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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간행물등록번호 11-1370152-000033-01 국립민속박물관 학술총서 31 러시아 사할린연해주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2001 국립민속박물관

한인동포의 생활문화가 된 한국의 민중들은 일본과 중국의 동북지방, 그리고 러시아의 원동 땅으로 옮겨 졌으며, 결국에는 동남아시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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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간행물등록번호

    11-1370152-000033-01

    국립민속박물관 학술총서 31

    러시아 사할린․연해주한인동포의 생활문화

    2001

    국 립 민 속 박 물 관

  • 연구책임자 :

    공동연구자 :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인류학)

    강정원 (서울대 인류학과, 인류학)

    김창민 (경기문화재단, 인류학)

    성태규 (영남대학교 박물관, 인류학)

    이덕성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인류학)

    이정재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민속학)

    이 보고서는 국립민속박물관의 2001년도 학술용역사업으로,

    한국문화인류학회가 조사연구한 결과물입니다.

  • 발 간 사 한국의 근현대사의 발전 과정 속에서 한국인들은 한반도의 정치, 경제적 변화에 따

    라 해외 여러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주도 하였습니다. 한

    반도와 인접한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이나 남미가 등장하기 이전에 한국인이 이주한

    대표적인 국가였습니다. 특히 러시아는 한국인들이 20세기 이전에 이미 이민을 시작

    하여 생활터전을 닦은 한국 이주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국가입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한인들은 여타 민족이 겪어 보지 못한 역사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

    들의 고향이라고 여기며 살던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강제이주를 당하

    게 됩니다. 낯선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서 고향을 만들 즈음 또 다른 역사의

    장에 한인들은 놓이게 됩니다. 이들 나라가 소련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을 하면서 새

    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이 새롭게 변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과정에 대

    한 연구가 1999년과 2000년에 실시되었던 것에 비해 2001년, 올해에 이루어진 연구는

    사할린과 연해주의 한인에 대한 연구입니다. 사할린 한인들은 여느 러시아 한인들과

    는 다른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준비를 위해서 탄광을 개발하고 나무를 베어내

    는데 필요한 인력으로 일본인들에 의해서 사할린으로 끌려 간 것이 사할린 한인 역사

    의 출발이 됩니다. 기존 러시아 한인들보다는 이주의 역사가 짧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해주의 한인들의 경우에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한인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현재 연해주에는 중앙아시아와 사할린에서 이주한 한인들과 중국

    에서 장사하러 건너간 조선족, 북한에서 일하러 간 노무자, 남한에서 돈을 벌거나 공

    부를 하기 위해서 건너가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연구는 한국문화의 다른 측면을 보는 것임과 동시에 한국

    인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인들이 사할린이나 연해주라는 지역에서 그

    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전달하게 될 것입니다. 연해주는 한반도가 대륙으로 이어

    지는 지점에 위치하여 한국에 매우 중요하며 사할린 또한 한국의 경제에 소중한 곳입

    니다. 따라서 이 연구는 한국에 소중한 이 지역에 대한 이해를 높여서 상호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교류를 증진시키게 될 것입니다.

    기존의 연구와는 달리 사할린과 연해주라는, 서로 거리가 멀리 떨어진 지역에 대한

  • 학술조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려운 여건 중에서도 조사에

    응해주신 한국문화인류학회에 감사 드립니다. 특히 상대적으로 힘이 많이 들었을 현

    지조사를 하시고 이를 기반으로 원고집필까지 하신 조사단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치하를 드립니다. 아울러 이번 조사에 기꺼이 응해 주시고 귀한 자료를 선뜻 내어주

    신 사할린, 연해주 한인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1년 12월

    국립민속박물관장

  • 서 문 자본주의는 초기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흔들어 무수한 농민들이 고향을 떠

    나게 하였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사람의 흐름이 국경을 넘게되어 각

    제국의 판도 내에서 인력의 재배치가 강행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혹독한 희생자

    가 된 한국의 민중들은 일본과 중국의 동북지방, 그리고 러시아의 원동 땅으로 옮겨

    졌으며, 결국에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까지 이식되었습니다. 지난 백년 세월에 아

    시아 대륙 곳곳에 한국인들이 흘러간 사연에는 한 세기 역사의 무게가 실려있는 것입

    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이역 땅에 옮겨진 한민족과 그들이 이룩한 문화의 모습을 이

    해하기 위한 조사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한국문화인류학회는 5년 전부터 국립민속박

    물관의 위촉으로 ‘재외동포 생활문화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왔습니다. 재외 한인동포

    들의 문화는 민족의 삶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화이므로 이에 대한 이해 없

    이 한국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996년부터 3년간 중국의

    '조선족'의 생활문화를 조사한 바 있는 본 학회는 1999년부터 구 소련권 '고려인'의

    사회, 문화를 조사하기 시작하여, 첫해에 우즈벡스탄, 다음해에 카자흐스탄을 조사하

    여 그 내용을 책들로 발간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선 2001년에는 현재 러시아 땅인 사할린과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조사

    하였습니다. 간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연해주는 조선시대 말기에 이미 우리 유이민(流

    移民)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일제 하에 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어 식민지 조선

    인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며 동시에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의 출발지가 된 곳입니

    다. 그러나 사할린은 일제 말기에야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원래 러시아의 짜르 체제

    아래 유형지였던 이 섬은 일제 전시체제 하에 징용되었던 식민지 백성들에게도 일종

    의 유형지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대구에서 열리고 있는 어느 젊은 사진작가의

    전시 제목이 마침 “슬픈 섬 사할린”입니다. 해외 동포의 문화에 관한 연구는 다국가적

    연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연해주의 경우는 한국 문화와 러시아 문화에 대한 동시적

    이해가 바탕이 되며, 사할린의 경우는 여기에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아무리 공시적 연구를 표방하더라도 깊은 시간적 심도를 떠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역사적 연구가 불가피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국 인류학은 특수한 하

    나의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조사에서 결코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훌륭하고 바람직한

    조사를 위한 여러 가지 조건 중에 충족되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를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조사를 감행한 것은 오로지 그 조사의 필요 때문입니다. 어

    려운 조건 속에서도 조사를 맡아주신 여러분께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구 소련 영역 내의 고려인들에 대해 넓은 이해를 구비한 서울대학교의 전경수 선생

    은 우즈벡스탄과 카자흐스탄 조사에 이어 이번 조사에서도 연구책임자로서 나서주셨

  • 습니다. 경북대학교의 이덕성 선생은 충분한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이번 조사를 깊이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영남대학교의 성태규 선생은 한국 민속에 대한 식견으로써 조

    사결과가 생동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베리아의 샤마니즘을 공부하던 경희대학교

    이정재 선생은 주로 신앙생활을 조사하였지만 언어와 식생활까지 조사해 주셨습니다.

    경기도문화재단의 김창민 선생은 한국 현대 문화에 대한 그의 연구 결과들을 사할린

    한인 사회에 적용하여 이 조사 작업이 한반도 사회 연구에서 겉돌지 않게 하여 주셨

    습니다. 원래 야쿠트 문화에서 출발하여 시베리아의 소수민족 문화를 연구하던 서울

    대학교의 강정원 선생은 사할린과 연해주를 넘나들며 대륙과 섬으로 갈라져있는 한민

    족의 문화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으려 애써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조사단은 이 보고서를 펴낼 수 있게 되

    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보고서가 그 조사 대상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주리라고 기

    대하지 않습니다. 바라는 바는 이 보고서가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디딤돌이 되는 것

    입니다.

    2001년 12월

    한국문화인류학회장 박 현 수

  • 목 차

    □ 발간사

    □ 서문

    1부: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제 1 장 총론: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17

    제 2 장 한인동포 사회의 이주역사와 정착배경 ····················································39

    제 3 장 지역사회의 조직과 구조 ··············································································81

    제 4 장 의생활 ··············································································································97

    제 5 장 식생활 ············································································································113

    제 6 장 주생활 ············································································································131

    제 7 장 신앙 및 의례생활 ························································································147

    제 8 장 언어생활 ········································································································177

    제 9 장 가족과 친족생활 ··························································································195

    제10장 직업과 경제생활 ·························································································215

    제11장 농기구와 생활용구 ·····················································································257

    제12장 세시와 놀이 ·································································································283

    2부: 연해주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제 1 장 총론: 연해주의 한인들 ··············································································317

    제 2 장 한인 동포사회의 이주역사와 정착배경 ··················································325

    제 3 장 마을사회와 구조 ··························································································333

    제 4 장 의생활 ············································································································339

    제 5 장 식생활 ············································································································345

    제 6 장 주생활 ············································································································351

    제 7 장 신앙 및 의례생활 ························································································357

    제 8 장 언어생활 ········································································································373

    제 9 장 가족과 친족생활 ··························································································385

    제10장 직업과 경제생활 ·························································································397

    제11장 농기구와 생활용구 ·····················································································409

    제12장 세시와 놀이 ·································································································415

  • 블라디미로프까의 개인집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아파트

  • 가정집에 걸려있는 옷, 겨울용 슈바와 쁠라치예가 보인다.

