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제Ⅲ부 역사가 들려주는 소리, 민족과 함께 하는 소통 - 지방 연구소 설립과 연구 범위의 확대, 심화 (1991년~1995년) 제1장 문화재가 있는 곳에 문화재연구소가 있다 - 지방 문화재연구소 설립 1. 연구소 도약의 의지 2. 새로운 도약의 밑거름 - 경주∙부여∙창원문화재연구소 발족 제2장 사라져 가는 문화재, 사라지기 전에 지키기 1. 유적 훼손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 문화유적 지표조사 2. 우리 미술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 전국 사찰 석등 및 사리장엄구 조사 3. 손닿지 않는 곳에 있어 더욱 소중한 문화유산 4. 건축물에서 건축 기법까지 그 가치를 찾아 - 고건축 조사연구 5. 문화재 복원 의지와 기술 향상 6. 문화재 보존을 위한 첨단장비 확충 제3장 조상의 소리, 역사와 소통하다 - 무형 및 민속문화재 조사연구 심화 1. 무형문화재 조사연구의 심화 2. 민속종합조사의 심화 3. 유∙무형 민속자료의 조사 심화 제4장 역사의 지평을 넓히고 조상의 지혜를 높이다 - 심층적인 문화유적 발굴 조사 1. 선사시대 및 철기시대 2. 삼국시대 3. 통일신라시대 4. 고려 및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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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Ⅲ부역사가들려주는소리, 민족과함께하는소통

- 지방연구소설립과연구범위의확 , 심화(1991년~1995년)

제1장 문화재가 있는 곳에 문화재연구소가 있다

- 지방 문화재연구소 설립

1. 연구소 도약의 의지

2. 새로운 도약의 밑거름

- 경주∙부여∙창원문화재연구소 발족

제2장 사라져 가는 문화재, 사라지기 전에 지키기

1. 유적 훼손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

문화유적 지표조사

2. 우리 미술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 전국 사찰 석등 및 사리장엄구 조사

3. 손닿지 않는 곳에 있어 더욱 소중한 문화유산

4. 건축물에서 건축 기법까지 그 가치를 찾아

- 고건축 조사연구

5. 문화재 복원 의지와 기술 향상

6. 문화재 보존을 위한 첨단장비 확충

제3장 조상의 소리, 역사와 소통하다

- 무형 및 민속문화재 조사연구 심화

1. 무형문화재 조사연구의 심화

2. 민속종합조사의 심화

3.유∙무형 민속자료의 조사 심화

제4장 역사의 지평을 넓히고 조상의 지혜를 높이다

- 심층적인 문화유적 발굴 조사

1. 선사시 및 철기시

2. 삼국시

3.통일신라시

4.고려 및 조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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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유적조사연구실 신설과 인력 증원

연구소가새롭게도약하고자하는노력이이어지는가운데1989년정부내에행정개

혁위원회가발족되어정부조직개편안마련에착수했다. 문화재연구소는즉시연구소직제

개편을 통한 연구기능 강화의 필요성과 기구 확장을 통한 역할 제고의 절실함을 행정개편

위원회에제시하 다.

그 같은 요청은 비단 연구소의 위상 제고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연구소 직원의 처우

개선을 위한 것만은 더더욱 아니었다. 전통문화의 계승을 위한 문화재의 학술적 조사연구

에서부터 문화재의 과학적 보존과 국제교류에 이르기까지, 문화재연구소가 지향하는 본연

의업무에매진할수있는여건을만들고자하는간절한바람이었다.

행정개편위원회는 그 같은 문화재연구소의 진정성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위원회보고서에문화재연구소직제개편안이게재되기에이른다. 그결과가연구소역사에

있어서도약의미래를열중요한전환점이마련되는계기가된것만은분명했다.

70

제1장문화재가있는곳에문화재연구소가있다- 지방문화재연구소설립

1. 연구소도약의의지

제2 장경호 소장의 취임과 연구소 도약의 의지

국내 유일의 문화재 전문 관리기구로서의 역할과 기능에 더욱 충실해 가던 1987년 3

월, 김정기 초 소장에 이어 장경호(張慶浩) 제2 문화재연구소장이취임하 다. 장 신임

소장은이미1961년부터구황실재산사무총국을걸쳐문화재관리국에서건축직으로근무를

하여 문화재 관리에 오랜 경험을 갖고 있었고, 1970년부터 문화재연구실건축 담당 사무관

으로일해온바있다.

취임식에서장소장은특히두가지계획에중점을둘것임을강조하 다. 그한가지

는 연구소 직원들의 학술적인 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매월 연구소 내에서 학술발표를 하도

록지원하겠다는것이었다. 또한가지는연구소를연구기관으로서독자적역할을할수있

도록직제개편을추진하겠다는의지 다.

신임 소장의 의지 표명에서도 알 수 있듯, 연구소가 연구기관으로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은 이미 문화재연구소 발족 당시부터 제기되어 온 문제 다.

1969년 문화재관리국 내에 문화재연구실이 설치된 이후 연구소는 문화재관리국의 행정적

인 업무를 상명하달식으로 시행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고, 1975년 문화재연구소로 승격된

후에도그같은사정은달라지지않았다. 특히문화재안내문감수나이벤트행사에필요한

자료수집등연구소업무와직접관련이없는일들이부여되는경우도많았고, 결국문화재

조사연구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가 어려운 점이 없지 않았다. 아울러 외적으로 연

구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인정받지 못하여 연구소에서 연구된 결과물을 연구소 명의로 인증

해줄수없는반쪽기관에머물고있는형편이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연구소 설립 목적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문화재연구소는 연구

기관으로서 역할 수행을 통해 새롭게 도약하고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 다. 장 소장 취임

이후 그 같은 노력은 더욱 구체화되어서, 1988년 장 소장과 조유전 미술공예연구실장이함

께총무처를드나들면서기회있을때마다연구소기구확장의필요성을역설하 다.

제1장문화재가 있는 곳에 문화재연구소가 있다

- 지방 문화재연구소 설립

국 장

문화재기획관

문화재1과

문화재2과

재산관리과

(3)

지구관리사무소(12)

종묘사무소

경복궁사무소

덕수궁사무소

창덕궁사무소

창경궁사무소

■ 기구도 (1988년 9월 1일)

유적조사연구실

미술공예연구실

궁원관리과

문화재보수과

예능민속연구실

보존과학연구실

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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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제1편통사

2. 새로운도약의밑거름- 경주∙부여∙창원문화재연구소발족

백제문화권정비사업계획

1988년 12월 19일 청와 통령집무실에서 백제문화권 정비사업 보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당시 노태우 통령과 최병렬 문화공보부장관을 비롯하여 관련 수석비서관들

이 거참석했다. 보고는문화재관리국장이맡았다.

백제문화권정비사업계획은 노태우 통령의 선거 공약사업이었다. 통령 당선 후

통령은 1988년 3월 15일 서울∙충남∙전북지역에 있는 백제 문화유적에 한 보존정비

계획을수립하라는지시를내렸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문화유적 보존 계획이 수립되었다. 정비 상 유적은 서울지역

의 경우 석촌동고분군, 몽촌토성, 방이동고분군, 암사동신석기시 유적, 풍납동토성등 5

개 지역이었다. 공주지역은 송산성, 송산고분군, 갑사(甲寺) 등 17개 사업이었으며, 익산지

역은 익산미륵사지, 왕궁평유적, 미륵산성, 제석사지 등 11개 사업이었다. 5개년

(1988~1992)에걸쳐54개사업에총645억원이투입되는 규모사업이었다.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사업 추진을 위해 먼저 발굴 조사 사업이 선행되어 유적의 성격

부터연구조사되어야된다는점을 통령에게상세히보고하고, 이를위해문화재연구소의

지방연구소가있어야한다는점을강력히건의하 다.

보고결과 통령은다음과같은지시사항을내렸다.

1. 문화유적 보존 정비사업은 관련 부처와 협조, 근처에 휴식 레크리에이션 관광시설

을함께설치하는등종합적이고보완적인보존정비가되도록하되, 휴식레크리에

이션관광시설이주가되어주종(主從)이바뀌는일이없도록할것.

2. 남북의 문화재를 함께 총괄 정리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우리 역사의 시원지(始原

地)인 한강변의 백제문화권을 잘 정비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이 우리에게 있음

을확립해나가야할것.

3. 문화재연구소의전문기능을강화하여 지방문화재연구소를설치하는등 각 시∙도

에문화재연구를위한관련기능을보강하도록검토할것.

4. 문화재관리국에 무형문화재과와 천연기념물 보호를 위한 전문기능 강화 방안을

검토할것.

이때처음으로지방문화재연구소설치방안이구체적으로언급된것이다.

이듬해인1989년9월1일먼저문화재연구소소속으로익산왕궁리유적발굴조사단

이 구성되었다. 이후 백제문화유적정비사업계획에 의해 익산 미륵사지 역사박물관이 건립

되었으며, 동탑복원도이루어졌다. 또익산미륵사지와왕궁평유적의계획발굴조사도장

72

제1장문화재가있는곳에문화재연구소가있다- 지방문화재연구소설립

1988년 9월 1일 통령령 제12513호에 따라 문화재연구소 직제 개정이 이루어져, 유

적조사연구실이신설되고정원이증원되었다. 이로써문화재연구소의업무분장체계는유

적조사연구실∙미술공예연구실∙예능민속연구실∙보존과학연구실등4실로확 되었다.

보존과학 전문가 양성 및 교류

문화재 보존과학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국가기관은 물론 학계 및 일반인에게도 공통

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존과학이라는 종합학문이 체계적으로 제몫을 할 수 있

는제도적장치가마련돼있지못한형편이었다. 국내에는이런특수분야의전문인력을양

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전무한 형편이었고, 따라서 자연과학분야의 전공자를 채용하여

미국∙프랑스∙일본 등 선진국 연구기관에 3~6개월 정도 파견 훈련하여 전문가를 양성하

다. 또한 학박물관 및 문화재 관련 기관 유물관리자를 상으로 보존과학 기초연수교

육과 실무위탁교육 등을 자체적으로 실시하여 유물관리자에게 유물관리 기초 지식을 획득

할수있게하 다.

특히1990년 들어발굴증가에따라매장문화재출토후보존관리가중요한문제점

으로 두되었을때, 1979년부터매년1~3명씩문화재관련기관의유물관리자를 상으로

실시한유물보존처리및보존관리에관한연수교육은큰힘을발휘하 다.

한편, 보존과학연구실에서는 문화재 관리 실무자를 상으로 1992년부터 매년 보존

과학 기초연수 교육을 개설하 다. 매장문화재 발굴이 증가하고 출토 유물 급증에 따라 각

박물관소장유물의과학적보존및관리를위해문화재보존처리및방법에관한전문지식

연수를 실시한 것이다. 1992년 15명을 시작으로1993년 32명, 1994년 40명 등이 연수과정

을이수하 다. 강의내용은보존과학에 한기초이론과문화재보존방법, 발굴현장에서

의 출토 유물에 한 응급조치, 수리 복원 및 문화재 보존 환경 등이었으며, 강사진은 문화

재전문위원과관련전문가 다.

아말감도금제작과정 개성경천사지십층석탑정 보존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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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제1편통사

74

제1장문화재가있는곳에문화재연구소가있다- 지방문화재연구소설립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부여 능산리고분지역의 토지 매입과 백제고분 정비 및

부소산성발굴도진행되었다.

연구소 개설 20년, 새로운 도약의 밑거름 - 지방 연구소 발족

문화재연구소 역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은 1990년 1월 3일에 있었다. 이 날짜 통

령령제12896호에따라문화재연구소직제개정으로경주문화재연구소, 부여문화재연구소,

창원문화재연구소의 3개 지방 연구소와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 등 모두 4개 지방기구가

발족한것이다. 각소장은4급학예연구관으로하고, 48명의증원이이루어졌다.

경북경주시인왕동76번지2층한식골기및조립식건축물에자리를잡은경주문화

재연구소는 이미 1977년에 준공한 유물 창고, 1984년에 준공한 문화재연구소 월성해자 사

무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충남 부여군 부여

읍관북리28-4번지지하1층지상3층철근콘크리트조한식골기와건물을중심으로전북

익산군왕궁면왕궁리발굴현장등을효율적으로관리할수있는거점을마련하 다. 또창

원문화재연구소는경남창원시용호동8-4번지에부지를마련하고연건평이3,684평에이

르는사옥건설에들어가1995년10월30일준공을맞게된다.

비록연구소독립은아직미완의과제로남았지만문화재연구소는처음으로3개지방

연구소를갖게됨으로써각지역에산재해있는소중한문화유적현장발굴과관리, 보존등

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연구소 개설 20년만에 이룬 중요한 전

환이었으며, 새로운도약의의지로1990년 를여는든든한밑거름이었다.

한편, 1994년 5월 4일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개편∙

독립되었으며, 이후 2000년 에 들어 2005년 8월 16일에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2007

년 11월 30일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각각 신설되어 현재는 5개의 지방연구소를 두고

있다.

국 장

문화재기획관

문화재1과

문화재2과

재산관리과

(3)

지구관리사무소(12)

종묘사무소

경복궁사무소

덕수궁사무소

창덕궁사무소

창경궁사무소

■ 기구도 (1990년 1월 3일)

미술공예연구실

예능민속연구실

유적조사연구실

궁원관리과

문화재보수과

보존과학연구실

지 유방 물연 처구 리소 소(3) (1)

문화재연구소

창원문화재연구소현판식

경주문화재연구소현판식 부여문화재연구소현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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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제1편통사

신라문화권 문화유적 지표조사

경주를 포함한 구∙경북 관내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적의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

고, 급속한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훼손되거나 인멸될 우려가 있는 문화재의 현상 변경

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90년부터 정 지표조사를 실시한 후 전국

문화유적분포지도와지표조사보고서를매년제작하 다.

연차지표조사는매년경상북도관내의1개군을선정, 정 한계획아래실시하 다.

또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으로 인하여 토지의 현상 변경이 발생하는 지역의 유적 유무 확인

을 위해서는 긴급지표조사를 실시하 다. 1990년 흥해 칠포리 암각화를 시작으로 1991년

장기읍성등3건, 1992년법광사지등2건, 1993년남미질부성등3건, 1994년경주서악지

역등2건에 한지표조사가실시되었다.

백제문화권 문화유적 지표조사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부여지방을 중심으로 한 백제고분 지표조사를 연차적으로

실시하여 이에 한 조사보고서를 발간하 다. 또 이를 문화재 보존관리의 기본 자료로 활

용하고자매년조사를실시하 다.

1992년에는 부여읍 일 에 한 고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백제석실분과 옹관묘 등

의 고분군을 확인하 다. 1993년에는 보령군 일 도서지역의 패총을 중심으로 한 지표조

사를실시하 으며, 1994년에는부여군석성면과초촌면일 에 한백제고분지표조사를

실시하 다.

가야문화권 문화유적 지표조사

가야문화권 지역 내의 유적 상황 및 중요도를 감안, 우선순위를 결정하여 종합적인

보존정비사업 및 학술발굴 조사 계획을 수립하 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1992년 함안 도항

리 고분군(사적 제84호)을 비롯한 20건의 중요 유적에 한 현장 답사를 실시하 다. 또

1993년거창∙함양∙산청등경남서북부, 1994년하동과남해군등경남서남부에 한지

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76건의 유적 현황을 파악하 다. 아울러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함

양손곡리유적, 하동안계리지석묘군등19건의새로운유적을확인하는성과를얻었다.

