에요. 그런데 갈 때도 달구지 못

타요. 소 피곤하다고 절대 안 타고 가요. 걸어가야 돼요. 옛날 농사짓는

어른들은 소에 대한 배려가 대단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달구지 끌고 집안 아저씨가 나락 팔러 황금동

오는데 따라 나왔어요. 내가 그날 다리 아파 죽을 뻔 했어요. 그때만 해

도 반바지 입고 검정 고무신 차림이야. 고무신은 다 떨어졌고 길은 비포

장이지. 돌아갈 때는 달구지에 태워줄 줄 알았더니만 끝내 안 태워 주더

라고요. 그런 식으로 해서 나이를 점차 먹어가니까 이곳 시장도 외형이

점점 변하더니 다양한 점포들이 뿌리박은 거에요. 황무지 같던 그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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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비하면 오늘날 황금시장은 뉴욕 타임스퀘어라니까. 그렇지만 아직까

지 멀었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제가 97년도에 왔을 때만 해도 할인마트가 등장하기 전이니 항상 시

장에 사람이 붐볐습니다. 명절 장을 마련할 때는 걸어다니기도 힘들 정

도로 인파가 대단했는데 지금 그런 활기를 다시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하

죠.

냉정하게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점은 문화관광형시장이 2009년도부

터 시행됐는데 실질적으로 성공한 시장이 전국적으로 몇 군데 안 돼요.

그 점에 대해서 제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황금시장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점포를 가지고 있는 건물주와

장사하는 세입자 간에 더러 있는 반목이에요. 장사하는 상인은 본래 내

장사를 한다는 자부심으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세월을 흘러가는 거에

요. 그런데 건물주는 세입자의 장사가 호황이다 싶은 기미가 보이면 당

장 세부터 올리려고 한단 말이죠. 이게 황금시장 전체의 입장에서 봤을

땐 바람직하지 않단 거예요. 상인이 시장에서 편한 마음으로 장사를 해

야 이 지역도 살고 시장도 살아요. 시장이 있어야 건물주도 있는 것 아닙

니까. 시장이 없고 상인이 없는데 누가 건물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건물

주가 세입자의 편의를 생각해야 장사하는 사람이 안심을 하고 자기 장사

에 애착을 갖는단 말이에요. 상인이 생각할 때 자기 입장이 불안하면 당

장에 관두고 짐싼다 소리가 나오는 거에요. 그게 시장 전체의 인식을 나

쁘게 만드는 것이죠. 그 다음은 뭐겠어요? 쇠락의 길만 남은 겁니다. 그

런 파탄을 방지하려고 상인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상인들이 신용카드를 기피하고 현금만 받으려

고 한다는 거에요. 카드 단말기를 꺼놓고 안 써요. 그 얘기는 무슨 뜻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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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요. 젊은 손님은 오지 말란 거잖아요. 그나마 있는 고객을 놓치지 않으

려면 신용카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꼬질꼬질한 가게에서 돈을 왜 쓰느냐, 마트에 비하면 제품 차

이도 하늘과 땅 차인데.”

우리 시장이 이런 평가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제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납니다.

최근에는 시장 내부 정경이 과거에 비해 아주 깨끗해졌습니다. 하드웨

어로써는 그럭저럭 쓸만한 모습을 갖춘 겁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젊

고 새로운 감각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봐야죠.

이제 필요한 건 고객이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올 수 있는 시장 분위기

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틈새를 파고 들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 옛날 낭만이 있

고 향수가 있는 시장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그 향수를 찾으러 멀리서 찾

아올 수 있는 시장. 그렇게만 되면 이 황금시장은 거대자본이 대형마트

군단을 끌고 시장 앞에 쳐들어와서 수많은 가격할인을 펼쳐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제 포부는 간단합니다. 우리 황금시장이 옛 명성을 되찾는 겁니다. 우

리 고객들이 항상 시장에 찾아올 수 있고 상인들도 전보다 더 친절하게

장사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손님이 많이 와서 우리 시장이 장사 잘 되

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닙니까. 편리한 곳에 찾아가서 쇼핑하고 싶은 마

음은 정상적인 인간의 욕구입니다. 상인 스스로 자기가 몇 십 년 해온 방

식이 있다고 해서 찾아온 고객에게 불편을 강요하고 고객을 불쾌하게 만

드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시장이 구태를 벗어나지 못

하면 공멸 말고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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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는 항상 제가 있습니다. 상인회장으로서 중재할 일이 있고 제가

필요한 장소가 있으면 밤이든 낮이든 안 가리고 찾아갈 테니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한솥밥 먹는 식구라고 생각하시고 화합했으면 한다는 말씀

을 상인 여러분에게 당부드립니다.

문화관광형시장사업이 성공하려면 우리 상인들의 의식 변화가 더 중

요하다고 봅니다. 먼저 상인들 스스로 이 시장을 살리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상인들 서로가 돈독한 유대감을 통해서 소통하고

뭉쳐야 됩니다. 우리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유통자본 등살에 못 살

아남습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더 힘듭니다.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자기

입장에서 한발짝 물러나 시장 전체의 입장에서 상인회의 활동을 지지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문화관광형시장사업을 올 8월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무에

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상인들은 이 지역민으로서 굳

건하게 살아온 방식이 있는데 하루 아침에 그게 잘못 됐으니 장사 방식

을 당장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기존의 자기 방식대로 살아왔던 상인들

은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자기가 지킬 것은

꼭 지키고 이 정도는 바꿔도 되겠다는 게 있으면, 자기 삶의 방식을 다수

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변화시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까지 저는 황금시장 상인회장으로서 상인들과 가까운 자리에서 진

심으로 애쓸 것입니다.

우리 시장이 문화관광형 사업을 따낼 수 있었던 과정에는 고마운 분들

이 참 많습니다. 그분들과 더불어 국회의원님, 시장님, 도의원님, 의회의

원님, 지자체 관계자님들, 우리 황금시장 상인 여러분. 감히서면으로나

마감사의 뜻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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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식당 (장재현)

우리의 배고픈 그 시절. 밥 장사할 마음 먹고

사나이 가슴처럼 뜨거운 국물을 끓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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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많은 장사 중에 굳이 밥장사를 선택해서 벌어먹고 사는 이유를

말하라니까 면구스럽습니다. 사실 대단히 거창하거나 대단히 세련된 화

법으로 말하면 좋겠지만 솔직하고 진솔하게 말문을 열어보겠습니다.

20여년 전이었어요. 당시 내 나이가 40대인데,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대로 정년을 맞고 노년이 될 때까지 전

전긍긍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 결단을 내리고 밖으로 나가 새

롭게 할 일을 찾아볼 것인가. 그날로부터 오늘이 시작된 거라고 봐야겠

죠.

나는 원래 김천 토박이입니다. 식당업을 해보라고 권한 건 우리 장인

어른이십니다. 당시 우리 장인이 면장 감투를 쓰고 계셨는데 그 당시 직

장 다닌 사람들이 회식을 하면 전부 어디로 가느냐. 식육식당. 시청 직

원들 동사무소 직원들 전부 식육식당에 갔어요. 테이블 밑에 나무젓가락

이 높이 쌓일 정도로 장사가 잘 됐어요. 그걸 보고 고지식한 우리 장인이

식육식당을 한 번 해 봐라. 그걸 하면 돈을 벌겠더라. 그때는 식육식당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안 좋았어요. 그런데도 우리 장인이 그런 이

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곧바로 예, 그러면 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월급

쟁이 생활을 관두고 과감히 보따리를 싸서 나오자마자 식육식당이란 걸

차렸어요.

옛날에는 먹을 것이 귀했다고 말해본들 뭣 하겠어요. 다 지나간 일이고

밥 투정하고 반찬 투정하는 어린애들한테 음식 귀하게 먹으란 얘길 하면

잘 듣지도 않는 시대잖아요. 지금은 먹을 게 없어서 울지는 않잖아요. 그

런데 뒤돌아보면 예전 시대는 모든 게 부족했지만 사람들이 행복했는데,

요즘은 모든 게 넘쳐서 버리기까지 하는 시대인데도 사람들이 우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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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지. 고기 파는 가게라고 차려놨는데 나를 포함

해서 세상에 파절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야. 흔한 말로 레시피라

고 하잖아요. 그런 거 하나도 없었어요. 고기 굽는 불판만 있으면 다 될

줄 알았나봐요. 참 가소롭죠. 그래도 희한한 건 뭐냐하면 손님이 안 온

게 아니에요. 손님이 제법 왔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구운 고기를

보통 기름장에 찍어먹잖아요. 나는 그 당시 단가 생각은 하지도 않고 국

산 참깨 왕창 사다가 순수 참기름 백 퍼센트를 짠 다음에 손님이 기름장

을 달라는 대로 준 거에요. 그 바람에 소문이 났어요. 고깃집에 고기 맛

있단 소문이 아니라 고깃집에 기름장 맛있더란 입소문이 널리 퍼졌어요.

얼마나 웃겨요. 주객이 전도된 거잖아요. 어쨌거나 기름장 탓에 손님이

많았어요.