    결혼식

  • 머위(나물재료)

    성묘 진설음식 세르게이 부엌(아파트)

  • 박한영의 주택

    다차.오른쪽에 다차에서 거주하는 작은집

    이 보인다

    텃밭

  • 돌잡이

    러시아 엑스트라센스의 카드점 한인회 사무실

  • 유즈노사할린스크의 공동 묘지

    송원철씨댁 장미온실 얀따리시장 내부

  • 1부: 사할린편

  • 제 1 장 총론 :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전 경 수 (서울대 인류학과, 인류학)

    보고서 작성의 辯: 총론에 들어가기 전에 / 18

    1. 서 / 20

    2. 사할린의 割據略史 / 21

    3. 원주민의 보금자리에서 제국주의의 각축장으로 / 23

    4. 고래싸움에 등터진 새우의 운명 / 26

    5. 러일전쟁과 사할린의 남북 분단 / 28

    6. 남사할린의 樺太廳 시대 / 30

    7. 러시아화 과정 속의 多種族性 / 33

    8. 결어 / 36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18

    제 1 장 총론: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보고서 작성의 辯: 총론에 들어가기 전에

    금년도 재외한인동포사회 조사연구는 사할린과 연해주로 한정되어 있다. 두 지역의

    한인 동포사회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상호 연결성이 거의 없고, 판이한 형성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자료수집의 출발시기부터 상당한 애로점이

    예상되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의해서 예상 가능한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는 국립민

    속박물관의 담당자에게 여러 차례 충분하게 하소연에 가까운 설명을 하였고, 한국문

    화인류학회의 책임자들에게도 구두로 설명을 하였다. 전혀 다른 두 지역에 대해서 예

    년과 동일한 규모의 예산과 일정으로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은 앞으로 나타날 자료집

    의 부실가능성이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한정된 예산과 경직된 관리방식으로

    인해서 우리의 호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기계적으로 주어진 시간 내에 주어

    진 경비로 작업을 마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의 용역연구라는 것이 기본으로 하고 있는 성격이 일차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련된 다른 연구서들을 참고하여 보고

    서를 작성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기본 인식이 있다. 가능한 한 직접 수

    집한 일차자료들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하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관련 연구서들을 참고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었다. 제한된 경비로 계약된 임무를 완

    성하기 위해서는 구성된 조사단 전원이 모든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지 못한 경우도 발

    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사할린과 연해주를 대등한 수준에서 대할 경우에 어느 한 곳도 제대

    로 된 민속지를 작성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둘 중의 한 곳에 역점을

    두기로 하였다. 여러 가지의 문헌들과 여러 경로로 문의를 한 끝에 우리는 사할린에

    역점을 두고, 시간과 연구비를 배정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연해주 쪽의 사회적 상

    황이 대단히 불안하고, 한인들의 인구집단 자체가 상당히 유동적이라는 점에 근거하

    게 되었다. 사할린에 역점을 두자고 결정한 또 다른 이유는 연해주의 경우, 한인 인구

    집단들이 주로 최근에 중부아시아 쪽에서 재이주해온 경우가 많다는 점으로 인하여

    안정적으로 자료의 수집이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는 점과 사할린의 한인들이 구비하고

    있는 성격자체가 대륙의 한인들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 주로 작용하였다.

    우리 팀의 어느 누구도 과거에 사할린에 대한 사전 답사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일종의 길잡이로서 김종훈 씨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그는 사할린에 상당한 수의 친

    척들이 거주하고 있고, 그곳에서 일년 반 동안 학교를 다닌 경력이 있고, 모스크바 대

    학에 수학한 사람이었고, 내가 수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물론 김종훈 씨에

    게는 사전에 우즈벡스탄 보고서와 까자흐스탄 보고서를 보여주고 우리의 사할린 방문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19

    목적을 여러 차례 설명하는 기회를 필자의 연구실에서 가진 바 있다.

    2001년 7월 19일 강정원(서울대 인류학과), 김창민(경기문화재단), 성태규(영남대 박

    물관), 이덕성(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이정재(경희대 국문학과), 전경수(서울대 인류학

    과)는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아시아나 편을 타고 러시아국 사할린주의 주도 유즈노사

    할린스크에 당도하였다. 오전 10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약 3시간을 비행하여 목적지에

    당도하였고, 당지의 시각은 오후 5시였다. 서울과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시간차가 2시간

    이다. 공항에는 야마시타 마코토 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2년 전 우즈벡스

    탄의 자료수집 때, 나의 조수 역할을 하였고,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는 한 부분을 나와

    공동 집필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 말을 잘 하며, 현재는 따쉬껜뜨에서 우즈벡

    어를 공부하면서 그곳의 고려인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북해도 대학의 박사

    과정 학생이다.

    공항에는 김종훈 씨의 친척들이 차량을 가지고 나왔고, 우리는 블라디미로프카의

    김종훈 씨 친척집에 짐을 맡기게 되었다. 숙소를 구하는 문제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

    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교회의 목사님 한 분의 노력을 어렵

    사리 빈집을 구하였고, 아침마다 당번을 정하여 식사를 준비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점

    심과 저녁을 주로 제보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되었으며, 아침은 모두 모여서 흘례

    브와 깔바싸를 먹으면서 각자의 진행과정을 보고하고 협의를 시간으로 활용하였다.

    조사단의 일부는 아니와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연해주로 특파된 특공대원 강정원,

    성태규(대장), 이정재는 7월 29일에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출발하여 러시아 비행기를 타

    고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블라디보스톡 시내에서 이 특공대가

    그곳의 경찰에게 사기를 당하였다는 전화통보를 받은 유즈노에 남은 우리들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연해주 팀은 8월 3일 블라디보스특에서 인천으로 귀항하였다.

    유즈노에 남은 셋은 하루의 일정으로 꼬르사꼬브를 방문하였고, 2박 3일 일정으로

    뽀로나이스크를 방문하였다. 뽀로나이스크에서는 일본 인류학자 나카오 카즈미(中生勝

    美) 씨와 함께 그곳의 노인회장 김진명 씨 댁에서 묶었다. 그와 함께 사할린의 원주민

    인 닙히와 울타 사람들도 만나는 기회를 가졌고, 뽀로나이스크의 박물관도 함께 견학

    하였다.

    사할린에서는 가장 좋은 제보자들 군을 구성할 수 있는 연령층인 노령인구의 상당

    수가 한국으로 귀국한 상황이었고, 그들의 재방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경기도의 안산

    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일제시대 강제모집과 징용의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안산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자료의 수집이 기대

    되기도 한다.

    사할린에서 계속 있었던 세 사람은 8월 2일 아시아나 편으로 귀국하였다. 블라디보

    스톡으로 특파된 세분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귀국하였고, 보고서가 작성되는

    과정 내내 연해주 쪽의 문제들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어렵사리 마련해준 연구비는 주어진 여건 내에서 최선을 다하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20

    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 사용되었다. 강정원 선생이 전체 조사단의 총무

    일을 맡아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1. 서

    징용과 계약노동의 이름으로 사할린 땅에 등장했던 조선인과 그들의 후예들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연구용역을 받

    은 한국문화인류학회의 요청에 의해서 연구진이 구성되었고, 연구진들은 함께 사할린

    을 방문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일종의 용역보고서임을 밝히며,

    용역에 따르는 표현상의 차이점 등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보고서의 작성을 위한 자료의 수집기간은 2001년 7월 19일부터 2001년 8월 2일 사

    이이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주로 시간을 보낸 곳은 러시아연방공화국 사할린주

    의 州都인 유즈노사할린스크이며, 유즈노사할린스크 이외에 지방도시로는 꼬르사꼬프

    와 뽀로나이스크 등지에서도 짧은 기간 동안에 자료수집이 이루어졌다. 면접과 참여

    관찰이 주로 행해졌고, 대상자들은 주로 조선인들이었다. 약간의 러시아인들과 일본인

    그리고 사할린의 원주민 후예들인 닙히와 울타 사람들과도 면접이 시행되었다.

    이 분야의 다른 연구자들과도 면담이 진행되었다. 사할린 태생이며 사할린에서 평

    생을 살아왔고, 그곳에서 공무원과 공산당원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역사학자로서 사할

    린의 조선인들에 관한 저술을 출판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꾸진 씨와의 집중적인 면접

    이 있었다. 일본인 연구자로서는 和光大學의 인류학 교수 나카오 카즈미(中生勝美) 씨

    가 자신의 연구 차 사할린을 방문한 기간이 우리들의 방문기간과 동일하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적지 않은 도움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뽀로나이스크에는 함께 방문하기

    도 하였다. 러시아 측의 자료들을 기반으로 하여 사할린의 조선인에 대해서 최초로

    단행본을 발행한 꾸진 씨와 나카오 씨의 조언과 의견은 나의 보고서 작성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7월 31일 뽀로나이스크 민속역사박물관 관장(싼기 스베틀라나 봐실리

    예브나, 47세)과 면담이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이 부분에 관한 자료의 수

    집과 저술을 발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할린의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

    이 가능하다. 본고에서 견지하고 있는 입장은 러시아 측도 아니고 일본 측도 아니고

    더군다나 한국 측도 아니다. 사할린에 살아온 주인공들의 입장에서 간략하게 사건들

    을 중심으로 하여 사할린의 변천과정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원주민들의 터전으로부터

    제국주의자들의 등장과 그들의 각축장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할린의 원주민들이

    경험하였던 문제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하고 싶은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따라서 본 장의 전반부는 ‘원주민의 보금자리에서 제국주의의 각축장으로’라는 소제

    목으로 정리를 하고, 후반부는 20세기에 진행되었던 소련과 일본 사이의 제국주의적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21

    전쟁 과정과 그 과정에서 등장하게된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정리하려고 한다.