이같은직 사업외에 행사업도시행하 다. 먼저가야문화권유적정 학술조사

는1984년김해시를시작으로1991년까지29개시∙군에 한제1단계조사를완료하여총

515건의 유적을 확인하 다. 제2단계 사업은 제1단계 조사 자료를 토 로 보다 심도 있는

76

제2장사라져가는문화재, 사라지기전에지키기

1. 유적훼손을막기위한최소한의조치, 문화유적지표조사

지표조사는고고학적으로문화유적의확인을위한일차적인작업이면서개발로인한

유적의훼손을방지하기위한최소한의조치이다. 유적조사연구실에서는이러한자료조사

의중요성을감안하여군사보호구역내문화유적에 한지표조사를실시하여유적의현황

을확인하고, 이미발간된『문화유적총람』을보완하여발굴조사의기초자료로활용함과동

시에통신망을이용하여우리문화의우수성을알리는계기를마련하여큰성과를얻었다.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는 휴전선 이남의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에

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현황과 실태를 파악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학술적 자료

및 유적의 보존정비 자료를 얻고, 향후 민족통일에 비하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삼고자

연차적으로실시하 다.

지표조사는 1991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시작되어 경기∙강원도의 군사분계선 인접

시∙군 지역을 상으로 문화유적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1991년 경기도 연천군 삼곶리

백제적석총등128건, 1992~1993년경기도파주군덕진산성등153건, 1993~1994년강원

도 철원군 자모산성 등 99건에 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는 민간인통제구역 내의

유적도 22건 포함되어 있었으며, 특히 학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보호 가치가

높은유적이많았다. 규제완화로인한개발등으로유적의훼손우려가있어국가문화재지

정 등 국가적 차원의 보존 조치가 요망된 유적으로는 1991년 경기도 연천군 전리산성과

심원사지(深源寺址) 등이있었다.

제2장사라져 가는 문화재, 사라지기 전에 지키기

파주동파리마애사방불탁본 고성건봉사부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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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제1편통사

을 실시하 고, 이를 토 로 조각 기법, 양식적 변천, 건축적인 고찰 등의 내용을 종합하여

2권의보고서를발간하 다.

1999년도에 발간된『석등조사보고서』1권은 간주식(竿柱式) 석등을 중심으로 국가지

정12건, 지방지정15건, 비지정17건등44건을수록하 다. 2001년도에발간된『석등조사

보고서』2권은 이형식(異形式) 석등 25기를 상으로 하 으며, 북한 소재 금강산 묘길상

석등5기에 한자료도수집하여함께수록하 다.

석등에 해서는각각해설과사진, 정 실측도면을수록하여향후지정문화재보존

관리와나아가문화재원형보존의활용에기여하고자하 으며, 미술사∙건축사등의관련

학문의기초연구자료를제공하고자하 다.

금석문 조사

금석문이란 말 그 로 청동과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文)과 비석처럼 석

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금문은 금속제

의 용기∙악기∙무기∙화폐∙인장(印章)∙경감(鏡鑑)∙조상(造像)∙범종(梵鐘)∙도량형 등

에 주출(鑄出)되었거나 새겨진 문자이며, 석문은 석제의 비(碑)∙묘지(墓誌)∙조상 등에 새

겨진 문자이다.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을 금석학이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금석 이외에 갑

골(甲骨), 간독(簡牘: 木簡 ∙竹簡), 봉니(封泥), 토기(土器), 와전(瓦塼: 기와∙벽돌) 등에 있

는문자도그범위에포함시킨다.

금문은중국의옛동기(銅器)에서볼수있는명문이주요한부분을차지하는반면, 서

양에서는그리스의비문(碑文)과묘지명(墓誌銘)이유명하다. 그러나동양에서도석고(石鼓)

나 진(秦)나라 각석(刻石)을 비롯하여 역 의 비문, 묘지명, 조상비(造像碑) 등에 걸친 중국

의석문이중요하다. 체로금석문은그출처나전해내려오는사정이분명한것일수록가

치가크다. 또정확한문헌이적은고 사의해명에기여하며, 때로는문헌상의잘못을바로

잡아주기도한다.

금석문조사는1998년부터전국에소재한국가지정금석비문을중심으로일제조사를

실시하여, 보존관리를위한자료확보및학술연구자료를제공할수있도록실시하 다.

먼저관계전문가의자문을구하여개별금석비문의상태를점검하고기록보존의우

선순위를 결정하도록 하 다. 그리고 국가지정 금석비문 70건과, 지방지정, 비지정도 포함

하여기록보존을위한탁본을연차적으로실시하며, 보존적측면에서는실태조사를통하여

우선순위를정한후실리콘복제를통한모형을제작하도록하 다. 또한미술사적으로중요

한 금석비문에 하여는 실측을 하고, 조사 자료를 필름첩으로 기록, 보존하도록 하 다.

1999년도부터본조사에착수하여경기도안성칠장사혜소국사비등11건을완료하 다.

2002년도부터는5개년계획으로전국에산재한국보, 보물, 신도비등을포함한금석

78

제2장사라져가는문화재, 사라지기전에지키기

가야의실체규명에필요한연구자료수집을위하여가야권역별유적정 조사를연차적으

로실시하 다. 이를가야사(加倻史) 재구성을위한기본자료로활용하기위해1992년부터

조사기관을선정하고금관∙소∙아라∙ 가야권에 한조사를실시하 다. 1992~1993년

금관가야권을 상으로 동아 학교박물관에서 조사를 실시하여 양동리고분군 등 90건의

유적을, 1994년 소가야권을 상으로 경남 학교박물관에서 조사를 실시하여 송학동고분

군등77건의유적을확인하 다.

2. 우리미술전통문화의아름다움을찾아서- 전국사찰석등및사리장엄구조사

미술공예연구의 범위 및 상 확

문화재연구소로 직제가 확장되면서 그에 맞추어 미술공예 연구도 북한 문화재 및 해

외 소장 한국문화재로의 범위 및 상의 확 를 이루었다. 아울러 전국 사찰의 불화, 괘불,

남산석탑, 불적조사외에중요한불교유물가운데미처손 지못했던전국사찰석등조사

에착수했다.

석등은 특히 조각사(彫刻史)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르인 까닭에 본 사업은

개별 석등을 국가지정 문화재 중심으로 선정하여 조각 기법, 시 양식 등을 비교 분석, 전

체 석등 양식의 계보를 밝히는 중요한 기초조사에 해당한다. 이 외에 1998년도부터 국가지

정 금석 비문을 중심으로 하여 금석 비문 자료 보존과 비문 판독 등을 위주로 전국 금석 비

문조사를실시하 다.

한편1998년경주나원리오층석탑보수시발견된사리장엄구일괄유물에 해분야

별조사연구가실시되었는데, 이때미술공예분야에서는사리장엄구를중심으로하는종합

학술서를발간하 다.

석등 조사

석등(石燈)은사원(절) 경내나, 능묘∙정원등에불을밝히기위해만들어두는등이다.

한국의 석등은 다른 부분의 석조물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가람 배치 양식에 따른 한 구조

물로전래되어등기(燈機)이자사원공간의첨경물로서그기능이발전되었다.

1992년부터 2001년까지 법주사 사천왕상 석등(보물 15호) 등 국가지정 석등 26기와

지방지정석등을합하여총74건에 한조사를실시하 다. 정 실측, 사진촬 , 탁본등 법주사사천왕상석등

회암사지선각왕사비화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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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제1편통사

그 후 관계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북한문화재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효율적이고 전문적

인자문과연구조사를실시하 다.

그 성과로 1999년 현재 도서류, 슬라이드 필름, 칼라 및 흑백사진, 비디오테이프 등

총7,797건의자료를수집보관하고있으며, 이러한자료를정리하여총7책의보고서를발

간하 다. 1985년에『북한문화재 실태와 현황』을 발간하 으며, 1990년에는 역사학∙고고

학∙미술사학∙민속학 등에 관한 저서와 논문들을 수집 정리하여『북한문화재관계문헌휘

보』를 발간하 다. 1991년에는 구석기시 부터 조선시 에 이르는 고고학∙고건축∙역사

학 등의 자료에 한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도면과 함께 수록한『북한문화유적발굴개보』를

발간하여 제10회 동원학술상(東垣學術賞)을 수상하기도 하 다. 1992년에 미술공예연구실

에서수집보관하고있는북한문화재관계도서∙필름∙사진및비디오테이프등의목록을

정리하여『북한문화재자료목록』을발간하 다.

또한 1992년에 광복 47주년 기념으로 민족 공동 문화 유산인 북한 문화재의 현황과

실태를 일반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북한문화재사진전을 개최하 으며, 1993년도에는 이

전시사진들을모아『북한문화재도록』을발간하 다.

1997년도부터는 북한의 중요 문화재를 각 분야별로 도면 및 도판과 함께 해설한『북

한문화재해설집』시리즈를 발간하 으며, 그 결과물로 1997년에『북한문화재해설집』Ⅰ집

(석조물편)과1998년에『북한문화해설집』Ⅱ집(사찰건축편)이발간되었다.

80

제2장사라져가는문화재, 사라지기전에지키기

문을 모아 선사시 부터 조선시 까지 종합적으로 웹상에 구축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금

석문종합 상 DB구축사업을 실시하 다. 금석문의 탁본, 실물 등의 이미지와 판독과 번역

의 텍스트를 수집하여 기록을 보존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 다. 나아가 2004년도

5월부터는웹서비스를실시하여전문연구가들에게는원문자료의활용을가능케하고, 일

반인들에게는 선조들의 기록문화에 한 이해를 증진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 다. 또한 금

석의 내용과 더불어 다양한 내용이 금석문 관련 콘텐츠를 상 이미지로 구축하여 쉽게 금

석문을이해할수있게구성하 다.

사리장엄 조사

사리장엄이란 부처나 승려의 사리를 담는 용구와 이를 탑 속에 봉안하는 사리장치를

통틀어일컫는용어이다. 미술문화재연구실에서는석탑해체보수시긴급히수습된사리장

엄일괄유물에 하여보존처리후과학적분석및미술사, 건축사, 사리신앙등의종합적

인 조사연구를 실시하 다. 1998년에는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39호), 2000년에는 경

주감은사지동삼층석탑(국보112호)의사리장엄일괄유물에 한종합연구를수록한보고

서를발간하 다.

나원리 오층석탑에서는 1996년 해체보수 과정 중에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고, 사리

(舍利)외에 소불상(小佛像), 소형의 금동탑∙목제탑, 다라니경(多羅尼經) 등이 다양하게 확

인되었다. 감은사지동삼층석탑의사리장엄구는1996년에진행된석탑의해체복원공사중

에발견되었는데, 탑내∙외의사리함, 사리병, 사리등이발견되었다.

보고서에서는 각종 유물에 장식된 문양과 기법 등을 분석하고, 동(同) 시 에 제작된

사리함과의 비교를 통해서 사리함 제작의 신앙적 배경 등에 하여 고찰하 다. 또한 일차

적인 유물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복원을 위한 복원도를 제작하 으며, 보존처리 결과와 과

학적분석에 한내용도함께수록하 다.

3. 손닿지않는곳에있어더욱소중한문화유산

북한 및 국외 문화재 조사

오랜 분단의 현실에서 장차 있을 통일에 비하여 남북한 문화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전통문화사를온전하게정립하고자1984년부터착수한사업이다. 초기에는북한의문화유

산에 한 자료를 국내외 관련 기관이나 학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하 으며,

구 분 자 료 명 비 고수 량

‘88~’98 1999 계

관계도서구입 및 복사

슬라이드 필름

칼라사진

흑백사진

비디오테이프

도면

CD-ROM

탁본

관계도서목록 입수

국내외보도자료 스크랩

총 계 8종

백두에서 한라까지 렌즈로 본 조국 등

금강산 등

황초령, 마운령순수비 등

평양성 명문석 등

보고싶은 북녘 산천 - 백두산 등

강원도 정양사 반야전 등

한민족문화네트워크

광개토왕릉비 부문

고조선, 마한 문화 등

북문화재 1만여점 첫공개 등

804권

4,364매

985매

226매

60개

221매

-

2건

370건

713건

4권

-

-

-

4개

-

2개

-

-

42건

808권

4,364매

985매

226매

64개

221매

2개

2건

370건

755건

7,797건

필름

총 5,575매

■ 북한문화재 관계 자료 수집 현황

금동사리함현장유물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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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제1편통사

82

제2장사라져가는문화재, 사라지기전에지키기

해외 소재 문화재 조사

해외에 소장된 우리 문화재의 소재와 실태를 파악하여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을 체계

적으로 정리하고, 나아가 해외 소재 문화재의 현지 선양을 통한 문화민족으로서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1966년‘ 일문화재반환협정’에 의한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 1,432

점의 반환을 계기로 해외 소재 문화재 조사사업을 시작하 다. 그 결과로 1984년~1998년

까지 미국과 일본 등 18개국에 소재해 있는 우리 문화재 7만 329건에 한 현황 파악과 해

외문화재관련목록집4책, 도판및해설집3책을발간하 다.

1989년부터는 통령지시문화발전10개년사업의일환으로해외현지조사를계획하

여1992년부터1998년까지7차에걸쳐일본및프랑스소재문화재에 한현지출장조사

를실시하 다. 1994년에는1993년일본현지조사당시수집한오가와 게이기찌(小川敬吉)

조사 문화재 자료 1,727건(4,660점)을 정리하여 표적인 사진과 탁본 중심의 도록을 발간

하 다.

번호 년도 책 자 명 내 용 비고

1

2

3

4

5

6

7

1985

1990

1991

1992

1993

1997

1998

북한문화재 실태와 현황

북한문화재관계문헌휘보

북한문화유적발굴개보

북한문화재자료목록

북한문화재도록

북한문화재해설집 제Ⅰ집(석조물편)

북한문화재해설집 제Ⅱ집(사찰건축편)

계 7책

광복 이후 북한의 유적발굴 현황과 시∙도별 문화재

현황 및 지정문화재 현황 등을 소개

북한문화재 관계 문헌자료의 개략적 내용과 목차

1,227건 수록

유적발굴 관계 문헌자료의 내용요약 및 유물과 유구

의 실측도면 등 357건 게재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자료(도서류∙필름∙사진∙비

디오테이프 등)의 분류별 목록정리

북한의 고건축∙성곽∙석조물∙고분∙고분벽화∙회

화∙도자기∙금속유물∙선사유적 및 유물∙명승∙

천연기념물 등 중요문화재 사진 230점과 해설수록

북한의 석탑∙부도∙석등∙석비∙당간지주∙능묘석

물∙기타 석조물 등 173건의 사진, 도면, 해설수록

북한의 사찰건축 총 61건의 사진, 배치도∙단면도∙

평면도 등 도면, 해설수록

■ 북한문화재 관계 보고서 발간 현황

소장처 목록 확인수량 기 타 계 비 고

일본

미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덴마크

중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

벨기에

스웨덴

이태리

네덜란드

스위스

19,057

7,799

769

1,880

-

1,222

1,470

-

679

380

-

-

-

-

48

17

8

1

33,330

14,018

7,615

6,420

3,366

3,350

1,168

-

1,434

-

-

250

135

58

56

-

-

-

-

36,999

33,075

15,414

7,189

5,246

3,350

1,518

1,470

1,434

679

380

250

135

58

56

48

17

8

1

70,329

■ 해외 소재 한국 문화재 현황 (1999년 11월 기준-30주년 내용)

* 기타 항목 3만 6,999건은 신문 등의 보도자료 등에서 발췌한 것으로, 문화재청이나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직접 목록을 확인하지 못한 추정 자료임.