고기 같은 경우도 저울 눈금을 정확하게 재야 하는 거잖아요. 혹시나

손님이 고기가 정량에 미달한다 소리할까봐 그랬는지 한 근 정량에 항상

몇 십 그램을 더 얹어 드렸어요. 그게 또 손님을 끄는 효과가 있었어요.

야. 저 집에 가면 다른 집보다 고기를 더 주더라. 비싼 기름장에 넉넉한

고기 인심이 식당을 알리는 데 톡톡한 노릇을 한 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였냐면 내가 장사를 처음 하다보니 사람을 볼 줄 몰

랐고 종업원의 행동이 식당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못 본 거에요. 종업

원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은 거죠. 사람 하나 잘못 뽑으면 세상이

시끄러운 게 선거지만 사람 하나 잘못 뽑으면 식당이 문 닫을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계기가 있어요.

식당에 일하는 사람을 하나 뒀어요. 성실하고 일도 잘하는 것 같아서

믿고 의지했지. 하루는 경찰서 사고 수습반이 회식을 하러 식당에 오셨

어요. 분주하게 접객을 하고 음식을 내갔지. 조금 있으니까 테이블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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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이 터지는 거야. 소고기가 뭐가 이렇게 질기냐고, 도저히 못 씹겠으

니 바꿔달란 거에요. 속으로는 그럴 리가 있나 하면서, 군말 없이 다 바

꿔드렸어요. 그런데 바꿔드렸는데도 고기가 또 말썽인 거에요. 이거 소

고기 맞냐고 물어요. 말썽 있는 고기 아닌가 싶어서 나도 놀랐지요. 그

랬는데 뒤에 밝히고 보니까 어떤 내막이 있었느냐 하면, 데리고 있던 종

업원 두 놈이 내 식당이 장사가 잘 되니까 배가 아팠던 겁니다. 자기들도

준비를 해서 식당을 차릴 생각이었는데 내 식당이 잘 되니까 근처에 자

기 식당 차리면 타격 아니겠어요. 둘이서 짠 계획은 고기로 장난을 치자

는 거였어요. 그래서 구이용으로는 보통 등심을 쓰는데 그 회식 자리에

내간 고기는 뒷다리살이었어요. 뒷다리살은 국거리용이거든요. 그런 걸

내갔으니 당연히 문제가 생기죠. 종업원 두 놈이 에라 식당 문 닫아라 하

고 그런 짓을 서슴치 않은 거에요. 돌아보니까 그 두 놈도 참 미웠지만

내가 더 한심스러운 거에요. 장사는 잘 된다는 데 적자는 점점 불어나고,

이상하잖아요. 고기도 볼 줄 모르면서 식육식당을 차렸다는 게 얼마나

낯 부끄러운 일이에요. 곧이어 그 두 놈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어요.

없어졌는데 어쩌겠어요.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 다짐을 새롭게 했어요.

여기서 관둘 수 없다. 이 식당 차린다고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다.

어떡해서든지 식당을 꾸려가야 우리 가족에게 미래가 있다. 이런 정신으

로 일을 했어요. 종업원도 다른 좋은 분들이랑 같이 하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가 안 무너지고 버티고 이만큼 온 거지. 8년을 식육식당 했어요. 그

렇게 모은 돈으로 지금 이 자리, 이 땅을 산 거야. 그 당시에는 여기에 도

로도 없었고 하수도만 있는 지역이었어요. 이 지역이 도시 정비가 되고

도로가 생기고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면서 건물을 지었지. 이 건물이에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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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 윗층에 입주하고 나서 일층 식당은 세를 줬어요. 그동안 나하

고 동거동락한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돈을 좀 벌도록 내가 도와

야겠다 싶어 16년 동안 세를 준 거죠. 장사를 안 할 적에는 손자들을 더

불어서 키웠죠. 그렇게 같이 식당에 있던 세 사람이 다 돈을 벌어서 5년

전 하나둘씩 자기 가게 차려 다 나가고, 나는 이 가게에 다시 식당을 꾸

린 거에요. 내부를 싹 고쳐서 다시 내 장사를 새로이 시작한 거지. 그러

면서 5년이 지난 거죠.

장사할 때 제일로 어려운 게 뭐냐하면 사람을 잘 쓰는 것입니다. 사람

을 잘 들여야지 일이 잘 되요. 식당일이란 것이 기계로 하는 일이 아니잖

아요.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무조건 사람이 괜찮아야 합니다. 국

물만 진국일 게 아니라 그 국물을 만드는 사람도 진국이어야 식당이 성

업을 해요. 하기야 만드는 사람이 진국이 아닌데 국물이 진국일 리 없겠

지만요. 어쨌거나 지금은 장사가 어렵지 않고 수월해요.

지나간 일이지만 한 10년 동안 시장 상인 회장을 맡아 했었어요. 회한

도 있었고 희노애락도 있었겠지요. 기억에 남는 일은 시장 골목 위에 캐

노피를 덮은 일이에요. 비 올 때 상인들은 물론이고 고객들도 불편했던

점을 개선한데 있어서 나도 한몫 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사람이 매일 놀면 노는 재미가 없어요. 일 년 열심히 일하고 한 이틀

좋은 곳에 관광 가면 그게 일하는 맛이에요. 항상 놀면 그 맛을 느낄 수

가 없어요. 내 돈을 벌어서 손자들 용돈 줄 때도 제일 기분이 좋죠.

식당 일을 하다 보면 여러 유형의 손님들을 보게 되는데 여유있게 유

머로 잘 넘기는 게 중요해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식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위생이고, 해충이 없는 공간이고 파리 없는 식

당은 내 신조라고 보시면 되요. 식당에 파리 한 마리 없는 게 자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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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죠. 그런데 어느 손님이 국에 파리가 빠져 있다고 항의가 들어온 거

에요. 분명히 죄송한 일이에요. 불쾌한 상황은 분명하니까, 내가 그 손님

에게 가서 말씀을 드렸지요. 이건 파리 아닙니까? 정말로 귀한 건데, 우

리 집에서 파리를 보는 건 대통령 접견하는 것만큼 만나기 힘든 일입니

다. 하고 웃으면서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니까 같이 오신 분들도 대폭소

를 하시고, 웃다보니 손님도 누그러지시죠. 나도 위기를 모면하고 웃으

면서 국을 바꿔드렸지요. 그 상황에서는 우리집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한 거에요.

장사를 하려면 유머가 있어야 해요. 손님께서 불쾌한 상황을 유머로

넘길 수 있는 재치가 있어야겠다 싶어서 내 나름 연구를 많이 하고 남의

말도 잘 듣죠. 장사를 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속이 시꺼매져요. 내가

손님에게 도리어 짜증을 낸다거나 화를 내면 안 되요. 더욱 더 청결에 신

경을 쓰도록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잘못이 없어도 고개 숙이는 게 맞는

거에요.

장사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는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 같

이 식당 일을 내 일처럼 할 것, 둘째는 청결하게 하되 맛있는 음식을 조

리한다는 자부심. 셋째는 손님에게 친절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되면 그

장사는 안 망해요. 그리고 항상 화장실이 깨끗해야 한단 거죠. 그 장소가

깨끗하면 손님들이 식당을 신뢰합니다. 그것 말고 다른 게 뭐 더 있겠어

요?

지금은 시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라던가 시장 경기가 확실히 예년만 못

해요. 28년 전에는 불경기 호경기가 따로 없었어요. 사람이 워낙에 많아

서 골목에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했습니다.

지금은 농협이 들어섰지. 아파트가 시 외곽에 들어서 있어서 상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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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으로 흩어졌으니 상권이 집중되지 않고 서로 분산되는 거에요. 그

런 객관적인 상황이 있으니까 시장 사람으로서 애로가 많죠.

28년 전에는 이 시간 되면 골목골목 사람이었어요. 골목에도 항상 노

점상들이 나물 뜯어서 팔곤 했는데 지금은 없잖아요. 노점상이 들어와서

같이 어울려주면 시장에 활기가 도는 장점이 있거든요.

우리 상인회가 발족이 되고 내가 회장 직에 있을 때 양념축제를 시작

했는데 도에서 지원이 시작됐어요. 그 돈을 잘 써서 황금시장이 사람들

에게 기억될 만한 축제 이벤트로 정착시키는 게 앞으로 상인회가 할 몫

이겠지. 내가 보기에 지금까지 잘 해오고 있어요.

처음에 캐노피를 달자고 할 때도 원성이 많았어요. 세들어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약 한 달 장사를 못한다는데 다들 가만 있겠어요? 생계가 달

린 문제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1년 동안 설득을 시켰어요. 건

물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캐노피 공사를 하면 시장이 장사를 한 달

가량 못하는데 세입자 월세를 감해주면 어떻겠냐고. 한 집 한 집, 집집마

다 다니면서 동의서를 받았어요. 그게 안 되면 공사가 안 되니까. 각양각

색의 반응들이 있었어요.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과격한 사람들은 왜 장

사를 못하게 하느냐고 화가 나서는 우리집에 불 지른다고 위협도 하더라

니까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세요. 지금 다들 좋아해요. 이제는 비오고

눈와도 걱정 없어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란 것은 지나고 나야 성과가 보이는 거에요.