    원주민들도 소수민족이 되었고, 후일 노동자들 끌려왔던 조선인들도 이제는 소수민족

    으로 되어가고 있다. 사할린에서 구성되어 버린 제국주의적인 판도가 소수민족을 요

    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2. 사할린의 割據略史

    사할린島과 모네론島(海馬島), 츄레니島(海豹島), 쿠릴列島로 구성된 러시아 유일의

    섬으로 구성된 주가 사할린주다. 이 주의 총 면적은 8만7천1백 평방 킬로미터이고, 사

    할린의 면적은 7만8천 평방 킬로미터다. 사할린 섬은 북위 46도에서 54도에 이르는

    길이 약 1천 킬로미터이고, 동해안과 서해안 사이의 최대 폭은 160킬로미터, 최소 폭

    이 있는 곳은 26킬로미터이다. 섬은 대륙과 7.5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는 네베리스코

    이 해협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서와 서남으로부터는 따뜻한 東海가, 북과 동으로부

    터는 한류가 지배적인 오호츠크해가 사할린을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사할린과 태평양의 영향을 받는 쿠릴열도의 근해는 세계적인 어장으로 손꼽히

    고 있다.

    사할린 섬은 남부와 북부가 산맥으로 나뉘어 있으며, 남부 쪽으로 치우친 산맥으로

    인하여 남쪽은 비교적 산이 많은 편이고, 北사할린 평야는 저지대로서 대부분의 저지

    는 습원화되어 있다(뷔소코프 外 1995: 22). 사할린의 식민화 경험이 있는 일본은 자

    신들의 기준으로 사할린의 지형을 분류하고 있다. “東部山地帶(東北山脈, 鈴谷山脈, 中

    知床半島, 富內低地), 中央低地帶(幌內低地, 鈴谷低地), 西部山地帶”(樺太廳 1936: 56)

    등이다. 즉 일본은 자신들의 점령기간이 길었던 “중앙저지대”를 지형분류에서 강조하

    고 있다. 사실상 북사할린 평야에 비하면 “중앙저지대”는 아주 좁은 곳이다.

    사할린에는 1만6천 개 정도의 호수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네프스코에湖

    (일본명은 多來加湖), 도우나이챠湖(富內湖), 아인스코에湖(來知志湖), 뷔아뷔아이스코

    에湖(和愛湖), 뻬샤노에湖(東沸湖)가 있다. 사할린 남부와 남부 쿠릴 전체는 타이가 지

    대이다. 사할린의 북부는 넓은 툰드라지대로 덮혀 있다(뷔소코프 外 1995: 23).

    고고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한 사할린의 선주민은 대륙의 아무르강 지역으로부터 이

    주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닙히의 조상들이다. 그들은 5천년 내지 6천년 이전에 대륙으

    로부터 사할린 섬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이 다시 소빙하기(3500년

    에서 4000년 전) 시대에 섬의 남부로 이주했고, 여기서 이들은 아이누의 선조들을 만

    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네프스코에湖 부근에서 고고학자들은 아무르강 유역에서 전해

    진 토기와 유사한 점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석기 중에는 黑曜石 박편들이 있었

    다. 토기는 내려오고, 석기는 올라간 흔적을 말한다. ‘흑요석의 길’이 사할린 섬에도 유

    지되고 있다(뷔소코프 外 1995: 32-33).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22

    9세기의 아무르강 하류유역에는 발해에 종속된 쿠슈의 제종족이 살았다. 그 중에는

    쿠-이(아이누, 骨嵬), 기리미(닙히, 吉烈迷) 등이 포함되어 있고, 이들이 살던 곳의 발

    해식 지명은 鐵利部(테리)와 鄚頡部(모제)였다(뷔소코프 外 1995: 59). 즉 일본열도의

    북부와 북해도를 주무대로 거주하던 아이누들은 북상을 하였고, 대륙의 아무르강 유

    역에 거주하던 닙히는 사할린 섬으로 남진하였던 고고학적 증거들이 출토되고 있다.

    즉 대륙과 도서의 교류 상황을 연출했던 주인공들은 북으로부터 닙히와 남으로부터

    아이누였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이 곳의 최초 원주민들은 닙히와 아이누였다

    는 결론이 가능하다. 출토된 토기들이 선주민들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경향은 뽀로

    나이스크의 박물관에서도 잘 확인되고 있다.

    1263년 몽골 군이 아무르 하류에 나타나서 닙히와 여러 종족을 지배하였다는 중국

    측의 기록이 있다. 사할린 아이누의 대다수 종족이 몽골에 대해서 완강하게 저항하자,

    1286년 강력한 무장부대 1만 명의 병사가 사할린에 상륙하여 주둔부대를 편성하였다.

    몽골 군대가 각소에 주둔하여 1308년에는 족장들로 하여금 강제로 공물을 상납하게

    하였다. 몽골 당국의 중심지는 아무르 대하구의 연안에서 1백 킬로미터 상류에 축조

    한 東征元帥府였다. 여기까지 몽골의 관리가 배속되었고, 이 지역의 제민족들을 ‘슈이

    다-다’(극동의 하천에 사는 사람들)라고 불렀다. 1368년 元의 멸망으로 몽골군대는 사

    할린으로부터 철수하였다. 明은 1409년 뉴루간(奴兒干, 누루간) 都司를 설립하여 아무

    르 하류역과 사할린의 제종족을 세력 하에 편입시키고 중국인은 과거 몽골의 초소를

    재건하여 요새와 마을을 건설하였다(뷔소코프 外 1995: 60).

    북해도 남부에 최초에 등장한 일본인은 13세기였고, 15세기 초에는 그 마을의 숫자

    가 12개소로 증가되었다. 그 압력을 아이누(에비수, 蝦夷)들이 느끼게 되었고, 이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 1457년 코샤마인 봉기이다. 북해도에서는 그 후 몇 차례

    (1515, 1529, 1536년) 일본인에 저항하는 아이누의 전쟁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

    해도의 아이누들은 사할린과 쿠릴열도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그 흐름은 18세기말까

    지 지속되었다. 16세기말부터 17세기 초에 사할린과 남 쿠릴에는 독립적인 아이누의

    제종족들이 생활하였고, 그들은 일본과 중국의 상인과 교역을 행하면서 극동의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았다(뷔소코프 外 1995: 61-62).

    16세기말에 대륙으로부터 사할린에 에벵키(퉁그스)와 오록크(울타)가 도달하였다. 그

    들은 순록을 사육하는 유목민족이었으며, 사할린에 정착한 이들은 어로와 해수렵을 주

    업으로 하였고, 가벼운 유르타(중앙아시아식의 천막)를 가지고 다녔다(뷔소코프 外

    1995: 56). 대륙의 유목민족들이 사할린으로 건너온 것은 시기상으로 몽골제국이 멸망한

    이후라는 점을 고찰할 때, 대륙의 정변에 의한 주변의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고 해석할 수 있다. 대륙의 정치적 변화는 사할린의 섬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고, 사할린

    을 구성하는 원주민들 중에는 대륙으로부터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도 생긴 것이다.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23

    3. 원주민의 보금자리에서 제국주의의 각축장으로

    1580년 코삭크의 추장 예르막(Yermark)이 2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우랄을 넘었다.

    코삭크(Cossaak)는 따따르어의 까자크(Kazak)를 말하며, 그 단어의 의미는 戰士이다.

    이들은 屯田兵(military farming organization)을 조직의 기본으로 삼았다. 따따르와 쿠

    슘칸(Kutshum Khan, 수도가 Sibir)을 차례로 점령한 예르막은 점령지를 러시아의 짜

    르에게 봉헌하였다. 그는 지속해서 야쿠츠크(1632년), 이르쿠츠크(1651년)를 점령하였

    고, 동부 시베리아의 주민족인 부리야트가 코삭크를 앞세운 러시아의 동진에 저항하

    여 1655년에 큰 전쟁이 있었으나 부리야트도 점령당하였다. 코삭크는 1636년에 오호

    츠크에 도달하였고, 결국 코삭크 덕분에 러시아의 영토가 커진 것이다(Norton 1923).