번호 조사년도 조사지역 및 조사기관 조 사 내 용 비고

1

2

3

4

5

6

7

1992

1993

1994

1995

1997

1998

1998

일본북구주시립박물관 및

경도국립박물관

일본 경도 杉山信三 所藏

小川敬吉 수집자료

일본 북촌미술관,

나라국립박물관 등 4개기관

일본 나라∙경도 소재

국립박물관 및 지은원 등 사찰

일본 동경 학교 건축자료실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

일본 동경 학교 건축자료실

일본 북구주시립박물관 소장 신라와전 79점,

경도 국립박물관 소장 고려동경 등 127점

小川敬吉 조사수집자료 조사야장 1,727건

흑백사진 4,660매

북촌미술관소장 및 나라국립박물관소장

고려나전칠기 등 54점

나라 및 경도국립박물관소장 등의

고려~조선시 불화 41점 조사

일본 동경 학교 關野貞 수집자료 실태파악 및

조사방법협의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수월관음도 등 914건 조사

건축도면∙관련사진 453건 확보

가야, 낙랑토기류 91점 조사

■ 연도별 해외 소재 한국 문화재 현지조사 실적

필라델피아미술관조사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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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제1편통사

석조건축물 조사

석탑, 전탑, 부도(浮圖), 석굴, 석빙고(石氷庫), 석교(石橋)∙성곽 등 우리나라 전통 석

조건축물의양식과건축사적변천등을조사연구하는것이석조건축물조사사업이다. 주요

조사 상은 국가지정 석조건축문화재 중 다수를 차지하는 석탑 186건(국보 28, 보물

158)으로 정 실측 등 기록보존을 실시하 다. 1977년도부터 2003년까지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된 석탑, 부도, 석등, 당간지주 등 37건을 조사한 바 있으며 2004년부터는 석조문화재

기록보존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전라남도의 석탑을 시작으로 지역별 국가지정 석탑

의조사를실시하 다.

조사내용 및 방법을 살펴보면 목조건축물 조사와 마찬가지로 현지조사에 앞서 문헌

및인문환경조사를실시하고현지조사에서는조사의정확성과안전을고려하여비계를설

치해 전체 현황 및 각 부재에 해 수실측 및 3D스캐닝을 통한 정 실측조사를 실시하

다. 또한, 상 석조문화재의 건축형식 및 결구(結構)기법 등을 조사하고 평면, 입면, 단면,

상세도등도면을작성하여기록화하 다. 조각및문양은탁본등을통해상세히기록하고,

현황 기록을 위해 전경 및 세부 촬 도 이루어졌다. 또한, 실측조사와 함께 부재의 훼손(결

실, 균열, 박락), 이완, 지의류 번식 상태 등을 기초로 석조물 보존실태조사를 시행하 다.

이러한조사결과는건축사, 미술사, 보존과학등관련분야의체계적연구를위해매우중요

한자료가되고있다.

전통 건축물 건조 기법 조사

이조사는전통건축물의해체보수시가구방식, 부재결구및치목기법, 가공방법

등을 상세히 조사하고 기록하여 전통 건조 기법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사업이다. 건축문

화에 있어서 유형의 건조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무형의 건조 기법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

고있으므로두가지모두보존되어야그가치가있는것이다.

오늘날문화재보수∙복원시기계의사용이급격히늘어나전통방식이사라져가고

있으므로전통건조기법의보존은시급한과제의하나가아닐수없다. 사업의 상은중요

국가지정 목조 및 석조건축물을 우선 선정하여 조사하 으며, 이를 바탕으로 모형을 제작

하여학술적연구및전시, 교육등에활용하 다.

조사내용은해체보수현장에서 상물의건축형식과가구방식, 부재결구, 치목기

법, 가공 방법 등을 조사하고 기록을 위하여 탁본과 현황 사진을 촬 했다. 이어 조사된 자

료를 바탕으로 상물의 모형을 제작했다. 1991년부터 우선적으로 해체 보수된 국가지정

목조건축물의모형21건을제작완료하 다.

84

제2장사라져가는문화재, 사라지기전에지키기

4. 건축물에서건축기법까지그가치를찾아- 고건축조사연구

목조건축물 조사

궁궐∙사찰∙서원∙향교∙사묘(祠廟)∙성곽∙관아∙누정(�亭)∙민가 등 우리나라

건축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전통 목조건물의 양식과 건축사적 변천 등을 조사연구하는 것

이목조건축물조사사업이다. 조사 상은국가및시∙도지정문화재전반에걸친것이지

만, 우선적으로 국가지정 목조문화재 332건(국보 20, 보물 116, 중요민속자료 142, 전통건

조물21, 사적30, 사적및명승3)을 상으로실측조사를진행하 다.

1989년까지는 사찰건축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58건의 단위건물을 조사하

고, 1990년부터는 목조건축물 조사 중장기계획에 의해 상을 서원과 향교 등 유교건축으

로변경하고, 조사범위도단위건물에서문화재지정구역전체로확장하여1995년까지무성

서원등서원건축물7건을조사하 다.

조사 내용 및 조사 방법은 우선 현지조사에 앞서 문헌과 인문환경 조사를 실시했다.

현지조사에서는 전체 배치도와 각 건물을 실측하여 평면∙입면∙단면 등의 기본도를 작성

하고, 각 건물의 건축 형식과 건조 기법 등을 조사했다. 이 외에도 중수 시기와 비문(碑文)

등의중요한명문이나공포등의건축부재는탁본하고, 전경과각건물의세부사진을촬

하 다.

법주사원통보전정 실측을위한가설비계

정읍은선리삼층석탑정 실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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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제1편통사

었다. 이를 통해 문화재 원형 고증 작업시 신속성과 정 성을 높임으로써 문화재 보존관리

에일익을담당하고, 그결과를애니메이션기법등을이용하여 상처리한후공개함으로

써문화재보급에기여하 다.

이 사업은 1991년 문화부와 과학기술처의 공동 추진 사업으로 시작하 다. 문화부는

복원 상 문화재의 실측자료 제공과 기술자문을 담당했고, 과기처는 컴퓨터 상처리 기

술과 인력을 지원하 다. 공동 추진 사업의 단기 과제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석사 조사당 벽화를 복원설계하 고, 이를 상 처리하여 중간발표회를 가졌으

며, 그결과를보고서로발간하 다. 1993년에는시스템공학연구소(SERI)에용역의뢰하여

법주사팔상전의조립과정을3차원으로 상처리하 다.

세계 문화와의 교감 - 문화재연구 국제학술 회

세계 각국의 고고학 연구 성과와 한국 고고학 연구 성과에 한 상호 연구자료 교환

과인적교류증 를통하여한국고고학연구의발전을도모하고연구분위기조성에이바

지하고자국제학술 회를실시하기시작했다. 유럽과미국각국및일본∙중국에서는고고

학 관계 국제학술 회가 수시로 개최되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기적으로

개최되는고고학관련국제학술 회가없는실정이었다.

이에따라문화재연구소는1992년부터계속사업으로특정분야전공자의연구결과

를 발표, 토론하고 그 결과는 논문집으로 발간하여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하 다. 1992

년제1회국제학술 회는동아시아구석기문화를주제로, 제2회 회는동아시아신석기문

화를 주제로, 제3회 회는 동아시아 청동기문화를 주제로, 제4회 회는 동아시아 청동기

문화를주제로하고각각국제학술 회를개최하 다.

1994년 11월 14일~17일 국립민속박물관 강당에서 개최된 제4회 회에서는 청동

기시 사회상과 성격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돋보 다. 특히 후기 지석묘 사회의 성격을 출

토 유물과 함께 검토하여, 지석묘는 부족장의 무덤이 아니라 전사자들의 기념물로서 조

되었다는새로운학설이제안되었다. 또청동기시 의경제생활, 특히농업∙수렵∙어업에

한 종합적인 분석이 이루어졌고, 중부지방의 중도 유적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상이한 성

격의 유적인 묘제와 주거를 동시에 비교∙고찰하 다. 이로써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보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등, 청동기시 의 사회상을 파악하려는 다양한 연구가 시도되었다. 또

한 한국 청동기시 입지 환경과 지역적 통합을 고찰하여 5가지 유형의 유적 성립 환경을

고찰한 연구와, 시베리아의 기원전 4,000년기 말엽에서 기원전 8세기에 이르는 청동기∙

초기철기시 의매장양식을잘보여주는최근50여기의무덤발굴결과에 한소개는한

국청동기문화연구에큰도움을주었다.

고고학발전을위한이같은노력과병행하여1992년에는고고학사전발간계획을수

립하여 한국상고사학회와의 연차적 학술용역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86

제2장사라져가는문화재, 사라지기전에지키기

국보∙보물 축소도면집 발간

문화재관련정보및자료공개의일환으로국가지정목조및석조건축물의정 실측

도를 축소하고, 연혁과 규모, 양식 등 관계 기록을 덧붙여 도면집으로 발간하 다. 이 책자

는각도서관, 건축과자료실, 관계연구기관등에배포되어전통건축의학술적연구에필요

한기초자료가되었으며, 문화재기록보존에도크게기여하 다. 1991년제1집, 1993년제

2집, 1995년제3집이각각발간되어총15건의목조건축물이수록되었다.

5. 문화재복원의지와기술향상

고산(孤山) 윤선도 유적 복원설계

고산윤선도유적은전남완도군보길면부용리에위치하고있다. 유적정비∙복원계

획에 따라 1989년 11월 보길도 부용동의 세연정지를 시굴 조사하 고, 1990년 10월부터 11

월에 걸쳐 유적조사연구실과 미술공예연구실이 합동으로 보길도 부용동 세연정지와 동천

석실지의발굴조사를실시하 다.

세연정지의발굴조사결과정면과측면이각각3칸이고, 중앙에온돌이있으며, 북쪽

에‘中’자형 구들과 반 쪽에 T자형 굴뚝이 있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1705년에 윤위가 쓴 보길도지(甫吉島識)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다. 동천석실지의 발굴 조

사 결과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 내부쪽은 흙을 다짐하 을

뿐온돌구조는나타나지않았다.

이러한 발굴 조사 결과와 보길도지(甫吉島識) 및 고산연보(孤山�譜) 등의 기록을 참

고하여 1991년 2월부터 11월까지 세연정과 동천석실 건물을 복원설계하 다. 세연정은 정

면과 측면이 각각 3칸 규모인 겹처마 팔작지붕 정자건물로, 2단의 석축 위에 세워졌다. 평

면은 중앙에 온돌을 두고 그 주위에 마루를 깔아 난간을 둔‘回’자 형식이다. 공포( 包)는

익공식으로 처리하 고 사방에 판문을 달아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 다. 동천석실은

사방 1칸의 작은 서실로, 내부는 마루를 두고 사방에 판문을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

붕은사모지붕인데중앙에절병통을올려놓았다.

컴퓨터를 이용한 문화재 복원설계

첨단기술인 컴퓨터 상처리 기법을 문화재의 복원에 응용하는 사업이 처음 도입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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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1. 무형문화재조사연구의심화

음악 분야는 어업요(漁業謠)를 주제로 서해안 지역 31개 마을(1991년)과 남해안 지역

32개 마을(1992~1993년)을 상으로 조사했으며,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보충 조사(1995

년)를실시하고 표적인가락과사설을채보하여보고서를발간했다.

그밖에문화재보호관리를위한학술연구자료수집을목적으로서도민요와경기민요

의 선율 구조를 연구하고(1992년), 전통 음악 자료의 효과적 분류와 활용을 위한 연구를 진

행했다(1997년).

무용 분야는 교방춤에 속하는 입춤∙한량무∙검무에 해 각 지역 총 72명의 춤꾼들

이지닌춤사위∙장단∙무복∙전승계보및전승실태등을조사했다(1992~1994년).

연극과 놀이 분야는 경상 지역 18개 마을(1992년)과 충청 지역 12개 마을(1993년)의

장례의식관련놀이와상엿소리, 공동조직등을조사했으며, 그밖에만석중놀음과박첨지

놀음을조사했다(1998~1999년).

공예기술 분야는 전북(1992년), 전남(1993년), 경상∙충청(1994년), 경기∙강원∙제

주(1995년) 지역의짚∙풀공예의재료∙종류∙용도∙제작방법등을조사했다.

2. 민속종합조사의심화

여자들에게만 주어진‘출산’이라는 특수한 문화 양상을 살피고자 산속(産俗)에 한

조사를실시했으며(1990~1992년), 민간의료를주제로전통의료제도의변천사및민간전

래 의약기(1993년), 전통 민간 약재의 종류와 채취 및 제조법(1994년), 민간 약재와 약물을

이용한 치료법 및 민속적인 치료법과 퇴치법, 왕궁에서 사용하던 전통 의약용구 등에 한

조사(1995년) 등을통해한국인의질병관을총체적으로밝히고자했다.

그밖에전북서해도서지역의각종문헌자료및사회민속에 한총체적조사를통

해서이지역의역사문화적성격을밝히고자했다(1997~1999년).

88

제2장사라져가는문화재, 사라지기전에지키기

서 처음으로 실시되는 고고학사전 발간을 통해 광복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발전해 온 우리

나라 고고학계의 업적을 총집약하고, 향후 고고학연구 및 문화재 보존 업무의 기초자료로

활용하는한편, 일반인들에게도고고학과문화재에 한이해를돕고자한것이다.

6. 문화재보존을위한첨단장비확충

1980년 후반부터 사라져 가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한 첨단기자재가 설치되었다.

문화재 재질의 과학적 분석을 위한 분석 장비로 플라즈마염발광분석기(ICP), X선회절분석

기(XRD), 형광X선분석기(XRF), 원자흡광분석기(AA), 주사전자현미경(SEM) 등 60여종의

기자재를구입확충하 다.

특히 이 시기에 탄소연 측정기가 국내 문화재 관련기관으로는 최초로 도입되어 유

적에서출토된숯덩이, 나무, 뼈등의시료110여건에 한연 를측정하 다. 이러한첨단

장비의 운용은 기존의 육안 판별에 의존했던 문화재 재질을 보다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었

고, 성분분석을통해제작기술을알수있게되었다.

제3장조상의 소리, 역사와 소통하다

- 무형 및 민속문화재 조사연구 심화

짚풀공예조사(1992~1995년)

인형극조사(1998~1999년)

어업요조사(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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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90

제3장조상의소리, 역사와소통하다- 무형및민속문화재조사연구확

3. 유∙무형민속자료의조사심화

산간 지역의 신앙 형태와 양상, 주민들의 인식 태도 등을 밝히고자 전국 산간 신앙에

한 조사를 진행했다. 경기∙강원∙충청 지역(1991~1992년)과 경상∙전라∙제주 지역

(1996~1999년)을조사하고이후지역별보고서를발간했다.

그 밖에 전국의 운반 용구에 한 조사를 진행하고, 표적 운반 용구인 지게를 중심

으로 그 종류∙재료∙형태∙제작 방법 등 지역별 접근을 통해 과거 생업 용구로써 지게의

의미와기능을살피고나아가각지역의생업특성을밝히고자했다(1992~1995년).