캐노피를 달고 난 이후에 황금시장이 정식으로 시장 등록을 할 수 있었

지요.

황금시장이 제일 노력해야 하는 숙제가 뭐냐하면 어떻게 하면 젊은 사

람들 발길을 다시 시장 안으로 돌릴 수 있나. 그게 제일 큰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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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는 지금껏 장사를 해오면서 손님들 덕택에 지역민으로서 자

리를 잡고 큰 손해 없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은혜라면 은혜

를 입은 거에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김천 신협 봉사단 회장으로 있으면

서 한 달에 세 번 장애인 복지관, 또 요양원, 여러 군데 다니면서 봉사활

동을 한 5년째 나가요. 봉사단 회장을 맡고 있고, 황금시장 안에서 음료

봉사를 하죠. 장애인 복지관에는 김천 신협에서 매번 60만원 상당의 식

자재를 지원해요. 그날 만큼은 봉사단 회원 30명이 가서 음식을 조리한

다음 점심식사 대접을 해요. 직지사 요양원도 있어요. 저는 장애인들 행

사 있으면 꼭 가요. 지금은 정기적으로 한 달에 세 번은 나가지요. 삶의

여유가 생겼으니 당연하게 행동으로 연결이 되더라고요.

요즘은 우리 식당에 다문화 가정 가족들, 베트남, 중국에서 시집 온 며

느리들이 많이 와요. 그분들이 오면 더 잘해드리지요. 며칠 전에도 캄보

디아 아가씨가 왔었어요. 부부가 함께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더라고요. 저녁에 노래방이 어딘지 가르쳐달라 해서 내

가 노래방까지 따라 갔어요. 사장님한테 우리 단골 손님인데 요금 조금

만 받고 좀 잘해주세요 하고 부탁도 드렸어요. 그런데 이 부부가 나를 꼭

끌고 들어가서 노래 한 곡 하고 가야 된대요. 내가 노래 한 곡을 즐겁게

불렀어요. 그리고 어제 다른 두 사람이 또 왔더라고요. 가만 보니 두 사

람 다 경계하는 태도였어요. 아마도 먼 타국에 일하러 와서 세상 물정에

어둡고 눈치가 빠르지 못하니까 혹시나 식당에서 바가지를 씌우지나 않

을까 싶어 걱정하는 눈치였다고 할까요. 그런 마음이 이해가 되죠. 그러

니 더더욱 부담없이 마음을 터놓고 그 사람들을 대하려고 노력을 했어

요. 지금은 친해졌지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외국 사람들이 순대랑 선지

를 의외로 잘 먹어요. 중국사람들은 원체 고기를 잘 먹으니까. 돼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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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도 통째로 사가요. 요즘 뉴스를 보니 국가에서 통계를 냈더라고

요. 그 내용은 우리나라 전체 가정을 일곱 가정으로 나눴을 때 한 가정은

다문화가정이래요. 앞으로 저는 이 다문화 가정이 김천 지역민들과 잘

융화되고, 지역 문화에 잘 흡수될 수 있도록 관공서와 더불어 봉사를 이

어갈 생각입니다.

그 외에는 내가 크게 바라는 건 없어요. 우리 황금시장 안에서도 손꼽

히는 깨끗한 식당이란 말을 지역민들에게 듣는 거에요. 돈을 떠나서 그

런 인식이 들도록 노력을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는 80살까지 장사하는

게 목표입니다.

뜨거웠던 삶의 시기가 지나가고 세상을 편히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

게 된 지금 온돌처럼 은근하고 뚝배기처럼 끈질기게 온기를 잃지 않는

한 사람의 여유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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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건어물 (이상덕)

선조의 지혜는 음식을 바람에 말려 상하기 쉬운 것들의 부패를 막았고

우리네 어머니는 세월의 풍화를 이기려고 매일 아침 가게문을 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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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황금시장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어요. 가게라고 부를 수 있는

장삿집들이 몇 채 없었어요. 인기척이 뜸한 골목이었어요. 그때가 1980

년대에요. 그 당시만 해도 김천의 인구가 제법 됐어요. 자연스럽게 골목

에 점점 사람이 모여들고 요즘 말하는 노점처럼 집에서 기른 채소나 곡

식, 과일 같은 걸 지고 이 골목으로 나와앉아서 파는 거에요. 자기 물건

짊어지고 장사 다니는 사람을 행상이라고 하지요. 행상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이라는 장소가 태동한 거지요.

내가 1974년도에 김천으로 시집을 왔거든요. 지금 있는 이 가게가 당

시에는 일반 주택이었어요. 또 이 일대에서 크게 눈에 띄는 건물은 목재

소 뿐이었어요. 당연히 장터도 없었고 5일장만 섰어요. 세월이 지나면서

목재소를 헐고 복합상가를 짓는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이런 시장 거리가

생겨난 거에요.

저는 처음에 장사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생활이 안 되고 돈벌이가

없었기 때문에 먹고 살려고 한 일이었어요. 건어물집을 하게 될 지도 몰

랐죠. 심지어는 도매인한테 물건을 받아서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보니 내가 건어물을 취급하고 있더라고요. 이 건어물을 다루면서 일단은

안심을 했어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많이 보고 접하는 친한 것들이니

까 이 장사를 꾸준히 하면 중간은 하겠다고 믿었죠. 호황도 없겠지만 불

황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심사숙고 한 뒤 자리를 폈더니 건어물이 내 마음에 쏙 들어요. 야채 같

은 건 쉽게 상하니까 관리에 신경써야 하고 재고도 생각을 잘 해야 되죠.

그래서 건어물이 내 적성에 맞았던 거 같아요. 장사의 시작은 되도록 작

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장사라기 보다는 반찬값을 스스로 번다는 생각만

있었죠. 그런데 조금씩 욕심을 내서 일하다보니까 구색이 다양해지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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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가 저절로 자리를 잡더군요.

가만 있자 내가 건어물 장사를 시작한 게 30년 째구나. 본격적으로 장

사꾼의 솜씨를 깨우친 건 한 26년째지. 오래도 했네. 이렇게 오래할 줄

모르고 시작했는데 말이죠.

장사를 오래 해온 관록으로 따지자면 황금시장의 터줏대감이 세 집인데

선산상회, 김천슈퍼, 그리고 경북건어물이다.

내 고향은 본래 상주에요. 중매를 통해 상주 처녀가 낯선 김천으로 시

집을 온 거에요. 젊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부끄럼 많은 아가씨로 통했

는데 누가 나를 장사할 관상으로 봤겠어요. 어쨌거나 이렇게 저렇게 살

기는 열심히 살았어요. 열심히 안 살았으면 이만큼 오래 장사를 이어올

수 없었겠지요.

원래 성격도 그렇지만 저는 그럭저럭 문제 없이 순리대로 해왔어요.

크게 돈 번 적도 없고 눈에 띄는 손해를 입은 적도 물론 없어요. 남들 사

는 것처럼 큰 굴곡 없이 평탄하고 순순히 살아온 거 같아요. 그러다가

2002년도에 큰 난리가 한 번 났었어요. 2002년 8월 30일. 날짜도 잊을

수가 없네요. 태풍 루사가 와서 김천 시내 전체가 떠내려갔어요. 강물이

범람을 해서 이 시장까지 모조리 삼켰어요. 여기 보이죠. 이 가게 높이의

절반까지 물에 잠긴 거야. 물의 힘이 얼마나 센 지 그때 실감했어요. 오

다가 보면 강 위에 철교 있잖아요. 그 철교도 한 개 떠내려 갔어요. 철도

다리가 무너진 거에요. 그 바람에 기차가 한동안 못 다녔어요.

거센 강물이 덮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싹 쓸고 가는데 아, 자연

의 힘이 그만치 겁나는 것인 줄 새삼스럽게 알았어요. 그야말로 수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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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된 거야. 난리가 났었어요. 살림도 못 건졌는데 가게 물건 챙길 요량

이 있겠어요. 다 놔두고 김천 초등학교로 피신을 했어요. 같은 동네 사

람을 그런데서 만나니까 기분이 묘하대. 난리통에 서로서로 안부를 묻

고 먹을 것도 나눠먹고, 상인들은 다 같이 피난을 갔었어요. 밤 12시 넘

으니까 물이 빠지대요. 내 기억으로는 세 시간 물에 잠겼다가 물이 빠졌

을 거에요. 그쯤 되니 남을 사람은 남고 집에 갈 사람은 가고 의견이 나

뉘었어요. 시장에 돌아와 보니까 성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이미 예상은

했지만 가게 물건은 고사하고 가재도구도 다 쓸려가고 그동안 손때 묻은

집안 모습은 하나도 안 남아 있었어요. 건어물 다 내버리고 식기고 가전

제품이고 싹 다 버렸어. 티비에 나오는 수재민들, 이재민들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어요. 말로 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요.