    16세기말 사할린은 글자 그대로 無國家 多民族을 구성하는 지도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부터는 주변의 상황이 상당히 급변하게 되었다. 사할린을 중심으로 하

    여 존재했던 제국들 즉 러시아와 청나라 그리고 일본의 삼국이 사할린과 쿠릴을 놓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하는 각축장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원주민들이 자신들

    의 땅에서 소수민족화하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일본 쪽에서는 松前藩이 역할을 담당하여, 北海道의 북쪽에 섬이 있다는 정보를 기

    초로 탐험대가 1635년 松前一門의 長公廣이 사할린으로 나갔고, 1636년 藩의 家臣 甲

    道庄左衛門이 사할린에 파견되어 1년 이상 체류하였다. 1644년 북해도에서는 1630년

    대의 정보를 기초로 최초의 사할린과 쿠릴의 지도가 제작되었다(뷔소코프 外 1995:

    79).

    바다를 통하여 사할린과 쿠릴의 연안에 당도했던 최초의 유럽인은 화란의 마르틴

    게르리첸 프리스다. 그는 1643년 6월 13일 카스트리쿰 호를 타고 소 쿠릴에 도달하였

    고, 7월 14일 아니와 만으로 등장하여, 이곳의 아이누 마을 근처에 상륙하여 당시 사

    할린 아이누와 접촉개시(뷔소코프 外 1995: 67-68)한 기록을 남겼다. 최초로 태평양연

    안에 나타난 러시아인은 이봔 유리에비치 모스쿠뷔틴이 인솔한 부대 중의 코사크 병

    들이다. 이때 이들의 일부가 사할린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된다(뷔소코프 外 1995: 72).

    1655년 가을 오누프리 스테파노비취 쿠즈네츠를 지휘관으로 하여 600명 이상의 러

    시아 코사크병의 부대가 아무르 하류에 도착하였다. 당시의 이 전해지는데, 이 대장(야사쿠 대장이란 세금을 징수했던 장

    부를 말함)에 코사크 병사들이 사할린에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러시아인들의 아

    무르와 사할린 개발은 중국인들에 의해서 중단되었다. 1644년에 건국한 淸은 러시아

    의 아무르 개발을 극력 반대하였고, 1650년대부터 러시아와 청 사이에 전투가 있었고,

    1658년 만주인들은 러시아 병대를 격파하였다. 그 후 아무르 하류는 만주인들의 손에

    들어갔고, 1689년 러시아와 청조 사이에 체결한 네루친스크 조약에서 러시아는 향후

    1세기 반 동안 아무르와 沿아무르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사할린은 장시간 러시아인의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24

    관심 밖에 놓이게 되었다(뷔소코프 外 1995: 74-75). 沿아무르를 잃은 러시아는 북동

    의 캄차카로 향하여 1696년 12월에 소부대가 캄차카로 원정을 시작하였고, 캄차카로

    부터 일본으로 내려오는 섬에 당도하였다.

    1709년 중국의 康熙帝는 아무르 하류유역으로 탐험대를 파견하였다. 다시 1710년

    새로운 탐험대가 출발하였고, 이들이 사할린에 건너갔다. 지도를 제작하였고, 울타(오

    록크)에 관한 정보도 수집하였다. 그 후 중국 상인과 사할린 주민 사이에 교역이 이루

    어졌고, 이들 사이에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할린 주민이 중국 상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생겼고, 그것을 빌미로 만주족이 군대를 사할린으로 파견하는 일이 생겼다. 만주인은

    닙히와 아이누들에게 공물을 부과하였다(뷔소코프 外 1995: 81).

    1711년 8월 캄차카의 코사크 부대가 島民에게 러시아 국적을 취득케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하여 대 쿠릴 최북의 슈무슈 섬(占守島)에 상륙하였다. 1713년에 코삭크 병과 원

    주민 수렵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원정대를 출발시켰는데, 그 중에 캄차달인 11인이 포

    함되었다. 북에서 두 번째에 있는 빠라무시루島(幌筵島)에서 아이누들과 접전이 있었

    고, 1778년과 1779년 사이에는 쿠나시리島의 아이누들에게서 러시아인들은 야사쿠를

    징수하였다. 이것은 러시아가 쿠릴을 완전하게 점령하였다는 얘기가 된다(뷔소코프 外

    1995: 82-83). 러시아인들은 최초로 원주민들을 정복의 전위부대로 이용하는 방법을

    시도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조직적으로 동부 시베리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탐험들 중에서 제1차

    캄차카 원정(1725-30)과 제2차 캄차카 원정(1733-43)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특

    히 베링(Vitus Bering)과 키리코프(Cirikov)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제2차 캄차카 원정

    은 그 이전의 경험들을 축적하여 ‘학술부’를 구성하였음은 주목할 점이다. 물론 이 원

    정은 코삭크 병대들이 호위를 하였고, 1733년 8월 쌍뜨뻬떼르부르크를 출발한 인원은

    모두 4천여명에 달했으며, 총 소요경비는 당시 1.5백만 루블리였다. 이때 베링의 부하

    장교인 마틴 스판베르그(Martin Spanberg)가 일본 북부의 해안 지도를 완성하였다

    (Vermeulen 1999: 19-20). 캄차카와 일본 북부 해안 사이의 지도가 바로 사할린과 쿠

    릴열도 임을 쉽게 인지할 수 있으며, 러시아가 일찍부터 이 지역에 대해 지대한 관심

    을 기울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1790년대에 쿠나시리에 일본인의 교역소가 설치되었다. 중심 상업촌은 白主村이었

    고, 1789년 쿠나시리 아이누의 反日蜂起 사건이 있었다(뷔소코프 外 1995: 87). 200인

    이상의 쿠나시리 아이누가 일본인을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70명이 넘는 일본

    인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2명의 일본인 통역이 가까스로 북해도로 탈출하였다. 松前에

    서는 진압부대를 파송하였고, 봉기 주모자 37명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뷔소코프 外

    1995: 88).

    1799년 러시아 황제는 露美會社의 설립에 관한 명령문서에 서명하였고, 그 회사는

    태평양 북부에 있는 러시아 식민지의 획득과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노미회사

    가 참가하는 강력한 원정대가 편성되었고, 세 개의 돛대가 있는 범선 두 척이 1803년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25

    원정대로 파송되었다. 두 배에는 노미회사 전권과 외교사절단도 동승하였다. 사절단의

    임무는 일본과의 통상을 여는 작업의 시도였다. 일본은 17세기 이래로 쇄국정책을 쓰

    고 있었다. 배는 나가사키로 가서 개항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고, 1805년 그 배들은

    사할린으로 퇴거하였다. 아니와 만에 정박하면서 그곳의 일본인 소집락에 접근하였다.

    이때 러시아인들의 사할린 조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1806년에 러시아인들은 일

    본인과 아이누 집락을 파괴하였고, 1807년에도 일본인 입식지에 대해서 공격을 감행

    하였다(뷔소코프 外 1995: 93). 1811년에서 1813년 사이에 일본인 군대가 파송되어 러

    시아인들을 공격하였다. 18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프리스 해협을 사이로 하여 쿠릴

    열도의 北은 러시아가 南은 일본이 장악하는 경계가 만들어졌다. 南 지역에 소위 “북

    방4도”(에토로프, 쿠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제도)가 포함된다.

    1850년 2월 3일 짜르의 재가를 얻어서 아무르 강 주변에 월동지를 설영하라는 것이

    시달되었고, 그 월동지에서 露美會社는 길야크인과 교역을 하였다. 1850년 7월 6명의

    수병과 2명의 길약크인 그리고 측량기사 1명이 포경선과 카누를 이용하여 아무르 하

    류지대를 항행하였다. 그들은 여기서 다시 만주인들과 만났고, 이 지역의 만주인을 추

    방하는 작전이 수행되었다. 1850년 8월 1일에 沿아무르 지역에 러시아 국기가 게양되

    었다. 이것이 러시아 주권의 초석이 되었다(뷔소코프 外 1995: 99-101). 수년 후 러시

    아의 외교노력의 결과, 연아무르 지방과 연해지방이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1858년 愛

    琿市에서 체결된 러시아와 중국의 조약(愛琿條約)으로 아무르 좌안지방이, 1860년 北

    京條約으로 우스리 지방이 러시아의 영유로 귀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사할린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이 강화되었다(뷔소코프 外 1995: 102).