연도 무형문화재조사 성과물 민속문화재조사 성과물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1992

1993

1994

1995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2

서도민요와 경기민요의 선율구조연구

(17) 어업요

(18) 무보집

(19) 입춤∙한량무∙검무

한국 전통음악 자료 분류법

(1) 산간신앙

(2) 장례놀이

산간신앙Ⅱ(경북∙경남편)

산간신앙Ⅲ(전북∙전남∙제주편)

(24) 산속편(상)

(25) 산속편(하)

(26) 민간의약

(27) 운반용구

(28) 짚∙풀공예

(29) 고군산군도

(30) 불교민속놀이

음악

음악

무용

무용

음악

■ 무형 및 민속문화재 조사연구 심화 결과보고서

지게조사(강원지역/1992년)

1. 선사시 및철기시

우리 구석기 문화를 거듭 세계에 알린 계기

- 파주 금파리(�坡里) 구석기 유적

1979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변에서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존재가 확인된 이

래 우리나라 구석기 연구의 중심은 중부지방의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으로 옮겨지게 되었

다. 미국버클리 에서구석기고고학을전공하고돌아온배기동은1989년문화재연구소에

재직하면서임진강및한탄강일 의지표조사를실시하 다. 여기에는당시유적조사연구

실심 섭학예연구사와김성배조사원이함께참여하 다. 1989년7월문산읍으로부터파

평면 장파리를 향해가던 조사자들은 임진강 동쪽에 강 방향과 나란히 언덕이 형성된 금파

리를지나게되었다. 언덕중심에도로가나있었고그좌우편으로논과밭이펼쳐져있었는

데, 길옆의 밭을 조사하던 중 주먹도끼(Biface) 1점과 박편들을 수습하면서 금파리 구석기

유적은세상에그존재를알리게되었다.

금파리유적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 산 5-1번지 일 에 위치한

다. 발굴 조사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4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주먹도끼, 원시형 클리

버, 다각면원구, 찍개, 석핵, 박편등총2,400여점의유물이출토되었다.

유적은 층위상으로‘경작토-황갈색점토층-적색점토층-모래층-현무암반층’으로 퇴

적되어 있다. 현무암이 이 지역을 덮은 후 상당 기간 하천이 존재하 고, 이후에도 두터운

사질층(두께 1.5m 내외)이 쌓인 것으로 보이며, 그 위로 황갈색의 점토층이 불연속으로 남

아있다.

유물은 주로 황갈색 점토층 내에서 집중적이면서도 불규칙한 양상을 보이며 출토되

었다. 금파리유적에서는 전곡리유적에서와 유사한 주먹도끼 등의 석기공작이 나타나고 있

지만, 석기들이출토되는상황이전곡리나다른유적들과는차이가있다.

1989년조사에서는야외주거유적일가능성이매우큰 타원형수혈유구를발견하

으며, 1990년 다량의 박편∙석편∙모암 등 약 400여 점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야

외석기제작장을 발견하 다. 표적인 유물로는 규암제 아슐리안 주먹도끼∙찍개∙ 개

제4장역사의 지평을 넓히고 조상의 지혜를 높이다

- 심층적인 문화유적 발굴 조사

파주금파리발굴조사현장

파주금파리유적에서출토된구석기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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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제1편통사

등을 들 수 있는데, 접합석기가 발견된 야외석기제작장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30만~10만년 전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더불어한탄강과임진강유역에존재했던고인류의환경적응체계및생활방식을종합적으

로구명할수있는귀중한자료가되고있다.

1991년 조사에서는 1989년에 조사된 추정 수혈 주거유적과 동일한 형태의 웅덩이가

4곳에 인접한 것이 확인되어, 이 유적에서 고인류(古人類)가 거주했을 가능성을 높여주었

다. 금파리유적의 구석기들은 모두 석 이나 규암을 이용하여 제작되었고, 격지 떼는 기술

이매우발달하여15~20cm가넘는격지들이많으며, 이들을이용하여 형의양면가공석

기들을만들었다. 유물의조합상으로볼때전기구석기로편년되며, 유적형성시기도 략

중기홍적세의말엽으로추정된다.

금파리유적의 발견으로 임진강 하류유역에도 제4기 지질시 에 인류가 살았던 것으

로밝혀졌으며, 이지역의구석기광역문화권설정과연구에일조할수있는매우중요한유

92

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전곡리(1989년 5월 9일)

적으로 인정된다. 발굴 진행 도중 아프리카 구석기연구의 권위자인 죤 데스몬드 클라크 박

사가 70 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발굴 현장을 방문하여 금파리 구석기 유물과 유적에 하

여 조언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세계에

알리는계기가되었다.

패총 유적 성격 규명의 자료- 창원 가음정동(加音丁洞) 당산패총

창원 가음정동 당산유적은 성산패총(사적 제240호)의 동북 방향 약 500m 거리에 위

치한 해발 73m의 야산에 소재하며, 여기에는 선사시 주거지∙지석묘∙패총∙고분 등이

복합적으로분포되어있어이들의성격규명을위해학술발굴조사를실시하 다.

패총을 형성하고 있는 층위는 표토층을 포함한 4개 문화층과 후 에 형성된 패분과

갈색부식토가다량섞여있는두꺼운교란층으로이루어져있고, 층위의흐름은지형의경

사도를따라북동에서남서방향으로20。내외의기울기를갖고비스듬히퇴적되어있었다.

조사구역의 동북편에서 확인된 길이 10m의 구(溝) 시설은 선사시 주거지 외곽에 설치된

방어적인시설의하나로사용되고있는환호(環濠)와같은성격으로보이며, 그시기는삼국

시 전기, 즉 서기 3~4세기경의 어느 시점이라 생각된다. 조사 결과 적갈색 연질토기편,

단경호, 고배, 시루편, 노형토기편등이패각층내에서다수출토되었고, 골제찌르개, 뒤꽂

이, 녹각제도자병등의골각기가수습되었다.

창원가음정동당산패총유적의조사로널리알려져있는외동성산패총유적과연계

하여 당시 이 지역 생활문화상을 복원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얻게 되었다. 또 양산패총과

김해 봉황 패총 등에서 발견되는 환호와 같은 성격의 구의 발견을 통해 초기 철기시 고

지성(高地性) 패총유적의성격을더욱분명하게해준좋은발굴사례로널리알려졌다.

2. 삼국시

새로운 축성(築城) 구조의 확인-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소산성은1980년부터1989년까지조사를실시하 는데, 군창지, 서록폐사지, 수혈

건물지, 추정 동문지와 남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연차조사를 계속 실시하여 1988년에서

1991년까지 계속된 추정 동문지 및 연결부 성벽 조사에서 성벽 구조와 토성의 축성 기법을

확인하 다.

토성의 주요 부분은 두께 260cm, 폭 500cm 정도인데, 황갈색 마사점토로 성토(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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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제1편통사

土)하여 쌓아올리고그 외부에는횡장목을 이용한 사각목공흔이2단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판축시설을 보강하기 위해 쌓아올린 석축시설이 그 토벽의 내외부에서 확인되었고, 석축

내외부에서도주공흔이남아있어목책을꽂았던것으로추정되고있다.

출토 유물로는 철제 무기류가 일괄 출토되었는데, 모두 형의 것으로 실전(實戰)에

사용했던것으로추정되는양지창, 갈고리형창, 낫, 화살촉, 갑주등이수습되었다. 그리고

많은양의와편과토기편, 소문수막새, 호, 벼루등이출토되었다.

1992년부터군창지를둘러싸고있는테뫼식산성의성벽과성내부의유구구조를조

사하 는데, 군창지 서남편 평탄지 에서 원형수혈주거지 1기와 방형수혈주거지 4기가 조

사되었다.

1993년에는군창지남쪽에형성된경사면과군창지테뫼식산성의남쪽절개지에이

르는지점에 해조사를실시하 는데, 교란된초석등의건물지유구가일부확인되었고,

퇴적된다수의백제토기편과기와편등이수습되었다. 그리고군창지동편지역에서는남북

방향으로 축을 이루는 조선시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이 건물지의 서편으로 150cm의 적

심 5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적심의아랫부분에서장방형의토광시설이확인되었는데, 그

내부의 퇴적토에서‘大唐’명(銘) 수막새가 발견되었다. 군창지 동편으로는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산성이연결되는곳으로여겨지는지점에 해조사를실시하 는데, 외부에장방형

의석재를이용하여석출을쌓고내부에는다짐을한구조로, 토루방향과일치하도록쌓은

후그위로석축과다짐을이용한축성을하여서편으로토루를구축하 다. 이지점의북편

으로는와편과토기편이섞인혼입토로다져서경사도를낮춘후그상면에판축을하여토

루를 완성한 축성 구조를 확인하 는데, 성벽의 안쪽 바닥에서 통일신라시 의 형 옹이

확인되었다.

1994년도에는군창지동편의테뫼식산성과포곡식산성의성벽이만나는지점을보

완조사하 고, 군창지 북편의 성벽을 2군데 절개하여 조사하여 역시 통일신라시 의 성벽

구조를확인하 다. 출토유물로는당초문암막새등이수습되었다.

1995년도에는군창지테뫼식산성의서편연결부를중심으로하여조사를실시하

다. 이 일 는 1992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군창지와 그 주변부 성벽조사의 하나로 수혈주

거지의 북동편 약 100m 지점에 성벽이 문지와 그 동편의 성벽 연접부에 해당하는 지점이

었다.

백제 최 규모의 사찰-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익산미륵사지는백제무왕때조 된것으로추정되는백제시 최 규모의사찰로,

고 가람의 실체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미륵사에 관한 기록으로는『삼국유사』무

왕조에 자세하게 나타난 창건연기설화가 가장 오랜 것이다. 조선시 에 들어서도『동국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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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지승람』에미륵사석탑이동방에서가장큰석탑이라고기술되어있고, 17세기경 조때강

후진이편찬한『와유록(臥遊�)』에는폐허가된후의미륵사에 한내용이나타나있다. 이

를 종합하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때 창건되어 통일신라∙고려∙조선중기까지 계속 번성하

다가 17세기경에는 이미 폐사(廢寺)되어, 현존하는 서탑과 동∙서 당간지주만이 남아 전하

음을알수있다. 폐사된이후미륵사는별다른관심없이방치되어오다가일제강점기에

서탑 및 가람 배치 등에 한 이 발표되면서 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광복 후인 1962

년에 서탑이 국보 제11호, 1963년에 당간지주가 보물 제236호, 1966년 미륵사지가 사적 제

150호로지정되어국가의보호를받게되었다. 이어1970년 에들어서미륵사지에 한관

심의폭이넓어지고가람의실체를규명하기위한소규모의발굴조사가이루어졌고, 미륵사

지및주변지역에 한토지매입이이루어지면서1978년부터정부가주도하여중서부고도

문화권정비계획의일환으로매입된토지에 한발굴조사를실시하게되었다. 이후발굴조

사는 유적의 중요성과 규모가 큰 점을 감안하여 5개년 단위로 사업계획을 수립하여 체계적

인 연차발굴을 진행하 는데, 1980년부터 1994년까지 15년간 3차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

고, 이후 보고서 집필 및 보완조사가 추가되었다. 미륵사지의 발굴을 통해 백제시 의 가람

배치는 물론 조선시 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건물지들에 의해 우리나라 건축문화와 불교문

화 구명을 위한 중요한 학술자료를 얻었고, 유적 정비를 통해 역사교육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다.

익산미륵사지토층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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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제1차 5개년 기간에는 사역의 내곽 지역을 조사하기로 하여 1차년도에는 동탑지 주

변, 2차년도에는 서탑 주변, 3차년도에는 2차년도 조사지역 북편, 4차년도에는 1차년도 조

사지역북편, 5차년도에는당간지주남편지역을각각조사하 다. 조사결과동탑과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위치하며, 각 탑의 북편 동서축 선상에 금당이 1개소씩 있음을 확인

하 다. 그리고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고, 중원 중금당지 북편 가람 남

북중심축선상에약393평크기의강당이동서로가로놓여있었다. 또동원동회랑지동편

에 화강암반을 파서 만든 인공 배수로를 구축했고, 당간지주 주변에서는 통일신라시 의

동서 당간지주와 함께 후 에 남회랑이 조 되었음이 밝혀졌다. 조사된 면적은 2만 1,000

평이었고, 금동투조판불을비롯하여9,045점의유물이출토되었다.

제2차 5개년도에는 사역의 북서편 외곽지역을 중심적으로 조사하면서 제1차 조사에

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 는데, 먼저 중심곽 보완조사에서는 강당지의 전

체 규모와 목탑지의 지하 판축 구조를 확인하 다. 사역 북편에서는 고려 및 조선시 에

96

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조성된건물지15기이상을확인하는한편, 미륵사의하한을추정할수있는「만력15년(萬

曆十五年)」명(銘)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이들 유구의 동편 능선에서는 조선시 기와가마

터 2기를 조사하 다. 사역 서북편에서는 고려시 에 조성된 건물지 13기 등과 함께 통일

신라시 의 공방지 1기를 확인하 고, 동편 능선에서 고려시 기와가마터 2기를 조사하

는데, 이곳에서는「연우 4년(延祐四年)」명(銘) 기와가 확인되어 가마터의 조업 시기를

알려주었다. 연못지에 해서는 부분적인 탐색조사를 실시하여 전체 규모를 어느 정도 파

악하 다. 조사된면적은총2만5,000평이고, 출토유물은안동당초문이그려진벽화편을

비롯하여모두8,561점이었다.

제3차5개년도에는사역남쪽의연못지및전시관부지그리고중심곽에 한정 조

사가 이루어졌다. 연못지에 한 조사 결과 후 회랑지와 함께 통일신라시 에 조 된 동

서양연못을확인하 고, 또그중앙에서남북으로중심사역을드나들던진입로를조사하

다. 연못지 입수로(入水路)는 동원 배수로에서 연결되어 동연못의 2곳으로 입수되는데,

이들은백제및통일신라시 에각각조 되었으며, 입수로상층에서는통일신라시 의와

요지(瓦窯址) 2기가 반지하식 등요의 구조로 확인되었다. 전시관 및 부 시설물 부지에

한 탐색조사에서는 유구가 없는 것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면적은 2만 4,210평이고, 출토된

유물은백제시 등잔을비롯하여모두1,104점이었다.

정치∙사회∙군사적 요충지- 익산 왕궁리(王宮里) 유적

익산왕궁리유적은왕궁편∙왕금이∙왕검이∙왕금성이라고도불리며, 지명자체가

암시하여 주듯이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지금까지 학계는 물론 많은 사람들

로부터관심의 상이되어왔다. 더욱이역사적으로도삼국시 인백제말기부터통일신라

시 에 이르기까지 이곳이 정치∙사회∙군사적으로 매우 주요한 지역임이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통해 널리 알려져 왔다.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시켜주는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하여

왕궁리오층석탑∙미륵사지∙제석사지∙쌍릉∙모질메산성∙오금산성 등이 남아 있다. 이

처럼기록이나유적의존재로인하여이지역이마한기준의천도설(遷都說) 또는백제무왕

의금마천도설과관련된별도설(別都說), 통일신라시 안승의보덕국도읍설(都邑說), 후백

제견훤의도읍설등여러학설이꾸준히제기되어왔다. 이후1965년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의 해체∙복원 당시 탑 내에서 고려시 로 추정되는 금제금강경판과 유리제사리

병 및 금제합, 각종 장엄구 등의 유물(국보 제123호로 지정)이 발견되었고, 탑 주변에서는

‘상부 관(上部大官)’∙‘관궁사(官宮寺)’등명문기와가출토되어왕궁과관계되는궁내사

원일가능성이제기되면서유적의성격에 한궁금증을더해주게되었다.