나는 장사를 해오면서 겪었던 고난이나 어려움을 고통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어떤 직종에 있든 간에 힘든 일

을 감내하며 살아가잖아요. 나는 그저 장사 잘 되면 사는 게 재미난 거에

요.

그 이후로는 그만큼 대단한 재해는 입은 적은 없지 싶어요. 나는 장사

를 해오면서 겪었던 고난이나 어려움을 고통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어떤 직종에 있든 간에 힘든 일을 감내하며

살아가잖아요. 나는 그저 장사 잘 되면 사는 게 재미난 거에요. 들여놓은

물건 쭉쭉 잘 빠지고 단골들 자주 찾아오면 신나는 거에요. 몇 십 년 장

사하는 동안 웬만한 일에는 대범해지다보니 크게 신경 쓰이는 것도 없어

요. 건어물은 별로 힘든 게 없어요. 이런 경우는 이렇게, 저런 경우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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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경험적으로 빠삭해요.

일반 회사가 분기별로 계획 세워 일하는 것처럼 나 같은 소규모 장사

도 봄여름가을겨울 계획 세워서 물건을 들이거든요. 사람들이 뭘 몰라서

그러는데 장사 규모가 작을 수록 더 꼼꼼하게 일해야 합니다.

우리 집 같은 경우는 김을 많이 팔아요. 손님들이 김을 잘 잡숫죠. 근

데 요즘은 김 달라는 손님이 뜸한 편이에요. 꾸준히 잘 팔리는 건 멸치

종류. 국물용, 볶음용, 중멸치, 대멸치. 골고루 잘 나가요. 미역도 잘 나

가는 편이죠. 나는 일본 지진 해일 났을 때 원자력 발전소 무너졌으니 바

다가 오염되고 해산물이 피해를 볼 거라는 뉴스를 하도 봐서 걱정을 좀

했는데 역시나 내 예상대로 별 영향 없이 괜찮더라고요. 매출에는 크게

영향이 없어요. 생선은 눈에 띄게 피해를 입는 모양이던데 이 건어물은

안 그래요. 같이 피해가 없어야 하는데, 그래서 사실 마음은 영 안 좋아

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시장 사람은 물건 잘 팔리면 그게 제일 큰 기쁨이

에요. 예전엔 이곳이 굉장했어요. 인파가 무지막지 했다고. 1990년대에

는 이 길을 다니지도 못했어요. 하도 사람이 많으니까 가던 사람이 밀치

고 뒤로 당기고 그랬다니까요. 그 당시 평일이 지금 5일장보다 사람이

더 많았어요. 지금은 재미가 그때 반의 반도 안 되지. 평일 오후 시간 되

면 도시락 반찬 사러 엄마들이 의무적으로 시장에 들렀어요. 90년대에는

이 장사가 아주 잘 됐어요. 학교에서 급식하기 전이니까요. 요즘은 학교

마다 학생 수도 적어지고 그때보다 못하지.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이 시

장 전체적으로 그때보다 못해요.

김이라면 놀랄 만큼 많이 팔았어요. 나도 옛날에 애들 소풍 가기 전 날

새벽에 김밥 많이 쌌어요. 운동회날도 김밥 싸고. 요즘은 그런 게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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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나요. 다 사먹지. 내가 애들 키울 때는 여기 김천 슈퍼 있잖아요. 이 앞

에 엄마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어요. 물건 사려고. 지금은 그때 모습

을 추억이나 하고 있는 거에요.

그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원산지 표시도 없었어. 이거 내가 다했어요.

컴퓨터 배워서, 배우니까 좋더라고. 인터넷 검색해서 내가 궁금한 거 찾

아볼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신기하더라고요. 나는 적어도 컴맹 소리는 안

듣게 된 겁니다. 상인회에서 또 컴퓨터 교육 한다고 하던데 그때 또 들어

야지. 나 역시 내 나름대로 가게를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만있자 컴맹이라고 하니까 기억나는 손님이 계셔요. 추석 대목장이

었는데 평소 오시던 92세 먹은 할머니 고객이 간만에 찾아오셔서 반가

운 마음에 이 얘기 저 얘기 대화를 하다보니 정신이 없었던지 물건을 드

리고는 당연히 내가 계산을 한 줄 알았어요. 내가 계산했는지 안 했는지

도 모르고 그냥 넘어간 거라고 봐야겠죠. 그랬는데 물건 사서 가신 할머

니가 다시 돌아오신 거에요. 92세 먹은 할머니가. 왜 돌아오셨어요? 물

으니까 새댁이 돈을 안 받았지 하면서 돈을 내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나

는 할머니, 저는 잘 모르겠네요, 하니까. 아니야. 돈 안 받았어, 본인이

돈 안 줬다 하시면서 만 원을 주고 가셨어요. 할머니가 젊은 나보다 기억

이 더 영롱했다고요. 그 92세 손님이 제일 기억에 남는 손님이네요.

요즘은 건어물 사러 오시는 분은 주로 나이 드신 분들. 제수품 마련

하려고 주로 찾으세요. 가오리 하고 문어, 말린 명태, 북어, 오징어. 이

런 걸 찾으세요. 김천은 아직도 제사 하는 문화가 살아있어서 평소 오시

는 분들은 꼭 오세요. 김천이 본래 양반도시잖아요. 제사를 철두철미하

게 해요. 나이 드신 분들은 명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오세요. 유교 문화

가 자리 잡고 있는 고장이니까. 집집마다 거의 다 제사 모셔요. 안 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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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집이 없을 거야.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태풍 루사 왔을 때 내가 일순

위로 챙긴 게 뭔지 알아요? 족보를 먼저 챙겼어요. 족보함이 있어요. 그

게 물에 젖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그것만 물에 안

젖고 다른 건 다 젖었지.

건어물 집에서 제일 많이 하는 일이 뭔지 알아요? 파리 잡는 일이야.

올해는 파리가 덜 끓었어. 날이 더워도 너무나 더웠으니까. 날이 습하면

해충이 쉽게 생기지만 너무 더우니까 파리 모기가 없었어. 그것 하나는

무더위 덕을 봤네요.

장사를 혼자 하느냐 둘이 하느냐 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있어요. 다른

집들은 일손이 필요해서 내외가 함께 일하는 곳도 있거든요. 근데 나는

안 그래. 혼자 해도 아무 무리 없었어요. 내가 딸 하나 있는데 이 장사 해

서 시집 보냈어요. 그럼 됐지 뭘 더 바라겠어요.

내 자랑은 이 가게가 오래 됐다는 거 하나 밖에 없어요. 보시다시피 대

단히 특별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잖아요. 올 겨울 설만 지나면 정

확히 40년이네. 오래 됐다는 거, 열심히 살았다는 거, 그거 밖에 없어요.

옛날에 비해서 장사는 더 까다로워졌어요. 손님들이 물건을 고르는 눈

이 높아졌거든요. 예전에는 건어물이 마르고 절어도 별 말씀 없이 다들

사가셨는데 요 사이는 고객의 눈높이가 변해서 냉장고에 있는 신선한 물

건만 찾아. 건어물이라고 해도 요즘은 재고 상품이 없어요. 냉장고가 있

으니 물건을 그때그때 받으니까요.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었잖아요. 그

덕에 물건이 좀 나빠도 팔렸는데 요즘은 아니에요. 그게 옛날하고 다른

점이에요.

나는 장사 오래 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연은 없어요. 맨날 만나는 상

인들이랑 장날마다 조금씩 거둬 모은 돈으로 해마다 한 번씩 관광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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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게 특별한 사연이랄까. 요 근래에는 돈을 조금 더 걷어서 외국으로 진

출 했어요. 이번에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에 다녀 왔어요. 백두산 천지까

지 올라갔는데 비가 와서 천지를 볼 수는 없었어요. 보면 또 더 좋았겠지

만 천지 외에도 북경, 만리장성, 다 잘 보고 잘 놀다 왔어요. 시장 안에서

만 살았던 사람이 세상 구경을 잘했어요. 갔다 오니 상인끼리 더 돈독해

지고 좋아요. 시장 사람들이 다 좋아요. 전부 오래된 사람들이니까. 평균

적으로 20년 이상 장사하신 분들이에요.

지금은 이 집에서 나 혼자 장사하니 느긋하고 편안해요. 처음엔 안 그

랬어요. 시집 와서 보니 어른들 계시고 시동생 시누이 다 있고 이 좁은

집에서 13식구가 같이 살았어요. 이 좁은 집에서 어떻게 열세 명이 모여

살았나 몰라. 지금은 나 혼자 살아도 이렇게 좁은 집인데. 그래서 지금

이 집은 가게로만 쓰고 나는 아파트 이사 나가서 살고 있어요. 그때 당

시는 모여살면서 참 애먹었어요. 지금은 어른들 다 돌아가시고 식구들은

다 각자 살 길 찾아 나갔어요. 또 나이들이 그만큼 흘러왔잖아요. 가만

보니 내가 도사 된 거 같네요.