    일본은 1869년 8월 15일 수상명령으로 千島國을 5개郡으로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뷔소코프 外 1995: 148). 1875년 4월 25일 조인된 상트뻬떼르부르크 조약(樺太千島交

    換條約)으로 일본은 사할린을 완전 포기하고 千島(쿠릴열도)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였

    다(뷔소코프 外 1995: 106). 1884년 일본정부의 결정으로 북 쿠릴의 아이누는 모두 시

    코탄 섬으로 강제이주되었다(뷔소코프 外 1995: 107). 1875년의 조약으로 사할린은 러

    시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그 상황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일본

    은 32개의 섬과 총 1천1백 킬로미터가 넘는 쿠릴에 대해 식민지화를 시도하였고, 행

    정상으로 남 쿠릴은 根室의 행정구 당국(당초에는 開拓使根室支廳)의 관할(뷔소코프

    外 1995: 143)이었다. 삼 백년 동안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중국이 벌였던 제국주의적

    각축장으로서 운명을 부여받았던 사할린은 러시아의 완승으로 종결되었고, 그 과정에

    서 사할린의 원주민들은 완벽하게 소수민족의 지위로 전락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사할린 개척의 주요 수단으로서 러시아 정부는 徒刑과 流刑을 실시하였다. 이 제도

    는 1858년에 시작된 것 같고, 1869년 사할린은 정식으로 도형과 유형의 땅으로 선포

    되었다. 유형수들은 주로 형사범과 정치범들이었다(뷔소코프 外 1995: 109). 1852년 사

    할린에서 발견된 석탄이 유형과 도형 기간 동안에 주요 산업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

    다. 1875년의 조약으로 인하여, 1879년이래 러시아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사할린에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26

    입식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147개의 러시아인 촌락이 만들어졌고, 세기전환기에는

    사할린에 러시아인 인구가 4만인을 넘게 되었다(뷔소코프 外 1995: 110-111). 1897년

    에 선주민들은 사할린 전체 인구의 15%를 밑돌았고, 자신들의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것이다(뷔소코프 外 1995: 112).

    1867년 일본과의 협정으로 사할린을 공동점유하기로 하였고, 1875년 러시아는 일본

    에게 쿠릴열도를 주고 대신 사할린을 전부 점령하기로 교환협정을 맺었다(Norton

    1923). 즉 千島樺太交換條約으로서 일본측의 대표는 夏本武揚, 러시아측의 대표는 고

    르치 야코브였다(樺太廳 1936: 25). 탁상 위에서 이루어진 사할린 할거의 제국주의적

    역사는 일단 마무리가 된 셈이었다.

    1892년과 1893년 사이에 일본은 郡司成忠의 활동으로 북 쿠릴 제도의 개척을 자주

    적으로 하는 애국주의단체(報效義會)가 활동하여, 군지의 힘으로 슈무슈도(占守島)-당

    시 최북 일본영토-에 일본인 입식지를 구축하였다. 郡司成忠는 1904년 6월 23일 입식

    자들로 부대를 편성하여 캄차카로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뷔소코프 外 1995: 114).

    사할린의 할거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제국주의적 확장은 그 이상의 북으로 향하였다.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확장 기도는 필연적으로 벌어질 전쟁을 충분히 예고하고 있었

    다. 그 사이에서 사할린에 거주해왔던 원주민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음이 분명하나,

    제국주의자들은 원주민들을 전쟁의 전위부대로 이용했던 사악함도 보이고 있다.

    4. 고래싸움에 등터진 새우의 운명

    1870년 경 일본자료는 재 사할린 아이누의 인구수를 약 2370명이라고 했다. 체호브

    의 기록에는 꼬르사코프 부근에 약간의 아이누 집들이 있고, 사할린의 아이누는 감소

    하였다고 적었고, 1897년 러시아의 제1회 국세조사에서는 1434인으로 기록되었다. 在

    사할린 아이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875년 千島樺太交換條約이다. 이때 일

    본정부는 108가구 841명의 아이누를 북해도로 강제 송환하였다. 수 년 후 질병으로

    절반 이상이 죽었다. 러일전쟁 후 북해도의 아이누들이 다시 樺太로 넘어갔고, 1941년

    의 기록에는 251가구 1272인이 남았다. 현재 사할린에 사는 아이누는 10인에 불과하

    다(田中水繪 1999: 45-46).

    러시아인과 일본인이 잡거하여 살았던 상황을 체홉이 그리고 있다. 체홉이 꼬르사

    코프에 왔을 때, 囚人을 포함하여 러시아인은 약 천명 정도 있었다. 당시 체홉은 거기

    에 있었던 일본영사와 비서를 만났다. 사할린의 주요 지역들이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과정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는 지를 살펴보면, 사할린의 원주민들이 어떠한 과정

    으로 무대에서 밀려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1882년 8월 블라지미롭까 지역에 러시아 도시의 기반이 형성되었으나 1905년부터

    일본의 지배를 당했다. 식민도시가 블라지미롭까를 거점으로 만들어진 것이 후일 일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27

    본이 건설했던 豊原(도요하라)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곳은 다시 1946년 6

    월 5일에 러시아식의 유즈노사할린스크로 명칭을 달았다. 1882년부터 스스야강반에

    도착했던 유형수의 감독 블라디미르 나뽈레오노피치 陸軍少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

    이다. 1890년에 체홉이 여기를 방문하였을 때 주민은 모두 91명이었다. 마을의 중심은

    따따르 상인 싸듸크의 상점이었고, 여기에 간수의 집, 학교, 성당 등이 있었다. 러일전

    쟁후, 블라디미로프까촌에 ’樺太廳블라디미로프까支廳‘이 설치되었으며, 스스야강의 동

    남에 ’豊原‘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豊原라는 이름은 러일전쟁시 일본군 사령관 原口

    中將의 이름과 그의 출신지 ’豊後‘에서 비롯된 것이다. (田中水繪 1999: 68-69). 1907년

    화태청이 설치되었고, ‘樺太廳豊原警察署文書’를 보면, 1907년 표지에는 ‘豊原’가 아니

    고 ‘블라디미로프까 支廳’이라고 되어 있다. ‘블라디미로프까 촌은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의 발상지“라고 적힌 스스야강의 석비가 있다.

    1884년에 꼬르싸꼬브 부근에 씨얀쯔라는 촌락이 생겼다. 이촌은 돌린까, 볼쇼예 따

    꼬예, 나이바 강들이 합류하는 곳으로서 로씨야 감옥본부 주임 갈낀-브라쓰끼가 이곳

    을 방문하였고, 그 형리의 이름을 따서 도시를 불렀다. 주민들은 모두 유형수들이었

    다. 1896년에 학교가 개설되었고, 학교의 교사도 유형수였다. 1897년에 이 마을에 처

    음으로 사할린 최초의 기상대가 조직되었다. 1947년 이 도시는 수수나이 산 지맥 아

    래의 평지(로어로 ‘돌리나’)에 놓었다 하여 돌린쓰크로 이름을 바꾸었고, 탄광과 제지

    꼼비나뜨도 있다. 꼬르싸꼬프는 아니와만 어업 중심지로서, 1914년에 王子製紙의 펄프

    공장이 생겼다.

    녜벨쓰크는 사할린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다. 백 년 전에 아이누들의 마을이 있었으

    며, 당시의 명칭은 뽄또-게시로서 아이누어로 ‘호수가’라는 의미이다. 4천년전의 패총

    이 발견된 곳이며, 학자들은 이곳을 ‘톤치’라고도 부른다. 그러한 영향으로 녜벨쓰크 1

    호 학교에 고고학박물관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뽄또-게시는 꼬르싸꼬브 현에 소속되

    었고, 1907년에 일본인은 이 마을을 혼또라고 개명하였다. 1945년 소련은 사할린의 첫

    개발자 이름을 붙여서 녜벨쓰크라고 개명하였다.

    일리인쓰끼는 1968년에 설립 115주년을 맞았다. 사할린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녜벨

    쓰꼬이 탐사대이며, 꾸쑤나이 마을은 아이누인들과 오로꼬인들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

    로씨야 초소를 세웠고, 이때부터 이 마을을 일리인쓰끼로 불렀다. 이때가 1853년이다.

    이곳에 아이누인을 연구하던 브뢸낀 박사와 지리학자협회 지도자인 에프.베.슈미트와

    셰부닌이 와 있었다. 1867년에는 아이누 연구자인 도브로뜨워르쓰끼도 왔다. 그는 아

    이누어-로어 사전을 만들었다.

    1905년 7월 일본군함대가 아니와 만에 침입하여 꼬르사코프를 점령하면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점령하고 ‘화태’ 시대를 열었다. 사할린의 중심지였던 꼬르싸꼬브는 화

    태청이 풍원에 설립되면서 중심지의 역할을 박탈당하였다. 꼬르사코프는 大泊(오오도

    마리)로 이름을 고치고 북해도로 연결되는 현관으로서 선박업과 상업을 진흥하는 2만

    명의 일본인이 사는 곳으로 변했다(田中水繪 1999: 44). 러시아인들은 남하를 위해서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28

    최남단의 꼬르싸꼬브를 사할린의 중심지로 건설하였고, 일본인들을 북상을 위해서 내

    륙의 도요하라로 중심지를 옮긴 것이다.

    아니와 만의 해안에는 아이누인들이 자리잡고 살았다. 고기잡이와 사냥이 근본업이

    었으며, 자기네 마을을 루쓰따끼라고 불렀다. 그 뜻은 ‘해안 길옆 마을’이란 뜻이다.