한편정부에서는익산지역이역사적∙학술적으로매우중요하고학계의관심이집중

되어있는곳인만큼학술발굴을통해이곳유적에 한정확한역사성을구명함을물론백

미륵사복원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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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제문화의 진면목을 파악하고자 하 다. 이에 따라 중서부고도문화권유적정비계획에 따라

1989년부터왕궁리유적의보존및정비를위한사업을추진하기에이르 다. 이에따라문

화재연구소에서는 장기적인 발굴 조사임을 감안하여 별도의 발굴단을 구성하고, 5개년을

단위로하는정 발굴계획을수립하여조사를실시하게되었으며, 1990년5월9일설치된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을 전담하 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사찰과 성곽에 관련된 건물지

와 유구들이 시 를 달리하여 복잡하게 노출되었고, 유물들 또한 다양한 양상으로 출토되

고있으며, 추후발굴유적에 한역사적고증과함께성격을파악한다음원형을정비함으

로써국민들의역사교육현장으로활용하고자하 다.

제1차 5개년조사(1989~1993)는 석탑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지역을 조사하기로 계획

하여 1차년도에는 발굴단 가설 사무소 부지에 한 탐색조사 및 석탑 북편지역, 2차년도에

는 추정 금당지 동편 기단외부, 3차년도에는 석탑 동남편 건물지와 석축유구 및 국도변 석

렬유구, 4차년도에는추정금당지와강당지의하부및석탑서편지역일 건물지, 5차년도

에는석탑하부토층및추정강당지남북편지역유구, 외곽지역성곽유구토층및성벽단

면등을조사하 다.

백제 초기 중앙과 지방 관계 규명의 중요 유적 - 연천 삼곶리 백제적석총

이 유적은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는 군사보호구역 내인 경기도 연천군 중면 삼곶리

421번지에 위치한다. 문화재연구소가 1991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실시한 군사보호구역

내문화유적지표조사에서확인되어발굴조사하게되었다. 지표조사는1991년도에실시하

여연천군119곳의문화유적을조사하 으며, 이중1992년에이유적을선정하여발굴하

다. 발굴은 1992년부터 3차에 걸쳐 실시하 다. 유적이 입지한 지역은 임진강변의 동북안

에펼쳐져있는충적 지로, 사방이훤히보이는전망좋은모래언덕위에있다.

이 유적에서는 동서로 연접하고 있는 쌍분으로 동서 각 1기의 묘곽과 추정 제사유구

가 조사되었고, 부 시설로 무덤보호시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적석총 바로 아래에서 초

기철기시 의주거지1기도확인되었다.

무덤은 동서 두 개의 무덤을 맞붙여 축조한 쌍분으로서, 전체 표주박 모양에 가까운

평면형태를띠고있다. 축조과정을살펴보면우선장타원형을띤모래언덕을편평하게정

지(整地)하여 장축 동서방향의 무덤을 만든 후 그 위에 돌들을 한두 겹 깔아 무덤 기초부를

만들고, 그 후 무덤 기초 부위에 안으로 약간 수축하여 층단을 지형에 따라 조성하 으며,

그중심부에는무덤주체부인묘곽을마련하 다. 무덤중심부에위치한두개의묘곽은장

방형으로, 무덤의 장축방향을 따라‘目’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적석방단의 북편에는

의례를 행하기 위한 제단시설로 추정되는 묘역 시설이 발견되었으며, 무덤이 자리한 모래

언덕의 남쪽면에 수해로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사면을 따라 강돌을 한두 겹 깔아

98

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익산왕궁리오층석탑자체정 실측조사

서 마련한 무덤보호시설도 확인되었다. 이 밖에 무덤 동쪽 가장자리 바로 아래에서는 초기

철기시 의주거지와함께반월형석도편과경질무문토기편등이확인되었다.

유물은 동서 두 개의 묘곽에서 목걸이 두 개체분과 철촉 2점, 토기편 및 부서진 인골

편들이출토되었으며, 묘역과분구곳곳에서반파된상태의토기4점과석제품등이수습되

었다. 목걸이는 돌을 갈아서 만든 작은 구슬들을 엮은 것으로 붉은색∙갈색∙비취색 등 다

양한색깔을띠고있다. 철촉은목이짧고촉머리가독사머리처럼생긴형태로서, 삼국시

초기에널리사용된형식이다. 토기는타날문의원저단경호가주류를이룬다.

유적은 발굴 조사 후 동서 묘곽과 조사갱을 복토하고, 적석무덤의 외부구조인 방단

(方壇)과 무덤 기저부 및 부석유구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 다. 이 유적은 백제 초기 중앙

과 지방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어 1994년 4월 20일자로 경기도 기

념물제146호로지정되었다.

독창적인 형태와 축조 방법- 경주 월성해자(月城垓子)

경주 월성은 경주시 인왕동에 남아 있는 신라시 궁궐터로서, 신라 천년의 역사를

변해 주는 표적인 유적이다. 최초로 성을 쌓은 때는 파사왕 22년(101)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이 기거하면서 정사를 돌보

았던곳이다.

인왕동신라시 궁궐터 궁궐터에남아있는‘해자’의발굴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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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제1편통사

이곳에 한체계적인학술조사를통해1980년동문지로추정되는곳에 한발굴조

사를 실시하여 문지의 형태와, 외부로부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참호인 해자의 일부

가 확인된 바 있다. 그 후 1984년 월성∙계림∙월정교지(月精橋址)∙안압지∙첨성 등의

역사 유적을 하나로 묶어 역사관광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월성 공원조성계획을 수립하

면서해자를포함한성벽바깥쪽에 한 적인발굴조사에착수하 다.

발굴결과외부의침입이많았던삼국시 에성벽의기저부를따라부정형(不定形)의

해자를 설치하여 궁궐의 방어에 활용하 고, 삼국이 통일되면서 외부 침입의 우려가 사라

진 후에는 해자를 메우고 그 위에 규모 건물을 세워 협소한 궁궐의 취약점을 극복하 던

것으로확인되었다. 해자는4개의좁고긴연못을서로연결해놓은형태인데, 이것은월성

동쪽의 입수구와 서남쪽의 배수구의 높이 차(18m)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 즉 해자 내부에

물을모으기위한배려 던것으로확인되었다. 이와같은해자의형태와축조방법은여타

성곽에서는아직확인되지않은독창적인것이다.

역 산성 축조의 기본적인 특징 재확인 - 순흥 비봉산성(飛鳳山城)

비봉산성은경상북도 풍군순흥면읍내리에위치한해발430m의비봉산360m 능

선에 자리잡고 있다. 산성의 규모는 남북 약 335m, 동서 약 460m에 달하며 총 길이는

1,350m이다. 발굴 조사는 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1985~1987년, 그리고 1991년 등 4개년

에걸쳐이루어졌다.

비봉산능선은남북과동서로‘ㅓ’자형태로발달했는데, 성곽은해발370m~420m

의위치에걸쳐서남쪽으로치우친‘ㄱ’자형태로축조했다. 지형에따라토축∙토석축∙토

석혼축을혼용했다. 성벽은전체적으로높이가2~3m이고너비는1~2m로얕으나성벽밑

은거의급경사로이루어져있다. 남서쪽으로성골이라불리는계곡이있는데, 성의진입로

가있었던것으로추정되며수량이풍부한우물이하나있다.

총길이는1,350m로긴편이아니나, 성벽이능선의바깥사면을통과함으로인해성

내를 한 바퀴 둘러 내환도(內環道) 같은 성벽 내 평탄지가 이어지고, 성내에 산 정상 및 능

선, 안부(鞍部) 등이포함되어단순한테뫼식산성은아님을알수있다.

성벽은 체로 직선으로 축조된 곳이 적고, 회절부(回折部)가 적절히 배치되어 별도

의치(雉)나곡성(曲城)이필요치않도록되어있어우리나라역 산성축조의기본적인특

징을갖추고있다. 성벽의단면조사를행한결과, 이성이한번의축조후버려진것이아니

라여러차례개축(改築) 및수축(修築)을거쳤다는사실이토층을통하여뒷받침되고있다.

석축 성벽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외축내탁(外築內托)이나, 상단은 내외협축(內外夾築)

의 석축으로 되어 있다. 1987년 조사한 남쪽 성벽이 이러한 성격을 확실하게 드러내는데,

이는삼국에서고려에걸치는보편적석축성벽축조방식이다. 그러나이석축의아래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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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벽하부가끝나는것이아니라또다른유구가계속이어져있는것이특이한점이다.

문지의 발굴 조사는 추정 남문지∙동문지∙서문지에 해 실시되었는데, 그중 동문

지의 발굴 조사 결과 3개의 유구가 수직으로 중첩하는 것이 확인되어 산성을 처음 축조한

이후적어도2번의수축및개축이있었음을알수있다.

비봉산성에서수습된유물은크게그릇류∙기와류∙철제류등이며, 시기적으로는삼

국시 에서고려시 유물까지를포함한다. 그릇류는주로파편들로서, 생활용기가 다수

를차지하는것으로추정된다. 또한신라토기의가장큰특징인경질회색및회청색의기벽

이 고르고 얇은 시문토기들이 절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성이 축조된 시

기, 혹은 가장 활발히 사용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치는 이러한 토

기들이 다수 분포한다는 것은 비봉산 기슭 및 읍내리에 자리잡은 고분군의 시 와도 략

일치하는 것으로, 고분군과 산성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고려시 의 자

기류및기와등이수습되었다.

발굴조사결과수습된유물과비봉산기슭의고분들의편년등을종합해보면, 이산

성이 이르게는 5세기 후반에 축조되어 고려시 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성벽

축조 이후 여러 번의 개축과 수축을 거친 것으로도 재확인된다. 축조 시기를 고려할 때, 기

록상 이곳은 이미 신라의 역으로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산성이었던

것으로결론지을수있다.

중원지역의 복합적 문화양상을 밝혀 낼 실마리 제공

- 청원 미천리(米川里) 고분군

이유적은1984년부터실시된문화재연구소중원문화권조사계획의일환으로1991년

과1992년2개년에걸쳐발굴조사되었다. 중원문화권발굴조사는삼국시 의각축장으로

서삼국의문화양상이혼재되어있는중원지역을조사함으로써중원문화의성격을밝히기

위한것이다.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미천리 청호 북단 건너편 나지막한 구릉에 자

리잡고있는청원미천리유적에서는총14기의석곽묘가발굴조사되었다.

1991년도에발굴조사된9기의석곽묘는자연지형을이용하여부식된암반층에장방

형의 구덩이를 만든 뒤 석곽을 축조하 는데, 이 가운데 1기는 시상 를 설치하기도 하

다. 출토유물로는적색연질고배, 태환이식, 세환이식, 고배, 말재갈, 삼엽형환 도, 은상감

장식유리제품등이있다. 출토유물이5~6세기경신라계인것으로밝혀져, 막연히백제

역으로여겨지던이곳이삼국시 의각축장이었음을뒷받침해주고있다.

1992년도에 조사된 5기의 고분들은 구릉의 능선 정상부을 따라서 축조되었는데, 그

장축 방향이 능선과 거의 직교(直交)하고 있으며, 무덤의 구조는 수혈계의 횡구식석곽분으

미천리고분군출토유물

미천리고분군의석곽묘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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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제1편통사

로서 동∙서∙북 세 벽을 먼저 축조한 후 남벽을 마지막으로 축조하 다. 시상 는 돌로

3~4단정도쌓아서마련하 으며바닥면은생토면을정면하여처리하고있다. 유물은도굴

로인해온전히남은것이별로없지만장신구로서금제이식, 곡옥, 단금구, 구슬, 은제수식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고배와 평저단경호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산라계의 향이

강하게보이면서내지적요소가첨가된6세기후반 의것들이다.

미천리고분군 발굴을 통하여 신라가 이 지역을 자비왕 17년(474년)에 점령하고 일모

산성(一牟山城, 현 養性山城)을 쌓았다는 역사적 기록을 뒷받침하는 신라계 유물들이 출토

되었고, 유구의성격으로볼때묘제상수혈식석곽묘에서횡구식석곽묘로넘어가는과도기

적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출토 유물 중 연갈색과 적색을 띠는 연질의 고배가 특징

적인데, 이러한형태의고배는지금까지거의알려진바가없어‘미천리식고배’라부를수

있을 정도로 표지적 유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청원 미천리고분군 발굴 조사는 중원지역의

복합적인문화양상을밝혀낼실마리를제공하 다는점에서그의의가크다.

창원지역 묘제(墓制) 변천사 연구의 자료 - 창원 가음정동 당산고분군

가야문화권 유적보존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창원연구소 자문위원회의에서 창원 가음

정동 고분군을 선정하여 첫 발굴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창원 가음정동 고분군은 해발

59m 내외의 나지막한 야산에 위치하며, 발굴 조사 지역은 야산의 정상부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려남쪽으로돌출한능선상의비교적평탄한부분이다.

조사 결과 삼국시 매장 유구가 10여기 확인됨으로써 고 창원지역의 사회 성격을

밝힐수있는자료를확보하 다. 발굴당시유적지주변에는30~40년생소나무가다수자

생하고 있었고, 당산에서 창원남중학교와 연결되는 능선상에는 봉분의 높이가 1.0~1.5m,

저경 10~15m 정도의 삼국시 폐고분 20여기가 산재되어 있었는데, 거의 도굴에 의해서

봉분과석실내부의원형이파괴되어있는상태 다. 또한고분이분포되어있는지역내에

는근래에조성된것으로보이는민묘와공동묘지가조성되어져있다.

발굴조사결과삼국시 목곽묘9기를비롯하여횡구식석실2기, 횡혈식석실1기, 옹

관2기, 그외소형석관6기등총20기의유구를확인조사하 다. 출토유물로는토기92

점, 철기55점, 장신구류8점등총155점의유물을수습하 다. 특히다양한형식의가야시

묘제가 확인되었는데, 토광묘 유적은 창원 도계동고분군, 마산 현동고분군 등과 유사한

4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고, 횡구(혈)식 석실은 6세기 후반~7세기 초로 추정되어, 4세기

후반에서7세기초에걸친창원지역묘제의변천사를구체적으로연구∙검토할수있는자

료를확보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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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다양한 성벽 축조 방식의 시험장 -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

함안성산산성(사적제67호)은경남함안군가야읍광정리조남산(해발139m)에위치

하는 테뫼형 산성으로, 함안 성산산성의 성격 규명 및 유적 보존정비계획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를실시하 다.

3차례의 단면조사에서 함안 성산산성은 내외 협축식 석성임과 외벽기단 보축구조물

이 있음을 밝혔다. 성벽은 흙에 덮여 지상에 노출되지 않은 상태여서 Trench 조사 결과 그

사실이확인되었다.

동쪽내벽의경우약90cm의너비를두고2개의내벽이맞붙어있다. 바깥내벽은안

쪽 내벽보다 약 50cm 더 높이 잔존하고 있으며, 점판암계의 판상석으로 매우 치 하게 수

직으로축조되어있다. 또약2m 더아래에서부터성벽이축조되어, 그기저부는커다란할

석을 이용하여 쌓고 있다. 외벽은 남벽의 축조기법과 동일하나 외벽기저부 확인을 위한 기

단보축 해체 결과 그 재부에 소형기단보축이 있었고, 이것을 해체하니 커다란 막돌로 약

1m 높이까지 축조되어 기저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상부는 후 에 개축한 흔적이 역력하

다. 규모는 내벽 높이 1~5m, 외벽 높이 5m, 체성 너비 약8m, 소형기단보축 높이 110cm,

너비55cm, 외벽기단보축높이180cm, 너비150cm로확인되었다.