앞으로 장사하면서 바라는 점은 다른 게 있겠어요. 장사하는 집에 손

님 많이 오는 게 제일 행복한 거에요. 이런 말하면 좀 그렇겠다만, 솔직

히 옛날에는 손님보다 가게 주인이 왕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손님이

왕이잖아요. 이곳 황금시장 상인들도 인식을 좀 바꿨으면 해요. 고객이

바라면 고객의 뜻대로 해주는 게 장사를 오래 성업할 수 있는 길이거든

요. 옛날에는 물건 사서 교환하러 오면 안 바꿔줬어요. 그런데 요즘은 무

조건 백 프로 다 환불 해주고 교환해드려요. 혹시 물건이 마음에 안 든

다던지, 돈 계산이 틀렸다던지, 물건을 빠뜨려 놓고 갔을 때도 다 책임

을 져요. 무조건 상인이 잘못한 걸로 해서 환불해드립니다. 저뿐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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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다른 분들도 다 그렇게 하십니다. 예전에는 언감생심 환불이라는 게

가능했나요. 우리 뿐만 아니고 전국의 시장이 똑같이 다 그런 서비스 정

신이 안 됐죠. 그런데 지금은 전국의 전통시장들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

가 바뀌었잖아요. 살아남아야 하니까. 누구는 전통시장이 이제서야 정신

차린 거라고들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객이 많이 찾아올 수 있도

록 상인들 스스로가 서비스를 개선하려고 노력했으면 하고 황금시장이

밖으로든 안으로든 골고루 발전 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죠. 물론 발전이야 되겠지만 상인들 평균연령이 높은 게 우리 시

장의 단점이라고들 얘기하더라구요. 젊은 사람이 많아야 시장도 활기 있

게 바뀔 텐데 말이죠. 그래도 내가 장사 시작할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

세지감이라니까요. 그 당시 말도 못하게 허름했던 시장 모습에 비하면

지금 이곳은 천당이에요.

사람을 편하게 대하고, 편한 만큼 존중해주는 게 물건 파는 사람의 도리

가 아닌가 싶어요. 내가 물건을 파는 것도 있지만 모르던 사람을 한 사람

사귀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자주 오는 손님도 좋지만 처음 보는 손님을

만나면 더 반가워요. 그래서 내가 오래도록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

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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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방짜유기 (이운형)

어려웠던 시기에 전통을 물려받으며 겪어야 했던

통과의례를 무사히 마치고

지금 다시 전통의 뿌리를 굳게 다지는 의로운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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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에서 유기를 만든 지는 55년 됐어요. 집안 내력으로 밝히자면 할

아버지께서 선조 때부터 일을 하셨으니까 200여년 이어온 셈이죠.

당시 할아버지 생각에는 이 기술을 저에게 전수 시키려고 초등학교 때

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이 계셨던 거 같아요. 할아버지 명에 따라서

어린 저는 일찌감치 공장에 들어가 기술자 분들과 동고동락을 했지요.

전기 보급이 안 됐던 시대였는데 당시 공장은 풀무질을 해서 용광로를

끓이는 가내수공업 형태였어요.

냉정하게 따져보면 55년 꼬박 그 공장에서 채운 건 아니에요. 일단 병

역을 마쳐야 했고, 여러 사정으로 생산이 중단된 시기도 있었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전통적으로 이어져내려온 유기 제작 방식

을 되살리는 것이었어요. 방짜유기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정직한 성

분의 유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요. 어릴 때부터 배워

익혀서 수십 년 터득해 갈고 닦아야 옳은 방짜유기를 만들어 내거든요.

그 기술이 고도의 기술이에요.

과학이 발달해서 금속 성질의 과학적인 증명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합

니다만 유기는 엄밀히 따지면 과학과는 무관한 다른 종류의 가치라고 보

시면 됩니다. 어떤 계산을 통해 재료의 정량을 투입한 다음 기계적으로

정확히 시간과 열을 투입한다고 해서 방짜유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결과입니다.

방짜유기란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방법에 의해 만들어져야 비로

소 유기가 되는 겁니다. 그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하면 유기가 탄생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고도의 기술이라는 것은 선조 때부터 고

수해 내려오던 기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유기를 말하는 겁니다. 화학적

계산으로만 따지게 되면 그 내용상 옳은 유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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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인 즉슨 구리가 한 근, 주석이 넉 냥 닷 돈. 풀이를 하면 주석이

22%, 구리가 78%. 정확한 합금이 돼야 합니다. 요즘은 저울이 좋습니

다. 정확하게 달아서 용광로에 넣으면 끝나는 걸로 생각해요. 재료를 정

확하게 넣으면 합금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가 실험을

해본 결과에 따르면 재료를 정확하게 달아 넣었어도 노하우가 없으면 유

기가 안 되는 겁니다. 그 이유인 즉슨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주석

은 빨리 녹는 습성이 있어요. 예를 들어 금은 이빨로 깨물면 깨문 자국이

표면에 남습니다. 주석도 그래요. 무른 금속이에요. 녹는 점도 구리보다

낮아요. 주석이란 쇠 자체가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금방 녹아버리는 거

에요. 구리는 천천히 녹죠. 용광로에 1500도 이상 불을 지폈을 때 구리

는 늦게 녹는 반면 주석은 빨리 녹아버리죠. 합금량은 정확하게 달아 넣

었지만 구리는 천천히 녹는 동안 주석은 타서 증발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달아넣기는 정확하게 달아 넣었는데 합금이 나올 때는 퍼센티지

가 다른 거에요. 그 퍼센티지를 유지하는 게 고도의 기술입니다. 그래서

합금이라는 게 굉장히 어려워요. 불을 조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의 색

깔과 금속이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봤을 때 적어도 30년 이상 한 사람은

그 정도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역사책에서 보면 주석이 넉 냥 닷 돈, 구

리가 한 돈. 이 비율에서 벗어나게 되면 합금을 했어도 유기라고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방짜유기를 정직하고 정확하게 만들어냈다면 우리 인체에 많은 도움

을 줍니다. 음식물에 독극물이 들어있다거나 음식에 농약성분이 남아 있

는 경우는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체에 나쁜 여러 세균들 역시 방

짜유기에서 100퍼센트 살균이 됩니다. 쇠붙이가 자석을 찾으면 자석 표

면에 쇠붙이가 달라붙는 대신 자석 속으로는 안 들어가잖아요. 그와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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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치입니다. 나쁜 균을 자기 몸에 끌어당겨 붙이는 거죠. 그래서 먹

으면 해로운 음식을 방짜유기에 담았을 때 얼룩이 지는 거죠.

방짜유기의 위기는 50년 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흔히 하는 말로

서양그릇이라고 불렀던 제품들이 쏟아져나옵니다. 스덴그릇, 양은그릇,

법랑그릇, 마구 밀려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 이전에는 방짜유기가 최

고로 많이 팔려나갔거든요. 목기 내지 토기만 쓰다가 스덴그릇 이게 나

오니까 국민들이 애용을 하잖아요. 그 그릇들을 선호하니까 우리 그릇

은 자동적으로 안 팔려요. 안 팔리니까 재정적으로 견딜 수 없죠. 그 당

시 제가 중학교 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해서 공직으로 진출하셨어요. 이제 공장을 운영할 사람이 없는 거죠. 나

는 아직 어리고. 우리 어머님, 우리 할머님이 공장을 처분하자고 서로 합

의를 하셨어요. 그래서 공장은 문을 닫게 됐어요. 나는 철이 없어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죠. 급기야 가세가 기울다 보니, 얼마 안 가 제가 학교를

못 다닐 정도가 됐죠. 그런데 나는 별로 속상하지 않았어요. 내게는 정규

교육과정보다 더 소중한 공부인 방짜유기 기술이 있었으니까요.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데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가, 하루는 공장 가

기 싫어서 공장에 안 나왔어요. 학교가 끝나면 공장에 꼭 와야 하는 거에

요. 그게 불문율이었죠. 그런데 저는 할머니한테 제 심정을 말씀드리고

외가집에 가 있었어요. 나름대로 반항을 한 거죠. 다음 날 할아버지가 직

접 저를 데리러 오셨어요. 그것도 새벽 무렵에 말이죠. 어린 나는 찍소

리 못하고 붙들려 온 거죠. 돌아오니 공장은 분주하게 일을 시작하고 있

더군요. 지금도 새벽에 일하지만 당시에도 새벽에 일을 했어요. 그 새벽

에 나를 데려다 벌을 세우신 거죠. 어른께서 종아리를 걷어라 하시니, 손

자가 종아리를 걷었어요. 싸리나무 회초리가 사정없이 날아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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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심하게 맞았던지, 피가 철철 났어요. 맞은 상처 탓에 3개월 동안

치료를 했어요. 그 정도로 맞고 나니 그 매가 무서워서 공장을 떠날 수가

없는 겁니다. 나가기만 하면 날 죽일 것만 같으니까. 옛날에는 어른의 말

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시대였잖아요. 뒤에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나서

알았죠. 장인의 기술을 배우려면 혹독해야 한다는 것을.