    1807년 러시아 군 장교인 호와트꼬브와 다위도브가 아니와에 와서 지방 주민들에게

    황제의 보호증서를 전했다. 1886년 루쓰따끼는 류또가로 개명되었고, 일제 강점기 이

    곳은 원목과 물고기를 실어나가는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 1926년에 마을에서 부두까

    지 도로가 건설되었다. 1945년 해방 후에 아니와로 개명되었다. ‘혼자서 건넜다’라는

    아이누의 말이다. 아이누의 전설에 ‘한 사람이 쪽배에 앉아서 풍파가 심한 날에 혼자

    가 아니바 만을 건넜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할린의 원주민들은 삼 백년 동안 벌어졌던 ‘고래싸움에 등터진 새우’가 되어 버렸

    다. 등이 터진 새우가 살아날 리가 없다. 19세기 중엽에 발견된 석탄을 중심으로 사할

    린의 풍부한 자연자원은 제2의 각축장을 예고하게 되었다. 석탄이나 석유 등과 같은

    자연자원들은 “새우”들의 삶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주의자들의 욕

    심을 자극하는 자원들의 존재 때문에, 사할린 원주민들의 운명은 더더욱 어려운 상황

    에 처하게 된 것이다.

    5. 러일전쟁과 사할린의 남북 분단

    1904년 8월 7일 러시아 순양함 ‘노뷔크’가 아니와灣(亞庭灣)에서 일본 순양함 ‘對馬’

    를 공격함으로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쿠릴 제도는 일본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

    다. 1905년 6월 24일 53척의 일본함대가 사할린에 접근하여 1만4천 병력을 상륙시켰

    다. 당시 사할린에 러시아군은 1200명밖에 없었다. 숫자가 모자라는 러시아 병들은 5

    개의 빨치산 유격대를 편성하여 대항하였으나 섬멸되었고, 7월 16일 북사할린이 항복

    하게 되었다(뷔소코프 外 1995: 115). 러일전쟁의 최종단계에서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8월 23일에 회담이 있었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조약(포츠머스 강화조약 제9조: 러

    시아제국정부는 일본제국정부에 대하여 영원하고 완전한 영토로서 사할린 남부와 인

    접한 섬들을 양도한다. 북위 50도 선을 양도하는 최북의 선으로 한다)이 이루어졌다.

    이 조약에서 러시아는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양도하고, 국경선을 북위 50도로 확정지

    었다. 이때 남부에 압도적으로 많이 있었던 러시아인들은 대륙으로 철수하였고(뷔소코

    프 外 1995: 116), 일본령이 된 남부에서 외국인 2739인이 2회에 걸쳐서 연해주로 이

    송된 적이 있다(田中水繪 1999: 147).

    1905년 12월 북사할린에는 先住 제 민족 즉 닙히, 에벵키, 아이누 그리고 오록크(울

    타) 2000인을 포함하여 7500인의 주민이 있었다. 러일전쟁 전에는 전도 주민이 46천명

    정도 있었다. 1906년 중에 대륙으로부터 원주민 약 5000인이 섬의 북부에 귀환하였고,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29

    1906년 4월 10일 사할린 徒刑의 폐지를 법으로 선포하였다. 1908년 섬은 자유로이 이

    주할 수 있는 땅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이주자들에게 특전에 제공되었다. 예를

    들면, 일 가족 당 400루불이 제공되었고, 병역의무를 3년 간 세금은 5년 간 면제를 하

    였다. 항로의 운임도 반액으로 설정하였다. 도착 후에는 수개월간 식료를 공급하는 보

    증을 하였다(뷔소코프 外 1995: 118).

    러시아의 짜르 정부는 러일 전쟁의 패전으로 인하여 사할린으로부터 대륙으로 이주

    한 러시아인들이 남긴 빈 자리를 그대로 둘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사할린의 反러시

    아화를 우려하여 대륙의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다시 사할린으로 이주할 것을 종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어서 러시아 정부는 석탄에 대한 채굴이 중요한 산업부문임을 인식하고, 지질학

    자들을 파견하여 북 사할린에서 금 아연 철광석 등을 발견하였다. 북 사할린의 석탄

    매장량을 3500만 톤으로 산정되었고, 1914년에 ‘러시아極東工業會社’를 설립하여 석유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회사의 기반은 영국 자본이었다. 주식의 반분은 1910년에 설

    립된 런던의 ‘第一사할린신디케이트’와 ‘第二사할린신디케이트’에 소유되었다. 영국은

    기술자도 파견하였고 플랜트로 운송해왔다. 북 사할린의 석유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1916년 이후였다. 당시 러시아극동공업회사가 석유채굴의 독점에 실패하면서, 일본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북 사할린 석유 개발에 일

    본인 참여의 계기가 되었다. 1918년 5월 일본 석탄왕 久原房之助(히다치 창설자)가 참

    여하여 4년 간 탐사의 기회를 얻었다(뷔소코프 外 1995: 119). 그러한 과정에서 사할

    린에 석유개발을 위해서 카프카스 지방의 그루지아 사람들 3만 명을 유치한 적이 있

    기 때문에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있다(田中水繪 1999: 32).

    1917년의 볼쉐비크 혁명이 사할린과 원동지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스

    크바의 지역보다도 훨씬 늦어졌다. 백군과 적군의 전투가 치열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백군이 기세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에서 소비에트 권력은 1920년에

    설립되어 단기간 잔존하게 되었다. 적군을 중심으로 혁명의 기세가 사할린에 자리를

    잡는 시점에서 일본군은 1920년 4월에 2000명의 병력으로 북부의 알렉산드로프스크를

    점령함으로서 일시적으로 사할린 전체가 日本占領期를 맞게 되었다(1920-1925).

    일본은 러시아의 공산화 혁명 이후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백군 측의 그레고리에프

    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적인 사할린 자치국가의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1920년 7월 3일 일본정부는 사할린 점령을 발표하였다. 첫째 이유는 북 사할린

    의 석유자원 확보, 둘째 이유는 미국 자본가들의 공세를 차단, 셋째 이유는 일본정부

    가 볼쉐비키 사상의 일본침투를 두려워하여 극동에서 볼쉐비키 사상의 근거를 박멸

    (뷔소코프 外 1995: 128)하려는 시도였다. 북 사할린 점령기 동안에 일본은 일만 오천

    명 정도의 노동자, 관리, 군인, 고고학자(그들은 무엇이든지 섬의 북부에 대한 일본의

    요구의 정당성을 증거하는 것을 입수하려고 하였음), 지질학자, 저널리스트 등을 파견

    하여 러시아인 주민들을 압박하였다(뷔소코프 外 1995: 129). 일본의 북 사할린에 대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30

    한 짧은 점령기 동안에 남북간의 왕래가 있었음은 물론이고, 그 와중에서 북쪽에 있

    던 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한 흔적도 보인다.

    일본이 알렉산드로프스크에 석탄회사, 오하에 석유회사를 만든 것은 1925년 일본군

    이 철군할 때였다. 현재에도 일본의 利權會社 北樺太石油株式會社가 세운 오하 第1号

    井이 남아 있다. 현재 ‘센카타야마’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건물은 北樺太石油株式會

    社의 사교 클럽이었고(田中水繪 1999: 29페이지 사진 설명), 전후 오하의 수용소에서

    죽은 일본병들의 묘지가 64개 있다(田中水繪 1999: 30).

    사할린의 제국주의적 분할은 원주민들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러시아와 일본이 사

    할린을 북위 50도 선에서 반씩을 나누면서 닙히 민족은 러시아를 배운 닙히와 일본을

    배운 닙히로 나뉘게 되었다.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남북분단이 일어났다.

    제국주의적 쟁탈전의 핵을 이루어온 오하에는 현재 3만7천인이 살고 있으며(田中水

    繪 1999: 27),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할린 프로젝트 I과 사할린 프로젝트 II의 중심적

    인 지점이기도 하다. 앞으로 등장할 사할린 프로젝트 III도 궁극적으로는 오하를 중심

    으로 하는 유전지대를 겨냥하고 있으며,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이

    다.

    이처럼 북사할린의 석탄과 석유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끊임없는 패권 줄다리기의

    원인이 되어왔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삶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사할린

    으로 이주되어온 외국인들의 족적도 복잡한 양상의 그물망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세

    계 석유 시장의 패자들은 결코 사할린의 오하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지속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6. 남사할린의 樺太廳 시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할린의 남부를 획득한 일본은 북해도에서 이미 실험을

    거친 척식의 방식을 사할린에 적용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다. 이주자의 6할이 북

    해도와 동북 그리고 北陸 사람들로 구성된 여명시대(1907-1912)는 대체로 둔전병 체

    재를 시발점으로 하여 개척을 이루었다. 농업자의 이주가 시작되어, 1906년부터 토지

    대부가 시작되었다.

    자유이민시대(1912-1926)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을 이민을 모집하였다. 1919년부터 이

    주비와 개간비의 보조가 있었다. 당시는 指定地에 自由移民制로서 지정지는 숫자가

    적었다. 1906년에 1만2천 명이었던 화태의 일본인 인구는 1920년대 중반에 20만 명으

    로 늘었다.