외형상 서문지는 현재 남아 있으나, 동문∙남문의 경우는 Trench 조사 결과에 의해

확인되었다. 동문지의경우성안의가장낮은지역인동쪽에위치하며, 성벽이북쪽구릉으

로 올라가는 지점에 치우쳐 구축되어 있는데, 규모 340×900cm의 문지 외부에 계단으로

사용된 듯한 커다란 판석 3매가 놓여 있다. 개축문지를 절개하여 조사한 결과 규모 500×

700cm의 초축시 문지가 확인되었는데, 역시 판상석이 고르게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이곳에

서는외벽기단보축시작점이확인되었는데자연경사가이루어지는부분(문지출입방향)에

길게 동서로 먼저 석축한 다음, 그 석축과 외벽에 덧 어 외벽기단보축이 남쪽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동문지의 북쪽 4m 내벽 지점에서는 석축한 모습이 판이하게 구별되는 지점이

있어성벽축조구분지점으로추축되고있다.

배수시설은동문지조사지역에서만배수로3개소, 입수구3개, 추정출수구1개가확

인되었다. 1992년에확인된배수로는현표토약280cm 아래지점에서노출되었는데, ‘Y’

자상의도수로(입수구2개)와일직선상의도수로이다. ‘Y’자상의도수로는현재약580cm

길이로노출되고있으며, 내벽약280cm 앞지점에서양분하여갈라져성벽밑으로입수되

고있는데, 북쪽입수구는막혀있으며, 도수로폭은40~60cm, 깊이60cm 정도이다. 남쪽

입수구는‘Ⅱ’자상으로되어있는데22×20cm 정도의크기이나진흙이충전되어있다. 일

직선성의 도수로는‘Y’자상 도수로의 남단 약 50cm 지점에서 확인되었는데, 바닥석이 깔

려있는 점이 특이하며, 도수로 길이는 210cm로 짧으나, 입수구의 형태‘Ⅱ’자 형태이고,

20×20cm 정도의 크기이다. 외벽에서 확인된 출수구는 하부가 붕괴되어 그 정형을 알 수

없으나, 점판암의초축벽에설치되어있고, 폭50cm 정도의장방형출수구로추정된다.

2003년함안성산산성노출전경

2007년함안성산산성유물측점측량과유물수습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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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1993년 건물지 조사지역은 추정 장 지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며, 성내의 중심지역에

해당한다. 초석이3~4개지표에노출되어있고, 소나무가 생하고있다. 민묘가조성되어

있고, 앞쪽에는 민가가 자리잡고 있다. Trench 조사 결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지에 3

벽이돌담으로되어있고, 건물양단은온돌시설이마련된방으로추정되며, 가운데는마루

로여겨지는건물지 다. 건물지의밖으로는120cm 내외의너비로석축담장이‘ㄷ’자 상

으로돌려져있어일반가옥이아님을밝히고있다. 유물은구들두둑에사용된기와들로서,

조선시 암막새가함께깔려있어건물의사용연 상한선을밝혀주고있다.

1992년과1994년뻘층조사결과산성내부에연못이있었다고추정할만한뻘층이동

문지 조사지역에서 일부 확인되었다. ‘나’지구에 현 표토 240~290cm 아래 지점부터 뻘층

이 노출되기 시작하는데, 이 층위의 윗부분은 황색계의 마사층과 점토층이 형성되어 있고,

마사층과뻘층의경계에는약30cm 두께의황색간층이형성되어있는데매우딱딱하다. 이

황색간층은성벽쪽으로경사져형성되어있는데, 내벽기저부의기지석까지뻗어있으나성

내부쪽으로는 그 기울기 형태를 알 수 없다. 이들 뻘층의 형태는 배수로가 확인된 지역에서

도검출되어동문지내부가까이까지커다란연못이형성되어있었다고볼수있다.

이들 뻘층 상면의 해발고도는 약 99.6m 정도로서, 현 표토 약 3m 정도 아래 지점으

로그두께만큼자연적으로퇴적되어있다고추정된다. 뻘층에서는목제품, 토기편, 동물뼈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그 외에 검은 부식층에서는 많은 나무껍질과 나무편이 착된 상태

로출토되고있으며, 어떤것은통나무껍질이부착된채로출토되기도하 다. 많은토기편

이 부분적으로 출토되지만 인화문이 새겨진 얇은 토기편∙편병∙고배뚜껑 등이 출토되어

그 시기를 반 해 주었다. 또 과육 씨(밤∙복숭아∙호두 등)들로 보아 성을 축조할 당시 사

역에동원된역부들이섭취했던음식물의일종으로여겨지며, 많은나무(편)들로보아작업

에 소요되는 목제류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폐기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부근에나무를다듬던작업장에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4개년 동안의 발굴 조사에서 수습된 유물은 연화문 와당, 토수기와, 귀면와, 명문목

간, 이형목제품, 고배뚜껑등총170점에이른다.

조사 성과를 살펴보면 첫째, 성벽의 견고성을 더하기 위한 축조방식으로서, 성벽 기

저부를삼각형구조로별개의구조물을덧붙인기단보축(基壇補築) 기법이적용되었음을알

수 있다. 이 축조 방법은 삼년산성∙명활산성∙계족산성에서도 관찰되고 있어, 신라와 관

계가있는것으로여겨진다. 둘째, 많은양의목간(木簡)이출토되었는데, 이목간중에는명

문이 있는 것도 있다. ‘仇�伐 上 者村’등의 명문과 벌(伐), 촌명(村名)이 확인되어 신라

중고기지방행정체제를연구할수있는자료로판단되고있다. 셋째, 연화문수막새를비롯

하여귀면와와토수기와등이출토되어성산산성내에상당한규모의와가(瓦家) 건물이있

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992년도 조사에서 수습한 목재의 탄소연 측정치는

BP 1640±60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을 AD/BC year로 전환하면 A.D. 250~540년이라는

연 가되어성산산성의연 추정에일단의실마리를제공한다.

104

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아라가야 문화상 파악의 길잡이 - 함안 도항리(道項里) 암각화고분

가야문화권 중요 유적에 한 학술조사 및 보존정비사업 계획의 일환으로 함안 도항

리와 말산리고분군 지표조사 중 1991년 2월 12일 제34호분의 서편에서 선사시 암각화를

발견하게되어이의정확한성격규명및암각보존 책수립을위해발굴조사를실시하

다. 암각화고분(현제34호분)의높이는약2m, 직경약11m의규모 는데, 2곳에도굴갱이

뚫려있었고, 주변에는가야시 토기편다수가산재하여있는상태 다. 발굴조사에서확

인된유구는가야시 수혈식석실1기와청동기시 지석묘, 주거지등이다.

세장방형의수혈식석실은선사시 지석묘와주거지일부를파괴시키고중복되게조

되었는데, 장방형의 토광을 파기 전에 지석묘의 부석 일부를 제거하 다. 석실이 들어설

자리를 풍화암반토로 정지작업을 한 후 토광을 조성하고, 부정형의 할석을 이용하여 석실

을축조하 다. 석실의바닥은점토로고른후자갈을고르게깔아사상을만들었으며, 시신

과부장품을매납한후개석(360×120×25cm)을덮고점토를판축상으로다져원형봉토를

조성하 다. 도굴로인한파괴가매우심하 으나석실남쪽단벽주위에서유물이다소출

토되고, 순장된 인골 2구가 북침(北枕)으로 놓여 있었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1,050cm, 너

비170cm, 깊이155cm 정도이며, 출토유물은고배∙등자∙이식등이다. 지석묘는석관형,

석곽형, 토광 1형과 토광 2형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출토 유물은 붉은간토기 4점,

마제석촉13점등이수습되었다.

주거지는 평면 형태가 원형에 가까운 수혈주거지로서, 지석묘의 하부 구조인 개석식

토광과 가야시 수혈식석실에 의해 반 이상이 파괴된 상태이며, 유구 중앙에 길이 70cm,

너비 60cm의 타원형 구덩이가 있다. 암각화 고분 발굴 조사 성과는 아라가야의 중심지인

함안에서 B.C. 4~5세기 의 지석묘와 A.D. 6세기 초의 봉토분에 한 정식 학술 발굴 조

사를실시한점이다. 또함안지역에 한창원문화재연구소의첫번째발굴조사로서, 이조

사를 계기로 함안지역에 해 향후 지속적인 조사 계획과 방향을 설정하여 아라가야의 문

화상파악에길잡이를할수있게되었다.

국내 최초로 실물 말 갑옷 출토 - 함안 마갑총(馬甲塚)

함안 도항리고분군 북쪽 능선자락에서 신축중인 아파트 공사 도중 다량의 철기 파편

이 1992년 6월 6일 수습 신고되어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사 결과 규모 목곽묘가 확

인됨과 동시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실물 형태를 알 수 있는 말 갑옷이 1벌 출토되어 세인

과학계의주목을받았다.

신고된 매장유물이 출토된 지역은 말산리고분군 능선이 경전선 철도 개설로 인해 단

절된북쪽구릉이며, 이지역은민가조성으로인해사적지보호구역에서제외된지역인아함안도항리마갑총출토말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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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제1편통사

파트 신축공사장이었다. 배수로 작업시 굴삭에 의해 유구의 일부가 파괴된 상태 으며, 유

적은 목곽묘와 목관묘 각 1기가 확인되었고, 파괴된 주변 지역에서 토기편과 철기편 등의

유물이수습되었다.

확인된 목곽묘(일명 말 갑옷 무덤)는 장축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형분(大型墳)으

로서, 현존 길이 890cm, 너비 280cm, 깊이 110cm의 규모이다. 그러나 유구의 1/3 정도가

이미파괴된상태 다.

구조는묘광을굴착한후내부에 형목곽(길이660cm, 너비230cm, 높이90cm)을

설치하고시신을안치한형태로서, 묘광의바닥은주먹크기의큰자갈을고루깔았다. 유구

의중앙에는폭70~90cm 정도로자갈을주변보다2~3단높이깔아주피장자(主被葬者)와

시상을마련한상태이다. 말갑옷은양벽을따라약반정도가결실된상태로출토되었으며,

길이230cm, 너비40cm 잔존된상태 다. 출토유물로는화염형투창고배등토기류14점,

철검과철모등철기류27점, 83cm 크기의환두 도1점등이있다.

목관묘1기는목곽묘의남서편장축에직교되게설치된선행묘제로서, 목곽묘설치시

일부가 파괴되었다. 현존 길이 190cm, 너비 140cm, 깊이 45cm로 묘광을 판 후 내부에 목

관을 설치하고 그 주변에 부장품을 매납한 형태이다. 출토 유물은 와질원저단경호 2점, 주

조철부2점등모두4점이수습되었다.

함안 도항리 말 갑옷 무덤 수습조사의 성과 및 의의는 아라가야 지역 내에서 묘광이

9m에 달하는 초 형 목곽묘의 존재와 선행 유구인 2세기 목곽묘의 확인이다. 유구와 출

토유물등으로보아5세기전반 의것으로추정되며, 4~5세기 수장층의주묘제인목곽

묘의 분포가 금관가야권 외에도 존재함을 확인하 다. 또 일부분이 파손되었지만 원형에

가까운말갑옷발굴로인해고 갑주(甲胄) 관계연구에중요한자료를제공하 다. 말갑

옷은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에서 긴급 보존처리 및 복원을 하여 1998년부터 국립김해박

물관에상설전시되고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말 갑옷 실물의 발굴 조사를 통해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실성을 더욱 높이고, 함안 도항리고분군 연차 발굴 조사의 중요성을 느끼게

한조사 다. 또출토된말갑옷에 한과학적인보존처리작업을국내최초로완벽하게처

리함으로써유물보존처리능력을 내외에널리알릴수있는계기가되었다.

남강연안 고분군의 성격 추정 자료 제공 - 함안 윤외리(�外里) 고분군

1992년 10월 4일 경남 함안군 법수면윤외리 법수초등학교뒤 야산 일 에서가야시

토광묘를도굴하던범인이검거됨에따라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현지조사결과중요한

유적임을 인식하고 수습조사를 실시하 다. 목곽묘 7기와 다량의 삼국시 초기 토기유물

을수습하여학계의관심을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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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함안윤외리고분군은남강과2km 거리에, 함안도항리고분군과5km 거리에위치하

는낮은야산의구릉에있는데, 시간 가크지않은토광묘유적으로추정되나경작과도굴,

농수로공사등으로인하여상당부분이파괴된상태다. 제한된지역에 한수습조사결과

7기의목곽묘를확인하 는데, 함안주변의남강이남지역에서집중출토되고있는통형고

배과노형토기등이주로수습되어당시일정한문화 역을규명할수있는좋은자료가되

었다. 또상면에문양이새겨진특수한형태의그릇뚜껑토기들이상당량출토되었는데, 역

시 인근의 함안 황사리, 의령 예둔리유적 등에서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함안 윤외리고분군

은 아라가야의 중심 고분군보다 다소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서, 약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 된것으로여겨진다.

매장문화재범칙사범에따른사후수습조사로써제한된지역에간략하게조사되었으

나, 4세기 함안지역의문화양상을확인시키고남강연안에분포된고분군의성격을추정

하는데큰자료를제공해준유적으로평가되고있다.

아라가야 역사 규명의 새로운 계기 - 함안 도항리고분군

함안도항리및말산리고분군(사적제84, 85호)은함안분지의중심부에자리하며남

북으로 길게 형성된 말이산의 구릉에 소재하고 있다. 남쪽 배후의 여항산으로부터 해발

200m 안팎의산지가점점이배열되면서갸야읍의저지 를향해서뻗어내려오는데, 도항

리와말산리고분군은바로그능선의말단부에해당된다.

함안도항리및말산리고분군은14만여평에분포되어있다. 이중사적(史蹟)으로지

정된 구역은 약 1만 3,000평이며, 나머지 부분은 사유지로서 주민들의 개간∙경작, 민묘

조성, 그리고잦은도굴로인하여유적의훼손이심한상태이다.

창원문화재연구소는 이러한 설정을 감안하여 아라가야의 고 사 정립 및 문화 복원

의기초자료를확보하기위하여말이산전체구릉을10개구역으로나누었다. 급속한도시

화 및 개발에 의한 유적 훼손 우려가 있거나, 파괴가 심하여 보존 경비가 시급한 구역을 선

정, 우선순위에따라1992년부터1996년까지5개년계획으로발굴조사를실시하 다.

제1차년도 발굴 조사 지역은 고분군 제일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래전부터 주민들

이 개간하여 밭으로 경작하고 있었다. 봉분의 흔적은 없었고, 지표상에 가야시 의 토기편

들이산재해있다. 발굴조사지역에서확인된유구는목관묘12기, 목곽묘17기, 수혈식석

실 1기, 횡혈식 석실 3기, 소형석곽묘 2기, 옹관묘 2기, 주거지 1동 등이다. 그 중 목관묘는

타원형의 소형토광 내에 시신을 넣은 목관을 안치한 후 부장유물 등을 상부에 매납하는 구

조의 묘제로서, 발굴 조사 지역 내의 매장유구 중 연 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출토된

유물은주로와질토기와철검, 철촉등이다.

또횡혈식석실은세장방형의평면형태를이루고있고, 측벽은혈암계의할석을주로함안도항리고분군(1992~1996년)

삼국시 말갑옷

(1997년 2월 5일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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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이용하여쌓아올렸다. 석실남쪽단벽의중앙에연도를설치한구조로써바닥에모두자갈

을 여러 겹 깔아 시상을 마련하 다. 봉토를 확인할 수 있는 4호분의 경우 저경이 약 22m,

높이3.5m이다.

봉토는주로마사토와점토를서로반복하여판축상으로쌓아올렸으며, 경사가심한

서쪽부분은작은할석을이용하여봉토의일정한범위를덮고, 그상부를다시성토하여석

실의 붕괴 및 봉토의 유실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배묘(陪墓)로 추정되는 소형 석곽이 봉토

내에서발견되었고, 주구(周溝)가봉토의동편에반원상(半圓狀)으로설치되어있다.