우여곡절 끝에 어느 정도 기술이 늘었다 싶을 즈음 제가 정신을 차리

게 됐습니다. 이제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서 일을 아주 못 하시게 됐

을 무렵입니다. 이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쳤어요. 이 전통은 나 아

니면 안 되는구나. 이 무렵 아버지는 공직으로 진출하셨는데 그런 아버

지마저 30대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 덕분에 어려서 일을 배웠던 제가 남의 공장에서 일을 한 시기도 있

었습니다. 오랫동안 와신상담한 끝에 제가 배웠던 방식의 유기를 복원하

고 다시 김천에 정착해 유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지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그 정도 밖에 안 됐습니다. 그 20여 년간 일을 해오면서 초창기에는

기술자들한테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또 기술자 없이는 혼자 일을 감

당할 수 없으니까. 기술자들과 언쟁도 참 많았어요. 제가 원칙만 지키려

다보니 월급 받기도 힘들고 기술자들은 나를 원망을 하는 거죠. 돈도 벌

면서 전통을 지켜나가야지 전통만 고집을 하느냐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

지입니다. 이 작업을 해서 크게 돈 버는 건 없어요. 전통을 지켜 나가는

게 참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걸 갈수록 느껴요. 하지만 내가 당면한 현실

이 그렇더라도 나는 이 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거나 소신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래 기술자들과 언쟁하고 다투면서 한결 같이 일을 해오니 서

로 신뢰감도 쌓이게 되고 이제는 직원들이 나를 이해하고 우리 공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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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이 해온 전통 기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40년 일

한 사람도 있고 20년 일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고객들이 직접 써본 평가에 따르면 김천유기는 쓰면 쓸수록 좋더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입소문을 통해 김천유기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그 덕분인지 한국예술인총연합회에서 방짜유기에 대한 명

인 이름표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한 물건을 쌓아놓기만 했던 과거에 비해 제품 수요가 비

약적으로 늘어나 이제는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상황으로 역전 됐습

니다. 그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진 않지만 옛날에 비하면 식구끼리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갈등이 많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이 일을 계속 할 것인가. 걷어치울 것인

가. 그렇지만 제가 모질게 배웠던 기억이 절 놔주질 않는 거에요.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 김천 방짜유기가 전통을 못 지켜나가면 우리나라에서

전통방짜유기는 맥이 끊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죽고 나면 네가 이어나

가야 된다. 어릴 땐 제가 받아들이질 못 했죠.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운

명적으로 그 길로 들어선 제 자신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놋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저희들은 항상 새벽에 합금을 해요. 새벽에 해야 쇳물 녹인 색

깔을 볼 수 있거든요. 낮에는 햇빛이 밝아서 색깔을 볼 수가 없어요. 그

래서 합금은 꼭 새벽 내지 밤에 해야 됩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하시던 대

로 하고 있는 거죠.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도 저는 항상 찬물로 샤워를

하고 큰 도가니 앞에서 기도를 드린 다음 불을 지핍니다. 나는 나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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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혼이 이 용광로에 함께 들어가야 질 좋은 쇠가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합금 전 의식을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건 말로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사소한 일이라고 생

각할 지도 모르지만 제가 그런 의식조차 생략하지 않고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죽고 없더라도 우리 전통 기법대로 정확히 전해야 하

는 것은 장인의 의무입니다. 또한 정확한 계승이야말로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지켜나가는 방법인 동시에 전통 방짜유기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

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전통 방짜유기란 불을 다루는 능력에서 좌우됩니다. 불을 보면서 용융

상태의 합금을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각고의

노력과 오랜 기간 담금질 없이는 제대로 알기가 불가능합니다.

제가 어릴 때 6.25를 겪었잖아요.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새벽에는 합금

을 했어요. 사방에 굴러다니던 총알껍데기, 탄피라고 하죠. 그걸 주워모

아 구할 수 없는 구리 대신 용광로에 넣었어요. 그리고 주석도 워낙 귀한

때니까, 길에 떨어진 양은 조각을 주석 대신 사용하곤 했어요. 그러니 그

당시에 만든 옛날 물건은 녹이 스는 거에요. 잡철이 섞였기 때문에.

하지만 저는 그 당시 만든 방짜유기가 녹은 슬었을 지언정 참된 방짜유

기가 아니었나 이렇게 반대로 생각하곤 해요. 그 난리통을 겪고도 기술

자는 기술로 밥을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최선의 방식으로 최선의 재

료를 구해 최선의 기술로 그릇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우

리의 전통이 기술로서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장인 정신을 믿고 계속해

서 이어가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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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DC마트 (윤기수)

가게 문 닫기 전 쓰레기통 비울 때가

제일로 기분 좋다외치는 이색적인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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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마치고 찾아간 김천 황금동 거리는 가을걷이를 시작한 고

향 풍경처럼 여유로웠다. 우리나라에서 연중 두 번 있다는 대목 가운데

한 번을 무사히 치렀음에도, 시장은 골목마다 벌인 갖가지 좌판 속에서

흥정이 있고 덤이 오갔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물건을 사는 사람도, 사람

의 인생이 별 게 있냐는 듯 침착한 모습들이었다.

황금동 네거리에서 남쪽을 바라고 좀 걷다보면 대로변 목 좋은 자리에

윤기수씨 삶의 근거지가 있다. 규모 있는 가게 앞은 깨끗하고, 가게 내부

는 정갈했다.

지금은 김천시 금산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예전엔 ‘거문들’이라고

불리우는 동네서 태어나 조용한 유년을 보낸 윤기수씨는 1990년 4월 군

복무를 마쳤다. 보통의 우리나라 남자라면 누구나 거쳐야하는 별로 특별

할 것 없는 현실인데도, 특별히 그 시기가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운명적

출발점이라고 했다. 그때가 스물세 살. 청년이라면 누구나 생각이 많을

시기다. 마침 그는 유통 쪽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눈 팔지 않고 버티다

보니 오늘의 천직이 되었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에도 종종 손님이 찾아들어 묻고 답하기가 뚝뚝 끊겼다.

그럼에도 그는 성의껏 자신의 속내를 풀어냈다.

“평소 남다른 신조가 있지 않으신가요?”

내 신조는 뭐냐. 큰 개념의 신조와 작은 개념의 신조로 나눌 수 있겠는

데, 일단 큰 개념의 신조는 어떤 일이든 일단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

으면 다 잘 된다는 생각으로 준비합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 뒤에 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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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잘 안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포기합니다. 일을 계속 진행

할까, 말까. 일장일단이 분명해야 손해를 입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은 개

념의 신조는 항상 웃을 거리를 준비해둬라. 흔한 말로 티비는 바보상자

아니오? 티비를 보더라도 그냥 보는 게 아니고 라디오를 듣더라도 그냥

듣는 게 아닙니다. 멍청하게 헤- 입 벌리고 볼 게 아니라 웃을 거리를 공

부한다는 마음으로 보고 듣는 거에요. 웃을 수 있는 일이 많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유쾌해집니다. 숲에서 공기를 마시면 상쾌하듯이 웃음소리

를 들으면 몸에서 좋은 기운이 나와요.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참으로

명언이란 말이지. 인상 찡그리고 고객한테 물건 팔아본들 다음번에도 그

고객이 내 가게에 다시 찾아오겠어요? 고객이 가게에 들어오시면 나는

항상 시선을 먼저 마주칩니다. 그 다음엔 인사를 하죠. 마지막으로 몸을

숙입니다. 왜, 다 어르신들이니까.

“장사하시면서 특히 신경 쓰시는 점은 무엇인가요?”

별 노하우는 없지만 일단 거스름돈을 빨리 내드려야 돼요. 손님은 겨

울바람이라서 안 기다려. 계산 느리면 난리가 나요. 물건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숙지를 해야 되는 건 물론이죠. 그래야 바쁘더라도 금방금방 찾

을 수 있으니까. 또 이런 게 있죠. 빈 박스 같은 거. 제 눈에 안경이란 말

이 있듯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시골 어르신들한테는 귀한 거

거든. 내 말은 아무것도 아닌 것, 남들이 귀찮아 하고 성가시게 생각하는

것, 일하기 하찮고 더러운 잔일들. 그런 것들 속에 고객을 유지하는 비결

이 숨었다. 뭐 그런 거겠지요. 담배도 많이들 태우세요. 그럼 나는 항시

빗자루를 들고 쉴 새 없이 비질을 하는 거야. 부지런하단 말 들으려고 억

지로 할 필요도 없지만, 내 가게 앞이 더러우면 상인의 도리가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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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를 들어서 내 가게에 만취한 손님이 왔다고 생각해봅시다. 최대

한 비위를 맞춰드립니다. 왜, 나도 술 먹고 꼬장 부릴 수 있는 경우가 생

길 수 있기 때문에. 말은 쉽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해야 가능한 건데 모르겠어요. 요즘 말로 이 세상이 불통 세

상 아니오.