    일본군이 북사할린에서 퇴거한 이후에는 남 사할린에 한정하여 계획적인 자원개발

    을 위한 이민이 시작되었고, 그 시대를 집단이민시대(1926-1935)라고 한다. 1928년 各

    府縣에서 이주자를 집단적으로 일정의 식민지에 입식하는 集團植民地制度가 시작되었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31

    다. 여러 가지 보조가 생겨서 화태에 가는 기차비용과 선비도 반액으로 할인되었다.

    1936년경에는 30만 명을 넘었다. 북해도로부터의 이주가 압도적이었다(田中水繪 1999:

    124).

    1937년 이후에는 전쟁준비를 위한 계획이 이주방식에도 적용되었다. 이 시대에 조

    선인의 강제모집과 징용이 주를 이루는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 정부는 전문가들을 구성해서 樺太 연구를 위촉하였고, 식민의

    성공 여부를 심도 있게 조사하였다. 1909년 4월 화태청은 "土人子弟의 교육을 위한 敎

    育所를 설치"(樺太廳 1936: 1472) 하였다. 일찍이 대만에서 대만의 원주민들을 통치해

    본 식민지 경영의 경험이 적용된 것이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사할린주파견군사령부

    는 1921년에 3책을 발행하였다. 일본의 시베

    리아 방향 대륙에 대한 관심이 사할린을 근거로 하여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사할린을 점령하고 원주민들을 “土人”이라고 불렀고, 그들에 대한 특별 교육

    을 “土人敎育”이라는 장르에서 다루었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쿠릴과 사할린을 교환

    한 후에 1879년(명치12년)부터 土人保護資金造成의 목적으로 이 지역에 土人漁場의

    제도를 설정하였다. ...동해안의 落帆, 서해안의 多蘭泊 2개소에 교육소를 설치하고, 소

    학교령에 준거한 수업을 개시하였고, 1931년경에 多蘭泊 지방은 일본인의 왕래가 많

    아졌다(樺太廳 1936: 1526-1527).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원주민 정책이 훨씬더 적극적

    이었고, 일본은 원주민들을 동화하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뽀로나이스크에서 만난 카미

    무라 데이코는 닙히인이고, 그녀의 남편도 닙히인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에 설치되었

    던 일본학교가 너무 멀리 있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누 어로 ‘砂地’라는 의미의 오타수 삼각주에 화태청이 ‘원주민 보호’라는 명분

    하에 그 지역에서 자유롭게 살아왔던 선주민족을 집합시켜서 일본식의 학교나 神社를

    제공한 것이 1926년이다. 오타수를 근거로 하여 敷香 관내의 소수민족은 1938년에는

    울타 243인, 닙히 92인, 기-린 30인, 산다 18인, 야쿠트 3인, 계 89호에 386인이다. 그

    들은 수렵이나 방목을 하면서 살다가 노동자로서 敷香에서 노동을 하는 신세가 되었

    다(田中水繪 1999: 234). 선주민들을 통솔하기 위해서 일본측이 구사한 정책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오타수노모리’(오타수의 杜)라는 것이고, 그곳의 ‘모리노오’(杜의 王)는

    야쿠트 인 뷔노그라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신학교를 다녔고 러시

    아 혁명이 일어나는 즈음 석유를 구하러 북사할린에 건너왔다. 그는 당시 북사할린을

    점령한 일본군에 협력하여 일본군이 철퇴할 때 처와 딸 그리고 심부름하는 사람들과

    순록 300두를 데리고 왔다. 그래서 그는 순록의 왕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때 거기서

    뷔노그라프의 통역를 했던 일본인이 한 명 그곳에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梅宮토미사

    부로이며, 뷔시녜프스키라는 이름도 썼다. 그는 1910년경에 일본에서 敷香으로 이주했

    다가 다시 1913년에 러시아 제국령의 북사할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에벵키

    출신의 처를 얻었고, 목축을 하며 살았다. 1920년 이후 북사할린에서 일본군의 통역으

    로 활약 훈장도 받았고, 일본군이 왔을 때는 知取(시리토리)에서 여관을 경영하였다.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32

    이때 그는 뷔노그라프를 만났으며, 일본과 야쿠트의 동맹구상으로 의기투합하여 ‘오타

    수노모리’를 만들었다(田中水繪 1999: 235). 1935년 현재 남 사할린의 원주민은 470호

    에 1883명이 등록되어 있다(樺太廳 1936: 1687).

    ‘오타수’라고 불리는 곳은 뽀로나이스크에 있는 뽀로나이 강의 한 가운데 삼각주가

    있는데 그곳을 이르며, 현재 그곳의 사람들은 그곳을 “아토시”라고 부른다. 5분이면

    건너는 삼각주를 ‘佐知’(사치)라고 하며, 사치는 화태시대 이름이다. 그곳을 지금은 ‘유

    지뉘오스토로프’(南의 半島)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사할린의 소수민족들이 살던 곳이

    었으나, 지금은 러시아인들이 많이 산다. 여기에 그쪽 소수민족들과 일본의 단체가 함

    께 건립한 ‘北方少數民族戰歿者의 合同慰靈碑’가 있다.

    현재 中生 선생이 "아토시"를 "오타수"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라는

    책의 저자는 뷔노그라프이며, 그가 책을 저술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현재 알렉산

    드로프스크에 있는 박물관의 관장인 티무르 미라마노프다. "뷔노그라프는 소련과 일본

    양측의 이중스파이로 의심을 받으면서 1942년에 58세로 사망하였으며, 그에 협력을

    했던 일본인 梅宮은 1946년 소련당국에 의해서 스파이 용의로 체포되어 1947년 라-게

    리(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田中水繪 1999: 236). 여기에 살았던 소수민족들은 적지

    않은 숫자가 ‘日本帝國軍人’으로서 소집되어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이들은 梅宮와 마

    찬가지로 수용소에서 많이 죽었다. 전후 일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

    니다’라는 이유로 軍人恩級을 받지 못하였다(田中水繪 1999: 237).

    ꡒ오타스ꡓ 이야기의 한 줄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96세대가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동네에서 72명의 남자를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고 사형을 시킨 사건이

    나면서, 동네에 남자가 극소수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다른 민족 남자들(러시아인이

    나 조선인 등)이 결혼하게 되는 대상이 소수민족의 여자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소수민족의 단일한 정체성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樺太廳博物館의 진열품은 자연(동물 40평, 807점: 식물 8.5평, 1천점), 문화(고고. 역

    사참고, 20평, 고고 3383점, 역사참고 223점: 토속 20평, 479점), 산업(농산 20평, 167

    점: 수산, 20평, 665점: 광산 20평, 257점: 임산 20평, 265점) 진열품총계 9559점(樺太廳

    1936: 1515-1516)이었으나, 1945년에는 박물관 전체가 日本軍司令部로 사용되었다(田

    中水繪 1999: 66).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이 즈음 지어지기 시작했다가 중단된 것과 대

    비시킬 필요가 있다. 화태에서는 그 공사가 끝이 난 상태고, 조선에서는 조금 시작했

    다가 그 규모상 마칠 수가 없었다. 화태에서는 박물관이 군사령부로 사용되었는데, 조

    선에서는 박물관을 짓기 위해서 마련했던 자금이 모두 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돌아

    간 것이다.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33

    7. 러시아화 과정 속의 多種族性

    러시아의 법률에서 정한 바에 의하면, 하나의 민족집단을 소수민족으로 규정하는

    것은 숫자로 되어 있다. 한 집단의 숫자가 5천명 이하가 되는 경우에 그 집단은 소수

    민족이라는 범주에 속하게 된다. 사할린에서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인이 대거 등장

    하는 계기가 마련되면서 선주민족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동시에 남 사할린에 등장했던 일본인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사할린은 두 개의 주류 민

    족들이 교대하는 정치적 역사적 변화가 교차하면서 소수민족들의 입장은 복잡한 양상

    을 띠게 되었다. 소수민족의 숫자가 극소화하면서 벌어진 노동력 동원의 문제는 자연

    스럽게 외부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이민정책 내지 강제이주 정책을 사용하

    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폴랜드인과 터키인들도 등장하였으며, 아시아에서는 중국

    인들과 조선인들이 이주되었다.

    결과적으로 사할린은 한 세기를 건너가면서 원주민 중심의 사회에서 외부로부터 이

    주한 이주자들의 사회로 변화하는 경험을 하였고, 사할린의 주인공들은 교체되었다.

    외부로부터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이 주인공이 되었다가 한 때는 일본인들이 주인공이

    되었다가 이제는 다시 러시아인들이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교체되

    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소수민족들의 종족정체성 문제는 간단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필자는 그러한 현상을 다종족성(multiethnicity)

    이라고 개념화할 것을 제안한다.