석실의내부는이미도굴에의해교란된상태이나폐쇄된남쪽입구부주위에서금동

장심엽형행엽(�銅裝心葉形杏葉) 등의 마구류(馬具類)가 수습되었다. 그리고 무문토기시

에 조성된 주거지 1동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화염형 투창고배, 원저단경호 등 토기류

172점, 형철정∙철모(鐵矛) 등 철기류 160점, 행엽(杏葉)∙운주(雲珠) 등 마구류 10점, 금

제이식∙곡옥등장신구류18점으로총360점의유물이수습되었다.

제2차년도발굴조사지역은제1차년도조사지역의남쪽이며, 확인된유구는목곽묘

10기, 수혈식석실 3기, 횡혈식석실 1기, 석관묘 1기 등이다. 그 중 목곽묘는 소형의 목곽

으로 이루어진 구조로서, 중심 연 는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후반 로 나누어지며, 크게 2

가지유형으로구분된다. A유형은묘광의규모가400×150cm 정도내외의소형이며, 유구

바닥에는 고운점토를 고루 깔아 시상을 마련한 구조로서, 통형고배와 원저단경호가 주된

유물이다. 시기는 개 4세기 중엽~후반경이다. B유형은 묘광의 규모가 600×250cm 정

도내외의 형으로, 유구바닥에는주먹크기만한자갈을한벌고르게깔아시상을마련한

후주피장자의관이놓이는곳은주변보다한단높게자갈을깔아놓았다. 출토유물은화염

형 투창고배, 원저장경호, 발형기 , 환두 두, 형유자이기, 철정 등 다량이며 중심 연

는5세기중엽~후반경으로추정된다.

제3차년도 발굴 조사는 함안군청 반 편 지능선상에 있는 제5호분 및 제8호분을

상으로 실시하여 봉토가 있는 형고분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했다. 제8호분은 현재의 제4

호분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지능선의 말단에 위치하는데, 봉토는 원형이며, 일부 훼손된

상태로현재저경38m, 높이5m 정도의 형봉토분이다. 조사결과석실의상부에는13매

의 형개석(250~380×100~160×10~20cm)이 횡가된 상태이나, 개석의 부분이 깨어

져 석실 내부로 내려앉은 상태이다. 석실은 현 봉토정부에서 3.8m 아래에 구축되어 있고,

규모는길이11m, 너비185cm, 깊이190cm의 형이나석실의측벽은개석의함몰과더불

어붕괴되어원형을찾기어려운상태이다. 석실의양단벽상부에1개씩의감(龕) 시설이확

인되었다. 석실 개석 2매에는 조반목(鳥盤目)의 조각류(鳥脚類)로 추정되는 이각보행(二脚

步行)의초식공룡(草食恐龍) 발자국이뚜렷이남아있었다.

석실 내의 유물 매납 상태는 주피장자가 중앙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좌우측

에순금제환두 두, 유자이기(有刺�器), 금동제마구류등주인공과관련된유골이배치되

었다. 석실북쪽에는주인공의부장품매납공간으로서, 고배와기 등의토기류, 말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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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투구∙갑옷등의철제무구류가놓여져있다. 또석실의남쪽에는순장(殉葬)으로보이는인

골 5구가 서침(西枕) 상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제5호분 및 제8호분에서의 감(龕) 시

설확인을통해함안말이산34호의감시설등아라가야의주묘제구조를확인하게되었다.

출토유물은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등총198점이다.

발굴 조사 성과는 가야시 순장의 실체를 확인한 점이다. 가야지역의 순장에 한

문헌기록은전무한상태이나『삼국사기』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3년(502)조의기록을통

해적어도6세기초반까지는신라지역에서순장이공식적으로행하여졌음을알수있다. 이

로미루어가야지역에서도이와유사했으리라추정된다.

제4차년도 발굴 조사는 함안 도항리 및 말산리고분군의 중앙부 제13, 14호분의 서쪽

능선상에있는 제15호분및 그 주변 지역에 하여실시되었다. 54호분은 제15호분과 제16

호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봉토는 모두 삭평되어 확인되지 않았으나 주변지역 조사 결과 저

경은 약 16m 이상으로 추정된다. 형 수혈식 석실로서 길이 790cm, 너비 140cm, 깊이

150cm의규모이며, 4매의개석이남아있었고, 동쪽장벽과양단벽에서감으로보이는시

설이4곳에서확인되었다. 석실의남쪽은도굴에의해훼손된상태이나북쪽과중앙부위에

는 고배, 기 , 검릉형행엽, 청동제 삼환령, 은제용문환두 도 등 96점의 유물이 수습되었

고, 순장된것으로보이는인골4구가서침된상태로확인되었다.

제5차년도발굴조사지역은함안도항리고분군의주능선상남쪽부분에서서쪽으로

뻗어 내린 지능선상의 제22호분 및 그 주변 지역으로서, 제22호분은 원형봉토분으로도굴

갱이 2~3개소 있고, 봉분 위에는 소나무 및 잡목이 생하고 있으며, 주변은 일부가 밭으

로 경작되고 있었다. 조사 결과 석실은 풍화암반토를 파내고 설치한 수혈식석실로 900×

180×190cm 정도이며, 개석은 약 10매로 추정되나 부분 파손되어 석실 내부로 가라앉

은 상태이다. 석실의 붕괴가 매우 심하나 양 단벽 쪽에 사각형의 감(龕) 시설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북단벽의 일부를 파괴시킨 도굴갱은 석실 내부까지 파고들어 유물을 심하게 교란

시켜놓았다.

유물의 배치상태를 살펴보면, 석실의 중앙부에는 주피장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

는옥류및금동제장신구류, 마구류등의잔편일부가남아있다. 주피장자의남쪽(모서리

부분)에 순장자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서침한 상태로 놓여 있고, 동남쪽 석실 모서리에는

순장자의 부장품으로 추정되는 토기 및 철기류가 다수 매납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북쪽(발

치 부분)은 도굴로 교란이 매우 심하나 토기류(단경호∙고배류)와 철기류(철부∙철도자)가

몇점잔존하고있었다. 출토유물은화염형투창고배, 철부, 금동제행엽등52점이다.

한편 본 조사에 앞서 과학적 유적 탐사 방법으로 전기비저항 탐사 방법과 자기 탐사

방법을이용하 다. 유구의깊이는현표토3~4m 깊이에, 석실의크기는약10m, 최 너

비3m 정도, 유구는남북방향으로추정하 다.

5개년에 걸친 함안 도항리 및 말산리고분군에 한 연차 학술 발굴 조사에서 A.D.

4~6세기에이르는가야시 분묘의집중발견으로아라가야최고지배계층의주요묘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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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제1편통사

태와 변천 과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출토된 다량의 철기유물과 무구류는 아라

가야의무장형태연구에중요한자료를학계에제공해주었다. 또국내에서 형급에속하

는 함안지역 특유의 수혈식석실과 다수의 순장 인골 및 은제용문환두 두, 철기류, 토기류

등으로 보아 A.D. 5세기 후반경 아라가야 최고지배자의 실체를 확인한 점 등은 이 지역 역

사규명에새로운계기가될것으로평가되고있다.

3. 통일신라시

새로운 사찰 건축양식을 밝힌 귀중한 자료 - 분황사(芬皇寺)

분황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3번지에 위치하며, 신라 제27 선덕여왕 3년

(634)에창건된신라시 초기절이다. 지금은모전석탑(模塼石塔)을비롯하여당간지주, 우

물등창건당시유구가초라한모습으로남아그명맥을유지하고있다. 모전석탑은현재3

층만 남아있으나, 1915년에 수리하여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창건 당시에는 9층으로

추정하는학설도있는데, 현재석탑부재가많이남아있어서이를뒷받침하고있다. 1915년

에탑을수리할때2층탑신에서발견된석함속에서여러가지유물이출토되었는데, 그중

에는 고려 중엽에 해당하는 숭녕통보(崇寧通寶) 등 주화가 발견되어 고려시 에도 탑을 수

리하 음을간접시사하는중요한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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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이 사찰은 창건 당시의 규모는 물론 가람 배치에 해서도 1탑가람, 서전동탑, 탑원

(塔院)과금당원으로구성된양원가람등여러학설이분분하 다. 발굴조사는가람배치와

창건 당시 절의 규모를 밝혀 학술자료 제공과 유적 보존∙정비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자

1991년부터연차적으로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조사를실시하 다.

발굴조사결과모전석탑을중심으로동∙서∙북편에3개건물지를확인, ‘品’자형의

1탑3금당식창건가람배치를처음으로밝혔다. 이와비슷한가람배치는정릉사등고구려

초기 절터에서 이미 조사된 바 있으나, 3금당이 모두 탑을 바라보고 있는 고구려의‘品’자

모양가람배치와는다르다. 즉분황사는탑을앞(남쪽)에두고3금당이모두남쪽을바라보

고있다는점에서신라식‘品’자모양의1탑3금당가람배치와도다른형태로, 신라지역에

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신라시 가람 배치를 확인함으로써 고고학 및 건축학계에 주목을

끌었다.

분황사는 이후 3차례에 걸친 중건 과정에서 1탑 1금당 형식으로 바뀌고 금당의 방향

도남향에서서쪽으로바뀌었음을확인하 다. 유물은 부분이건물에서사용되었던기와

류와 청동제 거울∙추를 비롯, 약간의 금속유물을 포함하여 1,10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당

시불교문화와신라초기사찰의새로운사찰건축양식으로귀중한자료로평가된다.

연구소 장기 행사업의 효시 - 장도(將島) 청해진(淸海鎭) 유적

청해진은통일신라시 5 진(大鎭) 중의하나로서장보고 사(AD 790?~841)에의

하여지금의전라남도완도에설치되었던군사∙무역기지이다. 문헌자료를통해서보면청

해진은서기828년(흥덕왕3년)에설치되어서기851년(문성왕13년)에폐지되었는데, 현재

에도 당시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는 유적이 바로 3만 8,000평 규모의 섬인 장도(사적 제

308호)이다.

완도군에서는국민관광단지조성사업의일환으로청해진옛터를사회교육도량및완

도군의 명소로 만들고자 복원∙정비 계획을 세웠으며, 이에 역사적 고증과 복원자료를 마

련하기 위해 사전 발굴 조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장도에 한 발굴 조사는 문화재연구소에

서완도군의의뢰를받아담당하게되었으며, 1991년도부터6차에걸쳐조사가진행되었다.

장도청해진유적을조사하기전1989년과1990년에는장보고 사가창건했었다고전하는

법화사지(法華寺址)를조사한바있다.

주요성과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첫째, 통일신라시 청해진성(淸海鎭城)의 규모와 구조를 밝혀냈다. 섬 내부에 축조

된성곽의총연장은약890m이며, 섬입구쪽인서남부부분에는성벽을겹으로둘러쌓아

출입부를 이중으로 보강하고 있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1단 내지 2단의 돌을 폭

5~6m 간격을두고평행으로배열한후, 그안쪽을주변의흙으로겹겹이다져단단하게쌓

분황사유구확인

분황사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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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올린 판축(版築)성벽임이 밝혀졌다. 최고 높이 2.5m의 성벽이 최다 18겹의 판축층으로

형성되었음이 조사되었다. 또한 성벽 축조시 돌과 나무기둥으로 작업 구간을 나누었던 흔

적이 14~16m 간격으로 그 로 남아있어, 고 성벽 축조 기법을 밝혀내는 데 귀중한 자료

가되고있다. 성곽관련시설로는출입시설인문지(門址) 1개소, 관측시설인치(雉) 4개소,

고 (高臺)시설1개소등이발견되었다.

둘째, 방어용 목책으로 추정되는 해변 원목열의 규모와 구조를 파악하 다. 장도의

입구와 남쪽 해변에는 방어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원목열(圓木�) 흔적이 남아 있는데, 조

사결과해변을따라깊이80cm로U자형의도랑을깊게파고그안에직경40cm 정도크

113

제1편통사

112

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장보고청해진(1985년 7월 9일동아일보)

기의 소나무나 참나무 원목을 일렬로 촘촘히 세워 총길이 331m의 방벽을 둘 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섬 입구 쪽(섬의 서남해안) 지하 1~2m 아래 약 100평 범위 내에는 직경 10cm

굵기의참나무들이20~30cm 간격을두고최소1,000여개(추정)가박혀있는것이확인되

었다. 이렇게 좁은 면적에 수많은 목책이 집중적으로 박혀있는 유구는 지금까지 다른 성곽

유적에서는볼수없었던최초의것으로, 청해진성의출입시설또는접안시설, 방어시설등

으로추측되고있다. 원목의일부를시료로채집하여3회에걸쳐방사성탄소연 측정을실

시한결과중심연 가모두9세기초∙중반경으로나와해변원목열유구는청해진당시의

흔적임이확실시되었다.

셋째, 섬 내부에서 발견된 표적인 유구로는 땅을 파서 나무 기둥을 세우고 건물

을 올렸던 굴립주(掘立柱) 건물지 2개소, 돌을 쌓아 석축을 마련하고 건물을 올렸던 기단

석축(基段石築) 건물지 3개소, 폐기된 기와들을 구덩이에 매몰시킨 흔적인 폐와(廢瓦)무

지 2개소, 배수로 시설 1개소, 당시 우물이 그 로 매장되어 있는 매납유구(埋納遺構) 1개

소 등이다.

굴립주건물지2개소는각각섬정상부평탄면의남측과북측에위치하는데, 남측건

물지는 3칸 규모(12.6m×4.8m)이며, 북측 건물지는 2칸 규모(7.8m×4.5m)이다. 이들 건

물지는 당시에 장도 주변 해역과 생활근거지인 완도 본섬을 조망할 수 있었던 시설로 추정

되며, 목심(木心) 흔적도잘남아있어귀중한복원자료가되고있다. 매납유구는폭1m, 깊

이70cm 정도되는원형구덩이속에큰항아리를가운데두고주변에토기편병(扁甁) 2점,

철제 솥(鼎) 2점, 철제소반(盤) 2점, 청동병 1점 등의 유물을 인위적으로 매장한 것으로서,

묻었던 당시의 상태가 그 로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들이 부분 제사용기로서

삼국사기 기록에 있는‘청해진 조음도(淸海鎭 助音島)에서 중사(中祀, 나라 제사의 일종)를

거행했다’는사실을뒷받침하는연구자료로평가된다.

넷째,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섬 내부에서 다량으

로 출토되고 있는 사면편병(四面扁甁), 일면편병(一面扁甁), 주름무늬병, 덧띠무늬옹기 등

당시의생활용토기들은모두가전남 암군구림리소재통일신라시 가마터(사적제338

호)에서 생산된 것으로 밝혀져 청해진 세력의 국내 활동 범위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A.D. 9세기경 제작된 중국 강소성 월주요계통의 해무리굽 청자편들도 출토되

고있어당시중국과의교류사실을뒷받침해주고있다.

또한 두 군데의 폐와무지에서 통일신라~고려시 에 걸치는 다양한 문양의 기와들이

2,000여편 출토되어 기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는‘大, 王, 本,

舍草, 德長, 宮, 東, 天, 巳, 寺’등의 자가새겨진명문(銘文) 기와들도있어주목된다. 금

속제 유물로는 철제 및 청동제 화살촉, 청동추(錘), 청동제 교구(허리띠 고리), 청동거울편

등이출토되었다.