“장사 철학이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소학에도 사람이 되려면 일찍 일어나서 마당부터 쓸라고 했어요. 세상

에 관심이 있어야 돼요. 고졸 학력인 나도 알게 모르게 뒷문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살아가면서 마음껏 응용을 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 면에

서 김천 황금시장이 전통시장이다 보니 아쉬운 점이 많지. 아무래도 평

균 연령이 높다보니 한 동네 사람으로서 부딪치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옳든 그르든 간에 젊은 사람은 어른 말에 수긍해야 되잖아요. 가끔은 억

울할 때도 있어요. 내가 이 동네에서 날개를 다 못 펼치고 산다는 느낌도

종종 받아요. 새가 날개를 다 못 펴면 새가 아니라 치킨이거든. 어찌 됐

든 장사꾼으로서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표를 지키려고 노력해요. 사실은

이 시간에 물건 정리를 하고 있어야 돼요. 들어가서 삼십 분 낮잠도 자야

돼요. 그래야 손님을 만나도 웃을 수 있으니까. 저는 매일 아침 7시 30분

에 가게 문을 엽니다. 밤 11시 반에 문을 닫고. 26살에 장사를 시작해서

지금 46살인데. 11월 1일이면 이 동네에서 살게 된 지12주년이에요. 이

기간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했어요. 그러니까 나 자신은 적어도 남들한

테 할 말이 있는 거에요. 내가 같이 장사하는 동료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뭐냐면 황금시장에서 30년 잔뼈가 굵었든, 40년 잔뼈가 굵었든 간에 불

친절하면 안 됩니다. 고객이 물건을 왜 바닥에 두고 파세요? 그렇게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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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있는데 그런 말 들으면 화를 내거든. 아 됐어요. 딴 데 가 보세요.

사실 바닥에 놓인 물건은 파는 물건이 아니라 쓰레기에요. 내가 40년 장

사했다고 해서 지저분하고 불친절한데 고객이 오겠어요. 안 와요. 안 그

래요? 분명히 말이 나온다고. 황금시장에 가면 뭐가 이렇고 저렇더라고.

그 집 하나가 실수한 건데, 전체를 욕해요. 거창한 교육을 배울 게 아니

라 사사로운 작은 것부터 다 같이 실천해야지. 싸가지 있는 장사를 해야

되는 겁니다. 자기 불편을 감수해야 고객이 감동을 받고 시장 전체의 등

급도 따라서 올라가는 거라고 봅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살아온 과정이 보통 고난은 아니었겠단 생각이 듭

니다.”

스물셋에 제대하고 하루도 안 쉬었어요. 결혼 이후에 사글세부터 시작

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남들은 철마다 휴가 가고 때마다 여행 가는데, 우

리 집은 아직 한 번도 가족여행을 못 갔어요. 그 사실이 아내와 아들한테

가장 미안하고 죄스러워요. 앞으로는 그런 기회가 많이 있을 거라고 생

각해요. 그토록 일만 해와서 그런지 몰라도 이 건물을 제가 몇 해 전에

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잘 실감이 잘 안 나요. 이렇게 일에 파묻혀 사

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겠어요. 남들은 사장, 사장 하는데 저

는 사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항상 종업원의 마음으로 일을 합니

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한 가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말은, 나 자

신이 굉장히 노력하며 산다는 거죠.

“장사의 보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게 안에 있는 쓰레기통을 12년 동안 직접 비웠습니다. 남들은 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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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한 일이라고 비하할 수 있지만 나는 쓰레기통 비울 때 제일 기분이 좋

아요. 분리수거 할 때 기분이 더 좋아요. 내가 오늘 장사를 해서 이만큼

을 손님들이 찾아주었구나. 쓰레기를 만지면서 스트레스를 풀어냅니다.

내가 남긴 하루의 허물이며 남모를 속앓이를 훌훌 털어내기엔 이만한 게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욕망에 가득 차 있고 말끔히 비우는 일을 잘 못하

잖아요. 나는 쓰레기통 하나가 꽉찬 걸 보면 가슴이 뿌듯해요. 또 꽉찬

쓰레기통을 싹 다 비울 때는 가슴 속이 후련해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꼭 도 닦는 사람 같네. 허허.

올해로 뱅크DC를 시작한 지 12년. 나의 눈으로 손님을 정직하게 바라보

고 나의 목소리로 손님에게 즐거운 말을 전해주고 손을 바쁘게 움직여

물건을 찾아드리고 서 있는 동안은 다리를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나

의 경영철학입니다. 내게 있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쓰레기통을

비울 때입니다. 오늘 쓰레기통을 비우며, 더불어 분리수거를 하면서 내

가 오늘은 얼마나 장사를 열심히 했는지 가늠해볼 때 일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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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사진관 (김태철)

사진 한 장으로 세상에 나왔다가 사진 한 장 남기고 돌아가는 우리네 인생

카메라 셔터로부터 시작된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순간으로 기록하며 고향을 지키는

여기 한 사람의 사진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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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황금동과 황금시장의 영고성쇠를 함께 해왔다는

대한사진관을 찾았다.

대한사진관은 황금시장 건너편 큰길 가 모퉁이에 아담하고 간소한 모습

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김천에도 사진관이 꽤 많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헌데 지금은 다 사라

지고 김천시 전체를 통틀어 몇 개 안 남은 실정이에요. 저 역시도 이 일

을 계속 하느냐 관두느냐 하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직격

탄을 맞은 업종이라고 할까요. 세상은 갈수록 디지털화 되는데 사진관의

본래 성격이 아날로그적이니까 사람들이 덜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 업

계 전체에 거센 불황이 밀어닥쳤던 것입니다. 사진관 자체가 과거의 뒤

안길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강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제가 그동안 견뎌

온 셈입니다. 도저히 사진관을 유지할 수 없는 시기도 있었어요. 그렇지

만 다른 사진관이 폐업을 선언하고 살 길을 찾아 떠날 때도 저 하나쯤은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기에 세태에 흔들리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사진관 문을 닫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일거리가 예전처럼 풍성하

진 않아도 어느 정도의 수요는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거든요. 아직까

지도 세상에는 가족 사진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남아있고 디지털 카메라

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사진관에는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제가 생각

하기에 이 문제는 오로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처럼 시간

에 쫓겨 바쁘게 사느냐, 아니면 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천천히 여유

롭게 일하느냐. 저는 일이 덜 있더라도 이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다 보면

살 길은 저절로 열릴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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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계속 하느냐, 관두느냐의 갈등에서 바쁘게 사느냐, 느리게 사

느냐로 건너왔으니 제가 그동안 조금 더 성숙해졌다고 봐야겠지요.

왜냐하면 제 자식들도 다 장성해서 둘 다 사회적으로 번듯한 직업군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고 있고 저희 부부 역시 건강하고 가정도 화목하니

이 정도면 됐다,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 싶어 욕심을 내려놓은 겁니다. 심

리적으로 안정을 찾아보니 예전에 비해 돈벌이가 적다 하더라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차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살아날 방

도가 생기더군요.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잊혀져가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

진을 찍어 남기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일을 천직이라

고 생각해서 관둘 수 없습니다.

제가 김천 사람으로서 사진 찍는 이 직업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지

금껏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

는 내가 사진을 통해서 많은 지역민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행복한 시절

을 사진이라는 기록물로 남기는데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

니다.

사진이란 뭘까요? 한 마디로 사진은 역사입니다. 제가 사진을 역사적

인 가치를 지닌 유물로 보는 이유는 그 안에 시대가 담겨있기 때문이고

인간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녹아서죠.

사진사는 다른 말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 이 시대를 지켜보는 사람

입니다. 사진사는 많고 많은 순간 중에서 찰나를 포착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평소에도 말을 적게 하고 조용하게 말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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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말하면 의미가 퇴색하고 내 본성이 아닌 내가 개입해서 내 양심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건 아마도 상인회 부회장직을 하면서 사람

들에게 비춰진 제 특징일 겁니다.

제가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단 한 마디 말을 하라고 권하신다면 저는 이

렇게 말할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난 세월을 살아왔던, 내 고장 김천 황

금동에서, 저는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저는 젊어서 이 일을 배우고 직업으로 삼으며 평생 동안 열심히 이 일

에 매달려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진관 다 문 닫고 나갈 동안에도 저는 굳

건히 버텨서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진의 기술이나 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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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티를 놓고 보면 전국 어느 집과도 비교할 수 있는 경쟁력이 있는 집이

됐어요. 그동안 사진을 통해 얻은 보람도 컸고 사진 덕분에 딸 하나 아들

하나 잘 길렀으니 이만하면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 자부합니다. 금전적으

로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도 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내 집도 있고 내

건물도 있으니 지역사회에서 넉넉하게 자리를 잡은 셈이죠. 지금부터는

제가 받은 이 은혜를 지역사회에 어떻게 환원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이 대량생산 체제로 이행하면서 이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모

든 게 흔해진 시대잖아요. 요즘 들어 생각되는 건 독점적 가치, 유일한

가치가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단 겁니다. 제가 사진을 배워 일을 시작

하던 과거에는 사진이라는 기호 자체가 아주 귀했고 사람들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가 온 세계를 휩쓸면서 하나의

사건이 터지죠. 코닥이라는 세계적인 카메라 필름 기업이 망하고 만 겁

니다. 그 뉴스를 보고 저 역시 충격을 받았어요. 저 스스로가 곧 망한다

고 비관을 했던 적도 있어요. 요즘 말로 하자면 필름 카메라 시대의 아이

폰이었던 코닥이 무너졌으니까. 코닥에서 나오는 필름으로 먹고 살았던

사람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어요. 하지만 보세요. 전자기기로 보

는 E북이란 게 처음 나왔을 때 종이책은 다 망한다고 했지만 지금 망했

나요? 오히려 E북이 주춤하고 종이책이 더욱 각광받고 있어요. 사진과

전자책을 똑같이 비교한다는 건 어느 정도 무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비교를 통해서 제가 한 가지 확산하게 된 것이 있어요. 인간의 아날로그

적인 감수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요. 가족사진 한 장에 대한 그리움

이 있는 한 사진관은 지속됩니다. 더군다나 제가 이 자리에서 영업을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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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하는 한 김천에서 사진관은 끄떡없는 셈이죠.