    여러 개의 민족들이 복합되어 있는 현상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

    이나 친구관계 또는 직업상의 관계 등으로 인하여 과거에는 서로 다른 원류의 정체성

    을 확고하게 견지했던 사람들의 관계망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예

    를 들면, 아버지는 일본인이고 어머니는 울타인 울타 여인이 교육은 노보시비리스크

    에서 러시아식으로 받고 아이누 남편과 살면서 그 사이에서 자녀를 두고 살다가 남편

    이 사망하자 조선인 남자와 재혼하여 그 사이에서 또 자녀를 두고 도라지타령을 부르

    는 경우의 삶이다. 아이누이면서 일본어를 하고, 사는 방식은 러시아 식이며, 직업은

    오하의 석유회사에 근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개인들의 생애사를 종합하게 되면,

    우리는 삶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조합이 형성되어가는 과정들이 부문별로 결합하는 형

    식의 과정에서 하나의 문화 속에서 진행되어온 것과 어떠한 차이를 보일 수 있는 지

    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할린이 다종족성을 구성해나가는 과정의 일부를 발견하는 시도로서 소수민족들의

    생활을 중심으로 편린으로나마 삶의 부분들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소수민족들 중에서

    도 닙히와 아이니는 빨레오 아지아틱 사람들이고, 나머지 다른 민족들 즉 울타(오로

    키), 나나이, 에벵키는 퉁구스-만주계통이다. “닙히”나 “아이누” 등은 모두 사람이라는

    의미(田中水繪 1999: 21)로서 서로 달리 분류되어왔던 사람들이 새로운 체제 하에서

  • 1부: 러시아 사할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34

    어떻게 하나의 덩어리로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 서로 영향관계

    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다종족성이라는 용어에 담겨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의 삶이 복합적인 종족성을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현재 노글리키의 인구는 1만2천명인데, 그중 7백명이 닙히와 에벵키 등의 북방소수

    민족이다. 다른 곳보다도 이들 소수민족의 비율이 높은 곳이다. 그 이유로는 1929년

    레닌의 민족자결의 방침에 따라서 노글리키에 학교나 병원을 갖춘 ‘북방소수민족센타’

    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 센타가 개최했던 ‘제1회 북사할린소수민족대회’의 기

    록에, “유목민족의 에벵키가 텐트나 가재도구를 갖고, 닙히는 먼 촌으로부터 썰매를

    타고 왔다. 선출된 대표는 닙히 19인, 에벵키 5인, 울타 5인, 네기달 1인, 러시아인 10

    인이었다(田中水繪 1999: 97). 소수민족센터가 러시아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

    었다는 증거가 되며, 소수민족의 러시아화가 민족자결이라는 이름 하에서 진행되었음

    을 알 수 있다.

    현재 어린이들은 소련시대에 만든 인테르나도(寄宿制學校)에서 닙히어를 배운다. 학

    비는 무료이고, 성적이 좋으면 우선적으로 쌍뜨뻬떼르부르크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다.

    조야 관장은 “언어를 배우는 것도 생활 중에서 사용해야 잊어버리지 않는다. 부모로부

    터 이탈되는 어린이들은 민족에 전해오는 마음이나 기술도 잃어버린다. 소수민족을

    격리시키기 쉬운 제도는 어린이의 독립심도 부모의 책임감도 말살시키고 있는 것이

    다”(田中水繪 1999: 24)라고 주장한다.

    북방소수민족들의 명절은 2월 24일에서 26일 간 거행되었다. 노글리끼에서 명절행

    사가 개최되었으며, 레닌그라드 민속학대학 과학 서기 춘네르 딱싸미가 손님으로 왔

    다. 사흘 동안 스포츠 경기가 진행되고, 스키활주, 활쏘기, 민족씨름, 사슴 및 개 썰매

    경주, 줄당기기도 연행되었다. 딱싸미는 닙히족의 첫 학자다(, 1968년 3월

    4일자). 북방민족체육대회가 1970년 3월 28일자로 개최된 적이 있다. 레닌 탄생 100주

    년에 즈음하여 제4차 사할린주 북방민족 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뽀로나쓰크, 알

    렉싼드롭쓰크, 오하, 띄롭쓰크, 노글리끼 대표단들이 모였으며, 이들은 함께 노글리끼

    마을에 조직된 민속학 박물관, 탁아소-유치원, 진료소, 수산 꼴호즈를 방문하였다( 신문기사에서 발췌). 북방민족 명절 행사나 체육대회 등은 소비에트 시대에

    소수민족들의 러시아화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이

    해해야 한다.

    닙히어 중에서도 지방마다 달리 언행되는 방언이 있다. 현재 사할린의 소수민족들

    중에서 숫적으로 최대인 닙히는 오하에 1100명이 거주하고, 노글리키에 800명, 티모보

    스키 라이온에 400명, 반라나이스키에 170명이 있으며, 대륙의 아무르에 2천명 정도가

    있다.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하바로프스크와 사할린 전체에 4673명이 있다고 나와 있

    다. 그들은 주로 어로와 사냥을 한다. 개를 기르고, 열매를 채집하면서 살고 있다. 뽀

    로나이스크에 닙히 언어를 하는 할머니가 한 사람 남아 있다. 닙히 민족학교는 오하

    와 노블리키에 있다. 닙히어를 가르치는 선생들이 있다.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러시아化 과정의 식민지 역사 35

    1920년대에도 닙히어 선생이 있었고, 당시에도 닙히어로 된 책을 만들었다. 그 책들

    은 모두 사라졌고, 1970년도에 다시 책들을 만들었다. 이때 책을 만든 사람이 블라지

    미르 싼기와 오따이나 빠끌리사이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1996년도에 닙히어로 된

    책을 찍었다. 이 때의 저자는 쌍뜨뻬떼르부르그에 있는 민족학자이며 시베리아 샤머

    니즘 연구가인 춘녜르 탁사미이다. 그가 1970년에 시작해서 1981년에 만든 책은 127

    페이지 짜리로서 레닌그라드에서 찍은 것이다. 이 책의 공저자들은 부크바리와 오따

    이나이다. “닙히 지흐”라는 이름의 닙히어 신문이 오하에서 발행되고 있다.

    현재 오하의 박물관에는 ‘석유 코나’와 함께 ‘북방선주민족 코나’도 있다. 관장은 조

    야이며, 사할린의 선주민은 현재 3천 명 정도로 기록되고 있다. 에벵키 190명, 오로치

    210명, 나나이 170명, 울타 130명, 그리고 가장 많은 수가 닙히로서 2000명이다. 원주

    민들의 절반 정도가 오하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관내에는 수렵민족 닙히의 생활을 해

    설하는 전시가 있다(田中水繪 1999: 20). 오하에서 북서쪽으로 30킬로 가면 닙히촌인

    네크라소프카 村이 있다. 사할린 유일의 닙히어 신문 “닙히”의 편집장은 리마이다. 닙

    히어는 문자가 없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문자로 차용하여, 1990년에 발간을 시작하였

    다. 네크라소프카에 사는 500인을 중심으로 전체 천명의 닙히가 오하 지구에 있기 때

    문에 월 1회 300부를 찍는다. 한 신문의 톱기사로 “잃어버린 토지의 반환을 정부에 요

    구 !”(田中水繪 1999: 22)에 관한 글도 있다.

    울타 민족의 ‘코롤 알례니’축제(6월 6일)가 있다. 코롤은 축제라는 의미이고, 알례니

    는 사슴이라는 말이다. 이 축제는 최근에 문화재생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키

    타지마 류바(55세)가 그 운동의 중심이다. 류바의 아버지는 일본인이고, 류바 어머니

    의 아버지도 일본인이었다. 류바는 ‘도라지타령’ 노래를 잘 부른다. 류바의 이름은 키

    타카와 후유코라는 일본 이름을 갖고 있고, 동시에 키타지마 류바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키타지마는 남편의 성이다. 북해도 아바시리에 北川家의 묘지가 있다. 키타지마

    류바의 어머니의 이름은 김 나츠코이다. 원래 아버지는 아브라카와라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아브라카와 나츠코에서 조선인 이태호와 1950년에 재혼하였다. 그와 10년 간

    함께 살았다. 그가 죽고 어머니는 1960년에 세 번째의 남편을 얻어서 재혼하였다. 그

    때의 아버지가 조선인 김씨다. 따라서 김 나츠코로 성을 바꾸었다. 어머니는 1997년 2

    월 18일에 69세로 사망하였는데, 당시에도 김 나츠코였다. 이태호의 남동생은 한국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일부를 북해도 텔레비젼에서 1995년 3월에 방

    송하였다. 1997년 8월 25일에 NHK가 재방송하였다. ‘사할린 소수민족복권에의 길’이

    라는 부제가 붙은 이라는 제목이다.

    이태호와 어머니 사이에 남동생 두 명이 있다. 큰 동생은 1957년 생으로서 조선인

    으로 인식되고 있고, 그의 부인은 나나이 인이다. 그 밑에 딸이 한 명이 있는데, 그녀

    는 조선인 남편을 얻었고, 그 밑에 4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다. 둘째 동생(41세) 사샤

    는 차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고, 부인은 러시아인이다. 그는 스스로를 울타 민족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