이조사로장도청해진유적정비를위한충분한자료를확보하 을뿐만아니라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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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가청해진내에서군진의성격과제사처의성격을겸하고있었던사실도밝혀냈다. 또한해

변 원목열의 C14연 와 편병류 등 토기 유물 및 중국 월주요계 해무리굽청자편 등의 연

가 9세기 중반경으로서, A.D.828~851년에 이곳에 청해진이 존속했던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장도청해진유적발굴조사는그이전까지연구소의발굴에서는볼수없었던장기

행사업의 시작으로서, 이후 나주 복암리 발굴 조사(1996~1998)와 풍남토성 발굴 조사

(1999) 등 행사업의효시가되었다.

경주 전랑지(殿廊址) 유적

전랑지는1937년경주월성에서북편으로약1.3km 지점에서북천제방호안공사중

장 석열과 일부 건물지 등 와전류가 발견됨에 따라 부분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하 다. 그

결과 전당지(殿堂址), 장랑지(長廊址), 문지 등 여러 동의 건물지와 다수의 유구를 확인하여

‘전지(殿址)’와‘랑지(廊址)’라는뜻으로‘전랑지’라고불리어지게되었다.

신라 왕경의 궁궐지(北宮)로 추정하고 있는 이 지역은 전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유

적의정확한규모등을알수없었지만, 1993년이곳의도로개설여부결정을위하여서편

의 일부 지역에 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단위 건물지를 확인하 다. 1993년 4월 15일

부터 12월 31일까지진행된 발굴 조사결과, 조사구역내 동서4칸, 남북24칸으로기단 전

체의 규모가 남북 75.4m, 너비 15.3m이며, 전체 면적은 약 350평에 달한다. 북단에서는

‘┎’형으로 계속 동편으로 연결되었으며, 유구 하층에서는 선 건물의 기단토로 추정되는

유구층이전체적으로형성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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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출토 유물은 고신라시 에서 통일신라시 에 이르는 각종 와전류와 토기 및 소형 금

동불상 2점 등이며, 고려시 이후의 유물은 전혀 출토되지 않고 유구도 확인되지 않는 것

으로유적의하한연 를짐작할수있었다

최초의 신라 왕릉 내부 구조 완전 조사 - 경주 헌강왕릉

제49 헌강왕릉은1993년8월초자주내리는많은비로지반이약해지자개석(뚜껑

돌) 무게를이기지못한유구의서쪽벽일부가무너지면서개석과봉분중앙이내려앉아봉

분정상부에직경1.6m 정도의원형붕괴구가생겼다. 순찰중이던사적공원관리사무소순

찰 직원이 이를 발견하고 알려와 수습조사가 실시되었다. 왕릉은 경주 남산의 동사면에 위

치한남산동산55번지일 2만1,000여평에조성되어있다. 수습조사는1993년9월16일

~10월30일까지약45일간실시하 다.

왕릉은 남산의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한 소지릉의 말단에 조성되어 있는데

저경 15.8m, 높이 4m의 타원형 봉분이다. 봉분 자락에는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은 지

석(기초석)과 그 위에 요석을 4단으로 쌓아 올린 호석이 둘러져 있다. 이 호석 안쪽에는

직경30cm 내외의천석으로내호석이돌려져있다. 봉분의동쪽중앙에는화강암제장 석

5매를이용해네모서리를돌리고그내부에다른석재를채운배례석이있다.

왕릉의내부구조는현실(방)과현실오른쪽에연도(방의남쪽에복도)가달린횡혈식

석실이다. 현실의 네 모서리는 서로 엇물리도록 축조했으며 석재 사이에는 잡석과 강회로

다져지면서 4벽을 안쪽으로 기울어지도록 축조한 후 상부에 장 석 2매를 개석으로 올려

마무리했다. 현실바닥은밤알크기의자갈돌을전면에깔아배수시설로이용했다. 현실서

벽에붙여서만든시상 는장방형의다듬어진석재(120×70×30cm)로6개의고임돌을놓

고그위에2매를붙여서마치돌침 처럼만들었다. 시상의장축은남북향이며, 현실북벽

과 시상 사이의 공간에는 50×14×10cm의 석재 1매로 하부에 잡석과 강회로 고임돌과 같

은높이로만든후보강했다. 도굴시흩어진두침석과족침석은흩어진위치로보아주인공

은 머리를 남쪽에 둔 것으로 추정되며, 연도 입구에 넘어진 사각형의 석주는 그 용도를 알

수없었다.

연도는 현실 남벽의 동쪽 면에 치우쳐 축조하 는데, 괴석을 이용해 쌓고 위에는 장

방형 개석 2개를 얹었으며 바닥에는 손바닥 크기의 납작납작한 할석 1벌을 깔았다. 연도에

는 벽석 외에도 문지방석∙문설주석∙미석∙석비(돌문)∙폐쇄석 등을 갖추고 있다. 연도

폐쇄시에는직경20cm 내외의할석을채워연도입구를막았으며, 연도바깥쪽으로는나팔

상으로벌어진묘도가확인되었다.

경주의 왕릉은 실제 주인을 모르는 것이 부분으로, 과거에는 왕릉 앞에 전(傳)자를

붙 으나, 후 에전자가사라지면서정식명칭으로오해되는경우가많아앞으로정 한연

경주전랑지발굴

경주전랑지출토, 소형금동불상전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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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구가진행되어야할것이다. 왕릉이발굴조사된사례도제53 전신덕왕릉과제44 전민

애왕릉이있으나, 전신덕왕릉만내부가조사되었음에도불구하고그내용은간략하게보고

되어있을뿐이다. 이런현실에서처음에는붕괴된부분만조사하고왕릉을복원하고자계획

되었으나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인 고 김기웅 박사와 조사단은 정 조사의 필요성을 감안하

여연도까지조사범위를확장하고전체석실내부구조를밝혔다. 따라서신라왕릉으로지

정되어 있는 고분의 내부 구조를 완전하게 조사한 것은 최초의 일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막상내부조사에착수했지만과거여러차례도굴로인하여현실내부에도굴장비인로프∙

쇠막 ∙사다리등이가득들어있었으며, 유물은거의남아있지않았다. 그나마다행인것

은도굴되고일부남은파편가운데금판과금사, 토기편등이있어서왕릉이만들어진시

를짐작하는데귀한자료가되고있다.

석실묘 자료 계량화를 위한 중요한 조사

- 경주 건천(乾川)휴게소 부지 유적

건천휴게소 부지는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에 남아 있는 신라시 규모 분묘유적인

방내리고분군과인접해있다. 이곳에 한발굴조사는한국도로공사가건천휴게소를신축

하기 위해 부지를 선정하고, 부지 내 매장문화재의 유무 파악을 하기 위해 1993년 12월에

시굴조사에 착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시굴조사 결과 부지 내에는 다수의 지석묘와 고분이

남아있는것으로확인되었고, 이에따라유구가남아있는지역에 한전면적인발굴을실

시하여횡혈식석실묘37기, 횡구식석실묘7기, 수혈식석곽묘11기등55기의고분과6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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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경복궁경회루발굴

경복궁발굴

지석묘를확인하 고, 이과정에서285점의유물을수습하 다.

확인된 고분 중 횡혈식석실묘는 경주지역 일원에 한 발굴 조사 중 가장 많은 수가

발굴된유적으로서, 이에따라석실묘의여러형태를계량화할수있는중요한조사로평가

된다. 즉, 분묘의크기, 방향, 무덤길(연도)의위치와평면형태, 그리고시상의형태와방향

등 왕경 외곽지역의 묘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 다. 특히 1968년 경부고속도

로 건설시 발굴된 방내리고분군의 조사에서는 신라 전기의 적석목곽분이 다수 조사된 바

있어, 신라∙통일신라시 까지 이르는 다양한 묘제가 동일 고분군 내에 포함되어 있어 주

목되었다.

4. 고려및조선시

다시 보는 조선 역사 - 경복궁 침전지(寢殿址)

경복궁은서울특별시종로구세종로1번지에위치하고있는조선왕조의정궁(正宮)이

다. 태조 3년(1394) 12월 3일 개기제를 지낸 후 다음 해인 태조 4년(1935) 9월 25일에 390

여 칸의 건물을 갖춘 모습으로 준공되었다. 그 후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으로 화

재를당하여폐허가되었다가고종5년(1868) 7월2일준공되었고, 이어진계속적인공사로

1888년에최종적으로규모7,714칸의웅 한규모로완성되었다.

이러한 상태로 1914년까지 유지되었던 경복궁은 1910년 이후 일제에 의하여 계획적

으로파괴가이루어졌다. 1915년조선물산공진회를경복궁에서개최하면서근정전동편으

로부터동십자각사이의7만2,000여평에자리잡고있던전각들이일시에헐리어불하되

었고, 1916년 흥례문 일 의 문과 금천교가 헐렸으며, 1917년 강녕전과 교태전 등 내조(燕

寢)가 거의 훼철되었다. 1925년 광화문이 이건(移建)되면서 궁장(宮牆)이 헐리는 등 경복궁

은지금의옹색한모습으로오늘날에이르고있었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문화벨트 조성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파괴∙변형시킨 경복

궁을서울의상징적문화유산으로정비∙복원하여조선정궁의기본궁제를보존하고우리

문화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현장 학습하는 역사교육 도장으로 조성하고자 경복궁종합정비

계획을수립하 으며, 1990년이계획에의한1차사업으로내조를복원하기로결정하 다.

따라서이에따른기초자료획득을위하여1990년5월21일착수하여1992년말까지3차에

걸쳐발굴조사를시행하 다.

발굴 조사 지역은 경회루 동편이자 사정전에서 아미산까지의 약 4,000여 평에 이르

는지역으로, 왕의연침구역인강녕전구역내의5동과왕비의연침구역인교태전일곽및

함원전∙흠경각으로서 총 8동이며, 이 두 개의 구역을‘ㅁ’자로 둘러싸고 있는 행각 및 함

헌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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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통사

원전과흠경각사이의서편행각이었다.

발굴조사결과고종중건당시의8개동의건물지와행각들의기초를비롯하여배수

로 및 아궁이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기초는 모두 화강석을 사용하 으며 모두 장 석이나

판석을 사용하여 어느 시기인가 사용하 던 석재를 재사용한 것이다. 그 하부에서 임진왜

란 이전의 기초부가 확인되었는데, 이 기초부는 고종 의 장 석 적심과는 달리 원형잡석

적심으로확인되었다. 이원형적심은다시두시기로나뉘어진다.

출토 유물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기와이며, 그 밖에 백자와 분청사기 등

자기편과 토기, 철정 등 금속제품 등이다. 이 중 주목되는 유물은 청기와편이다. 청기와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청와(靑瓦)’로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조에 이미 기록이 보이고, 성

종 이후 청기와 사용이 확 되며, 중종에 이르러서는 이미 도성 주변의 세 사찰(봉선사 등)

까지도청기와로덮었다. 경복궁내중요전을중심으로하여내불당등이청기와를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굴 조사 결과 청기와가 주로 강녕전과 교태전 등의 건물을 중심으로

출토되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청기와는 용문, 봉황문을 새긴 암, 수막새로

당시호화로운면모를보여주고있다.

이 발굴을 통하여 경복궁의 복원 정비에 필요한 기초 자료 제공은 물론 조선 역사와

그궤를같이하는경복궁의역사에 한학술자료를제공하게되었다.

유적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다각적 분석 - 파주 서곡리(瑞谷里) 벽화고분

이 유적은 청주한씨종친회로부터 묘 안의 벽에서 그림으로 판단되는 채색들이 보인

다는제보가있었고, 당시국립중앙박물관정양모학예연구실장과문화재관리국김기웅전

문위원의현지답사를통해고려벽화묘일가능성이확인되어발굴조사를실시하 다. 유적

의위치는경기도파주군진동면서곡리산112번지로, 민간인출입이통제되는군사보호구

역에위치하여군부 의협조를얻어발굴하 다. 유적의중요성을감안하여문화재연구소

와국립중앙박물관이합동으로참여, 1991년4월에발굴조사를실시하 다.

발굴유적은분묘2기로, 그중남쪽에위치한1호묘에서벽화가발견되었다. 1호묘는

화강암반층을 남북 394cm, 동서 202cm, 깊이 103cm의 크기로 파낸 후에 다듬은 판석을

이용하여석실로지었으며, 천정은3매의큰판석으로덮었다. 벽화는석곽의동∙서∙북3

벽내면과문배석내면에각각인물상이그려져있고, 천정석중앙에는성진도(星辰圖)가그

려져 있었다. 벽화의 배치는 동∙서 벽 내면에는 입구 가까이에서 북벽 쪽을 향하여 각각

26cm 간격을 두고 1열로 5명의 인물상을 그렸는데, 맨 안쪽 북벽 가까이의 동∙서 벽면에

는정좌상(正坐像)을그렸고, 나머지인물상은모두입상이며, 북벽면과문비석내면중앙에

도 각각 1명의 인물 정좌상을 그렸다. 그리고 천정의 성진도는 가로로 놓은 천정석 3매 중

중앙에놓인천정석내면에그려져있다.

벽화는 돌 벽면에 음각선으로 인물상의 윤곽을 잡고 그 위에 묵선을 그어 그렸다. 얼

굴의 세부와 손에 쥔 홀(笏), 넓은 소매의 주름 등은 잘 다듬은 돌 벽면에 직접 묵선을 그렸

고, 머리에쓴수(岫)로보이는모(帽)와코∙입술∙볼등과긴옷고름, 허리에맨넓은띠등

은 먹선으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 붉은색으로 채색하 다. 그러나 벽화는 침수에 의하여 묵

선과채색등이거의씻겨 부분의벽화가분명하지않으나, 북벽의인물정좌상과동∙서

벽면 입구 가까이에 그린 인물 입상 및 천정의 성신도는 잘 남아 있다. 인물상의 머리는 십

이지신상이고그아래는사람의형상을하고있다. 12지를주제로한벽화는북한지역의수

락암동1호분, 장단법당방고분, 철원문내리고분, 공민왕현릉과같은수법을보여준다. 성

진도는중앙에덮은천정석안쪽면에굵은양각선으로원을돌려천공(天空)을표현하고그

원 안에 북두칠성과 삼 성(三台星)을 음각하 다. 별들은 얇게 음각한 동그라미에 먹선으

로테를그리고그속에백회를메우듯칠하여표현하 다.

1호묘에서는특히묘지석이출토되었는데, 크기는가로54.3cm, 세로100.2cm, 두께

3.7cm의 규모로서 지석면 앞면에만 각자되어 있다. 각자는 가장 상단에‘贈謚昌和權公墓

銘’이란제액이전서체횡으로씌어졌고, 내용은해서체로쓰 다. 묘지명의주인공은고려

시 말경에생존한인물인권준(權準)으로서, 죽은해는‘至正壬辰年’(1352)이다. 묘지명의

내용에는 권준의 증조∙조∙부∙손에 이르기까지 가보(家譜)가 실려 있고, 장지(葬地)를 생

전에선정하여처음부터묘지를주도면 한계획하에조성하 음을알수있다. 이묘지명

은금석학및출토유물편년등을함께살필수있는귀중한자료로평가된다.

이 발굴 조사에는 벽화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고고학∙미술사∙민속학 등에 한

분야별전문가들로조사단을구성하고, 벽화및목재, 금속유물에 한보존과분석을위하

여보존과학의전문가들도참여하 다. 또벽화의학술적보전을위하여발굴조사후모사

작업도실시하 다. 따라서일반적인발굴조사보고서와는달리회화사, 복식사, 묘지명해

석, 구조적 의견, 보존처리 내용을 분야별로 나누어 유적과 관련된 제 분야를 가능한 여러

측면에서분석하여발굴조사보고서에수록함으로써보고서의내용과수준을한층높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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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역사의지평을넓히고조상의지혜를높이다- 심층적인문화유적발굴조사

벽화인물사진