전통시장에 대한 사람들의 아날로그적인 감수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자란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오듯이 사람들은 누구나 과거의 기

억,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 황금

전통시장이 이 점을 잘 알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거리

를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KTX역사까지 생겨 교통도 편하겠다, 사

통팔달 길도 잘 뚫렸겠다. 황금시장이 살아나는 건 시간 문제일 거라고

봅니다.

이번 년도부터 황금시장이 문화관광형 사업권을 시행하게 됐는데 국

민의 세금을 받아서 시행하는 사업이잖습니까. 시장 상인들이 잘 단합해

서 한 푼도 허투루 쓰이지 않고 옳은 자리에 바르게 쓰이는 사업이 될 수

있도록 다 같이 참여해서 신명나게 시장 선진화를 마련해봅시다.

사진관을 빠져나와 밖에서 뒤돌아보니 대한사진관 모습 자체가 김천시

황금동을 비추고 있는 양심의 거울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장님의 강

단있는 말씀과 태도 때문일까. 꼭 다시 와서 사진 한 장 찍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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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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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국일식당 435-4937

민들레순대국 434-5453

고향떡집 433-7005

미모식품 434-8956

황금과자 432-7426

농우촌식육식당 430-2998

구정식당 432-2039

길곱창 439-1013

황금종합식품 439-2541

경복미용실 430-4463

수진식당 434-0964

바다친구회 431-4489

들마루 433-7211

시골아저씨식육점 439-3800

골목길식당 430-1793

서울노래연습장 432-8245

지례순대 435-2751

중앙건어물 434-0356

금릉떡방앗간 432-6353

영이식당 434-8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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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인견 430-2833

양천수산 434-8495

푸른상회 010-2006-2841

시골식당 430-2347

김천떡방앗간 432-6232

한신이발소 436-2997

형우축산정육백화점 432-2444

대흥떡방앗간 432-3630

보성약국 434-8827

뱅크할인마트 437-2658

태산양곡상회 434-0264

금성농산 016-248-3081

대창쌀상회 434-5959

우돈명가 435-0092

황금알농장직판장 431-9959

황금건어물직매장 434-2940

서민건강원 435-0424

서림장사우나 433-3411

남산이불커텐 434-8063

매목식품 433-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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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삼육식육점 430-4327

한국꽃화원 432-9065

신광세탁소 434-2120

정보광사우나 434-9144

황금분식 432-8806

대구소리사 011-812-9529

재건사 439-3144

대인할인마트 432-3006

밀레니엄마트 434-5303

오복과일 431-1876

대덕청과 010-2526-1743

외갓집양념통닭 432-6053

된서리고급육판매점 432-3123

제일신발 434-5445

형제청과 430-6945

구성떡제유소 435-0976

대성흑염소 433-4855

황금할인마트 431-9295

황금뚝배기 434-3263

대한사진관 434-5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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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축산물 437-6703

상신장의사 432-0614

대구떡집 437-5277

구성과일상회 435-4640

김천닭집 434-9046

하이미헤어 435-4435

속수식육점 436-1015

수천그릇마트 432-6139

양금약국 430-6406

동보반점 435-8687

오복떡집 433-8718

동해반점 434-2501

백광전업사 434-2981

조마생선식품 435-4982

정화식품 434-9046

대구구제 010-5537-4144

성주과일 017-503-9122

황금농약사 432-1303

김천야채상회 437-5455

탑유통 432-0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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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부자과일 434-7728

삼성당 436-7571

선산상회 434-3652

황금시장식육점 432-2662

유일상회 430-4662

연화네수산 430-1491

김천할인마트 433-3366

새마을식품 432-2504

한아름화장품 435-4053

쌍방울식품 439-0912

진흥떡방앗간 433-1153

보은식육점 432-6889

보람이식당 432-8629

예원 430-8599

황토포크식육점 435-1519

민수네반찬 430-3307

풍년떡집 433-4843

대전건어물상회 432-5244

갈무리식당 435-2645

서울농산 433-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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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방짜유기 435-1057

장터꽃화원 010-4634-0598

온양식당 434-3317

황갈비생삽겹돼지갈비431-0304

미봉식당 435-1221

천지식당 432-2388

김천수산 432-5244

중국집 436-6466

금동이갈비촌 434-2113

가야분식434-9144

시장분식 434-4516

한신이불 010-9382-2413

털보식당 434-0172

해성한방오리 432-8823

태영수퍼마켓 432-9275

서울종로떡집 432-8141

신안수입브랜드패션 434-7376

제주숯불갈비 430-1202

김천제일꿀양봉원 432-6720

대신유통그릇백화점 43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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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성 434-5525

어모영식품 433-1134

샤니빵대리점 434-3555

맛찬고을 435-3356

번개통신 433-8830

권샘컴퓨터학원 010-8951-3296

짱구분식 433-3430

미라인피부관리 434-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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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종합건축보일러 431-1104

풍산숯불갈비 436-4831

황금떡방앗간 433-5668

새마을농약종묘사 433-6118

김천에서 두번째 맛있는 집435-6133

파티파티노래연습장 433-8060

챠밍헤어 433-4437

애주가 436-2008

경동나비엔 436-0654

불타는뒷고기 430-5222

삼흥수입소고기전문점 432-4119

김천땅콩 432-0896

정남타올상회 432-8796

선산할매곱창 432-5116

수진상회 433-7470

부산아나고 431-1482

조마식품 434-9223

황금수산 010-3515-7621

황금식품유통 436-5879

현수정식당 434-3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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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칼국수전문점 432-2557

황금장식 433-0442

싱싱회수산 010-9769-2323

경북건어물434-8523

건강더하기 011-829-6378

돼지과일 439-3162

부산아귀찜 436-0880

진안농산 016-505-7437

황금종합과일 434-6344

복돼지숯불식육식당 432-4581

영해회초밥 437-9494

황금반점 431-8788

똘이식품 439-0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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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4년1월20일초판발행

기획 |김천황금시장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단

사업단장김승길I(054)[email protected]

글쓴이 |김지훈

펴낸이 |김동헌

펴낸곳 |도서출판아르코•삼우애드컴

790-834포항시남구효자로70(효자동210-1번지효자웰빙아울렛2층)

(054)[email protected]

사진 |김승길

디자인 |김의동

ISBN | 78-89-93330-40-3(03800)

<비매품>

이 책은 중소기업청, 경상북도, 김천시의 지원을 받아 시장경영진흥원의 주관으로 추진되는

2013년 김천 황금시장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제작 되었습니다.

황금시장,황금인생시장이라쓰고인생이라고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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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이

쓰고

‘인

생’이

라고

는다

황금

시장

금인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시장 사람들의 일상은 특별한 변화가 없습니다. 시장 안 점포

들은 그저 각자의 정해진 규칙을 통해 가게 앞을 쓸고 손님을 맞이한 다음 빈 자리에 물건을

채웁니다. 새벽 일찍 문을 열고 밤늦게 문을 닫는 반복 속에서 달력은 떨어지고 계절이 머물

렀다가 저절로 흘러갑니다. 어제도 같았고 오늘도 똑같은 그 세월을 시장 사람들은 인생이라

고 부릅니다.

전통시장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곳 황금시장에는 여전히

침착하게 자신이 그동안 해온 대로 오늘의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호들갑

스러운 사람들은 시대의 대세를 들먹이면서 전통시장은 곧 사라져 없어질 거라고 떠들곤 합

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똑똑한 말이 넘칩니다. 하지만 그 많은 똑똑한 말들을 존경할 수 없는

이유는 말하는 당사자가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 황금시장에는 대단히 유식한 어른은 없지만 배움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행동으로 도리

를 깨우친 어른들이 계십니다. 세상의 평지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버텨온 상인들입니

다.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지키며 말 없이 자기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의 얼굴에서 한없는 어머니의 모습과 한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세월이 묻거든, 얼굴의 주름살로 답하지 마십시오. 살아간다는 말이 무

슨 뜻이냐고 물어본다면 상인들은 아마도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버팀의 연속이라고. 힘들고 거친 세월을 버티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인생을 돌아볼 수

있노라고.

황금시장 황금인생

황금알을 낳는 황금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